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선비 고고학 · 문화유산 본문

여러나라시대/북위(선비)

선비 고고학 · 문화유산

대야발 2024. 8. 1. 18:31
SMALL

 

 

 

 

 

 

미소띤 얼굴, 네모난 모자 “꼭 닮았다”…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 유물전

  • 동아일보
  • 업데이트 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김상운 기자

 

국립부여박물관-中 뤄양박물관

충남 부여 정림사 터에서 발굴된 인물상(왼쪽 사진)과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에서 나온 인물상. 둘 다 농관(籠冠)을 쓴 모습이 닮았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후덕한 얼굴 위로 각이 진 네모난 모자가 서로 닮았다. 중국인들의 옛 복식으로 알려진 농관(籠冠)을 쓴 인물상이다. 하나는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永寧寺), 나머지는 부여 정림사(定林寺) 터에서 나왔다. 영녕사는 6세기 초엽, 정림사는 6세기 중엽 이후 각각 건립됐다. 백제 사비시대의 왕실 사찰이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중국 뤄양(洛陽)박물관과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전시는 백제 사비도성 중심에 자리 잡아 왕실 사찰로 추정되는 정림사의 위상을 조명하고,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뒀다.

뤄양박물관은 인물상을 비롯해 총 46점을 제공했다. 일제강점기 정림사 터를 조사한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의 발굴일지가 처음 공개된다. (1)

 

 
 

중국 산시성① 역사의 수수께끼를 간직한 땅

송고시간2015-02-06 08:49

 

(다퉁=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산시(山西)성의 성도인 타이위안(太原)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온통 황토 빛이었다.

 

고원에는 골이 무수히 패어 있었고, 물줄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메마르고 푸석푸석한 기운이 대지를 휘감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작은 가옥마저 없다면 사막으로 착각할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건조한 토지의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높은 건물들이 나타났다.

사실 중국에는 산시성이 두 곳 있다. 산시(山西)성과 산시(陝西)성이다. 한문을 우리말로 읽으면 '산서성'과 '섬서성'이지만, 중국어 표기법은 같다. 두 고장은 동서로 맞닿아 있으며, 고도인 시안(西安)이 성도인 산시(陝西)성이 더 이름난 편이다.

중국에는 성마다 약칭이 있는데, 중국어 발음상으로 산시(山西)성은 '진'(晋)이고 산시(陝西)성은 '친'(秦)으로 매우 비슷하다. 두 글자는 각 지역의 역사적 뿌리를 암시한다.

진(晋)나라는 기원전 8세기부터 비롯된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이다. 이때는 주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져 지방에서 새로운 세력이 발호했다. 진나라는 춘추오패의 하나로 일컬어질 만큼 상당한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는 진(秦)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우면서 끝났다. 진나라의 수도는 시안 근처의 셴양(咸陽)이었다. 이후 시안은 수많은 왕조의 본거지로 명성을 떨쳤다.

산시(山西)성은 역사의 중앙 무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 근거가 오늘날 중국 정부가 귀중한 문화유산을 뽑아 공표하는 '전국 중점문물 보호단위'다. 산시성에는 전국 중점문물 보호단위가 452개로 31개 성·시·자치구 중 가장 많다. 그에 반해 산시(陝西)성은 절반 수준인 243개에 불과하다.

또 송나라 이전에 지어진 목조건축물 중 약 70%가 산시(山西)성에 자리한다. 중국 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보려면 산시(山西)성으로 가야 하는 이유다. 거칠고 황량해 보이는 땅에 수많은 보물이 숨어 있다.

◇ 대륙의 경계에 꽃핀 불교 예술

타이위안에서 약 350㎞ 거리에 있는 다퉁(大同)은 산시성의 북단에 있는 제2의 도시다. 다퉁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네이멍구 자치구에 닿는다. 다퉁은 지리적으로 '북적'(北狄)이라고 불린 오랑캐의 영지에서 지척이었다.

선비족인 탁발씨는 북위를 건립하고 398년 다퉁을 수도로 삼기도 했다. 북위는 수나라가 전역을 통일하기 전까지 계속된 남북조시대의 한 축이었다.

서쪽에서 전래된 불교는 북위에서 융성했다. 초기에는 도교를 숭상하고 사찰과 승려를 탄압했으나, 점차 불교를 신봉했다.

