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후기신라 문화유산 (3) 왕오천축국전 - 세계 4대 여행기 본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혜초 스님(704~787)이 후기신라(통일신라) 때 723년부터 727년까지 다섯 천축국 곧 인도의 다섯 나라와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 모두 44개 지역을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왕오천축국전》은 13세기 후반에 쓰여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4세기 초반의 오도릭의 《동유기》, 14세기 중반에 쓰여진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인데요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가(Paul Pelliot, 1878~1945)가 간쑤성 둔황의 막고굴 장경동에서 당시 장경동을 지키던 왕위안루(왕원록)에게서 구매한 7,000점의 유물 중에 섞여 있었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만이 남아 있는데, 책명도 저자명도 떨어져 나가 남아 있지 않으며 여러 글자가 결락되어 있습니다.(1)
임영애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혜초 스님의 여행 목적이 인도의 8대 성지를 직접 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1908년 3월, 중국의 서쪽 끝 돈황 막고굴에서 서류뭉치가 발견되었다. 막고굴의 장경동(藏經洞)에서 였다. 장경동은 지금의 제17굴에 해당하는데, 말 그대로 ‘경전이 보관되어있던 굴’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 안에는 수 만 본의 문서와 그림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들 서류뭉치 속에 뒤섞여있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진가를 알아본 이는 바로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였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왕오천축국전’을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두루마리 형식인 왕오천축국전의 앞부분 3분의 1이 손상돼 책 제목도 지은이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해진 두루마리의 내용을 살펴보던 펠리오는 얼마 전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바로 혜림(慧琳 737~820)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이다.
이 책은 경전의 용어를 해설해 놓은 일종의 불교용어사전이다. 이 책에 인용된 왕오천축국전의 단어들이 두루마리 뭉치에 언급된 단어들과 일치하고 있음을 펠리오가 알아차린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만약 천재 동양학자 펠리오의 놀라운 기억력이 없었다면 왕오천축국전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두루마리는 혜초가 직접 쓴 것은 아니라, 후대 누군가가 혜초의 글을 보고 필사한 것이지만 말이다.
돈황에서 그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것은 너무나도 기쁜 일이지만, 책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6000여자만 남아있다는 사실은 큰 아쉬움이다. 이 문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왕오천축국전의 초고로 보는 의견, 둘째는 왕오천축국전을 줄인 축약본이라는 의견, 마지막은 왕오천축국전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보는 의견이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혜초(慧超, 700?~780)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그가 신라인이라고 적고 있는 문헌은 사실 없다. 다만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오행시만이 그가 신라인임을 암시한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남방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계림’은 ‘신라’로 국호를 변경하기 전의 신라의 다른 이름이다.
바로 이 부분, 즉 그의 고향 계림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그리움을 담은 구절만이 그가 신라인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다만 원문에는 ‘誰爲向林飛’이라고 적혀 있어, 이 때 ‘림’이 꼭 계림을 지칭하는 것이냐는 반론도 있지만, ‘(고향)계림’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고, 언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중국에서 인도로 출발할 때가 723년, 귀국한 때가 727년이니 햇수로 5년 동안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했음은 분명하다. 이후의 그의 생애는 기록을 통해 간간히 알 수 있을 뿐이다.
