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북위(선비) (8) 세계문화유산 용문(룽먼) 석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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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伊水)가 흘러가는 양쪽에 용문산과 향산(香山)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수 양쪽에 솟은 두 산을 멀리서 보면 마치 문처럼 보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곳을 ‘이궐(伊闕)’이라고 불렀다. ‘궐’은 문이라는 뜻이니, 이궐은 이수가 흘러가는 곳의 문을 의미한다. 서쪽 문에 해당하는 게 용문산(서산)이고 동쪽 문에 해당하는 게 향산(동산)이다.
이 두 산의 암벽에 마치 벌집을 뚫어 놓은 듯한 수많은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남북으로 1㎞에 달하는 구간에 2300여개의 석굴과 감실, 10만존(尊)에 달하는 불상, 2800여개의 비각제기(碑刻題記)가 존재한다. 물론 이렇게 엄청난 규모를 갖추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비율로 따지자면 북위 때 조성된 석굴이 30%이고, 당나라 때 조성된 석굴이 60%다.
빈양중동이 완공되기까지 24년(500~523)이나 걸렸다. 높이 10m 가량에 너비와 안팎 깊이 각각 11m 가량인 석굴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그 세월의 열매들이 빈양중동에서 뜯겨져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311년, 흉노가 서진(西晉)의 수도 뤄양을 함락한다. 포로가 된 회제(懷帝)는 핑양(平陽)으로 끌려간다. 영가(永嘉) 5년에 벌어진 이 일을 ‘영가의 난’이라고 한다.
영가의 난이 있기 전, 서진의 황실에서는 무려 16년(291~306)에 달하는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바로 ‘8왕의 난’이다. 당시는 가뭄·기근·돌림병으로 수많은 백성이 죽어가던 때였다. 서진의 멸망은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서진이 골육상잔의 권력투쟁에 빠져 있을 당시, 흉노의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 훗날의 전조(前趙))은 날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유연은 뤄양을 두 차례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한다. 이후 왕위에 오른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이 결국 뤄양을 함락하게 된다.
핑양으로 끌려간 회제는 유총의 신하가 된다. 어느 날 유총은 회제에게 이렇게 물었다.
“경의 집안은 어찌하여 골육상잔을 벌인 것이오?”
“폐하의 대한(大漢)이 장차 천명을 받을 것이기에, 폐하를 위하여 저희가 스스로를 정리한 것이옵니다. 이는 하늘의 뜻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옵니다. 만약 신의 집안에서 무황제(武皇帝, 사마염)의 대업을 받들고 구족(九族)이 화목했다면, 폐하께서 어찌 천하를 얻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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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 |
중국 석각예술의 최고봉
회제의 대답을 듣고 유총은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영가의 난은 한족 왕조가 이민족에게 멸망당했다는 점에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황제가 구차하게 목숨에 연연하여 이민족 군주의 발밑에 엎드리는 비굴함이란! 회제뿐만이 아니었다. 황후·대신·장군 할 것 없이 죄다 그랬다. 역사학자 첸무(錢穆)는 이들을 “염치와 절개가 없다”(<국사대강(國史大綱)>)고 평가했다.
영가의 난 이후 뤄양은 황무지로 표현될 만큼 폐허가 된다. 이후 뤄양의 부흥은 북위 효문제(孝文帝, 467~499)에 의해 이루어진다. 효문제는 180년 가까이 폐허로 버려져 있던 뤄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효문제는 뤄양에 수도를 건설하는 것과 더불어서 뤄양 남쪽 교외에 대규모 석굴사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용문(龍門)석굴’이다.
이수(伊水)가 흘러가는 양쪽에 용문산과 향산(香山)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수 양쪽에 솟은 두 산을 멀리서 보면 마치 문처럼 보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곳을 ‘이궐(伊闕)’이라고 불렀다. ‘궐’은 문이라는 뜻이니, 이궐은 이수가 흘러가는 곳의 문을 의미한다. 서쪽 문에 해당하는 게 용문산(서산)이고 동쪽 문에 해당하는 게 향산(동산)이다.
이 두 산의 암벽에 마치 벌집을 뚫어 놓은 듯한 수많은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남북으로 1㎞에 달하는 구간에 2300여개의 석굴과 감실, 10만존(尊)에 달하는 불상, 2800여개의 비각제기(碑刻題記)가 존재한다. 물론 이렇게 엄청난 규모를 갖추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비율로 따지자면 북위 때 조성된 석굴이 30%이고, 당나라 때 조성된 석굴이 60%다.
