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현입력 2013. 9. 6. 08:34수정 2013. 9. 6. 08:55

"식민반도사관 벗자" 재미사학자 폴 김 박사 '동이배달한민족사' 발간 (daum.net)

 

"식민반도사관 벗자" 재미사학자 폴 김 박사 '동이배달한민족사' 발간

2009년 '간도협약' 무효청구 국제사법재판소 제기 주역【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일본과 청이 멋대로 맺은 사기조약은 원천무효입니다. 간도는 통일 코리아(Corea)가 반드시 찾아야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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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간도협약' 무효청구 국제사법재판소 제기 주역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일본과 청이 멋대로 맺은 사기조약은 원천무효입니다. 간도는 통일 코리아(Corea)가 반드시 찾아야할 우리의 영토입니다."

1909년 9월 4일은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오욕의 날이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제국주의는 청나라가 이른바 '간도협약'을 맺고 이 지역의 철도부설권을 받는 조건으로 우리 땅 간도를 멋대로 중국에 넘겨주었다. 청일간의 사기조약으로 대한제국과 중국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경계가 되버렸다.

 

일본은 1965년 간도협약을 무효라고 국제사회에 선언했지만 남북한 정부 어디도 공식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간도는 현실적으로 중국이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간도를 수복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근거를 갖고 있다고 뉴욕의 재야사학자 폴 김(63 김태영) 박사는 주장한다.

이는 간도협약 100년을 사흘 앞둔 지난 2009년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에 민족회의통일준비정부(대표 김영기)가 간도협약 무효청구를 정식으로 제기한 덕분이다. '실효적으로 점유한 영토가 100년이 지나면 해당국의 영토로 간주한다'는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의 100년 시효설은 지난 2009년 뜨거운 쟁점이었다.

당시 선봉에서 피끓는 목소리로 간도협약 무효청구소송을 주장한 주인공이 바로 폴 김 박사다. 동포들의 연대서명과 거듭된 탄원을 이명박 정권은 끝내 무시했지만 정부를 대신해 민족회의측이 '간도협약 100년'을 불과 사흘 남겨두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정식 제소하는 개가를 올렸다.

폴 김 박사는 4일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국제사법재판소에 무효청구를 제기한 것은 100년 시효설의 함정을 차단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00년이 되기전에 국제사법재판소가 무효소장을 정식 접수했기 때문에 시효설을 근거로 시비를 삼을 여지가 없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해 말 폴 김 박사는 필생의 역작을 탈고했다. 이후 3년이 넘게 손질 보완의 작업을 거쳐 마침내 햇볕을 보게 된 것은 '동이배달한민족사(東夷倍達韓民族史)'이다. 소호출판사에서 지난 여름 발간된 '동이배달한민족사'는 무려 594쪽에 달하는 우리 민족의 참역사 이야기다.

 

부제로 '김태영의 한국 상고사'가 달린 이 저서는 김 박사가 반평생을 걸쳐 연구하고 찾은 사서와 기록, 자료, 지도를 토대로 엮었다. 그는 수년전의 간도논란을 비롯, 국사학계를 지배하는 식민반도사관을 척결하고 역사의 진실을 찾는데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책을 펴냈다고 했다.

김 박사는 "이 책은 현존하는 모든 역사자료들을 토대로 했고 경우에 따라 토씨까지 바꾸지 않고 기록한 곳도 있으므로 엄격히 말해 내가 저자가 될 수 없음을 밝힌다"면서 "당시의 기록을 생생하게 재현시키기 위해 지리지명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아닌게아니라 책 말미에 있는 참고자료 목록은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엄청난 양이다. 한중일 역사서가 도합 131권, 영어 등 기타외국 서적이 114권이나 된다.

김 박사는 우리 민족의 정확한 명명은 한민족보다는 '동이배달한민족'이 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을 '지나(支那)' 혹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 '중공'이라 부른다. 알려진대로 'China'는 지나에서 유래된 영어이고 중국은 수천년전 단군조선이 지어준 이름을 20세기 들어 차용했는데 그 뜻을 천하의 중심국인양 자의적으로 해석해 쓰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중국은 단군조선의 제12대 아한(阿漢)의 국태사(國太師)였던 유위자(有爲子)가 지어준 이름으로 '가운데 사이의 땅'이라는 뜻이다. 당시 섬서성과 하남성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나대륙 땅은 단군조선 영토였고 모계와 서출로 이뤄진 지나인들을 한가운데 모여 살도록 배려한 것인데 힘이 강해지자 자신들의 조상이자 큰집인 동이배달한민족의 영토를 침탈한 것이다. 황하 북쪽의 아시아대륙은 고려때까지도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 다른땅은 몰라도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을 포함한 간도(間島)는 1909년 9월 3일까지 우리 땅이었고 역사적 법적으로 당연히 되찾아야 할 땅이다."<138-139쪽 중국이란?>

그는 "일본인들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왜곡 날조 말살한 식민사학의 노예가 된 강단사학이 해방 65년이 지나도록 바른 민족사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뜻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재야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동이배달한민족사를 밝히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면서 "재야사학이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의 상고사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식민사학이 '단군조선은 신화다'라는 말 한마디로 삼국 이전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시켰기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물론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나 이론이 식민사학의 바이블인 '조선사'처럼 정리되지 않고 특히 지리의 해석이 제각각인 경우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는 만신창이가 된 우리 민족사를 정리하기 위한 통과의례일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단군조선의 역사기록이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모두 불타 없어지고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 역사는 선비족 모용외의 난으로, 고구려 초기까지 역사기록 유기(留記) 100권은 위나라 관구검의 난으로 각각 소실되고 심지어 조선 태종 이방원은 명나라에 사대하기 위해 단군조선의 기록인 신지비사(神誌泌詞),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을 불살랐다.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을 한 일본은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경찰과 헌병을 총동원하여 전국각지에서 강탈한 역사서 51종 약 20만권을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일본은 1923년 6월 총독부직속하에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서를 자신들에게 불리하거나 열등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을 후세인들이 알 수 없게 조작 날조 왜곡을 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상고사를 약간이라도 언급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남아 있는 것이다."<79~80쪽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니다'>

김 박사는 "한민족 상고사는 환국(BC8936)으로부터 배달국(BC3898) 단군조선(BC2333)으로 이어지는 약 9900여년의 역사를 말한다. 특히 환웅천황이 음력 10월3일 아사달(산서성 태원)을 도읍지로 배달국을 세우고 47대 단군들이 2100년동안 통치한 조선을 일본의 이마니시류(今西龍)를 비롯한 식민사학자들이 고조선의 이름으로 신화라고 비하했지만 단군조선은 실존한 대연방국가였다"면서 "따라서 동이배달한민족의 역사역년은 2013년을 기준하여 배달기 5911년을 사용해야 옳으며 음력 10월3일을 우리 민족의 설날로 지정하고 이날을 기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이 책에서 제1대 단군 왕검(王儉)부터 제47대 단군 고열제(高列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것은 물론, 기자조선과 한사군 등 허구의 역사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또한 "자국의 수치를 감추고 남의 자랑은 깎아내리며, 자국의 역사는 상세히 기록하고 남의 역사는 간단히 기록하는 춘추필법의 엉터리 기록들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정사로 둔갑하고 있다. 오늘날 동북공정과 탐원공정도 그것의 연장선"이라며 민간차원이 아니라 정부차원에서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이밖에 '고구려는 900년간 대륙을 지배한 천자국',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한글의 역사는 4190년이다'는 놀랄만한 주장의 역사적 논거들을 들고 'Corea로 국호를 되돌리면 동해와 독도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한일간의 갈등 해법도 제시하고 있다.

책 발간에 맞춰 모국에 다녀온 폴 김 박사는 '동이배달한민족사'를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전국의 주요 대학 도서관에 일일이 발송을 했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기관이나 단체에서도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기증할 생각이다.

'한민족사관정립의식개혁회'라는 역사연구단체를 이끌며 요즘도 동포들을 위한 무료 역사강연회를 열고 있는 그는 "둘째 손자의 이름을 '한(韓)', 손녀는 '동이(東夷)', 넷째 손자는 '국(國')이라고 지었다. 부디 우리 자손들이 동이배달한민족사를 잘 지키고 계승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헤럴드POP 기사전송 2007-03-15 16:37

“중국 3황5제ㆍ일본 천황계, 그 뿌리는 한민족” : 네이트 뉴스 (nate.com)

 

“중국 3황5제ㆍ일본 천황계, 그 뿌리는 한민족” : 네이트 뉴스

한눈에 보는 오늘 : 사회 - 뉴스 : 존 패어뱅크 하버드대 교수는 생전 “중국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더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는 말을 남겼다. 중국의 동북공정 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이 왜곡

news.nate.com

 

존 패어뱅크 하버드대 교수는 생전 “중국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더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는 말을 남겼다. 중국의 동북공정 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이 왜곡하고 날조한 동아시아 역사관을 서구학계가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을 폄하하는 중ㆍ일 학자들의 역사관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학계에서 그대로 수용돼 왔고, 오늘날 대 한반도 정책의 학문적 배경이 되고 있기도 하다.


오는 30일 세계적 석학들의 저서를 출간해온 뉴욕 캠브리아 출판사에서 중, 일 학자들의 왜곡된 역사관과 서구 학계의 무지를 깨우칠 수 있을 만한 한 권의 책이 나온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헌팅턴 커리어 칼리지의 이홍범 학장이 평생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영문으로 출간하는 ‘아시아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란 400쪽 분량의 저서가 바로 그 책이다.

‘태평천국과 동학혁명 사상의 세계사적 의미’라는 부제만 보면 동아시아의 근대사에 국한된 내용 같지만 “고대 한민족의 정신문명이 중국과 일본 문명의 원류”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주장을 담고 있다.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선 ‘대륙공정’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동경대 법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미국 동부의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국제관계와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이 박사는 이제 자신의 저서를 통해 자신이 밟아온 최고의 학풍을 스스로 백지화하는 셈이다.

이 학장은 “한민족의 역사는 ‘객관적 연구’란 미명 아래 고대에는 중국의 식민지로, 근대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비문명의 역사로 폄하되고 있고, 불행하게도 이런 역사관이 세계 학계의 정설로 통하는 실정”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학장은 책의 첫머리에서 영자역학 이론을 들어 “중, 일 학자들이 어떤 목적 의식을 가지고 연구할 때 연구대상의 실체는 사라진다”며 새로운 연구방법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객관적 연구방법론 자체가 주관적 오류를 범한다”며 “동양의 초합리적인 직관적 방법과 자연과학의 이론까지 병행하는 ‘총체적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학장은 자연과학의 실증적 방법으로 한민족의 역사는 5000년이 아니라 1만년이며, 4대 문명이 존재하기 전 이미 한민족의 고대문화가 있었다고 입증했다. 그리고 방사선 동위원소 추적결과, 9000여년 전 한민족 일부가 베링해를 건너 오레곤주 일대의 미국에 정착했으며, 오늘날에도 ‘아파치’(아버지), ‘가시내’(처녀), ‘지풍’(지붕) 등의 인디언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이어 다양한 고증을 통해 중국의 3황5제, 일본의 천황계가 모두 한민족 계열이며, 한(漢)문화는 다름아닌 한(韓)민족 문화였음을 입증한다. 청(淸) 태조 누르하치 또한 중국 역사문헌에서 `애신각라`(愛新覺羅), 즉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점을 들어 한민족의 후손임을 드러낸다.

이 학장은 이런 실증과 고증을 통해 한민족 정신문화가 중, 일 문화의 원류임을 입증한 뒤 근세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서구문명의 우월성 주장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분법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서구문명이 세계를 지배해왔으나 이제는 한민족의 홍익이념을 세계민주주의(Unicracy)로 승화시켜야 할 때”라고 제안한다. “태평천국이나 동학이념은 모두 고대 한민족의 천부(天符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유,불, 선이 한민족의 정신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천부사상이 동아시아 정신문명의 원류”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 만유를 포괄하는 홍익이념이야 말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라고 말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관이 ‘도전과 응전’이라면 이 학장의 역사관은 ‘자아투쟁’이다. 역사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은 정신과 인격이며 세계민주주의는 물질과 경제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정신과 인격을 더 중시한다는 것. 이런 역사관은 ‘H=PNT’라는 공식으로 집약된다. 여기에서 H는 역사(History), P는 인격(Personality), N은 비인격적 요소(Non-Personality), 즉 경제와 자원, 군사력 등을 말한다. “역사는 자아의 투쟁”이며 “인격이 몰락하면 역사도 몰락한다”는 것이 이 역사공식의 의미다. 이 학장은 “중국과 일본은 한민족 인물까지 자기네 민족으로 둔갑시켜 자아를 확장하려 애쓰는데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폐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 책이 미국 학계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이 학장은 자신의 저서가 “미국을 움직이는 아이비리그의 지원으로 출판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 학계 역시 대륙공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학장에 따르면 책의 서문을 쓴 힐러리 콘로이(Hilary Conroy)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는 원래 동경대학에서 동아시아학을 연구한 친일 학자였으나 최근에는 친한파로 자신의 학문적 궤도를 수정하고 있다고 한다. 한 때는 “일본이 갑오경장을 통해 한국에 근대화의 방법까지 숟가락으로 떠먹여주었으나 한국은 받아먹지 못했다”며 한민족을 우매한 나라로 취급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버드대학의 아키라 이리에(Akira Irie) 교수, 스탠포드대학의 피터 두스(Peter Duus) 교수 등 미국내 동아시아학계를 주도하는 다른 두 명의 학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이 박사의 관심거리다.

