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4.3.  4만 년 전~3만 년 전

 

4.3.1. 평안남도 덕천 승리산 동굴유적 - 승리산인(4만 년 전~3만 년 전)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약 75km 떨어진 곳에 있다. 1972~73년까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 의하여 두 차례 발굴된 이 동굴(길이 62.2m)은 대동강 서쪽 기슭의 두 번째 하안단구에 해당하며, 하상으로부터 17~18m, 그리고 지표로부터 7m 높이에 있다. 이 유적에서는 중기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굴 앞쪽에 쌓인 퇴적층은 6개의 층으로 구분되며

 

이 아래층에서 중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고인 단계의 큰 어금니 2개와 어깨뼈 1개가 발굴되었다. 이빨은 동굴 입구로부터 약 18m 지점에 있는 곳에서 동굴하이에나와 함께 들어 있었다. 한편 동굴 입구 가까운 곳에서 발견된 후기 구석기시대 신인의 아래턱뼈는 청동기시대 층보다 아래쪽으로 약 50cm 떨어진 층에서 나왔다. 이 층은 구석기시대 위층에 속하며 신인 화석은 약 4~3만 년 전 사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위층에서는 동물 화석이 출토되지 않았다. 고인 단계의 화석은 덕천사람’, 그리고 신인 단계의 화석은 승리산사람(35살 정도의 남자)’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덕천사람과 승리산사람의 유골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인류화석이다.

(출처; 한국고고학전문사전, 구석기시대편)

 

 

 

승리산 모습(출처; 전곡선사박물관)

 

 

 

출처; 전곡선사박물관

 

 

 

4.3.2. 충청북도 단양 상시바위그늘 유적 - 상시인(BCE 39,000~ BCE 30,000)

 

1981년 연세대학교 박물관은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에서 세 곳의 바위 그늘유적을 발굴하였다. 이 중 1바위그늘은 구석기시대, 2바위그늘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3 바위그늘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였다. 1바위그늘은 11개의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러 종류의 짐승화석과 석기가 나왔는데, 1바위그늘의 다섯 번째 지층에서 옛슬기사람으로 추정되는 머리뼈와 아래턱뼈 화석이 발굴되었다. 사람화석의 머리뼈와 아래턱뼈는 남성의 것으로, 발전된 곧선사람 또는 하이델베르크인의 특징이 일부 남아 있었던 것으로 관찰되었다. 화석이 발견된 다섯째 지층의 우라늄계열연대측정방법에 의해 절대연대는 3만년에서 ±9,000BP로 나왔다.

 

상시인(上詩人)은 후기 구석기 시대 한반도에 살던 화석인류로 처음에는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되었으나 나중에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로 분류된다.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에 있는 석회암 바위인 상시바위그늘유적에서 기원전 3 9천년에서 3만년 경 사이에 살던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해골과 아래턱뼈가 발견되었다. 상시옛슬기사람(Homo sapiens sangsiensis, Homo heidelbergensis sangsiensis)으로 부른다.

(출처; 위키백과)

 

 

 

 

상시 바위그늘 유적 / 슬기사람의 윗머리뼈

충북 단양군 매포면 상시리 상시마을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상시슬기사람의 윗머리뼈 겉모습.(손보기)(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면 상시리 상시마을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

서쪽으로 상시내가 흐르고 동북쪽으로 200m 높이의 석회암 산이 솟아 있다. 북쪽 영천리 산과의 사이에 측백나무 숲이 우거져 자라고 있다.

 

올도비시안기에 이룩된 석회암 줄기에 뚫어져 있고, 이 바위그늘의 네 곳이 유적이다.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1그늘·2그늘·3그늘·4그늘로 불린다. 1그늘은 구석기시대, 2그늘은 청동기시대, 3그늘은 구석기시대 끝 무렵과 신석기시대이고, 4그늘은 발굴되지 않았다.

 

1) 1그늘

1그늘에서 발굴된 층위는 모두 11층이며 그 아래로 34층이 더 있는 것으로 보인다. 11개층 중 1·4·6·10 4개층은 문화층이 아니고 나머지 7개층(2·3·5·7·8·9·11)만이 문화층이다.

