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2)

 1.1 삼성기 전 상편

 

환단고기범례에는 계연수가 삼성기는 두 종류가 있고 완편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집에 전해 온 안함로가 찬한 것을 삼성기 전 상편이라 한다고 하면서 안함로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임승국은 한단고기해제에서 안함로를 신라의 승려라고 밝혔고(1), 안경전은 안함로(579~640)가 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이며 성은 김씨이고 이찬을 지낸 시부의 손자로 안홍법사, 안함법사, 안함태화상 등으로 불리고 신라 십성十聖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2)

 

고려 고종 때 승려 각훈(覺訓)이 지은 해동고승전에 안함이 들어 있다. 아래 안함의 구법 항목 외에도 안홍 관련 기록, 안함의 예언과 입적, 안함의 비문, 찬하여 말하다 항목이 더 있다.

 

해동고승전권 제2 권 제2 유통1-2 > 석안함(釋安含) > 안함의 구법

 

안함의 구법

승려 안함(安含)은 속성이 김씨요, 시부이찬의 손자이다. 나면서부터 도리를 깨달았고, 성품이 맑고 허심탄회하였다. 의지가 굳고 깊고 아름다운 도량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일찍부터 마음대로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에 뜻을 두어, 풍속을 살펴보고 널리 교화하였다. 진평왕 22(600)에 고승 혜숙(惠宿)과 친구가 되기를 약속하고, 뗏목을 타고 이포진(泥浦津)으로 가는 도중 섭도(涉島)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 뗏목을 되돌려서 물가에 대었다. 이듬해(601)에 임금이 교지를 내려 법기(法器)를 이룰 만한 자를 뽑아 중국에 파견하여 학문을 닦게 하고자 하였을 때, 마침내 법사가 명을 받들어 가게 되었다. 이에 신라 사신과 동행하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중국의 조정으로 갔다.

천왕이 불러 친히 보고 크게 기뻐하며 칙명으로 대흥성사에 머물게 하였다. 스님은 단시일 내에 깊은 뜻을 환히 깨달았다. 이에 화산(華山)에서 선장(仙掌)까지 10개의 역이나 되는 길을 하루 낮에 갔다 돌아오니 누가 저녁 북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으며, 진령(秦嶺)에서 제궁(帝宮)까지 천리나 되는 땅을 하룻밤 사이에 오르니 어찌 새벽 종소리를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십승(十乘)의 비법과 법화현의의 진실한 문장을 5년 동안에 두루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뒤 27(605)에 우전(于闐)의 사문 비마진제(Vimalacinti)와 사문 농가타(Nangata) 등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으니, 서역의 호승이 직접 계림(雞林)으로 온 것은 대개 이때부터였다.(3)

 

 

 

해동고승전 / 각훈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삼국유사에 안함 기사 2개가 있다.

 

권 제3 > 3 흥법(興法第三) >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 > 흥륜사 금당의 10

 

동경 흥륜사 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

동쪽 벽에 앉아 경방(庚方)을 향한 진흙상은 아도(我道), 염촉(厭髑),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이고 서쪽 벽에 앉아 갑방(甲方)을 향한 진흙상은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이다.

東亰興輪寺金堂十聖

東壁坐庚向泥塑我道·猒髑·惠宿·安含·義湘, 西壁坐甲向泥塑表訓·虵巴·元曉·惠空·慈藏.(4)

 

권 제3 > 4 탑상(塔像第四) >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 9층탑 관련 기록

 

또 해동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편찬한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략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곧 이웃나라의 침입이 진압될 수 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이다.”

또 국사와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 계유에 절을 세운 후 선덕왕대 정관 19년 을사(645)에 탑을 처음 이루어졌다. 32대 효소왕 즉위 7, 성력(聖曆) 원년 무술 6(698)에 벼락이 쳤다. 사중고기에는 성덕왕대라고 하는데 잘못이다. 성덕왕대에는 무술년이 없다. 33대 성덕왕 경신(720)에 다시 세웠다. 48대 경문왕 무자(868) 6월에 두 번째로 벼락이 쳤고 같은 왕대에 세 번째로 다시 세웠다. 본조 광종(光宗) 즉위 5년 계축 10(953)에 세 번째로 벼락이 쳤고 현종(顯宗) 13년 신유(1021)에 네 번째로 다시 세웠다. 또 정종(靖宗) 2년 을해(1035)에 네 번째로 벼락이 쳤고 또 문종(文宗) 갑진년(1064)에 다섯 번째로 다시 세웠다. 또 헌종(獻宗)233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로 벼락이 쳤고 숙종(肅宗)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세웠다. 또 고종(高宗) 25년 무술(1238) 겨울에 몽고의 병화로 탑, 장육존상,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타버렸다.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女王爲主, 雖有道無威九韓侵勞. 若龍宫南皇龍寺建九層塔則隣國之災可鎮.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逰,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犾, 第九層獩㹮.” 又按國史及寺中古記, 真興王癸酉創寺後, 善徳王代貞觀十九年乙巳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即位七年, 聖暦元年戊戌六月霹靂. 寺中古記云聖徳王代, 誤也. 聖徳王代無戊戌. 第三十三聖徳王代庚申歳重成. 四十八景文王代戊子六月第二霹靂, 同代第三重修. 至本朝光宗即位五年癸丑十月第三霹靂, 現宗十三年辛酉第四重成. 又靖宗二年乙亥第四霹靂, 又文宗甲辰年第五重成. 又憲宗末年乙亥第五霹靂, 肅宗丙子第六重成. 又髙宗十六年戊戌冬月, 西山兵火塔寺丈六殿宇皆災.(5)

