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 (14)부하문화(富河文化) 본문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14)
6. 14 부하문화(富河文化); 7200년 전~7000년 전(BC5200~5000년)
『중국 내몽고자치구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富河溝門)유적을 통해 확인되었다. 부하문화(富河文化)는 서납목륜하(西拉木倫河) 이북지역인 오이길목륜하(烏爾吉木倫河) 유역에 집중하고 있으며,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의 다음 단계에 속한다. 이전 문화기의 조보구문화와 관련되며, 1962년에 조사된 파림좌기(巴林左旗)의 부하구문(富河溝門)유적을 통해 그 특징을 알 수 있다. 부하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2700년경으로 보고되고 있다.
부하구문유적에서 출토된 주거지는 37기이며, 대부분 방형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중앙에는 위석노지(圍石爐址)를 설치하고 있는 구조이다. 이 유적에서는 원형인 주거지도 4기가 조사되었으며, 노지는 원형과 방형이 있다. 유물은 토기를 비롯하여, 농경 관련 도구, 사슴, 멧돼지, 개 등의 동물뼈가 출토되고 있어 수렵과 농경을 겸한 생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토기는 심복통형관(深腹筒形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직복발(直腹鉢), 곡복발(曲腹鉢), 두(豆), 소배(小杯) 등이 소량 보이고 있다. 문양은 빗살점문이 종방향으로 ‘之’자문을 연접하여 시문하고 있으며, 이 ‘之’자문토기가 부하문화토기의 특징이다. 부하문화기의 통형관은 조보구(趙寶溝)문화의 것과 동일하며, 문양도 유사하다. 석기는 세석기, 몸돌, 긁개, 찍개, 박편석기, 화살촉, 첨상기(尖狀器), 돌자귀, 돌삽, 돌보습, 석추 등이 있으며, 골각기는 칼, 골화살촉, 바늘, 복골(卜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복골은 사슴이나 양의 견갑골을 사용하고 있으며, 은허(殷墟)의 복골이 바로 여기에서 전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하문화(富河文化)는 조보구(趙寶溝)문화의 영향을 받아 지속되었으며, 부하문화 이후에는 홍산(紅山), 소하연(小河沿) 문화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부하문화,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813)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발해연안문명의 여명을 밝히다
갑골문화와 점복신앙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사회는 신탁(神託)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이다. 백성은 지혜가 출중하고 용맹한 사람의 출현을 갈망하고 그와 같은 인물을 추대하여 지도자로 뽑는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부족함이 많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그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이 꼭 인간을 다스리고자 할 때는 으레 한 인간에게 신령이 하강하여 그로 하여금 신을 대신토록 했다. 이때 신탁을 위임받은 인간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신으로 위장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신을 부르고 계시를 받아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동해 신을 대신하여 집행한다. 그것이 곧, 신앙이며 바로 고대 사회의 정치다. 종교의 바이블과 같다.
동방의 고대사회에서는 점복신앙(占卜信仰)이 있었는데, 짐승의 어깨뼈[견갑골(肩甲骨)]나 거북이 뱃바닥[구복갑(龜腹甲)]을 불로 지져 반대편에 조짐[조문(兆紋)]이 나타나면 그 터진 방향을 판단하여 길흉(吉凶)을 점쳤다. 이것이 바로 종교였다. 점복이라는 것은 종교적으로는 신을 대신하는 도구요, 정치적으로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것이 갖는 목적은 곧, 씨족사회나 군장사회의 수장 또는 왕족사회의 제왕이 점복을 통해 신을 불러 그 뜻에 따라 자신의 권력이나 지위를 강화하고 지도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고대 사회의 갑골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부여나 고구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고대사회에서도 이미 존재했다. 가장 비근한 예로 3세기 말엽에 쓰인 중국 정사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부여에는 “有軍事亦祭天 煞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이라 하였다. 즉, 군사행동이 있을 때마다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를 잡아 그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하였는데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송나라 때의 『태평어람(太平御覽)』에 보면, 고구려에서도 이와 같은 점복이 있었다고 하였다.
예로부터 나라의 국가대사(國家大事)[고대 정치]는 사(祀)와 융(戎)이라고 하였다. 곧, 제사와 군사가 수장이나 왕의 임무일 뿐만 아니라 점복[종교]을 주재하는 것도 왕의 임무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단군(檀君)이 그러하였고, 신라의 제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그러하였다. 그것은 곧, 우리가 흔히 일컫는 제정일치(祭政一致)로 은나라 말기에는 왕이 손수 점을 치기도 하였다[왕복정(王卜貞)].
원시종교로서 최초의 갑골(甲骨)은 신석기시대에 발해연안 북부에서 발생하여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신앙되었다.
