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세월을 견뎌낸 사비백제의 역사의 흔적 따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여 나성' 따라 길을 걷다 보면 백제 수도 사비도성이 자연친화적 공간조경을 지닌 성곽도시였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서에서 남으로 흐르는 백마강은 시가지를 품고 자연해자 역할을 했고, 북쪽과 동쪽에는 외곽성인 나성이 백마강을 마주보며 초승달 형태로 시가지를 감싸고 있습니다.
부여 나성 전경
1500년 세월을 견뎌낸 사비백제의 역사의 흔적 따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여 나성'따라 트레킹에 나서보자. 부여 나성은 시간의 풍화작용에 떠밀리면서 무너지기도 하고 근래 농경지 정리로 사라진 구간도 있다.
그러나 길을 걷다 보면 백제 수도 사비도성이 자연친화적 공간조경을 지닌 성곽도시였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서에서 남으로 흐르는 백마강은 시가지를 품고 자연해자 역할을 했고, 북쪽과 동쪽에는 외곽성인 나성이 백마강을 마주보며 초승달 형태로 시가지를 감싸고 있었다.
부여 나성 전경
협소한 웅진을 벗어나 부소산과 백마강으로 둘러싸인 너른 땅이 펼쳐진 사비로 천도를 준비한 백제인들은 계획도시 부여 건설을 나성축조로 시작했다. 사비도성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도성 내부와 외부를 명확히 구분하도록 한 나성 축조방식은 백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도성제이기도 하다.
능산리 사지와 부여 왕릉원이 자리한 동문이 사비도성의 정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백제왕도핵심유적 조사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북문지가 확인되기도 했다. 나성과 백제 도성의 구조를 밝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라는 평가가 나왔다. 군은 북나성 구간 발굴조사를 마무리하는 대로 주민과 관광객들이 산책할 수 있는 탐방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부여 나성 전경
또 부여군은 1998년 나성 정비 기본계획을 세우고 1999년부터 현재까지 토지매입과 발굴조사를 병행하며 정비에 온 힘을 쏟아 왔다. 지난해에는 부여 왕릉원과 인접한 동나성 일원에 경관 조명을 설치해 야간에도 고즈넉한 나성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투어코리아. 정하성기자. 2022. 5. 18. (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여 나성(사적 제58호)의 일부로 추정된 서나성(西羅城)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고고학 증거가 발견됐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성인 사비도성이 120년 동안 존속하면서 서나성 대신 자연해자(自然垓子)로 쓰인 백마강 방면으로 도시가 확장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됩니다.
2012년 충남 부여 능산리사지 근처에서 발굴된 동나성 성벽. 내부를 흙으로 다져 올린 뒤 그 위에 돌을 쌓았다. 백제고도문화재단 제공
《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여 나성(사적 제58호)의 일부로 추정된 서나성(西羅城)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고고학 증거가 발견됐다. 백제의 마지막 왕성인 사비도성이 120년 동안 존속하면서 서나성 대신 자연해자(自然垓子)로 쓰인 백마강 방면으로 도시가 확장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
문화재청과 발굴 기관인 백제고도문화재단에 따르면 올 6월 충남 부여군 구교리 구릉지대에서 벌인 서나성 추정지 시굴조사에서 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이곳으로부터 서쪽 백마강 방향으로 50m가량 떨어진 곳에서 사찰 강당지로 보이는 유구(遺構·옛 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엿볼 수 있는 흔적)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상육 백제고도문화재단 책임연구원은 “통상 사찰이 나성과 인접한 곳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추정지에 서나성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외리사지와 왕흥사지 등을 제외하고 정림사지, 부소산 폐사지, 군수리 사지, 동남리 사지, 구아리 사지 등은 모두 나성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부여 나성은 적의 침공에 대비해 왕도 주변을 에워싼 성곽으로 확인된 길이만 6.6km에 이른다.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급하게 축조된 웅진도성과 달리 사비도성은 오랜 기간 천도를 계획한 도시답게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나성을 외곽에 둘렀다. 또 백제 초기 도읍인 한성의 왕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평지에 있는 반면, 사비도성은 유사시를 대비한 부소산성(扶蘇山城)을 왕궁지 배후에 뒀다. 오랜 전란에 시달리면서 고구려와 신라,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
부여 나성 가운데 북나성과 동나성 유적은 이미 발견됐지만, 서·남 나성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부터 구릉과 제방을 중심으로 서나성의 위치를 추정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땅을 파 보니 북·동 나성과는 달리 서쪽에서는 나성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학계에서는 사비도성의 서쪽을 휘돌아 나가는 백마강이 일종의 자연해자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굳이 성벽을 쌓지 않아도 물길로 외적의 즉각적인 침입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고고학)는 ‘사비도성의 구조에 대하여’ 논문에서 “사비 천도 당시 최대의 가상적은 고구려였을 것이므로 도성 방비에 있어서 가장 주의를 기울인 방향은 역시 동·북방이었을 것”이라며 “반면 남쪽과 서쪽은 백마강이 자연해자와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에 나성 건설이 시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나성이 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읍의 경계를 명확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능산리 사지 옆을 남북으로 지나가는 동나성이 사비도성의 동쪽 경계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서나성이 없었다고 전제할 때 사비도성의 서쪽 경계는 어디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이 부분에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엇갈린다.
