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4-2)

1.3 《단군세기》


국조 단군왕검 조에 보면 신지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셨고 삼한에는 모두 5가(五家) 64족(族)이 있었다고 한다.

『단군왕검께서 어명을 내려 팽우에게 토지를 개간하게 하시고, 성조에게 궁실을 짓게 하시며, 신지에게 글자를 만들게 하셨다. 기성에게 의약을 베풀게 하시고, 나을에게 호적을 관장하게 하시며, 희에게 괘서를 주관하게 하시고, 우에게 병마를 담당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왕검께서 천하의 땅을 일정한 지역으로 경계를 정해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리셨다. 삼한에는 모두 5가 64족이 있었다.』

2세 단군 부루 조에 ‘어아가’가 나오고, 또 중토와 국경을 바로잡은 구절이 나온다.

『초기에 우순(虞舜)이 유주와 영주를 람국 근처에 설치하므로 임금께서 군사를 보내 이들을 정벌하여 그곳 왕을 모두 쫒아내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셨다.』

3세 단군 가륵 조에 정음 38자 곧 가림토문자가 나온다.

『이에 가륵 단군께서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시어 정음 38자를 짓게 하시니 이것이 가림토이다.』


또한 신지 고설에게 명하시어 《배달유기》를 편찬하게 하셨다.

4세 오사구 단군 재위 5년(단기201년, BCE2133년)에 둥근 구멍이 뚫린 패전(貝錢)을 주조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2014년 인하대 융합고고학팀은 이 원공화폐기록이 최근의 고고학 발굴성과와 일치한다고 발표하였다. 우선 개오지로도 알려진 카우리 조개가 이미 한나라 때부터 화폐로 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1987년 이후인데 1911년에 간행된 단군세기에서 이 사실을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조개화페에 둥근 구멍을 뚫어 사용한 사실 역시 하남성 정주 이리두유적과 내몽고 하가점유적 발굴 이후에 알게 되었는데 단군세기에 이미 그 내용이 기술되어 있고 특히 요서지방 대전자유적에서 납으로 주조한 조개모양 화폐가 발견되어 단군세기의 금속 조개화폐 주조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시사한다고 주장하였다.

2014년 6월 24일 중부일보 기사이다.

『단군세기 창작설을 뒤집을 인하대학교의 논문이 오는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족하는 ‘세계환단학회 창립회의’에서 발표된다.

이번 논문은 천문현상 기록의 정확성·조개화폐 기록의 사실성 통해 강화도의 역사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으로 국내 고고학계의 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3일 인하대 융합고고학팀에 따르면 이번 논문을 통해 천문현상 기록의 정확성과 조개화폐 기록의 사실성을 입증함에 따라 ‘단군세기’를 근거 없이 창착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학계에서 다시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단군세기’가 고조선 역사의 실체를 담고 있다고 인정되면 기존의 교과서에 고조선 관련 기술을 채워 넣을 풍부한 검증대상이 확보된다. 또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쐐기를 박는 유력한 근거도 된다.

 

 

하남성 이리두 유적과 언사상성박물관의 조개화폐.


인하대 융합고고학팀은 “단군세기의 5세 오사구단군 재위 시(BC 2133) 주조한 원공화폐 기록은 흥미롭게도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와 일치하고 있다”며 “개오지로도 알려진 카우리 조개가 이미 하나라 때부터 화폐로 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1987년 이후인데 1911년에 간행된 단군세기에서는 이 사실을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개화폐에 둥근 구멍을 뚫어 사용한 사실 역시 하남시 정주 이리두 유적과 내몽고 하가점유적 발굴 이후에 알게 되었는데 단군세기에는 이미 그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요서지방 대전자(大甸子) 유적에서 납으로 주조한 조개모양 화폐가 발견돼 단군세기의 금속 조개화폐 주조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시사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관홍 인하대 해양학과 교수는 “카우리 조개는 쿠로시오 난류대에 서식하는 아열대성 종으로서 한류가 남하하는 중국 동남해안에서는 채집하기 어려운 것”이라 설명하며 “중국 본토가 아닌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면 발해만과 한반도 지역을 주 무대로 하는 해륙문화세력이 이 고대통화를 유통시킨 주체”라고 주장했다.

김연성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장은 “발굴 분포와 조개화폐의 출토량을 종합 고찰할 때 명도전이 그렇듯이 이 조개화폐도 고조선의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중국 고고학계에서도 하가점하층의 조개화폐 사용이 중원에 비해 시기적으로 앞선 것을 근거로 북방세력의 초기화폐문화로서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기대 인하대 고고학 교수는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기록 모두가 창작이라는 기존 학계의 입장은 그 기록이 모두 진실이라고 보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이고 경솔한 감이 없지 않다”며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는 정밀한 검증작업을 통해 ‘단군세기’ 기록 중 의미 있는 사실 기록을 추출해 내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했다. 라다솜 기자/radasom@jooongboo.com』(1)

 


13세 흘달 단군 오성취루(五星聚婁)기사가 있다.

