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신라 고고학 (12) 신라 목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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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8일 문화재청은 대구 팔거산성에서 7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11점이 대구 지역에서는 처음 출토됐다고 밝혔다. 문자를 기록한 나무 조각인 목간은 문헌이 적은 고대사 연구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기록 유산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발굴 조사를 벌인 화랑문화재연구원으로부터 현재까지 발견된 목간 11점을 받아 기초 조사를 진행했다. 전체 11점 중 7점에서 글자 또는 글자의 흔적이 보이고, 그 중에는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와 곡식 이름도 등장한다.
또다른 목간(木簡) 보물창고가 될 수 있을까. 삼국의 격변기였던 7세기 초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 팔거산성에서 목간 11점이 최초로 출토됐다.
4점의 목간에서 크게 3종류의 간지가 발견됐으며, 임술년(壬戌年)과 병인년(丙寅年) 그리고 글자 부분이 파손되어 간지 중 글자 일부와 세 번째 글자 년(年)만 보이는 사례가 확인했다. 여기서 임술년과 병인년은 각각 602년과 606년으로 추정되며, 목간을 작성한 시점으로 여겨진다. 또한 보리(麥의 속자)와 벼(稻), 콩(大豆)이라는 곡식 이름이 등장한다.
팔거산성은 금호강과 그 아래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구 함지산 정상부에 축조됐다.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선 팔거산성 역시 기존 목간이 나온 다른 지역처럼 군사적으로 중요하면서 물자가 집중된 거점으로 추정했다. 목간이 담고 있는 내용이 곡식과 관련되었고,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거점이 대부분 산성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칠곡 지역을 중심으로 금호강 하류와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통제하던 곳이 팔거산성이라는 점도 확실해졌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팔거리현(八居里縣)이 등장하는데, 그동안은 대구 칠곡 지역을 가리킨다고 막연히 추정해왔다.
팔거산성은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7세기 초반 무렵, 신라 왕경 서쪽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진평왕 시절인 7세기 초반 백제 무왕은 본격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특히 642년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으로 대야성(경남 합천)을 잃은 뒤 군사·행정 거점을 신라 왕경과 가까운 압량(경북 경산)으로 옮겼다.
신라 서쪽 지역에서 왕경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오늘날 낙동강을 통해 대구-경산-영천을 거친다. 이러한 경로에서 가장 서쪽에 있던 팔거산성은 수로와 육로를 동시에 통제하는 중요 거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심이 모이는 것은 목간의 내용이다. 목간에는 ‘왕사(王私)’와 ‘하맥(下+麥의 속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의미 해석은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여기서 왕사의 경우 기존 경남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 보이는 왕송(王松)과 동일한 표현으로 추정됐으나, 두 차례 판독조사를 거쳐 ‘송(松)’을 ‘사(私)’로 수정해야 함을 밝혀냈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이번 목간은 다른 데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간지가 많이 쓰여 있고, 일반적으로 연월일이 나오는 것과는 달리 연도만 나오는 것도 특이하다”면서 “현재 반 정도 발굴이 됐기 때문에 더 많은 목간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에 ‘왕사’라는 글씨가 확인되면서 함안 성산산성 목간에서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았다”면서 “개인적 의견으로는 왕실 직속이라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고, 역시 팔거산성의 중요도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팔거산성은 대구 북구 노곡동 산1-1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2018년 사적으로 지정된 구암동 고분이 있다. 2015년 지표조사, 2018년 시굴조사를 거쳐 2020년 10월부터 학술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이번 조사에선 석축(石築) 7기, 추정 집수지(集水池) 2기, 수구(水口) 등이 발견됐다. 석축은 조사지역 북쪽 경사면에 조성되었으며, 일부 유구가 중복되어 있어 석축 사이에 축조 순서 또는 시기 차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집수지는 남반부 평탄면에 조성되었는데, 추정 집수지 1호는 돌, 2호는 목재를 사용하여 조성되었다. 목간이 출토된 집수지 2호는 길이 7.8m, 너비 4.5m, 높이 약 3m이다.
목간이 출토된 집수지 2호의 토층. 문화재청 제공
목간 출토 상태. 문화재청 제공
목간 1호. 문화재청 제공
목간 3호. 문화재청 제공
신라 지방 유적에서 목간이 출토된 사례는 인천 계양산성, 경기 하남 이성산성, 경남 함안 성산산성 유적 등이 있다. 2019년 11월 대구 인근 경산 소월리에서도 사람 얼굴 모양으로 화제를 모은 토기 아래에서 6세기 신라 토지 관련 목간이 발견됐다. 하지만 대구 소재 유적에서 목간이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1)
배문규 기자, 팔거산성에서 대구 지역 최초로 목간 11점 출토..7세기 초 전략적 거점으로 확인, 2021. 4. 28.
