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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제 문화유산 (4) 세계문화유산 : 백제역사유적지구 -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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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제 문화유산 (4) 세계문화유산 : 백제역사유적지구 - 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대야발 2025. 1. 1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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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관북리유적

 

 

 

충남 부여에서 40년 넘게 진행돼온 백제의 마지막 왕궁지 발굴이 2단계 사업에 접어들었습니다.

부여는 웅진성(지금의 공주)에서 천도한 백제 왕조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 있던 곳입니다.

사비성은 부여읍 부소산성과 나성 일대를 가리킵니다.

 
 
사비백제 왕궁지로 알려진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지, 1982년부터 42년간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왕궁의 중심은 왕이 정사를 처리하던 정전입니다. 의례 등이 열리던 건물 터가 발굴된 만큼 정전도 곧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기대합니다.”

 

 

2024년 4월 29일 아침 부소산 자락 관북리 유적지에서 만난 심상육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16차 발굴지를 가리키며 “정전 발굴이 머지않았다”고 말했다.

 

 

16차 발굴지에선 지난해 백제 멸망 직전 마지막 전투의 흔적으로 여겨진 칠피갑옷들과 함께 왕이 정무·의례를 주관하던 건물 터와 연화문전 등이 확인됐다. 발굴된 건물 규모는 남북 방향으로 60m에 이르는데, 주변에선 폭 8~9m의 도로와 교차로, 상수도 유적도 발견됐다.

 

 

발굴 실무자들은 올해부터 2028년까지 진행되는 2단계 발굴을 하면 사비왕궁의 밑그림이 그려질 것으로 전망한다. 부소산 자락과 왕궁은 담으로 경계를 이루고 경사면을 깎아 남쪽으로 터를 조성했다. 현재 부소산성으로 오르는 입구 구실을 하는 사비문의 오른쪽 평지는 관청들이 즐비했을 것으로 발굴팀은 추정하고 있다.

 

 

 

관북리 발굴 책임자인 심상육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선임연구원(왼쪽 셋째)이 지난 29일 사비문 누각에서 관북리 유적지의 특징과 발굴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송인걸 기자

 

 

 

백제는 538년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541년 가야부흥회의를 개최하는 등 국력을 과시했다. 왕궁 터가 있는 관북리는 백마강이 부소산을 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휘감아 도는 천혜의 요새였다.

 

심상육 선임연구원은 “관북리는 각 건물을 기능에 따라 배치한 계획도시다. 서당 지하 창고 유적은 백제가 사비로 수도를 이전한 뒤 왕궁을 대규모로 증축한 흔적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 남조, 경주 동궁과 월지, 일본 아스카 궁과 일본 전기 나니와 궁 등 고대 동아시아 왕궁들의 건물 배치 형태로 미뤄 보면, 백제는 서당과 동당 사이, 조당의 북쪽 교차점쯤에 정전을 지었을 것”이라며 “정전이 확인되고 왕의 사적 공간인 내조가 발굴되면 6세기 중반 이래의 백제 관직제도인 22부사의 실체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관북리 유적지 건물 터에는 660년 사비백제의 마지막 모습도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으로 발굴팀은 기대한다. 김영규 부여군 백제왕도팀장은 “건물 터 발굴 보고서를 보면 대들보가 내려앉으면서 불 먹은 기와와 수막새 등이 쏟아진 상태 그대로 무더기를 이룬다”며 “지난해 발견된 칠피갑옷도 누군가 훗날을 위해 구덩이를 파고 숨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당시 왕궁은 불바다였던 듯하다”며 “건물들은 화마를 견디지 못하고 차례차례 무너졌을 것이고, 궁인들은 주요 유물을 주변에 파묻고 탈출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한겨레. 송인걸기자. “관북리 유적 발굴 42년…사비왕궁 정전 찾을까” 2024. 5. 1. (1)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사비(부여) 시기(538~660) 왕궁터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길이 60m 이상의 대형 건물터 등이 확인됐습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 사비시기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대형 건물터 등을 확인했다. 사진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건물터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대형 건물터는 특히 장랑식 건물터(궁궐에서 중심 건물 주변을 둘러싼 긴 건물)로 드러나 당시 왕이 업무를 관장하던 정전 같은 중심 건물의 존재 가능성을 높여 주목된다.

 

 

관북리 유적에서는 그동안 각종 유물과 대형 전각 건물터를 포함한 여러 건물터, ‘+’형으로 교차하는 도로, 연못, 각종 먹거리 저장고 등이 확인돼 왕궁터로 여겨지지만 아직까지 정전 같은 핵심 건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왕궁 관련 시설이 밀집된 관북리유적의 남쪽 일대 발굴조사 결과 3동의 사비시기 건물지와 기와, 벽돌 등을 확인했다”고 1일 밝혔다.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연꽃무늬 벽돌(연화문 전, 왼쪽)과 바람개비 무늬 수막새(파문수막새). 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부여문화재연구소는 “3동의 건물터 가운데 특히 1호 건물터는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만 약 60m에 이르고, 추가 조사를 할 경우 규모가 더 클 것으로 보인다”며 “1호 건물터를 포함해 2동의 건물터는 북극성이 위치한 방향인 진북 방향과 일치하도록 남북 방향으로 길게 축조됐다”고 덧붙였다.