당나라 이후에도 석굴 조성이 계속되긴 했지만 그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북위와 당나라 때가 용문석굴 조성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용문석굴은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는 용문석굴을 “중국 석각예술의 최고봉”이라고 평가했다.
용문석굴이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더욱 유효하다. 먼저 서산을 둘러본 뒤에 이수의 다리를 건너 동산을 보면 되는데, 석굴 대부분은 서산에 분포해 있다. 잠계사·빈양삼동·마애삼불·만불동·연화동·봉선사·약방동·고양동은 특히 꼼꼼히 살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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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양중동 |
부조들이 미국 미술관으로 간 까닭은
서산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석굴이 잠계사(潛溪寺)다. 당나라 초기에 조성된 잠계사의 주불은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을 믿으면 서방 정토(淨土)에 태어난다는 정토종의 신앙을 반영한다. 잠계사의 높이와 너비는 각각 9m가량이고, 바깥에서 안쪽까지의 깊이는 7m가량이다. 돌산을 깎아 석굴과 불상을 만든 정성과 노고, 거기엔 얼마나 많은 바람과 간절함이 깃들어 있으랴.
빈양삼동(賓陽三洞)은 빈양중동·빈양남동·빈양북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위의 선무제(宣武帝)가 아버지 효문제의 공덕을 기리며 착공한 것인데, 북위 때 완공된 것은 빈양중동뿐이다. 빈양중동이 완공되기까지 24년(500~523)이나 걸렸다. 그 사이 선무제는 세상을 뜨고, 여섯 살의 효명제(孝明帝)가 즉위(515)한 뒤 몇 년이 더 지나서야 완공된다.
높이 10m가량에 너비와 안팎 깊이 각각 11m가량인 석굴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정면에 있는 현세불 석가모니 곁에는 두 제자와 두 보살, 그리고 양쪽 벽은 각각 1불(佛) 2보살의 구조다. 불상 외에도 천장과 벽 가득하게 크고 작은 부조가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24년의 세월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월의 열매들이 빈양중동에서 뜯겨져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아름답고 온화한 보살의 두상이 두 개나 잘려졌고, 그것은 현재 일본 오사카시립미술관과 도쿄국립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측벽에 있던 부조 역시 그 행방이 각각이다. 문수보살과 유마힐이 담론하는 장면이 담긴 부조에서, 유마힐은 미국 프리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문수보살은 행방조차 알 수 없다.
양쪽 측벽에 서로 마주하고 있던 <황제예불도(皇帝禮佛圖)>와 <황후예불도> 역시 현재 미국에 있다. <황제예불도>와 <황후예불도>는 선무제가 자신의 부모인 효문제와 문소(文昭)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모두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넬슨-앳킨스 미술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높이 2m에 폭이 4m나 되는 부조가 어떻게 미국까지 가게 된 것일까?
1930년대 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극동부(Far Eastern department) 주임인 앨런 프리스트(Alan Priest)가 용문석굴을 찾는다. 그는 빈양중동에서 <황제예불도>와 <황후예불도>를 사진에 담아 베이징으로 간다. 그는 베이징 류리창(琉璃廠)에서 골동품점을 운영하고 있던 웨빈(岳彬)을 만나 사진을 건네며 계약을 한다.
웨빈은 뤄양의 골동품상 마룽투(馬龍圖)를 찾아가 일을 의뢰한다. 마룽투는 토비를 고용해 석공들을 위협하여 빈양중동의 부조를 떼어내게 한다. 토비들이 망을 보고, 석공들은 컴컴한 석굴에서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부조를 조각조각 떼어냈다. 은밀히 진행하기 위해서 밤에만 작업했던 것이다. 그렇게 2년이 넘는 동안 떼어내어진 부조의 조각들이 베이징으로 운반되었다. 그리고 1935년, 그 조각들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앨런 프리스트가 전문가를 고용해 부조를 짜맞추고, 이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황제예불도>를 구입한다. 그런데 <황후예불도>는 도저히 복원할 수 없게 되자, 앨런 프리스트는 그것들을 시장에 내놓는다. 이 소식을 들은 넬슨-앳킨스 미술관 관장(Laurence Sickman)이 각지로 팔려나간 조각을 수집하게 된다. 그는 5년에 걸쳐 <황후예불도>의 3분의 2 정도를 확보했다. 이후 2년이 넘도록 진행된 복원작업을 통해 현 상태의 모습을 갖추고 넬슨-앳킨스 미술관에 전시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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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예불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앨런 프리스트는 빈양중동뿐 아니라 빈양남동·연화동·봉선사·고양동의 유물 역시 비열한 방식으로 손에 넣어 미국으로 가져갔다. 앨런 프리스트와 추악한 계약을 맺었던 웨빈은 용문석굴의 유물을 일본인에게도 팔아넘겼다. 그렇게 그는 국보를 팔아넘기고 큰돈을 벌었다.
