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입력 2008-02-14 02:58업데이트 2009-09-25 16:10

 
종교적 상징들 무슨 의미가 담겼을까

《“ 그리스도교의 물고기와 불교의 물고기는 어떻게 다른 건가요?” “우리 옛 그림이나 도자기에도 포도가 나오는데, 그리스도교의 포도와는 어떤 차이가 있죠?”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6월 4일까지 계속되는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전.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동서양 종교와 전통 문화에 나타난 상징물들의 의미와 차이에 대한 궁금증이다. 이 전시는 1947년 사해(死海) 해안에서 발견돼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서로 인정받은 사해사본(기원전 2세기경 제작)을 비롯해 고대 중세의 그리스도교 유물 80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물고기와 포도나무,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는 크리스토그램 등 다양한 종교 상징물을 만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와 문화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상징물이 만들어지는 법. 이들 동서양 상징의 의미와 차이를 들여다본다.》

 

물고기, 박해받을 때 그리스도교인 암호

그리스도교에서 물고기는 예수를 상징한다. ‘예수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서처럼 물고기는 중요한 존재였다.

로마시대 박해를 받을 때 그리스도교인들은 물고기를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암호로 사용하면서 물고기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사람들은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ΙΧΘΥΣ(익스투스)’라는 글자를 함께 사용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단어의 첫 글자를 모아 놓은 것과 같다.

 

木魚, 늘 눈뜬 물고기처럼 끊임없는 수행

불교에서 물고기는 수행정진을 상징한다.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 물고기처럼 잠을 자지 말고 수행정진을 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사찰에 목어(木魚)를 만들어 매달아 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 전통 문화에서 물고기는 입신출세와 신분 상승을 상징한다. 15세기 전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분청사기를 보면 유독 물고기 무늬가 많다. 특히 물고기 두 마리가 새겨진 분청사기엔 소과(小科) 대과(大科)에 잇달아 합격하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크리스토그램, 기독교인의 승리 상징

가톨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크리스토그램은 X와 P를 겹쳐 놓은 모양의 무늬. 그리스도를 뜻하는 헬라어 ‘Χριστοs’의 첫 두 글자를 겹쳐 놓은 것이다.

312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꿈에서 이 무늬를 보았다. 이 무늬를 군대의 깃발, 방패 등에 붙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투를 치러 승리를 거둔 뒤 313년 그리스도교를 해방시킴으로써 크리스토그램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징하게 됐다. 주사위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한다. 로마 병사들은 주사위에 운명을 맡기고 내기를 걸곤 했다. 예수가 처형당했을 때 로마 병사들은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에 따라 예수의 옷을 나눠 가졌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닐 수 없었다.

 

포도, 성경구절서 유래한 예수의 사랑

요한복음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팔레스타인 땅에 많이 자랐던 포도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징한다. 중세시대 이후 교회의 바닥이나 벽면 천장 등의 모자이크 장식에 포도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의미다.

우리 전통 문화에서 포도는 다산(多産)과 풍요를 상징한다. 이 같은 상징은 포도알이 많이 붙어 있는 포도송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국보 93호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18세기)를 보면 포도 넝쿨을 잡고 줄을 타는 익살스러운 원숭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원숭이를 뜻하는 한자 ‘후(후)’는 제후의 ‘후(侯)’와 중국식 발음이 같아 예로부터 원숭이는 높은 벼슬을 상징했다. 포도에 원숭이까지 가세한 것은 자식을 많이 낳아 그 자식들이 높은 벼슬에 올라 잘살았으면 하는 기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수정 2008-01-04 21:55 등록 2008-01-04 21:55

“애초의 기독교·이슬람엔 종교간 포용정신 있었다” (hani.co.kr)

기자신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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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예수 그리고 이슬람〉

인터뷰 /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펴낸 이명권 교수

종교간 대화·상생 위한 세번째 저술 같은 신 섬기면서 1500년 싸워온건교리보다 신앙추종자들의 잘못 탓제2의 예수·무함마드로 다시 태어나야

〈예수, 노자를 만나다〉 〈예수, 석가를 만나다〉에 이어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코나투스 펴냄·1만8천원)이란 책이 나왔다. 지은이는 같다. 중국 길림사범대 교환교수인 이명권 영성수련공동체 ‘코리안 아쉬람’ 대표(사진)가 바로 그이다.

그의 연구를 꿰는 주제는 종교간 대화와 상생이다. 그가 예수를 축으로 노자와 석가 그리고 무함마드(마호메트)를 비교하면서 그 차이와 다름을 밝히고 평화와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자신의 뜻과는 정반대의 경험을 했다. 〈예수, 석가를 만나다〉를 소개하는 신문 기사에 그가 합장하는 사진이 실린 게 발단이었다. 김 교수가 강의를 하고 있던 기독교 재단 대학 쪽에서 이를 빌미삼아 그를 학교에서 축출한 것이다. 이런 관용의 부재에서 대화와 상생은 초현실의 영역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종교가 공존해 온 역사를 꿋꿋이 환기시킨다. 이번에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두 종교의 신봉자들이 믿는 신은 “실질적으로 같다”는 데서 그는 출발한다. 이슬람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아브라함과 그 계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같은 신을 섬기면서도 “기독교와 이슬람은 1500여 년 가까이 다투어 왔다.”

하지만 이 기간 다툼의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원시 기독교와 초기 이슬람에는 종교간 화해와 관용, 포용의 정신이 있었음을 강조했다. “이슬람 경전인 꾸란(코란) 외의 이슬람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금욕주의자이면서 예언자적인 스승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꾸란은 예수의 신성 부정에 초점을 맞추면서 예수를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비정통적 경전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이슬람 사상가인 이븐 아라비는 예수를 ‘성자들의 봉인자’(The seal of Saints)라고 높였고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 사상가 가잘리는 예수를 엄격한 윤리적 가르침과 신비적 교훈을 제시하는 자로 설명하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처럼 무슬림이 자신의 종교 안에 다른 종교의 영적 스승을 무한한 존경과 헌신, 사랑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점은 종교 간 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모범적 사례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꾸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를 믿고, 너희들에게 주어진 것도 믿는다.” 다른 종교의 계시를 인정한다는 것은 포용의 다른 말이다.

“모든 종교는 자기 비움이며 나눔이고 공동체적 사귐입니다.” 그가 말하는 종교의 본질이다. 그는 노자와 석가의 사유도 허(虛)와 공(空)으로 풀었다.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의 사유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그리스어로 비움을 뜻하는 케노시스, 이슬람에는 무와 존재를 뜻하는 파나와 바카가 같은 개념입니다.” 그에게 자기 비움은 모든 종교가 만나는 결절점이다.

“꾸란의 중심에는 ‘라 일라하 일랄라’(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가 있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복종이지요. 예수도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게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여 될 수만 있으면 이 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거듭 기도한 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절대적 복종이지요.” 이런 종교 체험에 내재해 있는 게 자기 비움이라는 것이다. ‘방랑설교자’ 예수가 창녀·죄인들과 함께 밥상공동체를 열어나간 점이나 무함마드가 알라의 뜻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기도와 자선을 강조한 점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이런 ‘종교적 원체험’은 어떻게 변질되어 갔을까? 그는 “교리적 문제보다는 신앙공동체 추종자들”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그들의 이해관계 등에 따른 자의적 해석이나 판단에 의해 애초의 정신이 변질되어 갔다는 것이다. “제2의 예수와 무함마드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 교수는 모든 종교는 “신비주의 그리고 침묵에서 다 만난다”는 소신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언어로 표현해낼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가 있습니다. 분석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도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고 했죠. 침묵에서 다 만납니다.”

글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수정 2007-10-29 19:18 등록 2007-10-29 19:18

세계 종교인들 ‘평화의 종’ 울린다 (hani.co.kr)

30일 강원 화천서 ‘세계평화의 종’ 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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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분쟁지역서 사용된 탄피·파편 37.5톤 녹여 만들어
“남북 분단상황·다종교 국가인 한국서 만드는 데 의의”
대형 무기 이용한 공원 만들어 ‘평화 순례코스’ 계획도

 

‘무기여 잘 있거라’,

전쟁문학의 대문호 헤밍웨이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기 위해 만든 총과 칼과 폭탄을 모두 용광로 속에 넣어 버릴 수 있다면.

그리고 다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고 했던 헤밍웨이의 가슴 아픈 절망이 희망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면.

그런 꿈이 전쟁과 분단의 땅에서 실현되기 시작한다. 30일 오후 2시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산231번지 일대 ‘평화의 댐’아래서 세계평화의종 기공식이 열린다. 세계의 종교인들이 마음을 모아 전쟁에 신음하던 사람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울릴 종을 만드는 것이다.

기공식엔 세계적인 종교인들이 평화의 기운을 모으기 위해 함께 하며, 이 행사 뒤 11월1~2일 이틀간 ‘종교간세계평화위원회’ 회의를 연다.

종교간세계평화위원회 다니엘 고메즈 이바네즈 사무총장은 지난 26일 서울 한국언론회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꿈은 꿈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면서 “평화의종이 울리면서 이제 그것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업에 발 벗고 나선 종교간세계평화위원회 정현경 교수(미국 유니언신학교)는 “한반도는 ‘휴전’ 중이어서 2차 대전이 아직까지 종식되지 않은 채 좌우가 대립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자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모두 모여 있는 다종교 국가”라면서 “6·25때 남북과 유엔참전국, 중국 등 세계의 젊은이 5만여 명이 목숨을 잃고 여전히 분단 장벽이 있는 곳에서 평화의 종이 만들어진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평화의 종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김용복 아시아태평양생명학대학원대학 원장과 이삼열 유네스코 사무총장, 이학영 전국기독교청년회전국연맹사무총장, 작가 이외수씨 등은 종교인, 화천군과 함께 세계평화의종건립추진위원회를 꾸려 평화의종과 함께 평화의종 공원을 만들어 평화의댐 일대를 세계적인 평화 순례 코스로 만들어갈 계획이다.

김용복 원장은 “앞으로 평화의종 맞은편에 대형무기를 이용한 평화예술공원을 만들고, 평화교육 프로그램도 상설화해 세계의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아 평화의 마음을 갖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의 종은 세계 각국의 분쟁 지역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데 사용됐던 탄피들과 파편들까지 합친 9천999관(약 37.5톤)의 쇠로 만들어져 내년 10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마지막 한 관은 한반도가 통일되는 날 더해진다.

한편 평화의종을 뒷받침하고 나선 종교간세계평화위원회는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화 지도자 투투 주교 등의 제안으로 1955년 만들어져 종교인들 간의 우정을 통해 종교적인 불관용과 전쟁, 폭력, 환경 파괴 등을 극복하기위해 만들어진 모임이다.

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세계적 종교인 대거 참석

이번 평화의종 기공식엔 종교간세계평화위원회 평화위원 22명 가운데 11명이 내한한다. 하나 같이 자기 나라에서 널리 존경 받는 종교지도자들이다. 인도 힌두교의 수도승인 아그니베쉬는 힌두개혁운동인 아르야협회 회장으로 국제반노예지도상, 자유와인권상 등의 수상자이며,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의 히츠키아스 아세파 박사는 ‘아프리카 평화구축과 화해의 네트워크’ 회장이다.

또 세계신앙총의회 회장인 마커스 브레이브루크 목사와 ‘여성의 세계평화주도회’ 공동의장인 조안 치티스트 성베네딕트수도회 수녀, ‘국제 여성불교도 활동회보’ 편집장으로 여승인 다마난다, 멕시코 사크리스토발관구 ‘정의와 평화 감독’ 대리인 곤잘로 베르나베 이투아르트 베두즈코 신부, 북아일랜드 ‘평화인의 공동체’ 설립자 메이리드 매과이어 노벨평화상 수상자, 영국 런던의 회교도문제연구소장인 살레하 마무드 아베딘 박사, 멕시코에 있는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 연대 국제 사무국’ 국장인 사무엘 루이즈 가르시아 대사제, 이스라엘의 ‘인권을 위한 랍비모임’ 지도자 레비 바이만-켈만 등이 함께 한다.

조연현 기자

 

 

[동학]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신동학 수행자입력 2023. 12. 31. 09:01

● 프로테스탄트, 근대국가 전환에 핵심 역할
● 3·1독립운동은 한국적 근대화 출발점
● 사상개벽 돼야 인간개벽·세상개벽 가능

[Gettyimage]
 
2024년은 청룡의 해다. 120년 전 용의 해,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있었다. 러시아·프랑스·독일이 한편이 되고 일본·영국·미국이 다른 한편이 돼 한반도를 무대로 전쟁을 벌인 것이다.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는 총선 같은 선거정치에 함몰되는 것을 용인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결 구도가 날로 심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전쟁이 언제 대만과 한반도에 전쟁의 불씨를 확산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순간이다. 필자는 2022년 1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한 달여 전 동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가 새로운 전쟁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예견한 바 있다. 21세기 들어 시작된 이번 전쟁들은 세계사적 중대한 변화와 신개벽의 시대로 연결될 것이다.

2024년은 3·1독립운동 105주년이 되는 해다. 3·1독립운동과 '3·1독립선언문'은 21세기 신개벽 시대의 중요한 씨앗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 정신을 반영한 '미국 독립선언문'이 영국·미국이 주도한 서양 근대국가 문명의 사상적 핵심을 담고 있다면, 한국의 1919년 '3·1독립선언문'은 제3세계 근대국가 문명의 사상적 정수를 담고 있다.

근대국가 출발점, 英 명예혁명과 美 독립혁명

영국 명예혁명 사상적 지도자 존 로크. [Gettyimage]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과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으로 시작된 근대국가 문명은 인류 역사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다. 두 혁명을 배경으로 개인의 자유의지, 발전 의지가 폭발적으로 성장해 영국과 미국은 18세기 중반부터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물질문명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전근대사회 수천 년 동안 변화가 거의 없던 개인의 소득이 산업혁명, 근대국가 문명으로 전환하면서 열 배 이상 증대됐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단순한 소득증대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생활방식, 문화생활, 정치 등 모든 영역에 걸쳐 폭넓고 깊이 있는 변화를 가져왔다.

