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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0) 1930년 ~ 1935년 한국독립당, 1931년~1933년 한국독립군 본문

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40) 1930년 ~ 1935년 한국독립당, 1931년~1933년 한국독립군

대야발 2025. 5. 17. 16:29

 

 

 

 

 

좌익계는 민족계열에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선을 비판하는 등 모든 일에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민족진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에 대항할 수 있는 회합을 결성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시영을 비롯한 백범ㆍ이동녕ㆍ조완구ㆍ윤기섭ㆍ조소앙ㆍ안창호 등이 상해 프랑스조계 대한민국임시정부 판공처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한국독립당 창당, 감찰위원장 맡아

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20. 8. 5. 16:36
 
[29회] 한국독립당은 김구와 이시영 등 임시정부 정통세력이 처음으로 만든 임정의 방계 조직이다

 

 

 
  이시영(1868-1953)
ⓒ 독립기념관
 
 
 

정세의 변화는 이시영의 '칩거'를 오랫동안 용인하지 않았다.

 
 

1927년 4월 중국에서는 장개석이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정부를 수립하고, 10월에는 모택동이 정강산에 근거지를 구축했다. 국내에서는 이에 앞서 1926년 4월 순종이 붕어하고, 6월에는 6ㆍ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7년 1월 좌우연합으로 신간회가 발족하였다.

 

 

중국 관내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1926년 12월 김구가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그동안 혼란했던 체제가 바로 잡히게 되고, 의열단원 나석주가 서울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 경찰과 교전 끝에 자결하였다.

 

 

1929년 3월 만주의 독립운동기관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가 길림성에서 제2차 통합회의를 열고 국민부로 통합하였다. 명분은 교민자치 기관임을 내세웠으나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이었다. 9월에는 재만한인 중앙의회를 개최하고 자치와 혁명을 분리하여 자치는 국민부가, 혁명은 민족유일당 조직을 개편하여 조선혁명당이 담당키로 하였다. 이 해 국내에서는 11월 3일 전라도 광주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진영 독립운동가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은 1927년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면서 공산주의세력이 급격히 성장하고, 이의 영향으로 독립운동계의 사회주의세력이 비대해지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강화되었다. 이에 맞서 태동한 것이 한국독립당이다.

 

 

좌익계는 민족계열에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선을 비판하는 등 모든 일에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민족진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에 대항할 수 있는 회합을 결성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시영을 비롯한 백범ㆍ이동녕ㆍ조완구ㆍ윤기섭ㆍ조소앙ㆍ안창호 등이 상해 프랑스조계 대한민국임시정부 판공처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주석 5)

 

 

한국독립당은 김구와 이시영 등 임시정부 정통세력이 처음으로 만든 임정의 방계 조직이다. 이시영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의해 조직된 한국독립당은 민족진영의 쇄신을 도모하고 지방적ㆍ파벌적ㆍ학문적 감정을 청산하여 해외 독립운동 전선의 통합을 기약하려는 큰 뜻을 또한 갖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당은 초기에는 당력을 보강하기 위해서 정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1931년 4월부터 한국독립당의 공식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은 당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주석 6)

 

 

한국독립당은 기본강령으로 국가의 독립을 보위하며 민족의 문화를 발양할 것. 계획경제를 확립하여 균등경제의 복된 생활을 보장할 것. 전민족의 정치기구를 세워서 민주공화의 국가체제를 완성할 것. 국비교육시설을 완비하여 기본지식과 필요기능을 보급할 것. 평등호조를 원칙으로 하는 세계일가를 실현하도록 노력할 것 등이었다. 한국독립당의 기본이념은 삼균주의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한보(韓報)』ㆍ『한보특간(韓報特刊)』ㆍ『상해한문(上海韓聞)』ㆍ『진광(震光)』 등을 발행하였다. 광동지부는 『한성(韓聲)』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한보』는 한국독립당에서 발행한 최초의 기관지였다. 한인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발행되었으며, 미주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에게도 발송되었다. 『한보특간』은 『한보』의 자매지로 "일본제국주의의 흑막을 폭로하고 독립당의 정체(正體)와 중한 두 나라의 우의를 고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한국독립당 본부가 있었던 사흠방 입구
ⓒ 조종안
 