그런데 1953년, 그가 저질렀던 행위가 발각된다. 중국인들은 분노했다. 300명이 넘는 문화계 인사들이 연대서명을 해서 웨빈의 처벌을 요구했고, 이듬해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그전에 감옥에서 병사했기 때문이다.
빈양중동에서 또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불상의 복식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인도식 불상과 달리 빈양중동의 불상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고 있으며, 옷의 품 역시 낙낙하다. 완전히 중국화된 복식이다. 이는 북위 효문제가 추진했던 한화(漢化)정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려서부터 중국의 문화를 익히며 자란 효문제는 철저한 한화정책을 실시했다.
심지어 그는 선비족 왕실의 성인 탁발씨를 버리고 한족 방식의 성인 원(元)씨로 바꾸기까지 했다. 효문제는 선비족의 전통 복식을 금지하고 언어 역시 한족의 말을 사용하게 했다. 또한 선비족과 한족의 혼인을 장려했다. 한족의 광활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선비족을 한화시키는 노선을 취했던 것이다.
외래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기에 그 이국성에 오히려 더 민감했으리라. 때문에 보다 중국적인 방식의 수용을 추구했고, 그것이 바로 북위시대에 조성된 불상의 복식에 반영된 것이다.
빈양북동 아미타불의 V자 수인
빈양중동 양쪽에 있는 빈양남동과 빈양북동 역시 북위 때 착공되긴 했지만 전란으로 인해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당나라 초에야 완공된다. 그래서 빈양남동과 빈양북동의 불상은 빈양중동의 불상과 풍격이 다르다. 북위의 풍격을 반영하는 빈양중동의 불상은 수골청상(秀骨淸相)의 미, 즉 호리호리한 몸매와 수척한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맑은 정신과 표일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한편 당나라의 풍격을 반영하는 빈양남동과 빈양북동의 불상은 풍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빈양남동과 빈양북동의 주불은 모두 아미타불이다. 빈양남동의 아미타불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이라는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즉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고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손 모양이다. 중생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주는 시무외인은 구원·보호·축복을 상징한다. 한편 빈양북동의 아미타불은 매우 특이한 수인을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자주 취하는 ‘V’자 모양과 영락없이 똑같다.
손가락으로 만든 V자가 승리의 상징으로 확산된 데는 영국의 총리 처칠의 영향이 크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늘 카메라 앞에서 시가를 물고 손가락으로 승리(victory)를 나타내는 V자를 만들었다. 당시 V자는 유럽에서 독일 점령지 주민들의 불굴의 정신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V자는 자유를 뜻하는 네덜란드어 브레이헤이트(vrijheid)와도 관계가 있다. 빈양북동의 특별한 수인은 강렬한 의지를 전달하는 수인이라고 한다.
오늘날 승리와 자유를 의미하는 V자와 절묘하게 통하지 않는가. 일단 흥미롭기도 하고 시공간을 초월한 묘한 감정이 일기 때문에 다들 이 ‘V자 부처’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불상의 머리를 잘라가고 벽의 부조까지 뜯어간 이들로부터 이것이 온전히 남아 있다니. 손목을 잘라가는 건 훨씬 쉬운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1930년대에는 V자가 아직 문화적 상징이 되지 않았던 덕분에 지금 우리가 서양의 어느 박물관이 아닌 용문석굴 빈양북동에서 ‘V자 부처’를 볼 수 있는 것이리라.
북위는 뤄양으로 천도하기 이전 다퉁(大同)에도 대규모 석굴사원을 조성했다. 바로 ‘운강석굴’이다. 북위의 불교는 황실의 전폭적 후원을 받았다. 뤄양에만 1367개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정복민인 선비족과 피정복민인 한족의 정신적 융화를 통해 사회의 안정을 이루려는 통치자의 의도로 인해 불교가 그토록 성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원인은 비참하고 고통스런 현실 때문에, 이성으로 답할 수 없는 현실의 불합리함 때문에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했던 것이다.