 

근대국가 문명 전환 과정에 핵심 역할을 한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다. 근대 사회과학 최고 저작 중 하나로 꼽히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이를 잘 분석한 책이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 등장한 프로테스탄트는 중세시대 1000년이 넘는 동안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교황, 왕,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다. 오직 신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자신의 소명을 찾고, 소명에 따라 개인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소명을 완수할 수 있는 합리적 국가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이 과정에 영국 명예혁명의 사상적 지도자 존 로즈는 인간의 자유권, 생명권, 재산권, 저항권을 보장하는 법치주의, 의회민주주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 등을 구현하는 근대국가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 등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에 이 같은 사상을 반영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압도적으로 국가의 힘을 축적한 영국과 미국이 제국주의 시대를 선도하게 된다. 프랑스, 독일 등도 조금 다른 경로를 거쳐 제국주의 시대를 주도하게 된다. 이 과정에 자본주의 불평등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면서 19세기 말 등장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영국·미국 주도의 자유민주주의 근대국가 문명에 대항하는 사회주의 근대국가 문명을 제시한다. 이러한 흐름은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현실화돼 1990년대 초 소련,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할 때까지 자유민주주의 근대국가문명과 경쟁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다수 국가는 제국주의 식민지가 돼 많은 고통과 변화를 겪게 된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적 근대화 씨앗 뿌린 역사적 사건

동학 창시자 최제우. [동아DB]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한국의 최제우는 1860년 큰 깨달음 '무극대도'를 얻었다고 선언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의 핵심은 개벽사상이다. 최제우는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한 '용담유사'에서 "온 세상이 괴질에 빠질 운수가 되니 다시 개벽"이라고 했고, 그의 후계자 최시형은 "최제우 선생이 항상 말씀하신 앞으로는 요순공맹의 덕이라도 부족하다고 했던 것은 현재가 후천개벽의 시대임을 가리키는 것이고, 선천이 물질개벽이라면 후천은 인심개벽이다"고 했다.
이 같은 최제우, 최시형의 철학적 사고의 대전환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즉 영국 등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동양 정치의 중심 역할을 해오던 중국이 1840∼1842년 제1차 아편전쟁, 1856∼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등으로 처참하게 붕괴된 소식을 접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근대국가 문명이 몰고 온 강력한 충격 속에서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함을 표현한 것이 개벽사상의 출발점이었다. 이에 따라 최제우는 유교·불교·도교를 통합해 동학을 창시했고, 자신의 여성 노비 두 명을 해방해 한 명은 며느리로, 다른 한 명은 수양딸로 삼는 혁명적 실천을 단행했다. 이는 영국·미국이 주도해 온 서양 근대국가 문명이 가장 중요시해 온 천부인권 평등사상, 인간의 자유권에 대한 존중 사상과 비교하더라도 더욱 선진적 사고와 실천을 보여준 것이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가 포함된다"는 내용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한 것이다. 특히 노예해방 문제는 서양 근대국가 문명에서도 1861∼1865년 미국 남북전쟁 때에 비로소 본격화한 것이다. 여성평등 문제도 1908년 소설 '빨간 머리 앤'에서 잘 표현됐듯이 서양 근대국가 문명에서는 20세기 초 전후부터 제기되고 확산됐다.

근대국가 문명으로 전환하는 데 한참 뒤져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던 한반도의 최제우는 1860년 깨달음을 선언한 뒤 노예해방, 여성 평등사상을 가장 앞장서 철저하게 실천한 것이다. 이는 한국적 근대화의 씨앗을 뿌린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와 관련해 진보좌파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영향을 받아 한국 자본주의 자체 맹아론, 보수우파는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주장을 펼쳐왔다. 이러한 주장은 공히 서양 사회과학의 그늘 아래 놓인 사대주의적이거나 협소한 견해다.

근대문명의 본질은 독립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인의 창의적 발전을 돕는다는 데 있다. 이러한 철학 사상이 전근대문명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엄청난 물질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 자본주의 맹아론, 식민지근대화론 등은 경제주의적 한계에 갇혀 있기도 하다. 근대문명으로의 전환을 독립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과 연관해서 보면 최제우의 여성 노비 해방은 한국적 근대화의 씨앗이었다. 그리고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는 '민주공화제'를 목표로 한 한국적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고 평가되는 3·1독립운동을 지도했다.

최제우가 창시하고 최시형이 승계한 동학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을 거치면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그것은 유교성리학과 중화주의적 사고의 잔재를 청산한 것이다. 최제우는 유교·불교·도교를 통합해 동학을 창시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대표 저작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에는 유교성리학, 중화주의적 사고 잔재가 적지 않게 나타난다. 이는 도인들이 큰 깨달음을 얻더라도 깨달음 이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깨달음 이전에 가졌던 생각의 습관, 감정의 습관이 남아 있는 것과 연관된다. 즉 부친의 유학 교육이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잔재는 일본군과 연합한 조선왕조 관군의 농민군 학살,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참패 등을 현장에서 목격하면서 소멸돼 간다.

유교성리학과 중화주의적 사고의 잔재를 청산하고 동학과 근대국가 문명의 융합을 추진한 인물이 손병희다. 손병희는 동학농민혁명 실패 이후 "근대국가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나라의 미래도 동학의 미래도 없다"고 보고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된다.

손병희의 '인여물개벽설'과 3·1독립선언문

3·1독립만세운동. [동아DB]
 
손병희는 1900년대 초 일본과 중국을 오가면서 근대국가 문명을 공부하고,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과도 교류했다. 그 영향으로 1904년 '진보회'의 단발 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좌파적 관점에서 개벽의 왼쪽 문을 여는 시도였다면, 1904년 진보회 활동은 우파적 관점에서 개벽의 오른쪽 문을 여는 시도였다. 이후 손병희는 종교적 수양을 심화해 1910년 최제우의 '무극대도'를 구체화한 '무체법경'을 발표했다. 1918년에는 1919년 역사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는 '인여물개벽설(人與物開闢設)'을 천도교 간부들을 대상으로 설법했다.

3·1독립만세운동은 중도 사상적 관점에서 개벽의 가운데 문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3·1운동은 손병희의 중도회통 사상에 기초해 동학·기독교·불교 간 대(大)연대를 실현하고, 당시 2000만 인구 중 100만여 명이 참여하는 평화적 시위를 만들어냄으로써 세계 근대국가 문명 추진 운동 역사의 빛나는 별이 됐다.

손병희의 '인여물개벽설'은 인간개벽과 물질개벽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으로 최제우의 '다시 개벽' 사상, 최시형의 '후천개벽' 사상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기존 동학사상과 손병희가 1900년대 초 이래 공부한 근대국가 문명의 내용을 중도회통 사상으로 융합한 것이다. 즉 도학과 과학의 병행 발전을 실현한 것이다. 이러한 동학사상과 근대국가 문명의 융합이 구체적으로 총화된 것이 '3·1독립선언문'이다.

그 내용은 첫째, '吾等(우리)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吾人(나)의 조선독립은(…) 我(나)의 고유(固有)한 자유권을 온전하게 지켜서'라고 하여 독립의 주체를 우리와 함께 '나' 즉 개인의 주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근대국가 문명의 핵심 정신인 독립된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함을 보여준 것이며 손병희 '인여물개벽설(人與物開闢設)'의 인간개벽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둘째, '인류평등의 대의를 (…) 조선독립은 동양평화의 중요한 일부로서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에 필요한 수단이 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근대국가 문명의 탄생 이래로 지속적으로 발전·확대되어 온 평등·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다. 이는 손병희 '인여물개벽설'의 물질개벽, 세상개벽의 방향을 반영한 것이다. 물질개벽이 개인들의 탐욕과 물질주의를 넘어서서 인류의 평등과 평화를 지향하는 세상개벽을 실현해야 함을 표현하고 있다.

셋째,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道義)의 시대가 (…) 眞理(진리)가 我(나)와 함께하는 도다'라고 하여 선언문의 철학 사상적 지향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도의의 시대와 진리는 사상개벽을 말한다. 인간개벽과 물질개벽의 출발점이요 기초가 되는 사상개벽을 실천할 것임을 밝힌 것이다.

선언문의 '도의'와 '진리'가 뜻하는 것은 한민족 건국 철학인 '홍익인간, 재세이화(在世理化·현존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실현함)'의 뜻을 담고 있다. 나아가 '재세이화'의 이치를 한자로 표현한 최치원의 '천부경' 철학과 홍익인간, 천부경 철학을 근대화한 최제우의 '동경대전' 등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손병희는 동학사상에 더해 근대국가 문명의 철학인 자유, 평등, 평화의 내용을 포용해서 최남선의 '3·1독립선언문' 작성을 지도한 것이다. 이 선언문은 신개벽 시대를 여는 '신동학'과 '신개벽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21세기 새로운 문명사적 비전의 중요한 씨앗이 될 것이다.

지식인 김정희의 삶, 도인 최제우의 삶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동아DB]
 
1840년 서양 제국주의에 의해 청나라가 참패를 당한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서세동점이 본격화하던 19세기 중반 조선에는 김정희(1786∼1856)와 최제우(1824∼1864)가 역사적 격변을 비슷하게 경험했다.

김정희는 박지원 등 소위 북학파의 계승자요 실학파 학자였다. 그가 남긴 최고의 유산은 1844년 작 '세한도'다. 유교·불교·도교를 통달했다는 그의 철학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동양화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평가됐지만, 아편전쟁 등 서세동점의 시대에 대한 통찰은 보여주지 못했다.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시절 '세한도'를 그린 장소는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상인 박연과 하멜이 표류하다 도착했던 곳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7세기 영국, 네덜란드, 미국의 프로테스탄트는 서양 근대국가 문명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 1600년 일본 지도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 상선 영국인 항해사 윌리엄 애덤스를 만나 서양 근대국가 문명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난학'을 발전시켰다. 이는 19세기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왕조와 지식인들은 비슷한 기회를 유실했다. 조선 후기 선진적 지식인이던 박지원·정약용도 예외가 아니었다. 북학파는 청나라 문물을 배우자는 정도에 그쳤고, 정약용이 수용한 천주교도 서양 근대국가 문명의 주도자는 아니었다.

김정희도 선배 세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특히 1840년 아편전쟁이라는 강력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서세동점의 시대와 서양 근대국가 문명의 원인을 이해하고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씨앗이 될 수 있는 하멜과 박연에 대해 공부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도인 최제우는 서세동점의 충격 속에서 정신 수양을 하다 큰 깨달음을 얻고 유교·불교·도교를 통합한 동학을 창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여성 노비 두 명을 해방시키는 혁명적 실천까지 단행했다. 새로운 역사적 전환, 새로운 개벽 시대를 온몸으로 느끼고 실천한 것이다.

학문의 세계, 학자의 세계가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라면, 도(道)와 수행자의 세계는 지식을 비워내고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지혜를 새롭게 채우는 것이다. 철학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석에 관한 것이라면, 사상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어떻게 살 것인지, 실천할 것인지와 결합돼야 한다. 사상에 일정한 신비주의와 조직이 결합되면 종교가 된다.

김정희가 지식인·철학자·예술인이었다면, 최제우는 도인·수행자·사상가·종교인이었다. 최근 최제우의 '동경대전'을 출간하면서 동학을 찬양하고 있는 김용옥의 시도도 지식인적 접근에 갇혀 있는 한계를 드러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근대국가 문명의 충격을 배경으로 세상을 개벽하고자 하는 사회개혁의 내용과 인간개벽, 사상개벽의 내용을 담은 종교개혁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세상개벽은 동학농민혁명, 진보회 활동, 3·1독립만세운동 등을 통해 표출됐다. 동학의 종교개혁적 요소는 1916년 큰 깨달음을 얻고 이후 원불교를 창시한 박중빈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벽사상 등으로 발전했다. 특히 박중빈의 '대종경'은 인간개벽, 사상개벽과 관련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박중빈은 '청풍월상시(淸風月上時) 만상자연명(萬像自然明): 맑은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떠오르니 만물의 실체가 스스로 밝게 드러나는구나'라고 하여 깨달음의 본질적 내용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일본 전통사상과 불교를 결합해 인간 혁명과 생활 혁신, 더 나은 사회 건설, 평화 지향을 내세우는 '창가학회'가 창립됐다. '창가학회'는 '일본판 동학'으로 평가된다.

에드먼드 버크가 '신의 자선에 의한 창조물'이라고 했던 인간과 국가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중도 즉 진공묘유(眞空妙有)에서 진공의 세계는 변함이 없지만 묘유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인간과 국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고인 물이 썩듯 인간도 국가도 낡아지고 부패해질 뿐이다.

1688년 영국 명예혁명, 1776년 미국 독립혁명으로 시작된 근대국가 문명은 인류 문명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온 역사적 업적이 크다. 근대국가 문명의 사상가들인 존 로크, 애덤 스미스, 토머스 제퍼슨, 에드먼드 버크 등은 붓다, 예수, 노자, 공자, 플라톤 등에 못지않은 위대한 사상가들이다. 그들의 사상은 동양사상의 핵심인 중도 사상 즉 진공묘유(眞空妙有) 중에서 묘유(妙有)라 할 수 있는 인간과 국가에 대한 구체적 통찰을 실현한 근대 중도사상이다.

그리고 근대국가 문명의 원동력 역할을 했던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의식은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국가 문명을 주도한 영국·미국은 1990년대 초 소련 동구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탈냉전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작동된 이후 독선과 통찰력의 상실에 빠져 심각한 리더십의 위기를 겪고 있다.

