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김유신 (4)
력사를 찾아서
왕호시대는 서기 514년 법흥왕 때부터였다. 신라가 이렇게 늦게 중국식의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한민족의 고유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회였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법흥왕은 군사행정을 정돈하여 병부를 설치하였고 율령을 반포하여 문무백관들의 공식 복장에 차등과 서열을 두는 제도를 제정하였다.대외관계에도 노력을 기울여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냈고 가야와는 혼인동맹을 맺었다.그리고 불교를 공인하였고 제방들을 수리하여 농업생산 증대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재상에 해당하는 상대등 제도를 실시하였고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동아시아의 다른 왕조들과 대등한 국가임을 천명하였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까지는 10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신하들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불..
■김씨끼리 죽고죽인 왕위쟁탈전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사실 신라, 특히 하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복잡함에 포기하고픈 생각이 절로 든다. 부계, 모계, 비계가 모두 근친혼으로 맺어졌고, 게다가 형제간, 사촌간, 혹은 소수의 진골귀족이 뒤엉켜 죽고 죽이는 왕권다툼을 벌였으니 말이다. 촌수를 가늠하기도, 누가 누구의 편인지, 적인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36대 혜공왕(765~780)이 살해되고 선덕왕(780~785)이 즉위할 때부터 46대 문성왕(839~857)까지 60여 년 동안 무려 11명의 왕이 교체됐다. 그 중심에 원성왕(785~798)이 있었다. 원성왕(김경신)은 경쟁자인 무열왕계의 김주원(생몰년 미상)을 몰아내고 즉위했다. 이로써 원성왕계 왕통이 성립됐다. 이쯤에서 왕실 계보도를 참..
마립간시대는 서기 356년부터 서기 513년까지로서, 내물마립간이 즉위하면서 통치자의 이름이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는데, 마립간은 이사금보다 훨씬 더 권위를 갖는 이름이었다. 내물마립간 이전에는 박씨 · 석씨 · 김씨 세 성이 왕위를 맡았으나 내물마립간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였는데, 이것도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내물마립간은 안으로는 덕치를 베풀면서 밖으로는 백제 · 고구려 · 전진 등과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너무 크게 팽창한 고구려의 압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실성과 복호를 볼모로 보내는 등 고구려에 신속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서기 427년에 고구려가 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펴..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1)임기환2021. 12. 9. 15:33 [고구려사 명장면-137] 한반도에서 한성고구려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부흥세력은 670~673년 4년 동안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끝내는 평양 이남의 세력 기반을 모두 상실하고 임진강을 건너 신라로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임진강을 당군 남하의 최후 저지선으로 설정하고,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을 영유하려는 애초의 목표를 포기함으로써 당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라의 전략 변화가 배경이 되었다.이렇듯 고구려 부흥운동은 결국 신라와 당 사이 전쟁에서 종속적인 변수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당전쟁의 결과가 결국 보덕국 고구려유민들의 존재 방식까지 규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부흥운동을 좌절케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