2019년 12월 6일 <한겨레>가 출토 사실을 단독 보도(6일치 18면)하면서 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던 경북 경산 소월리 신라 촌락 유적의 나무쪽 문서(목간)가 1500여년 만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굽은 나무 표면 다듬은 육면에 94자 추정되는 한자 고루 적어
남한 출토 역대목간 중 가장 커, 골짜기'곡' 논'답' 둑 '제'기록
경산 인근 마을 저수지, 논 조성 정황 조세 징수용 땅 면적 단위로
'결''부' 쓴 것도 확인, 통일 전 신라 국가경영 기초 다진 흔적
전문가들의 판독 결과, 이 유물은 6세기 신라 관리들이 경산 일대 촌락의 저수지와 농토를 관리해온 상황과 세금을 매기는 단위 면적 등을 기록한 촌락 행정 문서였다.
길이 70㎝가 넘는 길쭉한 나무쪽을 여섯 면으로 각지게 다듬어 각 면에 총 90자 이상을 빼곡하게 새긴 이 목간은 지금까지 남한에서 출토된 고대 목간 중 가장 크며, 시기도 가장 오래됐을 가능성이 큰 희귀기록물로 밝혀졌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9일 이런 판독 결과와 함께 길이 74.2㎝의 목간 사진을 공개했다. 목간은 화랑문화재연구원이 최근 발굴·공개해 큰 화제를 모은 5세기 삼면 얼굴 모양 토기 출토 지점 바로 아래쪽에서 발견됐다. 발굴 즉시 경주연구소로 옮겨져 지난 6일 한국목간학회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와 윤선태(동국대)·이수훈(부산대)·김재홍(국민대) 교수의 1차 판독을 거쳤다.
발견된 목간은 굽은 나무의 표면을 다듬어 각진 여섯 면을 만들고 모두 합쳐 94자로 추정되는 한자를 적었다. 해서체의 서체나 내용으로 보아 경산 인근 토지 현황을 기록한 6세기 무렵 공문서의 성격인데, 6면 가운데 2면은 글자를 연습한 습자 흔적으로 보인다.
기존 국내 목간보다 훨씬 커 발굴 당시엔 대형 나무쪽 문서인 목독으로 보는 견해가 나왔다. 하지만 모양새로 미뤄 관의 권위를 드러내는 대형 시각(視覺) 목간으로 분류하는 게 타당하다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대세였다.
목간의 첫 면인 에이(A)면에는 ‘□부감말곡답칠(?)□제상일결 구미곡삼결 제하□부’(負甘末谷畓七(?)□堤上一結 仇彌谷三結 堤下□負)라는 글자가 보이며, 다른 면에도 논을 뜻하는 답(畓), 밭을 뜻하는 전(田) 등이 숫자와 함께 보인다. 학자들은 판독 글자 가운데 골짜기를 뜻하는 ‘곡’(谷)과 답(畓), 둑을 뜻하는 ‘제’(堤) 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골짜기에 형성된 일정한 신라인의 촌락 집단을 ‘곡’이라 칭했으며, 둑(堤)이 조세 부과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처음 밝혀졌기 때문이다. 골짜기와 둑을 중심으로 당시 지방 촌락이 형성되고, 계곡에 제방을 쌓은 뒤 물길을 빼 논을 만들어 고유 면적 단위인 ‘결’(結)이나 ‘부’(負)를 매겨 조세를 거둔 신라 중앙정부의 지배 양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윤선태 교수는 “6세기 초 고신라 시대 이미 지방 곳곳에 중앙정부가 토목기술을 동원해 제방을 쌓고 농토를 조성했고, 이를 측량해 세금 징수 기반까지 마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통일 이전에 신라가 국가 경영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증”이라고 짚었다.
고대 한반도에서 창안된 고유 한자인 논 답(畓) 자를 목간에 썼다는 점, 조세를 매기기 위한 농지 면적 단위로 결이나 부를 이미 쓰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은 큰 성과다. 그간 학계에선 답(畓)은 경남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561년 건립)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간주했다.
소월리 출토 목간에 ‘답’이 적혀 있어 제작연대를 그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주보돈 교수는 “이 목간은 신라 목간을 대표해온 경주 월성 해자 출토 목간의 연대인 580년대보다 이른 시점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는 물론 남한 출토 고대 목간 중 가장 이른 유물일 수 있다”고 밝혔다.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나온 대형 목간의 컬러사진.