 

부스러진 돌이 섞여 있는 5·7·10층은 기후의 변화가 심했던 시기에 쌓였고, 나머지 층은 흙 분석에서 찰흙층으로 그늘 안의 석회석가루와 언덕 위의 흙이 그늘 안으로 들어와서 생긴 층으로 나타났다.

 

짐승의 종은 젖먹이짐승 27, 물뭍짐승 2, 길짐승 1,  2종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옛말·말사슴·옛비단털쥐·들염소·북쪽오소리·아시아두꺼비들은 사라져 없어진 종으로, 이 그늘에 당시 살았던 사람들이 이 짐승들을 사냥한 것으로 보인다.

 

잡았던 사슴의 이로 보아 68달 된 사슴 6몸체, 1112달 된 사슴 4몸체, 18달 된 사슴 1몸체들로서, 이들은 늦가을과 겨울에 이 그늘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늘의 넓이가 24쯤 되므로 56사람이 한 식구로 살았던 것 같다. 시기는 중기 구석기시대 말후기 구석기시대로 가늠되며, 우라늄-토륨연대측정법으로는 3만 년 전으로 나왔다.

 

상시 1그늘에서 나온 사람의 뼈화석으로는 양쪽 윗머리뼈, 왼쪽 앞팔뼈, 오른쪽 뒤팔뼈, 오른쪽 주걱뼈들이 있다. 이들은 진화된 곧선사람(Homo erectus)의 특징과 슬기사람(Homo sapiens)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점이 드러났다.

 

양쪽 윗머리뼈는 그 휘임새에 있어서는 진화된 로데시아 곧선사람의 머리뼈와 비슷하며, 중국다리·스완스콤·제벨이루후  머리뼈와 닮은 점도 있어 슬기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보다 앞서는 것으로, 진화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을 지니고 있다.

 

뒷머리뼈의 이음새활과 활줄이 105 90으로 그 지수가 85.7이다. 다리사람이 115·100·86.9로 가깝고, 스완스콤사람의 105·92·87.6과도 매우 비슷하다. 이와 달리, 슬기슬기사람의 98·88·90.0과는 멀게 나타난다.

 

머리뼈 두께도 7이고 핏줄홈도 굵고 깊다. 뼈 이음새자리로 보아, 나이는 25살쯤 된 것으로 가늠된다. 머리 크기가 작은 점과 낮은 점은 진화된 곧선사람의 전통을 지니고 있어 연구과제가 된다.

 

왼쪽 앞팔뼈는 슬기사람의 특징을 지니며, 짧고 굵은 편으로 길이 22.7이고 휘임새도 슬기사람보다 크고 위둘레(anular sufrace)의 휘임새가 크다. 그 밑의 불룩이의 크기가 30.7×14.6로 힘살덧자리는 크고 거칠어 슬기슬기사람보다 오래된 것으로 나타난다. 앞팔뼈 마루(interosseous crest)에도 거친 덧자리가 있고 앞팔 뼈끝솟기까지의 너비는 33.2로 더 투박하다.

 

오른쪽 뒤팔뼈의 반달도르래는 짧고 굵다. 뒤팔뼈 몸체의 가장 가는 곳의 둘레는 42.0로 둘레지수(caliber index) 19.39로 훨씬 크다. 반달도르래 밑의 힘살자리는 매우 거칠고 신경구멍도 길고 그 아래 둘레도 크다.

 

오른쪽 주걱뼈는 줄기갓도리(margo axillaris)의 힘살홈이 슬기슬기사람의 것과는 달리, 등쪽에 나있어 네안데르탈사람의 것을 닮았다. 주걱뼈굼(cavitas glenoidales)  3 아래 둘레모습으로 보아 슬기사람의 것으로 가늠된다. 앞팔뼈와 뒤팔뼈의 길이로 보아 키는 161162로 추측된다.

 

전자 현미경으로 본 결과, 뼈를 깨고 뼈연장을 만들어 쓴 것이 뚜렷해졌다. 뼈밀개 가운데 한쪽에서 햇살방향으로 떼어낸 수법도 썼으며, 창끝으로 쓰기 위해 허리 양쪽을 홈을 파 듯 떼어낸 찌르개도 있다.

 

뼈를 깨고 깎으며 다듬는 데는 석기도 써 자갈돌을 떼어서 만든 큰 찍개 3점이 나왔다. 말사슴 갈비뼈에 가위표 (×)를 새기고 한쪽 끝에 구멍을 뚫어 치레걸이로 매달았던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가늠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앞으로 더 발굴할 필요가 있는 유적이다.

