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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4.2. 5만 년 전~4만 년 전 본문

지음/《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4.2. 5만 년 전~4만 년 전

대야발 2024. 2. 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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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4.2.  5만 년 전~4만 년 전

 

4.2.1. 평양 상원군 룡곡동굴유적(龍谷洞窟遺蹟) - 룡곡인(49,000년 전~46,000년 전)

 

 

평양특별시 상원군 상원읍 용곡리에 있는 유적. 상원읍에서 남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있으며 유적 앞으로는 상원강으로 흘러드는 문호천이 흐른다. 1980~81년에 2개의 동굴유적이 발굴되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나왔다. 1호 동굴유적은 강바닥보다 20m 정도 높은 곳에 있다.

 

이 유적의 동북쪽 약 2 지점에 대흥리동굴유적이 있고, 북쪽 약 5 지점에 검은모루동굴유적이 있으며, 남쪽 약 5 지점에 중리동굴유적이 자리 잡고 있다.

 

용곡 제1호 동굴의 길이는 약 40m, 너비는 약 25m이다. 굴 안에 쌓인 전체퇴적의 두께는 21.05m에 이른다. 퇴적은 13개의 지층으로 이루어졌고, 이들 지층 가운데에는 5개의 문화층이 들어 있었다.

 

동굴 아랫부분의 지층(1~7퇴적층)은 물의 영향을 받아 쌓였으며, 모두 비문화층이었다. 8~11퇴적층(차례대로 1~4문화층으로 나누어짐)에서는 구석기시대, 12퇴적층(5문화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나왔고, 가장 위에 있는 제13퇴적층은 비문화층이었다. 열형광법에 의한 절대연대측정 결과 1·2문화층의 연대가 40~50만 년 전으로 보고된 바 있다. 그러나 그 뒤에 우라늄계열원소측정방법으로 1문화층이 7만 년 전, 2문화층이 4 6,000년 전 및 4 9,000년 전으로 나왔고, 열형광법으로 1문화층이 11 1,000년 전으로 나왔다. 1호 동굴 퇴적층의 형성과정과 사람화석의 생김새로 보아 뒤에 얻은 연대값이 더 정확한 것으로 추측된다.

 

1호 동굴의 구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용곡사람'이라 불리는 슬기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의 화석과 함께 석기, 뼈연모, 짐승뼈, 뼈를 갈아 납작하게 만든 조각품을 비롯하여 불 땐 자리가 발굴되었다. 구석기시대 아래층에서는 물소나 쌍코뿔이와 같이 따뜻한 기후에 사는 짐승이 많고, 위층으로 가면서 온대성 또는 아한대성 기후에 어울려 사는 짐승이 늘어난다. 꽃가루분석 결과에서도 위와 같은 환경 변화를 보여준다. 신석기시대 층에서는 사람뼈·짐승뼈·돌도끼·갈돌·새김무늬질그릇 등이 나왔다.

 

용곡 제2호 동굴은 제1호 동굴에서 2 떨어진 핵골이란 골짜기에 있다. 유적 앞으로 작은 강이 흐르며, 주변에는 고인돌 등이 분포되어 있다. 굴의 길이는 약 10m 정도이며, 퇴적의 전체두께는 3.9m로서 10개의 지층으로 나누어진다.

 

아랫부분에 있는 제1~7퇴적층은 비문화층이며, 8(1문화층)과 제9(2문화층)에서 유물이 나왔고, 가장 윗부분의 제10층은 겉흙층이다.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1문화층에서 뗀석기가 발굴되었다. 2문화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사람화석 및 짐승뼈와 함께 여러 종류의 문화유물이 발굴되었다. 뼈연모와 석기(돌괭이·돌호미·돌도끼·돌보습·돌자귀 등)를 비롯하여 진흙을 빚어 구운 가락바퀴와 질그릇 조각을 이용하여 만든 별 모양의 치레걸이도 나왔다. 질그릇의 밑바닥은 뾰족밑 또는 둥근밑이었으며, 납작밑과 닮은 것도 있었다. 그릇의 겉면에는 새겨 그은 무늬와 찍어 누른 무늬가 있는데 무늬의 종류에는 빗금무늬·점무늬·점선물결무늬 등이 보인다.