갑골이란 구갑(龜甲, 주로 뱃바닥)이나 사슴·양·돼지·소 등 수골(獸骨)[주로 어깨뼈]을 이용하여 점을 치는 것[점복(占卜)]을 일컫는데, 이를 함칭하여 갑골이라 하였다. 구갑이 점복 재료로 출현하기 전에는 흔히 수골만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복골(卜骨)이라 했다. 여기에서 복(卜)이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灼龜也 象兆之縱橫也”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구갑[혹은 수골]을 불로 지져서 뼈판 뒷면에 좌우로 터진 조문을 살펴 길과 흉을 판정하는 것을 말한다. 문자가 없는 것을 무자복골(無子卜骨)이라 한다. 은나라에서처럼 문자가 있는 복골을 갑골문자(甲骨文字)라고 한다.
갑골은 동방의 고대사회 중에서도 중국의 은나라에서 가장 많이 숭상했다. 하느님[상제(上帝)]을 위시하여 조상신과 산천·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대상으로 점복활동을 해왔다. 점복의 목적으로는 위로 국가 대사(大事)로부터 아래로는 통치자의 일상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였다. 예컨대 제사·정벌·연세(年歲, 연수(年壽))·천기(天氣)·화복(禍福)·전렵(田獵)·유력(遊歷)·질병·생육(生育) 등 많은 것을 위해 행해졌다. 이와 같은 점복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우리는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甲骨文)이라고 하는데 이 기록은 곧, 역사 그 자체이다. 복사는 주문을 묻는 말[문복(問卜)]과 이에 대한 응험(應驗)을 새긴 것[험사(驗辭)]을 말한다. 이와 같이 점복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유형·무형의 산물을 우리는 갑골문화라고 한다.
서요하 유역 부하구문(富河溝門) 유적 출토 복골(卜骨)
최초의 갑골은 발해연안 북부서요하 상류의 부하구문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500년경)에 속한다.
갑골문화야말로 동방문명의 가장 대표적인 문명적 요소이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문명을 문자의 출현 시기로부터 본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동방문자, 즉 한문은 갑골문자로부터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갑골문자의 재발견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은 1899년에 청나라 국자감 좨주(祭主, 지금의 북경대학 총장)인 왕의영(王懿榮)이 병 치료 중에 탕재 안의 용골[땅에서 파낸 뼈의 화석]이라는 약재에서 문자를 발견하여 드디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은나라의 역사는 전설로 치부하려던 의고파(擬古派)가 성행하였는데, 갑골문자의 발견으로 은나라의 역사는 진정한 역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동양 고고학뿐만 아니라 세계 고고학의 최대의 개가였다. 이 새로운 고고학적 성과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처럼 은나라가 황하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발해연안 북부에서 기원한 사실을 밝혀주었다.
지금까지 가장 이른 시기의 복골은 1962년 서요하 상류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 유역,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富河溝門)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우리가 누누이 확인하였듯이 이곳은 동이족의 분포지역이다. 이 유적에서는 복골 이외에 ‘之’자형 빗살무늬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방사성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3500~3000년으로 나왔다.
부하구문 유적 출토의 복골은 사슴의 어깨뼈에 아무런 가공을 하지 않고 곧바로 불로 지져 점을 친 흔적[작흔(灼痕)]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초기의 복골은 주로 발해연안의 부하문화(富河文化)나 하가점하층문화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은나라 때에 오면 비교적 더 발전한 단계로 소(牛)의 어깨뼈[견갑골(肩胛骨)]를 주로 사용하지만 이보다 더 귀한 것으로는 거북이의 뱃바닥을 점복 재료로 사용한다. 그리고 은나라 때는 거북이 뱃바닥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 조짐[조문(兆紋)]이 잘 나타나도록 점복 재료의 배면(背面)에 약간의 구멍[찬조(鑽鑿)]을 파는 기술상의 개혁이 이뤄지고 있다. 은나라의 갑골은 발해연안 초기 복골에서 발전한 것이다. 소의 어깨뼈나 거북이 뱃바닥의 뒷면을 파서 불로 지진 다음 점복 내용[복사(卜辭)]을 앞뒷면에 기록하였다.
북표시(北票市) 하가점(夏家店)하층문화 복골
요녕성 북표시 강가둔(康家芚) 석성지(石城址)에서 출토되었다.
산동반도 용산문화(龍山文化) 복골
중국 산동성 치평 상장(尙莊) 유적에서 출토된 소의 견갑골에 점을 친 복골이다. 용산문화 시기(기원전 2500~1800)의 것이며, 크기는 33.5cm이다.