△백마강 건너편에 왕흥사지와 외리사지, 대형 고분군이 조성된 점 △신라 궁궐인 월성(月城)도 외곽으로 점차 확대된 점 등을 고려할 때 사비도성도 인구가 늘면서 백마강 너머까지 도성의 경계가 확장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심 연구원은 “사비 천도 초기 백마강 언저리에 목책이 설치됐으나 강 건너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목책 시설이 유명무실화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반면 백마강 너머까지 도성의 서쪽 경계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박순발 교수는 “백마강 건너편에 시가지가 형성된 흔적이 없고 동쪽에 왕릉 등 주요 고분군이 집중된 것을 감안하면 사비도성의 서쪽 경계는 백마강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김상운 기자. '세계문화유산 부여 나성에 西나성은 애초에 없었을 가능성' 2015-10-08 (2)
백제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고대 왕국이다. 고구려·신라와 경쟁한 삼국의 주역이자 세계 각국과 교역하며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에 선 해상왕국이나 실체가 잘 잡히지 않는다. 왕궁과 사찰은 불에 탔고 기록은 사라졌다. 땅에 묻힌 왕릉은 도굴꾼의 먹잇감이 됐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수도 경주가 천년고도로 명맥을 이어오는 동안 백제의 흔적은 서서히 옅어졌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사비 함락 당시 불에 그을린 자국과 소정방이 새겨 넣은 승전 기록이 남아있다.(사진=이정현 기자)
백제 패망의 아픔이 새겨진 탓일까. 이 절터는 역사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백제 불교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고찰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지금도 절의 창건과 운영, 규모에 얽힌 내력에 대해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충남 부여읍)안 한가운데 자리한 고찰 정림사터가 바로 이 비운의 유적이다.
5층탑과 석불좌상
정림사터는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가득한 곳이다. 현재 터에 남은 건 1500여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선 5층 석탑과 후대인 고려시대 세웠으나 얼굴이 깎여버린 석불좌상, 연못터와 희미한 건물터 흔적들 뿐이다.
절의 역사와 관련된 문자기록은 정림사 석탑에 낙인처럼 새겨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백제 정벌 전승기록인 2100여자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과 1940년대 발굴된 정림사명 새겨진 고려시대 기왓장밖에 없다.
사진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지난해 백제사적 지구로 유네스코 유산 목록에 오르면서 백제 대표유산으로 새롭게 조명받게 됐지만, 절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카즈오의 첫 발굴조사 이래 70~80년대 충남대 윤무병 교수팀의 2차 조사, 2008~2010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거듭되면서 인자한 미소의 진흙 소조상과 불교 유물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절터의 배치와 얼개에 얽힌 고고학적 정보도 상당부분 확보된 상태다. 최근 이를 토대로 절의 실체를 둘러싼 여러 학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림사를 둘러싼 쟁점들 가운데 핵심은 출토된 불상들과 탑에 얽힌 두가지로 집약된다.