신개벽사상 출발점은 사상개벽

미국의 대표적 외교 전략가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학계를 대표하는 니얼 퍼거슨 전 하버드대 교수가 2012년에 벌인 논쟁,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등의 주장은 2017년 미국 트럼프 정부의 미·중 무역전쟁 등을 거치면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중국은 이미 2003년 동북공정 등을 통해 패권적 민족주의를 표출했다. 2010년에는 중국공산당 기관지에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자유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논문을 발표했지만 미국은 무시했다. 미국 지성의 통찰력 상실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많은 희생과 막대한 자원을 낭비한 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패에 대한 성찰도 부족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전쟁 등은 세계사적 중대 변화의 촉진제 구실을 할 것이다.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대만 사태, 한반도 전쟁 등이 발발할 경우 문명사적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다.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근대국가 문명이 깊은 성찰과 변화를 보이지 못하면, 세계1등 국가는 유지할 수 있겠지만 세계 패권국 또는 지도국가로서 역할은 쇠락해 갈 것이다.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와 문명사적 전환의 국면을 한국이 잘 준비한다면 '신개벽의 시대'를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은 한편으로는 최제우·손병희·박중빈 등의 개벽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미국 중심의 근대국가 문명 주도 세력의 원동력 역할을 했던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의식과 존 로크, 애덤 스미스, 토머스 제퍼슨, 에드먼드 버크 등의 철학 사상과 근대국가 문명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이러한 두 가지 흐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융합에 더해 21세기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결합해서 사상개벽, 인간개벽, 세상개벽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이것이 개벽사상의 진화이며 21세기 신개벽 시대에 조응하는 신동학, 신개벽사상, 현대중도사상이다.

신개벽의 시대는 동서양 문명의 충돌과 회통이 함께 이루어지고 나아가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사회주의 간의 중도회통이 실현될 것이다.

신개벽사상의 출발점은 사상개벽이다. 사상개벽이 돼야 인간개벽, 세상개벽이 가능하다. 21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등장한 임윤찬은 가야금 창시자 우륵에 대한 삼국사기의 애이불비(哀而不悲·애잔함이 있으나 슬프지 않다)라는 평에 대해 '어떤 깊은 슬픔을 토해낸 뒤 모든 것을 초월한 상태'라고 표현하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사상개벽은 슬픔(悲)과 기쁨(喜)을 초월하고, 무와 유의 경계를 넘어서고, 생(生)과 사(死)를 초월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지고 스스로 맑아져서 '참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중도, 즉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에 대한 균형 잡힌 통찰을 통해 '시절 인연'에 따른 자신의 '본분지사'를 깨달아야 한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의 '소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고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개벽에 따르는 통찰력에 기초해 인간개벽, 세상개벽을 실현해야 한다. 한국은 최제우·손병희·박중빈 등의 개벽사상 전통과 세계 근대국가 문명운동사에서 최고봉이라 할 만한 3·1독립만세운동과 '3·1독립선언문'이라는 귀중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도학적 차원에서 보면 개벽사상가 손병희가 '시절 인연에 따른 자신의 본분지사'를 다한 결과물이 3·1독립만세운동과 '3·1독립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현대사회, 신개벽 시대에 맞는 신동학을 발전시켜 낸다면 동양을 대표하는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의 소명 의식'을 원동력으로 인류사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서양의 자유민주주의 근대국가 문명과 서로 배우고 회통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인류 문명을 더욱 변화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장·신동학 수행자

 

 

입력 2024. 1. 15. 00:30수정 2024. 1. 15. 06:01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새해를 맞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운 최제우다. 1824년 12월 18일 경주에서 태어났으니 탄생 200주년이 된다. 최제우의 삶과 사상을 10여 년 전 『시대정신과 지식인』이란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다. 유학자 이건창, 독립운동가 서재필, 승려 경허와 함께였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네 지식인은 다른 길을 걸었다. 이건창이 양명학을 바탕으로 자주적 발전을 꿈꿨다면,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추구했다. 경허는 선불교를 중흥시켜 근대 불교를 열었다. 그리고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해 민족 사상과 동학농민혁명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 수운 최제우가 남긴 사상적 유산
인간주의, 평등주의, 공동체주의
21세기의 문명사적 대격변 맞아
의미와 의의를 새롭게 성찰해야

최제우가 활동했던 19세기 중후반은 ‘서세동점’의 문명사적 대전환기였다. 과학기술과 제국주의를 앞세운 서양 세력들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넘어 머나먼 동쪽 나라들까지 몰려 왔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 청·일본·조선의 개항은 대전환기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동아시아는 전통에서 근대로 가는 시대교체의 황혼 속에 놓여 있었다.

최제우는 당대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와 다른 제3의 사상적 거점을 세웠다. ‘시천주(侍天主)’는 그 거점의 핵심을 이룬다. 시천주는 내 마음속 천주, 즉 한울님을 모시고 섬긴다는 의미다. 이 시천주는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최시형의 ‘사인여천’과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손병희의 ‘인내천’ 사상으로 발전했다.

최제우 사상에는 민족주의·인간주의·해방주의가 숨 쉬고 있었다. 동학은 서양의 물질적·정신적 팽창에 맞서려는 민족주의 성향을 담고 있었다. 또 인간 존엄과 평등에의 열망을 품고 있었다. 최제우가 여자 노비 두 명을 각각 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은 일화는 그의 사유와 실천을 증거했다. 나아가 혼란의 ‘선천’이 끝나고 희망의 ‘후천’이 열린다는 최제우의 ‘후천개벽’ 사상은 새로운 해방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동학의 역사성이다. 19세기 중후반 서양을 대표했던 사상가가 존 스튜어트 밀과 카를 마르크스였다면, 우리에게는 서재필과 최제우가 있었다. 21세기의 시점에서 밀과 마르크스 사상에 성취와 한계가 존재하듯, 최제우 사상에도 낡음과 새로움이 함께 깃들어 있다. 최제우가 열망했던 인간주의·평등주의·공동체주의는 인류의 ‘오래된 미래’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동학의 현재성이다. 2024년 현재 우리 사회에는 선진국의 문턱에 올라섰다는 자부심과 지금이 ‘피크 코리아’일 것이라는 우려가 공존한다. 지속가능한 선진국을 일궈가기 위해선 혁신성장과 불평등 완화의 제도개혁이 중요하다. 더하여 의식과 가치와 문화의 선진화가 요구된다. 진정한 선진국이라면 생각부터 선진국다워야 한다. 생명을, 자신을, 타자를 존중하는 생명주의·인본주의·이타주의의 씨앗을 최제우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21세기 현재의 세계사회는 대격변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전쟁과 평화, 혁신과 퇴보, 이성과 욕망의 대결 아래 인공지능·플랫폼·집단지성이 이끄는 ‘트리플 혁명’,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 자연의 복수를 예고하는 기후위기는 대격변을 상징한다. 2020년대 현재 대서양의 표준이 퇴색하고, 팍스 아메리카나와 팍스 시니카가 충돌하는 태평양의 표준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 교차로에 우리나라가 서 있다고 봐야 한다.

‘동도서기(東道西器)냐, 서도서기(西道西器)냐’는 동아시아 현대화 200년의 화두였다. 서양의 기술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술과 조화로울 수 있는 의식·가치·문화의 토대가 동도인가, 서도인가, 동도와 서도의 융합인가는 지난 동아시아 200년의 정신적 과제였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서구문화의 미덕을 이루는 개인주의·자유주의·공화주의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서구사회의 한계이자 한국사회의 그늘이라 할 수 있는 약육강식·적자생존·각자도생 문화를 이대로 놓아둘 수 없음을 직시하고 극복해야 한다.

‘전통의 재창조’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지나간 전통’과 현재의 삶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전통’은 다른 것이다. 연고주의·가부장주의·권위주의의 지나간 전통은 거부하되, 인간주의·생명주의·공동체주의라는 살아 있는 전통을 재발견하고, 이를 개인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 가치와 새로운 방식으로 융합하는 것이 선진국 대한민국의 문화적 과제일 것이다.

“나 또한 동쪽 나라 조선에서 태어나 동쪽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하늘의 도라 할 수 있지만 학문으로 말하면 동학이라 해야 하느니라.” 최제우의 『동경대전』 ‘논학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평생 서양의 정신과 학문을 공부해온 내게 동쪽의 학문과 실천을 추구해온 최제우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는 감회가 애틋하고 무량하다. 최제우가 남긴 사상적·문화적 유산을 풍성하게 성찰하는 2024년이 되길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송인걸입력 2021. 10. 28. 17:26수정 2021. 10. 28. 17:56

1880년 초본 수정한 1883년 계미중춘판 목판본
북접 접주 김은경 후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기탁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의 표지와 책머리.

 

“세상에 나오면 (너희가) 위험해지니 열지 마라. 좋은 세상이 오거든 공개하여라.”

충남 천안지역 동학의 우두머리 북접 접주 김은경은 충남 천원군 목천면 집에 항아리를 파묻고는 후손들에게 “항아리를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후손들은 이 당부를 오랫동안 지켰다.

집안의 판도라 상자였던 이 항아리는 1990년대 후손 김찬암이 열었다. 이중으로 된 항아리의 안에는 동학 경전이 들어 있었다. 〈동경대전〉 계미중춘판(계미년 봄 간행본), 〈용담유사〉 필사본 등 동학 관련 경전과 대한제국 학부에서 발간한 역사교과서인 <동국역사> 등 이었다.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은 2000년께 발견됐다는 소식이 동학 연구자들 사이에 전해졌으나 소장자 쪽이 공개를 꺼려 실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항아리에서 나온 〈동경대전〉 계미중춘판 등 동학 관련 유물이 발견된지 20여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다. 지난 4월 김찬암씨의 손자인 김진관씨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기탁해 모습을 드러냈다.

〈동경대전〉 계미중춘판 간기, 왼쪽에 후손 김찬암이 쓴 주소, 오른쪽에 계미년 봄에 북접에서 간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원장 조한필)은 11월3일 연구원 강당에서 〈동경대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계미중춘판 수탁식을 연다고 28일 밝혔다. 수탁식에는 소장자 김진관씨, 양승조 충남지사, 기탁을 주선한 김종식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장,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 회장 등이 참석한다.

겉표지를 포함해 90쪽인 이 경전은 서문에서 ‘1880년 간행한 〈동경대전〉 초판을 수정하고 빠진 내용을 보완해 1883년 간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지난 5월부터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 박맹수 원광대 총장,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등 학계의 대표적인 동학 연구자들과 서지학자 손계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등이 이 경전을 분석해 진본 임을 확인했다.

이들의 분석을 종합하면, 항아리를 묻은 김은경은 천안지역 동학의 우두머리인 북접 접주 출신으로, 이 목판본은 그의 집인 충남 천원군 목천면 한천(현재 천안시 동남구 동면 죽계리 450번지)에서 간행됐다. 이 경전은 최제우의 동학사상과 그가 지은 시 등 문집이 한문으로 담겼다.

동학 연구자와 서지학자 등 전문가들이 지난 5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동경대전〉 계미중춘판을 감정하고 있다.

 

연구원 쪽은 “이 책은 논학문(동학을 논한 경문)에서 서학과 동학의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한문으로 간행된 것은 최제우가 유학자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이어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동경대전〉 경진판(1880년)은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 이번에 공개된 계미중춘판을 현존하는 〈동경대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라고 덧붙였다. 연구원은 다음 달 30일 연구원에서 이 경전의 문화재적 가치와 의의를 논하는 세미나를 열 예정이다.

이상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동경대전〉계미중춘판은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또 이 책을 간행하는데 사용한 나무활자가 상용되던 것인지, 별도로 제작한 것인지 등 다양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며 “충남의 동학혁명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는 평이 많다. 시·군에 산재한 동학 사료를 모아 학술대회를 열고 누구나 역사적 실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동학 관련 개설서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사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동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동학(東學)은 1860년(철종 11) 최제우가 창도한 조선 말엽의 사상이다. 이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계승되지만 1898년 해월 최시형의 순도이후 종통(宗統) 계승을 둘러싸고 분란이 발생하여 여러 분파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배경[편집]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각지의 반란, 외국의 간섭, 정치의 문란, 사회적인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었으며 한편 종래의 종교는 이미 부패 또는 쇠퇴하여 민중의 신앙적인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성립[편집]

이와 같은 정세를 배경으로 경주 출신인 최제우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0년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 동학이라 이름 짓고 종래의 풍류 사상과 (儒)·(佛)·(仙)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므로 모든 사람은 멸시와 차별을 받으면 아니된다.)',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다.)'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내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 즉,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이념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과 평등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 신앙의 구체적 방법은 21자의 주문 '至氣令至, 願爲大峰,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를 외우고 칼춤을 추며 '弓弓乙乙'이라는 부적을 태워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제병장생(濟病長生),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전파[편집]

한편 동학은 조선의 지배논리인 신분·적서제도(嫡庶制度) 등을 부정하는 현실적·민중적인 교리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되던 삼남지방에 재빨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최제우는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인 1864년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하고,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어 비밀리에 교조의 유문(遺文) 《동경대전》,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는 한편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세를 확대시켰다. 그 후 동학 혁명이 일어나 최시형도 처형을 당하고 동학은 천도교(天道敎)와 시천교(侍天敎)로 분열, 3대 교주에는 손병희가 되어 꾸준히 교리 정비와 교세 확장에 힘썼다.

조직[편집]

동학의 교회 조직은 최시형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즉 전국 각지에 세포 조직인 포(包)를 설치하여 접주(接主)로 통솔케 하고, 접주(接主) 중에서 유력한 사람을 도접주(都接主) 또는 대접주(大接主)라 하여 여러 포를 통솔하는 한편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6가지 직분을 두었다.