『재위 50년 무진(단기 601, BCE 1733)년에 오성(五星)이 루성(婁星)에 모이고, 황학(黃鶴)이 날아와 금원(禁苑)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BCE 1733년에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서쪽 방위의 루성에 모였다는 것인데 서울대학교 라대일, 박창범 두 박사가 과학적 사실임을 검증하고 1993년 한국천문학회지에 ‘단군조선시대 천문기록에 관하여(ON ASTRONOMICAL RECORDS OF DANGUN CHOSUN PERIOD)’라는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오차가 1년 있는 것으로 나왔는데 한국천문연구원장 박석재 박사도 5행성이 모였고 《단군세기》의 기록이 옳다고 하였다.

2014년 10월 1일자 Premium Chosun 박석재의 우주 이야기(24) 〈'환단고기' 내용 중 개천에 관련된 부분은 진실이다〉 기사 내용이다.

『그런데 그 역사의 블랙홀 한복판에 천문관측 기록이 있다. ‘환단고기’의 ‘무진오십년오성취루’ 기록이다. 이 기록은 한자로 ‘戊辰五十年五星聚婁’ 같이 적는다. 여기서 ‘무진오십년’은 BC 1733년을 말하고 ‘오성’은 물론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을 말한다. ‘취’는 모인다는 뜻이고 ‘루’는 동양 별자리 28수의 하나다. 즉 이 문장은 ‘BC 1733년 오성이 루 주위에 모였다’ 같이 해석된다.

이 기록을 처음으로 검증해 본 천문학자는 라대일 박사와 박창범 박사다. 그 검증 결과는 ‘단군조선시대 천문기록에 관하여’ 논문으로 작성돼 1993년에 발행된 한국천문학회지에 실렸다. 나는 큰일을 해낸 두 후배 천문학자가 너무 자랑스럽다. 안타깝게도 라대일 박사는 요절했다.

 

 

라대일-박창범 박사의 역사적 논문 첫 페이지.



이 기록을 천문학적으로 확인하는데 슈퍼컴퓨터 같은 대단한 장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도 천문 소프트웨어를 노트북에서 돌려봤다. 그 결과 BC 1734년 7월 중순 저녁 서쪽 하늘에는,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화성·수성·토성·목성·금성 순서로 5행성이 늘어서 ‘우주쇼’를 연출했다!

 

 

천문 소프트웨어 'Starry Night' 이 보여주는 BC 1734년 7월 12일 오성취루.



오차가 1년 있기는 하지만 4천 년 전 일을 추정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바로 오성취루라고 봐야 한다. 그 당시 달력이 어땠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또한 28수 중 ‘루’가 아니라 ‘정’ 옆에 모인 것도 4천 년 전 28수가 지금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똑같으면 이상한 것 아닌가.

중요한 사실은 5행성이 모였고 옛 기록이 옳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보름 이상 계속됐기 때문에 장마철이었어도 고조선 천문학자들이 놓쳤을 리 없었다. 특히 제일 아래쪽에 있었던 행성이 가장 밝은 금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위 결과를 바탕으로 BC 1734년 7월 12일의 오성취루 상상도를 그려봤다. 위쪽부터 화성, 수성, 달, 토성, 목성, 금성의 순서로 황도를 따라 배열돼 있다. 아름답지 않은가?

 

 

BC 1734년 7월 12일 오성취루 상상도.



달은 하루에 약 13도씩 동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하루 전인 7월 11일에는 목성과 금성 사이, 하루 후인 7월 13일에는 화성 위에 자리를 잡는다. 7월 11, 12, 13일을 벗어나면 달은 더 이상 오성취루에 참여하지 않는다.

 

 

오성취루 같은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추거나 컴퓨터 없이 손으로 계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BC 1734년 우리 조상들은 천문현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조직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천문대를 가진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고조선을 신화의 나라로 치부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최근 오성취루 기록이 남아있는 ‘환단고기’를 놓고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혐오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극한대립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나라에는 무엇이든 흑백논리로 몰아가는 유행병이 번지고 있는 것 같다. 어느 경우든 ‘환단고기’를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채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옛날에는 복사기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일일이 옮겨 적었다. ‘환단고기’의 내용 중에는 후세 사람들이 옮겨 적으며 추가한 부분, 즉 ‘가필’된 부분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일부 가필됐다 해서 ‘환단고기’를 쓰레기 취급하는 일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과연 이 세상에 전혀 가필되지 않은 경전이나 역사서가 있을까? 아마 파피루스도 가필됐을 것이다.

