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4.5. 2만 년 전~1만 년 전 본문
《만주와 한반도 후기 구석기시대 년대기》
4.5. 2만 년 전~1만 년 전
4.5.1. 흑룡강성 하얼빈 염가강유적- 하얼빈인; 20,000 BP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 시 서남쪽 25㎞ 옌자강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쑹화松花 강과 윈량허運粮河 강 사이의 해발 146m인 제2단구에 있으며, 윈량허 강에서는 10m높이에 있다.
1982년~1985년까지 조사하여 사람 머리뼈, 석기, 짐승 화석, 뼈연모, 불탄 뼈, 재층 등을 찾았다. 옌자강유적은 A, B, C 3구역에서 20여 개의 시굴 구덩이 조사되었으며, 그중 B구역의 지층이 비교적 완벽하게 남아 있다.
층위는 5층으로 구분되며 위로부터 제5층은 30~50㎝ 두께의 검은 갈색 부식토층이다. 제4층은 135~145㎝ 두께의 노란 갈색의 황토층이다. 윗부분은 비교적 단단하고 아랫부분은 잔모래로 비교적 무르다. 제3층은 45~70㎝ 두께의 황백색 모래점토층이다. 비교적 뚜렷한 파도 모양으로 아주 가는 모래층이 끼어 있다. 제2층은 130~140㎝ 두께로 노란 가는 모래층으로 가는 모래는 위로 갈수록 많아진다. 제1층은 20㎝만 발굴되었는데 노란 고운 모래층으로 희미하게 층 구분이 된다. 그 아래층은 명확하지 않다.
화석과 유물은 제4층 아랫부분, 제3층과 제2층 윗부분에서 발견되었다. 제3층에서 사람 오른쪽 윗머리뼈 뒷부분 조각이 나왔는데 산딩둥山頂洞유적에서 나온 사람보다는 늦은 시기에 속하는 특징을 보인다. 석기는 찍개, 긁개, 격지 등 9점이 나왔다. 뼈·뿔로 만든 연모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짐승 화석은 3,000점이 넘게 발굴되었다. 젖먹이짐승은 털코끼리, 털코뿔소, 들소와 말류 등 모두 7목 15과 25속 29종으로 삼림형 짐승 25.8%, 초원형 짐승 71.2%, 강과 늪지형 짐승이3%를 이룬다. 사멸종은 최후하이에나 등 7종으로 25.9%를차지한다. 식물은 25개 과科 속屬 종種의 화석이 나왔다. 이를 통하여 옌자강유적의 자연환경은 초원 환경의 서늘한 기후였음을 알 수 있다.
옌자강유적에서는 짐승 뼈로 쌓은 반원형 구조물이 발굴되었다. 구조물은 2개가 나왔는데 1호(HY83TA3)는 6.0×5.5m, 2호(HY84T4)는 5×5m 크기의 둥근 구조로 짐승의 긴뼈대를 이용해 여러 단으로 쌓았던 것이 무너진 채 남아 있었다. 1호는 들말 6, 들소 5, 털코뿔소 2, 그리고 사슴과 여우 1마리씩 등 20여 종의 큰 짐승의 뼈대 500여 개로 쌓았다. 짐승의 종은 중국 북방의 갱신세 후기 털코끼리-털코뿔소 짐승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90% 이상이 나이 어린 짐승으로 때때로 뼈에 인공의 흔적이 나타나기도 한다.
1호와 수십 미터 떨어져 있는 2호는 입구가 북동 방향으로 500여 점의 뼈대를 3층으로 쌓았으며 아래층은 코뿔소의 큰 뼈로 이루어졌으며 가운데와 위층은 들소, 들말, 사슴 등 작은 뼈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조물은 털코뿔소 9, 들말 5, 들소 3, 사슴4, 최후하이에나 1, 이리 1, 영양 2마리 등으로 구성되었다. 구조물 근처에서는 숯, 불탄 뼈와 간단한 연모들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구조물들은 4개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베리아 말타Mal’ta유적의 집터 구조와 비슷한 점이 있다. 철따라 이동 생활을 하면서 짓고 살았던 임시 집터 또는 짐승 사냥을 위한 은신처로 보기도 한다. 지질 층위와 출토된 동물상으로 보면 후기 갱신세 늦은 시기 유적으로 판단되며 방사성탄소AMS연대측정 결과는 22,370±300 BP의 연댓값이 나왔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구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4&idx=253)
4.5.2. 흑룡강성 오상학전유적- 학전인; 20,000 BP
『이 유적은 흑룡강성 오상현 용봉산향에 위치하며 송눈평원 동남쪽 가장자리이다. 서북방향으로 35km 지점에 오상현성이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3km지점에 송화강 2급지류 망우하가 있으며 동남 방향으로 7km 지점에 장광재령 서쪽 산맥 용봉산이 있다.
1986년 9~10월 흑룡강성고고연구소에서는 정식으로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발굴은 번호 H8601과 H8602 지점으로 나누어 실시하여 대량의 포유동물화석을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H8601 지점에서는 인류화석, 석제품과 뼈도구를 확인하였다. 두 지점의 화석의 층위 침적물 암석, 화석 출토 층위, 석화 정도와 포유동물화석이 기본적으로 일치해서 그것들을 동일 지점과 동일 시기로 간주하였다.
인골화석 출토 2점 중 한 점은 좌측 종아리뼈, 다른 한 점은 대칭적인 이마뼈이다. 전자는 종아리뼈를 보존, 길이 23cm, 전척상부가 예리하고 얇으며 하부는 원형이고 외부측상은 가볍게 흠이 있으며 하단은 융기되었다. ~ 성년 여성의 것으로 추정된다.
후자와 나란히 놓인 3점의 부스러기는 회황색이며 비중이 비교적 크다. 좌측 이마뼈로서 거기에는 섭연부분이 포함되고, 상부에는 이마 결절이 있다. 좌측 이마뼈의 앞뒤 부분이 보존, 관상봉합점이 뚜렷하다. ~ 이마뼈 벽으로 판단하면 5~6세의 어린아이에 속한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포유동물화석은 925점이다. 감정된 8종은 송화강 맘모스, 진맘모스, 털코뿔소, 들소, 프레제발스키 야생말, 사슴, 식육류, 두더지 등이다. ~ 동물 중의 사멸 종속 및 Carbon14 측정 결과 BP 24500±400년이다. 오상 유적의 지질연대는 후기홍적세,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출처; 조빈복, 중국 동북 구석기문화, 97쪽 ~ 100쪽)
4.5.3. 요동 단둥 동구현 전양유적- 전양인; 18,000 BP
『전양인 동굴유적은 요녕성 단동시에서 서남 방향으로 36km 지점에 있다. 단동시 동구현 전양향 백가보촌에 예속되어 있다.
동굴은 1982년 지역 농민들이 채광 시 발견된 것이다. 같은 해 5월 요녕성과 단동시 고고연구부에서 조사단을 조직하여 발굴을 실시하여 1매의 인류화석과 동물화석 그리고 석제품을 발견하였다.
동굴 전체 문화퇴적층 두께는 1.5m, 최초 발굴시 전체 퇴적의 절반을 발굴하였다. 암성과 침적물의 성격에 의해서 위에서 아래로 4층으로 나누었다.
전양동굴에서 출토된 인류화석은 두개골, 아래턱, 고골 및 이빨 등이다. 2인 개체에 해당되며 이 화석은 제3층에서 출토, 동일 시기의 사람이다. …
아래턱의 상 · 하 어금니는 대단히 뽀족하고 기본적인 마모현상 분석에 따르면 죽은 자의 연령은 20세 미만이다. …
두개골의 뇌용량이 비교적 작은 것 등을 관찰하면 전양인은 여성 개체에 속한다.
전양인 화석은 2인의 개체, 전체적으로 황색인종의 체질 특징을 가졌으며 중국 화북인 유형에 접근된다고 보고 있다.
