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북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440년  당시의 북위(파란색)

 

북위(北魏, 386년~534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에 선비족 탁발부가 화북에 건국하여 남북조 시대까지 이어진 대표적인 정복 왕조이다. 정식 국명은 탑가치이지만 한자 국호는 위(魏)라고 불렸기 때문에 전국 시대 그리고 삼국 시대 위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불리고 있다. 또는 후위(後魏), 선비족 탁발씨(拓跋氏)가 지배했다고 하여 탁발위(拓跋魏),이후 탁발씨가 원씨(元氏)로 개명했기 때문에 원위(元魏)라고도 한다.

역사[편집]

261년 선비족 탁발역미가 한족들을 원정하여 정복하였다. 후세에 선비족 탁발씨가 정복한 지역에 옛 위나라가 존재했어서 위나라라고 기록하기도 하였고 현재는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부르고 있다.

3세기 중엽 탁발부는 내몽골의 파언탑랍(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다. 삼국을 통일한 서진은 탁발부의 세력을 이용해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의 산시성 북부의 땅을 내어주어 살게 했다. 하지만 선비족들은 지속적으로 서진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선비족 탁발부는 세력이 강해졌다.

315년에 침략해오는 선비족을 달래기 위해 서진은 선비족 탁발의로에 관작을 주어 대나라(代)의 왕으로 봉했으나 선비족의 침략은 멈추지 않았다.

대나라는 탁발십익건 때 376년에 저족의 국가 전진에 멸망하였다.

북위의 성립[편집]

대나라가 멸망했으나, 383년에 탁발규는 선비족들을 이끌고 전진과의 비수 전투에서 이겼고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는 386년에 대나라를 재건하고 전진과 화북의 한족들을 정복하였다. 이후에 탁발규는 황제를 자칭하고 타브가치를 건국하였고 한족들은 중국을 정복한 탑가치의 국호를 (魏)라고 기록하였다. 이 탁발규가 바로 초대 황제인 도무제이다.

도무제는 지금의 내몽골 일대로 북상해 고비사막계, 정령족, 흉노족 등 기마민족들과 함께 오르도스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이어서 선비족 도무제는 남쪽으로 정복활동을 벌이면서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를 영유하고 있던 후연을 공격하였고, 397년에 수도 중산(中山)을 함락하고 후연을 멸망시켰다. 398년에 수도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 다퉁으로 옮겼고, 그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소개시켰다.

도무제는 갈족, 흉노족, 선비족의 군사로 남쪽으로 한족들을 정복하면서 선비족 체제를 유지하였다. 피지배층 한족에 대한 차별과 학살이 존재하였다. 후세의 기록에는 선비족이 피지배 문화인 중국 한족 문화도 일부 수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탁발도(拓跋燾)의 한족 원정[편집]

도무제의 뒤를 이은 선비족 명원제는 대규모 선비족 군사들을 이끌고 한족 국가인 유송을 공격하였고 하남을 정복했다. 명원제를 이은 태무제 탁발도는 호하북연북량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한족 국가 유송 원정하면서 유송의 회남 강북을 정복하였고 439년에는 화북을 통일하였다. 북위에 굴복한 유송의 한족들이 조공과 한족 공녀들을 보내니 북위 선비족들은 중국 전체에서 우세한 세력을 떨쳤다.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화북 정복 과정에서 많은 한족들이 학살되었다. 서진 시절부터 내려오던 많은 한족들이 노비로 강등되었고 선비족과 갈족, 흉노족 군인들에게 한족들을 노비로서 배분하였다. 또한 많은 한족(漢族) 여성들을 기생으로 만들었다. 선비족 군사들에 정복된 화북에서 한족들의 인구는 대량으로 줄게 되었고 한족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태무제 탁발도는 유송의 회남과 강북을 점령한 이후 도사 구겸지가 접근하였다. 불교가 성행하던 때 도사 구겸지가 도교 교단을 확립하였고 이어서 한족인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 최호는 한족으로서 선비족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유송에서 한간(매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삼무일종의 폐불 첫 번째) 태무제의 북위 시절 한족들을 등용한 적이 없었으나 도사 구겸지의 요청에 의해 한족 출신 최호를 등용하였는데 최호는 선비족들이 한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한족화). 선비족 지배층들은 이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고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호는 한족들을 모아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하였고 탁발도는 한족 시점의 역사서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였다. 이후 탁발도는 선비족들의 불만이 거세지자 한자 체제화(한족화)를 추진하던 최호와 한족 출신 관료들을 전부 숙청하였다.

효문제 때 풍태후가 섭정하면서 유교적인 예법을 받아들이고 균전제를 시행하였으며 또한 삼장제를 확립했다. 풍태후 사후에 친정을 시작한 효문제는 493년에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그는 선비족의 성씨도 중국풍으로 바꿔 탁발씨를 원씨(元氏)로 고쳤으나 피지배민족인 한족의 성씨를 쓰는 것에 선비족의 반발이 심해 북위를 이은 북주에서 다시 선비족 성씨로 휘귀하였다. 선비족에 충성을 하는 한족 일부에 관직을 주었으나 선비족은 선비족끼리 혼인하는 풍습은 지속되었고 한족에 차별이 있었다.

북위의 쇠퇴 및 멸망[편집]

효문제 사후 어린 효명제를 대신해 섭정한 영태후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혔다. 또한 태무제 때 선비족들이 한화정책에 불만을 가져 최호와 화북의 한족들을 대부분 숙청하였지만 효문제와 풍태후 그리고 영태후는 또 한화정책을 실시하였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정책에 대한 선비족들의 불만은 523년에 일어난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6진은 원래 북위의 수도 평성을 지키던 6곳의 군사기지로 북위 선비족 왕실의 선비족과 흉노족의 명족들이 있는 곳이였다. 하지만 급진적인 한화정책으로 인해 이민족들인 6진의 불만이 누적되어 6진의 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황제를 두 번이나 바꿔 세우지만 6진의 난의 진압과정 중 대군벌으로 성장한 흉노족 출신 이주 영(爾朱 榮)이 군사를 일으켜 영태후에 맞서 효장제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에 낙양을 함락한 뒤 영태후와 영태후가 세운 황제를 황하에 빠뜨려 죽이고, 승상 이하 대신 천여 명을 처형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하음의 변이라고 한다.

이주 영은 진양(晉陽)에서 조정과 효장제를 마음대로 휘둘렀으나 이주씨(爾朱) 휘하의 선비족 장군 고환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를 폐위하고 효무제를 세웠다. 고환은 6진에 있던 선비족들과 흉노족을 모아 이주씨 일당을 각지에서 격파하여 정권은 효무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효무제는 이번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 낙양을 탈출해 장안으로 도망쳐 선비족 우문태에게 의지하자, 선비족 고환은 효정제를 옹립하고 534년 수도를 으로 옮겼다. 같은 해 선비족 우문태는 효무제를 살해하고 문제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역사상 이것을 동위서위라 부른다.

동위의 정권은 모두 고씨의 손에 있어, 고환의 아들 고양이 재상이 되어 550년에 효정제로부터 제위를 빼앗아 북제를 건국했다. 서위에서도 정권은 우문씨가 차지하여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이 556년에 공제를 폐위하고 다음 해 북주를 건국하니 이로써 동서 양위는 멸망했다.

