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백제 문화유산 (2) 세계문화유산 : 백제역사유적지구 -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본문
2021년 9월 14일부터 2022년 3월6일까지 국립공주박물관이 백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특별전으로 연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전에서 금동 신발 등 왕릉 출토 유물 5232점 전체를 발굴 이래 최초로 모두 꺼내놓았습니다.
1500년 전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의 발에 신겼던 큰 금동 신발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구려에 패해 망한 것이나 다름없던 왕조를 웅진(공주) 땅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제왕이었다. 신발은 22년간 재위하며 눈부신 치적을 쌓은 왕이 죽자 슬퍼한 왕족들이 주검에 신겨 무덤에 넣어준 껴묻거리였다.
국립공주박물관이 백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특별전으로 13일 개막 행사를 연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전 현장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처음 공개된 왕의 신발이었다. 측판과 바닥판을 이어 만든 금속 신발은 왕릉 발굴 당시 형태가 으스러져 원형을 찾기 어려웠으나, 박물관 연구진이 집요하게 잔편을 추적하고 이어붙이는 복원 작업 끝에, 역시 뒤꿈치가 복원된 왕비의 금동 신발과 함께 처음 선보이게 됐다. 녹슬어 어두운 빛이었지만, 육각무늬와 맞새김된 꽃무늬가 드러난 신발에는 군주의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국립공주박물관 상설관에 차려진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 들머리에 나온 동탁은잔(청동받침이 있는 은잔). 잔과 받침에 연꽃, 톱니 등의 무늬와 인면조, 용, 사슴, 새 등의 온갖 신령스러운 동물들을 새겨놓은 백제 공예미술의 명품이다. 웅진백제 시기 백제인의 사상과 미의식을 집약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상설관과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전시는 금동 신발 등 왕릉 출토 유물 5232점 전체를 발굴 이래 최초로 모두 꺼내놓았다. 상설전시실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용한 국보급 명품들을 중심으로 출토품들을 새로이 배치했다. 들머리에는 학계에서 ‘동탁은잔’이라고 흔히 불러온 청동받침 있는 은잔만 단독으로 부각시켰다.
잔과 받침에 연꽃, 톱니 등의 무늬와 인면조, 용, 사슴, 새 등의 온갖 신령스러운 동물들을 새겨놓은 백제 공예미술의 명품이다. 실체의 기억이 모호한 웅진 도읍기 백제인의 사상과 미의식을 집약해 보여주는 결정체다. 왕과 왕비의 관꾸미개, 금귀걸이, 청동거울, 진묘수 등 주요 유물들은 몰입해 감상할 수 있게 저반사 유리 진열장에 넣어 전시한 점이 돋보였다.
무령왕릉의 대표적인 출토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무령왕의 관꾸미개 장식. 치솟아 오르는 화염 모양의 무늬가 특징이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육각형, 직사각형의 금속 마구리를 씌워 온전하게 복원한 왕의 목관을 처음으로 왕비의 목관과 나란히 선보인 점도 호평을 받았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옛 송산리고분군의 배수로를 파다 무령왕릉의 입구를 막은 벽돌을 발견했던 당시 최초 보고 문서와 조사 실측 도면, 탁본, 언론 보도 기사 등을 먼저 보게 된다. 뒤이어 핵심 유물의 실물이 발굴 이후 50년간 이뤄진 주요 연구 성과와 함께 줄줄이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는 발굴 뒤 처음으로 무령왕과 왕비의 나무 베개가 나란히 진열장에 나왔다. 무령왕릉의 대표 공예품 중 하나인 왕과 왕비의 베개는 보존상의 어려움 때문에 대개 복제품만 전시되거나 따로따로 전시되어 왔다.
삼국시대 목제 공예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작으로 회자되는 무령왕과 왕비의 목제 베개와 발받침이, 두 사람의 주검이 놓였던 자리인 시상대와 함께 나란히 진열장에 나온 것이 감상의 알짬이다. 왕과 왕비의 베개는 보존상의 어려움 탓에 복제품만 전시되거나 따로따로 전시된 터라 동시 전시는 희귀한 구경거리다.
왕과 왕비의 금동 신발에 붙은 채 발견된 직물 등을 분석해 금(錦)과 라(羅) 직물 재현품을 내놓았고, 발굴 현장에서 흩어진 채 발견됐던 꽃, 오각형, 사각형 등 갖가지 모양의 꾸미개, 못들을 처음 모아 보여준 시도도 특기할 만하다.