제3층에서는 동물화석과 함께 3점의 석제품이 출토되었다. …
전양동굴 출토 포유동물화석은 18종이다. …
전양인 지층의 절대 연대는 북경대학 Carbon14 실험실에서 측정한 것은 BP 18620±320년이 산출되었다.』
(출처; 조빈복, 중국 동북 구석기문화, 168쪽 ~ 173쪽)
4.5.4. 충청북도 단양 수양개 유적-눈금 새김 돌제품; 18,000년 전
2014년 6월 17일 동아일보는 5월 중순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의 남한강가에서 구석기 유적 발굴 작업을 하던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연구진이 1만 8천 년 전에 제작된 여러 석기를 발굴하던 중 일정 간격으로 눈금이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고 보도하였다.
『구석기인들이 ‘눈금자’를 사용했다?
5월 중순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의 남한강가에서 구석기 유적 발굴 작업을 하던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연구진은 깜짝 놀랐다. 약 1만8000년 전에 제작된 여러 석기를 발굴하던 중 마치 자처럼 일정 간격으로 눈금이 새겨진 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구석기인이 포획 동물 수를 뼈에 새겨 넣는 등 수(數) 개념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기존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하지만 구석기인들이 수를 이용해 크기, 넓이를 계산하는 측정 도구를 사용했는지는 밝혀진 바 없었다. 눈금이 새겨진 돌을 보고 놀란 이유다. 16일 문화재청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2011년부터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단양 수중보 건설지역에서 진행된 후기 구석기 유적(수양개 6지구) 발굴조사를 통해 눈금을 새긴 돌제품 등 총 1만5000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5월 중순 충북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남한강 유역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눈금(점선 안)이 새겨진 돌. 일정한 간격으로 눈금이 새겨져 있는 이 돌은 다른 돌의 길이를 잴 때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길이는 20.6cm로 아래쪽 10cm 길이의 자보다 배 이상 길다. 문화재청 제공
연구원에 따르면 이 유적지(830m²)에서는 총 3개의 후기 구석기 문화층이 발견됐다. 문화층이란 집터, 석기 제작터 등 인류 행위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출토된 석기는 몸돌, 격지, 조각, 망치 등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다. 이 일대에서 석기 제작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눈금이 새겨진 돌은 가장 아래층인 3문화층에서 발견됐다. 길이 20.6cm, 너비 8.1cm, 두께 4.2cm의 길쭉한 규질사암 자갈돌에 0.4cm 간격으로 눈금 22개가 새겨져 있다. 손으로 들고 다른 돌의 길이를 잴 수 있는 크기로 망치 등을 제작할 때 쓰였을 수도 있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유적의 형성 시기는 중간층인 2문화층의 숯 연대를 측정한 결과 약 1만8000년 전후였다.
우종윤 선사문화연구원장은 “눈금 돌이 발견된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처음”이라며 “구석기인들이 단순히 숫자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을 넘어 각종 사물을 측정하는 용도로까지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눈금 돌이 측정용으로 사용됐는지를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낼 계획이다.』
(출처; 동아일보, 구석기인들의 눈금자?… 충북 단양서 눈금 새겨진 돌 발굴
http://news.donga.com/3/all/20140617/64337862/1)
4.5.5. 충청북도 청원 소로리유적- 소로리 볍씨; 15,000년 전
소로리유적은 오창과학산업단지 건설을 계기로 1997년~1998년, 2000년에 발굴 · 조사하였다. 1문화층은 후기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 2문화층은 1문화층보다 약간 앞선 시기, 3문화층은 중기 구석기시대로 보고 있다. 그런데 한국고고학전문사전에는 소로리 볍씨 언급이 없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소로리유적 항목이 없다.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읍 소로리 156-1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의 주변 지역은 소구릉이 완만한 경사로 미호천 방향으로 발달하여 있으며 이 구릉에는 침식작용으로 인한 소계곡이 남동 방향으로 뻗어 있다. 오창과학산업단지 건설을 계기로 1997년~1998년까지 충북대학교 박물관이 주관하여 A지구(충북대), B지구(단국대), C지구(서울시립대) 및 지질조사(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4개 팀이 조사에 참여하였다. 2000년에는 지구 토탄층을 중심으로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소로리유적의 전체 퇴적층은 크게 5개 지층으로 구분되며 세분하면 9개 지층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문화층은 3개가 확인되었는데 A지구는 1문화층(2-2지층), B지구는 1·2문화층(2-3지층), C지구는 1·2·3문화층(3-1지층)에서 석기가 출토되어 각 지구별로 문화층의 존재 양상이 다르다. …
전체적으로 소로리유적의 석기는 대부분 1문화층에서 출토되었고 2·3문화층 출토 석기의 수는 많지 않다. 돌감은 규암과 석영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밖에 사암, 화강암, 편마암, 응회암, 염기성 맥암, 석영 맥암 등이 드물게 사용되었다.
석기 수성은 격지떼기에서 비롯된 몸돌과 격지, 돌조각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잔손질된 석기가 드물고 석기 종류도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보고자는 유적의 연대를 절대 연대값과 지층, 석기의 특징을 고려하여 1문화층은 후기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 2문화층은 1문화층보다 약간 앞선 시기, 3문화층은 중기 구석기시대로 보고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전문사전, 구석기시대편, 소로리유적)
청주소로리볍씨 홈페이지에 따르면 1997∼98년에 제 1차 발굴작업이 실시되면서, 구석기 유물들과 함께 소로리 볍씨가 처음 찾아져 학계에 보고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고 한다.
『소로리유적의 위치
청주 소로리 구석기유적은 충북 청주시 옥산면 소로리 156-1(밭) 에 위치한다
소로리볍씨의 의미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볍씨는 중국 화북지방으로 1만 500년 전으로 기록돼 왔는데, 그보다 3000여년이나 앞선 소로리 볍씨가 발견됨으로써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벼에 대해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질까?
농경(農耕)의 시작은 인류가 탄생된 이후 불(火)의 발견과 함께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농경중의 으뜸인 쌀(벼)의 시작은 언제부터 시작하여 발전해 왔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전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와 고증을 계속 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 인구의 60%이상이 쌀(벼)을 주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벼의 기원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왔지만, 주로 중국을 중심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1970~80년대까지는 주로 황하 유역에 있는 유적에서 발굴된 볍씨들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장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양자강 유역에 있는 유적에서 밝혀진 자료들이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 좋은 예가, 호남성 도현 옥섬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가 만 천년으로 밝혀지면서, 이 주장은 더 굳어지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청원 소로리 볍씨가 출토되었다.
1994년 충북 청원군 소로리 일원에 오창과학산업단지의 조성 계획이 수립되고,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사전 지표조사가 실시됐다.
지표조사로 구석기 유물들을 확인하여 1997∼98년에 제 1차 발굴 작업이 실시되면서, 구석기 유물들과 함께 소로리 볍씨가 처음 찾아져 학계에 보고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오창산업단지 예정지 토탄층에서 발견된 볍씨는 고대볍씨임이 밝혀졌고, 청주문화방송국에서 특집 다큐멘터리 프로제작이 확정되면서 2001년 2차 발굴 작업이 실시됐다.
1차 발굴은 구석기 문화층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졌고, A지구 II 구역 토탄층 일부에 대해 발굴작업이 이뤄졌지만, 2차 발굴 작업은 볍씨를 찾는 작업이라 대나무칼로 토탄층을 얇게 쪼개고 쪼개 수거된 토탄들을 물체질 정밀작업을 실시하여 고대벼 6톨과 유사벼 30톨을 찾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출토된 볍씨는 바로 서울대학교 AMS(방사선탄소연대측정) 연구실과 미국의 지오크론(Geochron Lab.)’연구실로 보내져, 1만 3000년~1만 5000년 전의 절대 연대값을 얻어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임이 판명됐다.
소로리 볍씨가 1만 5000년 전 것으로 판명되자 일부 학계에서 의문이 제기됐다.
즉, 1만 5000년 전은 구석기말 빙기의 끝무렵인데 한반도에서 아열대 식물로 알려진 벼가 추운 기후에서 자랄 수 있었을까? 또 그 벼가 야생벼인지, 재배벼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고증을 얻기 위해 청주MBC 취재팀이 국립 작물시험장 춘천출장소에서 냉해실험을 통해 벼가 자랄 수 있는 온도를 실험한 결과, 벼가 자연상태에서 최저 발아온도가 섭씨 20도로 알려졌지만, 실험결과 13도에서도 70%이상이 발아되어 생성되는 연구 결과를 얻게 되었다.