 

2) 2그늘

2그늘은 1그늘에서 상시내 쪽으로 50m쯤 내려와서 높이 솟은 낭떠러지 바위 벽 밑쪽에 3.5m×3m쯤 팬 그늘에 있다. 이곳에는 민토기조각과 무늬그릇조각이 얇게 깔려 있고 고동을 구어 먹은 화덕이 나왔다.

 

이 밖에 사람뼈·말뼈가 더불어 나왔고 마름질한 돌끌, 화살촉들이 나왔다. 말뼈는 한 몸체분이 고스란히 묻혀 나와서 이곳에 머물렀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묻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상시 바위그늘 유적

충북 단양군 매포면 상시리에 2그늘의 모습. (손보기남한 최고(가장 오래된)의 인골 발견된 단양 상시리 바위그늘(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3그늘

3그늘은 2그늘보다 남쪽으로 20m쯤 내려와서 더 낮은 상시내와 더 가까운, 지금의 둔치와 거의 같은 높이(해발 180m)에 자리해 있다. 4m 너비의 나들이를 가지고, 안으로 좁아지는 넓이 14의 그늘이다. 쌓임층은 모두 6층으로 나누어지며 맨 아래 6층이 후기 구석기시대 말기, 2·3·4·5층이 신석기시대로 나타났다.

 

후기 구석기 문화는 하이에나의 아래턱뼈와 우수리사슴·노루·오소리·토끼뼈가 있을 뿐이다. 2·3·4·5층에서는 석기로서 찍개·긁개·찌르개·홈날·뚜르개·화살촉 등의 발달된 구석기 전통의 석기와 아울러 곰배괭이·갈판·갈돌·공이들의 농사연장과, 간석기를 만들 때 썼던 숫돌·화살촉들이 출토되었다.

 

뼈연모로서 뼈송곳·찔개살·밀개·뼈바늘·치레걸이도 나왔다. 화로로 썼던 토기는 덧띠를 4줄로 대어 손으로 들어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해 나르기 좋게 만든 것으로 풀이된다. 덧띠화로 외에도 빗살무늬그릇과 점찍은 가락바퀴들을 만들어 썼고, 조가비로 연모를 만들어 쓴 것도 나왔다. 이들 연장으로 보아 농사와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상시그늘의 문화는 중기 구석기시대부터 후기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1그늘문화, 후기 구석기시대 말기에서 농사지으며 살았던 신석기문화인 3그늘문화, 신석기시대 말부터 청동기시대(민토기시대)까지 살았던 2그늘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이 유적은 곧선사람의 전통을 지니는 슬기사람 화석이 나와 우리 겨레의 뿌리를 찾는 점에서 매우 귀하고 뜻깊은 유적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3.3. 충청북도 단양 수양개 유적 - 사람 얼굴 모양 추정 돌조각(3 5천 년 전)

 

 

단양 수양개유적 모습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나라 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단양 수양개유적(사적 제398)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슴베찌르개와 좀돌날몸돌 등 특징적인 유물이 출토되어 주목받아 온 유적이다. 1980년 충주댐 수몰지구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알려진 후 1983년부터 2011년까지 10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수양개유적은 총 5개 지구로 구분되는데 발굴 조사된 지구(19831985지구(19951996지구(20002011)와 지표상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된 ·지구이다.

 

구석기 문화층은 지구와 수양개유물전시관 건립 부지였던 지구에서만 확인된다. 1980년대 중반에 발굴 조사된 수양개 지구에서는 50여 곳의 석기제작소에서 27,000여 점의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주먹도끼찍개긁개밀개슴베찌르개슴베밀개새기개뚜르개홈날톱니날주먹 칼간돌도끼 등 완성된 연모와 몸돌돌날몸돌좀돌날 몸돌격지돌날좀돌날·모룻돌·망치돌 등 석기제작과 관련된 유물들이다.