북위 사람들은 독실한 불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했다. 그중 하나가 동굴을 판 뒤 부처상을 조각한 '석굴'이었다. 중국 4대 석굴로 불리는 다퉁의 윈강(雲崗) 석굴과 뤄양의 룽먼(龍門) 석굴이 북위의 작품이었다. 뤄양은 494년부터 북위의 수도였다.

5세기 중반 북위의 종교 장관이었던 담요(曇曜)가 건의해 제작된 윈강 석굴은 형태와 크기가 다채로운 불상의 전시장이다. 1㎞ 길이의 절벽을 따라 석굴 252개, 불감 1천100여 개에 5만 개 이상의 부처가 조각돼 있다.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17m에 이르고, 작은 석상은 2㎝에 불과하다.

윈강 석굴의 주요 동굴은 1호굴부터 53호굴까지 번호로 지칭하는데, 관람객은 5∼20호굴만 둘러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청나라 때 세워진 누대를 통과해야 하는 5호굴과 6호굴이 특히 아름답고 화려하다. 비록 많은 부분이 풍화되고 훼손됐지만, 압도적인 규모와 미감에 탄성이 터진다.

다퉁 남부에 있는 쉬안쿵쓰(懸空寺)도 북위가 만든 걸작이다. 쉬안쿵쓰는 중국의 5대 명산을 뜻하는 오악 중 하나인 헝산(恒山)에 들어선 고찰이다.

명칭처럼 '하늘에 걸려 있는 절'로, 수많은 나무 기둥을 박아 낭떠러지에 건물을 지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장관'(壯觀)이라는 글자가 쓰인 바위 위에 돋을새김처럼 위태롭게 붙어 있다.

좁은 계단과 복도를 오가며 경내를 둘러볼 수 있는데, 전각의 꼭대기에 오르면 시선을 아래로 두기가 쉽지 않다. 절묘한 위치와 기이한 모양새가 조화를 이룬 절경이다.(2)

psh59@yna.co.kr

 

 

 

삶과 죽음 경계에서 만났다, 1600년 전 구도자들 염원
중앙일보
입력 2015.02.10 00:21

업데이트 2015.02.10 01:12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7129627

 

중국 돈황 막고굴의 불상 중 가장 큰 와불(臥佛)이다. 당나라 때 조성한 148호 굴에 있다. 부처의 열반상 뒤로 제자들이 조각돼 있다. 동굴 천장에는 1000개의 부처를 그린 천불상(千佛像)이 보인다.
원택 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 스님) 주최로 지난 2~6일 시안에서 돈황까지 중국 불교석굴을 순례했다. 옛날에는 꼬박 석 달이 걸렸다는 실크로드 2000㎞를 버스와 야간열차를 타고 따라갔다. 돈황의 석굴과 사막에는 목숨을 걸고서 법(法)을 구하려 했던 옛 수행자들의 간절함이 오롯이 녹아 있었다.

 

 중국 시안(西安)과 란저우(蘭州)를 거쳐 12시간 동안 야간열차를 타고 4일 돈황에 도착했다. 새벽이라 아직 캄캄했다. 동행한 동국대 황순일(불교학부) 교수는 “돈황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돈황 역사(驛舍)도 새로 지었고, 시내의 거리도 엄청나게 넓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는 중국 불교의 힘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수년 전만 해도 돈황까지 오는 열차가 없었다고 한다. 근처 유연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130㎞를 더 들어가야 할 만큼 돈황은 오지였다.

 

 돈황은 중국땅의 서쪽 끝이다. 돈황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타클라마칸은 ‘돌아올 수 없는 땅’이란 뜻이다. 실크로드의 상인들과 구법승들은 중국의 오랜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시안)에서 란저우, 돈황을 거쳐 사막을 건넌 뒤 멀리 인도와 로마까지 갔다. 그건 동·서양 문명을 잇는 거대한 징검다리였다. 불교 문명 역시 이 비단길을 따라 동서를 오갔다.

 버스는 시내에서 20㎞ 떨어진 돈황의 막고굴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뺨을 때렸다. 현지인 가이드는 “여름에는 섭씨 44도, 겨울에는 영하 24도까지 떨어진다”고 했다. 막고굴 입구로 들어서자 사막의 모래와 자갈이 뭉쳐서 만든 높다란 절벽이 나타났다. 그곳에 492개의 동굴이 있었다. 1600년 전부터 하나씩 생겨난 거대한 석굴 사원이다. 동굴마다 문이 잠겨져 있었고, 막고굴 안내인이 열쇠를 들고 다니며 안내했다.