냉해실험을 통해 따뜻한 기후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벼가 기후적응을 잘하는 식물로 1만 5000년 전의 학설이 긍정적으로 무게가 실려졌다.
볍씨를 분석한 허문회(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서학수(영남대학교 교수), 박태식(작물시험장 박사), 조용구(충북대학교 교수) 등의 연구에 따라, 소로리 볍씨는 재배벼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여기에 따라 이융조(충북대학교 교수)는 재배벼 이전의 순화벼로 국내외 학계에 발표하였다.
2003년 10월 22일, 세계적 권위를 갖고 있는 영국 BBC 방송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소로리 유적에서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라고 하는 타이틀로 보도하였으며, 인터넷판으로 다시 그 내용을 전 세계에 보도하여, 이제는 소로리 볍씨가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인 것으로 공인받은 셈이다.
소로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구석기시대 야외유적과 토탄층이 함께 확인된 곳으로 고고학과 고생물학, 제4기 지질학 등 학문연구를 통하여 벼의 기원과 진화, 전파경로를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며, 2004년 1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문화유산 관계자들은 이 유적이 세계 문화유산으로의 등재 가치가 충분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출처; 청주 소로리볍씨,
https://www.cheongju.go.kr/sorori/contents.do?key=20118)
동아일보 2014년 5월 14일자 기사 “세계 最古 소로리 볍씨 아시나요?”에서는 연대측정결과 1만 7000년 전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청주서 기념사업 추진위 발족
“美서 1만7000년 전 볍씨로 확인… 구석기학회서 새 학명 제안할 것”
…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은 “앞으로 소로리 출토 유물 보존과 청주 소로리 볍씨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재조명 사업, 후속 연구를 위한 지원활동 등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이끈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소로리 볍씨 발굴을 비롯해 교과서에 등장하는 청원 두루봉 동굴 구석기 유적 발굴,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한국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으로 전시되고 있는 단양 수양개의 슴베찌르개 발굴 등 선사 고고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았다.
그는 “소로리 볍씨는 현재 1만5000년 전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 애리조나대의 조사 결과 1만70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됐다. 앞으로 연대기를 1만7000년 전으로 수정하고, ‘한국에서 재배된 벼’라는 의미로 ‘오리자 사티바 코레카(Oryza sativa coreca)’라는 새 학명으로 명명할 것을 11월 열리는 아시아구석기학회에서 제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는 1994년 오창과학산업단지 조성에 따른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던 중 충북대 박물관이 구석기 문화층과 토탄층을 확인했다. 이후 1997년부터 2001년 사이 고대 볍씨 18알, 유사 볍씨 41알 등 모두 59알의 고대 탄화(炭化) 볍씨를 발굴했다. 이 볍씨들은 탄소연대측정 결과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왔던 중국 후난(湖南)성 출토 볍씨(1만2000년)보다도 3000여년이나 더 오래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세계 最古 소로리 볍씨 아시나요?”, 2014. 5. 14.
http://news.donga.com/3/all/20140513/63452299/1)
중부매일은 2019년 9월 29일자 〈'청주 소로리볍씨'의 오늘과 내일〉 기사에서 2토탄층에서 출토된 볍씨들이 고대벼(뒤에 원조벼로 고쳐 부름)의 1형(작은 벼, 자포니카 종) 17톨과 2형(긴 벼, 인디카 종) 1톨, 그리고 유사벼(벼와 유사한 식물유체)의 1형과 2형(모두 109톨)으로 분류해 4종 127톨이라고 하면서, 세계 고고학 개론서 'Archaeology'에 쌀의 기원을 2004년 개정판부터 '중국'에서 '한국'으로 변경하였고 2016년 7판도 한국으로 표기하였다고 한다. 한편 벼에 달린 소지경이 인위적으로 잘라냈던 흔적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쌀은 인류에게 생명이고 문화를 만든 중요한 역동적인 핵심체다. 이렇게 중요한 쌀의 연구는 UN의 산하기관인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 IRRI, 필리핀 로스 바뇨스 소재)를 중심으로 특히 미·영·일·중국학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IRRI에서 4년 마다 개최한 제4회 벼 유전학 국제회의에서 서학수 영남대 교수와 발표자는 2000년 10월 22일부터 27일까지 열린 회의에서 청주 소로리볍씨를 처음 발표했고, 이 회의의 종합 수정본이 2003년 출판됐다.
이어 4년마다 열리는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WAC-5, 미국 워싱턴DC 2003. 6. 21~26)에서 125개 분과의 하나로 열린 '제8회 수양개와 그 이웃들'에서 발표된 2개의 논문(이융조·우종윤의 '1만5천 년 전의 세계 최고의 소로리 벼: 발견과 의미'와 김종찬·이융조의 '구석기 유적인 소로리토탄층의 연대측정')이 발표되면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2토탄층에서 출토된 볍씨들을 고 허문회 교수(전 서울대)는 고대벼(뒤에 원조벼로 고쳐 부름)의 1형(작은 벼, 자포니카 종) 17톨과 2형(긴 벼, 인디카 종) 1톨, 그리고 유사벼(벼와 유사한 식물유체)의 1형과 2형(모두 109톨)으로 분류해 4종의 유형을 확인해 발표했다. 이것은 청주 소로리볍씨가 단순히 한 유형만이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2003년 이들의 발표 이후 같은해 9월 10일 계간지 고고학(ARCHAEOLOGY)에 올해의 발견(Year of DISCOVERY)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는 바로 국제적으로 제일 높이 평가 받고 있는 BBC뉴스에 2003년 10월 21일 '세계 최고의(oldest) 순화벼'로 보도되고 AP·AFP·Le Monde에도 인용·보도됐다.
세계적인 고고학 개론서에 청주 소로리 볍씨가 기존 중국것보다 앞선다는 것이 명시돼 있다. 출처 : 중부매일(http://www.jbnews.com)
세계적인 고고학 개론서에 청주 소로리 볍씨가 기존 중국것보다 앞선다는 것이 명시돼 있다. (확대본) 출처 : 중부매일(http://www.jbnews.com)
벼에 달린 소지경을 비교해 보면 야생벼는 자연탈립돼 그냥 통째로 떨어지게 되나, 재배벼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자연탈립되지 않고 인위적으로 잘라야만 떨어지는데, 고 박태식박사(농업과학원)가 실시한 전자주사현미경(SEM)의 연구결과로도 잘라진 특징을 밝혀내 인위적으로 잘라냈던 흔적임을 확인했다.』
(출처; 중부매일, '청주 소로리볍씨'의 오늘과 내일, 2019.09.29
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2204)
경향신문 2019.12.03.자 기사 〈홀연히 나타난 1만5000년전 '청주 소로리 볍씨'의 정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에서 이기환은 소로리볍씨를 국내학계에서 외면하고 있지만, 소로리 토탄층과 볍씨의 연대가 1만2500년 전~1만5000년 전으로 측정된다는 것과 박태식 박사(농총진흥청 작물시험장)의 소로리 볍씨 소지경 분석과 볍씨가 출토된 문화층에서 사용 흔적이 관찰되는 홈날 연모의 출토로 1만5000년 전 구석기인의 벼수확 흔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1만5000년 전(소로리볍씨)와 5000년 전(고양 가와지 볍씨) 사이에 무려 1만년의 공백기가 있으니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다른 곳에서 소로리 단계의 볍씨를 찾아내는 것이 과제라고 보았다.
『국뽕사관의 산물인가?
소로리에서 확인된 볍씨. 2매의 토탄층(부패와 분해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식물의 유해가 진흙과 함께 늪이나 못의 물 밑에 퇴적한 지층)에서 127톨의 볍씨와 곤충화석, 그리고 각종 식물자료를 찾아냈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이 ‘소로리 볍씨’는 국내 주류 학계의 냉대와 외면 속에 발굴·연구자인 이융조 충북대 교수 등의 동분서주로 국제학계에 알려졌다. 2003년 BBC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가 발견됐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과학자들이 소로리에서 가장 오래된 순화벼(domesticated rice)를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소로리’ 관련 기사는 이후 르몽드 등에서도 소개되었다. 이융조 교수에 따르면 고고학 개론서인 <Archaeology> 제4판(2006년)에 ‘중요한 식량과 짐승종들이 처음으로 순화된 위치’가 담긴 세계지도를 첨부하면서 ‘한반도 청주 부근에 쌀그림’을 표시해두었다. 그 책에는 ‘최초로 순화된 동식물과 전 세계 문화발전 편년표’를 작성하면서 ‘벼=한국 1만3000년 전’이라 했다.