영향[편집]

동학의 혁명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참고자료>

 

동학(東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최제우(崔濟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최시형(崔時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경대전 - Daum 백과

 

 

[불교]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4-11 19:32

돈오돈수면 어떻고 돈오점수면 어떠랴 (hani.co.kr)

기자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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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선〉

〈돈오선-사람이 부처다〉
월암 지음/클리어마인드·2만원

1500년 논쟁의 역사와 현실 짚어한국 불교계 감정적 대립 치달아방법론 떠나 종교적 실천이 중요

현대 한국 불교의 최대 논쟁의 하나로 ‘돈-점 논쟁’을 꼽을 수 있다.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닦느냐는 ‘깨달음과 수행’ 논쟁이다. 돈은 돈오돈수(頓悟頓修), 점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약자다. 돈오돈수란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닦는 것’이다. 이를테면 단박에 도통해 일대사를 해결해 마친다는 것이다. 돈오점수도 먼저 단박에 깨닫는다는 점에선 같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도 점차 닦아나간다는 점에서 돈오돈수와 다르다.

이 논쟁은 성철 선사(1911~93·왼쪽)가 한국 불교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보조 지눌 국사(1158~1210·오른쪽)의 주장을 내치면서 일약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현대 불교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성철 선사의 영향으로 현재 한국 선가(禪家)에선 돈오점수론보다는 돈오돈수론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형국이다. 일부 선승들 사이에서 돈오점수는 이단으로 취급될 정도다. 그러나 돈-점 논쟁의 역사는 간단치 않다. 이미 1500여년 전 중국 남북조시대 때부터 이어온 논쟁이다.

<돈오선>은 이 논쟁의 역사부터 문제까지 다룬 책이다. 저자인 월암 스님은 ‘불립문자’(不立文字ㆍ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에 대한 교조적 해석으로 경전과 글을 폄하하기도 했던 한국 선가에선 드물게 중국 베이징대에서 ‘돈오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우리나라 선의 종가인 지리산 벽송사 선원에서 매년 10여일씩 선승들을 대상으로 한 선회(禪會)를 열어 선가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다. 선회는 전국의 선방이 오직 좌선만 하는 것과 달리 그의 저서 <간화정로> 등을 강설하면서 이론과 실참을 병행함으로써 선에 대한 ‘바른 이해’(正見)를 바탕으로 선을 체득하도록 하는 자리다.

월암 스님은 <돈오선>의 맺음말에서 “발심이 곧 구경이라고. 한 번 뛰어넘어 바로 여래의 언덕에 올라 비로정상을 당당하게 노니는 본색납자가 되어야 염라노자에게 밥값을 정산하게 될 것”이라며 “선가의 안목으로 조사관을 타파하고, 선가의 수족으로 삼수갑산을 향해가자”고 당부하고 있다. 단박에 번뇌미혹의 허망함을 보아 어떤 험고에서도 열반락을 누릴 수 있는 붓다로 깨어나라는 그의 촉구는 돈오적 선승의 풍모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돈오’(즉각 깨달음) 이후 ‘닦음’의 문제로 성철 선사-보조 국사의 문도들 사이에서 감정적 대립만으로 치달으면서 간과해 버린 논쟁의 역사성과 현실적 맥락들을 하나하나 풀어헤치고 있다.

 

‘깨달음 이후에 닦아야 한다’라는 한마디에 욕을 당한 것은 보조만이 아니다. 육조 혜능을 당대의 최대 라이벌 신수보다 높여 조사선의 정통으로 자리매김한 일등공신인 혜능의 적자 신회조차 돈오점수설로 지금까지 폄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돈수’론자들은 번뇌미혹의 허망함을 보면 번뇌가 곧 보리이며, 범부가 곧 부처임을 확연히 알기에 더 깨닫고 얻을 것이 없다는 식이다. 반면 ‘마치 큰 바다의 맹풍이 단박에 쉬어지나 파도는 점차로 멈추는 것과 같으며, 마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육근이 단박에 다 갖추어졌지만 역량은 점차 구비하는 것과 같고, 햇빛이 단박에 떠오르지만 서리와 이슬은 점차 소멸되는 것과 같다’라는 ‘선의 교과서’ <능엄경>의 가르침은 ‘점수’론자들의 주장이다. 이치로는 단박에 깨달아 모든 번뇌가 제거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므로 모름지기 차례로 제거하거나 근기에 따라 대처하도록 이끌어준 것은 규봉종밀로부터 위산영우, 화두선의 개창자 대혜종고, 보조지눌, 벽송지엄, 청허휴정, 경허에 이르기까지 바른 눈을 가진 조사들에 의해 한결같이 유지되어온 설이라는 것이다.

이 책엔 돈수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들이 등장한다. 뉴욕주립대 박성배 교수는 “점수설이 인간 사회 속에서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넓은 의미의 수행이론이라면, 돈수설은 이타적 보살행에 대한 관심표시나 구체적인 언급을 일체 거부하고 오직 깨침 하나만을 위해 사는 깊은 산속 수도자들의 용맹정진반 경책과도 같은 매우 좁은 의미의 특수한 수도이론”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철 선사가 돈수를 다시 제창한 것도 수행자들이 수행 자체에 철두철미하지 못한 채 초견성 운운하며 도인 흉내를 내는 데 대한 준엄한 경책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종교적 실천 없이 논쟁을 위한 논쟁에 빠지기보다는 양론을 상호 보완해 중생의 입장에서 일상생활의 번뇌와 생사로부터 놓여나는 돈오해탈의 실천의 길을 여는 것이 중요함을 설파하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만해의 참여불교 사상 진수 해외 전파” | 서울신문 (seoul.co.kr)

입력 :2008-02-28 00:00ㅣ 수정 : 2008-02-28 00:00 

‘조선불교유신론’ 영문판 출간 박노자교수 이메일 인터뷰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이 최근 영역됐다.‘만해 한용운 선집:사회진화론적 불교유신론부터 불교사회주의까지’(SELECTED WRITINGS OF HAN YONGUN:From Social Darwinism to Socialism with a Buddhist Face)란 제목으로 영국 ‘글로벌 오리엔탈’ 출판사가 펴냈다. 시가 아닌 만해의 불교사상이 해외로 번역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박노자 교수

 
역자 이름이 무엇보다 눈길을 끈다.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러시아에서 귀화한 박노자(36·한국학)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교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2004년 한국학번역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오웬 밀러(런던대 동양 및 아프리카 연구학교 박사과정)와 함께 번역했다. 박 교수는 중심 텍스트인 ‘조선불교유신론’ 외에 만해 불교관의 요체가 담긴 ‘내가 믿는 불교’‘석가의 정신’‘선과 인생’ 등과 만해가 스스로 자신의 생애를 회상한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도 함께 영어로 옮겼다.

박 교수는 불자다. 그의 불심은 폭력에 대한 강한 거부에서 비롯된다. 어린 시절 군사화된 소련 사회의 폭력이 무서워, 그는 ‘법구경’과 ‘숫타니파타’를 읽으며 평화를 갈구했다. 한국사회의 소수자 차별과 도처에 뿌리내린 불평등 권력구조를 ‘토종 한국인’보다 예민하게 감지해내는 것도 불교사상에 뿌리를 둔 그의 폭력혐오와 무관치 않다. 남에 대한 보살핌에 취약하고 수행과 참선이란 이름으로 대중과 유리된 한국 불교를 그는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 중생을 구제함)없는 선(禪)’이라고 비판해 왔다. 박 교수의 불교 비판은 “조선시대식 ‘산간불교’는 부처와 예수의 본마음이었던 구세주의보다 염세주의에 가깝다.”고 갈파한 한용운의 불교개혁론에 맞닿아 있다. 노르웨이에 머물고 있는 박 교수를 이메일로 만났다.

“만해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진보주의자”

 


만해 한용운을 언제, 어떤 계기로 접하게 됐나.

-러시아에서 대학을 다닐 때 만해의 시 ‘님의 침묵’을 읽었다. 만해는 열반 혹은 공(空), 불성(佛性)을 인격화해 ‘님’으로 표현하고, 그 ‘님’에 대한 사랑 속에 인간적인 감정과 종교적인 열성을 섞었다. 특히 ‘당신을 봤습니다’ 같은 시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미 영역된 ‘님의 침묵’과 달리 아직 손이 닿지 않은 만해의 저서를 내가 꼭 번역하고 싶었다.

▶‘불교유신론’을 주요 번역 텍스트로 택한 이유는.

-‘불교유신론’에서 제시된 불교 혁신과제들이 아직 충분히 해결되지 못했기에 시의성이 강한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승려들의 결혼이 본원적인 의미의 계율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만해의 지적은 아직도 주류 불교계에선 꺼내기조차 힘들다. 기복신앙 극복, 비불교적 의례 폐지 또는 간소화 등도 불교계의 여전한 난제다. 지금 세상이 탈근대를 이야기하지만, 한국 불교계는 석가모니와 각종 부처, 보살들을 ‘신’이 아닌 자력을 통해 자기 해방의 길을 제시한 ‘사람’으로 객관화하는 근대적 종교관도 수립하지 못했다.

그간 ‘박노자식 한용운론´은 서구 근대적 민족주의를 뛰어넘은 종교적 진보주의자로 만해를 주목해 왔다. 이번 영역판 서문에도 동일한 문제의식이 반영돼 있다.

-한마디로 만해는 특정 시대에 속해 당 대의 경향을 따르면서도 모든 시대를 초월한 자유와 보편성의 정신을 소유한 보기 힘든 사상가였다.1913년에 나온 ‘조선불교유신론’만 해도 당시 유행했던 사회진화론적 사고를 수용하면서도, 약육강식의 야만적 문명이 언젠가 한계점에 도달해 불교적 자비와 상부상조에 입각한 신문명이 도래하길 염원하고 있다. 만해는 식민지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민족운동에 깊이 참여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유제도와 착취, 불평등한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 극복을 지향하는 ‘석가정신’, 즉 불교 사회주의 정신을 견지하고 있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민족주의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불교에 대한 몰이해도 풀릴 것”

만해의 문제의식을 빌려 한국 불교와 사회현실을 진단한다면.

-우리 사회의 일반적 신앙 행태는 일종의 ‘신과의 거래’다. 불전 혹은 십일조, 헌금 등을 많이 낼수록 서방정토에서의 왕생과 천당행이 쉬워진다고 믿는다. 심지어 모 그룹 오너는 수십억원대의 헌금을 내면서도 비정규직들의 처우는 최악으로 하지 않는가. 비정규직들을 아무리 학대해도 돈으로 영생을 살 수 있다는 사고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천당의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려는 행태를 비판했다. 진정한 종교인의 태도는 윤리적인 행실과 자기 해방의 쉼 없는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만해 사상이 절실한 이유다.

만해의 어떤 면모가 서구 독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외국에서는 한국 불교가 대개 참선이나 화두참구(話頭參究)를 한다고만 알고 있다. 만해의 참여불교 사상은 잘 모른다. 오리엔탈리즘에 길들여진 서구는 불교를 자칫 이국적 이념과 의식으로만 소비하기 쉽다. 만해는 겉모양이 아닌 내용의 불교, 사회참여를 필요로 하는 알맹이 불교를 가르친다. 만해가 외국에 제대로 알려져야 한국 불교에 대한 몰이해도 풀릴 것이다.

번역에서 역점을 둔 부분이라면.

-학술성을 담보하면서도 가능한 한 쉬운 영어를 지향했다. 전문 학자뿐 아니라 학부생과 일반인들까지도 참고할 수 있는 책이 되길 바란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입력 2008-02-18 14:41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1700년 전 불교가 전해진 것이리라.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선불교가 전해지고 8만대장경이 간행된 것 역시 한국 불교의 전기를 이룩한 일대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8만 대장경 판각 이후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큰 이벤트는 무엇일까. 이는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팔리어로 된 근본 불교의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사업이라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초기불교의 경전을 우리말로 옮김으로써, 경전이 한역(漢譯)되면서 불가피했던 일부 중국식 의역이나 왜곡없이 붓다 가르침의 원형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까닭이다. 특히 한국 불교를 이끌어가는 조계종의 선불교가 중국의 선불교를 직수입한 탓에 붓다 가르침의 원형이 상당 부분 왜곡됐다는 비판이 점증하는 시점에서 팔리어 경전 역경 사업은 의미가 크다. 한국의 선불교는 ‘지관쌍수’(止觀雙修·선정(사마티)과 통찰(위파사나)을 함께 닦음)로 이뤄진 붓다의 가르침 중 한 기둥인 관(觀), 즉 위파사나를 사실상 제외해 버렸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20여년 전 팔리어 경전 번역을 시작한 뒤 최근 ‘앙굿따라니까야(전11권)’ 역주를 완료한 전재성(55·한국빠알리(팔리)성전협회 회장·사진) 박사를 만났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인도철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뒤 독일의 본 대학에서 인도학과 티베트학을 연구한 전 박사는 영어와 독일어는 물론,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인도어, 티베트어, 일본어, 현대 중국어와 한문 등을 해독할 수 있는 불교학자. 이미 ‘쌍윳따니까야’(전11권·2002년), ‘맛지마니까야’(전5권·2003년)를 역출(譯出)한 그는 1999년 독일에서 탁발로 연명하며 나무 아래서 잠을 자고, 무소유를 실천하는 페터 노이야르의 삶을 ‘거지 성자’(안그라픽스)라는 이름의 책으로 소개한 베스트셀러의 저자이기도 하다.

―‘앙굿따라니까야’는 어떤 경전인가.

“붓다가 입멸한 뒤 제자들이 모여 붓다의 가르침을 결집했는데, 처음 구전돼 오던 결집 내용들이 기원전 1세기경 팔리어로 기록됐다.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장(經藏)은 주제나 숫자에 따라 ‘쌍윳따(相應部)니까야’, ‘디가(長部)니까야’, ‘맛지마(中部)니까야’, ‘앙굿따라(曾支部)니까야’, ‘쿳다까(小部)니까야’ 등 5부의 니까야로 나누어 담았는데 ‘앙굿따라니까야’는 붓다의 가르침을 1부터 11까지 숫자에 따라 묶고 연결해 정리한 경전이다. 이를테면 ‘삼법인’은 3권에, ‘사성제’는 4권에 모으는 식이다. 한역(漢譯)대장경의 ‘증일(增一)아함경’에 해당하지만, ‘잡아함경’이나 ‘중아함경’과 일치하는 내용이 더 많다. 특히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심리적·윤리적 측면을 출가자나 재가신자의 일상적인 관심사와 연결시킨 내용이 많아 수행의 길잡이로 더할 나위 없는 경전이기도 하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지난해 ‘앙굿따라니까야’(대림스님 역주, 전6권)를 역출했다. 서로 무엇이 다른가.