1971년 7월 조사단원들이 무령왕릉의 아치형 입구 연도(널길)를 가로막았던 벽돌들을 빼고 있는 모습이다. 입구 연도 구멍을 빽빽히 채웠던 벽돌들을 걷어내고 묘실 내부로 들어간 조사단은 이후 몰려든 취재진과 주민들에 겁을 먹고 하룻밤 새 유물들을 모두 쓸어담는 패착을 두게 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전시를 보고 나면 두 가지 요점을 알게 된다. 우선 왕의 관과 부장품이 왕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세나 격조가 높다. 무령왕이 절대권력자였음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또 그의 관과 묘실 곳곳은 각종 꾸미개와 못으로 고정한 화려한 직물들로 덮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특별전에서 새 연구 성과로 은연중 강조하는 내용이다.
한겨레. 노형석 기자. '집요한 잔조각 찾기…50년 걸려 복원한 무령왕 금동신발'. 2021.09.13.
'송산리 고분군'으로 불리던 무령왕릉 일대는 2021년 9월 17일부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정식 명칭이 바뀔 예정입니다. '능'은 왕실의 묘에만 붙는 특별한 호칭입니다.
문화재청은 "백제 왕실의 무덤, 특히 무령왕의 무덤인 사실이 확실히 밝혀져 '무령왕릉' 이름을 포함해 사적 명칭을 바꾸는 것"이라며 "일반 국민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고, 왕릉급 무덤임을 명확히 해 역사적·문화재적 위상을 세우는 취지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무게 각 53.4g, 54.7g의 무령왕릉 금귀걸이는 국내에서 발견된 금귀걸이 중 가장 무겁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을 14일부터 내년 3월 6일까지 연다. 국립공주박물관
얇게 편 금으로 만든 나뭇잎 모양이 수없이 달려있고, 가운데 기둥에는 금 알갱이를 하나하나 박았다. 재질도 거의 순금에 가깝다. 고리 장식 끝에는 구부러진 옥(곡옥)을 달았다. 신라 금관에서도 보이는 형태다.
왼쪽 54.7g, 오른쪽 53.4g의 이 금귀걸이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역대 금귀걸이 중 가장 무겁다. 금이 가장 많이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금귀걸이다.
국보 진묘수. 무령왕릉 입구에서 발견된 '진묘수'는 입에 붉은 칠(나쁜 기운을 쫓음), 발에 녹색 채색(무덤을 지킴), 몸통에 날개문양(망자를 좋은 세상으로 안내함) 등이 특징이다. 무령왕릉의 벽돌 구조를 차용해온 중국 남조에서 '진묘수'를 썼지만, 사진의 돼지와 비슷한 형상이 아니라 물소, 악어 형상이 많았다. 돼지는 무령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상이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묘지석. 무덤의 주인(무령왕)과 사망연도가 적혀있다. '송산리 고분군'으로만 알려졌던 공주 일대 고분군이 백제 무령왕의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 가장 뚜렷한 자료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측은 이번에 공개되는 '받침있는 은잔'이 '백제 금동대향로만큼 의미있다'고 분석한다. 잔과 받침에 그려진 각종 문양이 백제 시대 종교와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그중 '받침있는 은잔'은 동으로 만든 받침 위에 은으로 만든 잔과 뚜껑, 금장식이 특징이다. 국립공주박물관 최장열 학예연구실장은 "무령왕릉 내에서도 왕비 쪽에서 발견된 유물로, 용·비익조·산 등 다양한 문양이 받침·잔·뚜껑에 빼곡히 새겨져 있어 이 시기 백제의 종교와 사상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귀한 사료"라며 "널리 알려진 백제 금동대향로만큼 의미 있는 유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왕의 베개(오른쪽)와 발받침은 올해 처음으로 실물을 공개한다. 왕의 물품에는 왕비의 것에는 없는, 금으로 만든 꽃모양 꾸미개가 빼곡히 붙어있다. 국립공주박물관
왕의 나무 두침(베개)와 발받침도 지금껏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실물을 전시한다. 왕비의 베개와 발받침은 10년 전 무령왕릉 발굴 40주년 전시에 실물이 공개된 적이 있지만, 왕의 베개와 발받침은 처음 대중에 선보이는 유물이다. 그동안에는 복제품을 전시해왔다.
