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3. 단군세기》 (1)

 

단군세기를 지은 이암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고려후기 찬성사, 좌정승, 수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이군해(李君侅). 자는 고운(古雲익지(翼之), 호는 행촌(杏村).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세자원빈(判密直司事監察大夫世子元賓)인 이존비(李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 이우(鐵原君 李瑀)의 아들이다.

 

1313(충숙 즉위년) 8월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충숙왕이 이암의 재주를 아껴 부인(符印)을 맡겨서 비성교감(祕省校勘)에 임명된 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충혜왕 초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에 올랐으며, 1331(충혜 1) 4월 우대언(右代言)으로 밀직제학 한종유(韓宗愈)와 더불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332(충숙 복위 1) 2월 충숙왕이 복위해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섬으로 유배되었다.

 

1340(충혜 복위 1) 지신사(知申事)로 복직하였으며 이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7월 밀직부사로서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김광재(金光載)와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충혜왕이 전교부령(典校副令)에 무인 한용규(韓用規)를 임명하려하자 이를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가 되었고, 좌정승 김영돈(金永旽) 제학(提學) 정사도(鄭思度)와 함께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었다. 그러나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인사행정을 공평하지 않게 처리한다고 왕에게 진언하여, 이로 인해 밀성(密城)에 유배되었다.

 

충목왕이 죽자 서자 왕저(王㫝)01)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온 뒤, 1349(충정 1) 7월 여흥군(驪興君) 민사평(閔思平)과 함께 정방의 제조에 임명되었고, 7월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고, 10월 좌정승에 올랐다.

 

공민왕 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으나 1353(공민 2)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1358(공민 7) 8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1359(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수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었으나 얼마 뒤 겁이 많아 도원수로서 군사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12월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으로 교체되었다.

 

136111월 홍건적이 개경에 쳐들어오자 왕을 따라 남행(南行)했고,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하였다. 1363년 윤3월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다. 이듬해 5월 세상을 떠났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했다. 필법은 조맹부(趙孟頫)와 대적할 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우왕 때 충정왕(忠定王)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1)

 

 

위키백과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암(李嵒, 1297~ 1364)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원래 이름은 이군해(李君侅), 자는 익지(翼之)이며 후에 이름을 암(), 자를 고운(古雲)으로 고쳤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문과에 합력하여 승문원 학사를 지낸 진()의 증손자이며, 고려국 판밀직사사 감찰대부(高麗國 判密直司事監察大夫), 문한(文翰)학사,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한 존비(尊庇)의 손자로,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 부사를 지낸 철원군(鐵原君) ()의 장남이다. 도촌(桃村) 이교(李嶠)가 그의 동생이다. 이들의 가문은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種) 문벌가였으며, 조선 개창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후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와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관과 무관을 배출하면서 조선의 명족이 되었다.

 

이암은 백이정(白頤正, 12471323) 문하에서 수학하며 당시 최고 서체로 추앙받던 조맹부의 송설체를 터득하여 13세에 명필이 되었다. 2년 후 이 소식을 들은 원나라의 무종(武宗)이 이암에게 불교의 연화경(蓮華經)을 써서 바치라고 명하자 이암은 10첩을 써서 보냈다. 무종이 천하일필(天下一筆)’이라 칭찬하고 1첩을 돌려주었다. 현재 그 연화경의 반쪽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 일제 강점기 반출 문화제 환수 등 사회적 관심에 따라 그의 글씨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암은 서예가로서뿐만 아니라 시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10세 강화도 마리산 보제사(普濟寺)에 들어가 학동초당(鶴洞草堂)을 짓고 3년 동안 유가 경전과 우리 고대사 기록을 탐독함

17세 충선왕 즉위년(1313)에 과거(문과) 급제

18세 경전을 비롯한 여러 문헌을 관리하는 비서성(秘書省)의 교감(校勘)에 임명

36세 강화도 귀양

39세 유배에서 방면.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거하면서 태백진훈(太白眞訓)단군세기(檀君世紀)지음

44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임명

56세 철원군에 봉해짐. 서연(書筵)에서 경서와 예법에 관한 시독(侍讀)을 맡음

57세 공민왕 2(1353)에 청평산에 입산

62세 공민왕 7(1358)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

63세 공민왕 8(1359)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4만 명의 홍건적을 물리침

67세 관직에서 물러나 강화도 홍행촌(紅杏村)에 해운당(海雲堂)이라는 집을 지음

68세 병으로 사망 (1364)(2)

 

 

 

출처; 9천년 한민족사의 위대한 증언 안경전의『 환단..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안경전은 환단고기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고려의 25세 충렬왕 때(1297) 경상도 고성에서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암은 뛰어난 학자와 관리를 배출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은 고종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고, 조부 이존비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학사, 진현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한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이러한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이가 바로 손자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강화도 마리산 보제사에 들어가 학동초당을 짓고 3년 동안 유가 경전과 우리 고대사 기록을 탐독하였다.

 

이암은 1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경전을 비롯한 여러 문헌을 관리하는 비서성의 교감에 임명되었다(1314). 그때 원나라가 원래 송나라에서 비장하던 4천 권의 책을 보내왔고 이암은 비서성의 랑()과 주부(主簿)로 승진하면서 그 모든 서적을 탐독하였다.

 

이 무렵 고려의 왕권과 국권은 밖으로는 원의 내정 간섭으로 안으로는 원과 결탁한 간신배의 횡포로 그 위세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후 충혜왕이 등극하고 다시 충숙왕이 복위하는 난세 속에 이암은 강화도에 귀양을 갔다. 어린 시절에 수학했던 강화도에 죄인의 신분으로 다시 왔을 때 이암의 나이는 36세였다. 이암은 그곳에서 주역을 연구하고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에 관한 책을 섭렵하였다.

 

3년 후 유배에서 방면되어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이암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이명(李茗)과 범장을 만나 한민족사 회복을 위한 사서 집필을 결의한 것이다. 이 세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그곳에서 소전거사라는 인물로부터 석굴 속에 감춰져 있던 고서적들을 나누어 받았다. 그것은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시대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암은 소전거사에게 들은 이야기와 전수받은 책을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백진훈단군세기, 복애거사 범장은 북부여기를 청평거사 이명은 진역유기를 지었다.

 

이암은 여생을 단군세기완성에 모두 바쳤다. 언제부터 집필하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단군세기서문에 의하면 흥행촌수로 살기 시작한 그해 10월에 단군세기를 완결하였다. 서문으로 글을 마감한 후 겨우 일곱 달이 지난 이듬해 5월 이암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암은 단군세기를 지어 고조선 2,096년 역사를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그 서문에서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피력하였고 국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 곧 구국의 길임을 토로하였다. 나아가 인간은 어떻게, ,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참된 삶은 무엇인가하는 인간론의 명제를 명쾌한 필치로 풀어냈다. 또한 신교의 우주론을 천지인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신교사상의 정수를 뽑아 신교의 역사관을 정립하였다.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논리 정연한 구조로 정리된 단군세기서문은 대학자의 지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만고의 명문이다. 행촌 이암은 실로 원형문화 신교 역사관의 정립자이다.(3)

 

 

 

 

<주>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암(李嵒)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D%B4%EC%95%94&ridx=0&tot=7

 

 

 

(2)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5%94_(%EA%B3%A0%EB%A0%A4)

 

 

 

(3) 안경전, 환단고기해제 . 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5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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