“초기불전연구원의 것은 6권인데 반해 내가 번역한 것은 11권으로 일단 분량에서 다르다. 내가 번역한 것은 생략된 부분을 모두 완벽하게 복원한, 세계 최초의 복원본이기 때문이다. 또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은 폐쇄적인 승려사회에서 쓰는 전문 용어를 많이 사용했으나 내가 번역한 것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일상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1950년대 미얀마에서 행해진 제6차 결집본을 참고하고, 1930년대까지 이미 역출된 영역본, 독역본, 일역본 니까야와 정교한 대조작업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불전 역경 사업은 대단히 방대하면서도 정교한 번역이 요구되는 대사업이다. 왜 초기불전연구원과 함께 하지 않았는가.

“초기불전연구원이 설립될 당시 공동작업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아무래도 박사급 역주자에 대한 보수가 부담스럽지 않았겠는가. 또 둘이서 번역하면 정교함에서는 앞서나 효율에서는 훨씬 뒤지는 문제가 있다. 서로의 번역을 비교하며 이견이 있는 내용들은 하나하나 합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전에 대한 신자와 승려사회의 반응은 어떤가. 승가대학이나 강원에서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는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 교양대학 같은 데서는 많이 읽고 있으나 승려사회의 반응은 미미한 편이다. 인식부족 탓이다. 중앙승가대에서 오는 3월부터 동아리 차원의 니까야 읽기를 계획하고 있는 게 전부일 정도다.”

―10년 전 독학으로 불교공부를 시작한 뒤 최근 왕성한 저술활동을 벌이고 있는 광주시법원의 김윤수 판사가 말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육조단경’ 따위를 읽으며 불교의 실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헤매다 니까야를 읽으면서 비로소 줄기를 잡기 시작했다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경전은 대부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이 많아 이것으로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또 경전이 한역됐다가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뜻이 바뀌었거나 왜곡된 것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붓다의 직접 가르침인 니까야는 해탈에 이르는 수행법을 소상하면서도 친절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쌍윳따니까야’와 ‘앙굿따라니까야’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럼 안거철마다 선방에 들어가는 스님이 2000명이 넘는 데도 깨쳤다는 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는 것도 니까야에 대한 무지와 관계가 있는가.

“니까야에 나오는 내용은 거의 모두 수행법에 관한 것이다. 이를 무시한 채 선방에 백날 앉아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간혹 깨쳤다고 하는 사람들도 붓다의 기준에 비춰보면 진정한 깨침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승려사회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참나, 진아(眞我), 불성(佛性) 등의 말은 붓다의 가르침에 전혀 없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무아(無我·실체 없음)를 근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참나, 진아 따위와는 상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조계종 불학연구소가 최근 내놓은 수행지침서‘간화선’은 150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붓다고사 스님이 쓴 ‘청정도론’의 발치에도 못 따라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니까야만 제대로 읽으면 ‘청정도론’을 능가하는 현대판 수행지침서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5부 니까야 중 아직 번역되지 않은 ‘디가니까야’와 ‘쿳다까니까야’의 번역 계획은.

“쿳다까니까야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숫타니파타’가 이미 역출됐으니 이제 ‘쿳다까니까야’의 일부와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디가니까야만 남은 셈이다. 2년 정도만 더 애쓰면 5부 니까야를 완역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수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는가.

“수행으로 해탈에 이르는 것은 모든 불자의 궁극 목표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알지도 못한 채 수행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팔리어 경전을 번역해 보급하는 것도 본격 수행을 위한 준비 단계로,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예수교]

 

송고시간2017-02-10 16:23

(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경 사본인 '사해문서'를 보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이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60년 만에 추가로 발견됐다.

지난 1947년 사해 부근 쿰란 지역의 동굴에서 기독교 탄생 이전 기원전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구약성서와 유대교 관련 문서들이 발견돼 성서고고학 분야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쿰란 지역 11개 동굴에서 항아리에 담긴 채 발견된 수백 건의 문서들은 구약성서 사본이 이미 기원전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 문서 발견은 전문가들로부터 '21세기 최대 고고학 발굴'로 각광을 받았다.

9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이스라엘 히브리대 고고학 발굴단이 이스라엘이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 쿰란의 한 절벽에서 사해문서를 보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12번째 동굴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이 동굴에서 또 다른 사해문서가 별견되지는 않았으나 발굴단은 지난 1950년대 현지 베두인 약탈자들이 문서를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굴은 중요한 발견이라고 지적했다.

발굴단장인 오렌 구트펠드 박사는 "이번 동굴 발굴은 60년 만에 새로운 사해문서를 발견한 것에 비견될만큼 흥분되는 것"이라면서 이번 발굴된 동굴이 사해문서를 보관한 12번째 동굴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발굴단은 동굴 내에서 앞서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문서 보관 항아리들의 파편을 발견했으며 역시 앞서 동굴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문서를 묶었던 가죽끈과 의복 등도 함께 발견했다. 이 동굴 역시 사해문서를 보관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또 현장에서 20세기 중반경의 곡괭이 두 자루가 발견돼 약탈자들의 침입 흔적으로 보인다고 발굴단은 덧붙였다.

한 항아리 속에서 발견된 조그만 양피지 두루마리는 내용을 분석 중이다.

구트펠드 박사는 이들 모든 정황에 비춰 이 동굴에 보관돼온 문서들이 약탈당했음이 틀림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번 동굴 발굴은 사해문서 추가 발굴을 위한 이스라엘 정부의 '두루마리 작전'의 일환으로 실시됐다.

1940년대 발견된 사해문서는 2천여 년 전 당시 그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 이전까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 최고 사본은 9-1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사해문서로 인해 구약성서 사본이 기원전에도 이미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또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다른 내용의 성서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이른바 외경 등 현대의 정전과는 다른 성서 전승이 이미 히브리어 원문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47년 한 베두인 목동에 의해 발견된 사해문서의 가치가 드러나면서 한때 이 지역은 직업적인 고고학자들과 보물탐험가들의 엘도라도가 됐었다.

사해문서들은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최근 발견된 사해 인근 동굴 (예루살렘 포스트 캡쳐)

yj3789@yna.co.kr

 

 

 

  • 수정 2019-10-20 17:20 등록 2007-02-16 07:15

[단독] 도올 “구약 믿는 것 성황당 믿는 것과 다름없어” (hani.co.kr)

“기독교인들 독선적 신앙 벗어나라”
“한글성경 오류 많아…공개토론 하자” 주장
보수 기독교계 “공식대응” 밝혀 신학논쟁 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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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교수.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요한복음’ 강의 논란 도올 김용옥 인터뷰

도올 김용옥 교수를 지난 13일 만났다. 그가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을 녹화하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교육방송〉 녹화장에서였다. 도올은 100강 가운데 현재 10개 강의를 인터넷에 올려놓고 있다.
이 강의에 대해 한국교회언론회(대표 박봉상 목사)가 지난 8일 보도자료를 내 반박하고 나섰다. 도올의 강의가 정통 신학적인 입장과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언론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비롯한 보수 기독교단을 대변하며 주로 대언론관계를 맡는 단체다.

이번 인터뷰는 한국교회언론회가 제기한 의문에 대한 도올의 답을 듣기 위한 자리였다. 도올은 한국교회언론회가 “마치 신약(성경)만이 성경인 듯 표현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데 대해 답하면서 ‘구약 폐기’를 주장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민족신인 야훼(여호와)가 유대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믿는 조건으로 애급의 식민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겠다고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며, 예수의 출현으로 새로운 계약(신약)이 성립된 만큼 구약은 당연히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구약은 초대 교회에서도 성경에서 떼어 내버리자는 말이 많았으나 초대교회가 제식의 측면에서 근거로 삼기위해 참고문헌으로 붙여놓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도올 김용옥 교수.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도올은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너희가 모세 율법을 믿느냐, 나를 믿느냐’는 물음을 한다”면서 “구약의 모세를 믿으려면 유대교로 가야하고, 우리나라에서 성황당을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올은 보수 기독교에서 대표를 지정해 내세운다면 공개 토론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도올은 이제 자신도 환갑을 맞이한다며 기독교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나 정도를 걷도록 도와 새롭게 부흥하도록 하고 싶다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언론회 사무국장 심만섭 목사는 “우리도 토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한기총 대표회장 이용규 목사도 “현재 도올의 강의를 체크하고 있으므로 곧 공식적인 대응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도올 강의를 둘러싸고 ‘상호 비난’을 넘어, 제대로 된 ‘신학적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게 된 셈이다. 다음은 도올과 일문일답이다.

-한국교회언론회가 ‘도올 강의가 드라마처럼 성경을 구성했다고 주장한다’며 성경을 제자들이 창안해 기록한 것으로 설명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이지 복음서 기자들의 서술이 아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목적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신문기사는 물론 조선왕조실록에도 드라마적 요소가 있다. 그런 요소가 없다면 사복음서의 내레이션이 왜 모두 다른지를 설명해 보라. 공관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가복음서)엔 예수의 사역이 일년 밖에 안 되고, 예루살렘도 한번 밖에 안 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서엔 예루살렘에 수시로 가고, 3년 간의 사역이 나오지 않는가.

-그런 주장은 ‘성경엔 일자 일획의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류설’에 배치되지 않은가.

=그렇게 무오류를 주장하면서 한글 성경에서조차 틀린 데가 많다. 한자도 틀린 것이 적지않고, 예수의 족보도 세어보라. 한대가 빠져 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도올의 강의에 영지주의적인 사상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구질구질한 신화만으로 어떻게 기독교가 가진 세계적 권위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또 영지주의가 역사에 있었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영지주의는 실체가 없었다. 그것이 ‘발전한 신학’에서 밝힌 바다. 그것은 헬레니즘이 발달한 당대 우주관이었을 뿐이다.

-한국교회언론회는 ‘강의 곳곳에서 신학적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누가 과연 오류를 범하는가. 기독교인들은 남을 비방하면 안 된다. 자신들의 신념만 종교고, 나머지는 이단이라면 거꾸로 보면 자신이 이단이 될 수 밖에 없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내면의 결단이다. 도올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 얘기로 신앙이 깨진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얘기들로 벌벌 떠나. 보수교계가 대표자를 정한다면 누가 더 정통적이고, 바른 신앙 생활을 하는지 공개 토론을 할 용의가 있다.

-기독교에 깽판을 놓는 게 아니라 북돋아 돕고 싶다고 했는데.

=나도 환갑이 다됐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비판해봤지만 효과가 없어서 이제는 기독교가 정도로 가게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이제 기독교단체들은 나와 협조하는 게 좋다. 나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를 부흥시키는게 현명하다.

-현재 기독교의 문제를 뭐로 보나.

=오직 성전건축에만 매달리는 거다. 건물엔 사람이 차야 은혜가 충만해진다. 사람보다 건물이 커서 썰렁하면 안 된다. 식당이 잘된다고 건물 크게 지은 식당 치고 안망한 식당 별로 없다. 현재까지 교회 건물이 사람으로 꽉꽉 차는 곳은 세계에서 한국 밖에 없다. 한국 교회가 없었다면 세계 기독교 자체가 20세기에 별 볼일 없어질 뻔했다. 한국 기독교는 그만큼 위대하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깨어나서 다른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 자신의 신앙만이 유일한 신앙이라는 독선에서도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제 민중들은 기만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신앙을 바르게 갖도록 도와야할 사람들이다. 건전한 상식을 자리잡게 하는게 내 강의의 목적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단시일내에 세계가 놀랄만큼 빠르게 정착했다고 보는가.

=우리나라는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기독교를 유입한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다. 유학이 가진 공백을 인간 평등으로 메우고, 양반부터 상민까지 뿌리 박고 있던 샤머니즘을 기독교가 흡수했다. 기독교의 평등 사상은 위대하다. 또 우리 민족은 음주가무를 즐긴다. 노래방 봐라. 찬송가가 준 감동이 우리 민족을 기독교에 빨려들게 했다.

-세계에서 대표적인 다종교사회인 우리나라의 여러 종교를 직간접으로 섭렵한 도올이 권하는 한국 종교인의 자세는 무엇인가.

=자기 신앙은 내면에서 지키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선 관용하고, 모든 사물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용어설명-영지주의 그리스어 ‘그노스티코스’(‘그노시스’, 즉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서 유래했다. 구원이란 바로 예수와 같은 빛의 사자에 의해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신념 체계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교육이나 경험적 관찰이 아닌 신적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 즉 영지를 중시해 내면의 준비 과정과 자아성찰, 변화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3,4세기 이후 이단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으나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뒤 관심이 증폭됐다.용어설명 -요한복음 마태오·마르코·루가 복음서 등과 함께 4대 복음서다. 다른 세 복음서들은 ‘보는 시각이 공통적’이어서 공관복음서라 부른다. 공관복음서의 완결판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이는 〈요한복음〉은 이름이나 지명도 더욱 더 상세하다. 도올은 “〈요한복음〉에선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로고스)의 화신이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설 같은 것은 필요하지도 않다”며 “그래서 오히려 신화적 예수에서 벗어나 인간적 예수를 제대로 그려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요한복음〉을 노자의 〈도덕경〉과 불교 〈금강경〉과 함께 인류 3대 지혜서로 꼽았다.

