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17) 1919년 2월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본문

■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아시나요?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로 시작해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만세!”로 끝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들어보셨습니까?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여성 주도로 작성하고 인쇄 배포한 최초의 독립선언서입니다. 또한, 애국부인회(김인종 외 8인)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국내외 각지로 반포하여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이는 민족지도자 33명이 3·1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이전의 일이며, 여성들이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세계사적으로도 큰 사건입니다. 선언서는 당시의 부녀자에게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을 요구하며, 이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밝혔습니다.
다른 독립선언서와 달리 1,335자의 순 한글로만 작성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악한 문맹 상황과 사회적 편견에 시달렸던 여성도 남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광복절이 되길 바랍니다.(1)
■ [3·1운동 백년과 여성]항일에 남여가 따로 있나..'대한여자독립선언서'
뉴시스 홍찬선기자 2019. 2. 25. 06:00
1983년 미국에 사는 도산의 장녀 수산 자택서 발견
가로 49cm, 세로 31cm 크기..총35행, 1393글자 담겨
"독립운동서 남녀는 대등하다..독립위해 분발하자"
"1919년 4월 간도·노령서 반포..작성 양력2월 추정"
작성자 8인 북간도서 애국부인회으로 활동했을 것
글씨체와 문구, 세련된 이름으로 볼때 新여성 추측
학자들 "3·1 독립선언서 버금가..사료적 가치 높아"

"지식이 몽매(蒙昧)하고 신세가 연약한 아녀자의 무리이나 국민 됨은 일반이오 양심은 한가지라…동포여 때는 두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시여 대한독립만만세."
3·1운동 100주기를 맞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억울함과 그들의 잔혹함에 맞서 대한독립을 외쳤던 '대한여자독립선언서(大韓獨立女子宣言書)'가 재조명되고 있다.·
1차세계대전 종식과 3·1운동 전 후 국제사회에 반포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격문류는 대략 100여종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여성들에 의해 선포된 것만도 10여종에 달하며 대표적인 선언서는 '대한여자독립선언서'가 꼽힌다.
대한여자독립선언서는 1983년 미국에 사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장녀 수산(繡山)의 자택에서 가로 49cm, 세로 31cm 크기로 발견됐다.
한 해 전인 1982년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견된 바는 있으나 순 한글로 된 여성독립선언서 원본이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수산은 아버지 도산의 유품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기 위해 정리하던 중 선언문을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발견 당시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했다.
한지로 된 선언서에는 가는 붓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35행, 1393자(서명 제외)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선언서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우리 동포의 억울함과 일제의 만행에 고통받는 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연약한 여자 몸으로 독립운동의 뜻은 있으나 행동으로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여성과 남성은 서로 대등하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선언서 말미에는 대한동포들이여 독립을 위해 분발하자는 내용도 담겨 있다.
당시 일제 강점기 역사 인식을 비춰볼 때 당시 여성들은 역사의 주역인 남자의 보조여야 한다는 사상보다 대한독립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특히 선언서 마지막에는 기원 사천이백오십이년 이월 일로 명시돼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는 민족대표 33인이 반포한 3·1 독립선언서 이전인 1919년 2월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확한 시기가 양력인지 음력인지는 밝혀진바 없다.
이에 대해 이명화 도산학회 회장은 "조선총독부에서 발견된 내부 문건을 보면 이 대한여자독립선언서는 1919년 4월8일 간도(현 중국 길림성 훈춘)와 같은달 14일 노령(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에 배포 됐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있다"며 "이는 4월보다 이전인 양력 2월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선언서에는 이를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여성 8명의 이름이 서명돼 있다. 서명인은 김인종·김숙경·김오경·고순경·김숙원·최영자·박봉희·이정숙 등이다.
당시 여성들은 누구의 어머니 또는 누구의 처로 대부분 불렸지만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남겼다.
8인의 여성들은 이 시기 간도 지역에서 애국부인회가 조직됨에 따라 이곳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기록은 전혀 밝혀진바가 없다.

8인의 여성들이 쓴 선언서의 글씨체와 문구, 세련된 이름으로 볼때 당시에도 우수한 교육을 받은 신(新)여성들로 보여진다. 특히 선언서 내용중 '상제'와 '하나님'을 쓴 것으로 비춰볼때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선언서를 작성한 배경에는 구주 대전란(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국내외 여성도 남자들과 함께 독립만세의 대열을 이뤄야한다는 의식에서 자발적인 여성의 소리로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분석된다.