최 실장은 "왕의 베개·발받침은 상태가 좋지 않아 수장고에서 빛을 가린 채 고이 보관만 해오던 것"이라며 "이번 전시에서도 14일부터 26일까지 첫 11일간 공개 후 복제품으로 전시하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날개달린 화형 금꾸미개. 무령왕릉에서 수습해온 바닥 흙에서 금과 은, 청동으로 된 꾸미개가 수없이 발견됐다. 얆게 편 금으로 꽃 모양을 만들고, 매달 수 있는 고리를 꼬아 걸었다. 천 등에 바느질을 할 수 있게 작은 구멍도 뚫려있어, 백제의 금속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한 단편이다. 최장열 학예연구실장은 "시신에만 장식했다고 보기엔 너무 많은 양이고, 무덤 안의 휘장 등에 사용했던 꾸미개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비가 살아있을때부터 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팔찌. 팔찌 안쪽에 만든 사람과 일자가 새겨져있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왕비 쪽에서 발견된 은팔찌에는 안쪽에 '경자년에 대부인을 위해서 '다리'라는 사람이 팔찌를 만들었는데, 230수(동전의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로 추정)의 은이 들어갔다'는 내용이 정확히 새겨져 있다.
최 실장은 "왕비가 526년에 사망했는데, 경자년은 520년에 해당한다"며 "장례를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생전에 찼던 팔찌를 채워서 묻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백제시대에 제작되어 사용된 연꽃무늬 벽돌.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이번 전시에서는 무령왕릉 입구에서 강렬한 첫인상을 줬던 연꽃무늬 벽돌도 볼 수 있다. 공주 일대 벽돌무덤 3곳 중 송산리 6호분은 동전무늬 벽돌, 교촌리고분은 무늬가 없는 벽돌을 사용했고, 연꽃무늬 벽돌은 무령왕릉에서만 발견된다. 백제 시대 불교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금을 얇고 섬세하게 가공하는 기술이 탁월했다. 왕이 사용했던 금 관꾸미개. 검정색 비단 모자에 아래쪽 뾰족한 침을 꽂아 고정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 국립공주박물관
올해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 되는 해다. 무령왕릉은 지난 1971년 공주 송산리고분군(현 무령왕릉과 왕릉원) 일대 배수로 공사 도중 벽돌 문이 드러나면서 발견됐다. 무덤 입구 안쪽에 놓인 ‘지석’(국보 163호)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계묘년(523년) 사망' 등 무덤 주인의 신분과 출생, 재위, 사망 연도가 자세히 적혀있었다. 2박 3일에 걸쳐 수습이 끝난 무령왕릉에서는 국보 17점을 비롯해 수천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중앙일보. 김정연기자. '계란 1개 무게' 금귀걸이, 왕비 은팔찌…무령왕릉 발굴 50년전. 2021.09.13.
1971년 7월 8일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주 무령왕릉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가 묻힌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이 명확하게 드러난 유일한 고분이다. 벽돌(전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무덤 내부에서는 백제 미술의 정수라고 할 만한 수많은 유물이 나왔다. 무령왕릉 발굴은 이후 경주 천마총, 황남대총 조사로 이어졌다.
국립공주박물관 등에 따르면 무령왕릉은 그해 7월 5일 백제 웅진도읍기(475∼538) 왕릉과 왕릉급 무덤이 모인 송산리 고분군에서 5호분과 6호분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됐다.
정부는 새로운 백제 왕릉급 무덤이 확인됐다는 소식에 조사단을 허겁지겁 꾸렸고, 전격적으로 발굴조사를 결정했다.
7월 7일 폭우가 내리자 조사단은 일단 철수했고, 이튿날 아침 일찍 발굴을 재개했다. 이날 오후 4시 15분께 무덤문을 연 조사단은 곧 '무령왕릉'임을 발표했고, 기자와 주민에 둘러싸인 채 속전속결로 발굴을 진행해 7월 9일 오전 8시께 모든 유물을 수습했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도 없이 하루 만에 발굴을 끝낸 것이다.