 

 

또 “이 2동의 건물터는 6~7세기 고대 동아시아 왕궁 내 조당(朝堂·중요 국가적 행사가 열리던 공간)의 일부로 여겨진다”며 따라서 “장랑식 건물터 북쪽에 백제 왕의 업무 공간인 정전 같은 왕궁 내 핵심 건물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1호 건물터 내부에서는 연꽃무늬 기와 제작용 거푸집을 활용해 찍어낸 연꽃무늬 벽돌, 바람개비 무늬의 막새기와인 파문 수막새 등이 출토됐다. 파문 수막새는 백제의 웅진(공주) 시기 왕궁터로 추정되는 공주 공산성을 비롯해 익산 왕궁리유적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는 기와다. 이밖에 건물 초석을 받치는 기초시설로 기존 건물들의 적심구조와는 다른 이례적인 적심시설, 배수로 등도 확인됐다.

 

 

 

부여 부소산성 아래에 자리한 관북리 유적 전경. 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부여문화재연구소는 “발굴조사 과정에서 연약한 지반을 극복하고 작업기간의 단축 등 효율적인 공사를 위한 당시의 정교한 토목기술도 파악했다”며 “4일 오후 발굴조사 현장을 일반에 공개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도재기 선임기자 '백제 왕궁터 추정 부여 관북리 유적서 길이 60여m 대형 건물터 확인' 2023. 12. 1. (2)

 

 

 

 

■ 부여 부소산성

 

 

삼천궁녀 전설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에 처음 등장한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지금도 많은 이들이 낙화암 옆 백마강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산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망국의 비극을 떠올립니다.

 
 
을사년 명문 토기의 마지막 글자를 확대한 모습.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 등 일부 연구자들이 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자라는 판독결과를 내놓았다.

 

 

 

6~7세기 백제의 마지막 도읍(사비성)이었던 충남 부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적지는 부소산 낙화암이다. 660년 백제가 나당(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할 때, 의자왕을 모시던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렸다는 전설이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지난해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을사년’ 명문 토기. ‘乙巳年三月十五日牟尸山菊作 ’(을사년삼월십오일모시산국작)이란 13개 글자와 마지막 미판독글자로 이뤄졌다. ‘을사년 3월 15일 모시산 사람 국(菊)이 만들었다’로 해석된다. 마지막 글자를 일부 연구자들이 분석한 결과 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자라는 판독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명문으로 미뤄 제작연대는 645년, 제작지는 모시산으로 추정되는 예산 또는 덕산. 제작자는 국이란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백제 중앙 조정에 세금 용도로 바치는 특산물 용기로 보고 있다.

 

 

 

새해 들어 부소산과 낙화암이 문화재계의 뜨거운 이슈로 등장했다. 최근 부소산성에서 백제의 세금 납부 체제를 알려주는 획기적인 명문 토기가 출토되면서다. 이 명문 토기를 근거로 부소산 일대가 당대의 최고 물류 거점 공간이자 관청 자리였으며 궁궐터였다는 해석이 나오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7~8월 성터 안에 재난방재관로 공사를 하다가 7세기께 성벽, 건물지, 집수시설 등의 유적이 드러나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긴급 발굴 조사를 벌인 것이 재조명의 실마리가 됐다.

 

 

 

을사년 명문 토기의 실측 그림에서 마지막 글자 부분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자라는 판독결과를 내놓아 주목된다.

 

 

 

조사 중 14자의 긴 한자 명문이 적힌 토기 쪽이 나왔다. ‘乙巳年三月十五日牟尸山菊作’(을사년삼월십오일모시산국작)이란 13자와 마지막 미판독 글자로 이뤄진 문장으로 ‘을사년 3월15일 모시산 사람 국(菊)이 만들었다’로 해석된다.

 

 

최근 미판독이던 마지막 글자를 일부 연구자들이 분석한 결과, 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이라는 판독결과가 나왔다. 제작연대는 645년, 제작지는 모시산으로 추정되는 예산 또는 덕산. 제작자는 국이란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특정 물품을 만들어 바치는 모시산이란 지역명과 장인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이상한 것은 판독되지 않은 마지막 글자였다. 왼쪽 옆에 기와 ‘와’(瓦)가 부수로 붙은 듯한 이 글자는 모양은 명확하지만, 자전에도 나오지 않고 과거 문헌이나 목간 등에서 확인되지 않는 수수께끼의 글자였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명문 토기에 새겨진 수수께끼의 미판독 글자(붉은 선 안). 최근 부소산성에서 나온 명문 토기의 마지막 추정 글자 ‘장(瓦+長)’이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학계의 관심이 집중된 이 글자의 정체를 새해 초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 방국화 경북대 인문학술원 연구교수 등 일부 소장 연구자들이 찾아냈다. 7세기 일본의 중심부였던 간사이 나라와 한반도 교역의 길목 규슈의 목간과 토기 등에 새겨진 각종 글자 기록에서 똑같은 글자를 확인한 것이다.