역사 학자들은 대한여자독립선언서가 지닌 역사적 의의는 3·1 독립선언서에 버금가는 힘과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명화 회장은 "지금까지 밝혀진 여성들이 작성한 선언서 중 3·1운동 이전에 작성한 것은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유일하다"면서 "이 선언서를 작성한 8인은 간도지역에서 애국부인회의 이름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밝혔다. 이어 "8인의 여인 중 김숙경은 독립운동가 황병길씨의 부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선언서는 반포 당시 국내와 만주, 노령 등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해 독립운동선상에서의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당시 국내와 노령, 간도 등의 지역에서는 일제의 감시가 심해 이 선언서를 공개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게 역사 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일제의 감사가 닿지 않은 미주지역은 달랐다. 당시 이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한여자애국단은 모든 행사에서 이 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여성항일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삼았다. 애국단은 이 선언서가 3·1 독립선언서와 더불어 여성들의 독립의지를 진작시킨것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기록은 당시 미주지역에서 발간한 신한민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19년 5월8일자 '대한독립녀자선언서' 사설을 보면 "3월1일 대한독립선언 이전에 미래 우리 대한민족부인동포의 대정신 대자각을 성명하는 선언이오 이선언서를 대표한 여덟분 선생은 우리 부녀 동포의 정신을 선언한 대표자시니라"라며 8인의 여성들을 추켜세우고 있다. 이 후에는 이들이 쓴 선언서 전문을 게재하고 있다.
신한민보는 발간 초부터 노령에서도 많이 읽혔다. 당시 신민회(1907년 국내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단체) 관련 민족지도자들이 노령으로 많이 망명하고 있었던 터라 노령과 미주의 민족지도자간에는 서신 연락 등 긴밀한 관계가 이뤄지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연구해온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는 "1919년 2월 중국 길림에서 대한여자독립선언서가 작성 됐고, 연해주로 보내져 석판인쇄를 한 후 지린성에서 반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이 독립선언서가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주까지 보내진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박 전 교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당시)국내외 여성도 남성들과 함께 독립만세의 대열을 이뤄야한다는 의식에서 자발적으로 여성의 소리로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다만 "8인의 여성이 누구인지는 어떤 직업들을 가졌는지는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기독교적 소양이 깊은 신여성인들로 추측 된다"고 말했다.(2)
■ 1919년 3 ·1운동 직전,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있었다
저자 이윤옥은 별나다. '평화의 소녀상' 수난 관련 국내외 뉴스들이 그치지 않는 세태에서는 그렇다. 일본을 편드는 역사 부정과 왜곡이 국내 극우 인사들의 바람몰이로 전파되는 판에서 자비 부담만 가중되는 여성독립운동가 알리기에 목매고 있으니까. 그것도 남성 위주 독립운동사에 가려진 '여성독립운동사'라는 낯선 지평을 열면서. 남성독립운동가에 비해 불평등하게 평가된 여성독립운동가의 역할과 지위(포상)를 곱씹게 하는 저자가 독보적 존재로 다가온다.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아래 여성독립운동사)를 읽으며 세 가지 사실에 놀란다.
첫째는, 재미와 거리 먼 문장들이 의외로 술술 읽힌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 암흑기에 눈뜬 여성들이 나이나 출신 상관없이 곳곳에 많다는 점이다.
셋째는, 듣도 보도 못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1919.2) 같은 기록들을 마주한 점이다.
저자의 땀이 묻어나는 사항들이어서 처음에는 섣부를까 싶어 리뷰를 망설였다. 그러다가 저자에게 서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 내용을 간간이 큰따옴표로 옮겨 맥락적으로 활용할 것이다.
"일본어 전공자인 내가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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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 겉표지 |
ⓒ 얼레빗 |
<여성독립운동사>는 시대별(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신분별(기생, 의사·간호사, 해녀, 교사·기자, 노동자, 의병), 해외별(중국지역, 러시아지역, 미주지역) 등 3장 구성에다 부록을 곁들였다.
일반 독자들이 여성독립운동가와 그 역사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첫 책이 아닐까 싶다. 특히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가운데 10대 소녀 명단' 59명의 이름을 밝힌 것은 관련 분야에서도 최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카드 6000여 장을 초주검이 되도록 일일이 다 뒤져" 얻은 결과물이다.