이로 인해 무령왕릉 발굴은 오랫동안 '졸속 작업'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1973년에 나온 발굴조사 보고서도 출토 유물 4천600여 점 가운데 2천600여 점만 언급됐고, 실측 도면도 일부만 수록돼 후속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내용이 부실했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보관하는 국립공주박물관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2009년 '무령왕릉 신(新)보고서'를 처음 간행한 뒤 지금까지 모두 6권을 펴냈고, 2023년까지 3권을 더 발간할 예정이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조사 과정과 유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신보고서에서 다섯 가지 이야기를 뽑아 소개한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무덤방을 막고 있던 벽돌의 특징은 무엇일까
무령왕릉은 백제의 전형적 무덤 양식과 달리 벽돌로 지었고, 무덤 내부와 바깥을 가르는 입구에도 벽돌을 쌓아 올렸다. 조사단이 무덤방 벽돌을 빼냈을 때 몇 명은 무덤 속으로부터 하얀 김이 빠져나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무덤방 폐쇄에 사용된 벽돌은 614점이 있다. 형태를 알 수 있는 유물이 366점이고, 나머지는 일부만 남았다. 모양은 정사각형·직사각형·사다리꼴·삼각형 등 다양하고, 문양도 다채롭다. '대방'(大方) 혹은 '중방'(中方)이라는 글씨가 있는 벽돌도 존재한다.
또 다른 특징은 떨어져 나간 면에 석회가 발라져 있고, 형태가 온전해도 부풀거나 균열이 심한 벽돌이 많다는 점이다.
무령왕릉 무덤방 내부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형식의 벽돌과 무령왕 사망 시점인 523년보다 이른 512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글자 '사 임진년작'(士壬辰年作)이 새겨진 벽돌도 확인됐다.
보고서는 "무덤방 벽돌은 별도로 제작한 물품이 아니라 무령왕릉 무덤방이나 다른 고분에서 사용하고 남은 것을 활용한 듯하다"며 "형태가 완전하지 않은 실패작도 쓰였다"고 분석했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무령왕릉 지킨 돌짐승과 무덤 주인 알려준 지석 성분은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12건이다. 귀걸이나 왕관 꾸미개 같은 금붙이가 많은데, 석수(石獸)와 지석(誌石)으로 명명된 문화재 두 점은 재질이 돌이다.
석수는 무령왕릉을 지키던 짐승 조각으로, '진묘수'(鎭墓獸)라고도 한다. 높이 30.8㎝·길이 49㎝·너비 22㎝이며, 입이 뭉뚝하고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 철제 뿔을 달았다. 조사단은 무덤 입구에 웅크리고 있던 석수를 '그로테스크한 괴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석수 바로 앞에 놓여 있던 지석은 두 장으로 구성되며, 앞뒤에 각각 내용이 있다. 무령왕 지석에는 '백제 사마왕'(百濟斯麻王)이라는 인명과 사망 시점이 기록됐고, 십이간지 방위표도 있다.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왕비 지석에는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계약서에 해당하는 매지권(買地券)이 새겨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석수와 지석 재질은 화성암의 일종인 각섬석암으로 동일하다. 화성암은 마그마가 냉각·응고하면서 만들어진 돌이다. 표면은 전반적으로 녹회색을 띠지만,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서 드러난 부분은 어두운 회색이나 녹색이다.
각섬석암은 공주 일대에는 산지가 없고, 전북 장수에서 많이 나온다. 흔히 '곱돌'이라고 하는 돌이 각섬석암이다. 장수 인근인 남원 아영면에서도 각섬석암이 산출된다. 보고서는 공주에서 100㎞ 이상 떨어진 장수나 남원에서 돌을 조달해 석수와 지석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짚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3만 점 넘게 수습한 옥 유물의 성격은 무엇일까
무령왕릉에서는 자그마한 알갱이 같은 구슬인 옥 유물이 3만1천210점이나 발견됐다. 그중 유리옥이 3만741점으로 전체 수량의 98.5%를 차지한다.
색상은 주황색이 8천338점으로 가장 많다. 이어 녹색 7천929점, 감색 6천425점, 짙은 푸른색 3천762점 순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노란색이나 보라색 옥도 있다.
전체 지름은 0.06∼0.95㎝이고, 단면 높이는 0.06∼0.7㎝이다. 구멍 지름은 0.04∼0.7㎝이고, 평균값은 0.14㎝이다. 지름이 0.6㎝ 이상인 대형 유리옥은 대부분 짙은 푸른색과 보라색이다.
보고서는 이렇게 색상과 형태가 제각각인 옥 유물의 용도가 다양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금동신발과 같은 금속 공예품의 장식, 목걸이, 가슴걸이, 팔찌, 무덤 내부 장식에 활용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일부 유리옥의 화학 성분을 분석하면 제작지가 인도 남부, 태국, 중국 남부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유리옥이 백제와 동남아시아, 중국의 교류 증거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보고서에서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 무령왕의 큰칼과 손칼에서 발견된 적색 안료 정체는
무령왕릉에서는 무령왕 허리 부근에서 길이 90㎝인 용·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 1점이 출토됐고, 금·은장식 손칼 4점도 발견됐다. 손칼은 왕 허리 근처에서 1점, 왕비 쪽에서 3점이 나왔다.