 

 

글자의 정체는 큰 백제 토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 자였다. 한자 한 자의 모양과 의미를 푼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적지 않다.

 

 

두 학자 모두 10년 전부터 일본 유적과 능산리 유적 등에서 이번에 나온 토기와 비슷한 명문이 새겨진 완형 토기, 토기 조각, 목간 등을 확인하고 오랜 추적을 해오던 터였다. 그런 와중에 부소산에서 공통 글자를 발견했으니 흥분할 만 했다.

 

 

 

7세기 고대 일본의 유적의 목간과 토기 표면에서 종종 발견되는 ‘장(瓦+長)’자의 용례들. 현지에서 바치는 특산물을 담은 용기란 뜻으로 부소산성에서 발견된 백제 특산물 수납용 추정 명문 토기의 글자와 일치한다.

 

 

 

이번 발굴조사와 문자판독의 성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백제인들이 특산물 넣은 토기 항아리의 기종을 ‘장(瓦+長)’으로 호칭했다는 것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삼국시대 신라인이 토기 항아리를 ‘옹(甕)’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은 경주 월성 출토 목간 등에서 확인되지만, 백제인은 ‘옹’ 외에 ‘장’이란 호칭을 썼던 것이다.

 

 

더욱이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기, 이름도 모양도 같은 세납용 특산물 명문 토기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 발굴된 사실이 교차 확인됐다. 이로써 이 항아리가 지방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공납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특산물을 담던 용기임이 분명해졌다. 특산물을 바치는 백제의 세금 수납제도가 고대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또한 밝혀진 셈이다.

 

 

 

부소산성 안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북사(北舍)’명이 찍힌 토기들. 장인들이 생산한 토기에 대한 당시 관청 관리들의 수납 증빙 표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은 백제 멸망기 백마강 낙화암 투신 장소로만 알려졌지만 이번 발굴을 통해 명문 토기 외에도 대형 건물 터와 창고 터 등이 확인돼 강을 타고 들어온 여러 물산이 집결하는 물류 창고 거점이었음이 드러났다.

 

 

인근 군창터와 궁녀사 등 여러 곳에서 대형 건물 유적이 추가로 확인돼 백제 사비시대 궁궐터가 아니겠느냐는 추정도 힘을 얻는 양상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부여 부소산. 이 산의 왼쪽 산성터 안에서 을사년 명문 토기가 출토됐다. 위쪽으로 백마강, 아래로 부여읍 시가지가 보인다.

 

 

 

16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연구소와 한국목간학회 공동 주최로 열리는 ‘2020년 신출토 문자자료와 목간’ 학술회의는 학계의 논의와 연구성과를 집약해 알리는 자리다. 토기에 새겨진 글자가 백제 특유의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이란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모시산(牟尸山)이 어느 지역인지를 놓고는 충남 예산(이병호)과 전남 영광(방국희)이란 학설이 엇갈린다.

 

 

당시 토기 항아리를 지칭한 ‘옹(甕)’과 ‘장(瓦+長)’이 실제 어떤 개념적 차이가 있었을지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논란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을사년’ 명문 토기가 출토된 부소산성 내 궁녀사 구간 집수시설 터. ‘북사’ 새겨진 토기와 중국산 자기, 칠기 등이 함께 나왔다.

 

 

 

백제 망국을 상징하는 곳으로만 여겨졌던 부소산은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의 경제적 번영과 풍요로운 물류를 알려주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됐다. 작은 토기 파편의 미판독 글자 하나가 역사 공간 인식의 반전으로 이어진 셈이다.

한겨레. 노형석 기자 ,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한국목간학회 제공. '삼천궁녀 몸 던졌다는 부여 부소산..백제의 핵심 물류기지였다' 2021. 2. 16. (3)

 

 

 

https://youtu.be/WZiJcv2xpQs

 

 

 

 

 

 

 

 

 

 

 

 

(2) 백제 왕궁터 추정 부여 관북리 유적서 길이 60여m 대형 건물터 확인 (daum.net) 2023. 12. 1. 

 

 

(3) 삼천궁녀 몸 던졌다는 부여 부소산..백제의 핵심 물류기지였다 (daum.net) 2021. 2. 16. 

 

 

 

 

<참고자료>

 

 

부여 관북리 유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부여 부소산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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