 

 

선비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선비족(중국어: 鮮卑, 병음: Xiānbēi, 기원전 1세기 ~ 6세기)은 만주 지역과 요동에 널리 퍼져 있던 민족으로 발흥하여 점차 중국으로 대이동하여 침입, 정복활동을 펼친 동호계 민족이다. 생활은 주로 정주 농경 생활과 목축을 하였으며 유목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비족의 유물은 대부분 요동과 만주지역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서 나온다. 위서(魏書) 서기(序起)의 기록에 따르면 선비족은 선비산(山)에서 숨어 들었고 이후 선비산에서 흥기했다고 하나 이것은 부정확한 일설로서 선비산에는 선비 유적은 적어 사료가 의심된다. 하지만 선비족이 건국한 북위는 해당 기록을 보고 선비산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사서의 기록에서는 선비족은 원래 흉노가 살던 곳보다 동남쪽인 요동 만주 남부에 살며 흉노에 복속되어 있었고 흉노가 멸망하고 독립하여 중국 북부에 침입, 정복하여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1]

선비족은 위진남북조시대에 중국으로 남하하여 내몽고 지역에 정착하면서 중국 대륙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한족들을 정복해가던 선비족은 한족의 문화를 접하고, 한족은 선비족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한족과 선비족이 점차 융합되는 호한융합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들은 화북에 북위와 북연을 세웠는데 선비족의 북위를 이어 북주, 북제는 남쪽의 한족들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대륙을 통일하였다. 북주의 선비족들은 복속된 남조의 한족들에게 선비족의 성씨와 문화를 쓰기를 강요시켰다.[2] 위서에 따르면 선비산에 살았다고 하여 선비족이라고 부른 일설이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근거로 북위 시절 선비산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전 선비산의 위치는 불확실하여 추정의 영역에 있으며, 현재는 대선비산이라는 명칭을 가진 산이 하얼빈에 존재한다. 하지만 대선비산에 고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나 유적은 보이지 않으며, '대선비산'(大鮮卑山)이라는 명칭이 《만주원류고》의 기록에 존재하는 것을 보면 청나라 이후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역사[편집]

중국 서북방 지역(현대 산시성과 간쑤성화베이성을 접하는 네이멍구 자치구 지역)으로 선비족은 대(大)이동하였다. 선비족은 흉노가 약해진 틈에 흉노로부터 독립하여 만주와 요동에서 세력을 키워 중국 북방으로 침입하였다. 언어학적으로는 선비어에 남아있는 모용선비 언어 연구에서 몽골어와 유사한 언어들이 발견된다.[3]

선비족은 기원전 시기에는 흉노에 복속하였다. 그 후 흉노가 분열하자 독립하여 세력을 길렀다. 1세기가 되자 흉노의 세력이 약해져 선비족이 강성하게 되었다. 흉노족 일파들이 선비족에 가세하여 선비족의 세력은 강대해졌다. 2세기 반경 단석괴(壇石槐)가 등장하여 선비 제국의 통합에 성공하여 세력이 매우 강대해졌다. 단석괴의 사후 선비 제국에서 우문선비, 모용선비, 탁발선비가 서로 독립하여 세력을 이뤘다.[4] 이후 우문선비, 모용선비도 각자 세력을 이루었고 탁발선비도 북위를 건국하였다.

선비족은 중국과 만주의 징검다리 지역인 하북성에 있는 중국인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끝에는 화북을 재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족들이 노예로 전락하였고 선비족을 주군으로 신봉하는 한족들만이 직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족들의 화남 왕조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한족 화남 왕조는 북위에 정복된 한족들이 선비족 지배층을 섬긴다고 하여 간신배의 명칭 한간이라고 불렀다.[5] 북위 건국 이후 문자는 피지배층 한족이 사용하는 한자를 사용하였고 이후 한자 사용이 늘자 한족식 성씨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책에 반발하는 선비족이 많았고 북위 멸망 이후 북주에서는 선비족 복고 정책이 일어나 북위 때 사용하던 한족 성씨를 폐지하고 다시 선비족 성씨로 돌아갔다. 청나라의 여진족이 한족(漢族)들에게 수치스로운 변발을 강요했던 것처럼 선비족들도 피지배인 한족들에게 선비족의 풍습과 선비족의 성씨를 따를 것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선비족들이 중국이라는 국가에서 확실한 지배층이 되어가는 과정은 선비족이 북위를 세우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까지 선비족의 무천진 8주국 관롱집단들이 중국의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한족(漢族)들은 피지배민족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한족들은 피지배 위치에 있으면서도 한자 문명을 사용함으로서 이민족 지배층들이 한자 문명화하는 것을 지속시켰다.[6] 북주의 지배층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선비족 관롱집단은 순수 선비족끼리만 결혼을 하였으며 이러한 풍습은 수나라의 양견과 당나라 이연까지 이어져 왔다.[7][8][9]

6개의 부족 선비족의 정체성이 강한 부족은 탁발부모용부이고, 단부, 우문부는 우환족에 가깝다. 흘복부독발부는 본래 선비족에서 나왔다고 하며, 남량이 망하고 북위에 귀속되었다.

이 외에 모용부로부터 나와 서천한 토욕혼(吐谷渾)도 선비계인데 현지의 티베트인 강인(羌人)도 융합했다.

선비족 탁발부의 북위(北魏)는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여 이 이후는 남북조 시대가 되었다. 그 후 중국 한족 남조를 정복하고 북주와 북제로 나뉘었다.

북주에 의해 북제가 멸망하고 이후 수나라의 양견(楊堅)이 북주를 이어받는다. 수나라의 양견은 선비족 우문부가 세운 북주(北周)의 외척인 선비족이다.[10][11][12][13][14][15] 그 이유는 북위 때부터 포함된 내몽골 지역인 관중과 농서지방의 무천진 군벌은 선비족이기 때문이다. 옛부터 내몽골에 포함되는 관중과 농서지방은 선비족들의 고향이며 북위 때부터 북주를 거쳐 계속 무천진 출신 선비족 8주국 관롱집단이 중국인들을 지배하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선비족의 다얀씨(大野氏, 대야씨)는 북주(北周)의 귀족이며 선비족 8주국 관롱 집단의 출신의 당의 이연(李淵)도 선비족이다.[10][16][17][18][19][20][21] 선비족의 북위는 한자라는 문자를 가진 한족(漢族)의 풍습을 수용하는 정책으로 한족 썽씨를 쓰며 한족 문화를 채택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최호 등이 북위 선비족 왕실의 지지를 받고 한호융합 정책을 실시하면 선비족들은 한자 사용에 더해 한족식 성씨를 선비족 왕실로부터 하사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 한족(漢族)의 최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복된 피지배족 한족(漢族)이 얻을수 있는 높은 직책들은 한정적이였다. 이후 북위 왕실의 정책에 반발한 선비족들에 의해 북위는 멸망하였고 북주의 우문태 시절에는 몽골제국과 여진족의 청나라가 피지배민족인 한족(漢族)들에게 했던 정책들처럼 피지배민족인 한족(漢族)들에게 선비족 풍습을 강요하고 선비족의 성씨를 쓰도록 강요했다.[6][22][23][24]

 

 

선비족도 고조선의 한 갈래, 고구려와 형제 우의 나눠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선데이

입력 2011.03.13 04:36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1 고조선 후예들이 외부의 공격으로 몰려 집결한 곳으로 후에 선비족 발상지로 알려진 알선 동굴. 헤이룽장성과 몽골이 접하는 지역에 있다. 선비족은 AD1세기께 이곳을 떠나 초원으로 이동했다. 이 지역을 흐르는 강이 아리하(阿里河)인데 이 이름은 아무르강, 압록강, 한강, 알천(경주)에 반영돼 있어 민족 이동의 징표가 된다.