LA에서 다민족연합회의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이 박사는 세계민주주의론이 인연이 돼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뉴욕주)과 돈독한 교분을 지니고 있다. 또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감으로서 힐러리 의원을 적극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 오는 23일 베버리힐스에서 소수계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열리는 힐러리 의원의 선거자금 모금행사도 그가 주관하는 것이다. “힐러리 의원은 세계민주주의 이론에 공감하고 있고 무엇보다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그의 당선 가능성은 90%이상”으로 믿고 있다.

글=김영한 LA특파원(yhkim@heraldm.com)
사진=김윤수 기자(photo@goodmorningm.com)
 

 

 

입력2004-01-29 15:20:00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신동아 (donga.com)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신동아

 

shindonga.donga.com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 이래 중국에 살았다
  •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

 

 

 

2019.07.04  13:15:19

동북아고대역사학회, '중국 백두산공정' 요동·요서 제천유적이 핵심  - 투데이안 (todayan.com)

 

동북아고대역사학회, '중국 백두산공정' 요동·요서 제천유적이 핵심 - 투데이안

[취재=인터넷언론인연대 조장훈 대표기자, 편집=엄범희 기자] 중국의 백두산 공정은 '백두산의 중국화'를 통해 만주지역에 대한 한반도의 영향력을 차단하며, 더 나아가 조...

www.todayan.com

 

 

기사입력 2018.01.02 17:04 기자명민족NGO면 편집장

 

[민족NGO 새해 외침]겨레의 미래를 위한 바른 역사 복원을 바란다! - 한국NGO신문

[민족NGO전면기사] ‘역사가 없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제4산업혁명은 인문학이 그 바탕이고,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하여 인문학의 중심은 역사다. 바른 역사가 복원되어야 겨레의 미

www.ngonews.kr

 

[민족NGO전면기사] ‘역사가 없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제4산업혁명은 인문학이 그 바탕이고,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하여 인문학의 중심은 역사다.바른 역사가 복원되어야 겨레의 미래가 있다.

고대사학계는 ‘거짓말 잔치’ 그만하고 공개토론회에 나와라!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

▲ 열국의 실재 위치와 거짓 위치(『매국사학의 18가지 거짓말』)

 


간도를 역사 영토에 포함하라!(간도학회)

▲ 간도 지역도(간도학회)

교과서에 ‘1909년 간도협약에 의해 일제가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다’고 하면서도 고려, 조선 시대 이후의 모든 지도에서 간도가 우리 땅으로 표시된 지도는 없다. 그리고 헌법 제3조 영토조항에서도 우리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고 규정함으로써 간도를 우리 영토에서 제외하고 있다.
반기문 전 외교부장관이 국회에서 ‘국제법상 간도협약이 무효’라고 증언했는데도, 정부에서 아무런 후속 조치를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국제법상으로도 우리의 영토인 간도를 우리 스스로 버리고 있다.
국회는 개헌을 통해 ‘영토조항’을 개정하고, 정부는 역사 교과서에 ‘간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하는 지도’를 게재하라!

고조선 영토에 남한도 포함시켜라!(사단법인 한배달)

▲ 교과서의 고조선 영역 지도(모든 교과서 공통)


현재 모든 역사 교과서의 ‘고조선 세력범위’ 지도에서 남한지역은 빠져 있다. 그런데 왜 남한지역 학생들에게 고조선 역사를 가르치고, 단군을 국조라고 하는가?
남한지역, 심지어 제주도에서까지 출토된 비파형 동검과 북방식 고인돌로써 범위를 결정했다면, 같은 유적이 나오는 남한 지역과 북경 남쪽 지역까지는 고조선 세력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
새해에 나올 역사 교과서에서는 고조선 영토에 남한을 포함하고, 서쪽도 난하를 넘어 북경 동남쪽까지 연장되기를 기대한다.


윤봉길ㆍ이봉창 의사의 국적을 분명히 밝혀라!(동립운동유가족회)

▲ 이봉창·윤봉길 두 의사의 선서문

현재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분명히 우리나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임시정부 때부터 30년간 써오던 ‘대한민국’이라는 연호 대신 ‘단군기원(1948)’ ‘서력기원(1962)’을 공용연호로 한다는 법률을 제정했고, 교과서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시대’라는 말 대신 ‘일제시대’라고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법통으로도, 역사의 주체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삼일운동’, ‘독립운동’이라는 용어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대한민국 건국훈장까지 받은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일본인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용어다. ‘운동’이라고 하면 민족과 민족, 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의 사회적 움직임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국회와 정부가 합작하여 ‘민족투쟁’을 ‘운동’ 차원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연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고, 교과서의 ‘운동’ 용어를 고쳐 이봉창ㆍ윤봉길 두 의사의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복원하라!


겨레 얼 ‘홍익인간’의 의미를 바르게 정립하라!(사단법인 한배달 학술원)

▲ 사)한배달 주최, 홍익인간 바로 알고 실천하기 학술대회 장면(2017.11.21.)

교육부와 교과서에서는 개천절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절로, 홍익인간은 국조단군의 건국이념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전류 등 책에서도 같다. 그런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 공인된 역사 책에서는 개천은 환웅이 했고, 따라서 국조는 ‘신시를 세운 환웅’이며, 홍익인간은 환인이 삼위태백이라는 지형을 내려다보면서 한 말로서 단군과 관련된다는 내용은 없다.
그리고 홍익인간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한자의 뜻(語義)과도 다른 일본식 한자 뜻에 따른 해석으로서 일본인들이 우리의 겨레 얼을 말살시키기 위해 왜곡시킨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와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기록이나 역사적 상황과도 구체적으로 들어맞지 않는 해석이다.
‘홍익인간’은 현재 우리나라 교육기본법에서 교육 이념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민족정신이자 겨레의 얼이다. 그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11월 13일 사)한배달 학술대회에서 밝힌 바 있다. 나라와 학계에서는 올해 이를 바르게 정립하기 바란다.

고조선~발해의 후손들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라!(한뿌리역사세계모임)

▲ 만주지역 영토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현 교과서의 지도들

현재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의 후예인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 다른 나라이지만 우리 민족 국가로 취급하고, 발해도 우리 민족 국가에 포함시키면서도, 발해가 포함되지 않는 ‘후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3,300여 년 간 같은 겨레였던 만주 지역의 우리 백성들을 발해 멸망 후 ‘북방민족 또는 이민족(여진, 거란, 몽골)’ ‘다른 나라(요, 금, 원, 청)’사람으로 만들어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우리가 버리니까 중국이 주워가기 위해 동북공정을 추진하여 최근에는 『동북고대민족역사편년총서』(전5권)를 통해 부여, 고구려, 발해, 거란과 함께 백제 전기까지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이런 계기를 만든 것은 분명히 일제의 반도사관을 추종하는 한국고대 및 중세사학회와 정부 관련 기관의 책임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들 몰래 이처럼 우리 역사와 역사 영토를 중국에 넘겨주는 일을 해온 것이다. 새해에는 이런 적폐를 확실하게 청산하라!


세계 최고의 우리 고대 과학기술 교과서에 게재하라!(운룡도서관)


▲ 국보 다뉴세문경과 고조선 철검

1960년 논산 고인돌 무덤에서 발굴된 2,400년 전 고조선 시대의 유물인 다뉴세문경은 머리카락 굵기인 1mm 안에 0.3mm 굵기로 3개의 선을 그려 넣은 거푸집을 만들어 찍어낸 주조 청동거울로서 세계에서 가장 이를뿐 아니라 근래에 컴퓨터로 겨우 복원해낼 정도의 최첨단 나노기술이다.
서기전 6세기에 고조선에서 강철을 생산(북한 세죽리, 운성리 출토)하여 만든 무기와 도끼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중국은 서기전 3세기, 유럽은 1772년에 강철을 생산했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우리나라가 ‘철기 기술을 중국으로부터 배워왔다’고 거짓 기술을 하고 있다.
새해에는 이런 거짓말을 바로잡아, 과학기술면에서 세계 최고였던 우리의 저력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독도는 일본 땅’ 돕는 일본 앞잡이들을 처벌하라!(독도지킴이세계연합)

▲ 얼마 전까지의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 초기화면

일본은 정치권은 물론 교과서에서까지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령’하고 있다는데, 우리 외교부는 그저 “유감스럽다! 좌시하지 않겠다!” 등 알맹이 없는 미지근한 외교적 대응만 하고 있으니 일반 학자들은 물론 정부 산하기관들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동북공정 대응 및 독도 영유권 수호를 위해 창립된 동북아역사재단이 역사전쟁은 하지 않고 ‘역사화해’를 추구했고, 김 모 전 이사장은 ‘독도를 꼭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내용이 담긴 책을 저술했으며, 이 재단의 배 모 연구원을 비롯한 이 모 등 국내 여러 학자와 정치인들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이 한국에 반환해야 할 섬의 목록을 확정 지었는데, 거기에 독도가 빠져 있다’ ‘미국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했다’는 등 사실과 다른 일본 측 주장을 따라 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의 세금으로 엄연한 우리 땅을 포기하거나 국제분쟁에 휩쓸리게 만드는 ‘일본 우익의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민족 반역 행위로서 광복 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앞 정권들 때부터 싸인 적폐다.
정부는 일본에 대한 미지근한 자세를 버리고 지금 당장 철저한 논리로 대응하라. 그리고 독도 영유권 관련 연구 및 대응 실태를 재점검하여 반역 행위자들을 책임 추궁하고, 지원을 중단하라!


이제 ‘단군신화’라는 말을 교과서에서 없애라!(역사의병아카데미동지회)

▲ 『삼국유사』 기이편

교육부의 교과서 집필지침에 따라 교과서에서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야기에 대해 1990년 이전까지는 ‘단군신화’라고 하다가 신화가 아니라는 강력한 항의에 부딪쳐 ‘단군의 건국이야기’로 고쳐졌었는데, 2009년부터 다시 ‘단군신화’라고 기술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편」의 고기(古記) 소개 내용은 긴 역사를 압축한 ‘사화’이지 ‘신화’가 아니다. 신화적 요소가 있다면 환인, 환웅이지 단군은 아니므로 ‘신화’라고 하려면 ‘환인신화’나 ‘환웅신화’라고 해야지 ‘단군신화’라는 말은 옳지 않다.
‘단군신화’라는 말은 일제가 자신들보다 이른 시기의 단군 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조작한 말이므로 조선총독부의 잔재이면서 최근 일본에 경도된 뉴라이트의 득세와 함께 등장한 ‘오래된 적폐’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 정부에서는 이런 반역행위에 가까운 교과서 왜곡 적폐를 가장 먼저 청산해야 한다.


잃어버린 ‘민족의 이름과 생일’을 찾아라!(역의병대 동남아지대)

▲ 1998년 『중학 국사』의 민족명 표기

아이가 태어나서 출생신고를 하는 첫 요소가 ‘이름과 생일’이다.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자기 정체성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2008년도 이전 중ㆍ고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배달민족이라고도 불리는 한민족’이라는 민족의 이름이 게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2009년 이후 국정이나 검정의 모든 교과서에서 ‘역사교육의 목적이 민족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민족 정체성의 첫 번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의 이름은 없어지고 ‘우리 민족’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던 조선총독부의 망령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생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므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데도,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제작된 교과서 내용을 보면, “선사 시대에 민족 형성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하여 고조선 전에 민족이 형성된 듯이 기술하면서도, ‘신라의 삼국 통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실질적인 민족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다’고 하여 고려 이전에 형성된 듯이만 기술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생일 없는 민족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새해에는 우리 생일을 찾자!

 

 

 

 

기사입력 2018.01.22 14:10 기자명민족NGO면 편집장

[민족NGO 새해 외침]겨레의 미래를 위한 바른 역사 복원을 바란다!(2) < 민족NGO  - 한국NGO신문 (ngonews.kr)

한류의 뿌리를 찾아라!(사단법인 한배달)

▲ 너와 나를 우리로 만드는 ‘마을 제사와 민속놀이’(초 사회 5-1)

우리 겨레는 지난 반세기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한류로 세계를 열광시키는 엄청난 저력을 가진 민족이다. 그런데, 역사교육에서는 이런 민족 저력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토인비는 1972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21세기 세계가 하나 되어 돌아가는 날이 온다면 그 핵심 사상은 한국의 홍익인간 사상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게오르규는 1977 방한 시 “홍익인간 이념은 21세기 인류 구원 사상”이라고 말했다. 예언가 루돌프 슈타이너는 우리 민족을 “인류사회의 새 삶의 양식을 결정할 원형을 제시하는 성배의 민족”이라고 말했다.
세계 석학들은 극단적 양극화에 직면해 있는 인류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로 어우러지는’ 새 삶의 양식이며, 그것이 홍익인간 사상이라고 하여 우리 민족의 저력을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 민족 저력인 하나 됨의 사상은 민족 창세신화인 마고신화의 빛ㆍ소리ㆍ지수화풍(地水火風) 조화론에 그 원형이 있고, 단군사화와 천부경의 천지인(天地人) 하나 됨, 단합잔치로서의 제사(祭祀爲一)’와 같은 전통문화에서 확인되는 한류의 뿌리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창세신화로부터 기술하고, 우리 고유의 제도와 문화를 ‘하나 됨’의 의식과 연결시켜 가르침으로써 자부심을 고취시켜야 한다.