 

석기제작소와 출토된 다양한 석기 구성양상은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석기 제작 행위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또한 다량의 돌날몸돌좀돌날몸돌과 다양한 크기 의 돌날과 좀돌날, 여러 유형의 돌날연모 등은 후기 구 석기시대 사람들의 석기제작 전통을 밝힐 수 있는 자료 이다. 이는 시베리아·중국·일본 등지에서 확인되는 석기와 유사성을 지닌 것으로서 구석기시대 문화이동의 다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 석기인 좀돌날몸돌과 슴베찌르개가 같은 층위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점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굴조사된 구석기유적 가운데 좀돌날몸돌만 출토된 유적이 20여 곳, 슴베찌르개만 출토된 유적이 10곳 정도, 두 종류가 함께 출토된 유적이 10 여 곳이다. 좀돌날몸돌과 슴베찌르개가 함께 출토된 유적 가운데 수양개유적은 출토량이 가장 많고 다양한 제작기술이 엿보여 동북아시아 후기 구석기문화를 연 구하는데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수양개유물전시관 건립 부지였던 지구는 2001(8)· 2008(9)·2011(10) 세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지역은 5×5m의 그리드를 설정하여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전체적으로 7개의 퇴적층이 확인되었다. 퇴적층은 위로부터 표토 및 교란층()-적황색 모래질점질토 층()-황갈색 점질토층()-황색 점질토층()-적갈색 점질토층(각력 및 자갈포함, )-모래층()-자갈층()으로 구분된다. 이 층들은 구하상력 층인 3단구층과, 단구층 이후에 형성된 하상기원퇴적층, 그리고 석회암의 풍화물 에 유래한 사면기원퇴적층으로 나누어진다.

 

구석기 유물은 주로 자갈층과 고토양 층인 황색·황갈색 점질토층에서 확인된다. 3단구층은 약 2530만 년 전의 층으로 구석기 유물이 주로 출토되는 황색·황갈색 점질토층과는 시기상 큰 차이가 있다. 이는 단구층이 침식에 의해 2단구층까지 노출되었으며 당시 구석기인들이 남한강변과 산능선 평탄지를 점유하여 생활하였음을 의미한다. 구석기 유물은 지표수습 유물을 포함하여 901점이 출토되었는데 3개의 구석기문화층에서 공통적으로 찍개·여러면석기·주먹대패·긁개·밀개·홈날 등의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 황갈색 점질토층에서는 뚜르개·톱니 날·새기개 등의 새로운 연모가 확인되었다. 이 황갈색 점질토층은 돌날·좀돌날몸 돌과 슴베찌르개 등 후기 구석기시대의 특징적 유물이 출토되는 문화층으로 수양개 지구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층 유물의 형식 및 특징과 비교될 수 있다. 슴베찌르개와 좀돌날몸돌 단양 수양개 구석기유적에서 주목되는 것은 슴베찌르개 와 좀돌날몸돌(좀돌날 포함)일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석기는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로 지금까지 남한강유역에서는 단양 수양개유적, 제천 두학동 중말유적, 용인 평창리유적에서만 확인되었다.

 

수양개 지구에서도 2008 9차 발굴조사에서 슴베찌르개 1점이 2문화층인 황갈색 점질토층에서 출토되었다. 찌르개의 날은 잔손질하지 않고 슴베부분의 아랫면에서 윗면을 한쪽 부분만 가파르게 잔손질을 하였는데, 자른면은 삼각형을 이룬다. 찌르개 부분은 특별한 잔손질 없이 돌날로 떼어질 때의 날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좀돌날몸돌의 경우 수양개 지구에서 195점이 출토되었다. 좀돌날몸돌의 제작기법은 때림면과 타격방향을 기준으로 자연면을 때림면으로 사용하고 양면떼기로 배모양의 형태를 만든 뒤 좀돌날을 얻는 형태, 때림면을 다듬을 때 긴 방향으로 격지를 뗀 다음 좀돌날을 얻는 형태, 너비 방향떼기로 때 림면을 만든 뒤 좀돌날을 만드는 형태로 나누어진다.

 

수양개 지구에서도 좀돌날몸돌 1점이 지표에서 수습되었는데 경작 및 기와가마 생산활동에 따른 태토 채취 과정에서 원지층이 일부 훼손되면서 지표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좀돌날몸돌은 자연면을 타격면으로 활용 하며 양면떼기로 배모양을 만든 후 좀돌날을 얻는 형태이다. 좀돌날떼기 각도는 6575°이며, 모두 5개 정도의 좀돌날을 떼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굴 및 지표조사를 통해 슴베찌르개와 좀돌날몸돌이 확인된 유적은 60여 곳에 가깝다. 슴베찌르개와 좀돌날몸돌(좀돌날)이 함께 출토된 유적은 철원 장흥리·광주 삼리·공주 석장리·청원 노산리·단 양 수양개·장수 침곡리·밀양 고례리·장흥 신북·진안 진그늘·순천 월평유 적·승주(순천) 죽산 등이다.

