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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송나라는 명실공히 한나라 이후 한족이 세운 중국의 통일국가였다고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와 대치했던 북방민족인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역사를 우리 민족사에 집어넣지 않고 중국의 역사로 넘겨주는 것은 “고구려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라고 우기는 동북공정을 엄청나게 도와주는 행위인 것이다. 보라! 중국의 통일국가였다는 송나라는 요나라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완전 동네북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두 황제가 포로가 되어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할 정도였다. 어찌 이런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겠는가. ■ 성헌식의 ‘대고구리’ 송을 지배한 요(거란)·금(여진)이 중국 역사라니입력 2013-08-0..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한국사로서의 금의 역사'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면서 역사학적, 민족학적, 영역적, 관계사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김 교수는 그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로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혹 고려)에서 옮겨 온 유이민이고 나라를 세울 때 협력한 발해 유민들은 곧 고구려계"라면서 "아골타 근족들의 혼인 대상 민족은 요양에 거주하던 발해 귀족의 여식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고조선(단군조선,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까지 강대한 국가를 유지·경영하다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 내로 위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러나 만주지역에서의 우리 역사는 여기서..

2006년 9월 14일 고구려연구회 주최로 열린 '동북공정 분석과 평가' 토론회에서는 금·청나라 역사를 한민족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이른바 재야사학계의 논리가 강단사학계에서 처음 나온 것이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는 20일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를 만났다.서 교수는 "중국은 한국사 해체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파악한다'는 반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며 "우리도 중국사를 해체해 대응하자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 "닫힌 반도사관으론 동북공정 못 막는다"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2006. 9. 22. 그는 "중국의 정사인 25사에 들어간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인정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전통..

우리 역사에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독립국이 존재했던 남북국 시대가 있었다. 신라와 발해(669~926), 고려와 요(遼ㆍ916~1129), 고려와 금(金ㆍ1115~1234), 조선과 청(淸ㆍ1616~1912)이 병립한 시기가 남북국 시대였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인식하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청나라도 우리 역사 일부가 된다. 이는 필자가 처음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다. 유득공(1748~1809) 선생이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여 발해와 신라가 병립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다. 김교헌(1868~1923), 박은식(1859~1925) 같은 선학들도 이미 주장한 내용이다. 이 두 분은 조선이 망한 이유를 유학 사대주의에서 찾았다. 유학 사대주의를 버리니 비로소 동이족 여러 나..

당시 만주와 몽골에는 크게 만주인(만주 쥬신)과 몽골인(몽골 쥬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몽골이란 민족적 의식은 칭기즈칸의 원나라 이후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 때까지도 여진(만주 쥬신)은 여전히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통일적인 구심체가 없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요동 - 만주 - 몽골의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한 분이 바로 청태조(김누루하치)입니다.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환국(桓國)·칸국(汗國)·한국(韓國) 김누루하치와 산채나물김운회 동양대 교수 | 2005.08.17. 대부분의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저는 야구(baseball)를 좋아합니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타자가 홈런을 치고, 미국 메이저 리그 최초의 한국인 ..
동부 만주 삼림 속에서 살던 여진족은, 서 만주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 요 왕조가 운영하던 2원 통치조직의 효용성을 일찍이 체득했고, 1126년에는 북중국 전체를 정복했다. 중국 역사상 1126년이란 한족이 만주족 왕조에 의해 두 번째로 중원으로부터 쫓겨난 사건을 상징한다. 고려와 금 나라의 창건자들은 모두 옛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왕건은 신생왕국을 고구려를 본 따 고려라 불렀고, 금 나라는 실제로 만주 전체를 점거했다. 금사(金史) 기록을 보면, 완안부 시조 자신이 본래 고려(혹은 고구려)에서 왔고, 여진과 발해는 한 가족이라고 말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려를 신라의 후계자로 상정하여, 같은 시대의 발해 (689-926) 237년 역사를 제외한 채, 통일신라 (677-935)..

만주 쥬신의 시조이신 김함보는 금나라 태조(阿骨打)의 조상으로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는 신라(新羅)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김함보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주 김씨이자 안동(安東) 김씨의 시조인 경순왕(敬順王 : 김부)의 후예라고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후손들이 일부는 금강산으로(마의태자 이야기), 또는 강원도 철원 땅으로, 일부는 장백산(백두산)으로 들어가서 후일을 기약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시기적으로 봐서는 신라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잔여세력들이 장백산으로 만주로 이동해갔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지요. ■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사라진 ‘영원한 신라’의 꿈 : Millennium Sh..
말갈이라 부르든 여진이라 부르든 간에 그들과 우리는 배달 고조선 고구려를 거쳐 이어온 같은 강역의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같은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들과 우리는 ‘친척 집안’이며 일가(一家)이다. 금나라의 뿌리가 신라에서 나왔고 그 백성들이 고구려와 발해 사람들이었고 그 땅이 우리 선조들이 살던 곳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전향적인 연구와 인식이 절실하다. ■ 금나라, 청나라를 세운 신라의 후예신완순 입력 2016.04.05 11:31수정 2018.11.19 23:04 금나라는 대륙 북부를, 청나라는 모두 차지했다. 신라인 김함보 후예가 세운 여진 금(金)나라...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선비들은 소위 중화와 오랑캐라는 화이관(華夷觀)의 이분..

여기서 꼭 해두어야 할 말은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중화를 침범한 요와 금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겨우 우리 역사라 했으나 요나 금은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박성수, 2006-10-25 신라 최후의..

《대동사강》(大東史綱)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쓴 책으로, 단군조선에서 대한제국 순종 황제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근거가 되는 사료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규장각학사 민경호(閔京鎬)의 서문에 의하면, 역사와 야승을 수 년간 모아 엮었다고 한다. 오진영(吳震泳)이 교정을 보았다. 출간사항 1929년(쇼와 4년), 대동사강사에서 상·하 2권으로 출간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상권 1권과 하권 2권이 보관되어 있다. 1974년, 경문사에서 상·하권을 합본하여 출간하였다. 권초에 '동국역대제왕전수통도(東國歷代帝王傳授統圖)'가 그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기씨조선 이후로는 기씨조선, 한, 부여, 예, 맥, 옥저, 숙신 등의 여러 나라로 나뉘었으며, 이들이 서로 합쳐지고 나뉘면서 단씨조선-기씨조선-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