보고서는 학계에서 고리자루큰칼 제작지를 중국 남조와 백제로 보는 시각이 대립했는데, 천안 용원리나 공주 수촌리에서 무늬가 비슷한 유물이 발견됐고 세부 가공 방법도 무령왕릉의 다른 유물과 흡사해 백제 장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무령왕 관련 유물인 큰칼과 손칼 1점에서는 적색 안료 흔적이 발견됐다. 이 안료는 왕비 유물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천연 광물인 진사(辰砂) 혹은 주사(朱砂)로 추정됐다.
보고서는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큰칼 등 많은 백제계 유물이 발견된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출토 금귀걸이에서도 적색 안료가 확인된 바 있다"며 "적색 안료는 백제와 연관된 중요 유적의 일부 금속품에서 공통으로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어 "적색 안료는 공예품을 장식하는 효과는 물론 주술적 의미도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뚜껑 나무판이 5개인 오른쪽이 무령왕 목관이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 무령왕과 왕비 목관은 어떻게 다를까
무령왕릉에는 525년 먼저 무령왕 시신을 안치하고, 4년 뒤인 529년 왕비 시신을 뒀다. 왕과 왕비 목관 재료는 일본에서 자생하는 나무인 금송(金松)이며, 표면 전체에 옻칠을 했다.
백제에서 금송으로 관을 만든 사례는 적지 않다.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잠든 것으로 짐작되는 익산 쌍릉 대왕릉 목관과 부여의 왕릉급 무덤인 능산리고분군 동하총(東下塚) 목관도 모두 재료가 금송으로 드러났다.
보고서는 "무령왕 사망 시점인 6세기 초 서일본의 대형 고분에서는 금송으로 만든 목관이 집중적으로 사용됐다"며 "금송 목관은 당시 백제가 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왕과 왕비 목관은 규모와 형태, 제작 방식이 비슷하다. 다만 왕 목관은 뚜껑을 나무판 5개로 제작했는데, 왕비 목관은 3개로 만들었다.
또 왕비 목관은 왕 목관과 달리 마구리 장식이 없다. 마구리는 길쭉한 상자나 토막의 양쪽 머리 면을 뜻한다. 목관에 사용한 관고리와 관못 제작 방법도 달랐다. 전반적으로는 왕 목관이 왕비 목관보다 화려한 느낌을 준다.
연합뉴스. 박상현기자. '무령왕릉 발굴 50년…새 보고서에서 찾은 5가지 이야기' 무덤방 앞 벽돌·석수와 지석·옥 유물 등 분석 결과. 2021-07-06
(출처; 1500년 된 블랙박스 열렸다, 백제 비밀 담긴 무령왕 황금무덤 (daum.net) 2021. 2. 23.)
(출처; 이곳이 1500년전 무령왕비의 장례식장이었네..'유지'서 27개월 [이기환의 Hi-story] (daum.net) 2021. 3. 22.)
<자료출처>
(1) 집요한 잔조각 찾기…50년 걸려 복원한 무령왕 금동신발 (hani.co.kr) 2021-09-14
(2) '계란 1개 무게' 금귀걸이, 왕비 은팔찌…무령왕릉 발굴 50년전 | 중앙일보 (joongang.co.kr)2021.09.13
(3) 무령왕릉 발굴 50년…새 보고서에서 찾은 5가지 이야기 | 연합뉴스 (yna.co.kr) 2021-07-06
<참고자료>
백제 무령왕릉서 나온 묘지석은 어디서 비롯했나 | 연합뉴스 (yna.co.kr) 2019-07-21
세계서 가장 아름다운 벽돌 나온 '외리 유적'..84년째 방치된 까닭은 (daum.net)2021. 01. 15.
'백제 8가지 무늬 전돌' 중 최초·최고의 산수인물화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2020. 12. 29.
불단에 가린 익산 백제 석불대좌, 30년만에 공개 | 연합뉴스 (yna.co.kr)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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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미소를 찍고… 숨결을 빚다 | 서울신문 (seoul.co.kr) 2007-10-16
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 잠에서 깨어나다 (daum.net) 2007년 10월 25일
‘금동향로’이후 최대성과 | 서울신문 (seoul.co.kr)2007-10-25
사리 없는 ‘백제 사리기’, 당시 외교사는 고스란히 (hani.co.kr)2007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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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 고고학 (13)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 (64) | 2024.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