인도 여행 후 733년부터 스승인 금강지(金剛智, 671~741)에게서 밀교를 배웠다. 740년 금강지가 입적한 후에는 불공(不空, 705~774)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6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780년 무렵 오대산으로 들어가 입적했다. 혜초는 당시 밀교의 대가였던 금강지와 불공에게 밀교를 배우고, 당시의 밀교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밀교 승려였던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말 그대로 인도의 5개 나라를 다녀와 쓴 글이다. 물론 인도만 둘러 본 것은 아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도 다녔다. 모두 44개 지역이다. 대부분 혜초가 직접 가보고 적은 글이지만, 일부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도 있다. 특히 지금의 페르시아, 아랍, 동로마까지 다녀왔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햇수로 5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모두 섭렵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가 밟았던 노선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책은 폐사리국(吠舍釐國)에서 시작한다. 지금으로 치면 인도의 바이샬리에 해당한다. 책의 끝에 등장하는 지역은 중앙아시아 서역북도에 위치한 언기국(焉耆國), 즉 카라샤르이다. 시작이 인도인 것을 보면 출발할 때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7~8세기 인도로 향한 구법승은 해로를 많이 이용했다. 그는 10대 후반 약관의 나이에 광둥항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크메르(지금의 캄보디아)를 경유하여 수마트라섬(인도네시아)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수마트라섬에는 슈리비자야 왕국이 있었다. 이곳에서 수개월 혹은 1~2년 정도를 머물고 인도의 벵갈만을 지나 천축국에 도착했다. 그는 슈리비자야 왕국에서 상당기간 머문 뒤 인도(천축)에 갔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천축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인도에 도착한 혜초는 44개 지역을 답사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혜초는 각 지역에 이를 때 마다 풍속, 언어, 종교, 산물과 그 나라의 정세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8세기 전반 혜초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인도불교는 침체하여 사원은 있으나 승려가 없는 곳이 있고, 어느 큰 사원에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되어 유지하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고 한다. 나체 생활의 풍속, 감옥은 없고 벌전(罰餞)만 있는 법률, 장(醬)은 없고 소금만 있으며, 여러 형제가 아내 한 사람으로 같이 사는 것 등 색다른 여러 풍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왜 인도로 갔는가? 물론 승려인 혜초가 ‘불법 구하기’가 목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목적은 여덟 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오언시는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급기야 마하보리사(大覺寺)에 도착하고 나니 내 본래의 소원에 맞는지라 너무나도 기뻤다. 내 이러한 뜻을 대충 오언시로 노래한다. … 여덟 탑을 보기란 참으로 어려운데, 오랜 세월을 겪어 거지반 타버렸으니, 어찌 보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하지만 오늘 아침 바로 내 눈앞에 있구나.’
그가 말하는 여덟 탑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석가모니 사리를 팔등분하여 인도 각지에 세웠다는 근본팔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도의 8대 성지를 일컫는 것이다. 석가모니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8곳의 성지를 그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바람이 그를 머나먼 인도로 이끈 것이다.
8대 성지는 석가모니가 나고 자란 카필라바스투,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첫 설법한 사르나트(녹야원·鹿野苑), 기적을 보인 쉬라바스티(사위성·舍衛城), 도리천에서 내려온 장소인 상카시아, 영축산이 있는 라즈기르(왕사성·王舍城), 원숭이가 꿀을 바친 바이샬리(사진 3), 열반에 든 쿠시나가라이다. 이 가운데 사르나트에 도착한 혜초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위에는 사자가 있는데, 그 기둥은 아주 커서 다섯 아름이나 되며, 결이 섬세하다. …탑을 만들 때 이 기둥도 같이 만들었으며…’. 혜초가 본 네 마리 사자가 장식된 아쇼카 석주는 인도의 화폐인 루피에 등장할 만큼 유명한 조각이다.
이 석주는 마우리아왕조(기원전 321~185)의 제3대 왕 아쇼카(기원전 272~232)가 석가모니의 첫 설법 성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잘 다듬어진 높이 12.8m의 돌기둥인데, 기둥 몸통은 부러져 현장에 있고, 위에 올려졌던 기둥머리 장식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혜초의 여행기간은 햇수로 5년이다. 중국 승려 법현이 12년(399~410), 현장이 17년(627~643), 의정은 18년(671~689) 점을 상기하면 긴 기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여행기는 법현의 ‘법현전’,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3대 여행기로 꼽힐 만큼 중요하다. 8세기 전반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직접 다녀왔던 신라승 혜초가 그의 고향인 신라로 다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또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이 땅에 없지만, 신라승 혜초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그 무엇보다 크다. 조선일보. 임영애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 2015.12.26.(2)
혜초 스님의 4년 동안 여행 일정은 앞서의 선배들과는 달리 해로로 가서 육로로 돌아오는 새로운 인도 여행로를 개척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무 살 때 중국 광주를 출발하여 해로로 남중국해→벵골만을 통해 인도로 들어갔다. 육로로 동천축→마게타국→중천축→나시크→서천축→북천축→가십마리국→건타리국→람파국→사율국→범인국→토화라국→호밀국→총령진→소륵국→구자국→연기국→돈황을 거치는 수만 리 길이었다.
풀이하면 지금의 사이공→수마트라→말레이반도→인도→티베트→파키스탄→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는 가는 곳 마다 그 나라의 정치·사회·문화·풍속·생활사 등을 지켜보고 기록하였다. 북천축국을 찾았을 때, 이 나라의 왕은 300마리의 코끼리를 갖고 있으며 외출할 때 왕과 수령들은 코끼리를 타고 낮은 관리들은 말을 타지만 백성들은 걸어다닌다고 기술하였다.