내가 직접 해보니 어지간히 품이 드는 일이다. 여성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모르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자료를 빼낼 수도 없다. 내가 검색란에 유관순 아닌 다른 여성독립운동가를 입력할 수 있음은 저자의 공로다.
저자는 일본어로 된 여성독립운동가 재판 기록들을 "번역 없이 바로 읽을 수 있"는 일본어 전공자다. "사회의 조명을 받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전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로 여겨 한국외대 연수평가원 교수직에서 물러나 본격 집필에 돌입한 덕이다.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올해(2021)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2돌이 되었지만 명확한 수형자카드가 있음에도 아직도 상당수가 미포상 상태다. 물론 이 표는 10대 소녀에 국한되며 여성에 한정된 조사다. 덧붙여 말한다면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6,264장 속의 상당수 남성과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여전히 독립운동가 포상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 이 가운데 1919년 3·1만세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동참한 소녀들이 있다. 바로 배화여학교 학생들로 김성재 지사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검정 치마저고리에 길게 땋아 내린 머리,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의 김성재(金成才, 1905.10.14. ~ 모름) 지사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될 때 나이가 만 열네 살이었다. 황해도 장연군 설산면 읍서리 17번지가 고향인 김성재 지사는 1920년 3월 1일 경성(서울) 배화여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수감되었다."(31~32쪽)
저자는 할 말을 가급적 자제하며 독립운동가 포상 현황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그런 거리두기가 책읽기를 편하게 하면서도, 저자가 못한 말까지 가늠해 귀 기울이게 한다.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 쉬운 '여성들이 감옥에서 당한 성폭행 고문 증언'과 관련된 자료나 연구의 미비함도 그런 방식으로 지적하며 관심을 제언하고 있다.
"철저히 자료를 바탕으로 생몰월일 하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 공개 자료가 극히 적어 후손들의 증언을 듣고 쓰자는 기본 원칙"에 충실한 서술이다.
나이·출신 상관없는 걸크러시
<여성독립운동사>는 여성독립운동가들 면면을 소개한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걸크러시투성이다. 특히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지금, 오신도 지사(吳信道,1852.4.18.~1933.9.5, 2006년 애족장)는 감탄스럽다.
"대한애국부인회에서 68세라는 고령에 총재로 추대되어 평안남도 일대에서 조직을 확대하고 군자금을 모으는 일에 앞장"서다 출옥 뒤 독립운동가 아들을 앞세우고 81세에 사망한다. 물론 2021년 10월 현재 유일한 생존자 오희옥 지사(1926.~ 생존, 1990년 애족장,중앙보훈병원에 입원 중)께도 경의를 표한다.
어리거나 젊은 나이에 고문후유증이나 과로로 순국해 안타까움을 안기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이 꽤 있다.
병고로 가출옥한 9일 뒤 열아홉 살에 순국한 이선경 지사(李善卿, 1902.5.25.~1921.4.21, 2012년 애국장),
출옥 두 달 만에 서른한 살로 숨진 최초의 고공 투쟁자 강주룡 지사(姜周龍, 1901~1932.6.13, 2007년 애족장),
스물여섯 살에 과로로 숨진 심훈 소설 <상록수>의 모델 최용신 지사(崔容信, 1909.8.12.~1935.1.23, 1995년 애족장) 등의 명복을 늦게나마 빈다.
부부독립운동가인 얼굴들도 많다.
호남 의병장인 남편 강무경(1962년 독립장)이 말렸으나 감옥 동지까지 된 양방매 지사(梁芳梅,1890.8.18.~1986.11.15, 2005년 건국포장),
지난 광복절 카자흐스탄에서 유해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부인 단양이씨(1874.~1908.3, 2021년 애국장),
미국에서 허드렛일 등을 하며 도산 안창호 선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혜련 지사(李惠鍊, 1884.4.21.~1969.4.21, 2008년 애족장) 등의 강인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애국은 출신과 상관없음을 새삼 일깨우는 인물들도 많다.