(출처;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6a2901a)

 

 

 

 

평양 룡곡 제1호 동굴유적 출토 머리뼈 화석[위:정면, 아래:측면] 룡곡 제1동굴유적 제2문화층에서 출토된 7호 머리뼈(두개골) 화석은 룡곡인이라 명명되었다. (출처; 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4.2.2. 요녕성 해성시 소고산 선인동유적(셴런둥유적(遼寧 仙人洞遺蹟 / Xianrendong Site) - 소고산인(40,000±3500 BP)

 

중국 랴오닝遼寧 성 하이청海城 시 동남쪽 30 지점에 자리한 샤오구小孤 산부근의 동굴에 위치한다. 이곳은 첸산千山 산맥 서쪽 가장자리의 구릉지대이며, 랴오난遼南 산의 일부분이다. 유적 앞에는 랴오허遼河 강의 지류인 하이청허海城河 강이 흐른다. 굴 입구는 하이청허 강에서 약 1m 높이로 늦은 갱신세에 형성되었다.

 

1981년 발견하여 같은 해 시굴조사 되었으며, 1983·1990·1993 3차에 걸쳐 정식 발굴되었다. 지층은 1차 발굴에서 5개 층이 확인되었는데, 위로부터 제5층은 모난 자갈돌, 흑갈색 점토질 고운 모래층으로 신석기, 청나라~현대 층이 섞여 있다. 4층은 갈색 점토질 고운 모래층으로 약간의 석기와 짐승 화석이 나왔다. 3층은 모난 자갈, 얇은 황갈색 고운 모래질점토층으로 석기, 뼈연모와 짐승 화석이 발견되었다. 2층은 모난 자갈돌, 얇은 황갈색 점토질 고운 모래층에서 석기, 불땐자리, 많은 짐승 화석이 발굴되었다. 마지막으로 제1층은 모래자갈층으로 석기와 짐승 화석이 확인되었다.

 

유적에서는 사람 이빨 6점과 어린이 허벅지뼈 1, 많은 짐승화석, 석기, 작살, 창끝과 구멍 뚫린 뼈바늘, 이빨이나 조가비로만 든 치레거리가 출토되었으며, 불을 사용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짐승 화석은 메르키코뿔소, 중국맥, 물소 등 더운 기후 동물과, 털코뿔소, 매머드 동굴곰 등 추운 기후 동물 등 38종으로 둥베이東北 지방 후기 갱신세에 살던 종류와 더운 기후, 추운 기후의 동물이 섞여 있다. 화베이華北 지방의 싸라우쑤薩拉烏蘇 동물군과 비슷한 구성으로 후기 갱신세에 해당한다. 출토유물은 석기, 뼈연모, 치레거리 등 1만여 점에 이른다. 석기의 돌감은 맥석영 자갈돌, 섬장암, 석영암 등이다.

 

석기 제작 수법은 직접떼기와 모루떼기이며, 모루떼기가 주로 쓰였다. 석기의 종류는 긁개, 찌르개, 송곳, 새기개, 찍개 주먹도끼 등이다. 긁개는 수량이 가장 많으며 날 모습에 따라 홑날, 양날, 둥근날, 손톱날, 부리날 등이 있다. 찌르개는 많지 않으며 날모습이 곧은날과 뿔날로 나뉜다. 송곳은 수량이 많으며, 새기개는 수량이 적다. 찍개는 맥석영 자갈돌로 외날 또는 엇갈려떼기로 만들었으며 다면체의 원형이 많다. 전체적으로 보아 쉬자야오許家窯 계통의 잔석기 전통에 속하며 큰 석기도 일부있다. 석기의 구성과 만든 수법은 저우커우뎬周口店, 산딩둥山頂洞 유적과 비슷한 후기 구석기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뼈연모도 많아 뼈작살은 불탄 우제류 뼈로 만들었으며, 창끝은 평편한 송곳형으로 형태를 다듬은 뒤에 전체를 갈았다. 또한 구멍 뚫린 이빨, 구멍 뚫린 조가비 치레거리 등이 출토되었다. 구멍 뚫린 조가비는 화폐 형태로 지름이 25이며, 돌출 면 가장자리에 둥글고 짧은 방사선이 있으며 그 홈 안에 적철광으로 보이는 붉은색 물감이 칠해져 있다. 짐승 이빨이나 조가비에 구멍을 뚫어 만든 치레거리는 저우커우뎬, 산딩둥 유적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다. 이 유적은 제3층에서 열형광TL연대측정으로 40,000±3500 BP 연댓값을 얻었다.