 

 

‘케케묵은 신학의 지엽적 논리를 앞세운 철학 강의’(한국교회언론회)/‘정통 성서신학에 충실한 성경 바로보기’(도올 김용옥)

도올 김용옥 교수의 EBS 영어로 읽는 요한복음 강의 논란이 도올-신학자간 공개토론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도올과 EBS는 예정된 100강을 강행할 방침이고 문제를 제기한 한국교회언론회(이하 언론회)는 도올의 신학적 자질과 기독교 오도를 내세워 강사 교체나 프로그램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양측이 이처럼 팽팽하게 맞서는 논쟁의 중심은 물론 성서와 신학을 보는 시각 차다. 현격하게 다른 양측의 핵심 논점을 들여다본다.

 
 
●‘메타노이아’와 원죄

“‘메타노이아’의 “회개하라”는 번역은 틀렸고,‘회심하다.’ ‘마음을 돌이키다.’로 단순 해석하는 것이 옳다.”도올의 ‘메타노이아’ 해석이다. 헬라어를 직역한 이 해석에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는 주체적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언론회는 항상 인간이 처해 있는 죄 문제를 생각하면서 의미를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에서의 ‘메타노이아’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포괄적 존재 변혁의 문제이고, 사람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근본적 문제를 자각하고,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도올의 교재 ‘요한복음 강해’ 속 ‘예수는 원죄를 말하지 않았다.’는 주장에도 언론회는 “정통 기독교의 근본적 가르침에 정면 도전하는 말”이라며 발끈한다. 예수가 비록 ‘원죄’ 용어를 쓰진 않았지만 예수가 명백하게 가르친 인간 존재 전체의 근본적인 죄의 오염과 인류의 첫 죄에 대한 죄책의 문제를 교회는 오래 전부터 ‘원죄’로 표현해왔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엔 성경이 없었다?

“사도 바울시대인 AD 1세기 중반엔 성경이 없었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왔으며, 구약성경은 폐기돼야 한다.” 도올이 강의와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 주장이다. 언론회는 “그 시대에도 이미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고, 사도들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여겨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가 구약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을 써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였다.”(누가복음 24:27)라고 한 것과 디모데후서 3:16, 베드로전서 3:16 등 신약 구절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예수가 율법을 폐하러 왔다.’는 주장에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서’라고 맞서고 있다.

●‘Logos’(로고스)의 해석

도올은 고대희랍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로고스처럼 만물의 이법(理法)과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성경과 연관짓는다. 언론회는 이에 대해 “요한복음 속 로고스는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을 말한다.”고 강조한다. 희랍 철학의 로고스 사상은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세계가 만들어진 것을 부인’하므로 도올이 요한복음의 로고스와 희랍 철학 사상을 일치시키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참 로고스가 태초부터 계셨으니 그가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가 죄에 빠진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셨다.’(요한복음 1:14)라는 구절을 예로 들고 있다.

창조와 빅뱅(Big Bang)

도올은 일단 하나님이 빅뱅 이전에 계셨고 시간과 공간이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현대 물리학의 ‘물체가 없으면 시간도 없다.’라는 이론에 동의한다. 이에 대해 언론회는 “하나님의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반론한다. 도올이 “하나님은 시·공간에 있을 수 없고, 그가 시·공간에 들어올 때는 로고스를 통해 들어온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언론회는 “성경의 하나님과 로고스는 모두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이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7-03-05 09:13

도올, 유일신앙 · 삼위일체 정면 반박 (hani.co.kr)

‘기독교성서의 이해’ 펴내…‘성서 무오류설 위험’ 논란 일듯

도올은 4일 펴낸 <기독교성서의 이해>에서 이미 논쟁을 불러온 ‘구약 폐기론’뿐 아니라 현 기독교에서 너무나 당연스럽게 여기는 유일신앙과 삼위일체설을 정면으로 반박해 또다른 쟁점을 만들었다.

그의 글은 예수 생애 전후 시대와 성서가 형성된 당시의 종교, 문화, 인물들에 대한 고증을 깔고 있다. 기독교를 공인해 13번째 사도로까지 불리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장인과 부인, 친자식까지 처참하게 고문해 죽인 ‘역사적 사실’도 글에 언급했다.

이 책은 ‘성서 문자 무오류설’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도올은 “초기 기독교엔 구전과 예배제식만 있었지 경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며 “1세기에만 해도 예수한테서 직접 말씀을 듣거나, 직접 들은 제자한테서 직접 전해들은 ‘사도’의 말이 경전과 같은 권위를 지녔는데, 2세기 초에 이런 사람들이 모두 죽고, 교회 내의 구술 전통이 변형되고 왜곡되면서 곳곳에서 사도성을 가장해 경전을 저작하거나 편집하는 것이 자유롭게 이뤄졌다”고 쓰고 있다.

그는 또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앙은 야훼교를 창시한 모세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초기 기독교에선 예수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도 자연스러웠다고 주장했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와 ‘예수는 인간일 뿐’이라며 논쟁했던 아리우스는 오늘날엔 흉악한 이단자로 취급되고 있다”며 “그러나 당시 아리우스의 주장은 초기 기독교도들의 리버럴한 사상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대변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중재에 나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올은 “‘성부·성자·성신’이라는 말도 복음서의 개념이 아니며 오직 가톨릭교회 내에서 성립한 삼위일체 논쟁 이후의 독단적인 교리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자유주의 신학 전통이 활발한 서구에서는 자유로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전통 탓에 논의 제약이 심했다. 도올의 주장이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배경이다. 조연현 기자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3-14 20:21

‘예수 가라사대’ 복음서로 만나는 예수 (hani.co.kr)

기자고명섭
〈큐복음서〉(왼쪽)과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

〈큐복음서〉
김용옥 편·역주/통나무·1만6000원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
김용옥 지음/통나무·2만5000원

실체 논쟁 원텍스트 ‘큐복음서’와 그 존재 뒷받침 ‘도마복음서’ 통해신앙 아닌 말씀 통한 가르침 음미

 

기독교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가 ‘큐(Q)복음서’ 문제다. 신약성서 중 공관복음서의 기초 자료가 된 원텍스트가 있었다는 것이 이 논란의 핵심인데, 그 원텍스트를 부르는 이름이 ‘큐복음서’다. 큐복음서는 가설로만 존재하다가 점점 실체성을 얻어가고 있다. 철학자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큐복음서의 성립 과정을 살피고 그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긴 두 권의 책을 동시에 펴냈다. 〈큐복음서〉가 큐복음서의 텍스트를 김용옥 교수의 관점에 따라 편집해 번역하고 상세한 주석을 단 책이라면,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은 큐복음서의 실체성을 뒷받침하는 도마복음서를 이야기의 줄거리로 삼고, 이집트·이스라엘의 초기 기독교 성지 순례기 형식을 빌려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를 찬찬히 음미하는 책이다.

도마복음서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20세기에야 알려졌듯이, 큐복음서도 오랫동안 성서학적 가설로 나돌았을 뿐 실체성을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큐복음서 가설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세기 초였다. 독일 신학자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세(1801~1866)가 공관복음서를 연구하던 중 1838년 ‘큐자료’ 가설을 제시했던 게 발단이었다. 공관복음서란 신약성서 가운데 공통의 자료와 공통의 관점으로 서술된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을 가리킨다. 이 세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성립됐으며 나머지 두 복음서가 마가복음을 공통 자료로 삼아 기술된 것임이 바이세 당대에 밝혀졌다. 바이세는 여기에 더해 마태·누가 두 복음서가 마가복음 말고 또다른 ‘자료’에 근거해 기술됐다는 ‘제2자료설’을 내놓았다.

이 제2자료가 바로 ‘큐자료’ 또는 ‘큐복음서’다. 제2자료를 큐자료라고 부르게 된 건 ‘자료’를 뜻하는 독일어 크벨레(Quelle)의 머리글자를 그냥 빌려다 쓴 데서 비롯했다.

 

이 큐자료는 1세기 뒤 다른 독일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나크(1851~1930)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총괄해 희랍어(고전 그리스어)로 된 ‘큐복음서’를 ‘복원’함으로써 나름의 실체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 복음서는 순전히 문헌학적 연구와 논리적 추론에 의지해 도출해낸 결과였으며, 물증은 따로 없었다. 그런 이유로 큐복음서는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만 관심거리였을 뿐,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기존의 기독교 신앙에 일대 타격을 줄 수도 있는 ‘복음서’를 널리 알릴 용기가 성서학자들에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터진 것이 ‘도마복음서 출현 사건’이었다. 1945년 12월 이집트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 지역의 바위틈에서 대량의 성서 고문서가 발견됐는데, 거기에 ‘도마복음서’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공관복음서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것이 분명한 도마복음서는 놀랍게도 내용의 35%가 ‘큐복음서’와 일치했다. 더 놀라운 것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돼 있음에 반해, 도마복음서는 예수의 말씀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 형식으로 이루어진 도마복음서는 그 형식이 큐복음서와 똑같았다. 이로써 큐복음서가 가설적 차원을 넘어 실체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김용옥 교수가 번역하고 해설한 〈큐복음서〉는 모두 8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신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는 전혀 없고, 대신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지혜의 말씀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김용옥 교수는 큐복음서야말로 도그마화하기 이전 초기 ‘예수교’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이자 “살아 있는 예수의 직접적 말씀”이라고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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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8-04-14 14:25
 
그 중요성에 비해 그리스도교 교인이나 일반인들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는 전시회가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서울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진행중인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전’이 그것이다. 오는 6월4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에서는 금세기 그리스도교에서 이뤄진 최대의 발견이라는 사해사본의 일부 진본을 비롯, 사해사본을 동굴 속에 숨긴 공동체의 유물과 예수의 발자취 등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와 관련된 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상당한 수준의 그리스도교 성지 순례가 가능한 셈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겉으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947년 이래 이스라엘 사해 서안 지역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이야말로 성서와 그리스도교가 가진 수많은 비밀의 해답에 대한 실마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관심을 가지기에 따라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역사 등에 대한 지식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요르단 문화재청과 사해사본 재단 등의 협조를 얻어 이 전시를 진행한 사해사본전시 사무국은 전시를 앞두고 국내외 석학을 초청, 특별강연을 진행한 뒤 최근 그 결과를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임마누엘 토브 외 12인 지음, 임미영 엮음, 쿰란출판사)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전시회와 책의 출간을 계기로 사해사본과 성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역사 등과 관련된 일부 의문을 문답풀이로 알아본다.

― 사해사본이 무엇인가.

“1947년 이스라엘 사해 주변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성서와 성서주석, 종교적 규율, 그리고 위경(僞經) 등 900편에 가까운 다양한 문헌들을 말한다. 파피루스나 양피지 등에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나바트어 등으로 기록된 이 문서는 기원전 250년에서 기원 후 6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본이 발견된 동굴 주변이 쿰란공동체의 유적지인 ‘키르벳 쿰란’언덕이어서, 이 일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을 ‘쿰란사본’, 또는 ‘쿰란문서’라고도 한다. 쿰란공동체는 로마군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서기 70년)라는 위기 상황에서 사본을 동굴에 숨겨놓고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 이 사본이 왜 중요한가.

“여기서 발견된 성서는 현존 최고의 구약성서 사본으로, 이전까지 최고의 사본으로 알려져 있었던 알렙포 사본(925년경)이나 레닌그라드 사본(1008년경)보다 무려 1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사본을 기록한 쿰란공동체는 예수 생존 당시에 실존하던 유대인 신앙공동체로, 쿰란 일대에서 여러 문서와 유물을 통해 유대인들의 종교사상과 생활 방식, 풍습과 조직 등에 대해 많은 정보와 지식을 남겼다.”

― 사해사본에서 신약성서는 발견되지 않았는가.

“그렇다. 신약성서와 관련된 경이적인 발견으로는 1945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 지역의 자발 알 타리프 절벽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가 있다. 13개의 파피루스 묶음(코덱스·codex)으로 구성된 이 문서에는 ‘도마복음’을 비롯해 진리복음, 빌립복음, 마리아복음, 요한비서, 베드로 행전 등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시해온 영지주의 위경이 포함돼 있어 세상에 공개되는 데 적잖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1977년에는 콥트어(헬라어 알파벳으로 표현된 고대 이집트어)로 기록된 나그함마디 문서 전체가 영역 출판돼 이제는 누구든지 볼 수 있다.”

― 정경(正經)과 외경, 위경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정경의 라틴어 ‘캐논(canon)’은 ‘표준 모델, 또는 척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구약성서에 포함된 경전, 즉 정전(正典)을 말한다. 이에 비해 외경은 헬라어 형용사 ‘아포크리포스(apokryphos·감추어진)’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 구약의 ‘70인역’(BC3~2세기, 유대인 12지파에서 나온 72명의 학자가 히브리어나 아람어 등에서 번역한 헬라어 성경)에는 포함됐으나 정경에는 포함되지 않은 성경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위경은 ‘거짓된 경전’이란 뜻이다. 신약 정경인 27서는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 아리우스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아타나시우스가 서기 367년 확립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초기에는 정경, 외경, 위경이란 개념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정경과 위경의 구분 기준으로 아타나시우스는‘신적인 영감’을,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사도저작성’과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등을 들었으나, 실제 정경 확립에는 이런 기준보다 교회의 이해 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나그함마디 문서는 신약 정경 27서가 확립된 뒤 금기시된 성서(위경)를 숨겨놓은 것이다.”

― 그럼 현존 성서의 내용들이 신적인 영감, 또는 계시에 의한 기록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성서의 기록이 성령의 계시에 의한 말씀이어서 절대 신성불가침이란 주장은 문제가 있다. 신약성서의 헬라어 사본만도 5500개가 넘는데, 이 사본 중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만 봐도 그렇다. 1515년 사상 최초로 헬라어 성경을 편찬, 이를 인쇄 출판한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가진 헬라어 성경 사본에서 빠진 부분을 라틴어 성경에서 그리스어로 역번역하기도 했다. 그 유명한 ‘흠정역 킹 제임스 바이블(1611년 영문판)’은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조금 수정한 판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고, 그 이후의 성서도 모두 수없는 수정, 개정을 거친 것이다.”