 

⑨ 고조선의 계승자들

 

고조선 멸망 뒤 유민 일부는 고조선 남부와 해안을 중심으로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과 연합해 고구려를 건국한다. 다른 갈래들은 고조선 북부에서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으로 불리며 할거했다. 크게 보면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눠지고, 선비오환부는 다시 모용부(慕容部)·탁발부(拓拔部)·우문부(宇文部)·단부(段部) 등으로 분류된다.

BC 2세기 한나라는 ‘흉노’를 견제하는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 요하상류의 동호(東胡·선비오환부)를 한나라 5부 북쪽으로 옮기려 했다(後漢書 烏桓鮮卑列傳). 그런데 흉노가 이를 간파해 동진하자 동호는 선비산(鮮卑山)과 오환산(烏桓山)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이들을 선비 또는 오환으로 부르게 됐다(烏桓鮮卑列傳)고 한다. 이들의 명칭이 시기에 따라 임의로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전국책(戰國策)에 “조(趙)나라… 동으로 연나라와 동호의 경계가 있다” 하고 사기에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山戎)이 있고 이들은 각기 흩어져 계곡에 거주하고 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했다(匈奴列傳)”고 하는데 동호 지역이 모두 고조선 영역이다. 따라서 동호는 고조선인들을 말한다.

그런데 오환이 처음 나타나는 사기의 기록엔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부여, 동으로 예맥조선과 서로 접하고 있다(貨殖列傳 烏氏<502E>)”고 한다. 이 기록은 흉노의 동진으로 동호가 오환산으로 들어가 오환족이 됐다는 후한서와 어긋나 의심스럽다. 또 부여는 북만주 일대이므로 연나라 ‘북’이라면 고조선 지역인데 사기는 이를 오환 지역으로 본 것이다. 결국 부여와 조선이 모두 예맥의 국가인데 ‘오환부여’니 ‘예맥조선’이니 하므로 오환은 예맥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오환산은 적산(赤山), 즉 울라간(Ulagan)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오주(烏州)는 원래 오환의 땅으로 요하(遼河)·오환산(烏桓山) 등이 있으며 경주(慶州)에는 적산(赤山)이 있다”고 한다. 오환산은 현재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츠펑(赤峯)이다. 츠펑은 몽골어로 ‘울라간 하다(Ulagan Hada)’라고 하는데 원사(元史)에도 적산(赤山)으로 명기돼 있다. 붉은 산(울라간)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사달’ ‘조선’과 연관되지만 아직 구체적인 문헌적 연계는 찾지 못하고 있다.

흉노와 후한의 대치 국면에서 고조선은 번영하지만 한 무제의 침공으로 흉노는 후퇴하고 고조선은 멸망한다(BC 108). 많은 유민이 발생하고 이들 대부분은 잡거(雜居)한다. AD 46년을 전후해 북방 일대는 메뚜기의 습격으로 수천 리가 붉게 변하고 초목이 말라 죽어 황무지가 되는 등 천재지변이 발생한다(後漢書 南匈奴列傳). 흉노는 내분으로 남북 흉노로 분열했다(48년). 이를 틈타 고조선의 후예(또는 동계)인 오환선비는 흉노를 막남(莫南) 지역까지 몰아 오르도스(현재 네이멍구(內蒙古) 바우터우 인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後漢書 卷90 烏桓鮮卑列傳).

고조선은 2세기께 선비족을 중심으로 재통합된다. 옛 고조선의 북부인 요서 지역에서 단석괴(檀石槐)는 후일 칭기즈칸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단석괴는 광활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동·중·서부로 나눠 각각 대인을 배치했다. 동부는 현재의 허베이(河北) 핑취안(平泉)~랴오양(遼陽), 중부는 탕산(唐山)~베이징(北京), 서부는 베이징~둔황(敦煌)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단석괴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구력거(丘力居)로 이어진다. 황제를 칭한 그는 영역을 확장해 청주·서주·유주·기주 등 네 주를 점령했다(三國志 魏書오환전). 3세기 초에는 구력거의 조카 답돈(踏頓:?~207)이 황제위를 이었다. 당시 북중국의 실력자였던 원소(袁紹:? ~ 202)는 답돈과 우호 관계를 맺고 친척의 자식을 자기 딸로 꾸며 시집을 보냈다(魏書 무제기). 답돈은 위 무제 조조(曹操)의 정벌 때 참수됐다. 이 시기를 전후로 고구려는 옛 고조선 남부 지역인 요하에서 벗어나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가비능(軻比能:?~235)이 여러 부족을 통솔해 위(魏)나라와 대립하다 암살되자 분열돼 모용부·탁발부·우문부·단부로 재편됐다. 이들 가운데 모용부가 가장 강해 전연(前燕:337∼370)과 후연(後燕:384∼409)을 건국했다.

4세기엔 ‘조선’이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난다. 진서에 “모용외가 건무(후한 광무제의 연호) 초에 정벌 전쟁을 하여 공이 크게 쌓여 조선공(朝鮮公·조선왕)에 봉해졌고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晉書 卷109)”고 했다. (고)조선의 이름이 고구려 아닌 모용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진서에는 모용외(慕容<5EC6>)가 조선공에 봉해진 뒤 모용황(재위 337∼348)이 이를 계승하자 내분이 일어났고, 모용황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험독(險瀆)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晉書 卷109). 수경주(水經注)나 청나라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에 따르면 이 지역이 바로 현재 베이징 인근으로 과거의 고죽국이다. 이로써 베이징 인근~요동에 이르는 고조선 옛 지역은 조선왕 모용외·모용황이 회복했다.

고조선이 멸망 450여 년 만에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 것이다. 조선왕 모용황은 기존의 고조선 영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남하해 북중국 주요부를 대부분 장악했다.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호를 연(燕·전국시대 연과는 다름)이라고 했다. 이런 현상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국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후연은 모용운(慕容雲)으로 이어진다. 진서(晉書)는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의 양자로 조부는 고화(高和)인데 고구려의 한 족속이다(慕容雲傳)”고 한다. 모용운은 즉위 후 성을 다시 고(高)씨로 하고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어 종족(宗族)의 예를 베풀자(408년), 시어사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함으로써 종족 간의 유대감을 표시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용씨 세력이 약화된 뒤 탁발씨가 대두해 건설한 국가가 북위(北魏:386∼534)다. 북위 헌문제(454∼476)는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며 472년 백제 개로왕이 국서를 보내자 꾸짖으며 장수왕을 두둔했고, 장수왕에게 딸을 보낼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헌문제의 아들 효문제(471~499) 탁발굉은 고구려 왕족 고조용(高照容:469~519)을 황후로 맞았는데, 그녀가 유명한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로 다음 황제인 선무제(499~515)를 낳았다(魏書 文昭皇太后列傳). 선무제의 등극에 황족 일부가 반발하자 문소황태후의 오빠인 고구려의 고조(高肇)가 대군을 몰고 와 북위 조정을 장악했고, 남조 송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기도 했다(502).

“491년 장수왕이 서거하자, 북위의 효문제가 부음을 듣고 흰 위모관과 베로 지은 심의를 입고 동교(東郊)에서 거애(擧哀)하였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효문제는 천자(天子)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서거한 듯한 애도의 정을 보였다.

이 같은 전연·후연·북위·고구려의 관계는 모용부·탁발씨·고구려가 중국 북부 지역에 서로 다른 나라를 만들었지만 ‘고조선의 후예’라는 인식을 공유했음을 보여 준다.