과문한 필자는 ‘청주 소로리 볍씨=세계 최고(最古)의 재배벼’라는 주장이 100% 옳은지 판단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실제로 ‘소로리 볍씨’의 연구·발표 단계에서 ‘검증이 완료되지 않는 가설단계의 내용을 전 세계에 홍보하는 국수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시쳇말로 ‘국뽕 사관’이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소지경’과 관련해서도 탈립면(잘린 부분)이 울퉁불퉁하다고 해서 ‘인간의 수확행위’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하는 주장도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짐승이 볍씨를 따먹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벼농사의 기원국’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려면 고고학적으로 연속적인 성과물이 축적되어야 하는데 소로리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약점도 있다. 즉 중국의 경우 소로리와 비슷한 연대의 벼 유적인 중국 후난성(湖南省) 유찬얀(玉蟾岩) 동굴을 비롯해 허무두(河姆渡) 유적(7000년 전)까지 벼농사 역사의 흔적이 계속 나온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만5000년 전(소로리)와 5000년 전(고양 가와지) 사이에 무려 1만년의 공백기가 있다. 소로리 단 하나의 에피소드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으며, 이것은 벼농사의 기원·발전을 언급할 때 하나의 약점일 수 있다.
1만5000년전 무렵이면 지금의 한반도와 중국 대륙은 육지로 붙어 있었다. 따라서 소로리 벼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양쯔강 유역 등지에서 동물(철새)이나 사람(수렵민)에 의해 운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 이융조 교수는 벼농사의 기원과 관련해서 “중국학자 옌원밍(嚴文明)의 ‘벼농사 다중기원설’을 주목한다.”고 밝힌다. 벼농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곳저곳에서 시작되었으며 소로리도 그런 지역 중 한 곳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소로리 만이 벼농사의 기원지로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융조 교수는 “소로리 볍씨는 재배단계 초기 농경 단계 사이의 순화가 진행되던 순화벼(domesticated rice)라고 해석되며 순화초기단계로 볼 수도 있다”고 밝힌다.
소로리에서 확인된 1만2000~1만5000년전의 벼. 국내외 4개기관의 연대측정 결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토탄에 박힌 볍씨의 연대
하지만 소로리 유적의 토탄층 연대측정 결과는 층위상 안정적이다. 가장 오래된 시기층인 밑부분 토탄층은 1만6890년 전이고 그 위부터 1만6340년 전~1만4090년 전~1만3750년 전~1만2890년 전~9510년 전~8800년 전 등의 순서이다. 볍씨가 가장 많이 나온 2토탄층의 연대는 1만2500년 전~1만4820년 전이었다. 맨밑부터 위까지 시기가 차근차근 올라간다는 것은 지층이 뒤집어지지 않았다는 의미한다. 즉 현대에 제작된 비닐이 1만5000년 전의 토탄층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볍씨’가 1만5000년 전에 쌓인 토탄층에 혼입될 수 없다.
학계 일각에서는 그래도 확실한 것이 좋으니 토탄층에 박힌 채 출토된 ‘고대볍씨’ 그 자체의 연대측정이 필요하다고 권유했다. 이에 따라 조사단을 이끈 당시 이융조 충북대 교수(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는 ‘토탄에 박힌 볍씨’를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 AMS연구실에 보냈다. 그 결과 1만2550년전(토탄)과 1만2520년전(볍씨)이라는 연대가 나왔다. 이것은 서울대 AMS 연구실 측정결과(토탄 1만2900년 전, 유사벼 1만2500년 전)와 완전히 일치했다. 이융조 교수는 “미국의 지오크론 연구소와 애리조나대와 서울대 AMS 연구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국내외4개 연구기관에서 흙과 볍씨, 토탄 등을 시료로 해서 교차검증해보니 동일한 결과를 얻어냈다”고 밝혔다. 이는 토탄 퇴적 층위가 매우 안정적이며, 볍씨들이 바로 그 원위치에서 출토되었음을 일러주는 것이다.
1만5000년전에도 이른바 자포니카형인 단립형 벼와 인디카형인 장립형 벼가 존재했다.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1만5000년 전 자포니카
그렇다면 토탄층에서 발견된 볍씨는 요즘의 볍씨와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서울대 허문회 교수(2010년 작고)는 소로리 출토 볍씨(127톨)을 분석한 결과 기원벼(18톨)와 유사벼(109톨)로 나누었고, 기원벼를 다시 자포니카형(17톨)와 인디카형(1톨)로 구분했다. 허교수는 “소로리 볍씨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졌던) 고양 가와지 볍씨(5200년전)와 크기 및 모양이 비슷하며 현재 재배종에 비해 벼알의 어깨쪽이 약간 좁고 가운데에서 끝쪽으로 약간 굵게 보인다”는 관찰기록을 남겼다. 이미 이 시대에도 이른바 자포니카형, 즉 단립형 벼를 선호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이융조 교수는 “사람들의 입맛이 작은벼(자포니카형)로 발전해가는 과정은 이미 가와지 1형(5000년전)과 2형(3000년전) 볍씨에서도 보인다”면서 “소로리 볍씨 단계에서 이미 작은벼(자포니카형)에 대한 기호현상이 있었다는 것은 한국벼의 진화과정과 연결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해석했다. 이융조 교수는 “또 볍씨의 DNA 구조를 분석해봤더니 소로리벼는 야생벼에서 잡초벼, 인디카, 자포니카 등이 분화되는 원시형 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물론 소로리 볍씨는 현대벼와는 완전히 다른 그룹이다.
인간이 수확했다는 증거로 제시된 소지경의 흔적. 벼가 익어 저절로 떨어지면 잘린 단면은 원형이 매끌매끌 하지만 인위적으로 자른 단면은 울퉁불퉁하고 거칠다.(왼쪽 사진) 같은 층에서 확인된 홈날연모. 아마도 1만5000여년전 구석기인들은 이 연장으로 벼를 수확했을 가능성이 있다.|한국선사문화연구원 제공
1만5000년 전 구석기인의 벼수확 흔적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이른바 ‘소지경(小枝莖·줄기에 붙어있는 부분)’의 관찰기록이다.
곡물의 순화, 즉 야생→재배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형태변화는 야생형에서는 벼알이 완전히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지만 재배벼에서는 그대로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스레 떨어진 부분 즉 탈립면에는 원형의 매끄러운 흔적이 남는다. 반면 순화형 벼의 경우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달려 있다가 인간의 수확행위로 잘리게 된다, 그 경우 잘린 단면은 매우 거칠게 나타난다.
그런데 당시 박태식 박사(농총진흥청 작물시험장)이 소로리 볍씨 가운데 소지경 분석이 가능한 볍씨 13톨을 분석했더니 그중 4톨에서 아주 유의미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즉 소지경이 매우 울퉁불퉁 거친 상태로 잘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도구로 수확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마침 볍씨가 출토된 문화층에서는 사용 흔적이 관찰되는 홈날 연모가 나왔다. 이융조 교수는 “소로리 사람들이 이 홈날 연모를 써서 다 익은 벼를 수확한 뒤 먹을거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 볍씨가 토탄층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그렇다면 소로리 볍씨는 1만2000~1만5000년전 인간의 먹이얻기로 남겨진 유체로 인류가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볍씨가 출토된 시대의 기후는 어땠을까. 볍씨가 많이 출토된 2토탄층의 화분 분석 자료는 ‘상대적으로 온난 습윤한 저습지에 형성된 토탄층’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나무분석 자료를 봐도 오리나무-밤나무 류의 낙엽활엽수가 주로 나타났다.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온난한 기후였던 알레뢰드/뵈링 간빙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로리 볍씨의 과제
‘소로리 볍씨’를 정리해보면서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일단 소로리 토탄층과 볍씨의 연대가 1만2500년 전~1만5000년 전으로 측정된다는 것이 눈에 띈다. 국내외 4개 기관(서울대·한국지질자원연구원·지오크론 연구소·애리조나주립대) 등에서 얻은 연대측정 기록이라 한다.
