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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정은 상해를 떠나 여러 곳을 전전했고 독립운동가들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남경·진강·항주·가흥 등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이 도착하고 김규식이 돌아오자 선생은 임정 재건작업을 주도했고 1933년 말부터 1935년까지 약 2년간 국무위원과 임정수반을 맡았다. 임정에 합류한 선생은 조직을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해 임정의 기능을 회복해 나갔으며 은신 중인 김구와도 협력에 나섰다. ■ 항일 언론부터 무장투쟁까지 이끈 전천후 독립운동가2025. 2. 15. 00:02━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⑭ 우강 양기탁우강(雩岡) 양기탁은 1871년 평양 소천에서 한학자인 부친 양시영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양시욱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
■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된 나주역오마이뉴스 정만진기자 2024. 10. 30. 10:27 [오늘의 독립운동가 51] 1929년 10월 30일 박준채, 박기옥, 이광춘 ▲ 박준채, 나주역, 박기옥ⓒ 국가보훈부 학생운동 계열을 상징하는 의거는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두산백과)"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시발점인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사건을 돌이켜본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뒷받침이 된 신간회 1926년 순종 사망을 계기로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분열적 종파주의를 극복하고 민족 역량을 통합하자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제고된다. 그 결과 1927년 2월 민족단일당인 신간회가 출범한다. 1929년 초 신간회는 전국에 14..

■ 좌우익 모두와 손잡고 독립운동 이끈 홍진김형민기자 2019. 4. 23. 14:02 홍진은 우리 역사에서 입법부의 장과 행정부 수반을 모두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반목하던 우리 내부를 하나로 모으려 했다. 좌우익 모두와 손을 잡고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중국 상하이의 임시정부 말고도 3·1운동 이후 곳곳에서 ‘임시정부’ 깃발이 솟았던 것을 알고 있니?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건 러시아령 연해주의 조선인들이었어. 이동휘·문창범·김철휘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은 대한국민의회를 만들어 행정부를 조각한 뒤 발표했지. 이게 1919년 3월17일의 일이었어.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4월11일 상하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깃발이 올랐고, 4월23일에는 식민지 조선 땅 한복판,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중국..

■ 시골 마을 2500명이 몽둥이 들고 日帝와 싸웠다[3·1운동, 임시정부 100년 - 1부]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 [3] 화수리 항쟁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화성=김상윤 기자 입력 2019.01.16. 03:01 평일 낮인데도 행인 한 사람 찾아보기 힘든 시골 마을이었다. 수원 시내에서 차를 타고 50분 정도 가면 닿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 이곳이 100년 전 3·1운동 당시 격렬한 항쟁이 벌어진 지역이라고는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화수초등학교 정문에 있는 독립운동기념비만이 그때 흘린 피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당시 주민들이 공격한 일제의 주재소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마을 하나가 불타 없어진 학살의 현장이었다. "28명이 살해당한 인근 제암리보다 더 큰 규모의 피살자가 발생한 것..

■서대문 형무소에서 다시 외친 '대한독립 만세'[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 [7] 유관순의 두 번째 3·1운동 조선일보 김성현 문화전문기자 입력 2019.02.18. 03:00 "전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만세 1주년 되는 날인데 빨래나 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각본·감독 조민호)에서 유관순(고아성)은 1920년 서대문 형무소의 세탁실에서 노역을 하다가 짐짓 쓰러지는 시늉을 한 뒤 동료 수인(囚人)들이 기다리는 8호실로 돌아온다. 3·1 운동 1주년을 앞두고 옥중 항거를 계획한 것이다. 10㎡(3평) 남짓 좁은 감방에는 20여 명이 갇혀 있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알리는 괘종 소리가 울리자 유관순은 ..

■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아시나요?정책브리핑 2017. 8. 10. 17:05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로 시작해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만세!”로 끝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들어보셨습니까?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여성 주도로 작성하고 인쇄 배포한 최초의 독립선언서입니다. 또한, 애국부인회(김인종 외 8인)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국내외 각지로 반포하여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이는 민족지도자 33명이 3·1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이전의 일이며, 여성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세계사적으로도 큰 사건입니다. 선언서는 당시의 부녀자에게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을 요구하며, 이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밝혔습니다. 다른 독립선..
■ 문 대통령 "2.8독립선언 실행한 열한 분의 이름 기억하겠다"오마이뉴스 구영식기자 2019. 2. 8. 10:33 페이스북에 '2.8독립선언 100주년' 메시지 올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이해 "독립선언을 실행한 분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기억하겠다"라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 등에 올린 메시지에서 "100년 전 오늘, 600여 명의 조선유학생들이 함박눈이 내리는 도쿄 조선YMCA회관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라며 "이날 유학생들이 낭독한 '조선청년독립선언서'는 우리 독립운동의 화톳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되었다"라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문 대통령은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고 3.1독립운동에 직접적인 영향..

1918년 11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한진교·조동호 등 20~30대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신한청년당은 1차 세계대전 마무리를 위해 열린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고, 국내·일본·만주·연해주에 밀사를 보내 독립 만세 시위를 유도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을 주도했다. 신한청년당은 소수 정예주의를 채택해 '20~40세, 기성 당원 2명 이상의 추천'으로 자격을 제한했다. 김규식·조소앙·이광수·김구·신석우·서병호·송병조·이유필 등 50명가량이 당원이었고, 외교·교육 활동과 기관지 '신한청년' 발간 등 활발히 움직이다 1922년 말 해산됐다. ■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을 아시나요이선민 선임기자2018. 11. 28. 03:05 191..

■ [단독]1910년 '성명회 선언서' 탄생한 이상설 선생 거주지 찾았다동아일보 유원모 기자2019. 4. 22. 03:00 '더채널' 김광만 PD, 당시 러 경찰 비밀보고서에서 확인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인근 위치.. 연해주 독립운동 세력 중심지 역할한인 8624명 서명 성명회 창립.. 일제 방해공작으로 한달만에 해체이후 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 거쳐 1919년 임시정부 한축으로 발전 1910년 8월 23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들은 직후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 8624명이 서명한 ‘성명회 선언서’(왼쪽). 일제강점기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평가받는 이 선언서가 작성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이상설 거주지가 처음 확인됐다. 러시아 국립극동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당시 러시아 경찰의 보고서에는 “항일조직을..

■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그의 집에서 안중근 단지동맹 맺어2024. 4. 13. 01:05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③ 최재형연해주는 헤이룽강, 우수리강, 동해로 둘러싸인 땅이다. 러시아 85개 연방지역의 하나로 우리나라 1.6배 크기다. 북방민족이 세운 금·원·청이 차례로 지배했고, 1860년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으로 차지했다. 한민족과도 뗄 수 없는 역사가 전개된 곳으로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발해 그리고 이와 연결된 북방민족국가의 영역이었다. 1863년 이래 두만강 건너 한인 이주가 계속되면서 집단거주지 ‘한인촌’이 세워졌고, 1910년 전후로는 애국지사의 망명과 이주가 줄을 이으면서 만주와 함께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거점이 됐다. 최재형 선생은 바로 이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의 대부로서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