리쩌허우(李澤厚)의 말처럼 “현실세계가 전혀 공평하고 합리적인 구석이 없는 바에야, 인과응보를 윤회에 기탁하고 합리성을 ‘내세’와 ‘천국’에 기탁하게 된 것이다.”(<미의 역정>) 앞서 말한 8왕의 난 이후 오랫동안 사람들은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다. “굶어죽은 시신이 길에 나뒹굴어도 거두거나 아는 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위서> ‘고조기高祖紀’)
8왕의 난 끝에 황제로 즉위한 이가 회제다. 서진이 멸망한 뒤 이민족 군주의 발밑에 엎드렸던 회제는 불과 2년 뒤(313), 그 군주에 의해 독살된다. 염치도 절개도 없었던 통치자의 말로다. 염치와 절개, 어디 통치자에게만 필요한 덕목이랴. 앨런 프리스트와 웨빈이 염치와 절개가 있었다면, 빈양중동에서 마주하고 있던 황제와 황후의 부조가 머나먼 이국땅에, 그것도 각기 다른 박물관에 떨어져 있게 되지는 않았으리. 염치와 절개,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가. 마애삼불·만불동·연화동·봉선사·약방동·고양동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번에 이어나가기로 하자.(1)
주간경향, 이유진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뤄양..문화유산 용문석굴 빈양중동 수난사,2016. 1. 27.
허난성 뤄양시 남부에 위치한 석굴은 중국 5A급 관광지로 룽먼스쿠(龙门石窟,용문석굴)은 중국 석조예술분야에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둔황(敦煌)석굴, 다퉁(大同)석굴,마이지산 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이기도 한 룽먼석굴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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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성 뤄양시 남부에 위치한 석굴은 중국 5A급 관광지로 룽먼스쿠(龙门石窟,용문석굴)은 중국 석조예술분야에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둔황(敦煌)석굴, 다퉁(大同)석굴,마이지산 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이기도 한 룽먼석굴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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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문석굴은 북위(北魏) 시대에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해 무려 400년 동안 공사를 진행해 완성했다. 현재까지 보존된 석굴은 남북으로 총 길이가 1km나 되며, 그 구간 내에 2천345개의 굴과 10여만개의 불상이 남아있다.
불상 외에도 2천800여개의 다양한 비석이 있으며, 중국 서예의 최고 수준을 볼 수 있는 "용문십이품"과 "이췌포칸지베이" 등이 있다.
또한 단순히 규모가 크고 볼거리만 많은 것이 아니라 석굴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기나긴 시기를 거친 만큼 각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의 발전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룽먼석굴은 다양한 시대의 석조작품을 한군데에 모아놓아 중국 석조예술 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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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먼석굴을 관람하게 되면 반드시 구경해야 할 곳으로 펑셴쓰(奉先寺,봉선사), 쳰시쓰(潛溪寺,잠계사), 빈양둥(宾阳洞,병양동)과 완포둥(万佛洞,만불동) 등을 꼽을 수 있다.
펑셴쓰는 과거 황실사원으로 사용했으며, 당나라 시대에 건설해 사원 내 불상이 전형적인 당나라의 특징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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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곳에는 관광구역 내 가장 규모가 크고 예술적인 가치가 높은 마애석각(摩崖石刻)이 있다. 룽먼석굴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바로 이 마애석각이 가장 많이 쓰인다.
마애석각은 총 9개의 불상으로 이뤄졌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불상은 석가모니상이다. 후덕하고, 코가 높고, 작은 입술은 살짝 웃고 있는 불상이 인상적인데, 막대한 건축자금을 대면서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펑셴쓰의 방대한 규모와 정교한 조각기술은 중국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당나라 시대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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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양둥은 북위와 당나라 등 다양한 시대의 조각 작품을 보여주며, 각기 다른 조각 표현기법을 볼 수 있다. 특히 시대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달라서 불상의 모습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북위 시대는 마른 모습을 아름다워해 불상도 마른 모습이 보이고 당나라는 뚱뚱한 몸매가 유행해 불상의 모습도 풍만하게 보인다. 이런 다양한 시대의 불상이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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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포둥은 동굴 안에 남북으로 조각된 1만5000개의 크고 작은 불상 때문에 이름을 얻게 되었다. 동굴 가운데 주불(主佛)이 앉아 있고 주변에 4명 금강이 둘러섰다.
주불 뒤에는 52개의 연꽃이 새겨져 있는데, 연꽃마다 각각의 표정과 동작이 다른 52개의 보살이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완포둥은 서방 극락세계의 모습을 재현하면서 즐거운 분위기를 표현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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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조선닷컴 미디어취재팀, 높이 17m 대형 불상의 웅장함, 룽먼석굴, 2014. 12. 10.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160127100940992
(2) https://v.daum.net/v/20141210164405371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7790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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