6세기 북위의 멸망 수·당시대(7~10세기)가 열렸다. 수·당나라는 선비족 전통과 중국 한족(漢族)의 발달된 문화를 결합해 퓨전(fusion) 통치체제를 구성했다.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은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이었고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은 양견의 이종사촌이었다. 전 서울대 박한제 교수는 호한융합(胡漢融合) 또는 호한체제(胡漢體制)라고 평가한다. 동아시아 최초의 거대 국제 국가 당은 ‘선비(鮮卑)의 나라’지만 한화가 극심했고 중국도 한·당나라를 중화의 꽃으로 보고 있어 이 시기를 고조선의 고유성(固有性)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나라는 그 정체성을 중립적, 비한비이(非漢非夷)로 파악해야 한다. 이 시기는 많은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귀화 또는 편입했고 만리장성 이북에서 북방민의 고유성이 많이 상실되는 계기가 됐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만주에서 거란·고구려·발해가 유지했다.

10세기 번성했던 거란(요나라 중심세력)은 우문부의 후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뒤 남은 사람들로 후에 거란으로 불렸다. 위서에는 “거란국은 고막해(庫莫奚)의 동쪽에 있는데 고막해와 같은 민족으로… 선조는 동부 우문의 별종이고 처음 모용원진(慕容元眞)에게 격파돼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달아나 숨었다(魏書 庫莫奚 契丹)”고 기록했다. 송막지간은 현재 네이멍구다.

요사(遼史)는 “요나라는 그 선조가 거란이고 본래는 선비의 땅이다. 요택(遼澤)에 살았다(“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遼史 地理志)”고 한다.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는데 연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밀려간 서쪽 국경 지역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요사는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했고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遼史 地理志2)”이라고 기록한다. 고조선의 후예인 거란(동호의 후예)은 모용부·탁발부 등 타 부족의 기세에 눌려 지냈지만 이전의 북위, 수·당과 달리 고조선의 고유 전통을 유지하면서 고조선의 옛 지역을 모두 회복하고 더욱 세력을 키워 중원으로 진출했다.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입력 2015-11-25 03:00업데이트 2015-11-25 03:00

미소띤 얼굴, 네모난 모자 “꼭 닮았다”…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 유물전|동아일보 (donga.com)

국립부여박물관-中 뤄양박물관
충남 부여 정림사 터에서 발굴된 인물상(왼쪽 사진)과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에서 나온 인물상. 둘 다 농관(籠冠)을 쓴 모습이 닮았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후덕한 얼굴 위로 각이 진 네모난 모자가 서로 닮았다. 중국인들의 옛 복식으로 알려진 농관(籠冠)을 쓴 인물상이다. 하나는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永寧寺), 나머지는 부여 정림사(定林寺) 터에서 나왔다. 영녕사는 6세기 초엽, 정림사는 6세기 중엽 이후 각각 건립됐다. 백제 사비시대의 왕실 사찰이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중국 뤄양(洛陽)박물관과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전시는 백제 사비도성 중심에 자리 잡아 왕실 사찰로 추정되는 정림사의 위상을 조명하고, 중국 북위시대 영녕사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뒀다.

뤄양박물관은 인물상을 비롯해 총 46점을 제공했다. 일제강점기 정림사 터를 조사한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의 발굴일지가 처음 공개된다. 내년 1월 24일까지. 041-830-8478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송고시간2015-02-06 08:49

(다퉁=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산시(山西)성의 성도인 타이위안(太原)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온통 황토 빛이었다.

 

고원에는 골이 무수히 패어 있었고, 물줄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메마르고 푸석푸석한 기운이 대지를 휘감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작은 가옥마저 없다면 사막으로 착각할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건조한 토지의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높은 건물들이 나타났다.

사실 중국에는 산시성이 두 곳 있다. 산시(山西)성과 산시(陝西)성이다. 한문을 우리말로 읽으면 '산서성'과 '섬서성'이지만, 중국어 표기법은 같다. 두 고장은 동서로 맞닿아 있으며, 고도인 시안(西安)이 성도인 산시(陝西)성이 더 이름난 편이다.

중국에는 성마다 약칭이 있는데, 중국어 발음상으로 산시(山西)성은 '진'(晋)이고 산시(陝西)성은 '친'(秦)으로 매우 비슷하다. 두 글자는 각 지역의 역사적 뿌리를 암시한다.

진(晋)나라는 기원전 8세기부터 비롯된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이다. 이때는 주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져 지방에서 새로운 세력이 발호했다. 진나라는 춘추오패의 하나로 일컬어질 만큼 상당한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는 진(秦)나라가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세우면서 끝났다. 진나라의 수도는 시안 근처의 셴양(咸陽)이었다. 이후 시안은 수많은 왕조의 본거지로 명성을 떨쳤다.

산시(山西)성은 역사의 중앙 무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 근거가 오늘날 중국 정부가 귀중한 문화유산을 뽑아 공표하는 '전국 중점문물 보호단위'다. 산시성에는 전국 중점문물 보호단위가 452개로 31개 성·시·자치구 중 가장 많다. 그에 반해 산시(陝西)성은 절반 수준인 243개에 불과하다.

또 송나라 이전에 지어진 목조건축물 중 약 70%가 산시(山西)성에 자리한다. 중국 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보려면 산시(山西)성으로 가야 하는 이유다. 거칠고 황량해 보이는 땅에 수많은 보물이 숨어 있다.

◇ 대륙의 경계에 꽃핀 불교 예술

타이위안에서 약 350㎞ 거리에 있는 다퉁(大同)은 산시성의 북단에 있는 제2의 도시다. 다퉁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네이멍구 자치구에 닿는다. 다퉁은 지리적으로 '북적'(北狄)이라고 불린 오랑캐의 영지에서 지척이었다.

선비족인 탁발씨는 북위를 건립하고 398년 다퉁을 수도로 삼기도 했다. 북위는 수나라가 전역을 통일하기 전까지 계속된 남북조시대의 한 축이었다.

서쪽에서 전래된 불교는 북위에서 융성했다. 초기에는 도교를 숭상하고 사찰과 승려를 탄압했으나, 점차 불교를 신봉했다.

북위 사람들은 독실한 불심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했다. 그중 하나가 동굴을 판 뒤 부처상을 조각한 '석굴'이었다. 중국 4대 석굴로 불리는 다퉁의 윈강(雲崗) 석굴과 뤄양의 룽먼(龍門) 석굴이 북위의 작품이었다. 뤄양은 494년부터 북위의 수도였다.

5세기 중반 북위의 종교 장관이었던 담요(曇曜)가 건의해 제작된 윈강 석굴은 형태와 크기가 다채로운 불상의 전시장이다. 1㎞ 길이의 절벽을 따라 석굴 252개, 불감 1천100여 개에 5만 개 이상의 부처가 조각돼 있다.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17m에 이르고, 작은 석상은 2㎝에 불과하다.

윈강 석굴의 주요 동굴은 1호굴부터 53호굴까지 번호로 지칭하는데, 관람객은 5∼20호굴만 둘러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청나라 때 세워진 누대를 통과해야 하는 5호굴과 6호굴이 특히 아름답고 화려하다. 비록 많은 부분이 풍화되고 훼손됐지만, 압도적인 규모와 미감에 탄성이 터진다.

다퉁 남부에 있는 쉬안쿵쓰(懸空寺)도 북위가 만든 걸작이다. 쉬안쿵쓰는 중국의 5대 명산을 뜻하는 오악 중 하나인 헝산(恒山)에 들어선 고찰이다.

명칭처럼 '하늘에 걸려 있는 절'로, 수많은 나무 기둥을 박아 낭떠러지에 건물을 지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장관'(壯觀)이라는 글자가 쓰인 바위 위에 돋을새김처럼 위태롭게 붙어 있다.

