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과 석견(石犬)

 

조선일보 2009423일자 34쪽에 실린 [유홍준의 국보순례] [4] 근정전 월대(月臺)의 석견(石犬)을 읽고 낱말 두 개를 한참 생각했다. 하나는 '디테일'이고 또 하나는 석견(石犬)’이다.

 

명작(名作)이라고 불리는 예술작품의 공통점 중 하나는 디테일(detail)이 치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위대한 건축가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미즈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은 디테일 속에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경복궁 건축은 과연 명작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섬세하고 다양한 디테일들이 곳곳에 있다. 그중 하나가 근정전 월대(月臺·궁전이나 누각 앞에 세워놓은 섬돌)의 돌짐승 조각이다.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 근정전 월대에는 사방으로 돌계단이 나 있고 그 난간 기둥머리에는 모두 세 종류의 석상(石像)이 배치되어 있다. 하나는 사방을 지키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의 사신상(四神像)이고, 또 하나는 방위(方位)와 시각을 상징하는 십이지(十二支)상이며, 나머지 하나는 서수(瑞獸)상이다.

 

이 돌조각들로 인하여 기하학적 선과 면으로 구성된 차가운 월대에 자못 생기가 감돌고, 사신상의 공간 관념과 십이지상의 시간관념이 이 공간의 치세적(治世的) 의미를 강조해 준다.

 

그런데 월대 남쪽 아래위 모서리의 돌출된 멍엣돌(모서리의 돌판을 받치는 쐐기돌) 네 곳에는 또 다른 한 쌍의 짐승이 아주 재미있게 조각되어 있다. 암수 한 쌍이 분명한데 몸은 밀착해 있으면서 딴청을 부리듯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어미에게 바짝 매달려 있는 새끼까지 표현되어 있어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한다.

 

이 석상에 대하여는 아직 정확히 고증된 바 없지만 유득공(柳得恭)춘성유기(春城遊記)에서 '석견(石犬)'이라고 하며 전해지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암수 석견이 있는데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는 이 석견은 남쪽 왜구를 향해 짖고 있는 것이고, 개가 늙으면 대를 이어가라고 새끼를 표현해 넣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득공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럼에도 임진왜란의 화()를 면치 못했으니 그렇다면 이 석견의 죄란 말이냐", "다만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 모름지기 믿을 것은 못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석견에 주목하는 것은 근정전이라는 엄숙한 공간에 이처럼 해학적인 조각상이 새겨져 있을 정도로 경복궁 건축의 디테일은 치밀하고 여유롭다는 점 때문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4/22/2009042201927.html)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detail'1.세부 2.구체적 내용 3.상세 4.자세한 정보 5.디테일 등의 뜻으로 나오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디테일'미술품의 전체에 대하여 한 부분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고, 국립국어원에서는 부분 세분 세부 등을 다듬은 말(순화어)로 올려놓았다. "디테일이 치밀하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부분이 치밀하다." 라고 말할 때 뜻이 더 쉽게 잘 통하지 않을까?

 

'석견(石犬)''돌개'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한글이 천대받았지만 이제는 한글전용 시대이니 한자말을 순우리말로 바꿔주는 것이 우리말생활에 더 편하지 않을까? 한자말은 한자를 알지 않고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기 어려우니까.

 

조선시대는 말할 나위도 없고 지금까지도 순우리말을 낮게 보고 또 일부러 한자말로 바꾸어 써서 우리말의 두겹구조(순우리말을 쓰면 낮아 보이거나 낯설고, 한자말(잉글리쉬 포함)을 쓰면 높아 보이거나 품위 있다는 의식구조)를 한층 더 깊게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말 하나하나를 여러 번 말해 보면 처음엔 느끼지 못했던 묘한 말의 맛이 느껴진다. 자장면이나 햄버거 맛이 아닌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의 맛이고, 사실 잘 와 닿지도 않는 한자말이나 잉글말의 느낌과는 다른 고향 같은 느낌이다.

 

한편 20191022일자 KBS NEWS 유동엽 기자의 보도 [단독] 경복궁 근정전 석견’, 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다?를 보니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서 근정전 월대 석견과 같은 석상을 발견했다는 기사인데 석견'서수가족상'이라는 표현과 함께 돌로 된 개로 쓰고 있다.

 

 

 

 

 

"현재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석상과 똑같은 것을 오래전 창덕궁 안에서 본 적이 있다."

 

두 달 전, 경복궁 동십자각에 있었던 동물 조각상이 창덕궁 안에 버려져(?) 있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전해드렸습니다. 이렇게 원래 자리와 내력이 잊힌 채 사실상 버려진 석상이 궁궐 곳곳에 꽤 많이 있다는 사실도 당시 취재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동십자각을 계기로 더 많은 석상을 재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던 차에 눈이 번쩍 뜨이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근정전 서수가족상과 왼쪽 동물 가슴에 매달린 새끼를 확대한 모습. [사진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경복궁 근정전 월대(목조 건물 아래 돌로 만든 구조물)에는 십이지신상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동물 석상이 있는데 그중에 암수 한 쌍이 새끼를 데리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서수가족상'이 있습니다. 상서로운 동물이라는 뜻의 '서수(瑞獸)'는 해태처럼 전통문화 속 상상의 동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서수가족상과 똑같이 생긴 석상이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 겁니다.