 

안홍(安弘)을 안함이라고도 한다고 주를 달았다.

 

안함(安含)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고승으로 성은 김씨이고 이찬 시부(詩賦)의 손자이다. 해동고승전에는 601년 왕명으로 수에 가서 대흥성사(大興聖寺)에 있다가 605년에 귀국했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는 576년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지었다(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흥륜사 금당에 봉안된 신라십성 중의 한 사람이다. 성은 김씨.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영민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일찍부터 뜻을 나라 밖에 두었다.

600(진평왕 22)에 고승 혜숙(惠宿)과 함께 이포진(泥浦津)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가 섭도(涉島) 근처에서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듬해 칙명을 받고 법사가 되어 중국 사신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대흥사(大興寺)에 머물렀다.

그 뒤 십승(十乘)의 비법(秘法) 및 현의(玄義)와 진문(眞文)5년 동안 배우고 605(진평왕 27)우전국(于闐國) 사문 비마진제(毗摩眞諦농가타(農加陀)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서역(西域)의 승려들이 신라에 들어온 것은 이 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하였으며 승려 담화(曇和)가 필수(筆受)하였다.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입적하였다. 한림 설모(薛某)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지었다. 저서로는 참서(讖書) 1권을 지어 견문한 바를 기록하였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한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1권이 있다. 그를 삼국유사황룡사구층탑조에 기록된 안홍과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6)

 

위키백과에는 안함로와 신라의 고승 안함이 동일 인물이라는 일부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은 한국 사학계에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안함로(安含老)환단고기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환단고기에서는 그가 삼성기상권을 저술했으며 원동중(元董仲)삼성기하권을 저술했다고 한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안함로가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안함로원동중삼성기를 제시하며, 안함로와 신라의 고승 안함이 동일 인물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해당 서명(書名)은 한국 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안함(安含노원(老元동중(董仲) 삼성기(三聖紀)로 해석하기 때문에 안함로 및 환단고기에 인용된 삼성기가 실제 조선왕조실록의 안함로와 삼성기라는 주장은 인정되지 않는다.(7)

 

 

삼성기 전 상편에는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며 동녀동남 800명이 흑수 백산의 땅에 내려오고 그 나라를 환국이라고 하며 천제환인씨(안파견)이 환국을 다스렸고 그 년대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천제(天帝)환인씨의 환국 7, 환웅씨의 배달국 181565, 단군왕검의 조선 472096, 대해모수와 고두막한의 동명, 고추모(고주몽)의 고구려까지 우리 겨레와 나라가 이어져왔음을 밝히고 있다.

 

대해모수가 임술년(단기 2095, BCE 239) 秦始時에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났다고 하였고, 정미년(단기 2140, BCE 194) 漢惠時에 위만이 서쪽 변방 한 모퉁이를 도적질하여 차지하였는데 번한의 왕 준이 맞서 싸웠으나 당해 내지 못하고 바다로 도망하여 이로부터 삼한에 속한 백성들은 대부분 한수(漢水) 이남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다.

 

계유년(BCE 108) 한무제가 우거를 멸망시켰는데 서압록사람 고두막한이 을미년(단기 2248, BCE86) 漢昭時에 부여의 옛 도읍을 점령하고 나라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이곳이 신라의 옛 땅이라고 한다.

 

이는 신라가 경주지역으로 내려오기 전에 만주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북부여 황실의 혈통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도 신라와 백제가 만주 길림지역에 있었다고 나온다.

 

 

<참고자료>

 

(1)임승국, 한단고기, 한단고기 해제 3~5

 

(2)안경전, 환단고기, 해제 .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53~55

 

(3)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해동고승전, 권 제2 권 제2 유통1-2 > 석안함(釋安含) > 안함의 구법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hg_002r_0060_0010)

 

(4)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유사, 권 제3 > 3 흥법(興法第三) >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 > 흥륜사 금당의 10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y_003r_0010_0070_0010

 

(5)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유사,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y_003r_0020_0060_0050

 

(6)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함(安含),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5089

 

(7)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D%95%A8%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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