좁은 계단과 복도를 오가며 경내를 둘러볼 수 있는데, 전각의 꼭대기에 오르면 시선을 아래로 두기가 쉽지 않다. 절묘한 위치와 기이한 모양새가 조화를 이룬 절경이다.

psh59@yna.co.kr

 

 

중앙일보 입력 2015.02.10 00:21 업데이트 2015.02.10 01:12

삶과 죽음 경계에서 만났다, 1600년 전 구도자들 염원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국 돈황 막고굴의 불상 중 가장 큰 와불(臥佛)이다. 당나라 때 조성한 148호 굴에 있다. 부처의 열반상 뒤로 제자들이 조각돼 있다. 동굴 천장에는 1000개의 부처를 그린 천불상(千佛像)이 보인다.
원택 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 스님) 주최로 지난 2~6일 시안에서 돈황까지 중국 불교석굴을 순례했다. 옛날에는 꼬박 석 달이 걸렸다는 실크로드 2000㎞를 버스와 야간열차를 타고 따라갔다. 돈황의 석굴과 사막에는 목숨을 걸고서 법(法)을 구하려 했던 옛 수행자들의 간절함이 오롯이 녹아 있었다.

 

 중국 시안(西安)과 란저우(蘭州)를 거쳐 12시간 동안 야간열차를 타고 4일 돈황에 도착했다. 새벽이라 아직 캄캄했다. 동행한 동국대 황순일(불교학부) 교수는 “돈황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돈황 역사(驛舍)도 새로 지었고, 시내의 거리도 엄청나게 넓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는 중국 불교의 힘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수년 전만 해도 돈황까지 오는 열차가 없었다고 한다. 근처 유연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130㎞를 더 들어가야 할 만큼 돈황은 오지였다.

 

 돈황은 중국땅의 서쪽 끝이다. 돈황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타클라마칸은 ‘돌아올 수 없는 땅’이란 뜻이다. 실크로드의 상인들과 구법승들은 중국의 오랜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시안)에서 란저우, 돈황을 거쳐 사막을 건넌 뒤 멀리 인도와 로마까지 갔다. 그건 동·서양 문명을 잇는 거대한 징검다리였다. 불교 문명 역시 이 비단길을 따라 동서를 오갔다.

 버스는 시내에서 20㎞ 떨어진 돈황의 막고굴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뺨을 때렸다. 현지인 가이드는 “여름에는 섭씨 44도, 겨울에는 영하 24도까지 떨어진다”고 했다. 막고굴 입구로 들어서자 사막의 모래와 자갈이 뭉쳐서 만든 높다란 절벽이 나타났다. 그곳에 492개의 동굴이 있었다. 1600년 전부터 하나씩 생겨난 거대한 석굴 사원이다. 동굴마다 문이 잠겨져 있었고, 막고굴 안내인이 열쇠를 들고 다니며 안내했다.

 

4세기 북위 시대에 만든 동굴에 들어섰다. 캄캄했다. 손전등을 비추자 마술처럼 벽화가 드러났다. 사방의 벽에도, 천장에도, 바닥에도 연꽃 무늬와 부처상, 비천상 등이 즐비했다. 정면에는 붉은색과 녹색으로 채색된 불상이 앉아 있었다. 동굴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미술관이었다. 북위 시대부터 수·당·송·원·명·청나라까지 무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성된 동굴들이 사막의 절벽에 펼쳐져 있었다.

돈황 석굴 벽화에 등장하는 고구려인의 사냥 모습.

 

동굴마다 고유 번호도 있었다. 335번 굴에 들어섰다. 당나라 때 조성했다는 벽화에는 머리에 깃을 꽂은 인물이 둘 그려져 있었다. 현지인 가이드는 “저 두 사람은 고구려 왕자들이다. 복장도 고구려 양식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동굴에는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똑 닮은 벽화가 있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인물, 그 역시 고구려인이라고 했다.

 

 중국 최초의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가 막고굴에 조성한 대불(大佛)인 북대상(北大像·96호굴)은 놀랍게도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여성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 문무왕 박사는 “측천무후가 33m 높이의 여성적인 불상을 세워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과 구법승들에게 돈황은 삶과 죽음의 땅이었다. 서쪽으로 가는 이들은 목숨을 걸고 사막을 건너야 했고, 서쪽에서 오는 이들은 “이제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곳이 돈황이었다. 동행한 원택 스님은 “당시 구법승들이 남긴 기록에는 사막을 건너다가 사람의 해골이 보이면 ‘내가 가는 길이 맞구나’ 하고 오히려 이정표로 삼았다고 한다. 현장 법사도 이 길을 따라 인도로 가 불교 경전을 가져왔다. 목숨을 걸고 법을 구하던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간절했겠는가”라고 말했다.

 

 17호굴에도 들어갔다. 『육조단경 돈황본』 등 5만여 권의 불교 경전과 유서가 발견돼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곳이다. 감회가 남달랐다. 신라 승려 혜초의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도 1900년에 이 동굴에서 나왔다.

 막고굴에서 나와 월아천으로 갔다. 사막과 오아시스가 펼쳐졌다. 모래바람이 불었다. 끝없는 모래 언덕, 바람이 불면 모래가 운다 하여 붙은 이름이 명사산(鳴砂山)이다. 그 울음을 뚫고서 구법승들은 인도를 향해 발을 뗐다. 저 모래 어딘가 그들이 밟았던 발자국이 있으리라. 그곳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돈황=글·사진 백성호 기자

 

 

2014.03.11 22:04

"네이멍구자치구 1500년 전 북위시대 귀족 무덤 발견"- 헤럴드경제 (heraldcorp.com)

[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ㆍ이준용 인턴기자]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에서 1500년 전 북위시대 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다. 이 유적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 당시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왕(新華網)은 9일(현지시간) 네이멍구자치구 시린궈러(錫林郭勒)초원에서 1500여년전 북방 민족 출신 귀족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목관과 유골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고분지역에서 발견된 이 목관의 길이는 2.7m, 넓이는 1.2m, 높이는 1.4m였으며 소나무재질로 만들어졌다. 관의 머리쪽은 비단으로 덮여 있었고 외부는 금으로 장식돼 있었으며 사람 형상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고 신화왕은 전했다.


관 속에 위치한 유골 주변은 금색의 비단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유골은 금속제 띠를 차고 있었다. 또한 벨트와 검, 토기 및 각종 장신구들이 함께 출토돼 신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고분 위치와 유물들을 통해 무덤의 주인이 약 1500여년 전 북위시대 귀족의 것으로 추정했으며 어떤 민족이었는지, 정확한 신분과 성별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안용더(安泳鍀) 네이멍구자치구 문화재관리국 국장은 “이 무덤은 네이멍구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이전 중국에서 발견된 북위시대 유물 중 보기 드물 정도로 보존이 잘 됐다”며 “유물을 통해 북위시대의 장례, 의복문화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 유적은 지난해 10월 중순 발견됐다. 그러나 도굴 위험 때문에 11월 시린궈러 문화재관리국으로 옮겨졌다.
ygmoon@heraldcorp.com
 
 
 

조선상고사

선비족 모용씨의 강성

선비족은 항상 고구려에 복속했었다. 용맹한 단석괴도 명림답부의 통제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발기의 난 때문에 요동을 잃고 약해지자, 선비족은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붙었다. 후한 말기에 원소와 조조가 대립할 때, 선비족과 오환족은 원소에게 붙었다. 원소가 망한 뒤에 조조는 서기 207년 7월의 장마를 이용해서, 노룡새1) 500리를 몰래 나와 선비족과 오환족을 불시에 공격해 그들의 소굴을 파괴했다. 이로써 오환족은 쇠망했다. 선비족은 나중에 가비능이란 자가 나타나자 다시 강성해져서 후한의 유주와 병주를 자주 침략했다. 이에 후한 유주자사 왕웅이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하자, 선비족은 다시 쇠약해졌다.