‘개천절과 국조(國祖)’ 역사 바로잡아라!(국사찾기협의회)
▲ 환웅을 국조로 모시는 단단학회 대시전의 삼황상(중앙 환웅, 우측 단군, 좌측 치우)

개천(開天)은 한자 뜻 그대로 ‘하늘을 열고 내려와 인간 세상에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는 의미이므로 개천한 사람이 바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국조(國祖)가 된다.
정부에서는 ‘개천절은 서기전 2333년, 단국 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에 국조(國祖)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된 날’이라고 한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 단군사화가 기록된 책에서는 ‘환웅이 하늘을 열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고 되어있다. 환웅이 ‘개천’한 국조이며, 최초의 나라 이름은 ‘신시’였다는 말이다. 대종교 책에서만 단군이 개천 및 건국’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광복 투쟁의 중심에 있던 대종교 관련자들이 민족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 ‘단군 개천 및 국조론’을 사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국조상 건립 운동을 하고 있는 마당에 누가 개천한 국조인지를 공인된 역사기록에 따라 바로잡아야 한다.


‘친일 적폐·매국 위증사학 청산 특별법’을 제정하라!(동학정신문화원)
▲ 반민특위 터(국민은행 명동점)

우리 역사학계가 지금까지도 일제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광복 직후에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한 데 있다. 광복 직후 반민특위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했으나 친일파들의 테러와 이승만의 조직적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2004년 국회에서 친일청산 특별법이 토의되었으나 ‘국민 화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여당 강경파 의원들의 주장으로 제정에 실패했다. 그러다 보니 친일ㆍ친군사혁명 성향의 역사 국정교과서는 폐지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1948년 건국절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정부에서는 ‘친일적폐 및 매국ㆍ위증사학 정리 특별법’을 제정하여, 오랜 친일 적폐를 청산하고 그들이 왜곡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확실한 계기를 만들기 바란다.


세계 최고의 우리글 바로 살려라!(훈민정음연구소)
▲ 훈민정음 서문(우)와 제자 원리(좌)

『훈민정음(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훈민정음’은 세계 유일의 음소(音素) 문자로서 우리말뿐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의 말과 우주 자연의 소리를 표현하는 데 어떤 민족의 글자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음성인식 문자 시대에 세계 글의 가장 강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한글’은 1933년 최초의 한글 맞춤법부터 훈민정음 28자 중 4개의 글자를 없애고, 초ㆍ중ㆍ종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조합형 글자를 완성형으로 만들었으며, 장단음과 합용병서 등 복합 문자를 폐기함으로써 훈민정음의 ‘모든 소리 표기’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세계 글로서의 한계에 봉착했다. 아직도 ‘1912년 조선총독부 오꾸라신뻬이에 의한 한글 말살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 정부에서는 훈민정음에서 없애버린 4글자와 조합형, 합용병서법을 살려 우리글이 명실상부한 세계의 글이 되도록 ‘일제에 의한 한글적폐’를 꼭 청산해주기 바란다.


기준ㆍ위만은 ‘고조선’ 법통에서 제외하라!(한당선생기념사업회)
▲ 삼국유사 기이편

현재의 모든 역사 교과서에서는 ‘고조선’을 단군왕검이 세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하면서 기준ㆍ위만을 고조선의 왕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대ㆍ식민 사학의 적폐이므로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왕검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다른 항으로 기술하여 같은 나라가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주나라 호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함에 따라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했지 왕위를 넘겨주었다고 하지 않았다. 중국의 『삼국지』「예전」 등 여러 사료에서는 ‘기자의 40여 세 후손인 조선후 준이 자칭 왕이라 칭했다’는 등 준왕을 ‘조선후’라고 칭하고 있다.

▲ 『중학국사』, 2008, 19쪽의 내용.

따라서 한ㆍ중 모든 역사기록에서 기자가 봉해진 ‘조선’은 단군왕검의 ‘고조선이 아니라 주나라의 조선현’으로서 준왕과 위만은 고조선 왕과 관계가 없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이들을 고조선의 왕으로 기술하는 것은 바로 한사군의 위치 논쟁으로도 연결되며, 동북공정 사학과 사대ㆍ식민 사학의 적폐를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 된다. 정부는 당장 공개토론회 등의 조치를 통해 이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 건국 연대 모순을 바로잡아라!(역사의병대)

▲ 초등학교 『사회 5-1』 6쪽 연표 일부

교육부의 지침과 모든 교과서에서 “우리 겨레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되었다.”고 하면서도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는 서기전 20~15세기에 시작되었고, 고조선은 그보다 앞선 서기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여 두 사건의 시기를 거꾸로 서술하고 있다.
교육부에서는 ‘그 이전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1974년 경기도 양수리의 고인돌 유적에서 서기전 2325년대, 1986년 전남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 유적에서 서기전 2630, 2365년대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왔으며, 고조선 영토인 홍산문화 지역에서는 서기전 30~25세기, 북한 지역에서도 서기전 40세기 초의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함으로써 만주지역 그 시대 유적들을 자기들 역사로 만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의 단군신화론을 우리가 도와주고 있다.
최소한 앞뒤 시대가 모순되는 내용은 바로잡고, 발굴된 실적들은 교과서에 반영시켜야 한다.


태극기와 붉은 악마의 상징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라!(치우학회)

▲ 태극기와 복희의 8괘

태호 복희는 중국 기록에 동이족 중에서도 풍이(風夷)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고, 『환단고기』에는 배달국 5대 임금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에서는 삼황오제 중 삼황의 첫째로 평가하고 있으나 우리는 우리 조상으로 보지 않으면서 태극기에는 그가 만든 8괘 중 건(乾), 곤(坤), 감(坎), 이(離) 4괘를 사용하고 있다.
군대를 창설하고 금속무기를 처음으로 만들어 백전백승의 전력으로 중원지역을 장악하여 한ㆍ중ㆍ일 삼국에서 전쟁의 신, 승리의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치우천왕은 중국 책에는 구리(九黎)의 천자, 동이(풍이)의 군장, 묘족(苗族)의 시조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환단고기』에는 배달국 14대 임금이라고 나오므로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 붉은 악마의 상징으로 선정되었다.

▲ 붉은악마 응원기의 치우천왕상

한ㆍ중 두 나라의 기록으로 볼 때 두 사람은 분명히 우리 조상이고, 태극기와 붉은 악마에 실제로 그 흔적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중화 삼조로 받드는 반면 우리 역사에서는 빠져 있어 우리가 중국 문화의 아류라고 오해를 하게 된다. 기록을 근거로 역사에 포함시켜야 중국의 중화 사관 극복과 단군이전 역사 복원에 기여할 것이다.


춘천 중도 유적을 제대로 보존하라!(춘천중도유적보존국민운동본부)
▲ 복토지침을 위반하고 복토하는 현장

중도유적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사유적지로서 2017년 12월 현재까지 하중도에서만 3,000여 유구와 9,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석기시대 무덤임 적석무덤을 포한한 160 여기의 무덤이 발굴되어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유물·유적이 밀집한 특수한 지역으로 원형 보존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는 발굴 초기에 문화재 위원회에서 원형보존 기준 평점 74.31점을 크게 초과한 91.77점이 나왔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하면서 레고 놀이터를 만드는 방향으로 밀어붙여 유적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 수혈에 쓰레기를 매운 채로 복토하는 현장

특히, 박근혜 정부 문화재청은 레고랜드로 인한 중도유적지의 훼손은 없을 것이라 호언하면서도 개발로 인해 유물·유적이 훼손될 것을 감안하여 시행되는 구제발굴을 허가하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였으며, 공사업체가 문화재 보존과 관련하여 복토 규정이나 훼손 방지 노력 등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신고를 받고도 이에 대한 감독과 조치를 소홀히 하고 있다.

▲ 작년 10월 25일, 복토현장을 확인 중인 운동본부 간부들

이런데도 강원도의회에서 고층 아파트 건축론이 나오는 등 부동산 투기적인 생각만 하고 있는 등 세계적 문화유산인 중도유적의 원형이 멸실될 위기에 처해있다. 정부에서는 지금이라도 공사를 중단시키고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엄청난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독립공원을 재정비하라!(역사의병대청년회)

▲ 독립공원 내 순국선열추념탑

독립협회는 친일파로 알려진 서재필, 안경수, 이완용, 윤치호 등이 주도하여 창립했으며, 독립문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준 것을 기념하는 문’으로, 현판은 매국노 이완용이 썼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항일 의병들을 ‘비적’이라고 보도하여 잡아넣도록 하는 등 우리나라를 일본의 속국으로 만드는 일에 앞장섰다.

▲ 서재필 동상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매국행위는 모두 감추고 이들이 마치 당시에 대단한 선각자들이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며, 현재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에는 이들이 세운 독립문과 독립신문을 발행한 서재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을 목숨 걸고 항일독립투쟁을 하다가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국한 광복 투쟁 선열들과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으로 오인하도록 만들어놓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나 친일파 후손들의 흉계일 수 있다.
정부는 교과서에서 부왜역적들의 매국 행적을 함께 기술하고, 내년 삼일의거 100주년을 기해 광복 투쟁 공원과 부왜역적 공원을 따로 만들어 친일 적폐를 말끔히 청산해야 할 것이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라는 용어, 이제는 청산하라!(김영윤/역사의병아카데미동지회)

▲ <비상교육 고등학교 『한국사』 , 12-3쪽 연표>

교육부에서 “선사 시대 문화발전 과정을 도구의 변천을 중심으로 파악”하도록 지침을 내림에 따라 모든 교과서에서 선사 시대를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로 구분하고, 그 뒤를 고조선-삼국의 건국-고려 등 국가의 이름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시대구분 기준에 일관성이 없다.

▲ 단군사화의 시대구분 비교표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삼국유사』 기이편에서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환인의 환국-환웅의 신시-단군왕검의 고조선’으로 선사시대 역사를 기술하고 있으며, 20세기 중반부터 사회학과 역사학에서는 인류사회가 ‘band society(무리사회)-tribe society(마을사회)-chiefdom society(고을나라 사회)-state society(국가사회)’로 발전되었다는 E.서비스의 ‘인류 사회 발전단계설’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윤내현 교수와 박정학 박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류사회 발전단계설과 비교하여 일목요연하게 도표로 정리해놓았다. ‘환국 또는 마을사회 시대의 사람들이 신석기라는 도구를 사용했다’고 기술하는 것이 일관성 있고, 논리적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시대구분이 일제 잔재라면 더더욱 빨리 청산해야 한다!
 
 
 

 

기사입력 2018.02.06 17:01 기자명민족NGO면 편집장

[민족NGO 새해 외침]겨레의 미래를 위한 바른 역사 복원을 바란다!(3)  - 한국NGO신문 (ngonews.kr)  

 
 

[민족NGO 새해 외침]겨레의 미래를 위한 바른 역사 복원을 바란다!(2) - 한국NGO신문

[민족NGO전면기사] ‘역사가 없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제4산업혁명은 인문학이 그 바탕이고,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하여 인문학의 중심은 역사다. 바른 역사가 복원되어야 겨레의 미

www.ngonews.kr

 

 

 

2017. 08.10(목) 06:00

 

 

한국타임즈

[인터뷰] 국토는 되찾았지만 역사는 광복 안돼…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만나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한국타임즈 하성호 기자] 광복 72주년을 맞아 기자는 지난 4일 서울

www.hktimes.kr

[인터뷰] 국토는 되찾았지만 역사는 광복 안돼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만나다.

 

 

 

발행일 : 2015-07-23 00:00

 

[박정학 칼럼] 우리 역사 무엇부터 복원할 것인가?

 

www.etnews.com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가 완전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조선총독부의 주장을 옮겨놓은 것이라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에서도 공청회를 여러 번 열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나는 이 지도를 만들고 이를 미 의회조사국에 보낸 사람들의 정신자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이 대학교수나 역사학을 전공한 박사로서 그 지도를 국내도 아닌 세계에 알리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배경이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아무래도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6월 8일 국회 학술세미나에서 ‘막가파식 매국행위’라는 이름을 붙여 발표했었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근거가 되는 사료를 확인하기도 어렵지 않는데, 학문적 절차를 아는 사람들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느냐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올바른 연구를 하면 중국이나 일본과 외교적으로 충돌이 생기므로 ‘외교부 공무원이 사무총장으로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의 목표 ‘역사화해’를 위해 일본이나 중국의 정치적 목적을 가진 주장에 동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실 상황이다. 이들에게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1차 사료, 2차 사료들을 제시하면서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무시해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배우지 못했다고 해도 확인은 할 수 있는 그 내용을 모를 수는 없다. 그들의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구체적인 역사를 복원하기 전에 먼저 역사가 무엇인지, 왜 역사를 찾으려고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얼이 빠져버린, 그래서 그들이 가르친 많은 국민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겨레의 얼’을 먼저 복원하여야 한다. 얼이 빠진 비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가지고서는 ‘6.25 사변 직후 세계 최빈국에서 반세기 만에 10대 경제대국이 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민족의 저력이 담긴 역사를 복원해지지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20세기에 들어오자마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35년 간 민족과 민족혼을 말살당하는 식민통치를 받으며 우리 겨레를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교육을 받았으며, 그런 목적으로 만든 역사 교육은 광복 70년이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복 후 얼마 되지 않아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사변을 겪으면서 국토와 나라가 더 이상 피폐해질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세계 최빈국의 상황에서 유엔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아 복구를 시작했으며, 그 잔재인 이념투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조선총독부와 그 계승자들의 이런 노력과 전란을 극복하고 1988년에 올림픽, 2002년에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2005년에는 국민총생산(GDP)이 세계 10위에 들었으며, 2010년에는 OECD의 G20 정상회의를 서울로 유치하였다. 이처럼 일본이나 그 추종세력들이 어쩔 수 없는, 우리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저력을 가진 민족이다. 20세기에 보여준 이런 겨레의 저력은 긴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겨레의 얼에 그 바탕이 있다. 그러니 과거에 그런 영광된 시기가 있었을 것이며, 그 저력은 우리가 알고 끄집어 낼 때 더 크게 힘을 발휘한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 앞으로 더 크게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사명을 가지는 것이 역사이식이다. 그러기 위해 역사를 바르게 복원하고, 가르치고, 배우려는 것이다.

