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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원광대 마한ㆍ백제문화연구소(소장 최완규)는 2009년 6월부터 4개월간 봉덕리 고분군 중 1호분 발굴조사한 결과 이 무덤은 봉분 하나에 석실분 5기, 옹관묘 2기를 갖춘, 5세기 무렵 이른바 '벌집형 고분'으로 드러났다고 말했습니다. 이 중 4호 석실분에서는 금동신발과 중국제 청자 등을 비롯해 금동제 신발은 목 부분과 측판 2매, 바닥으로 이뤄졌으며, 이들은 각각 작은 못을 박아 결합했고, 측판과 바닥은 맞새김(투조. 透彫)으로 장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전북 고창군 봉덕리에 소재한 백제시대 분구묘(墳丘墓.봉분을 갖춘 무덤)에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금동 신발 1켤레가 출토됐다. 바닥에는 스파이크 모양의 징 18개를 붙였고 부착지점은 꽃무늬로 장식했다.특히 바닥 중앙에는 용 ..
동성대왕 이후 백제의 부흥 신위례성이 파괴되어 외환이 심하던 상황에서, 백제는 잦은 내란마저 겪어야 했다.그러자 문주왕은 곰나루(웅진)로 천도했다. 문주왕이 재위 4년(《삼국사기》 〈연표〉에서는 3년)에 반역자 해구에게 죽임을 당하자, 장자인 왕근왕(〈백제 본기〉에서는 삼근(三斤)이라고 했지만, 임걸(壬乞)이라고도 한 걸 보면 삼근의 三은 王의 오자일 것이다)이 13세의 어린아이로 즉위했다.왕근왕은 이듬해에 좌평 진남과 덕솔 진로 등과 모의하여 해구를 죽였다. 왕근왕은 이 정도로 영명했지만, 왕이 된 지 3년째 되는 해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그해 즉 서기 479년에 동성대왕이 즉위했다. 대왕의 이름은 마모대(摩牟大)다. 기존 역사서에서 마모(摩牟)라고 쓴 것은 끝의 한 글자를 뺀 것이고, 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