서기 250년 무렵, 선비족에서는 우문씨·모용씨·단씨·탁발씨라는 4부가 패권을 다투었다. 그중 모용씨에서 모용외란 인물이 용맹하고 명석하여 이 부족이 가장 강성해졌다. 이들은 창려 대극성 즉 지금의 동몽골 특묵우익 부근을 거점으로 사방을 약탈했다. 당시 중국의 위·촉·오 삼국이 다 망하고 진()나라 사마씨가 중국을 통일했지만, 모용외에게 자주 패배하는 바람에 요서 일대가 항상 소란스러웠다. 어떤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거점인 창려가 지금의 난주 부근이었다고 말하지만, 《진서》 〈무제 본기〉에서 “모용외가 창려를 침략했다”고 한 것을 보면 모용씨의 창려는 지금의 난주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모용씨의 창려는 훗날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이 도읍을 둔 용성()과 멀지 않은 곳이라고 봐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비족 모용씨의 강성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선비족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나라의 중간에 선 탓에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나라를 도우면 한나라가 이기는 식으로 양국의 승패를 좌우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선비()라 불린 종족이다. 선비족이 조선의 서북쪽인 몽골 지역에 거주하다가 흉노족 모둔에게 패해 본거지를 잃고 외흥안령·내흥안령1) 부근으로 이주했다는 점은 제2편 제3장(제3편 제2장 조선 분립 이후의 신조선의 착각인 듯하다_옮긴이)에서 서술했다.

그 뒤 선비족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여전히 선비라고 불렸고, 또 하나는 오환()이라고 불렸다. 둘은 언어나 풍속이 거의 동일했다. 이들은 짐승 고기를 먹고 짐승 가죽을 입으며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했다. 각각 읍락에 나뉘어 살았는데, 전체 부족을 관할하는 대인()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이 있었다. 그들은 대인이나 부대인의 명칭으로 자기네 성()을 만들었다. 그들은 투쟁을 즐긴 탓에 젊은 사람을 존대하고 늙은 사람을 천대했다.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이 생기면 나무에 새긴 신표로 각 집단을 소집했다. 모든 소송은 대인이 결정했고, 지는 사람은 소나 양으로 배상했다.

조선이 모둔에게 패한 뒤, 선비와 오환은 조선에 복속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 열국을 침략했다. 고구려 초에 유류왕은 이 점을 염려해서 부분노의 전략에 따라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그런 뒤 왕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는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부분노가 지휘하는 부대는 샛길로 은밀히 선비국의 후면으로 진입했다. 왕이 먼저 전투를 벌이다가 거짓으로 패주했다. 그러자 선비는 소굴을 비우고 급히 추격했다. 이 틈에 부분노가 소굴을 기습적으로 점령한 뒤 왕의 군대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여 선비의 항복을 받고 속국으로 삼았다.

오환의 경우에는, 한무제가 위우거를 멸망시킨 뒤 이들을 권유하여 지금의 직예성·산서성 등지인 우북평·어양·상곡·안문()·대군 일대에 정착시킨 다음에 흉노족에 대한 정찰을 맡도록 했다. 그 뒤 소제(한나라 소제_옮긴이) 때에 오환이 날로 번성하자, 그 당시 한나라 권력자인 곽광은 이들이 후일에 걱정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이에 오환이 과거에 흉노족 모둔에게 참혹하게 패했던 역사를 들춰내어 오환으로 하여금 모둔의 무덤을 파헤쳐 지난날의 원수를 보복하라고 부추겼다. 그러자 흉노의 호연제 선우는 대노해서 정예 기병 2만으로 오환을 쳤다. 오환이 한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한나라는 3만 병력을 보내 구조한다 하고는 그냥 멀리서 관망했다. 그러다가 흉노가 철군하자 오히려 오환을 습격하여 무수한 학살을 자행했다. 이로써 오환은 쇠약해져서, 다시는 한나라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 왕망 때에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도록 하고 그들의 처자를 각 주군()에 볼모로 보냈다. 그런 뒤 ‘흉노를 전멸하기 전에는 처자들이 귀환할 수 없다’고 압박하자, 오환에는 이에 원한을 품고 도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자 왕망은 볼모로 잡은 처자들을 학살했다. 이 참혹함이 매우 심했다.

왕망이 망하고 중국이 혼란스러워지자, 고구려 모본왕이 이를 틈타 요동을 회복한 뒤 양평성의 명칭을 예전의 고구려 명칭인 오열홀로 고쳤다. 그러고는 선비와 오환을 규합하여 중국을 자주 공격했다. 후한()의 광무제가 한나라를 중흥한 뒤, 요동군을 지금의 난주로 옮기고 고구려를 막기 위해 채동()2)을 요동태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채동은 전쟁에서 자주 불리해지자, 선비 추장 편하에게 재물을 주고 오환 추장 흠지분을 살해하도록 했다. 그러자 모본왕이 선비와 오환을 다시 타일러 공동작전을 펴니, 한나라의 전략이 다시 궁색해졌다. 이에 한나라는 매년 2억 7천만 전()을 고구려·선비·오환 3국에 공물로 납부하기로 조약을 맺고 휴전을 했다.

한나라를 이긴 뒤로 매우 교만해진 모본왕은 아플 때는 사람을 안석(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_옮긴이)으로 삼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삼고 그 사람이 꼼짝하면 목을 베어 죽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시종인 두노가 왕의 베개가 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친구 앞에서 울며 사정을 하소연하니, 친구는 “나를 보살펴주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했다. 지금 임금은 포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다. 너는 그를 죽여라”고 했다. 이에 두노는 칼을 품고 있다가 왕을 찔러 죽였다. 모본왕이 피살된 뒤, 신하들은 모본왕의 태자가 못나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태조를 맞이해서 왕으로 세웠다.

〈고구려 본기〉는 대주류왕 편 이후로 분명히 연대가 삭감됐다. 참고로 쓸 만한 자료는 모본왕 편 이후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연도 삭감의 흔적을 은닉하기 위한 허위의 내용이다. 모본왕은 대주류왕의 증손이나 4대손 정도일 것이다. 또 모본왕 때 요동을 회복했다는 기록이 〈고구려 본기〉에는 없지만, 요서의 10성()을 수축한 태조대왕 3년 이전에 요동을 한 차례 회복했음이 명백하다. 또 《후한서》 〈동이 열전〉에서는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약탈하자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뢰로 회유하니, 다시 머리를 숙였다”3)고 했지만, 《후한서》 〈채동 열전〉에서는 해마다 전() 2억 7천만을 주었다고 했다. 이는 세공()이지, 은혜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비족 대 고구려의 관계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서기 197년 발기의 반란 이후부터 서기 370년 고국원왕의 말년까지는 고구려의 중쇠시대였다. 하지만 미천왕 시대는 이 시기에서 가장 나은 시기였다.