(출처; 한국고고학전문사전, 구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4&idx=199)

 

 

 

 

 

4.2.3. 충청북도 청원 두루봉 동굴유적 - 흥수아이(4만 년 전)

 

 

 

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 시남마을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 유적. 두루봉에는 여러 개의 굴들이 발굴되었으며, 각 굴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특징이 달라서 문화적인 시대와 배경이 다르다. 자연 동굴을 이용하여 집으로 삼는 예는 일반적으로는 기후가 한랭한 구석기시대에 이용되었다. (이융조)(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완벽한 모양의 인골 흥수아이가 발견된 청원 두루봉 동굴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 산 75-1에 있는 두루봉에 위치한다. 두루봉이 있는 청원군은 상당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은 남한강, 서쪽에는 금강이 흐르는데, 금강 수계는 금강의 중류에 속하고 평지를 흐르기 때문에 유량이 풍부한 편이고, 남한강 수계는 남한강 상류의 평지가 좁은 곳을 흐르기 때문에 하천 쪽이 좁고 유속이 빠른 편이다. 이 강들은 완만하고, 많은 강굽이 현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쪽에 노령산맥의 산지를 등지고 있는 두루봉의 지형은 이 산맥의 끝 지류인 얕은 파도 모양의 구릉이 연달아 이어지는 곳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곳의 지질은 옥천계 변성 퇴적암류와 이를 뚫고 들어간 화성암류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정질 석회암이 잘 발달되어있다. 이러한 곳에 많은 동굴이 발달되어 있다. 1976년 두루봉 제2굴 조사를 시작으로, 1983년까지 2·9·15굴 집터·새굴·처녀굴·흥수굴로 이어지는 학술 조사를 통하여 많은 짐승 화석과 뼈연모,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석기, 이 연모들을 만든 사람(고인류)까지 찾게 된 구석기 연구의 중요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2굴은 1차 조사 시 연세대 박물관과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공동으로 진행하였으나, 2차 조사부터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단독으로 조사하였다. 모두 40.48를 발굴하였다. 석회암 채취로 많은 부분이 없어진 2굴은 6개의 석회마루층 밑에 있는 문화층(7)에서 3 7 15 28 37 46종의동물상과 3아강 10 13 12종의 식물상이 밝혀졌다. 쌍코뿔이·크로쿠타 크로쿠타·하이에나·큰원숭이 등 멸종된 짐승이 발굴되어, 지금까지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종의 짐승이 보고된 것이어서,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의 구석기 동물상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불땐자리(평면 타원형, 90×65)에서 출토된 숯 조각은 오리나무로 밝혀져, 이를 땔감으로 불 피웠음을 알게 되어 당시 사람들의 불땐자리를 중심으로 한 생활 자료를 확인하였다. 또한 굴 모서리에서 찾은 진달래 꽃가루 157개는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인간이 일부러 갖다 놓은 의식에 따른 꽃을 사랑한 첫 사람들the first flower people”의 행위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은 사슴 정강이뼈에 홈파기로 만든 사람 얼굴 모양을 만든 예술품도 찾아져 당시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의식을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많이 잡힌 사슴과의 이빨 분석으로 사냥 행위는 9·10월에 가장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나, 계절에 따른 사냥 행위를 해석할 수 있다. 전체 발굴된 뼈 화석을 통하여 인구 고고학 방법으로 그들의 동굴 생존 일수를 계산하면 278일 나온다. 이 자료를 이용하여 그들의 생활을 복원하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자료로 보아 중기 갱신세( 20만 년 전)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9굴은 연세대학교 박물관이 1977~1978년까지 2차에 걸쳐 발굴하였다. 9굴의 문화층은 붉은 흙층(I)과 노란층(II)에서 큰원숭이·사자·큰꽃사슴 변종을 비롯하여 2 49 22 27 1아속 31종의 동물상이 확인되었으며, 석기는 석회석, 석영을 돌감을 사용하여, 간단한 떼기와 잔손질을 베풀어 만든 주먹대패·찍개 등이 출토되었다또한 사슴 정강뼈로 만든 사람 얼굴 모습의 예술품은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짐승의 크기와 마리 수에 따른 고기의 열량을 계산하여 이곳에서 살았던 날수를 연구한 결과 곧선사람Homo erectus 5명이 50여 일 동안 살림을 꾸렸던 것으로 보인다.