사람은 몸(육체)과 마음(정신, 감성, 영성)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이 둘을 연결시켜서 생명활동을 하게 하는 ‘풀’이라는 에너지가 있다. 2002 월드컵 때 세계인을 놀라게 하고 하나의 세계적 흐름으로 만든 거리 응원의 ‘하나되는 신바람’ 에너지, 그리고 FTA의 무한경쟁 원리 때문에 1% 대 99%라는 극단적 양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2008년 금융대란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가 부도의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우리의 이런 신바람 기질은 한류가 되어 세계인을 열광케 하고 실의에서 빠져 나오는 힘이 되고 있다. 나는 그 한류의 뿌리가 겨레 얼이며, 겨레 얼은 경쟁과 투쟁이 아닌 ‘어울림’이라는 민족정신과 신바람에너지가 합쳐진 것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저력이 나오는 샘이라고 본다. 따라서 우리 역사는 그것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이런 내용을 배우지 못했다. 없어서가 아니라 교과서를 만들고 역사를 가르친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는 역사철학과 보려는 의지(사관)가 없으니 보지 못했을 뿐이다. 조선총독부와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을 따라서 고대조선을 ‘신화’로 만들어놓고, 북쪽은 중국,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로써 우리 민족이 출발했으며 민족의 활동범위도 한반도로 줄여서 세계에 알리고 있는 제도권 역사학자들은 겨레 얼이 빠져 있으니 우리 겨레의 역사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외형적 사실(史實)뿐 아니라 밑바닥에 약동하는 겨레의 저력이 포함된 심층의 역사로 복원되어야 한다. 우리 겨레의 저력이 포함된 역사는 많다. 지금의 교과서나 역사학에는 없는 민족 신화인 창세신화에 그 원형이 있고, 홍익인간이라고 하는 민족정신이 있으며, 옛날 영고, 동맹 등 나라에서 해마다 1~2회씩 거행해온 제천행사와 역사 속의 수많은 우리 겨레 고유 제도와 생활 문화 속에 살아 있다. 세계 보편역사법칙을 수용하면서 우리 겨레의 몸과 마음과 풀이 담긴 역사, 특히 민족의 저력을 스스로 깨치게 하는 역사로 복원하는 것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필자소개/박정학
(사)한배달 창립 후 치우학회를 창립하고 국사찾기협의회 운영위원장과 우리역사복원연대 대표로 재직 중이다. 한민족의 형성과 얼에 대한 연구 등 단군과 홍익인간에 대한 역사 연구를 통해 민족의역사와 문화, 그 뿌리인 정신을 연구하고 바로세우는 운동을 30년간 해오고 있다.

 

 

차준호기자 입력 2015-08-14 03:00업데이트 2015-08-14 03:00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의 남만주 역사를 꿰뚫고 있는 복기대 교수는 13일 “일본 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된 한국 고대사를 올바르게 바로잡는 역사 바로 세우기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우리는 일본 역사학자들이 ‘한반도 지배 논리’를 위해 조작한 한국 고대사를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민족의 자긍심을 찾기 위해 새로운 역사 인식이 필요합니다.”

13일 이같이 말한 인하대 대학원 복기대 교수(52·융합고고학)는 일제 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되고 달라진 한국의 고대사를 바로잡기 위한 연구를 펼치고 있다.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평양연구팀을 이끌고 있는 그는 고대 평양의 진짜 위치를 찾는 연구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진행 중이다.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한반도 지배 논리’를 만들기 위해 한국 고대사를 왜곡한 사실을 정부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복 교수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성(城)과 촌(村)의 수를 새롭게 밝혀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국사나 역사교육을 통해 광개토대왕이 총 64성과 1400촌을 점령했다고 배웠다. 그러나 복 교수가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정밀 분석해 총 ‘128성 2400촌’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복 교수는 “비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광개토대왕이 몇 년도에 몇 개 성과 촌, 부락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모두 합하면 128성 2400촌인데 지금까지 일본 학자에 의해 전해진 역사를 그대로 인용해 가르쳤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 중 낙랑군의 위치도 지금의 평양 인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사서인 ‘사기색은(史記索隱)’과 ‘통전(通典)’을 보면 한나라의 기록을 근거로 갈석산에 만리장성이 시작되었고 이곳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밖에도 다양한 중국 고대 문헌기록에서 낙랑군의 위치를 갈석산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일항쟁기 조선총독부는 일본 학자들을 동원해 한국 고대사를 조작했습니다. 한국 고대사를 한반도에서만 이뤄진 역사로 규정하는 이른바 ‘반도사관’에 초점을 맞춘 것이죠.” 

복 교수는 새로운 자료를 찾는 연구보다 기존의 자료를 꼼꼼히 분석하고 현장을 찾아가 정답을 찾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우리 전통 사학을 계승 발전시킨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윤내현 교수의 연구 방식을 지향한다.

복 교수는 고구려 후기 도읍지인 평양의 진짜 위치를 찾는 연구에도 몰두하고 있다. 그는 “조선 성종 때 문신인 최부(崔溥)가 저술한 ‘표해록(漂海錄)’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遼寧) 성 랴오양(遼陽) 일대가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평양의 위치와 관련한 문제는 2013년 12월 국회 동북아역사특별위원회 토론회에서 제기됐다. 이듬해 특위에서 평양 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교육부 산하 한국학진흥사업단의 예산 지원이 이뤄져 연구가 시작됐다.

최근에도 국회 차원에서 일본의 한국 고대사 왜곡의 문제점을 인식한 토론회가 열렸다.

복 교수는 “한국사 연구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인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는 그동안 한반도 평양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새로운 기록이 많이 발견됐다”며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 우리 민족이 새로운 역사 인식을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

 

 

 

2013.11.04  

'한민족의 뿌리' 그 위대한 역사를 고찰한다 - 인천일보 (incheonilbo.com)

 

'한민족의 뿌리' 그 위대한 역사를 고찰한다 - 인천일보

대학연구소·융합고고학전공, 3년간 7억5000만원 정부지원IT 접목·실증작업 기반 마련 … 동북아史 관계 재조명 기대인하대 고조선연구소와 융합고고학전공이 교육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국

www.incheonilbo.com

인하대, 역사학계 최초 한국상고사 DB구축사업 선정

 

 
 

 

 

등록 2010-01-14 14:25수정 2012-09-04 15:24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

[한민족의 시원, 만주]<제1강>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

환인 한나라, 환웅 배달, 고조선, 고구려 터전
신라는 정통성 없고 조선은 사대로 역사 ‘망각’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터전이었고,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평화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이사장 법륜스님)은 해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만주 역사기행’ 나서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역사특강을 개최한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다섯 차례 열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는 동북아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갔다.법륜 스님 등 다섯 분의 특강을 11 차례로 나누어 영상과 함께 싣는다. 우리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다잡고 역사적 지평을 넓히는 길안내다. (편집자)
 
우리 민족사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에 탄생했다. 그럼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한다. 임시정부라는 것은 본 정부가 따로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임시로 정부를 세웠다는 의미다.현재 우리나라 국명은 대한민국이다. 그럼 이 국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왔다. 왕이 주인인 나라냐, 민이 주인인 나라냐에 따라 왕정과 공화정으로 나뉜다. 대한제국이라는 것은 왕이 주인인 국가다. 고종황제 때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이유는 이렇다.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신문은 어디로부터 독립하자고 세운 문이고, 단체이고, 신문일까? 많은 사람이 일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럼 조선은 언제부터 청나라에 예속되었을까?
 
대한민국과 대한제국
법륜스님이 좋은벗들이 지난해 10월16일 서울 서초구 평화재단에서 연 역사특강 ‘청년, 역사를 만나다’에서 강연하고 있다. 영상 캡쳐. 박종찬 기자
 
일제의 식민지배는 일본이 우리를 직할로 지배한 것이다. 그 전에 조선은 청나라와 싸워서 졌다.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 인조는 1636년 청나라 장군 용골대가 이끄는 대규모 병력이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전하다 항복해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이는 ‘삼배구도두’의 예를 갖추었다.<편집자>) 그래서 우리나라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내치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외교권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완전한 독립 국가가 아니었다.그렇기 때문에 개화파들이 독립협회 등을 만들어 청나라로부터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런 움직임과 맞물려 ‘우리가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나라’라는 의미로 독립 연호를 썼다. 황제국가인 중국만 연호를 쓰는데,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은 독립된 연호를 쓰지 못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이름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
대한제국의 모체는 조선왕조다. 조선왕국은 어디가 모체일까? 고려왕국이 모체다. 조선왕국이란 것은 빈 땅에 세운 것도 아니고, 원시적인 사회에 세운 것도 아니다. 나라가 원래 있었는데 주인만 바뀌었다. 왕만 바뀌었다. 왕의 성이 바뀌었다 해서 역성혁명이라고 한다. 조선과 고려는 결국 같은 나라다. 그러면 고려왕국은 어디를 계승했느냐? 고려 태조 왕건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고려로 지었다.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은 자신을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그게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와 있다. 해모수는 누구인가? 부여를 세운 사람이다. 고주몽이 바로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엔 연대가 너무 멀다. 20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고주몽은 말은 자신이 부여왕족이라고 선언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부여를 세운 해모수는 자신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부여에서 단군 조선으로 이어진다.
 
고조선, 배달 나라, 한나라
단군조선은 환웅을 계승했고,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민족의 기원이 된 ‘배달나라’다. 인기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배우 배용준은 우리 상고사의 주인공인 ‘환웅’을 연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가 단군조선을 무슨 조선이라고 하나? 고조선이라고 한다. 나라 이름이 원래 고조선이 아니라 조선인데 후기에 조선이 또 생겼으니 구분하기 위해 옛날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른 것이다. 고조선의 통치자를 단군이라고 불렀으니 단군조선이라고도 한다. 단군은 자신을 환웅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환웅의 후예들이다. 환웅이 세운 나라가 배달 나라다. 우리 민족을 ‘배달겨레’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했다. 그럼 환웅은 누구의 아들인가? 환인의 아들이라고 했다. 환인이 더 근원이다. 환인이 세운 나라, 환인이 다스린 나라는 한나라라고 한다.대한민국의 ‘한’은 한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럼 환인의 한나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그것은 없다. 그러니까 민족사가 한나라보다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유추할 수는 있지만, 여기까지다. 구전이나 문서로 전해지는 것이거나 어떤 쪽에도 더 이상 얘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 민족사는 한나라가 시작이다.
 
열국, 또는 부여시대
다시 한번 우리의 민족사를 되풀이해본다면 제일 먼저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조선 나라, 해모수의 부여, 고주몽의 고구려, 왕건의 고려, 이성계의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우리 민족사에 성립한 나라를 쭉 내려오면 빠진 나라들이 많다. 예, 맥, 신라, 백제, 가야, 옥저 등이다. 이런 나라들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해야 할까?고조선의 말기에 가면 여러 제후국이 세워진다. 작은 부족들이 다 독립해서 왕의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이런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하고 우리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열국시대라고 한다. 열국시대의 맹주, 다시 말하면 중심은 부여였다. 부여시대가 열국시대다. 부여가 중심이지만, 주위에 작은 나라들이 거의 독립하다시피 포진했다. 옥저, 예, 동예 등이 있었고, 옥저에도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 하는 식으로 여러 개가 있다. 또 맥이라는 나라도 있었고 남쪽에는 한이 있었다. 고조선이 망하자 후손들이 이동해 한강 이남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게 한이다. 한도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5국 시대
만주 일대에서 고조선 문화와 연관되는 유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다. 중국 심양 요녕성박물관의 ‘요하문명전’에 전시된 청동검. 청동검은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고조선 문화의 상징적 유물이다. 조현 기자
 
열국시대의 중심 나라인 부여 말기에 가면 부여를 계승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원부여족이 있었고, 거기서 갈라진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부여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갈라지기 전 부여를 원부여라고 하고 갈라진 뒤 부여를 동부여라고 한다. 이처럼 동부여가 있고 고구려가 있고 백제가 있었다. 그리고 한강 이남 아래 삼한 가운데 마한은 백제로 흡수되었고, 진한과 변한에서 신라가 나오고, 가야가 일어났다.열국시대의 많은 나라는 결국 동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5국 시대로 정리가 되었다. 5국 시대에는 고조선과 부여로 이어진 역사의 주류, 정통성을 고구려가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부여와 백제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세 나라가 심한 마찰을 빚었다. 정통성 경쟁에 아예 끼지 않았던 가야나 신라와는 마찰이 없었다. 그래서 신라가 위험에 처할 때 고구려가 도와주기도 했다.
 