토탄층 연대가 미심쩍다 해서 토탄층에 박힌 볍씨 연대를 직접 측정했고, 그 결과가 같다면 믿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연대측정을 교차 검증한 결과 각 층위별로 안정적인 퇴적층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소로리 볍씨는 벼농사 기원논쟁의 차원을 떠나서도 그 자체, 즉 ‘1만5000년 전의 볍씨’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소로리 볍씨’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백안시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작 학술논문으로 문제를 제기한 이는 사실상 단 한 연구자(안승모 전 원광대 교수)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그저 뒷담화 수준이다. ‘소로리 볍씨’가 그렇게 미심쩍다면 안교수처럼 논문으로 제기해야 학문 하는 이의 기본자세일 것이다.
‘소로리 볍씨=1만5000년 전의 볍씨’가 맞다 해도 과제는 남아있다.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다른 곳에서 소로리 단계의 볍씨를 찾아내는 것이다. 1998년 ‘소로리 토탄층의 보존’을 일축해버린 문화재위원회의 처사가 두고두고 한심할 따름이다. 지금 청주시 소유지가 된 보존지역이 약간 남아있지만 다른 공장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제대로 된 토탄층 발굴은 쉽지 않다. 적어도 10~15m 이상의 깊이에 200㎡(10×20m) 면적을 발굴하기는 턱없이 좁다. 이융조 교수는 “폐교된 인근 소로분교를 박물관으로 조성하고 소로리 주변 지역의 농지에 대한 학술발굴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또 안승모 교수는 “소로리와 비슷한 중부지역 토탄층에서 학술발굴이 계속 이어져서 추가적인 자료를 확보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아닌 게 아니라 달랑 소로리 한 곳의 자료뿐이니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소로리와 비슷한 환경의 다른 지역 토탄층들을 발굴해서 관련 자료를 충분히 확보할 필요가 있다. 가만 보면 남의 발굴 성과를 두고 뒷담화만 할 게 아니라 볍씨와 벼농사 관련 자료를 발굴하고 확보하는 것이 학자들의 자세가 아닐까. 이 대목에서 일단 이렇게 정리해두고 싶다. 어느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1만5000년 전 볍씨가 나타났다고 해서 백안시할 게 아니다. 다른 소로리 단계의 볍씨를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로리 단계의 토탄층 발굴을 해보고 나서야 이러쿵저러쿵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출처; 경향신문, 홀연히 나타난 1만5000년전 '청주 소로리 볍씨'의 정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2019.12.03.
https://news.v.daum.net/v/20191203060312114)
4.5.6. 내몽고 우란차부(烏蘭察布)시 흑피옥-14,000년 전
흑피옥은 한국고고학전문사전이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들어 있지 않다.
2007년 9월 19일 흑피옥에 대한 신동아의 기사 〈흑피옥 조각상의 진실; 인류사 대발견이냐, 희대의 사기극이냐〉에 따르면 한국인 고대 유물 수집가 김희용(58·광주시 북구 매곡동) 씨가 1991년부터 중국 네이멍구(內蒙古)를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 일대에서 16년간 700여 점의 ‘흑피옥(黑皮玉) 조각상’을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2006년 흑피옥출토지도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가 확인한 출토지는 네이멍구 자치구의 성도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동쪽으로 150km가량 떨어진 우란차푸(烏蘭察布) 시 외곽. 민가에서도 20~30km 떨어진, 풀이 무성한 산기슭이었다. 흑피옥 조각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무덤을 택한 뒤 무덤을 파기 시작했는데 지하로 2m 정도 파들어 가니 가로 2m 세로 3~4m 크기의 석실 비슷한 곳에 전신 인골이 누워 있었고, 주변엔 마치 시체를 호위하듯 15개의 인물상을 비롯해 동물상, 반인반수(半人半獸)상 등 31개의 조각상이 정렬해 있었으며, 인골의 다리 아랫부분에서는 62cm 길이의 태양신 조각상도 발견했다고 한다.
조각상 재료는 모두 옥이다. 운반 도중 잘못 취급해 깨진 조각상을 확인해본 결과 속이 청옥이거나 황옥으로 돼 있었다는 것. 김씨는 “흑피옥의 강도는 4.5~5.5도의 연옥인 홍산 문화의 옥기와 달리 5.5~6.0도의 경옥이다. 그리고 출토 장소는 홍산 문화의 유적지와 적어도 50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라고 말했다.
(출처; 신동아, 흑피옥 조각상의 진실; 인류사 대발견이냐, 희대의 사기극이냐, 2007-09-19
http://weekly.donga.com/List/3/all/11/83414/1)
2008년 1월 9일자 뉴시스의 〈흑피옥 연대 1만 4000년, 인류 최고 문명〉 기사에 따르면 흑피옥 연대 측정결과 1만 4 천 년 전 것이라고 한다.
『세계 고고학계에 파장을 불러온 흑피옥의 연대가 1만4000여 년 전이라는 과학적 추정결론이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9일 전남과학대학 동북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흑피옥 염료를 채취해 서울대 기초과학 공동기기원에 방사성 연대를 측정한 결과, 흑피옥 조각상 연대는 구석기 말기인 1만4300년에서 전후 60년 정도로 추정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동북아문화연구소는 지난해 11월 모 방송사 입회하에 높이 30cm. 폭 8cm 크기의 양머리에 사람모양을 하고 있는 반인반수상 형태의 흑피옥 조각상에서 염료를 채취, 검사를 의뢰했다.
흑피옥 연대가 1만4000여년이 넘는 것으로 공식 인정될 경우 현존하는 인류문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구석기 유물은 목걸이나 벽화 등이 발견됐으나 문명에 도달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현존하는 최초 인류문명이 될 가능성도 높은 실정이라고 동북아문화연구소 측은 설명했다.
이와 관련 흑피옥 최초 발견자 김희용씨(59)는 "흑피옥이 발견된 주변에는 신전. 벽돌식 무덤 등 고대문명 흔적이 역력했다"며 "인류가 직립보행하기 이전인 반직립 상태의 고대문명이 확실하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더욱이 흑피옥이 발굴된 중국 내몽고 네이멍구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높은 지역 탓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정건재 동북아문화연구소장(55)은 "흑피옥에 관련된 과학적인 데이터가 처음으로 나왔다"며 "추가 연구가 이뤄지면 흑피옥에 대한 더 많은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뉴시스, "흑피옥 연대 1만 4000년, 인류 최고 문명", 2008.01.09.
https://news.v.daum.net/v/20080109084407860?f=o)
천지일보 2018.3.26.자 기사 [인터뷰] “만년 가는 옥(玉)에 조각한 ‘흑피옥’ 후대에 전할 메시지 담겨”에 따르면 환배달고조선유물보존회 정승호 대표는 흑피옥 연대측정결과 9300년 전~12000년 전, 5000년 전~15000년 전 것이라는 연대측정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흑피옥은 과학검측 결과 기원전 약 5000~10000년 전 이전의 유물임이 확인됐다. 실제로 정 대표는 흑피옥을 프랑스 고대유물 감정소인 ‘씨램(CIRAM)’을 통해 과학감정을 의뢰했으며, 흑피옥이 신석기 시대(5000년전~15000년으로 본다)의 유물이라는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또 미국의 권위있는 연구소인 ‘베타(BETA)’에도 의뢰했다. 베타는 4점의 흑피옥에 대해 모두 9300년~12000년전 유물로 판정했다. 베타는 우리나라 문화재청도 탄소연대 측정을 의뢰하는 곳이다.