 

15굴은 두루봉 산봉우리 8부 능선쯤의 동쪽 편에 2굴 보다 약간 위쪽에 위치한다. 1979~1980년까지 2차에 걸쳐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였다. 여기에서는 커다란 석회암바위 4개와 길이 40 정도의 길쭉한 석회석들을 한 줄로 세워 만든 담돌로 이뤄진 집터가 발견되었다. 집터 중앙부에는 뜸숯이 출토되는 타원형 불땐자리 2(55 × 35, 55 × 40)가 있고 그 주변에서 석영으로 만든 긁개·자르개 등의 석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이곳을 중심으로 짐승의 도살과 조리 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집의 형태는 프랑스의 테라 아마타Terra Amata유적처럼 오리나무와 같은 잘 휘어지는 나무를 이용하여 칡넝쿨로 엮어서 지붕을 씌웠던 것으로 여겨지며, 발굴된 집터의 면적은약 9.6쯤으로 2~3명의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새굴은 두루봉 정상부의 비교적 높고 가파른 절벽에서 새로이 찾은 굴이라는 의미에서 새굴이라고 하였다. 발굴조사(1979~1980)결과 11 1,770여 점의 뼈 유물과 37점의 석기를 찾았다. 석기는 찍개·긁개·새기개·몸돌·격지 등으로 몸돌과 격지가 많은 수를 차지하며 암질은 모두 외래 암질인 석영을 사용하였다.

출토 유물 중 옛코끼리Elephas antiquitas 상아(길이 61.8,지름 7.6)는 우리나라에서 옛코끼리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 상아의 뿌리 쪽에 남아 있는 넓게 떼어 낸 자국은 뼈격지를 얻기 위한 제작 행위의 결과이며, 가운데부분에는 4줄의 자른 자국이 관찰되어 상아를 떼어 내고 손질하였음을 보여준다.

 

처녀굴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아니한 굴이라고 하여 처녀굴이라고 이름 붙인 이 굴에서는 완전한 개체의 동굴곰Ursus spelaeus이 발굴되었다. 동굴곰은 큰꽃사슴 뿔을 가운데에 놓고 곰의 머리뼈를 오른쪽에, 아래턱은 머리뼈로부터 1m 떨어져 엉덩뼈 위에 ‘×’자로 얹어 놓은 상태로 왼쪽에 있으며, 팔뼈·다리뼈 등의 긴뼈들을 동쪽으로 향하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하였던 것으로 발굴 결과 밝혀져, 당시에 이곳에서 의식儀式 행위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흥수굴은 10(1982~1983)발굴로 조사되었다. 12층으로 구분되며 이 가운데 문화층은 3개 층(Ⅲㄱ·Ⅲㄴ··)이다. Ⅲㄴ층에서 두 개체의 어린이 뼈가 출토되었는데,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된 흥수아이 1호 사람은 의도적으로 매장하였음이 확인되었다체질인류학적 연구 결과 5살 정도로 두뇌 용량은 1,260이고, 키는 110~120로 밝혀졌다. 머리뼈는 좁고 길며Dolichocrany, 높은 머리Hypsicrany로 특히 윗머리뼈의 굽은 길이는 매우 긴 가운형 얼굴이다.  4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흥수아이는 머리뼈의 해부학적 특징과 잰 값으로 볼 때, 슬기 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어 한민족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아시아에서는 가장 완전한 구석기시대의 사람인 흥수아이는 매장한 사람 뼈이어서 우리 겨레의 기원 연구뿐 아니라 아시아 구석기 사람들의 사후 세계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10차 조사로 확인된 두루봉동굴은 석기·짐승 뼈·사람이 같이 출토된 이상적인 구석기 유적이며, 또한 중기에서 후기 갱신세까지의 여러 시기의 문화상이 확인되는 한국의 주구점유적이라고 불러 좋을 듯 하다. 더욱이 완전한 개체의 흥수아이는 우리 민족의 기원 연구는 물론 당시의 장례 행위도 알 수 있다.

 

두루봉 사람들이 만든 석기로서 잡은 많은 옛코끼리·동굴곰·큰원숭이 등 멸종동물이 찾아져 아시아 고동물 연구에 큰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나, 광산 개발로 유적이 보존되지 못하였다.