 
 

한국독립당은 집단지도체제의 중앙집권제였다. 중앙조직은 중앙당부와 구회(區會)ㆍ지회(支會)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이사장제를 체택하였다. 이사장은 10명 내지 13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대표하고 당무를 집행하는 당의 최고책임자이었다. 

 
 

한국독립당의 초대 이사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고 1932년 4월 윤봉길의거 이후에는 송병조가 이사장에 선출되어, 1935년 7월 한국독립당이 해체될 때까지 역임하였다.

 

중앙당부는 최고의결기구인 당대표회의와 이사회ㆍ감사로 구성되었다. 당대표대회는 각 구회와 지부의 대표들이 참가하는 회의로, 중앙당부의 간부인선 및 당의 주요업무를 심의ㆍ결정하는 기구였다. 당 대표대회는 한국독립당이 결성된 이후 두 차례의 임시대표회의를 포함하여, 모두 아홉 차례 개최되었다. 이사회는 10명 내지 13명의 이사로 구성되었으며, 당의 업무를 협의 추진하는 운영기구였다. 이시영은 당이 해체될 때까지 이사직을 맡았다.

 

  
  대전자령 전투의 유적지 길림성 왕청현.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사상 최대의 승전이었다.
ⓒ 독립기념관 보도자료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조직ㆍ선전활동 뿐만 아니라 일제의 요인 처단이나 적기관의 파괴와 같은 의열투쟁을 명시하고 실행하였다. 상하이에 있는 일본 신사(神社)에 폭탄을 던진 강병학 의거를 시작으로 1932년 3월말에는 상해한인청년단의 이덕주ㆍ유진만ㆍ유진식을 조선통족 우가키를 처단할 목적으로 국내로 파견하였다. 또한 4월에는 유상근과 최흥식을 따리엔(大連)으로 파견하여, 일본 관동군사령관 혼조와 만철총재 우치다 폭살을 계획하였다.

 

 
 

비록 이들의 의거계획은 좌절되었지만, 한민족의 강렬한 독립의지와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데에 충분하였다. 산하단체로 상해한인청년단ㆍ상해한인애국부인회ㆍ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ㆍ상해한인청년동맹 등이 있었다. 산하단체들은 당원모집과 양성기관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해체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지역 민족유일당운동의 결실로서 민족주의진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정당이었다. 임시정부의 여당역할을 수행하면서, 많은 선전활동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주석 7)(1)

주석
5> 추헌수 편, 『자료 한국독립운동』2, 86쪽, 연세대 출판부, 1971.
6> 이은우, 앞의 책, 143쪽.
7> 조범래, 「한국독립당」,『한국독립운동사사전(7)』, 346쪽, 독립기념관, 2004.

 

 

 

■ [이희용의 세계시민] 대전자령대첩을 아시나요? 90주년 맞은 독립군의 승전보

[이희용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 고규대기자 2023. 6. 29. 16:06
 
봉오동, 청산리전투와 함께 꼽히는 3대첩
지청천 장군 대전자령에서 최고의 승리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군이 거둔 3대 대첩으로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933년 대전자령전투를 꼽는다. 학자에 따라서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하나로 이어진 싸움이라고 보고 대전자령전투와 함께 2대 대첩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지청천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중국군과 손을 잡고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 130여 명을 살상하고 장갑차 2량, 박격포를 비롯한 각종 포 8문, 기관총 110자루, 소총 580자루, 탄약 300상자, 피복과 담요 등 군 장비 부속품 2,000여 건, 1개 대대의 1년 치 식량 등 마차 200여 대 분량에 이르는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역대 최대의 전과를 올렸음에도 대전자령대첩은 청산리전투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승리를 이끈 지청천 장군도 청산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이나 봉오동의 전설 홍범도 장군보다 존재감이 덜한 느낌이다.