또한 훈민정음 연구소가 발간한 서적 ‘주해 홍사한은’에 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우기 이전 고조선 제1대 단군의 조부인 태제 한인 무오 27년에 ‘무룡씨가 쇠 녹이는 용광로를 시설하고 옥을 새겨 예술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정 대표는 “실제로 옥을 깎는 것은 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기록으로 보아 우리나라 철 문화가 약 5천 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환배달고조선유물보존회 정승호(50) 대표는 7년전 흑피옥을 알게 된 이후 역사적 가치를 깨달아 흩어져 있던 흑피옥을 수집하는데 힘써왔다. 정 대표는 “흑피옥은 고대 인류가 천신에게 제사 지내는 용도 혹은 지도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조각상”이라며 “흑피옥은 80년 전 중국 감숙성 둔황의 제단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은 과거 고조선의 수도인 아사달이 있던 곳”이라며 “흑피옥은 우리 민족의 고대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강조했다.
흑피옥이라는 명칭을 명명해 사용한 인물은 중국 길림대 백악 교수다. 부장품으로 매립된 것을 발굴한 흑피옥 유물은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의 개인 소장가가 보유하고 있다.
정 대표는 고조선의 수도가 있던 곳에서 발견된 흑피옥 안에 한국인이 가지는 문화적인 요소가 많이 담겨있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상투, 가부좌, 단전호흡 등의 문화가 담겨 있었다. 정 대표는 “유물을 보면 새 형상도 많이 나오는 데 우리는 새를 굉장히 숭상했던 민족”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오늘날에도 시골에 가면 솟대가 있지 않느냐”라며 “솟대에게 소원을 비는데 이처럼 새를 신격화해서 모시는 곳은 우리 민족 뿐”이라고 했다.』
(출처; 천지일보, [인터뷰] “만년 가는 옥(玉)에 조각한 ‘흑피옥’ 후대에 전할 메시지 담겨”, 2018.3.26.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505492)
2009년 9월 29일자 한국일보 기사 〈흑피옥은 한민족 고대문명 풀 열쇠〉에서 우실하교수는 흑피옥이 한민족 고대문명 풀 열쇠라고 하였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우란차부(烏蘭察布)시 박물관이 흑피옥 유물 출토지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최근 발굴 조사를 벌였다고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양학부 교수가 29일 밝혔다. ~
우 교수는 "김씨가 2006년 흑피옥 31점과 인골 일부를 출토한 무덤에서 지난 22~23일 우란차부박물관이 비공개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며 "발굴된 인골의 연대를 측정해보면 흑피옥의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우란차부 박물관은 발굴 뒤 별다른 설명 없이 유적을 다시 흙으로 덮고 발굴물의 행방도 밝히지 않고 있다"며 "중국과 한국의 전문가가 입회한 가운데 다시 공개 발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 교수가 흑피옥에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 랴오허문명의 핵심인 홍산문화(紅山文化ㆍ만주 지역 신석기 문화) 옥기 유물과 형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 교수는 적석묘 형태의 분묘 형식, 곰 토템 유물 등이 한반도의 고대 문화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홍산문화를 단군조선의 뿌리로 보고 있다.
만약 흑피옥과 홍산문화의 연관성이 확인된다면, 한민족의 고대 문명이 네이멍구 지역에까지 뻗어 있었음을 입증한다는 게 우 교수의 주장이다.
"흑피옥은 어쩌면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을 밝혀줄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우 교수는 "중국은 랴오허문명론 등 정치적 자세에서 벗어나, 고대사를 학술적 관점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출처; 한국일보, “흑피옥은 한민족 고대문명 풀 열쇠”, 2009.09.29
https://news.v.daum.net/v/20090929212511277?f=o)
브레인미디어 2014년 7월 31일 기사에 따르면 〈흑피옥은 한민족 고대사 유물, 고조선은 신화 아닌 역사〉
라는 제목으로 김영식 청파현대서예연구원 원장은 국학원 제132회 국민강좌에서 강연하였다.
『이날 김 원장은 ‘고대 한민족의 이동’, ‘고조선 신화를 실존 역사시대로’, ‘흑피옥과 요하문명’, ‘동북공정의 실체’, ‘현시대 우리의 역사적 사명 등 테마별로 강의를 진행했다. 그는 특히 홍산 문명 유물은 고조선과 배달국 시대의 유물, 흑피옥 문명 유물은 환국과 마고 시대의 유물이라고 지적했다.
“제가 오늘 주제로 삼은 것은 유물이다. 바로 흑피옥이라는 것이다. 왜 이 유물에 목을 거느냐. 지금 우리 학자들이 고조선을 인정 안 하고 있는 것은 실증사학에 의해서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 실재를 증명할 수 있는 이 유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김 원장은 “홍산문명 유물과 흑피옥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동북아시아 지역(만주, 요서지역, 랴오둥반도 일대)은 예로부터 동이족(대황, 구환, 구이 등으로 불리던 고대 한국인)의 주 활동 영역이었다”며 “이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많은 유물은 환인족과 곰족으로 대변되는 북방 수렵족과 남방 농경족, 즉 예족과 맥족이 융합되어 가는 과정이 신화가 아닌 사실의 역사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고조선이 신화가 아닌 실존 역사시대임을 증명하는 옥규 [자료제공=국학원]
홍산문명옥기는 1980년대 중반 중국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 일대에서 출토된 엄청난 양의 옥(玉) 조각상들을 말한다. 1990년대 출토된 흑피옥은 홍산문명옥기보다 선대의 옥 조각상들이다. 그는 고조선 신화가 역사임을 증명하는 유물로 옥 유물 중 하나인 옥규(玉圭)를 들었다. 옥규는 고조선과 배달국, 환국이 존재했던 요하 상류지역에서 출토된 실존 유물이다.
김 원장은 “옥규에 새겨진 글자(令 出其不用 保衛兵荒, 령 출기불용 보위병황) 중 가장 중요한 글자는 ‘황(荒)’”이라며 “이는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이라 칭하는 고대 한민족이 살던 ‘한반도와 요하 일대의 대황지구’를 지칭한다”고 했다. 여기서 대황지역은 천손민족이 사는 하늘나라, 즉 환인 천제가 다스리던 대흥안령산맥을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지역을 말한다.
흑피옥은 경도 3~4도의 연옥이 아니라 경도 6~7도 경옥이다. 흑피옥의 토템사상은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천부사상을 담고 있다. 흑피옥 유물에는 풍이족인 환인족과 새족인 조이족이 융합되어가는 과정을 나타낸 조각상, 태호복희와 여와의 합체 옥 조각상, 염제 신농 조각상, 치우천왕을 상징하는 C 형룡, 흑피옥 천부경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 흑피옥 유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염제 신농 조각상, 흑피옥 천부경, 흑피옥 표면에 나타난 문자, 치우천왕을 상징하는 C 형룡 [자료제공=국학원]
특히 흑피옥 조각상에 양각된 문자는 갑골문(BC.1600년)보다 최소 1000년 이상 더 오래된 문자로 밝혀졌다. 이 문자에는 우주 천부의 원리, 자연과 인간·종족 간의 충돌과 융합, 천지자연 숭배의 원시 신앙 등이 담겨 있다. 천손민족이던 지배계급층이 사용하던 문자로 추정 연구하고 있다.
김 원장은 “중국은 갑골문이 가장 오래된 문자라고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 이전에 이미 문자를 쓰고 있었다”며 “흑피옥에 나타난 문자가 정확하게 밝혀지는 날 우리나라의 위상은 물론이거니와 인류문명의 시원이 바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그는 “지금은 문화전쟁 시대이다. 우리는 실감할 수 없겠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록 현장은 세계 각국이 자국의 문화유산을 등록시키기 위한 치열한 전쟁터"라며 "제가 이러한 일련의 유물들을 확보하고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함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정신을 되찾기 위함이다.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살아왔던 드넓은 땅과 웅혼한 역사, 위대한 조상들까지 모두 빼앗긴 '얼'빠진 나라가 되는 것이다. 외세에 의해 단절되고 숨겨졌던 한민족의 고대사를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이 시대의 역사적 사명을 강조했다.』
(출처; 브레인미디어, 피옥은 한민족 고대사 유물, 고조선은 신화 아닌 역사, 2014. 7. 31
http://www.brainmedia.co.kr/BrainLife/14134)
4.5.7. 러시아 하바롭스크주 가샤유적(Khabarovsk Gasya遺蹟)-14,000년 전 토기
『러시아연방 하바롭스크주 아무르 강 하류의 사카치–알리안 마을에서 0.7㎞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975년부터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데레뱐코와 메드베데프가 여덟 차례에 걸쳐 조사해 아무르 강 하류의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를 밝히게 되었다.