산업사회로 발전되어 가던 1970년대에 결국 이 동굴은 광산 활동으로 없어지게 되었지만, 여기서 찾아진 여러 고고학 자료들은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와 세계 구석기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전문사전, 구석기시대편)

 

흥수굴인(興洙窟人) 또는 흥수 아이(興洙 - ) 1983년 충청북도 청원군 흥수굴에서 발견된 현생인류 구석기 시대 화석에 붙인 이름이다. '흥수굴'은 발견자인 김흥수씨의 이름을 따서 굴에 붙인 이름이고, 동굴에서 발견된 소년은 '흥수 아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두루봉 동굴, 석회석 광산을 찾기 위해 산을 헤매던 탐험가 김흥수는 새로 발견된 동굴 속을 살펴보다가 사람 뼈를 보고 놀랐다. 김흥수 등은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유골을 관찰, 자세히 등을 비춰 보니 키 110~120cm 가량 되는 남성 어린아이의 뼈 화석이었다. 발견 당시 이 뼈는 석회암 바위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으며 해골의 뒤통수가 튀어나와 있었다. 흥수아이의 나이는 5~8 살가량으로 추정되며 질병에 걸려 채 자라지도 못하고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았던 시대는 약 4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흥수아이의 유골 근처에서는 간단한 석기들이 발견되었으며, 유골의 가슴 부분에서 꽃가루가 발견되기도 했다. 화석의 유골 위에는 고운 흙이 뿌려져 있고 둘레에 꽃을 꺾어다 놓아 둔 흔적이 있었다. 꽃가루와 주변의 꺾어 놓은 꽃은 국화꽃이었고, 가족들은 흥수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를 땅에 묻고 영혼을 보내는 장례의식을 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골이 사람 화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발견된 동굴은 흥수굴이라 하였고, 유골의 별칭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뼈를 '흥수아이' 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이후 정식으로 흥수굴인이라 명명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D%A5%EC%88%98%EA%B5%B4%EC%9D%B8)

 

 

 

두루봉 흥수굴 인류화석 발굴 모습

두루봉 흥수굴에서 출토된 6세쯤 되는 아이의 골격은 비교적 잘 남은 상태였다. 복원된 두개골은 ‘흥수아이’라고 명명되었다. 대략 4만 년 전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충북대학교 박물관 제공.

 

그런데 한국 1호 고(古)인류학 박사’인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는 30여 년간 ‘한국 최고(最古)의 구석기인 화석’으로 불려온 ‘흥수아이’의 두개골(頭蓋骨)을 검증하며 “위아래 어금니 대부분에서 충치가 보입니다. 갈아 만든 음식이나 곡식을 먹는 신석기시대에는 흔하지만, (곡물 농사를 짓기 전인) 구석기시대에는 거의 보기 힘든 특징입니다.” 라며 구석기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였다.

 

흥수아이는 사망 당시 나이가 약 4~6세로 추정되는 아이의 유골로 초등학교 사회과부도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다. 1982년 충북 청원군 가덕면에서 발굴됐다. 발굴팀은 인근에서 구석기 유적과 동물이 많이 발굴된다는 점을 근거로 4만 년 전 구석기 인류 화석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상희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가 충북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흥수아이 두개골 원본을 살펴보고 있다. 이 교수는 충치가 많은 치아 상태와 화석화가 안 된 뼈의 상태를 바탕으로 구석기 유골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했다. - 사진 제공 윤신영

 

하지만 당시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발굴에서 중요한 증거인 출토 지층 등의 엄밀한 기록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퇴골 등 긴뼈의 계측치도 누락돼 있었다. 구석기인이 아닐 가능성이 줄곧 제기됐지만,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고고학계 한 원로는 이를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표현했다.

 

이미 기초 조사에서 구석기인으로 보기 힘든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뼈의 화석화(무기질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통상 1만 년을 기준으로 화석 여부가 갈린다는 점에서 4만 년 전 뼈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해석이다. 또 구석기 때는 매장이 매우 특수한 계층에서 이뤄져 부장품이 같이 발견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의문으로 지적됐다. 신석기 인류 고질병인 충치도 다수 확인됐다.

 

이 교수는 현재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고고학계도 그에게 힘을 싣는 분위기다. 흥수아이를 보유한 충북대 박물관도 나섰다. 충북대 박물관 기획부장인 김범철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이 교수와 함께 신체 측정 등 조사에 착수했다. 이선복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동료평가(peer review)라는 학술체계를 거치지 않은 주장이 일방적으로 퍼져 지금에 이르렀다 과학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법의인류학자인 진주현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확인기관 박사는 흥수아이는 (학술체계를 거치지 않은 탓에) 국제 인류학계에서 아무런 위치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를 통해 진실이 밝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출처; 동아사이언스, 국내 最古 유골 흥수아이, 구석기인 아닐 수도, 2018 03 02일,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2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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