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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한국사』1권에서는 산맥ㆍ하천ㆍ기후구 등을 모두 한반도로 제한하고 있다. 일부 교과서에서도 선사시대 유적 분포를 한반도로 제한하거나 고려의 국경을 압록강 입구~함흥 선으로 하고, 서희가 담판으로 얻은 강동6주를 압록강 남쪽에 표시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이라고 하여 윤관의 동북9성이 있었던 두만강 북쪽 연해주 지역은 제외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반도사관’의 잔재다. 최근에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왕조 중기까지의 국경이 지금의 압록강이 아닌 요하까지였고, 동북쪽도 연해주 지역까지라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이제 반도사관 학자들은 학계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 [민족NGO 새해 외침]겨레의 미래를 위한 바른 역사 복원을 바란다!(3) 기사입..

윤 교수는 스다가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인 서희의 강동6주는 압록강 동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요하 동쪽에 존재했으며, 요하가 고려의 서쪽 경계선이었다는 사실을 ‘고려사’ ‘요사’ 등을 근거로 고증했다. 고려 시대의 압록강은 현재 북한쪽 압록강(鴨綠江)이 아니라 고대 요하를 가리키는 압록강(鴨淥江)이라는 사실도 찾아냈다. 이는 ‘록’자의 한자 표기가 서로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 "강동6주는 압록강쪽 아니라 中 요하 근처"..고려 국경선 지도 바뀌나?동아일보 2018. 8. 31. 17:14 서희를 거짓말쟁이로 몬 일본학자 스다 소키치스다의 저의를 의심한 한국학자 윤한택 스다의 고려 국경선 “서쪽으로는 고구려를 넘어서지 못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보다 더 넓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이익은, 단군조선은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순(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가 중국 문화 영향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然則檀君亦必在虞廷風化之內 而東邦之變夷爲夏久矣”, 『성호사설』)고 보았다. 이익이 하(夏)문화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본 편발개수(編髮蓋首)는 이암의 『단군세기』와 『정조실록』과,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 이종휘의 『東史』에도 실려 있다. 다른 사서에서는 모두 단군이 제정한 제도(『단군세기』에는 2세 단군 부루)라고 인식하고 있는데도, 오로지 이익만은 하(夏)의 예(禮)가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000여 년 동안 원시적이고 개척되지 못했던 문화는 기자 시대가 되어서야 암흑이 걷혔다는 인식(“檀君之世鴻濛未判 歴千有餘年 至箕子東封天荒始破”, 『성호사..

신형식 백산학회 회장(상명대 초빙교수·한국고대사)은 “일제가 제작한 지도에도 드러나듯 간도는 명백한 우리 영토였고, 1909년의 청·일 간 간도협약은 국제법상으로도 무효”라며 “만일 정부가 제기하지 못한다면 국회와 학계에서라도 이 문제를 이슈화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영돈 인천대 교수(국제법)는 “중국이 국가 주도로 자신의 국익에 유리한 이론화 작업을 추진하는 데 비해 우리 정부는 ‘외교적 마찰’ 운운하며 이런 논의를 스스로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중국 정부와의 ‘조용한 조율’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삼음으로써 중국에 대한 ‘카드’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습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간도협정은 무효’ 명기된 국감자료집 수거후외교..

간도는 통상 남부 만주 지역 중 두만강 북쪽 땅(동간도)을 뜻하지만, 압록강 북쪽도 서간도로 불려왔습니다. 이곳은 원래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으로 조선과 청 나라가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만들 때 합의한 것처럼 조선 영토였습니다. 특히 19세기 중반부터 이곳에서 땅을 개간하는 한국인이 급증, 간도협약 당시 동간도에만 10만 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1900년 대한제국은 간도 조선인 보호용으로 두만강 인근에 변계경무서를 설치했습니다. 1902년엔 간도관리사 종3품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노무현 정부 때 중국 “간도 영유권 거론 말라” 요구 후“외교부가 왜 국감 자료집 회수하느냐” 제보 전화신구 자료집 비교해 보니 간도 협약 기술 바뀌어파..

우리 해동(海東)은 삼면이 바다에 막혀 있고, 한 모퉁이가 육지에 이어져 있는데, 그 폭과 둘레는 거의 10,000 리(里)나 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고구려(高句麗) 땅에서 일어나 신라(新羅)를 항복시키고 백제(百濟)를 멸망시켜, 개경(開京)에 도읍을 정하니, 삼한(三韓)의 땅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 이후로 5도(五道)·양계(兩界)를 정하니, 양광(楊廣)·경상(慶尙)·전라(全羅)·교주(交州)·서해(西海)·동계(東界)·북계(北界)가 그것이다. 모두 합하여 경(京)이 4개, 목(牧)이 8개, 부(府)가 15개, 군(郡)이 129개, 현(縣)이 335개, 진(鎭)이 29개이었다.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
고려의 명장 윤관이 세운 동북9성이 두만강 북쪽의 중·러 국경지대 부근에 있었다는 학술 주장이 처음으로 제기됐다.경복대학교 이인철 교수는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국경선으로 삼은 동북9성의 최북단이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둥닝(東寧)현 일대임을 관련 문헌과 현지 답사를 통해 밝혀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주장은 동북9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지목한 학술적 성과이자, 고려의 국경선을 북만주까지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 윤관의 동북9성이 두만강 북쪽 中·러 국경지대에 있었다?동아일보 2017. 5. 23. 11:02 이인철 경복대 교수, 고려 동북국경은 '두만강 이북'설 주장"윤관의 동북9성 최북단은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중·러 국경지대" 경복대 이인철 교수가 ‘세종실록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淸, 국경 획정에 조선 대표 배제해 역관이 참석… 백두산에 정계비입력 2018-03-26 22:44업데이트 2018-03-27 00:09백두산정계비와 간도300여년 전인 숙종 38년(1712)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압록강변 위원군에서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내 두 나라의 경계를 확정 짓게 했다. 숙종은 조상들의 산소 이장 문제로 원주에 가 있던 박권(朴權·1658~1715)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국경을 획정하게 했다. 그러나 박권, 이선부 등은 목극등이 늙었다면서 따라오지 말라고 하자 주저앉았고 중인 역관 김경문(金慶門) 등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