3국 시대, 그리고 발해가 빠진 통일신라시대
5국 시대의 후기에 가면 동부여는 고구려에 합병이 되고, 가야는 신라에 합병이 돼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열렸다. 삼국시대 말기에 신라가 강성해지고, 중국이 천하를 통일해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결국 나당연합군에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했다.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 이남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통일신라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즉시 발해는 우리의 역사에서 제외된다. 발해가 없다고 보면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 있으나 발해를 놓고 삼국통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국 요녕성 환인시 북동쪽에 있는 오녀산성.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이 첫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성터와 병영터, 우물터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 조현 기자
 
남북국시대 또는 2국 시대
고구려의 정통성은 발해로 갔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처음에 독립적 연호를 썼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 연호를 없앴다. 그래서 민족사 정통의 자격이 없다. 발해는 끝까지 연호를 쓰고 독립국가로서 위상을 가졌다. 발해 사람들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임했다. 인구 구성으로 보면 고구려인보다 말갈인이 많다. 그렇다고 말갈의 나라라고 말할 수 없다. 로마는 로마인들의 국가인데 구성원으로 보면 로마인보다 노예가 더 많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옛날엔 왕만 고구려 사람이면 그 나라를 고구려라고 보았다.발해는 명백히 고구려 후예들이 세운 나라다. 고구려를 부흥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 영토보다 2배나 더 커졌다. 말갈족이 사는 북쪽으로 영토를 2배나 넓혔으니, 인구구성상 말갈족의 비중이 높아진 것뿐이다. 정리하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을 하고, 대동강 이남에는 신라가 이북에는 발해가 들어섰기 때문에 민족사로 볼 때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 2국 시대, 양국시대라고 본다. 3국 시대에서 2국 시대로 갔다고 봐야 한다.
 
고려의 ‘다물사상’ 계승
신라와 발해가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는데 그게 고려다. 고려는 영토나 인구 면에서 대부분 신라를 계승했다. 그러나 고려가 ‘우리는 신라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 사람들이 투철한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를 계승했다고 말하지 않았다.신라는 누구를 계승했을까? 구전이나 문서로 신라는 누구를 계승했다는 게 없다. 고려와 고구려 사이의 나라가 신라와 발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면 신라와 발해를 모두 계승한 것이다. 신라만 계승해도 그렇고, 발해만 계승했다고 해도 민족사의 절름발이다. 고려를 세운 사람들이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사의 뿌리가 유지된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고려는 건국 초기 ‘고구려의 옛 땅을 다 회복하겠다’는 큰 원을 세웠다. 고조선 말기에 중국 한 무제가 침입해 땅을 뺏겼다. 고구려는 나라를 세우자마자 고토회복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조선의 옛 땅을 우리가 되찾겠다’는 선언이었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땅을 되찾은 것인가? 고구려의 전쟁은 침공이나 침략전쟁이 아니다. 남의 나라를 침공해서 땅을 뺏은 게 아니라 고조선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고구려의 ‘다물 사상’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다물사상을 계승했다.
 
서희의 강동 6주 담판이 의미하는 것
서희와 소손녕의 ‘강동6주’ 담판.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우리 땅을 다 내놔라”고 반박해 새치 혀로 강동 6주를 얻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자 고려는 북진정책을 펴서 대동강 유역에서 압록강으로 진출했다. 발해는 거란족에 의해 멸망했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이 다 거란 땅이라고 생각했으니 고려의 북진은 자기 땅을 침공한 것으로 봤다. 이를 빌미로 거란이 침공해오자 서희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새 치 혀로 강동 6주를 인정받았다. 거란이 “강동 6주는 발해의 땅이다. 우리가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우리 땅”이라고 하니까 서희가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며 “고구려의 옛 땅이 다 고려의 땅이니까 강동 6주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우리 땅을 다 내놔라”고 반박했다.거란 입장에선 혹 때려다 혹 붙인 꼴이 돼버린 것이다. 결국, 영토문제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하고 요와 고려가 국교를 맺었다. 그것으로 영토분쟁은 일단락됐다. 만약,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고 했으면 요나라 땅을 침공한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럼 싸워서 이기든지 지든지,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고려의 역사의식과 조선의 자발적 사대주의
고려가 싸우지 않고도 외교술로 강동 6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올바른 역사관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라 사람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없었다. 광활한 대륙이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는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 땅을 준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감격했다. 역사의식의 부재다. 신라는 문화적으로 뛰어나고 부유했지만 역사관이 부족해 이런 문제를 초래했다.반면 고려는 옛 땅을 회복하려 했지만, 당시 국제 정세가 너무 좋지 않았다. 거란족도 강했지만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더 강성했다. 요나라나 금나라만 해도 고려와 형제의 예를 맺고 화친했는데, 원나라는 너무 세서 군신의 예를 맺자고 하니까 고려 사람들이 인정을 할 수 없었다. 고구려 시절 복속된 민족이 세력이 강성해져 거꾸로 군신관계를 맺자고 하니까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고려는 투철한 민족의식, 역사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강대국인 원나라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이렇게 강했던 민족의식이 언제부터 약소국 비슷하게 전환되었을까? 조선시대에 오면서 세력도 마음도 모두 약소국가로 전락했다. 즉 자발적 사대를 취했다. 그러면서 역사왜곡 현상이 빚어졌다. 오늘 우리가 역사를 다시 정립하자는 것은 우리 민족사를 상고사부터 다시 되돌아 보면서 웅대했던 역사의식을 되찾자는 것이다. 법륜 스님, 정리/박종찬기자 pjc@hani.co.kr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윤내현 교수  | 기사입력 2008/03/31 [00:29]

한국 고대사 체계 확실히 바꿔야 한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한국 고대사 체계 확실히 바꿔야 한다

1.고구려는한국사에포함될수있는가?중국은고구려사가자신들의역사에포함되어야한다고주장하고있다.이러한주장은중국정부의재정지원을받으며오랜기

www.pluskorea.net

 

동북공정은 만주와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중국 나름의 정치적 포석

 

1.고구려는 한국사에 포함될 수 있는가?
 
중국은 고구려사가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중국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연구결과이다. 이 사업은 “동북공정”이라는 약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彊歷史與現象系列硏究工程)이다.중국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 많은 연구결과를 축적하여 놓았으므로 굳이 한국의 움직임에 반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북공정은 그 명칭이 보여 주듯이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는 학술사업일 뿐만 아니라 동북지역 즉 만주와 한반도의 매래에 대한 중국 나름의 정치적 포석이기도 한 것이다.
 
그 가운데 고구려 역사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중국은 만주와 그 지역 거주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연고권을 역사를 통해 확고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그러한 중국인들의 연고권 주장이 만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고구려가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고구려는 오늘날 중국의 영토인 만주에서 건국되었으며 대부분의 기간 그중심부인 도읍은 만주에 있었으므로 중국의 동북 변방에 있었던 소수민족의 정권이며, 둘째는 한민족은 그 활동영역이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만주에서 활동한 고구려인들이 한민족에 포함될 수는 없으며 셋째는 고구려는 서한 무제가 설치한 중국의 행정구역인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현도군에서 건국된 나라임으로 중국을 계승한 나라이다. 이 외에도 조공과 책봉 등 몇 가지를 더 들고 있지만 이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구려는 한민족의 영역인 한반도 밖의 만주에서 건국되었고 그 중심부도 오랜 기간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은 한민족이 아니며 고구려는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중국역사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불행하게도 한국의 고대사 체계는 이러한 중국인들의 주장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지난날 한국 학계통설을 따르면 한민족은 한반도와 만주를 통합한 적이 없다. 

 


그리고 한국사개설서에는 고구려는 현도군 지역에서 건국되었다고 서술되어있다. 근래에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청천강 이남지역으로 국한해서 보는 견해가 지난날 우리 학계의 통설이었고 지금도그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고조선의 영토가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만주의 거주민을 한민족에 포함시킬 근거가없다. 민족은 지역을 단위로 한 정치공동체, 문화 공동체로서 일정한 지역의 거주민이 자신들이 구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집단귀속의식을 가짐으로써 형성되는 것인데 한반도와 만주가 하나로 통합된 적이 없다면 만주 지역 거주민이 한민족에 속한다는 집단귀속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따라서 고구려가 한민족의 나라라는 분명한 논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고구려 건국 이전에 한반도와 만주는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이루어 그거주민은 이미 하나의 민족으로서 한민족을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고구려는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된 것이 아니라 한민족이 건국한 단국조선을 계승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고대사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한다.

 

 


2.한국 고대사 체계에 문제가 있다
 
한국고대사 체계에는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방치해놓고 있다. 현재 통용되는 우리의 고대사 체계를 보자.오늘날 통용되는 한국사 개설서에는 고대사 처계가 고조선ㅡ>준왕ㅡ>위만조선>한사군>ㅡ>여러나라ㅡ>삼국시대ㅡ>남북국시대 등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개설서들은 삼국시대부터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그 이전 고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 여러나라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는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그 이전의 역사는 불확실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신화시대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그런데 고조선의 준왕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사료에 의하면 그는 중국 망명객인 기자의 후손이다 중국 혈통인 것이다.
 
한민족이 세운 단군조선이 어떤 연유로 중국 망명객의 후손에게 정권이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준왕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준왕을 한민족의 혈통으로 잘못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준왕 다음에 등장하는 위만도 중국의 망명객이다. 중국의 서한 초에 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은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건국했다고 위략에 기록되어 있다. 한국 학계에는 위만은 중국에 거주하던 조선계통 사람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분명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를 중국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위만조선 다음에 등장하는 한사군은 서한의 행정구역이다. 서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네 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영토가 된 것이다. 한국사 개설서에는 임진강 유역까지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위만조선의 뒤를 이어 여러나라가 등장한다. 그들이 위치한 지역은 대체로 북만주에 부여, 연해주에 읍루, 남만주와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 함경도에 동옥저, 강원도에 동예, 한반도 남부에 삼한 등으로 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고구려가 북방을 통합하고 한반도 남쪽에서 고대사 체계를 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단군조선은 어떤 연유로 중국 망명객 기자의 후손인 준왕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을까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는 아닐까 실제로 이었다 해도 그것을 국가 수준의 사회로 볼 수 있을까.둘째, 준왕은 중국 혈통 인물이고 위만은 중국 망명객이며 한사군은 서한의 행정구역이었다면 단군조선이 끝난 후 한민족은 중국인들의 지배를 받다가 중국에 통합되었다는 것이 된다. 만약 단군조선의 존재가 의심스럽다면 한국사는 중국인들의 지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셋째 한사군은 서한의 행정구역이었으므로 그 지역에서 한사군의 뒤를 이어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등의 여러 나라가 일어났다면 중국인들의 시각에서는 그 나라는 중국을 계승한 나라로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리고 만약 단군조선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 했더라도 좁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정치집단이었다면 한민족은 이 시기까지도 민족을 형성했다고 볼 수 없지 않은가.중국인들은 지금 이러한 논리로 만주와 연해주에 있었던 부여 고구려, 읍루, 발해 등은 한국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 통용 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중국인들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준왕의 정권이나 위만조선 및 한사군은 한국사의 주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이 위치했던 지역은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다. 이들의 흥망성쇠는 단군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지금의 요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요동과 한반도 지역에는 단군조선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가 중앙 권력의 약화로 지방의 정치세력들이 독립하여 부여, 읍루 고구려, 최씨낙랑, 동옥저 동예 삼한 등의 나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나라는 한민족이 세운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로서 한민족의 국가인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사 개설서들은 이를 바로잡지 않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한민족은 주군을 빼앗아 중국계통 사람의 지배를 받거나 한만족의 영토가 중국에 통합된 적이 없는 것이다. 기자일족의 망명 위만조선의 건국 한사군 설치 등으로 인하여 단군조선 영토의 서부 변경에 다소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한국 고대서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여러나라를 거쳐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 등으로 끊어짐 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단군조선 말기에 서부 변경인 난하(灤河) 유역에서는 몇 차례의 정변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에서 망명 온 기자 일족에 의한 정권 수립,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에 의한 위만조선의 건국, 위만조선의 멸망과 한사군(漢四郡)의 설치 등이다.서기 전 1100년경에는 기자 일족이 고조선의 서부변경으로 망명해 왔다. 기자는 원래중국 상(商)왕실의 후예로서 기(箕)라는 땅에 봉해졌던 자(子)라는 작위를 가진 제후였다. 그런데 상나라가 주족(周族)에 의해 멸망되자 기자는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난하유역에 정착하였다. 기자일족은 망명정권을 세우고 고조선의 거수국이 되었다그 후 서한 초인 서기 전 195년에는 위만이 서한에서 기자국으로 망명해 왔다.
 