 

슴베찌르개와 좀돌날몸돌의 출토는 유적의 형성 시기를 규명해주는 자료이자 유물의 분포 및 확산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연구자료로 이용된다. 발굴조사 및 지표조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북한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 전 지역에 걸쳐 슴베찌르개와 좀돌날몸돌이 출토되고 있어 우리나라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의 전파 및 확산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수양개 구석기유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단양 수양개유적은 우리나라 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구석기유적으로, 슴베 찌르개와 좀돌날몸돌 등 특징적인 유물의 출토와 꾸준히 개최되는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렇지만 수양개유적의 형성과 성격 파악을 위해서는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들이 있다. 먼저 수양개 지구와 지구 구석기유적 간의 퇴적층위 연결과 유적의 형성 시기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지구는 2단구층(해발고도 132m) 상부에 위치하고, 지구는 3단구층(해발고도 156m) 상부에서 유적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양개 지구의 지표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주먹도끼의 연대 문제이다. 이 주먹도끼는 수양개 지구에서 확인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3단구층 형성 이후~2단구 형성 이전, 즉 전기~중기 구석기문화층의 분 포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수양개유적 일대는 2단구와 3단구가 함께 분포하는 곳으로 전기~후기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 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퇴적층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제4기 지질학의 연구와 절대연대의 측정,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변화양상 등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로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의 암질 조사는 구석기유적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구석기유적의 석기는 고인류의 행위가 담겨 있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유적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암질 외에 흑요석·혼펠스·응회 암·쳐트 등은 석재의 채취뿐만 아니라 고인류의 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암질조사를 위해서는 유물 파괴 분석이 필요하기에 실질 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부분이 있다. 이를 위해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인류의 행위가 가해지지 않은 외부반입석재를 이용하여 자연과학분 야와의 공동 연구가 필요하다. 자연과학에서 도출되는 결과를 통해 유적 내에서 사용되는 암질 및 암질과 석기 제작의 관계 등을 파악하고 주변유적과의 비교를 통해 고인류의 이동까지도 이야기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출처; 2011 한국고고학저널)

 

 

그런데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이 수양개유적 6지구에서 발굴한 유물을 확인하던 중 '얼굴 모양 돌조각'을 찾아냈다고 2015 11 2일 밝혔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남한강가에 있는 수양개 6지구에서 지난해 발굴한 유물을 확인하던 중 '얼굴 모양 돌조각'을 찾아냈다고 2015 11 2일 밝혔다. 성인의 엄지손톱 크기인 이 돌조각은 가로 2.29, 세로 1.57이며,  35천 년 전의 문화층에서 출토됐다. 연구원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 등 4개 기관에 이 토층의 시료를 보내 연대를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이 경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연구원은 "구석기 사람들이 얼굴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선을 그은 것으로 본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돌에 새겨진 선들을 얼굴 모양으로 추정하는 이유에 대해 "현미경으로 유물을 살피면 입 부분의 가운데를 살짝 아래쪽으로 그려 인중을 나타냈고, 돌의 전반적인 형태가 이마와 턱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이어 "3만년에서 35천 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은 선을 그은 것만으로도 예술품으로 간주된다."면서 "얼굴 모양을 새긴 돌조각은 동시대 유물 중 매우 희귀하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예술성과 자의식이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배기동 한양대 교수는 관련 유물을 사진으로만 접했다고 전제한 뒤 "인공적으로 조각하듯이 판 것은 틀림없다"면서 "큰 돌의 귀퉁이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파편이라 전체 모습을 본다면 얼굴 조각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양 수양개 6지구에서 나온 사람 얼굴 모양 추정 돌조각.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이어 "얼굴로 보이지만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대에 따라 혹은 개인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서 한쪽으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출처; 연합뉴스, 단양 수양개유적서 사람 얼굴 모양 추정 돌조각 발견, 2015.11.02.

https://news.v.daum.net/v/20151102095326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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