 

4세기 북위 시대에 만든 동굴에 들어섰다. 캄캄했다. 손전등을 비추자 마술처럼 벽화가 드러났다. 사방의 벽에도, 천장에도, 바닥에도 연꽃 무늬와 부처상, 비천상 등이 즐비했다. 정면에는 붉은색과 녹색으로 채색된 불상이 앉아 있었다. 동굴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미술관이었다. 북위 시대부터 수·당·송·원·명·청나라까지 무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성된 동굴들이 사막의 절벽에 펼쳐져 있었다.

돈황 석굴 벽화에 등장하는 고구려인의 사냥 모습.

 

동굴마다 고유 번호도 있었다. 335번 굴에 들어섰다. 당나라 때 조성했다는 벽화에는 머리에 깃을 꽂은 인물이 둘 그려져 있었다. 현지인 가이드는 “저 두 사람은 고구려 왕자들이다. 복장도 고구려 양식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동굴에는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똑 닮은 벽화가 있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인물, 그 역시 고구려인이라고 했다.

 

 중국 최초의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가 막고굴에 조성한 대불(大佛)인 북대상(北大像·96호굴)은 놀랍게도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여성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 문무왕 박사는 “측천무후가 33m 높이의 여성적인 불상을 세워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과 구법승들에게 돈황은 삶과 죽음의 땅이었다. 서쪽으로 가는 이들은 목숨을 걸고 사막을 건너야 했고, 서쪽에서 오는 이들은 “이제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곳이 돈황이었다. 동행한 원택 스님은 “당시 구법승들이 남긴 기록에는 사막을 건너다가 사람의 해골이 보이면 ‘내가 가는 길이 맞구나’ 하고 오히려 이정표로 삼았다고 한다. 현장 법사도 이 길을 따라 인도로 가 불교 경전을 가져왔다. 목숨을 걸고 법을 구하던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간절했겠는가”라고 말했다.

 

 17호굴에도 들어갔다. 『육조단경 돈황본』 등 5만여 권의 불교 경전과 유서가 발견돼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곳이다. 감회가 남달랐다. 신라 승려 혜초의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도 1900년에 이 동굴에서 나왔다.

 막고굴에서 나와 월아천으로 갔다. 사막과 오아시스가 펼쳐졌다. 모래바람이 불었다. 끝없는 모래 언덕, 바람이 불면 모래가 운다 하여 붙은 이름이 명사산(鳴砂山)이다. 그 울음을 뚫고서 구법승들은 인도를 향해 발을 뗐다. 저 모래 어딘가 그들이 밟았던 발자국이 있으리라. 그곳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3)

돈황=글·사진 백성호 기자

 

 

 

  • 네이멍구자치구 1500년 전 북위시대 귀족 무덤 발견
  • 2014.03.11 22:04

[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ㆍ이준용 인턴기자]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에서 1500년 전 북위시대 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다. 이 유적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 당시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왕(新華網)은 9일(현지시간) 네이멍구자치구 시린궈러(錫林郭勒)초원에서 1500여년전 북방 민족 출신 귀족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목관과 유골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고분지역에서 발견된 이 목관의 길이는 2.7m, 넓이는 1.2m, 높이는 1.4m였으며 소나무재질로 만들어졌다. 관의 머리쪽은 비단으로 덮여 있었고 외부는 금으로 장식돼 있었으며 사람 형상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고 신화왕은 전했다.


관 속에 위치한 유골 주변은 금색의 비단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유골은 금속제 띠를 차고 있었다. 또한 벨트와 검, 토기 및 각종 장신구들이 함께 출토돼 신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고분 위치와 유물들을 통해 무덤의 주인이 약 1500여년 전 북위시대 귀족의 것으로 추정했으며 어떤 민족이었는지, 정확한 신분과 성별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안용더(安泳鍀) 네이멍구자치구 문화재관리국 국장은 “이 무덤은 네이멍구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이전 중국에서 발견된 북위시대 유물 중 보기 드물 정도로 보존이 잘 됐다”며 “유물을 통해 북위시대의 장례, 의복문화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 유적은 지난해 10월 중순 발견됐다. 그러나 도굴 위험 때문에 11월 시린궈러 문화재관리국으로 옮겨졌다.(4)
ygmoon@heraldcorp.com
 
 
 
 
 

고구려 출신 북위(北魏) 황태후 묘지 확인

2004. 11. 8. 05:08
 
 
문소황태후와 그 일가족, 민경삼 교수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3살에 부모를 따라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왕조인 북위(北魏.386-534)에 들어가 후궁을 거쳐 황태후 지위까지 오른 고구려 출신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 고조용(高照容.469-519) 묘지명(墓誌銘)이 중국에서 확인됐다.