위만은 준왕에게 국경 지대에 살면서 서한의 침략을 방어하겠다고 하므로 준왕은 그를 믿고 박사(博士)로 삼아 국경인 난하 유역에 살도록 하였다. 위만은 그곳에서 토착인들과 주국 망명인들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는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서한이 쳐들어오니 궁궐을 지키겠다고 거짓 보고를 하고는 무리를 이끌고 들어가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웠다.준왕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은 서한에 외신(外臣)이 되겠다고 약속하고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당시 서한은 건국 초로서 국력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였으므로 위만을 이용하여 고조선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고조선은 철기가 보급된 이후 종래의 경제구조와 사회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위만은 그 세력을 지금의 대릉하(大凌河) 유역까지 확장하였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동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서한은 무제 때에 이르러 국력이 강성하여졌으므로 더 이상 위만을 이용하여 고조선을 견제할 필요가 없었다. 서한 무제는 서기 전 108년에 위만조선은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지역에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등의 세 군(郡)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여세를 몰아 고조선 영토를 침략하여 지금의 요하(潦河)까지 차지한 후 앞의 세 군보다 1년 늦게 서기 전 107년에 요하 서부유역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이렇게 설치된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한사군은 서기 전 82년에 진번과 임둔은 폐지되고 낙랑과 현도 두 개의 군만 남았다가 현도군은 오래지 않아 서기 전 75년에 고구려와 토착세력의 공격을 받아 난하 상류유역으로 이동하였고, 서기 106년에는 요동군(潦東郡)지역으로 이동하여 그 명칭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서기 206년에는 그 지역을 지배하던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나 서기전 313~315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낙랑군, 대방군, 현도성 등이 모두 격파되어 한사군은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난하 유역까지를 차지함으로써 고조선의 고토를 완전히 수복하였다.기자국, 위만조선, 한사군은 서로 연결된 사건으로서 지금의 난하 유역을 기점으로 하여 요서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즉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이 기간에도 고조선은 지금의 요하 동쪽에 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 개설서들은 기자의 후손인 준왕을 고조선의 왕으로 서술함으로써 위만이 고조선의 정권을 빼앗았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위만의 정권 수립과 동시에 고조선은 멸망하였고 중국세력인 위만조선과 한사군은 고조선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3.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계승했다
 
단군조선은 많은 거수국을 거느린 국가였다. 『시경(詩經)』 「한혁(韓奕)」 편과 『제왕운기』는 고조선은 많은 소국(거수국(渠帥國)을 거느린 국가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고대국가가 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고조선이 건국되기 전 각 지역에는 마을연맹체들이 있었고 이들은 종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이 건국된 후 이들은 고조선의 지역 정치집단으로서 거수국이라 불리어졌고 그 우두머리를 거수(渠帥)라 하였다. 거수국은 대부분은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부터 각 지역에 있었던 마을연맹체들이 성장한 것이었지만 고조선이 건국된 후 필요에 따라 새로 건설된 것도 있었다.당시에는 통치조직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중앙에서 모든 백성을 직접 지배하지 못하고 각 지역 마을연맹체의 우두머리를 거수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봉지를 다스리도록 하고 중앙의 단군은 거수들만을 다스렸다.
 
따라서 거수들 사이는 신분이 대등하였으나 모두가 단군을 그들 공동의 통치자로 받들면서 명령에 복종하고 동일한 법을 따르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일정한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에는 고조선과 동시대에 고조선의 영토 안에 위치했던 작은 나라 또는 종족들의 명칭이 보인다. 이들은 고조선에 속해 있던 거수국이었던 것이다. 같은 지역에 독립국이 겹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들면 부여(夫餘), 고죽(孤竹), 고구려(高句麗), 예(濊), 맥(貊), 추(追), 기자국(箕子國), 진번(眞番),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 숙신(肅愼), 청구(靑丘), 양이(良夷), 양주(楊洲), 발(發), 유(兪), 옥저(沃沮), 진(辰), 비류(沸流), 행인(荇人), 개마(蓋馬), 구다(句茶), 조나(藻那), 주나(侏那), 한(韓, 三韓) 등이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에 속해 있던 거수국 가운데 하나였다.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거수국이 많을 것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을 것이다.서기 전 1세기에 한반도와 만주에는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다. 북만주 지역에 동부여가 있었고 그 동쪽 연해주 지역에 읍루, 평안북도와 지금의 요동을 포함한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 함경남북도 지역에 동옥저, 강원도 지역에 동예, 대동강 유역에 최씨낙랑, 한반도남부에 한(삼한) 등이 그것이다.
 
한은 신라, 백제, 가야 등이다. 동부여는 서기 전 59년 고구려는 서기 전 37년, 신라는 서기 전 57년, 백제는 서기 전 18년 이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찍이 건국된 동부여, 고구려, 신라는 모두 건국 연대가 서기 전 1세기 중엽이다. 이 나라들이 독립했다는 것은 이 시기에 한반도와 만주를 그 영토로 아우르고 있던 단군조선이 붕괴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들 여러 나라는 모두 단군조선 영토 안에서 건국되었음도 알게 해준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나라들인 것이다. 고구려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지만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종족 즉 거수국이었는데 단군조선이 중앙통치력을 잃게 되자 독립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한사군의 현도군에서 성장한 나라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태어난 한민족의 국가인 것이다. 

 

4.한국 고대사 체계 바꿔야 한다
 
현재 통용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크게 잘못되어 있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중국 기자의 후손인 준왕과 중국 망명객인 위만이 한민족을 통치했고 위만조선의 뒤를 이어 서한의 행정구역인 한사군(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이 설치됨으로써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를 이어 부여, 고구려, 읍루, 동옥저, 동예, 한(삼한) 등이 건국되었는데 고구려는 한사군의 현도군 지역에서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 고대사 체계가 옳다면 고대에 한민족은 오랜 기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된다. 고구려도 중국의 행정구역인 현도군에서 건국되었음으로 중국의 역사를 계승했다는 논리를 펼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의 고대 문헌에 의하면 이러한 한국 고대사 체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준왕 정권과 위만조선 및 한사국은 한국사의 주류가 아니었다.고구려가 한국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사실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고구려가 건국된 요동지역이 고구려보다 앞선 단군조선시대에 이미 한민족의 영토에 속해 있어야 한다. 즉 단군조선의 강역이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그래야만 만주와 한반도의 거주민들이 하나의 국가에 속하여 동일한 정치공동체, 문화공동체를 형성하고 집단귀속의식을 갖게 되어 이 지역 거주민 모두가 한민족이 되는 것이다. 셋째, 고구려는 단군조선이 붕괴되면서 단군조선의 백성들이 세운 나라여야 한다. 그래야만 고구려는 한민족의 국가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고대 문헌은 이러한 점을 분명히 해준다. 단군조선은 북경에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를 서쪽 경계로 하여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을 그 영토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요서 서부 난하 유역에 기자국(준왕정권)이 서고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이 위만조선을 건국하여 그 영토를 대릉하까지 확장함에 따라 단군조선의 서부 영토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다시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하 유역까지 차지하여 난하와 요하 사이에 한사군을 설치함에 따라 단군조선의 서쪽 국경은 지금의 요하가 되었다.요약하면 기자국(기자국),위만조선, 한사군 등은 지금의 요서 지역 즉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교체되는 기간에도 단군조선은 서쪽 국경에 변화가 일어났을 뿐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를 그 영토로 삼고 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러한 단군조선의 여러 거수국 가운데 하나였는데 단군조선 말기에 중앙의 통치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고구려와 부여, 발해 등 만주에 있었던 나라들은 중국변방사이고 한국사에 포함 될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주장은 계속될 것이다.

윤내현 교수/약력
단국대학교 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 학장,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단군학회 회장, 남북역사학자 공동학술회의 남측단장 등 역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소장, 고조선사 연구회 회장

 

 

2008/03/17

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pluskorea≫ 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

고대우리민족사에대한관심이날로증폭되어가고있다.그것은중국의동북공정과함께일본이조선침략후역사적인열등감을감추기위해36년간반도사관으로치

www.pluskorea.net

한민족의 고대사의 범위는 [12환국]영토였던 유라시아 대륙 전역이다

 

고대 우리 민족사에 대한 관심이 날로 증폭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함께 일본이 조선침략 후 역사적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36년간 반도사관으로 치밀하게 조작왜곡했으며, 수 많은 고서들과 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 갔기 때문이다. 또한 소수 민족들로 구성된 중국 또한 중국의 통합차원에서 서북.서남.동북공정이라는 정부차원의 역사왜곡과 조작작업를 정치적인 차원에서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경제군사적인 침략과 독점을 목적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차원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행위는 인류적인 범죄행위로써 인류양심과 민족정기차원에서 좌시할 수 없는 문제로 적극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분야에서 종사하면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찾기 차원에서 우리 민족사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례들을 제시한다.

 

 

고대12환국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 고대 중국의 지도-상세보기는 지도클릭

 

 

지금까지 식민사관에 주입세뇌되어온 사람들이 들으면 당혹스런 역사해석들을 들어 보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가야는 중국에 있었다. 왜(倭)는 본래 대만에 있다가 열도로 자리를 옮겨 일본이 됐다. 이성계(李成桂)의 부모는 여진인으로 출생지 함주는 함흥이 아니고 허난성(河南省) 통허현이다. 이성계는 중국에서 배를 타고 1427년 황해도 해주로 들어와 한반도에 조선왕조를 세웠다.

이는 재야사학자 이중재(66, 한국 상고사학회장)씨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한반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시 그의 말, "그때 한반도는 국가 체제도, 지방행정도 없는 황무지, 즉 평민들이 살던 구석 땅이었다. 중국에 남은 고려는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멸망했다."

박용숙(62,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의 가설을 대하면 더 숨이 가쁘다. 한민족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개막한 수메르족이다. 그들은 1천8백년간 환인 시대를 유지하다 기원전 2333년 침공해온 아카드의 사르곤과 결합한다. 사르곤은 수메르의 여신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고, 그 후손은 제국의 최고 지배계층이 된다. 이 사르곤이 곧 한웅(桓雄)이며 중국역사의 황제(皇帝)와 동일 인물이다.

한민족의 일부는 서쪽으로 가 미케네 문명을 일으키고 원래 땅에 남은 사르곤의 연합제국은 고조선과 부여(페르시아 제국)로 이어져 기원전 7세기까지 계속된다. 이후 부여 태자 고열가가 지금의 이란땅 하그마다나에 북부여(메디아 제국)를 세우고 자칭 천제 해모수(解慕漱)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 동부여(일명 부여별종)을 세운다. 동부여에서 고구려가 나타나며 여기서 다시 백제, 신라로 이어진다. 박교수의 말대로라도 한반도는 역시 공백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자. 이들의 역사확장은 끝이 없어 보인다.

이중재씨와 비슷한 역사관을 펴고 있는 재야사학자 정용석(44)씨를 통해 새로운 역사해석의 의미를 들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후세들이 자존심 충만한 후예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확장정신 또는 광역정신이 필요하다. 누구라도 지금의 정사(正)에 부정(反)의 역사 논리를 들이댐으로써 나중 함(合)의 새로운 역사관을 세워야 하지 않는가."

간혹 이런 파괴론을 '세기말'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재야 또는 비주류 사학들의 입장은 다르다. '바로잡아 달라'는 역사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史實)도 그렇다. 역사해석의 열망은 사실적 총체로서의 역사와 역사서(歷史書)로서의 역사 사이에서 진동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어느 시대건 위서(僞書)파문이 있어 역사를 제대로 읽기가 난망하다.

내친 김에 더 달리자. 역사의 '지평 넓히기'가 뭐 나쁘랴. 박용숙 교수는 한민족의 강역을 지금의 이라크, 터키, 시리아, 레바논 등이 자리잡고 있는 서남아시아 지역으로 확장한다. 고구려는 서남아시아 일대를 장악한 리디아, 페르시아 제국, 백제는 이란 동부의 파르티아 왕국, 신라는 파키스탄 인근 박트리아 왕국이었다. 가야는 인더스강 하류에 자리잡았다.

이중재, 정용석씨의 경우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 역사를 시간적으로는 1만년 이상, 공간적으로는 중국대륙 전체와 서역, 몽골, 바이칼호 지역과 동남아시아까지 옮긴다. 문헌 대조와 해석을 통한 한국, 중국 지명의 1대 1 대응은 꽤나 현란하다. 예컨대 이중재씨 주장대로라면 신라의 경주는 중국 간쑤(甘肅)성 경양현이며 백제의 공주는 허난성 웅진이다. 박혁거세(朴赫居世)와 김유신(金庾信) 묘는 장쑤(江蘇)성 오현에 있다. 의주는 허난성 급현이며 압록강은 여기에 흐르고 있다.

현직 국사교사 이희옥(李熙玉, 60, 서울 중앙중학교)씨의 입장은 좀 다르다. 두번의 역사날조로 한민족의 무대가 위축됐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삼국사기를 편찬(1145년)했던 김부식(金富軾)이 고의로 B.C. 3000년이던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 33년, 기원전 2~3세기에 세워진 백제를 B.C. 18년에 건국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6세기 이후 국가모습을 갖춘 신라가 뒤늦게 중심에 위치하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하는 또 한번의 결정적인 역사왜곡은 8~10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진행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멸망한 가야, 백제, 고구려계 영주, 호족들이 대대적인 '역사만들기' 작업에 나섰다. 그들의 손에 의해 없던 '일본'이 소설처럼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서 백제의 사서(史書)를 모두 없앴다는 것이다.

재야사학자 정용석씨의 사례 한토막 -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입수한 『고려도경(高麗圖經)』(중국 북송 휘종시대 徐兢 著)을 번역하면서 가벼운 흥분 상태다. 고려로 가는 북송의 사신이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 마카오 쪽으로 가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를 발판으로 일본정벌에 나선 중국 원나라의 출병 근거지도 광시(廣西)성 합포로 그려져 있다.