유적의 가장 아래층은 두께 2.5∼3m에 달하는 플라이토세 점토층인데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유물은 주로 이 점토층 상면에 놓여 있다. 이 오시포브카문화층 위로 말리셰보문화층과 보즈네세노브카문화층이 있고, 그 위로 초기금속기와 중세 문화층까지 형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토기로 추정되는 고토기가 출토된 오시포브카문화층이다. 이 외에 신석기시대 말리셰보문화와 보즈네세노브카문화의 유물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시포브카문화층에서는 주거지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이동식주거지 춤(Tsum, 원두막식 주거지)과 유사하다. 주거지 2기의 평면 크기는 길이 3.5m, 너비 4.5m, 길이 5m, 너비 1.7m이다. 주거지의 시설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 외에 훔미유적(Khumi遺蹟)에서 보이는 반수혈식 주거지도 이 시기에 보인다.
오시포브카문화층에서는 여러 가지 재질의 타제석기가 출토되었다. 이암, 응회–이암, 규질암 옥수석, 사암, 현무암, 섬록암으로 제작되었으며, 가공기술로는 세석인기법과 양면가공이 있는데 후자가 많다. 마연된 석기도 1점 확인되었다.
오시포브카문화의 가장 지표가 되는 석기는 단면렌즈형의 타제첨두기이고, 자귀–긁개형석기도 특징적이다. 긁개, 자르개, 뚜르개, 손잡이형석기, 밀개, 손자귀, 다양한 복합석기, 대형 어망추, 홈이 나 있는 석기, 굴지구, 대패, 공이, 망치돌, 모룻돌도 출토되었다.
자갈돌 중에는 격지나 혹은 일부러 잘라낸 면을 보이는 다양한 크기의 석기들이 있다. 그 중 상당수가 몸돌이며 쐐기형과 사각형 소형 몸돌이 가장 우세하다.
상기한 석기들을 보고자는 ‘중석기’ 층으로 보고하고 있는데, 이 층에서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가장 오래된 토기는 흑색을 띠며 기벽이 두껍고(두께 0.8∼0.9㎝) 무르다. 태토에는 짚과 샤모트(chamotte)를 혼입하여 일부 편에는 짚이나 동물털 자국도 남아 있다.
토기 안팎 면에는 기면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가는 선흔(條痕)이 보이는데, 양면의 방향이 다른 경우도 있다. 토기는 구연부가 약간 내만한 발형 평저로 복원되었으며 높이는 25∼26㎝ 가량이다. 소성온도는 350° 정도다.
그 외에 돌로 만든 새, 남·여근석, 토제 곰상, 석제 구슬과 걸개 등도 출토되었다. 오시포브카문화층의 절대연대는 12,960±120 BP(층 바닥), 11,340±60 BP, 10,875±90 BP(층 상부)로 오시포브카문화에 속하는 곤차르카–1, 훔미 유적의 연대와도 유사하다.』
(출처;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http://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452)
4.5.8. 충청북도 제천 점말동굴유적-점말인; 13,000년 전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 점말에서 조사된 구석기시대의 동굴 유적.
점말마을 주민들 사이에 ‘용굴’로 알려진 이 동굴은 마을 뒤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난 산길을 타고 10분쯤 거슬러 올라가면 나타나며, 석회암줄기 속에 발달한 점말동굴 유적은 용두산의 동남쪽 기슭에 동서 방향으로 뚫려 있다. 높게 둘러친 병풍바위의 낭떠러지 아래에 있는 굴의 동쪽 입구는 해발 약 430m지점에 자리한다. 동굴 앞쪽은 동남향으로 열려 언제나 따뜻한 햇볕을 받게 된다.
제천점말동굴 유적은 1973년 6월 10일에 연세대학교 박물관 학술 조사단이 찾아, 그해 11월 17일부터 발굴이 시작되었고, 1980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발굴을 하였다. 발굴 결과 동굴 안 퇴적층은 모두 7층위로 구분되었지만 이를 다시 세분화하여 12개의 문화층으로 구분하였다.
발굴 결과 자연 유물 자료가 다수 확보되었으며, 1980년 이후부터 발굴 보고서 작업이 진행되어 모두 5책의 발굴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유적의 연대는 셋째 빙하기[약 30만 년 전]부터 넷째 빙하기[1, 2만~2, 4만 년 전] 사이로 편년된다.
동굴의 규모는 너비 2~3m, 길이 12~13m로 작은 편이다. 동굴을 채웠던 퇴적층의 두께는 4~5m에 이르며, 이 퇴적층 안에서 제4기의 짐승화석과 더불어 이 굴에서 살다 남긴 여러 가지 문화유물이 출토되었다.
퇴적층은 7개의 층으로 나뉜다. 아래로부터 Ⅰ층은 자갈돌층, Ⅱ층은 석회마루층, Ⅲ층은 흰모래층, Ⅳ층은 붉은 흙색찰흙층, Ⅴ층은 흙색 모래찰흙층, Ⅵ층은 회갈색찰흙층, Ⅶ층은 겉흙층이다.
점말동굴의 Ⅰ층과 Ⅱ층은 짐승화석과 문화유물이 나오지 않은 비문화층이며 Ⅲ~Ⅶ층은 선사시대의 문화층이다. Ⅵ층까지는 구석기시대에 속하며, 이 중에서 Ⅴ층은 우라늄계열 연대측정(U·Th·Pa방법)으로 66,000+30,000-18,000B.P., Ⅵ층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C14)으로 13,000±700B.P.의 연대값이 측정되었다. Ⅶ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무늬토기 등이 나왔다.
동굴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짐승뼈 화석이다. 새, 물뭍동물, 박쥐와 쥐종류를 빼고 5목 12과 약 25종의 젖먹이 짐승뼈가 나왔다. 문화유물로는 뼈연모·석기·치렛거리·예술품 등이 있다.
Ⅲ층에서는 비록 화석의 수는 적은 편이지만, 사슴·노루·오소리·족제비·산달·여우·표범·동굴곰 등의 뼈가 나왔다. 이들 짐승의 구성관계는 당시의 기후가 온난하거나 조금 추웠음을 알려준다. Ⅲ층에서 분석한 나무숯 중 바늘잎나무가 으뜸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그러한 점을 잘 뒷받침해 준다.
Ⅳ층에서는 넓은잎나무의 비율이 늘어나며, 지금보다 따뜻한 기후에 적응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원숭이·하이에나·코뿔이·들소·호랑이·표범·사자·곰·여우·족제비·산달·수달·너구리·사슴·노루 등의 짐승뼈가 발견되었다.
Ⅴ층과 Ⅵ층에서는 바늘잎나무가 다시 많아지고, 젖먹이 짐승뼈로는 하이에나·호랑이·표범·곰·오소리·족제비·여우 등의 화석이 나왔다. 사슴과(科) 짐승은 동굴 유적에서 나온 젖먹이동물 중 으뜸종을 차지한다. 이 종류의 뼈는 부스러기까지 포함해 약 8,000점에 이르러 약 175마리분에 해당된다.
뼈화석 중에는 사냥한 사슴의 가죽을 벗기고 부위별로 잘라 고기를 바르는 과정에서 남긴 석기의 칼날자국이 그대로 있는 유물이 여러 점 보인다. 때에 따라서는 골수를 빼먹으려고 뼈를 잘랐던 흔적을 보여주는 화석이 있으며, 가끔 하이에나와 같은 육식동물의 이빨자국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이빨의 돋음새와 닳음새로 볼 때, 사슴과 짐승의 대부분은 가을에서 겨울철 사이에 잡혀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동굴 유적에서 나온 석기는 적은 편이지만, 뼈연모는 매우 많이 나왔다. 뼈연모는 직접 내리쳐 깨기로 뼛조각을 잔손질해 만든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뼈유물 중에는 쐐기를 이용한 세로쪼갬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들도 있다.
골수를 빼먹고 남은 뼛조각을 간단한 떼기와 잔손질을 해서 연모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보인다. 한편, 전자현미경(SEM)에 의한 뼈연모의 쓰임새 분석자료를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되살리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뼈연모의 사용방법을 복원할 수 있었다.