열여섯 살에 만세운동을 이끈 황해도 해주 기생 문재민 지사(文載敏, 1903.7.14.~1925.12, 1998년 애족장),
일제 총독부와 맞선 간호사 노순경 지사(盧順敬, 1902.11.10.~1979.3.5, 1995년 대통령표창),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지사(尹熙順, 1860.6.25.~1935.8.1, 1990년 애족장),
유관순 열사의 올케인 교사 조화벽 지사(趙和壁, 1895.10.17.~1975.9.3,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부춘화 지사(夫春花, 1908.4.6.~1995.2.24, 2003년 건국포장) 등의 다부짐이 강하게 다가온다.
페미니즘을 넘어선 '여성독립운동사'
나는 '대한독립여자선언서'(1919.2)가 존재하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학교에서 줄곧 '3·1독립선언서'만 배웠으니까. 저자가 '여성독립운동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배경과 상황이 새삼 이해된다.
지금보다 엄혹한 일제 강점기 가부장제하에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 참여하는 행위는 목숨을 거는 동시에 가정 분란을 자초하는 일이다. 사회·정치적 제도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이 암암리에 여권신장을 천명하며 대의를 몸소 실천하였으니 페미니스트 수준을 넘어섰다.
페미니즘의 국어사전적 정의는 "성별에 의한 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사회, 정치, 법률상의 지위와 역할의 신장을 주장하는 주의"다. 남녀동권 지향이다. '여성독립운동사'의 인물들은 독립쟁취를 위해 남성독립운동가들마냥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자발성은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던 차미리사 지사(車美理士, 1880.8.21.~1955.6.1, 2002년 애족장)의 독려와 맞물려 페미니즘 너머를 응시한다. 그들 중에서 변절자 오현주와 오현관 자매가 나왔으니 기막힌 일이다.
오현주의 밀고로 인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원 9명이 기소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오현주 부부는 밀고의 대가로 원서동 196번지에 크고 넓은 집을 사서 편한 여생을 보냈다." 지난 1월 만화가 윤서인이 자신의 SNS에 친일파 후손과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 사진을 나란히 게재하고 쓴 글이 떠오른다.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한 걸까. 사실 알고 보면 100년 전에도 소위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 아니었을까."
현재 국사는 법적 편제상 고등학교 1학년이 배우는 필수과목이지만 수능에서는 선택이다.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교육기관과 대중매체에서 꾸준히 조명하지 않는 한 윤서인처럼 생각하는 청소년이나 젊은이는 늘어날 수 있다.
그렇기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애써 찾아가 묻히기 십상인 자료와 증언을 수집하느라 바쁘게 움직일 저자의 건투를 빈다. 아울러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10권 더 출간해 총 400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다루고 싶다"는 저자의 10년 계획이 완수되기를 바란다.(2)
■ 대한독립여자선언서大韓獨立女子宣言書
1919년 4월 간도에 있는 애국부인회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국내외에 선포한 선언서.
국내에서 3·1운동이 계속 진행되자 당시 미국·노령(露領)·만주·중국본토에 있던 여성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부녀자들만의 조직이 필요함을 느껴 대한부인회를 조직하였다.
대한부인회원 8인은 1919년 4월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작성, 인쇄하여 국내외 각지에 배포하여 한국여성들의 독립만세운동 전개를 고취하였다.
선언서는 “유정(有情)한 남자들은 각처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는데, 우리들은 그 중에 기와(起臥)하면서 무지몽매하고 신체가 허약한 여자의 일단(一團)이나, 같은 국민 같은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주저함이 없이, 살아서는 독립기 아래서 활기 있는 새 국민이 되고, 죽어서는 구천하에서 수많은 선철(先哲)을 찾아가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가는 의무이므로, 동포여 빨리 분기하자.”라고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선언서는 여자들만의 독립선언서, 부녀자들도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일종의 격문적인 선언서라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는 김인종(金仁宗)·김숙경(金淑卿)·김오경(金五卿)·고순경(高順卿)·김숙원(金淑媛)·최영자(崔英子)·박봉희(朴鳳姬)·이정숙(李貞淑) 등이 서명하였다.(4)
<자료출처>
(1)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아시나요? (daum.net)
(2) [3·1운동 백년과 여성]항일에 남여가 따로 있나..'대한여자독립선언서' (daum.net)
(3) 1919년 3 ·1운동 직전,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있었다 (daum.net)
<참고자료>
"기당 현상윤은 3.1운동의 숨은 주역" | 연합뉴스 (yna.co.kr)2009-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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