역사는 말이 없고 오직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오랜 논란거리였다. 심지어 역사가가 갖춰야 할 제1의 덕목은 무지라는 야유도 있다. 그래야 사안을 단순화하고 선택, 생략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실증주의자들은 역사는 스스로 말을 한다는 논리를 폈다.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의 한마디로 글을 맺자. "그것이 진정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 정말 그것이 궁금하다.

한민족은 인류조상인 삼묘족의 후예> - 재야사학자 이중재씨

상고사학회 이중재 회장은 일본 메이지대 법과 2년 수료의 학력 소지자다. 51년 째 한문 서적을 독파하면서 한민족 역사를 연구해 왔다. '한민족사' '상고사의 새 발견' '한민족 우주 철학사상' '새 고려사의 탄생' 등의 저서에 이어 최근 '고대조선과 일본의 역사'를 펴냈다. 그의 주장 한토막 - "한민족은 인류의 조상인 삼묘족 후예로 기원전 8936년에 반고환인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三皇五帝, 堯舜이 모두 우리 조상이며 주나라까지도 한민족의 나라다. 삼국은 주나라의 봉토국인 晋이 분열된 韓, 魏, 趙 세나라에서 비롯됐다."

일본에 대한 역사해석도 특이하다. 중국의 魏나라가 망한 후 흩어지면서 작은 위(魏)란 뜻으로 倭라고 불렸는데 신라와 백제에 흡수됐다는 것. 이들은 나중에 백제 유민과 손잡고 대만에서 나라를 세운 후 섬을 따라 이동해 지금의 일본땅으로 나라를 옮겼다.

<백제를 공격한 말갈은 로마군이었다> - 미술사 전공 대학교수 박용숙씨

동덕여대 회화과 박용숙교수는 고대 한민족의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유사점을 근거로 우리 고대 문명은 지중해 문명과 관련 깊다는 가설을 펴고 있다. 그는 이를 최근 펴낸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 - 수메르 신화에서 알타이 신화까지'라는 책에 담았다. 박교수는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백제를 공격한 말갈군'을 파르티아를 공략한 로마군이라고 추정한다. 로마군의 공격에 밀려 고구려와 백제는 육로로, 신라와 가야는 해로로 한반도로 이동했다. 인근에 있던 중국도 이때 함께 옮겨와 역사를 현재의 중국땅에서 벌어진 것처럼 재구성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바로 삼국의 멸망> - 국사교사 이희옥씨

중앙중학교 국사교사 이희옥씨에게는 학교가 좁다. 교과서는 '오류투성이'건만 학생들에게 자신의 역사시각을 일방적으로 일러주기 곤란한 탓이다. 혼란을 걱정하는 학부모들의 항의도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말대신 삼국멸망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통일신라 역시 중국 당의 지배에 놓였기 때문이다.

고대 우리민족의 영토은 고구려와 부여가 만리장성 동북쪽 중국대북을 전부 차지했고 한반도는 마한, 진한, 변한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이후 백제왕국은 마한지역을 재통일하며 등장했고 진한과 변한지역에 가야왕국이 세워졌다.

왜곡된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역사교과서가 일제 식민사관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교사의 독특한 역사관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책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정립된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 재야사학자 정용석씨

 

정용석씨는 기상청에서 21년을 근무한 경력자다. 남들과는 달리 기상, 지리, 지질 등을 역사의 보조과학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참과 거짓의 역사 1,2,3'에 이어 최근 '일본은 열도에 없었다'를 펴냈다. '기후현상으로 본 삼국의 역사' '지각운동으로 고찰한 삼국역사'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진실과 왜의 비밀' 등 특이한 논문도 있다. 

▲ 재야.민족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중국대륙의 고대 삼국과 왜.가야

 

흥미있는 주장 하나 - "경주라는 이름 자체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생긴 이름인데 지금의 경주시가 신라의 천년고도라니! 식민사관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토함산은 어디 있어야 하는가. 화산이 폭발한 산이면서 휴화산이니 자연이 함산(含山)인데 그것은 대륙의 양자강 북쪽 안휘성 남부 함산현에 있다."
 
<광개토태왕비는 중국이 옮겼고,일본이 비문을 조작했다>-역사 칼럼니스트 성훈씨

민족정론지 '플러스코리아'의 역사칼럼니스트인 성헌씨는 광개토태왕비는 중국에 의해 하북성에서 만주로 이전했고, 일제하에서 일본이 비문을 조작했다는 내용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들어 보면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는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본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nbsp;&nbsp;동치제가 6살에 즉위하자 섭정은 주로 서태후가 했다.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동과정에서 분명‘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호태왕비가 중국인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내용보기).

<史料 비판없는 我田引水 해석 일본 황국사관과 뭐가 다르냐>

이와 같은 재야.민족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경희대 사학과 조인성 교수같은 사람은 '한국사 시민강좌' 제20집에서 '국수주의 사학과 현대의 한국사학'이라는 글을 통해 특히 고조선사를 둘러싼 일부 재야 사학자들의 입장을 비판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워 고조선의 강역을 넓히고 건국연대를 수천년 당기는 것은 비학문적이라는게 그의 지적이다.

재야.민족사학자들이 제시하는 사료는 [환단고기(桓檀古記)]다. 그러나 일제 반도사관으로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선 이병도의 후학들로 대한민국 국사학계를 지배해온 식민사관 학자들은 [한단고기]를 위서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내에서의 역사논쟁 또한 본질적으로 진실과 거짓과의 싸움이며, 민족주의와 반민족주의와의 전쟁이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민족사 바로 찾기에 나선 재야.민족사학자들은 일본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지나친 감정과 흥분을 배제하고 모두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공감하고 인식할 수 있는 차원에서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이고 명확한 고대 문헌들의 비교분석 제시와 고고학적 유물유적, 유전학적 근거제시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역사란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독점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인식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하는 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쪽록 개방적인 자세로 치열한 역사논쟁이 있기를 바란다.


한민족의 고대사의 범위는 [12환국]으로 대변되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이다
 
[자료]고대 중국 문헌이 증언하는 고대12환국
 
한국(桓國)과 한국의 12 연방국(聯邦國) 실체 ㅡ 위치 1편  

 

 


 
고대 중국[진서(晉書)-사이전(四夷傳)]에서 전한다. 

裨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日  領戶二萬  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  領戶二萬
비리국재숙신서북  마행가이백일  령호이만  양운국거비리마행우오십일  령호이만
 
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行  領戶五萬餘  一群國去莫汗又百五十日  計去肅愼五萬餘裡
구막한국거양운국우백일행  령호오만여  일군국거막한우백오십일  계거숙신오만여리

해설:"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며 가구의 수는 2만호이다.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또 말을 타고 50일을 가며 가구의 수는 2만호이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50일을 가며 가구의 수는 5만여호이다.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150일을 가야하는데 이를 계산해보면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하는 거리이다."  

 

 

고대12환국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 고대 쥐나의 지도-상세보기는 지도클릭

 

숙신(肅愼)은 파나류산(派奈留山) 아래 파나류국을 일컫는 말로 곧 한국(桓國)을 뜻하는 것이지만 한국(桓國)의 12연방국 중 본국(本國)을 의미한다. 즉 천해의 동쪽 땅에 하늘나라에서 내려오신 한인(桓因)께서 처음으로 세상을 여신 곳이다.
 
숙신의 원음(原音)은 조선(朝鮮)이라고도 전하는데, 진서(晉書)에 기록하기를 12연방국중 4곳의 나라 이름과 대략적인 위치와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진서는 당나라 태종(이세민)때인 서기 644년 편찬된 책이며, 한인(桓因)께서 세상에 내려오셔서
한국(桓國)을 여신지 7840 여년이 흐른 후의 기록이다.진서가 만들어진 서기 7세기경 당시에는 숙신(肅愼)은 흑룡강성과 연해주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곳 숙신으로 부터 말을타고 서북쪽 방향으로 200일 가면 12연방국중 하나인 비리국(裨離國)이 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7세기 까지 비리국과 관련된 국가나 혹은 후손들이 끊어지지않고 연결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서(晉書) 에서 전한다.
肅愼氏一名邑婁  在不咸山北  去夫餘可六十一行  東濱大海  西接寇漫汗國
숙신씨일명읍루  재불함산북  거부여가육십일행  동빈대해  서접구만한국
 
北極弱水  其土界廣무數千里
북극약수  기토계광무수천리
 
해설:"숙신씨는 일명 읍루라 하는데 불함산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을 가야한다.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구만한국에 접해있고 북쪽으로는 약수에 닿았다. 그 땅의 경계는 넓고 길어 수천리에 이른다."
 
숙신과 읍루는 모두 한국(桓國)을 지칭하는 것이며, 불함산은 현재의 백두산이라고도 전한다. 부여(夫餘)는 해모수 단군이 건국하셨던 북부여(北夫餘)를 가리키는 듯하고, 약수(弱水)는 현재의 흑룡강 즉 아무르(Amur)강 이다.
 
진서(晉書)가 편찬된 시대는 서기 644년이지만, 그 역사서의 내용은 동진(東晉)과 서진(西晉)의 역사인 서기 3세기부터 서기 5세기때가지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진서(晉書)의 기록에 보이는 대부분의 지명(地名)은 그 당시의 지명이거나 혹은 수 세기 앞선 지명으로 봐야한다. 물론 수 백년동안 혹은 수 천년동안 변하지 않는 지명(地名)도 있을 수 있으나 거의 대부분 지명 등 명칭은 국가나 땅을 지배했던 민족(民族)들에 의해 변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랫 옛적 한국이 세워질때의 흑수(黑水)와 약수(弱水)는 각각 다른 강이었으나 후세의 배달국(培達國)이 세워지면서 모든 강과 산의 지명이 동쪽으로 배달국(培達國)을 따라 이동하였고 약수와 흑수는 같은 강으로 인식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진서(晉書)에 기록된 약수(弱水)는 흑수(黑水)와 같은 강으로 인식되어졌으며, 오늘날의 흑룡강(黑龍江)이다.
 
서기전 7199년 안파견(安巴堅) 한인께서 세우신 한국(桓國)이 3301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뒤를 이어서 거발한 한웅(居發桓 桓雄)의 신시(神市) 즉 배달국(培達國)이 건국되었으며 지명(地名)의 이름이 같아도 그 위치가 달라졌으니 후세의 자손들이 한국(桓國)과 신시(神市) 즉 배달국(培達國)을 분리하지않고 하나의 역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위리 한인(智爲利 桓因)의 뒤를 이어 거발한 한웅께서 건국한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이므로 같은 역사라고 인식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桓國)은 한인께서 천산에 거주하시면서 파내류산 아래 천해의 동쪽땅에 세우신 나라이고 신시 배달국은 거발한 한웅께서는 한국(桓國)의 뒤를 이어 삼위태백(三危太百)의 지역(地域)에 건국하신 나라이니 현재의 지도상 위치로 보면 한국(桓國)과 신시 배달국(培達國)은 약 4,000km 정도의 거리 차이가 있다.
 
즉 한국(桓國)으로 부터 동쪽으로 4,000km 정도 떨어져서 신시배달국(神市 培達國)이 세워진 것이다.

 



[자료]'한단고기'가 증언하는 12환국과 신시배달국
 

한국(桓國)과 한국의 12 연방국(聯邦國) 실체 ㅡ 위치 2편
 
[한단고기-삼성기(三聖記)]에서 전한다.

日降童女童男八百  於黑水白山之地  謂之桓國
일강동녀동남팔백  어흑수백산지지  위지한국
 
해설:"어느날 동녀동남 800명이 흑수 백산의 땅에 내려왔다. 이를 한국이라고 한다."
 
後桓雄氏繼興  奉天神之詔  降于白山黑水之間
후한웅씨계흥  봉천신지고  강우백산흑수지간
 
해설:"뒤에 한웅씨가 계승하여 일어났다. 천신의 뜻을 받을어 백산과 흑수의 사이에 내려왔다."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한국시대(桓國 時代)때의 기록과 더불어 한웅(桓雄)의 신시 배달국의 기록에도 같은 지명(地名)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桓國)시대 때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 때와 비교하면 지명은 같으나 위치(位置)는 전혀 다른 곳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한국과 신시 배달국의 역사를 후손들이 동일(同一)한 한 역사로 보았기 때문에 흑수와 백산을 같은 지역으로 당연하게 생각한 오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흑수(黑水)는 흑룡강성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흑룡강(黑龍江) 즉 아무르(Amur) 강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또한 백산(白山)은 현재의 백두산 또는 강원도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 혹은 북경 서남쪽 섬서성(陝西城) 서안(西安 고대의 장안長安)의 서쪽에 있는 태백산(太白山)으로 보는 등 여러 갈래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여러 사서(史西)들의 기록에 나오는 한국시대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은 한웅시대 즉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의 흑수(黑水) 백산(白山)과는 전혀 다른 곳임을 알아야한다.
 
앞서 수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桓國)은 파나류산(派奈留山) 아래에 즉 현재의 천산산맥과 발하슈 호수를 포함한 지역이고, 한웅의 신시 배달국은 삼위태백(三危太百)의 지역으로 바이칼 호수와 흑룡강 그리고 대흥안령산맥, 소흥안령산맥, 장백산맥으로 포함한 지역이기 때문에 한국과 신시 배달국은 서로 전혀 다른 지역에서 건국한 각각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桓國) 시대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을 살펴보면,
 
흑수(黑水)는 현재의 내몽고 자치구와 감숙성 동부 지역에 있는 위치한 고원(固原)의 북쪽에 있는 강이다. 또한 감숙성 북서부 지역인 장액(張掖)의 부근에는 약수(弱水)도 있다.