지금까지 갑골문자는 주로 은나라 때[기원전 14세기~11세기]의 수도였던 중국 하남성 은허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지만, 초기의 갑골문화는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산동반도, 서쪽으로는 태행산 이동과 황하 이북, 북으로는 대흥안령 이남의 요녕 지방과 요동반도, 그리고 흑륭강 이남의 송화강, 두만강[중국에서는 도문강(圖門江)이라 함] 유역에 분포되어 있다. 물론 이들 지역은 두말할 나위 없이 동이족이 활동했던 지역이다.
은(殷)나라 갑골과 갑골문자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중국 하남성 안양현 소둔 은허에서 발견된 은나라 무정왕 때의 갑골문자. 우리나라에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유일하게 한 점이 소장되어 있다.
은나라 갑골의 배면(背面)의 찬조(鑽鑿) 부분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는 1959년 두만강 유역의 함경북도 무산읍 범의구석[호곡동(虎谷洞)]의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문화층에서 여러 점의 복골이 발견된 적이 있다.6)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고고학 성과이다.
저자는 1970년대에 국립대만대학(國立臺灣大學)에서 중국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늘 이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1980년에 「渤海沿岸無字卜骨之硏究」[『故宮季刊』 16-1~3, 國立故宮博物院, 臺北, 1981~82]를 집필한 바 있다.
김해 부원동(附院洞) 출토 복골(卜骨)
경상남도 김해시 부원동 유적에서 출토된 복골은 사슴의 견갑골을 불로 지져 점을 친 철기시대의 갑골(甲骨)이다. 기원 전후의 변한(弁韓)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문에서 갑골문화의 기원을 발해연안이라 논증하였고, 아울러 문헌상에 보이는 우리나라 갑골문화를 연구하면서 장차 한반도 안에서 더 많은 갑골[복골]이 출현하기를 고대했다. 다행히 1981년에 경남 김해시 부원동(府院洞) 유적에서 삼한(三韓)시대 내지 가야(加耶)시대의 복골이 발견되어 이와 같은 기대가 달성되었다.7)
이어서 김해시 봉황동(鳳凰洞)유적과 삼천포시 늑도(勒島)유적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복골이 출토되어 변한(弁韓) 혹은 가야시대에 복골을 사용한 사실이 실증되었다. 내륙지방에서는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林堂) 저습지(低濕地)유적에서 복골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986년부터 수년 동안 발굴된 전남 해남군 군곡리(郡谷里) 조개무지[패총(貝塚)]에서 철기시대 또는 삼한시대[마한(馬韓)]의 것으로 보이는 다량의 복골이 출토되었는데, 보고자는 이 유적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까지 추정하고 있다.8) 그리고 금강(錦江) 유역의 하구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城山面) 여방리(余方里) 남전(藍田) 조개무지에서도 복골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백제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마한 사회나 백제 초기사회에서도 강력한 지배층에 의한 정치가 존재했음이 복골의 발견으로 증명되었다.
일본에서도 야요이(彌生)시대부터 고분시대에 걸쳐 복골 습속(習俗)이 유행하였다. 특히 일기도(壹岐島)에서 발견되고 있어 한반도로부터의 그 전파과정을 짐작케 한다.9)
무산읍 범의구석[호곡동(虎谷洞)] 유적 출토 복골
1959년 함경북도 무산읍 범의구석 8호 집자리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복골. 이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갑골이다. 크기 14.2cm.
마한(馬韓)시대 복골
전라남도 해남군 군곡리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마한시대의 갑골. 비록 문자를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재료, 방법, 행위 및 목적이 은나라의 갑골과 동일하다.
금강(錦江)유역 출토 복골
백제 초기의 조개무지[패총(貝塚)]에서 출토되었다.
삼한(三韓)시기 복골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은 삼한시기(기원 1, 2세기경) 압독국(押督國)이 있었던 곳이다.
일본의 복골
일본 가나가와(神奈川) 마구찌(問口) 동굴에서 출토된 복골은 동물의 견갑골을 이용하여 점을 친 흔적이 남아 있다. 남은 길이가 10cm, 시대는 야요이시대 후기로 대략 3세기경이다.
우리는 흔히 갑골문자가 중국의 은나라에서 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갑골하면 으레 은나라의 것으로 연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민족과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발해연안에서 발생하여 서남쪽으로 내려가 황하 이북의 은허에서 문자[갑골문(甲骨文)]가 있는 갑골문화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에 만주 지방과 한반도에서 갑골문화가 유행하고, 이어서 일본으로 전파되어 야요이시대에 유행하였다. 이 갈래에서는 비록 문자를 대동하고 있지 않지만 갑골의 점복 재료나 방법, 점복 행위 및 목적은 은나라의 갑골문화와 일치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갑골문화와 점복신앙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968017&categoryId=42954&cid=42954
<참고자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부하문화,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813
[네이버 지식백과] 갑골문화와 점복신앙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968017&categoryId=42954&cid=4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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