― 이렇게 성서의 수정, 개정이 많았다면 정확성에도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성서 사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본의 서로 다른 내용은 대부분 필사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밝혀졌다. 그러니까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파피루스 단편과 9~11세기의 성서 사본에서 내용상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다 지난 200년간 이뤄진 성서 사본과 본문 연구는 신약성서의 본문 전승이 상당히 정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최근의 성서는 이들 사본을 엄정하게 비교 검토하면서 원문에 가까운 내용을 회복한 것들이다. 하지만 나그함마디 문서의 도마복음 같은 것은 현존 신약과 상당 부분 다른 것으로, 오랫동안 잊어진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유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 댄 브라운의 베스트셀러 소설 ‘다빈치 코드’에도 사해사본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어떤 내용이 허구인가.

“‘다빈치 코드’에서는 사해사본이 예수의 선교를 매우 인간적인 용어로 서술한다는 것으로 돼있으나 이 사본에서 예수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부분은 없다. ‘다빈치 코드’에서는 또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고 말하나, 사해사본은 물론이고 고대 문헌 어디에도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거나 성적인 관계를 가지거나 아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예수의 결혼설 등은 대부분 전설이나 상상에 근거한 것이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 수정 2008-02-04 18:47 등록 2008-02-04 18:47

“그리스도 예수는 종교철학적 개념” (hani.co.kr)

신학적 의문점들 풀어낸 ‘예수퍼즐’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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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복음서의 사건들 과 그 주인공 ‘나자렛의 예수’는 신약 서간들에서 찾아볼 수 없을까. 왜 바울의 ‘신적인 그리스도’는 ‘복음서 예수’와 아무 연관을 갖지 않은 채 그 시대의 수많은 ‘이교도의 구원자 신들’과 흡사해 보일까. 왜 수많은 공동체들 가운데 한 공동체만이 예수의 삶·죽음에 대한 이야기, 즉 마르코 복음서를 작성했으며, 다른 복음서들은 왜 그것을 단지 복사하고 개작했을까. 왜 예수의 재판·십자가형에 대한 복음서 이야기는 구약 성경 구절들로부터 짜 맞추어졌을까.

신학적으로 제기돼 온 이런 문제들에 대해 답한 책이 출간됐다. 〈예수퍼즐〉(씽크뱅크 펴냄·사진) 1, 2권이다. 캐나다 휴머니스트협회 회원으로, 고대 역사와 고전어를 전공한 얼 도허티가 썼다. 저자는 복음주의 작가 리 스트로벨의 베스트셀러인 〈예수는 역사다〉를 본격적으로 비판한 책을 쓰기도 했다.

나자렛의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가르침을 펼친 뒤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죽음을 맞는다. 저자는 예수의 행적을 편의상 ‘갈릴래아 전승’과 ‘예루살렘 전승’으로 나누어 따로 고찰한다.

주로 신약 서간들에 드러나듯이 예루살렘 전승이 전파하는 신적인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인류 사이를 이어주는 ‘영적인 채널’로서 헬레니즘 시대를 휩쓸었던 ‘중개자 아들’이다.

이는 그리스철학의 로고스와 유대 전통의 ‘인격화한 지혜’를 적용시킨 것으로서, 역사적인 나자렛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철학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갈릴래아 전승은 마태오복음과 누가복음서의 공통 부분들로 뽑아낸 큐(Q)문서로 대표되는데, 학자들은 이를 진화의 과정에 따라 Q1, Q2, Q3으로 분류한다.

저자는 Q1, Q2에선 나자렛 예수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독창적인 통찰을 통해 마지막 Q3에 이르러서야 갈릴래아 전승과 예루살렘 전승을 한데 통합시켜 인위적인 창립자, 나자렛의 예수가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한마디로 기독교는 어떤 단일한 인물이나 역사적으로 근거한 운동이 아니라, 수천 군데에서 각각 자발적으로 싹튼 독자적인 가닥들이 마르코 복음서로 한데 합쳐진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옮긴이 강경수.

조현 기자

 

 

입력 : 2008.07.07 02:38

폭 90㎝짜리 석판이 신학계와 고고학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석판에 새겨진 87줄의 히브리어 문장 때문이다. 여기에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되살아나는 구세주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를 근거로 예수의 부활이 당시 전통 신화였다는 주장이 나와 학계와 종교계는 논쟁 중이다.

뉴욕타임스는 6일 이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사해사본’ 발견 60주년을 기념해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이와 관련한 치열한 토론이 오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논쟁점은 석판에 기록된 내용의 해석이다.

이 석판은 새로 발견된 것이 아니다. 유대계 스위스인 수집가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이스라엘 학자 아다 야르데니가 몇 해 동안 면밀히 연구한 끝에 지난해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학계의 관심이 쏟아졌다. 다음달 쯤에는 이 유물에 대해 개별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가 쏟아질 예정이다. 히브리 유적 전문가인 야르데니는 문장과 언어의 모양을 근거로 “이 석판의 제작 시기가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고고학자의 화학적 분석 결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성서 연구의 권위자인 예루살렘 소재 히브리대의 이스라엘 크놀 교수는 석판에서 부활하는 주인공은 헤로디안군에 노예가 돼 죽음을 당한 시몬이라고 주장했다. 새겨진 이야기는 시몬의 추종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는 이 석판의 19~21행에 있는 “사흘 후 당신은 악이 정의에 패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를 근거로 부활 이야기가 당시 보편적이던 전승 설화라고 주장한다.

반면 히브리어 연구자인 모셰 바르 아셔 히브리대 교수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결정적 부분에 결정적 단어가 빠져있다”고 밝혔다. 크놀은 “석판에서 말하는 구세주가 시몬인가 아닌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흘 후에 부활하는 구세주’가 예수 시대에 이미 확립돼 있던 개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입력 2007-12-24 14:05

 

오늘날 우리가 매년 12월25일을 맞아 기념하고 있는 성탄절, 즉 크리스마스는 언제, 어디서 유래했을까. 흔히들 크리스마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날’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이는 명확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신약성서 ‘마태오의 복음서’나 ‘루가의 복음서’에서 그리스도 탄생에 대해 상세히 밝히고 있지만 정확한 날짜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크리스마스를 12월25일로 처음 지키기 시작한 것은 서기 4세기의 일이다. 로마 교회(서방교회)가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된 것은 354년 쯤이며, 이어 379년부터 그리스 교회(동방교회)가 이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도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은 행해졌지만 그 날짜가 일정하지 않아서 1월6일, 3월21일(춘분), 12월25일 가운데 어느 하루가 선택됐다.

로마에서는 12월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결정하고 이어서 1월6일을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현현일(Epiphany)로 기념했다. 본래 로마에서는 하루 해가 가장 짧았다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12월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보고 이날을 축제일로 삼아 농업을 주관하는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란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탄생은 ‘빛’의 탄생이다. 로마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12월25일로 결정한 것은 이교도들의 ‘태양의 빛’과 기독교의 ‘세상의 빛’을 일치시킴으로써 이교도들에게 기독교가 더욱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중세 유럽의 크리스마스에는 교회에서의 의식과 농신제(農神祭)에 따르는 가장행렬이나 소요가 뒤섞여 행해졌다. 그것은 카니발의 요소도 있는, 일종의 혼성적 종교행사였다. 중세 유럽 크리스마스의 민간행사에는 민족이나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비(非) 그리스도교적인 많은 풍습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미사는 초기부터 그리스도 교회에서 한밤중에 장중하게 행해졌다. 가톨릭국인 프랑스 등지에서는 크리스마스는 반드시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행사였으며, 특히 어린이를 비롯한 가족 중심의 축일이었다.

기독교의 어떤 종파나 교회에서도 크리스마스 의식을 행하고 있으나, 드물게는 스코틀랜드의 지극히 청교도적인 장로교회파와 같이 특별한 예배를 행하지 않는 곳도 있다. 이 지방에서는 일반인들도 12월25일을 휴일로 하지 않고 1월1일이 크리스마스 대신으로 돼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마르틴 루터가 처음…상록수에 촛불 매달아

 

크리스마스 행사에서 가장 중심적인 장식물은 ‘크리스마스 트리’다.

집집마다 가지가 곧은 푸른 나무를 잘 손질하여 통 같은 데 꽂아 양초·완구·인형·종·과자 따위를 달아매고, 또 가지나 뿌리 위에는 눈송이를 본떠 솜을 얹는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방안에 들어설 때 양초에 불을 붙인다.

최근에는 여러 가지 전구가 쓰이며, 나무도 플라스틱을 재료로 한 인조제품들이 많이 사용된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이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에 대한 이야기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하늘에 별이 빛나고 그 밑에 상록수가 서 있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루터는 상록수의 끝이 뾰족하여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 같이 보여 이와 같은 나무를 준비하여 자기 집 방에 세우고 거기에 별과 촛불을 매달아서 장식을 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상록수는 이교도들에게 ‘생명의 상징’이었다. 이교도들의 ‘생명의 상징’인 상록수와 기독교인들의 생명의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로 통합되어 이루어진 전통이 ‘크리스마스 나무’라는 것이다.

 

 

  • 수정 2007-10-26 22:33 등록 2007-10-26 22:33

“바울로가 만든 기독교리는 유대교의 변형” (hani.co.kr)

기자조현
〈잃어버린 예수〉

 

인터뷰 / ‘잃어버린 예수’ 펴낸 박영호 선생

1970~80년대 정신세계의 기인 가운데 ‘뿐 선생’이 있었다. 요절한 가수 현이와 덕이의 아버지였던 뿐 선생 장규상씨는 첼로 연주자였다. 그는 몸, 마음, 영혼까지도 ‘착각’을 일으키는 장치로 생각하고 자신이 발견한 절대세계를 ‘뿐’이라고 했다. 숭산 선사의 ‘오직 모를 뿐’의 그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순수의식의 에너지를 첼로를 통해 전했다. 누군가 그를 만나러 방에 들어가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첼로만 켰다. 그러면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은 금세 영안이 열렸다. 이 얘기를 들은 한 대학총장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뿐 선생을 찾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뿐 선생이 첼로를 연주했다. 그러자 가만히 앉아 있던 아이들이 “영계가 보인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총장은 자신이 궁금한 것을 아이에게 질문하게 했다. 우선 “부처님과 예수님 가운데 누가 더 도가 높냐?”고 물었다. 붓다가 답했다.

“예수님이 높으십니다.”

다음에 예수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예수가 답했다.

“부처님이 높으십니다.”

총장은 이어 절집과 교회가 그들의 가르침을 잘 잇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나의 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예수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답했다.

〈잃어버린 예수〉(교양인)를 들고 지은이 박영호(73·사진) 선생을 만나러 경기도 의왕으로 가면서 떠오른 것은 뿐 선생 방에서 이를 목격했던 증인으로부터 들은 이 대화였다. 〈잃어버린 예수〉는 “주여, 주여!”를 목 놓아 부르면서 오지 구석구석까지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는 교회가 예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의왕의 조용한 시골마을 집에 들어섰다. 지은이가 홀로 사는 집이다. 감나무 주위로 잡풀이 우거져 있다. 인위적 가공미가 없는 자연 그대로다. 지은이의 얼굴이 해사하고 맑다. ‘과격’한 이미지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세속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도심으로 살았다.

다석 류영모에게 인정받은 유일한 제자“바울로는 예수 가르침 도그마화” 비판‘잃어버린 예수’ 찾는 것이 세계평화의 희망“육체부활 욕망 버리고 진정한 나 찾아야”

조선 팔도 3대 천재의 한명으로 알려졌으면서도 평생 북한산 기슭에서 농사짓고 벌을 치며 살았던 스승 다석 류영모(1890~1981)처럼. 류영모가 기라성 같은 제자들에게도 주지 않았던 ‘졸업장’을 박영호 선생에게만 준 것도 도(道)가 아는 데 있지 않고 행하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었을까. ‘다석 사상으로 다시 읽는 요한복음’이란 부제가 붙은 〈잃어버린 예수〉도 사랑의 화신인 예수의 삶을 배타와 독선으로 도그마화한 ‘먹물’에 대한 질타인 것만 같다.

그 먹물은 바로 ‘바울로’다. 오늘날 기독교라는 종교를 있게 한 인물로 추앙받는 바울로의 추락에 독자는 누구나 전율할 것이다. 교회주의자들은 주일마다 귀가 닳도록 교회에서 듣던 ‘육체 부활 신앙’과 ‘대속 신앙’(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그 피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했다고 믿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단지 바울로의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독자들은 세상의 테러와 폭력과 전쟁을 이끌었던 기독교가 ‘잃어버린 예수’를 되찾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평화로 이끌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전율하게 될 것이다.

바울로에 대한 질타가 느닷없는 것은 아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교의신학을 연구하고 나서 “기독교의가 예수와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인가 교회의 의식적인 허위가 있음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지금도 문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인물로 늘 첫손에 꼽는 그 톨스토이가 육체 부활이나 대속 신앙과 같은 바울로의 교의신학이 허구라고 선언한 것이다.

톨스토이만이 아니었다. 수리 철학자이자 과정 신학자로 알려진 앨프리드 화이트헤드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 누구보다도 왜곡하고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울로”라고 썼다. 그들의 생각이 박영호 선생 생각이다. 지은이가 예수의 배반자는 유다가 아니라 바울로라고 하는 까닭은 이렇다.

바울로는 살아 있는 예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예수가 죽은 뒤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당시 유명한 율법학자 ‘가믈리엘’한테서 율법을 배웠다. 성격이 과격한 근본주의자였던 바울로는 본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주동자였다.

그런 바울로는 다마스쿠스 성 밖에서 갑자기 쓰러지면서 시력을 잃을 지경이 된 뒤 회심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로는 하느님을 무서워하는 ‘유치신관’에 머물렀다.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예수의 신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로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짐승을 잡아 바치는 대신 예수를 제물로 한 대속 교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바울로가 만든 기독교리는 유대교를 변형시킨 것일 뿐이다.”