‘결’(結)과 ‘부’(負)의 두 단위 한자도 지금까지 삼국 통일 뒤부터 쓴 것으로 봤지만, 이 목간을 통해 6세기께까지 올려볼 수 있게 됐다. 7세기 통일 직후의 신라 촌락문서(일본 쇼소인 소장)에 나오는 지방 촌락 경제의 국가 지배 방식이 한 세기 전 이미 충실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연구소 쪽은 자연과학적 분석도 병행해 추가 판독 성과와 세부 분석 내용을 지속적으로 공개할 방침이다.(2)
한겨레, 노형석 기자, 사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내 최장 '꼬챙이' 신라목간 1500년전 논땅 세금 매긴 장부였다, 2019. 12. 10.
2017년 7월 10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일본 나라(奈良)문화재연구소 와타나베 아키히로 부소장이 올 3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를 방문해 ‘모지조(MOJIZO)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목간 판독을 실시했다. 판독 결과 ‘王子寧(왕자녕)’으로 해석된 21번 목간 글자가 사실은 ‘壬子年(임자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첨단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목간(木簡·글자를 기록한 나무막대기)에서 연대(간지)를 최초로 확인했다. 이에 따라 6세기 신라가 대가야를 공략하기 위한 교두보로 성산산성을 쌓았다는 학계의 기존 통설이 흔들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나라문화재연구소와 도쿄(東京)대 사료편찬소가 지난해 공동 개발한 모지조는 일본의 고대 목간 화상 3만 건을 모은 데이터베이스(DB)를 바탕으로 목간 글씨를 판독하는 소프트웨어다. 목간 이미지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아이폰)으로 업로드 하면 이를 정자체로 풀어서 보여준다. 약 40만 점에 달하는 출토 목간을 보유한 일본학계에서 모지조의 신뢰성은 높은 편이다.
앞서 올 초 일부 학자들이 해당 목간을 ‘왕자녕’으로 판독한 결과가 공개된 이후 권인한 성균관대 교수(국문학)와 서체 연구자인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중심으로 반론이 제기됐다. 필획이나 앞뒤 문맥을 고려할 때 ‘임자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었다. 지금껏 성산산성에서 1991년부터 17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뤄져 국내 출토 목간의 절반에 육박하는 총 308점의 목간이 발견됐으나, 연대가 확인된 건 처음이다.
목간 연구자인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후 문맥을 봐도 ‘왕자녕’은 오독(誤讀)이 분명하며 ‘임자년’이 99% 맞다”고 말했다. 일본 목간 연구 권위자로 해당 목간을 관찰한 와타나베 부소장도 “‘임자년’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중국 쪽 목간 연구자도 같은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임자년 목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산산성에서 함께 출토된 토기 양식을 감안할 때 임자년 간지의 연대는 532년, 592년, 652년 중 하나에 해당된다. 주목할 점은 해당 목간이 성을 쌓기 전 나뭇가지 등 폐기물로 땅을 다지는 부엽층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목간 연대가 성산산성의 축조 시점을 알려주는 중요한 열쇠인 셈이다.
학계는 삼국시대 당시 정황을 감안하면 임자년은 532년 혹은 592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만약 592년으로 본다면 대가야는 이미 562년에 멸망했으므로 성산산성 축성 의도는 백제나 왜(倭)를 겨냥한 걸로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6세기 말∼7세기 초 백제는 왜와 손잡고 신라에 맞서는 형국이었다. 백제 무왕이 602년 왜와 동맹을 맺고 전북 남원 일대의 신라 영토를 공격한 ‘아막성 전투’가 대표적인 예다.
임자년을 532년으로 봐도 새로운 역사해석이 가능하다. 함안은 신라가 점령하기 직전까지 아라가야의 영토였는데, 학계는 아라가야가 550년 무렵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성산산성이 신라에 의해 532년에 세워졌다면 아라가야 멸망 시점은 통설보다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성산산성에서 7세기 전반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걸 보면 임자년 목간은 592년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며 “성산산성의 역사적 성격을 새롭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3)
동아일보, 김상운 기자, [단독] 컴퓨터로 성산산성 목간 연대 최초 확인..고대사 해석 바뀐다, 2017. 7. 11.
6세기 신라의 지방지배 및 조세 체계를 엿볼 수 있는 목간이 처음 확인됐다. 2017년 1월 4일 문화재청 가야문화재연구소는 561년 축성된 함안 성산산성에서 2014~2016년 새로 발굴한 목간 23점을 공개했다.