필자는 예전에 환인현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때 그곳의 문인이자 만주족인 왕자평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고구려 때 우굴로란 대왕이 있었다. 신분이 낮을 때에 처지가 불우해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하면서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다.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을 우굴로(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라고 하는 것은 그 대왕의 이름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렇게 걸식할 정도로 곤궁하면서도 대왕은 요동을 경영할 뜻을 늘 품고 살았다. 그래서 요동 각지에서 걸식할 때에, 산천의 형세와 도로의 원근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갖고 다니며 길가에 뿌렸다. 자신이 다닌 길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지금도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다.”

우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는 을불뿐이므로, 우굴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의 소싯적 이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천왕은 서기 300년부터 331년까지 31년간 재위한 제왕이다. 그 31년간의 역사는 선비족 모용씨와 혈전을 벌인 역사다. 축소된 〈고구려 본기〉와 과장된 《진서》를 종합한 뒤 그중에서 진실에 가까운 것을 골라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현도군의 회복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 또다시 한나라의 소유가 됐다는 점은 앞에서 서술했다. 즉위한 이듬해에 현도군을 공격한 미천왕은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평양에 옮기고, 재위 16년에 마침내 현도성을 점령했다.

2) 낙랑군의 회복

한무제 때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은 대대로 이동이 매우 잦았다. 대체로 요동 땅에 잠정적으로 설치한 것으로서, 평양의 낙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고구려 본기〉 동천왕 편에 나오듯, 위나라 군대가 낙랑으로 물러날 때에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평양 천도 이후에도 위나라·진()나라의 낙랑태수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중국의 낙랑이 조선의 평양인 남낙랑이었다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도읍인 동시에 중국 낙랑군의 군청 소재지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모순적인 역사적 사실이 있었겠는가.

미천왕이 낙랑을 점령한 것은 재위 14년째인 서기 313년1)이었다. 당시 진나라 사람인 장통이 낙랑·대방 두 군(대방도 요동에 잠정적으로 설치된 군이다. 장단이나 봉산의 ‘대방국’과는 다르다)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미천왕이 장통을 공격하자, 항거할 힘이 없는 장통은 모용외의 부장인 낙랑왕 모용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모용준은 구원하러 나왔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모용준은 장통을 꾀어 천여 호의 민가를 데리고 모용외에게 투항하도록 했다. 이에 모용외는 류성() 즉 지금의 금주() 등지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에 임명했다. 한편,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소유가 됐다.

3) 요동 승전

요동군청 소재지는 양평 즉 지금의 요양이었다. 《진서》에서는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배하자 화친을 구걸했다”고 했지만, 《양서》에서는 “을불이 요동을 자주 침략했다. 모용외가 막을 수 없었다”라고 하여 모용외가 미천왕에게 항상 패배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두 기록이 상호 모순된다.

《진서》는 당태종 때 지어진 책이다. 당태종은 요동이 중국의 요동이었던 것처럼 위조함으로써 자국 신민()을 고무하고 고구려에 대한 전쟁 열기를 일으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이전 왕조의 역사서인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 등에 적힌 조선 관련 기사, 특히 고구려 관련 기사를 상당 부분 조작했다. 이 정도였으니 자기 시대에 편찬한 《진서》는 어떠했겠는가. 따라서 《양서》에 기록된 내용이 진실일 것이다. 당시는 현도와 낙랑이 정복된 뒤였으니, 겨우 몇 개 현()만 남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정도로만 언급한다.

4) 극성 전투

서기 320년, 미천왕은 선비족 우문씨·단씨 및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와 연합하여 모용외의 서울인 극성을 쳤다. 그러자 모용외는 네 나라를 이간시켰다. 이 때문에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나고, 우문씨와 최비는 모용외와 싸우다가 대패했다. 이에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는 사성()을 지키다가 모용외의 장수인 장통에게 패했다. 이상은 《진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사실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여노자는 고노자()의 오자인 것 같지만, 모용외를 여러 차례 격파한 명장인 고노자가 장통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은 의심스럽다. 또 고노자가 봉상왕 5년 이후로 〈고구려 본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가 그 즈음에 사망했다는 뜻인데, 그런 그가 근 40년 만에 갑자기 출현하는 것은 이상하다. 따라서 위의 내용은 조작된 기록일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광개태왕의 환도성 천도와 선비족 정복

태왕은 야심이 넘치고 군사전략이 출중한 동시에, 동족에 대한 사랑도 많았다. 백제를 공격한 것도 백제가 일본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지, 영토를 탈취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태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방의 강력한 선비족을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성과 직예성 등지를 소유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남방과의 전쟁은 소극적 의미밖에 없었고, 북방과의 전쟁만이 적극적 의미를 띠었다.

태왕은 지금의 개평 부근에 있었던 제5도읍인 안시성으로 천도한 뒤, 선비족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하면서 항상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선비족 군대를 기습적으로 격파했다. 요동 땅에서부터 지금의 영평부인 요서까지 차지하니,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던 후연왕 모용수도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은 후연왕 성()과 희() 같은 중국 역사상의 대()영웅들도 다들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리의 영토를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그 존호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그런데 《진서》에서는 “고구려왕이 연나라(후연_옮긴이) 평주의 숙군성을 침략하자 평주자사 모용귀가 도주했다”라고 한 것을 빼고, 그 외에는 항상 후연이 승리한 것처럼 기록했다. 왜 이랬을까? 《춘추》에서 북적()이 위나라를 멸망시킨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처럼,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숨기는 것은 중국 사관들이 습성이다. 사실, 모용씨의 후연이 망하고 탁발씨의 북위가 강해진 것도 태왕이 후연을 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또 동진의 유유()가 일어나 선비족과 강족을 꺾고 또 유송()의 고조가 황제가 될 기반을 닦은 것도 태왕이 후연을 친 것과 간접적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완고한 습성을 고수하느라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서기 5세기 초반에 중국 정세가 바뀐 실제 원인이 은폐된 것이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태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왕이 작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서》보다 더 신뢰성이 높다. 그런데 선비족 정벌에 관한 내용이 한 구절도 기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예전에 태왕의 비석을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간 적이 있다. 그곳 여관에서 만주족인 영자평이란 소년을 만났다. 그와의 필담에서 나온 비석에 관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비석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영희(만주족)가 이것을 발견했다. 그 비문에서 고구려가 영토를 빼앗은 부분은 모두 다 칼과 도끼로 도려내져 있었다. 그래서 식별 가능한 문구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뒤 일본인이 이것을 차지한 뒤 영리를 위해 비문을 탁본해서 팔았다. 이때 문구가 깎인 곳을 석회로 바르다 보니, 더욱 더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내용이 첨부됐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태왕이 선비족을 정복한 전공이 비문에 없는 것은 그런 내용이 삭제됐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태왕이 평주를 함락한 뒤 선비족의 쇠락을 틈타 계속 진격했다면, 태왕이 개척한 영토는 그 존호 이상으로 넓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후연 신하인 풍발이 후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후연에서 벼슬하던 고구려왕 후손 고운을 북연의 천왕으로 옹립하고 태왕에게 보고했을 때였다. 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면서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종족 간의 도리를 정하고 전쟁을 그쳤다. 이로써 태왕의 서진정책은 종언을 고했다. 태왕은 백제 근구수왕이 즉위하기 전년인 374년에 태어나서 391년에 즉위하고 412년에 죽었다. 향년 39세였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의 비문은 지금의 봉천성 집안현 북쪽 2리쯤에 있다. 높이는 약 21척이다. 서기 ○○○○년에 만주족인 영희가 발견해서(영희가 처음 탁본을 입수한 것은 1903년이다) 탁본해보니 비문에 빠진 글자가 많았다. 그 뒤 일본인이 비석을 입수한 뒤 탁본하여 판매했다. 이때는 빠진 글자를 석회로 발라 덧붙였다. 학자들은 그것의 실제 모습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개태왕의 환도성 천도와 선비족 정복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고구려 금관이 선비족에 미친 영향

그림 21, 22, 22-1. 북표현 서관영자 북연 풍소불 무덤 출토 금제관식

평양성시기 고구려의 금관은 주변민족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령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북연 풍소불() 무덤 출토의 금제관식 및 금제관(그림 21, 22, 22-1, 23)과 내몽고자치구 달무기() 출토의 금제관식이다.