 

 

1930년대로 접어들며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은 암울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주요 지역을 점령한 데 이어 이듬해 꼭두각시 나라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이 부설한 철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905년부터 만주에 주둔해오던 관동군도 대대적으로 증강됐다.

 

 

만주가 일본 손아귀에 들어가다 보니 일제의 수탈과 착취를 피해 만주로 건너온 한인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한인의 지원에 기대고 있는 독립군의 기반과 여건도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낳는 법. 무장독립투쟁 세력은 조직을 통합하고 전열을 정비했다. 북만주에서는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 남만주에서는 양세봉 장군의 조선혁명군으로 재편됐다.

 

 

중국도 가세하고 나섰다. 만주 중국인들은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달갑지 않게 여기면서도 일본군과의 정면충돌을 두려워해 한인들의 무장투쟁을 마뜩잖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 지배 야욕을 노골화하자 항일투쟁에 나서면서 독립군과 연대한 것이다.

 

한국독립군은 중국호로군, 길림자위군, 중국구국군 등과 함께 쌍성보, 대전자령, 사도하자 등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겼다.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와 홍경성에서 승전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린 대전자령전투는 1933년 6월 30일 치러졌다. 조선 회령에 주둔하던 일본군 19사단이 길림성 왕청현에 파견됐다가 복귀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한중 연합군은 대전자령에 이르는 계곡 양편에 매복했다. 일본군은 1600여 명이었고 독립군과 중국군은 각각 500명과 2000명 규모였다. 지청천은 공격 개시를 앞두고 병사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

 

 

“태평령(대전자령)의 공격은 3천만 대한인민을 위하여 원한을 복수하는 것이다. 총알 한개 한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영혼이 보우하여 주는 피의 대가이니 제군은 단군의 아들로 굳세게 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 만대자손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워라!”(지헌모 저 ‘청천장군의 혁명투쟁사’ 중에서)

 

 

한중 연합군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한 일본군은 보급물자를 버려둔 채 도주했다. 아군의 피해는 경상자 4~5명에 그쳤다. 그러나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한중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그해 9월 독립군이 동녕현성을 공략했을 때 중국은 약속한 지원병을 보내주지 않아 독립군 수십 명이 전사하고 지청천도 부상했다. 10월에는 중국인 부대가 독립군 사령부를 포위한 뒤 지청천을 비롯한 간부들을 구금하고 무장해제에 나섰다.

 

 

만주를 무대로 한 활동에 한계를 느낀 지청천은 임시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교관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9월 양세봉마저 일본 밀정에 의해 암살되자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세력은 사회주의자 일부만 남았다.

 

 

일제는 1920년 청산리전투 직후 만주 한인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보복에 나섰다.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다. 이번에는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근거지를 아예 없애는 작업에 나섰다. 이들 지역 주민을 강제이주시켜 공동화하는 대신 ‘안전농촌’이란 이름으로 집단부락을 만들었다. 만주 한인들은 피땀 흘려 개간해온 농토를 빼앗긴 채 새로운 황무지로 내던져졌다.

 

 

6월 30일은 대전자령전투 90주년을 맞는 날이다. 승리의 주역 지청천 장군은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한 항일독립전쟁의 전설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의 총사령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애국혼을 기리는 동시에 만주 동포들의 희생과 수난도 잊지 말아야 한다.(2)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00805163601425

 

 

(2) https://v.daum.net/v/20230629160645007

 

 

<참고자료>

 

“나라 지켜야” 굴복 없는 의병항쟁…민족의식 불씨 되다 (daum.net)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4h2638a

 

 

한국독립당 - 나무위키 (namu.wiki)

 

 

한국독립군 - 나무위키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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