바울로는 육체 부활을 얘기했지만, 지은이가 처음 스승 류영모를 찾아갔을 때 스승은 “어머니, 아버지가 낳은 육체는 참나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교회와 목사들은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구속하고 결코 자유를 주는 법이 없었지만, 스승은 지은이가 꿀맛 같은 가르침에 취해 있을 때 다시는 찾지 말고 홀로 설 것을 명령했다. 스승과 결별해야 하는 설움으로 통곡하면서 그는 홀로 섰다. 그래서 생사와 애증, 욕망의 노예인 제나(자아·에고)에서 벗어나 참나인 ‘얼나’로 솟구쳤다.

그 얼나는 붓다의 공(空)이자 불성이었고, 노자·장자의 도였으며, 예수의 하느님이었다. 다석은 이를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고 했다. 털끝만큼도 다른 것이 없으니 종교 간 배타와 증오가 있을 리 없다. 십자가를 앞세운 마녀사냥도, 십자군 전쟁과 아프리카의 노예 사냥과 인디언 대학살도 있을 턱이 없다.

지은이와 함께 마당에 나섰다. 가을이다. 류영모는 여름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고, 가을은 변화된다는 뜻이라 했다. 단감도 잎들도 누렇고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기독교도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을 벗어버림으로써 더욱 아름다움으로 불타고, 새 생명을 잉태하는 가을 단풍처럼.

의왕/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수정 2007-10-19 20:44등록 2007-10-19 20:44

“민중신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 유효”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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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남일(50)

 

인터뷰 /
‘안병무 평전’ 펴낸 소설가 김남일씨

일본 신학자 아라이 사사구에게 안병무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너와 나의 차이는 그거구나. 나는 한국 민중의 현실을 가지고 신학하는데 너는 그 ‘장’이 없구나.”

소설가 김남일(50)씨가 <안병무 평전>(사계절)에서 이 얘기를 떠올린 것은 다음과 같은 맥락 위에서다. “독일 대학에서는 신학과의 인기가 점점 떨어져서 전과나 폐과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한때 일본의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한국의 고단한 현실을 오히려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없는 ‘장(場)’이 우리에게는 넘치도록 흔한 터였으므로.” 안병무(1922~1996)의 머릿 속에 있던 장은 “1970년 이후 한국사회를 요동치게 만들었던 민중운동, 민주화운동, 평화통일운동의 그것”이요, “가부장제, 식민지배, 망명, 빈곤, 독립운동, 공산당, 해방, 분단, 이데올로기 투쟁, 그리고 마침내 전쟁까지!” 그의 전생애에 걸쳐 넘치도록 흔한 것이었다.

김씨에 따르면, 안병무의 관심은 “처음부터 ‘신학’이나 ‘신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초지일관 역사의 예수를 제대로 알아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것뿐이었다.” 평남 안주군에서 태어난 다음 해인 1923년 포대기에 싸여 부모와 함께 만주로 간 안병무가 기독교와 인연을 맺은 시발은 소학교 4학년 때 자격미달의 조선인 교장에 대한 스트라이커를 벌였다가 학교를 쫓겨난 뒤 옮겨간 투두거우라는 소읍에서 본 가톨릭교회 십자가에서 받은 충격이었다. 그때 그 정체에 관해 들은 얘기는 “누가 우리 대신 죽었다”는 것뿐. 그를 교회로 이끈 것은 그 충격과 ‘첩질’하면서 어머니를 사람취급 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었다. 총명한 전도사로 칭송받았고, 나중에 ‘민중신학’을 창도해 예수 연구에 ‘혁명적’인 차원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불트만, 몰트만 등과 함께 거론되는 세계적 신학자 반열에 오른 그가 신학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게 무슨 얘긴가?

그는 말했다. “난 성서에서 예수를 만났소. 그걸로 족해요. 내가 기도할 대상은 아니야요. 한 역사적 존재이지. 지금도 그는 내 심장을 뒤흔들고 나를 감격에 울게 해요.”

시대적 맥락 파악 위해 전기 아닌 평전으로신화 벗긴 ‘역사의 예수’ 자체로 접근 시도‘전태일 사건’이 안병무 민중신학의 출발

김남일씨는 이번 책을 “그냥 전기로 할까 생각하다 그래도 평전 쪽으로 갔다”며 “시대적 맥락을 짚어줘야겠다”는 게 그 이유라고 했다. “시대와 개인 안병무가 부딪치는 그 실존적 지점들을 짚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신론자인 그가 홍천에 칩거하면서 성서부터 다시 읽고 안병무의 책과 안병무에 관한 책을 거의 다 섭렵하고 관련자들을 만나고 상상력과 지식을 총동원해 쓰면서 그렇게 작심했다. 2년이나 걸렸다. 그 때문에 지난해 10주기에 맞춰 내지 못했다. 김씨는 지난해 나온 <안병무- 시대와 민중의 증언자>(살림),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삼인) 등도 많이 참고했다며, 그들 책에 비해 자신의 책이 인간적인 면모, 전기적 사실을 좀더 많이 담았다고 했다.

김씨는 안병무가 공관복음서, 그 중에서도 마르코(마가) 복음에 주목한 사실에 주목했다. 안병무는 예수가 처형당하기까지의 ‘사건’ 목격자들은 정치적 압박 밑에 있었고, 사건의 진실은 묵살되거나 왜곡됐으며, 기득권층이 얼버무리고 덮어버린 진실을 위험을 무릅쓰고 유언비어 형태로나마 전달한 것은 민중이었다고 봤다. 예수 수난사 전승에는 바로 그들 약자, 타자화된 민중 곧 ‘오클로스’ 자신들의 실존적 상황이 반영돼 있었다. 특히 그런 상황을 가장 짙게 반영하고 있는 마르코복음의 필자 마르코의 “삶의 자리”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김씨가 이번 책을 전기가 아닌 평전으로 써야겠다고 결심한 주요 모티브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개인이든 공동체든 로마제국에 나라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자기 땅에서 추방되어 고향도 토지도 집도 빼앗기고 미래에 대한 아무 보장도 없는 이방의 땅을 거지떼처럼 방랑하는 현장이었다. 그는 이 점을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을 그런 삶의 자리에서 파악한다. 이는 결국 예수를 둘러싼 모든 신화를 벗겨내고, 역사의 예수 그 자체로 다가서려는 시도였다.” 그 ‘현장’이 바로 책의 부제인 ‘성문 밖에서 예수를 말하다’의 ‘성문 밖’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예수가 부닥친 실존적 지점은 오클로스 중의 하나였던 마르코가 마주쳤던 실존적 지점과 겹치고, 그것은 다시 식민지와 디아스포라, 분단, 전쟁, 가난, 군사독재, 대국들의 패권횡포 아래 난도질당하는 이 땅의 오클로스들을 목도한, 그 자신 오클로스였던 안병무가 처했던 실존적 지점과도 겹친다. 안병무가 심지어 교회로부터 ‘빨갱이’로 손가락질당하고(그 역시 교회에 절망하고 교회를 버렸다) 권력의 감시 아래 거듭 투옥당하고 학교(그와 문동환 등이 버티고 있던 한신대는 70~80년대 저항운동의 선두에 있었다)에서 쫓겨나는 고난을 피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깨우침과 예수 사랑 때문이었다.

안병무에겐 예수가 민중이었고 민중이 예수였다. 몰트만은 예수가 민중이었다는 데엔 동의했으나 민중이 예수라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에겐 민중이 구원자가 될 수 없었지만 안병무는 민중은 스스로를 초월한다고 봤다. 이 지점이 민중신학을 둘러싼 주요 논점의 하나라고 김씨는 지적했다. 안병무에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아니라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였고, 예수 수난사건은 일회성이 아니라 화산맥처럼 잠류하다가 때가 되면 거듭 분출하며 그게 바로 수없이 되풀이되는 부활이었다. 그는 1970년 평화시장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 분신사건을 바로 그 화산맥이 이 땅에서 분출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사건이 ‘민중신학’의 출발점이 됐다고 김씨는 본다.

제도화한 사도 바울 이후의 교회는 그 본래모습인 공동체를 파괴하고 권위의 덧칠을 입히면서 민중한테서 예수를 빼앗아가버렸으며, 우상에 대들고 저항한 예수를 우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거기에 반발해 가톨릭을 뛰쳐나왔던 개신교도 어느덧 꼭같은 길을 밟았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다. 그 결과 ‘장’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도 이미 독일과 일본이 걸어온 신학과 교회의 쇠락 길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안병무는 그런 교회에 저항했다. “민중신학은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지금 오히려 더 유효하다”고 김씨는 생각한다.

김씨는 “평전이라 했지만 책의 목적은 무엇보다 ‘기억’에 있다”면서 서경식 교수가 얘기한 ‘기억의 싸움’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번 작업을 덜컥 떠맡은 것은 “순전히 무지 때문”이었지만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안병무한테서 “고집은 세지만 솔직하고 다정하며, 또 나약하면서도 끝없이 싸워나가는 인간의 초상”을 발견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7-09-07 17:06

기독교 근본주의는 미국 파시즘의 기둥 (hani.co.kr)

이단 배척하는 편협한 정통신앙이
금권·제국주의 손잡고 신정국가 꿈
자유주의자 목사의 비판적 설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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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데이비슨 뢰어 지음·정연복 옮김/샨티·1만2000원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샨티)은 목사의 설교집이다. 그럼에도 지은이 데이비슨 뢰어는 “나는 결코 기독교인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밝히는가 하면 “나는 그야말로 철저한 이단자”라고도 한다. 1942년생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그는 “우리가 베트남에서 그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죽인 100만 또는 그 이상의 베트남 사람들이 정당한 전쟁이 아닌 무지하고 오만한 살육의 희생자였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까지는 거의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른다. 그가 보기에 미국은 오히려 민주주의가 “돈과 권력과 종교의 왜곡된 조작들로 인해 끝장”나고 파시스트 동맹이 지배하는 위험한 나라가 돼가고 있다.

인문학 박사학위 소유자 뢰어는 텍사스주 유니테리언 보편구제설협회 소속 교회 담임목사다. ‘종교적 자유주의자’인 그가 믿는 것은 ‘예수에 관한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종교’다. 그의 기독교 부인은 ‘예수에 관한 종교’, 즉 제도화·기득권화한 기독교에 대한 거부이겠다. 그런데 ‘이단자’라면? 뢰어는 ‘선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에서 온 ‘이단’을 배척하는 정통신앙(orthodoxies)이야말로 신성모독이라고 상식을 뒤엎는다. “일부 오만한 작은 집단들이 선택은 끝났다고 선언”하고 자신들만이 이 모든 ‘하느님의 일’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선택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이단자로 정의”한다. 정통신앙은 일종의 집단사고이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며, 진리와 신과 구원을 발견하는 능력을 해치는 치명적인 적이다. 진리는 오히려 이단에 있다는 것이다.

정통신앙, 규범적 기독교는 경전들을 상징이나 은유, 시적 이미지나 신화로 읽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믿는 문자주의를 따른다. 문자주의는 저 높은 곳 어딘가에 천국이 있고 ‘영원한 생명’도 실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뢰어에게 ‘영원한 생명’은 신자들을 통제하고 오도하기 위한 장치요 미신이다. 게다가 종교는 하느님이나 신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더 지혜롭게 잘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신은 사람들이 자신의 속성을 투사해서 만들어낸 순수한 인간 발명품이라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 뢰어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리키는 달(높은 이상이나 가치)은 보지 않고 손가락(신, 제도화한 종교)만 쳐다본다.

미국 화가 해리 스턴버그의 <파시즘>(1942). 2차대전 때의 추축국을 상징하는 세 얼굴의 괴물이 족쇄를 끊고 자신이 파괴한 인류의 지적·물적 유산의 폐허 위를 배회하고 있는 모습. 그 추축국 파시즘 분쇄의 주역이었던 미국이 지금 파시즘에 빠져들고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이주헌의 <미술로 보는 20세기>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 등 위대한 종교사상가들은 문자주의에 부정적이었으며, 사제의 종교가 아닌 예언자의 종교 편에 섰다. 아모스, 예레미야 등 예언자들은 모두 더 높은 가치의 이름으로 당대의 사제들에 저항했고, 종교언어 아닌 보통의 언어로 그 가치들을 표현했다. 예수도 그 연장선 위에 서 있지 않았나. 뢰어는 자신을 바로 이들 예언자의 전통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미국 파시즘의 한 기둥인 기독교 근본주의 수장 팻 로버트슨, 제리 폴웰 등을 “못된 목사”, “편협하고 역겨운” “협잡꾼과 선동가”로 질타하면서, 그런 나쁜 목사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하느님을 “그들 자신보다도 훨씬 편협하고 역겨운 하느님”, “가장 못된 부류의 사람들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로 비판한다.

지금 미국 사회를 파시즘으로 몰아가는 세 가지 사조가 있다. 첫째, 기업과 부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금권정치.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 빈자를 위한 자본주의”다. 둘째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라는 제국주의적 꿈”. 부시 1기 정권을 장악했던 네오콘들의 “미친 짓거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세계지배 환상”이다. 셋째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꿈꾸는 신정국가 건설. “근본주의는 종교적 파시즘이요 파시즘은 정치적 근본주의”다. 셋은 서로 얽혀 있다. 파시스트들이 “국가권력과 시장권력을 동시에 사용해 일반시민을 영구히 자신들에게 복종”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무기들은 세계 최대의 교도소 체제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세계무역기구(WTO), 노동조합 파괴, 최고경영책임자 보수는 늘리고 노동자 몫은 깎기, 노동자 연금 폐지, 약탈적인 신용카드 이자율, 그리고 일자리 아웃소싱 같은 것들”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이미 만연한 미국식 근본주의에다 이들 투기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초고속도로가 되지 않을까. 뢰어는 “선량한 사람들은 대부분 활동하지 않고 가만히 있도록, 심지어 잠에 빠져 있도록 길들여져” 왔고 그 결과가 파시즘 국가로의 이행이었다며 “너무 늦기 전에”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 행동하기를 고대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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