왜 ‘환단고기’에만 그렇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과연 그 많은 내용을 한 사람이 다 창작해낼 수 있었을까? 언뜻 생각해봐도 ‘환단고기’ 내용이 전부 엉터리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내용 중 일부는 진실일 수 있는 것이다.』(2)

 

단군조선 왕계표

   왕    명 즉위년도
(한기-B.C)
재위기간                 약                    사
1 왕검(王儉) (4865-BC2333)  93 단웅과 웅씨녀사이에서 태어남. 신인 왕검이 무진년(b.c.2333) 오가와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局으로부터 아사달의 檀木단목의 터에 이르러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니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다.
2 부루(扶婁) (4958-BC2240) 58  BC2239 소련 대련 3년상.경술 10년(B.C.2229),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듬.무술 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 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3 가륵(嘉勒) (5016-BC2182) 45 일명 읍루. 삼랑 을보록이 정음38자(가림토 문자) 제작.신축 3년(B.C.2180), 신지인 고을이 배달유기를 편수
4 오사구(烏斯丘) (5061-BC2137) 38  산삼발견.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 을 몽골리한(한은 임금의 뜻)으로 봉하다.
5 구을(丘乙) (5099-BC2099) 16 양가(羊加)구을이 즉위.을축 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듬
6 달문(達門) (5115-BC2083) 36 우가(牛加)인 달문이 뭇 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이음 .육십갑자 사용(BC2096)
7 한율(翰栗) (5151-BC2047) 54 양가(羊加)인 한율이 즉위.
8 우서한(于西翰) (5205-BC1993) 8 우가인 서한 즉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였다.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삭이 맺혔다.
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9 아술(阿述) (5213-BC1985) 35 양가(羊加).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궁궐을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는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10 노을(魯乙) (5248-BC1950) 59 우가인 노을이 즉위. 신원목(신문고와 같은 역할) 설치(BC1946)병오 16년(B.C.1935), 돔눔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중국에선 황하 또는 발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팡괴가 그려져 있어 이것이 팔괘의 시초라 하고 삼서성의 낙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 이를 하도 낙서라 하는 것이다.)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윳판과 같은 것이었다.을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천문대)을 두었다.
11 도해(道奚) (5307-BC1891) 57 우가(牛加).경인 원년(B.C.1891), 단제 께서는 오가에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12 아한(阿漢) (5364-BC1834) 52 우가 아한이 즉위.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리라.
13 흘달(屹達) (5416-BC1782) 61 우가 흘달이 즉위.대음달. 하 정벌. 무술 50년(B.C.1763),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재로 하여금 글 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꽃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14 고불(古弗) (5477-BC1721) 60 우가인 고불이 즉위.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을해 56년(B.C.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1억 8천만인 이였다.
15 대음(代音) (5537-BC1661) 51 후음달.경진 원년(B.C.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침을 구했다. 이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16 위나(尉那) (B5588-C1610) 58 우가인 위나가 즉위.
17 여을(余乙) (5646-BC1552) 68 병신 20년(B.C.1456), 지백특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18 동엄(冬奄) (5714-BC1484) 49  
19 구모소(구牟蘇) (5763-BC1435) 55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지었다.
20 고홀(固忽) (5818-BC1380) 43 우가인 고흘이 즉위.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21 소태(蘇台) (5861-BC1337) 52 경인 47년(B.C.1291),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엿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우현왕은 주변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사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단제 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중국 서울 북평의 옛이름)의 자손 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발해만이나 요동만)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았다.
22 색불루(索弗婁) (5913-BC1285) 48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 무력으로 제위에 오름.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엄독골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23 아홀(阿忽) (5961-BC1237) 76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함.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24 연나(延那) (6037-BC1161) 11 태자 연나가 즉위하여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았다.
25 솔나(率那) (6048-BC1150) 88 영나의 아우.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기자(箕子)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26 추로(鄒魯) (6136-BC1062) 65 태자 추로가 즉위
27 두밀(豆密) (6201-BC997)
26 갑신 원년(BC 997) 천해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28 해모(奚牟) (6227-BC971) 28 정묘 18년 빙해의 뭇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29 마휴(摩休) (6255-BC943) 34 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30 내휴(奈休) (6289-BC909) 35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31 등올(登올) (6324-BC874) 25 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32 추밀(鄒密) (6349-BC849) 30 갑인 3년 선비산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33 감물(甘勿) (6379-BC819) 24 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34 오루문(奧婁門) (6403-BC795) 23  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35 사벌(沙伐) (6426-BC772) 68 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임진 24년 큰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36 매륵(買勒) (6494-BC704) 58 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일본 서기는 이사람을 神武王(신무왕)이라며 건국시조로 날조하여 떠받들고 있다.]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37 마물(麻勿) (6552-BC646) 56  
38 다물(多勿) (6608-BC590) 45  
39 두홀(豆忽) (6653-BC545) 36  
40 달음(達音) (6689-BC509) 18  
41 음차(音次) (6707-BC491) 20  
42 을우지(乙于支) (6727-BC471) 10  
43 물리(勿理) (6737-BC461) 36 을묘 36년 우화충이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백민성 욕살 구물이 장당경을 점령하니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44 구물(丘勿) (6773-BC425) 29 병진 원년(BC 425) 3월 우화충을 죽임.백민성의 욕살구믈 즉위. 국호를 대부여로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45 여루(余婁) (6802-BC396) 55 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까지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헌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막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46 보을(普乙) (6857-BC341) 46  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고열가가 43대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터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47 고열가(高列加) (6903-BC295)
57 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했다.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2,096년이라 임술 57년고열가 단제께서 조선 폐관하시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었다.

출처; · 동이족 이야기 - 9000년 역사의 역대 왕계표 (siddham.kr)



참고자료
(1)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www.joongboo.com)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930109

(2) Premium Chosun,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30/2014093001289.html?opi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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