사기(史記)에서 전(傳)하기를 고원(固原)의 북쪽에 흑수(黑水)가 있으며, 북쪽으로 흘러가 대하(大河)에 유입한다고 하였다. (又北有黑水 北流入於大河) 즉 흑수는 고원을 지나 황하(黃河)로 흘러가는 강이다.

백산(白山)은 중앙 아시아에 위치한 키르기스스탄(Kyrgyzstan)과 카자흐스탄 그리고 신강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族自治區)지역 사이에 위치하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의 수 많은 봉우리 중 한 봉우리 또는 천산산맥에 속하며 항시 눈이 덮여있는 봉우리 전체일 것임에 틀림없다.

백산(白山)은 말 그대로 하얀 설산(雪山)을 일컫는 말로, 빙하(氷河 Glacier)가 덮여있으므로써 연중 어느 시기에 보아도 하얀 모습을 드러내는 산이므로 빙하가 생성되는 최소 3,000m 이상의 고봉(高峰)일 것이다. 현재 천산산맥의 최고봉은 포베다산(7,439m)이며, 평균고도 3,000m~4,000m 이상의 고봉들로 이루어져있다.


한웅의 신시 배달국(神市 培達國)에서의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을 살펴보면, 흑수(黑水)는 흑룡강(黑龍江) 즉 아무르(Amur)강이며, 흑룡강성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오호츠크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백산(白山)은 현재 흑룡강성의 하얼빈 동쪽 통하(通河)의 북쪽에 있는 평정산(平頂山)이다. 원래의 이름은 태백산(太百山)인데 후에 백산(白山)으로 산명(山名)이 바뀌었고, 다시 현재에 이르러서는 평정산(平頂山)으로 불리우는 산이다.

[자료]유전자 분석으로 보는 한민족

한국인은 대부분 남방의 농경문화 민족에서 그리고 일부는 북방의 유목·기마 민족에서 비롯돼 ‘이중의 민족기원’을 지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 한국인과 몽골인이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결과와 달리,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중국 베이징 한족과 만주족, 일본인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이 연구결과는 지금까지 한국인의 민족기원과 관련한 연구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김욱 단국대 교수(인류유전학) 연구팀은 “한국인을 비롯한 중국·일본·베트남·몽골 등 동아시아 11개 민족집단에서 1949명의 유전자를 조사·분석한 결과 한국인은 북방계보다는 주로 남방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그러나 북방계도 뚜렷해 ‘이중의 민족기원’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는 저명한 국제학술지 〈휴먼 지네틱스〉에 발표됐다.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위해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유전되는 두가지 염색체의 디엔에이(DNA)를 이용해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추적했다. 하나는 아버지에서 아들한테만 전수되는 ‘와이(Y) 성염색체’의 디엔에이이며, 다른 하나는 난자 세포에만 존재해 모계로 전수되는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다. 김 교수 연구팀은2001~2003년 한국과학재단 지원으로 11개 민족 738명의 와이염색체를, 2002~2003년엔 8개 민족 1211명의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를 비교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어냈다.먼저, 와이염색체를 분석한 결과는 ‘한국인의 원류는 북방 민족’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김 교수는 “16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현대인(호모 사피엔스)은 6만~8만년 전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이주 집단의 한 갈래가 2만~3만년 전 아시아 남쪽으로 가는 과정에서 와이염색체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엠(M)175’라는 유전자형을 지니게 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에 Y염색체를 비교해보니 한국인 75%에서 이런 유전자형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한국인10명 가운데 7, 8명이 아시아 남쪽으로 이동하던 2만~3만년 전의 집단과 동일한 와이염색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몽골인을 뺀 동아시아인 대부분에서 엠175 유전자형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이런 사실은 엠175 유전자형 집단이 중국 중북부인 황허·양쯔강 유역에서 농경문화를 이룩해 인구의 대팽창을 일으키면서 5천년 전쯤 한반도와 다른 아시아 남부로 퍼져나갔다는 유전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선 중국 중북부 농경민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남방계와 별개로, 한국인에선 몽골·시베리아 북방계 와이염색체의 유전자형(20%)도 발견됐는데, 이는 남방계가 대규모로 옮아오기 이전에 알타이산맥이나 시베리아 바이칼 주변에서 빙하기를 피해 남하한 집단이 먼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풀이된다. 

결국 “지금의 한국인은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일부 북방계와, 대규모로 이동해 들어온 남방계 농경민족이 섞여 이뤄졌다”는 것이 연구팀의 결론이다.이와 함께 연구팀은 이번 11개 민족집단의 비교분석을 통해, 2300년 전쯤 농경문화를 전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는 유전적 증거도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한국인이 주로 중국 중북부 농경문화에서 비롯했다는 와이염색체의 분석결과는 이 연구팀이 따로 벌인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의 분석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김 교수 연구팀의 결론은 ‘한국인과 몽골인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팀의 연구결과와 달라 논란을 일으킨다. 
 
김종일 한림대 교수(생화학교실)는 ‘한국인 66명과 몽골인 72명의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를 분석한 결과 두 민족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는 중간 연구결과를 밝힌 바 있다.이와 관련해 김 교수는 “우리는 한국·몽골인 사이의 유전적 관련성만을 연구한 것이며 연구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며 “이런 점에서 다른 결론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윤두현 입력 2007-10-02 15:15

<2007 개천절 특집-개천절의 과거와 미래>“국경 낮아지지만 민족주의는 강화” :: 문화일보 munhwa

 

단군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의 개천절을 기리는 노랫말이다. 학창시절부터 해마다 10월이면 이 노래를 부르며 기원전 2333년(戊辰年) 단군조선을 건국한 단군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오는 3일로 단기 4340회의 개천절을 맞지만 우리들은 직장과 학교를 ‘쉰다’는 것을 제외하고 개천절의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지난 1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난 한민족평화제단(祭團) 임선정(55) 대표는 대뜸 개천(開天)의 의미를 “단군조선의 건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아래에 내려온 날을 뜻한다”고 바로잡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개천절에 엮인 역사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단군조선을 건국한 해인 기원전 2333년보다 124년 앞선다. 천신(天神)인 환인의 뜻을 받아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어 광명개천(光明開天),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대업을 시작한 날인 기원전 2457년(上元甲子年)의 10월3일을 기리는 것이다.

“환웅께서 환인의 가르침을 받은 내용들이 녹도문자(鹿圖文字·사슴의 발바닥 모양이란 뜻으로 상형문자를 의미함)로 전해지다가 경(經)으로 남겨진 것이 바로 51자의 문자와, 31자의 숫자로 이뤄진 천부경(天符經)이에요. 그래서 천부경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와 인간이 지켜야 할 모든 진리들이 담겨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임 대표는 천부경의 화두를 ‘삼일정신’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천부경에 셋 즉 우주, 만물, 인간이 모여 하나가 된다라고 했어요. 이것이 삼일정신이죠. 이것이 기독교에서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를 가르치고, 불교에서 불, 법, 승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천절이 환웅의 강림(降臨)을 기리는 것이라면 단군은 지금보다 격하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아니다. 임 대표는 환인은 인류의 시조이며, 환웅은 한민족의 시조, 그리고 단군은 우리나라의 국조라고 설명했다. 즉 인류의 시조인 환인으로 내려온 직계손으로 바로 천손민(天孫民)이 세운 나라라는 의미다.

하지만 천손민의 자손인 우리들 대부분은 단군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기록을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인간이 되는 신화일 뿐”이라고 믿고 있는 데 대해 임 대표는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우리 민족의 어머니인 웅녀께서 곰이었다고 하는 인식은 식민지시대 때 우리 민족의 뿌리를 잘라 버리려는 일제에서 시작됐고 그 그릇된 인식을 고치려 하지 않는 역사의식의 부재 때문에 계속되고 있어요.”

임 대표가 들려주는 개천 이후의 역사는 이렇다. 환웅이 태백의 정기를 보고 동으로 이동해 왔을 때 곰족과 호족의 무리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 곰족의 여족장과 호족의 여족장을 수신케 하여 인간성회복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호족은 성품이 사납고, 급하였으나 곰족은 끈기있게 정진을 잘하여 인간성을 회복해 결국 곰족의 여족장은 환웅의 아들, 즉 단군을 탄생시킨 우리 민족의 어머니가 된다. 임 대표는 이러한 환웅과 단군의 기록을 단순히 구전으로 전해지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의 기록으로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넘치는 세계화의 물결로 국가와 국가 사이 국경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세계 국가는 반대로 자국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웃국가를 둘러보면 실제로 그렇다. 일본은 전범자들을 자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기 바쁘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앞세워 우리나라의 고구려, 더 멀리 단군조선마저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고 있다.

그는 이런 주변 강국의 정신적 공세에 대응해 하루빨리 환웅과 단군을 단순히 신화가 아닌 역사 속 주인공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북이 단군의 역사로 하나가 되어 정신적 사상을 공유할 경우 현재 중국에 예속된 땅과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땅과 국민으로 편입될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같은 민족주의 강화가 배타주의적인 역사관으로 이어질 경우 우리는 또 참혹한 전쟁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 같은 속내를 읽었는지 임 대표는 천부경에 기록된 ‘하도(河圖)-낙서(落書)-해인(海印)’이라는 문명전환의 의미를 강조한다. 하도의 시대는 바로 ‘그림’이 글을 대신하던 시대로 상생의 시대다. 하지만 낙서의 시대 즉 글을 가지고 있는 시대는 전쟁의 시대다. 환인 이후 전 세계 수천년 역사가 전쟁으로 얼룩진 것은 바로 발전과 경쟁을 위한 하늘의 뜻이었다는 의미다. 그가 말하는 그 다음의 시대, 해인의 시대는 바로 인터넷 세상처럼 강물이 바다에 모여 하나가 되는 시대다. 이때에는 전쟁의 시대를 대신하는 평화의 시대가 열린다.

“도참설에 우리 인간들은 결국 ‘신시반본(神始返本), 원시반본(原始返本)한다’라는 얘기가 있어요. 결국 환인 할아버지의 시대 즉 상생의 시대로 돌아간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환웅과 단군의 시대를 재정립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윤두현기자 ydh117@munhwa.com
 
 
 
 

 

2019. 9. 2. 18:06

재일동포 학자의 일침 "고대를 국민국가 틀로 보지 말라" (daum.net)

 

 

2013/04/12

민족시원, 한민족국가의 역사 요약-상고시대~고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13년 01월 10일

국제관계학으로 고대사를 이야기하다 (brainmedia.co.kr)

 

 

파이낸셜뉴스입력 2010.06.28 18:33수정 2010.06.28 18:33

 
 
 

2007/11/17

[충격]우리 國祖는 신화로 만들고, 중국 始祖는 역사상 인물로 만든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7-10-31

“민족우월주의 신화경쟁 그만”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2008/03/04

아메리카와 일본에서 찾는 고대한국: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05/02

 

2019년10월15일

주식회사 이데이뉴스- (edaynews.com)

 

 

[열린세상] 이제 아랍 땅에서 길을 묻다/ 황규호 ‘한국의 고고학’ 상임편집위원 | 서울신문 (seoul.co.kr)

 

 

 

입력 2003. 6. 25. 08:12수정 2003. 6. 25. 08:12

러시아에 진출한 '진짜 한국사' (daum.net)

 

 

 

사고전서(四庫全書)로 조명하는 한국상고사의 실체,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https://youtu.be/CY-jcY2ct3M?list=PLRAmvpNm4pmmRSyCOBUipzw4lmxC6bFH- 

 

 

 

 

<참고자료>

 

Korea - Wikipedia

 

 

History of Korea - Wikipedia

 

 

Korea | History, Peninsula, Rulers, & Facts | Britannica

 

 

Ancient Korea - World History Encyclopedia

 

 

· 동이족 이야기 - 9000년 역사의 역대 왕계표 (siddham.kr)

 

· 동이족 이야기 - 9000년 역사의 역대 왕계표

65 "아메리카 인디언, 인디오는 韓民族"…고대 아즈텍어 우리 고어와 일치 [17] 운영자 2011-12-29 17310

www.siddham.kr

 

 

우리민족의 역사는 9200년 전부터 시작 되었..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우리민족의 역사는 9200년 전부터 시작 되었다.

동이문화원[東夷文化院] www.siddham.kr

blog.naver.com

 

 

韓國 역대 國家 時代別 區分

國 號 始 期 歷 年 代 數
西紀前7,1993,898 3,301 7
倍達
靑丘
西紀前3,8982,707 1,191 13
西紀前2,7072,333 374 5
朝鮮
大夫余
西紀前2,333 425 1,908 43
西紀前 425 232 193 4
馬韓
北夫余
迦葉原夫余
西紀前 32310 333 9
西紀前 23958 181 6
西紀前 8622 108 3
高句麗
新羅
百濟
西紀前 58668 726 28
西紀前 57935 992 56
西紀前 18660 678 31
西夫余
加洛
22494 472 9
42532 490 10
渤海 668926 258 15
高麗 9181,392 474 34
朝鮮 1,3921,897 505 25
大韓帝國 1,8971,910 13 2
1,919(2,014) (96) 37(임정)
18(건국)
大韓民國

 

이병화 역사 연구가 2014. 09. 26. 발표

 

출처 : 한민족사중앙연구회

글쓴이 : 이광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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