 

동십자각 서수상을 찾았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에 제보에 관한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꽤 많은 직원이 동원돼 궁궐 이곳저곳을 확인한 결과, 찾아냈다는 답이 왔습니다. 그런데 위치가 창덕궁이 아니라 경복궁 옆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였습니다. 기사 첫머리에 있는 사진이 수장고에서 찾아낸 또 다른 서수가족상입니다.

 

박물관 수장고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언론사 기자는 물론이고 '국회의원이 와도 쉽게 열어주지 않는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인데, 서수상 덕분에 수장고에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근정전 석상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암수 한 쌍이 새끼를 데리고 있는 모습이 워낙 독특한 데다, 석상의 구조도 근정전 석상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석상 아래 길게 뻗어 나온 부분은 어딘가 다른 구조물에 끼워 넣었던 흔적입니다. 현재 근정전 석상에도 아랫부분이 길게 나와 월대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아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 "석상의 내력은 모른다"문헌에서 확인되는 단서

 

서수가족상은 언제 어떻게 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들어왔을까? 박물관의 답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궁궐 곳곳에 흩어져있던 석상 등의 유물을 일괄적으로 박물관에 이관했다"면서 "서수가족상은 20059월 창덕궁에서 이관된 기록만 남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래전 창덕궁에서 봤다.'는 제보와도 일치하는 셈인데, 문제는 그 이전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근정전에 있던 것이 맞는지도 알 수 없고, 근정전에 있었던 석상이 2005년에 경복궁도 아닌 창덕궁까지 가 있었던 이유는 또 뭔지 박물관도, 문화재청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수장고 석상이 근정전 것이 맞는지에 대한 단서는 옛 문헌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영묘조구궐진작도>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영조 연간인 1767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근정전의 빈터에서 왕족과 신하들이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 석상이 보입니다. 현재 서수가족상과 마찬가지로 월대 하단 전면부 양쪽 모서리에 두 마리씩 그려져 있습니다. 왕이나 왕실을 주제로 한 회화는 문서처럼 엄격한 기록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시 근정전 빈터에 서수가족상이 있었다는 분명한 근거입니다.

 

 

 

영묘조구궐진작도(‘의령남씨가전화첩수록)와 서수가족상을 확대한 모습.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제공]

 

두 번째 단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문집에서 확인됩니다. 유득공 문집에 수록된 <춘성유기 春城遊記>라는 글은 봄날 도성을 유람한 기행문입니다. 여기에 "근정전 옛터에는 암수 한 쌍이 새끼를 데리고 있는 돌로 된 개(석견, 石犬)이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유득공은 또 "새끼까지 대를 이어가며 남쪽의 왜구를 지키라는 뜻으로 무학대사가 만든 것"이라며 당시에 떠돌던 속설도 적어 놓았습니다. 당시에도 서수가족상은 꽤 유명세(?)를 탄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때 근정전이 불에 타 사라진 뒤에도 서수가족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또 다른 근거입니다.

 

"최소한 임진왜란 이전, 멀게는 태조 때 유물일 수도"

 

홍순민의 한양읽기 : 궁궐의 저자인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취재진이 촬영한 수장고 석상과 문헌 자료를 검토한 뒤 "수장고 석상은 원래 근정전에 있던 것으로 고종 연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이후 버려져 있던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중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수가족상을 새것으로 바꿨다는 겁니다.

 

홍 교수는 "빼낸 석상을 어디 버릴 수는 없고 그리 중요하지 않게 보관했다가 창덕궁까지 흘러들어 간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습니다. 수장고 석상의 형태가 월대와 같은 구조물의 일부인데 근정전을 제외한 다른 궁궐 건물에서는 계단과 난간을 갖춘 월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이 같은 판단의 주된 근거였습니다.

 

홍 교수는 "임진왜란 전의 궁궐 구조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서수가족상을 통해 임진왜란 이전에도 근정전에 상당한 규모의 월대가 조성돼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유득공이 전한 속설처럼 무학대사가 만든 것이라면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경복궁을 지을 때의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다고도 말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과 문화재청은 근정전의 원래 석상일 가능성이 크다며 전문가 자문 등 추가 조사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근정전 석상이 맞다면 짧게는 20년 가까이 멀게는 백여 년 동안 동십자각 서수상처럼 알아봐 주는 이 없이 사실상 방치돼 있었던 셈입니다. 문화재청이나 박물관 탓만 하기엔 제도적인 공백이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십자각이나 근정전처럼 건물에 딸린 특정한 석상이 따로 문화재로 지정된 사례는 없습니다. 더구나 서수가족상처럼 똑같은 석상이 2점이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관리해야 할 건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당분간 수장고 석상은 박물관에 계속 머물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 경복궁 근정전에 가면 고종 때 만든 서수가족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근정전을 바라보고 계단 아래 남쪽 모서리에 가면 앙증맞은 새끼가 매달려 있는 한 쌍의 동물 조각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307767&ref=D)

 

https://tv.kakao.com/v/403158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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