중기 구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예술활동을 보여주는 유물이 나왔다. 여러 가지 수법으로 짐승이나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애쓴 자국이 전자현미경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후기 구석기층에서는 사람의 발뼈와 손뼈가 몇 점 나왔다. 층위로 보아 이들 화석은 슬기슬기 사람의 것으로 추정된다.
제천점말유적은 동굴유적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조사된 유적이다. 동굴유적에서의 발굴과정에서 조사된 퇴적물의 분석, 동식물화석의 분석, 연대측정의 실시, 뼈연모의 만듦새와 쓰임새들에 대한 연구성과는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과 문화적 복원에 필요한 매우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과정에서 습득한 구석기시대의 인류의 생활과 자연환경의 복원을 위한 고고학적 연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점말인은 한국에서 발견된 화석인류의 하나로 현생인류에 속한다. 충청북도 제천군 점말 동굴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후기~중석기 시대에 살던 남녀의 뼈화석에 붙여진 이름이다. 화석은 젊은 남녀로 현생인류에 해당되는 인종이었으며, 연대는 기원전 12,860년에서 13000년을 전후하였다. 근처인 청원 두루봉 동굴과 흥수굴에서도 현생인류의 화석이 발견된 바 있다.』(출처; 위키백과)
4.5.9. 길림성 송눈평원 호우타오무가유적; 12,000년 전 편두
『고고학자들은 중국 북동부의 길림성 호우타오무가에서 신석기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 속하는 11 개의 길쭉한 두개골을 발견했다. 고의적 두개골 변형 (ICM)이라고도 한다.
텍사스 A & M 대학교 치과 대학의 생명 과학부 부교수 Qian Wang은 “이것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아마도 세계에서 의도적인 머리 수정 징후를 발견한 최초의 발견이다.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관행이 시작된다면, 대초원을 통해 중동, 러시아, 유럽으로 서쪽으로 퍼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베링 육교를 건너 미대륙으로 뻗어 나갈 가능성이 높다."
Houtaomuga 사이트는 12,000년에서 5,000년 전에 매장과 유물을 보유한 보물 창고이다. 2011년에서 2015년 사이에 발굴된 동안, 고고학자들은 25명의 개인의 유골을 발견했으며 그 중 19명은 ICM을 위해 연구될 만큼 충분히 보존되었다. 이 두개골을 각 표본의 3D 디지털 이미지를 생성하는 CT 스캐너에 넣은 후, 연구원들은 11개가 전두골의 평탄화 및 신장 또는 이마와 같은 명백한 두개골 형성 징후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ICM 두개골은 12,027년에서 11,747년 전에 살았던 성인 남성에 속했다.
고고학자들은 모든 대륙에서 전 세계에 걸쳐 인간의 두개골이 재형성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특별한 발견은 "만약 의도된 두부의 수정에 대한 최초의 증거가 될 것이다. 이것은 처음 등장한 후 같은 장소에서 7,00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했다.
이 특정 문화가 두개골 수정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사회적 지위 및 아름다움이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왕은 말했다. ICM이 호우타오무가에 묻힌 사람들은 특권 계급에서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 사람들은 무덤 물품과 장례식 장식을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특권계급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출처;
https://www.livescience.com/65901-china-oldest-skull-shaping.html)
4.5.10 길림성 전곽 청산두유적- 청산두인; 10,000 BP
『1981년 길림성 지진국 야외지질조사원들이 백성지구에서 인류 두개골과 약간의 유골을 채집하였다. 1982년 길림성 지질구역 지질조사대가 사간포 일대의 제4기 지층을 조사할 때 다시 한 번 동일 지점 부근에서 대량의 인골, 장식품과 척추동물골격이 채집되었다. …
청산두유적은 첸궈얼러스 몽고 자치현 목천향 사간포 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간포는 송화강, 눈강과 서요하 사이 넓은 유역의 동북 끝에 있다. …
유적의 지층은 아래에서 위로 10층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 10~8층은 충적세 또는 신석기시대 층위이다. 7~1층은 후기홍적세, 구석기시대 층위이다.
청산두 인골화석은 유적 7층의 정상부에서 출토되었다. 좌측 구고 하나이다. 표면 색깔은 갈황색, 내부는 회백색, 석화 정도가 뚜렷하다. … 이 표본은 성년 남성의 것이다.
청산두 유적에서 6점의 석제품이 채집되었는데 그 중 1점은 조각기, 1점 긁개, 기타 4점은 석편이다. …
포유동물화석은 유적의 제7층과 제6층에서 출토되었다. 출토 속·종은 13개로 시베리아 마르모트, 다울황쥐, 브란트 밭쥐, 동북 두더지, 아만 두더지, 시베리아 다섯발가락쥐, 사완웅맥, 이리, 프레제발스키 들말, 털코뿔소, 멧돼지 등이다.
Carbon14 측정은 제7층 정상부 연대 10940±170년, 후기구석기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제8층(신석기시대 층)은 7870±95년과 9860±150년이 산출되어 길림 서부지구 후기홍적세와 충적세 또는 세칭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한계선 10,000년 전후시기를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전곽현 사간포 북쪽 언덕의 청산두 유적 인류화석의 발견은 길림성의 서부지역에서 최초의 예이다. 이 발견은 길림성 서부의 광활한 대소택호박 지역에서 찾은 후기구석기시대 인류화석 및 그 문화는 동북지구 홍적세와 충적세 층위구분과 고생태환경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츨처; 조빈복, 중국 동북 구석기문화, 110쪽 ~ 114쪽)
<참고자료>
한국고고학전문사전-구석기시대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전곡선사박물관 http://jgpm.ggcf.kr/
이형구,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2012, 새녘출판사
조빈복 지음, 최무장 옮김, 중국 동북 구석기문화, 2006년, 집문당
동아사이언스, 국내 最古 유골 흥수아이, 구석기인 아닐 수도, 2018년 03월 02일,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21614)
연합뉴스, 단양 수양개유적서 사람 얼굴 모양 추정 돌조각 발견, 2015.11.02.
https://news.v.daum.net/v/20151102095326268)
파이낸셜뉴스 , 강원도 정선 매둔동굴서 2만9000년 전 구석기 그물추·손가락 뼈 발굴, 2018.08.07
http://www.fnnews.com/news/201808070903408714)
연합뉴스, 정선 매둔동굴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 또 대거 출토, 2019.12.20.
https://news.v.daum.net/v/20191220155422516)
동아일보, 구석기인들의 눈금자?… 충북 단양서 눈금 새겨진 돌 발굴
http://news.donga.com/3/all/20140617/64337862/1)
동아일보, 후기구석기 유적서 간돌 첫 출토,
http://news.donga.com/3/all/20040513/8061328/1#csidx41614e6c096c521be391c9515867f8c)
청주소로리볍씨,
https://www.cheongju.go.kr/sorori/contents.do?key=20118
동아일보, “세계 最古 소로리 볍씨 아시나요?”, 2014. 5. 14.
http://news.donga.com/3/all/20140513/63452299/1
중부매일, '청주 소로리볍씨'의 오늘과 내일, 2019.09.29
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2204
경향신문, 홀연히 나타난 1만5000년전 '청주 소로리 볍씨'의 정체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2019.12.03.
https://news.v.daum.net/v/20191203060312114)
신동아, 흑피옥 조각상의 진실; 인류사 대발견이냐, 희대의 사기극이냐, 2007-09-19
http://weekly.donga.com/List/3/all/11/83414/1
뉴시스, "흑피옥 연대 1만 4000년, 인류 최고 문명", 2008.01.09.
https://news.v.daum.net/v/20080109084407860?f=o
천지일보, [인터뷰] “만년 가는 옥(玉)에 조각한 ‘흑피옥’ 후대에 전할 메시지 담겨”, 2018.3.26.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505492
한국일보, “흑피옥은 한민족 고대문명 풀 열쇠”, 2009.09.29
https://news.v.daum.net/v/20090929212511277?f=o
브레인미디어, 피옥은 한민족 고대사 유물, 고조선은 신화 아닌 역사, 2014. 7. 31
http://www.brainmedia.co.kr/BrainLife/1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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