6세기 중반, 561년 무렵이었다. 백제와 대치 중인 신라는 물적·인적 자원을 경남 함안군 일대에 집결시켰다. 쌀·보리·피 등 다른 지역에서 걷은 물품은 물론 방어시설을 지을 인력도 여러 곳에서 동원했다. 당시 진내멸이라는 지방의 촌주가 중앙(경주)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에게 잘못된 법 집행을 아뢰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타리라는 사람이 60일 동안 일하고 돌아갔어야 했는데, 단지 30일만 채우고 떠나간 것에 대해 사죄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신라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의 구체적 모습을 보여주는 함안 성산산성 사면목간. [사진 문화재청]
종이 없던 시절 소나무 다듬어 기록
6세기'목간' 23점 공개..'4면목간'도
당시 행정·율령체계 유물로 첫 확인
종이가 없던 시절, 촌주는 보고서를 길이 34.4㎝, 두께 1.0~1.8㎝의 소나무에 적었다. 이른바 목간(木簡)이다. 나무를 길게 잘라 네 면을 다듬고, 그곳에 총 56글자를 기록했다. 중앙에서 내려온 상급 관리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시 신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지방에 강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즘으로 치면 법치주의, 신라의 율령체계가 확고히 자리잡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6세기 신라의 지방지배 및 조세 체계를 엿볼 수 있는 목간이 처음 확인됐다. 문화재청 가야문화재연구소는 561년 축성된 함안 성산산성에서 2014~2016년 새로 발굴한 목간 23점을 4일 공개했다.
그 중 네 면 모두에 글자가 기재된 사면목간이 주목된다. 나머지는 1면, 혹은 2면 목간이다. 내용 또한 어디에 사는 누군가가 어떤 물건을 보낸다는 꼬리표(하찰목간) 같은 게 대부분인 것에 비해, 이번 사면목간은 보낸 이와 받는 이, 보고 사실을 두루 갖춘 행정문서 형식을 취했다. ‘□법 30대’ ‘60일 대법’ 등 신라의 율령이 구체적으로 기록됐고, 경주 중앙정부의 관등명인 ‘대사(大舍)’도 확인됐다.
목간은 고대사회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총 1289점이 발굴됐다. 성산산성은 국내 최대 목간 출토지다. 1991년 첫 발굴 이후 308점이 나왔다.
가야문화재연구소 김용민 연구관은 “6세기 신라의 행정체제를 보여주는 목간이 나온 건 획기적”이라고 말했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신라 율령체계의 전개·발달과정을 보여주는 성산산성 최고의 목간”이라고 평가했다. 이성시 일본 와세대 교수는 “일본에선 이런 형식의 목간이 7세기에 많이 제작됐다.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4)
중앙일보, 박정호기자, "제 죄를 아뢰옵니다.." 신라 지방관리 나무막대 보고서, 2017. 1. 5.
국내 최대의 고대 목간(木簡) 출토지인 경남 함안 성산산성(사적 67호)에서 신라시대 목간 76점이 또다시 출토됐다.
2007년 12월 11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진흥왕 시대(540-576년) 신라가 가야 지역을 복속한 뒤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산산성에 대한 제12차 발굴조사에서 목간 76점과 함께 목기와 토기류 등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 목간 발견으로 성산산성에서는 총 238점의 목간이 출토돼 국내에서 출토된 전체 고대 목간 459점 가운데 절반 이상을 보유하게 됐다.
목간은 좁고 길게 다듬은 나무조각에 각종 기록을 남긴 것으로 고대인의 삶을 생생히 보여 주는 사료로 주목받고 있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경주 월성 해자, 충남 부여 궁남지, 경남 함안 성산산성 등에서 신라와 백제 목간이 출토됐다.
목간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쓰여진 종이 문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고대사회의 비밀을 알려주는 보물창고로 여겨지고 있다. 목간에는 식재료의 제작 시기와 가공지 등의 음식문화와 행정체계, 호적제도는 물론 낙서 그림과 글씨까지 남아있어 고대의 사회·경제·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에 성산산성에서 추가로 출토된 목간에서도 신라의 지명과 인명, 신분 등이 기록된 물품 꼬리표인 하찰(荷札)목간이 다수 발견됐다.
일례로 '仇利伐(구리벌, 지명) 仇陀知(구타지, 인명) 一伐(신라 외위 8등급 벼슬) 奴人(신분) 毛利文(인명) 負' 즉 '구리벌에 사는 일벌 벼슬의 구타지에게 속한 노인(노비와 비슷한 계급으로 추정) 모리문이 지고 왔다'는 문구가 적힌 하찰목간이 확인됐다.
또, 米(쌀) 물품이 처음 확인됐고, '勿思伐(물사벌)'이나 '(丘伐)구벌' 등의 지명과 '매곡촌'(買谷村) 등 경북 상주 지역의 옛 지명도 새로 확인됐다.(5)
노컷뉴스, 정재훈기자, '고대목간의 보고' 성산산성, 신라 목간 또 무더기 출토, 2007. 12. 11.
(1) 팔거산성에서 대구 지역 최초로 목간 11점 출토..7세기 초 전략적 거점으로 확인 (daum.net)202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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