첫번째는 1980년대 이후 정림사터 서쪽 폐기 구덩이에서 쏟아진 불상과 인물 소조상들의 본산지다. 이 상들은 현재 중국 뤄양에 있는 북위 영녕사터의 출토 불상들과 모양새가 거의 똑같다. 백제인들은 자주 교류했던 중국 남조 대신 대륙 북쪽 뤄양에 있는 고찰까지 가서 불상들을 직수입한 것일까. 아니면 백제 장인들이 기술을 갖고 들어와 불상을 만든 것일까.
두번째 쟁점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제기된 정림사터 석탑 이전의 목탑 건립설이다. 정림사터에서 나온 작은 중국풍 불상들은 원래 용도가 목탑의 내부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림사도 마찬가지로 그런 용도로 불상들을 썼다면 목탑이 앞서 지어진 뒤 내부를 장식했다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이런 쟁점들을 실제 유물들과 견줘보면서 음미할 수 있는 전시가 열리는 중이다. 지난해 11월 개막한 특별전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다. 중국 뤄양박물관에서 빌려온 영녕사터 출토 불상들과 정림사터에서 나온 불상과 소조상 등을 중심으로 당시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던 백제 불교문화와 고찰 정림사가 지닌 역사적 비밀을 살펴보는 자리다.
이 전시의 초점은 정림사와 중국 북위 효문제가 518년 지은 국찰인 영녕사의 교류 관계다. 정림사는 538년 사비천도 직후인 6세기 중반~후반에 창건됐을 것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전시장 2부 영역에 흙으로 빚고 구운 영녕사 소조상, 불상 40여점과 정림사터 출토 소조상들이 비교 전시되어 있는데,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았다.
편안하고 자비스런 얼굴상에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옛 북위 스타일의 농관(籠冠)을 쓴 인물상들이 단적인 예다. 구일회 관장은 “너무나 유사해 백제인들이 일부러 북위를 찾아가 직수입했을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않다. 중국 남조 도읍이었던 난징 건강성 주변의 홍토교란 곳에서 최근 정림사터나 영녕사터 소조불과 거의 같은 모양새의 소조불들이 무더기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남조의 난징에서 이 소조불의 기본 도상이 창안돼 북위나 백제로 전파되거나, 아니면 북위에서 도상이 창안돼 백제나 남조로 전파됐다는 가설이 모두 가능하다.
게다가 정림사라는 사찰은 한·중·일 세 곳에 모두 존재한다. 중국 난징에도 상정림사터가 있고, 6세기 백제의 불교문화를 직수입한 일본의 고도 아스카 지방에도 백제풍의 정림사터가 남아있어 당시 한·중·일간에 긴밀했던 불교문화 교류상을 보여준다.
또다른 쟁점인 목탑의 존재를 둘러싼 논란은 출토 기와, 토기, 벼루 등의 유물들과 발굴된 절터 영역 등의 사진, 출토 자료들을 전시한 1부를 보면서 떠올릴 수 있다.
6세기 중엽 정림사가 창건되면서 원래는 큰 목재 중심기둥이 내부를 받친 목탑을 먼저 세우고 그 안에 중국에서 직수입한 소조불 등을 붙이는 식으로 장식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 등의 소장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2000년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석탑터 주변을 추가 발굴한 결과 두툼한 흙다짐층 외에는 목탑터의 구체적인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지금도 학계는 목탑지 여부를 놓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목탑이 있다가 화재 등으로 사라져 석탑을 쌓았다는 추정이 나오지만, 화재의 흔적인 불먹임 자욱 등은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어지는 3부에서는 1940년대 조사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정림사명 기왓장과 고려시대 석불, 그리고 소정방이 탑에 새긴 평제비 탁본을 입체적인 구조물을 통해 감상하며 절터의 역사를 음미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김미경 학예연구사와 한봉규 학예실장은 “정림사터에 얽힌 역사적 실체 논란은 사실 탑 자리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풀릴 수 있는 성격이지만, 세계유산인 탑을 섣불리 해체 조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앞으로도 논쟁은 거듭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