그의 딸과 사위이자 조카, 또 다른 조카 묘지명도 아울러 밝혀졌으며, 이외에도 주로 북위 왕조에서 활약한 고구려 혹은 요동(遼東) 출신자나 그 후예 9명의 묘지명도 아울러 공개됐다.

충남 천안 소재 백석대학 중국어과 민경삼(閔庚三. 37) 교수는 중국 역대왕조도읍인 뤄양(洛陽)과 시안(西安) 일대 출토 고대 묘지명을 조사한 결과 현재까지 100여 점을 헤아리는 고대 한인(韓人) 계통 사람들의 묘지명을 확인했다고 7일 말했다.

 

이 중 북위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년)인 원굉(元宏)의 귀인(貴人ㆍ후궁의 한 등급)이 되었다가, 그의 아들인 원각(元恪)이 제위를 이어 세종(世宗) 선무제(宣武帝ㆍ재위 500-515년)가 되자 황태후(皇太后)에 책봉된 문소황태후와그 일가족 묘지명은 특히 관심을 끌고 있다.

문소태후 묘지명은 출토 장소와 시기가 정확하지 않은 가운데 `낙양출토역대묘지집승"(洛陽出土歷代墓誌輯繩)이라는 묘지명 탁본집에서 그 존재가 확인됐다.

이 묘지명(59.5 x 49.5cm)은 일부 훼손됐으나, `魏文昭皇太后山陵誌銘幷序"(위문소황태후산릉묘지명병서)라는 제목 아래 대략 20여 행에 20여 글자가 확인된다.

여기에는 묘주(墓主)인 문소황태후 고조용에 대해 `기주 발해 수인"(冀州 渤海蓚人) 출신으로 효무제의 귀인(貴人)이었다가 뒤에 아들이 즉위하자 황태후로 책봉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문소황태후는 `위서"(魏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계통인 아버지 고양(高양<風+易>)과 어머니 개씨(蓋氏) 사이에서 난 4남3녀 중 가운데 딸로서, 13살(482년) 이전에 가족을 따라 "발해"에서 북위로 왔다가 황제의 어머니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또 기존 문헌 기록에 의하면 문소황태후는 작은오빠인 고언(高偃)의 딸을 아들인 선무제(宣武帝)의 비로 들이는 한편 큰오빠인 고곤(高琨)의 아들 고맹(高猛)은역시 자기 소생인 장락장공주(長樂長公主) 원영(元瑛)과 혼인케 했다.

민경삼 교수는 문소황태후 외에 그 일가족인 원영과 고맹, 작은오빠 고언의 아들인 고정(高貞)의 묘지명도 확인했다.

 

이 외에도 민 교수는 중국 산시(陝西)성박물관(일명 시안비림<西安碑林>) 소장`원앙칠지재장석"(鴛鴦七誌齋藏石)이라는 묘지명 탁본집에서 고구려 출신 혹은 그후예로 간주되는 한인(韓人) 9명의 묘지명도 찾아냈다.

이들은 대체로 6-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동이족(東夷族) 출신으로, 각각 실명이▲왕정(王禎) ▲왕기(王基) ▲부인왕씨(夫人王氏) ▲이거란(李渠蘭) ▲공손의(公孫의<개견 변에 奇>) ▲공손략(公孫略) ▲고승호(高僧護) ▲고규(高규<糾에서 실사 변대신 벌레 충 변>)이다.

백 교수는 "묘지명은 중국과 고구려 사이의 교류나 이민에 관한 실상을 전해주고, 문헌기록에서 탈락한 정보를 보충하고 있다"면서 "중국에는 이런 묘지명이 수없이 많은 만큼 이에 대한 꾸준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5)

<사진있음> taeshik@yna.co.kr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주>
 
 
 
 
 
 
 
 
 
 
 
 
 
 
 
 
 
 
 
 
 
 
 
 
 
 
 
 
 
 


LIST

'여러나라시대 > 북위(선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위(선비)  (2) 2020.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