대식국(大寔國)에서는 왕과 백성들이 똑 같은 옷을 입어 구별이 없고, 식사도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손에 숫가락과 젓가락을 들었으나 보기에 매우 흉하다고 쓰고,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고 알라신을 섬기거나 불법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오마이뉴스. 김삼웅2023. 11. 23. (3)
혜초 스님은 4편의 시를 남겼는데요, 유홍준교수는 구법승으로서 혜초 스님의 용맹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읊은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은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에도 나오지 않는 오지의 성지순례기라는 점에서 세계불교사와 기행문학의 한 고전으로 되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받는 감동은 구법승(求法僧)으로서 혜초의 용맹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4편의 시로 읊은 인간적인 모습이다. 혜초는 달 밝은 밤이면 고향 계림이 더욱 그리웠다는데 어느 날 순례길에 티베트 승려를 만나서는 이렇게 읊었다.
"그대는 티베트가 멀다고 한탄하나
나는 동쪽으로 가는 길이 멀어 탄식하노라
길은 험하고 눈 쌓인 산마루는 아득히 높고
골짜기엔 도적도 많은데
나는 새도 놀라는 가파른 절벽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는 건너기 힘들다네
평생에 울어본 기억이 없건만
오늘따라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네"
장안에 온 혜초는 계림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국 밀교(密敎)의 제1조인 금강지(金剛智)와 2조인 불공(不空) 밑에서 경전의 편찬과 번역에 매진하였다. 불공은 유언에서 밀교를 이어갈 여섯 스님 중 두 번째로 혜초를 지목하였다. 그는 통일신라가 낳은 자랑스러운 당대의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이 육필본이 과연 혜초의 친필인가엔 이론이 있지만 흐트러짐 없는 조용한 서체에는 스님의 높은 도덕과 따뜻한 인간미가 은은히 배어 있어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선일보. 2011. 1. 26.(4)
박상진교수는 혜초 스님이 외롭고 고달플 때마다 시를 썼고 그 시들이 기행문의 형식을 독특하게 만들었다고 보았습니다.
방랑자 혜초는 먼 타향에서 외롭고 고달플 때마다 시를 쓴다.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다섯 편의 시는 직접 보고 들은 대상의 기록이라는 기행문의 형식을 독특하게 만든다.
月夜瞻鄕路(월야첨향로) 浮雲颯颯歸 (부운삽삽귀)
緘書參去便(함서삼거편) 風急不聽廻 (풍급불청회)
我國天岸北(아국천안북) 他邦地角西 (타방지각서)
日南無有雁(일남무유안) 誰爲向林飛 (수위향임비)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숲으로 날아가리. (정수일 역)
혜초는 남천축에서 어느 버려진 곳을 보고 이 시를 쓴다. 절은 황폐하고 승려는 없다. 황량한 풍경에 젖은 그의 마음은 머나먼 어딘가로 떠난다. 떠도는 구름만이 눈에 들어오고, 내면은 달빛 어린 고향 가는 밤길로 향한다. 향수를 달래느라 구름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요청하지만 구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기만 한다. 마음은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가득하고, 고향은 북쪽 지평과 서쪽 변방 사이에서 하염없이 멀어져 간다. 구름 대신에 기러기를 찾지만, 기러기는 더운 그곳에 살지 않는다. 이제 메신저는 어디에도 없다. 서울경제. 최성욱 기자2020. 3. 13. (5)
<자료출처>
(1) 왕오천축국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2) 신라승 혜초가 인도로 간 까닭은… 조선일보 2015년 12월 26일
(3) 국보급 '왕오천축국전' 쓴 신라인 혜초 (daum.net) 오마이뉴스. 2023. 11. 23.
(4) [유홍준의 국보순례] [95]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daum.net) 조선일보. 2011. 1. 26.
(5) 雪山 넘으려면 다시 한달..혜초의 끝나지 않는 여행 (daum.net) 서울경제. 2020. 3. 13.
<참고자료>
온난화가 바꾼 기막힌 풍경···중국 고비 사막에 풀이 자란다 중앙일보 2019년 9월 20일
왕오천축국전은 왜 프랑스에 있을까? (daum.net) 2007.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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