요령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석곽묘는 북연의 풍소불 무덤이라고 밝혀졌다.1) 풍소불은 오호십육국시대 후연의 모용운을 이어 왕위에 오른 천왕 풍발의 동생이다.2) 광개토대왕 17(408)년에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후연왕 모용운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어 화친을 맺었다.3)

모용운은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성이 고()씨였는데,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가 태자로 있을 때 그를 양자로 삼아 모용씨 성을 하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그를 종족의 예로 대했던 것이며, 모용운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처럼 북연이 갖는 고구려 혈통의 내용과 풍소불 무덤이 위치한 지역이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점을 볼 때,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이 한민족의 문화적 성격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발굴자들도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철로 만든 갑편과 말갑옷 조각 및 금동으로 만든 등자(그림 24)의 경우는 그 형태가 중국의 것과 달라 중국의 유물로 편입시키지 못하고 있다.4)

철로 만든 갑옷 조각은 그 형태에서 긴 장방형과 아래가 둥근 장방형을 주된 양식으로 하고 있는데, 이 같은 양식은 고조선과 이를 계승한 여러 나라 갑옷의 고유양식이다.

그림 23. 북표현 서관영자 북연 풍소불 무덤 출토 금제관

그림 24. 풍소물 무덤 출토 금동등자

 

또한 말갑옷은 한민족이 중국이나 북방지역보다 약 2세기 정도 앞섰기5) 때문에 이는 고구려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철투구의 경우도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투구 전체를 주물을 부어 만든 것을 사용했고,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것처럼 장방형의 갑옷조각을 연결하여 만든 철투구는 사용하지 않았다. 등자의 경우도 발굴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출토된 등자 가운데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이른 연대의 것이라고 하였는데 중국의 등자 사용연대가 고구려보다 늦기 때문이다.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등자는 고구려 등자의 고유한 양식을 보인다.6) 그 밖에 은과 동으로 만든 허리띠 역시 끝모습이 나뭇잎모양으로 된 한민족의 고유양식을 나타낸다.

이상의 분석된 내용을 근거로, 북연의 문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았거나 고구려의 것을 수입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금제관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나뭇잎모양의 장식이 달린 금제관식은 고구려의 것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 서술한 요령성 북표현 방신촌에서 출토된 금으로 만든 꽃가지모양의 장식과 유사한 관식이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되었다. 이 관식이 금으로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소머리 위에 뿔처럼 뻗어나간 줄기의 끝에 새순 또는 움모양의 나뭇잎이 줄기 끝에 장식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말머리 위에 뿔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고 끝에 새순 또는 움모양의 나뭇잎이 장식되어 있다(그림 25, 26).

발굴자들은 이 유물이 북조시대(420~588년)에 속하는 선비족의 것이라고 했다.7) 이 유물은 북표현 방신촌에서 출토된 관식과 유사한 형식을 하고 있어, 선비족이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한민족이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생산하고 사용한 연대는 고조선시대부터이며,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장식단추나 원형 또는 나뭇잎모양의 장식기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림 25, 26. 내몽고자치구 달무기 유적 출토 금제관식

따라서 선비족에게 갑자기 출현한 이 같은 관식은 고구려로부터의 영향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의 관식은 나무줄기를 표현했으나 이 달무기의 관식은 소와 사슴의 뿔을 묘사한 모습이며 나뭇잎모양의 장식도 모두 위로 향해 있는 등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선비족의 양식을 보여준다. 선비족은 고구려 초기에는 중국에 의한 호시()나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통하여 고구려와 접촉이 비교적 활발했다.

호시의 상황은 『후한서』 「오환선비동이전」에 따르면, 동한 광무제 건무( ) 25(49)년 이후 명제(, 57년) · 장제(, 76년) · 화제(, 89~104년)시기에 오환과 선비족은 장기적으로 영성()에서 호시를 하였다. 이 영성은 상곡()에 위치하는데 상곡은 지금의 하북성 선화() 서북쪽으로 한()시대에 유주()에 속하는 지역이다. 이를 확인시켜주는 실제 예로 달무기에 근접한 내몽고자치구 화림격이현에 위치한 동한 고분벽화의 ‘영성도()’에 ‘영시중()’이라는 방제()가 보이는데8) 이는 동한이 영성에 ‘호시’를 설치하고 북방민족들과의 무역과 왕래의 장소로 삼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본왕 때부터 미천왕때까지 줄곧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였는데, 동한 광무제에서 화제에 이르는 시기 유주지역에 여러 차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고구려가 요동태수와 화친을 하여 국경을 정상화시키거나 요동태수에게 패하는 등 동한이 영성에 호시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시기로 호시를 통하여 중국과 선비족 및 고구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우호적인 경우를 보기로 들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태조왕 69(122)년에 고구려는 선비의 군사 8천여 명을 데리고 중국의 요동지역을 공격하는 등 우호적인 접촉을 갖기도 하였다. 이후 3세기 말 무렵에 이르러 중국의 정권 내부가 혼란한 틈을 타서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하던 선비는 성장을 하게 되며, 줄곧 고구려를 침략하거나 화맹을 맺기도 했다. 이 같은 끊임없는 고구려와 선비의 접촉과 충돌은 선비가 고구려의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을 것이다.

따라서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은 아래 부분은 선비족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윗부분은 고구려의 고유양식인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구나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된 금제관식과 북연의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은 모두 연대가 5~6세기에 걸쳐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금제관식인 요령성 북표현 방신촌 출토의 금제관식과 요령성 조양현 십이태향 원태자촌 출토 금제관식 그리고 요령성 조양 전초구 출토의 금제관식은 이보다 약 2~3세기 정도 앞서 출현한 것이므로, 달무기와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에 시간적으로 충분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령성 출토 금제관식의 국적 재검토에서 서술했듯이 중국학자들은 방신촌 무덤을 처음 발굴했을 당시에는 북연()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다. 발굴자들은 이 무덤의 국적을 선비족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이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중국학자들은 이 무덤을 다시 북연의 무덤이라고 명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기 이전 준비과정에 있을 때였다. 중국학자들이 방신촌을 중심하여 북표와 조양 등지의 문화가 고구려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모를리 없다. 앞의 첫 페이지에서 설명했듯이 그들은 이 지역에 대한 유물 분석에서 고구려적 특징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고학의 유물특징에서 뿐만 아니라 문헌자료에 존재하는 북연의 종족성격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삼연이 위치하고 있던 지역이 고대 한민족의 거주지역이었던 점도 잘 알고 있다. 삼연()은 전연()과 후연(), 북연()으로 전연과 후연은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지만 북연은 고구려 사람이 세운 나라라는 점이다. 북연은 407~436년에 존속했던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이 후연()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운 나라로 광개토대왕은 사신을 보내 후연 왕 모용운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어 화친을 맺기도 했었다. 따라서 북연문화에는 고조선과 이를 계승한 고구려문화의 특징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중국학자들은 오늘날 만주가 그들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고대부터의 연고권을 주장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중국은 고대부터 천하는 중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천하()사상이 그들 정치사상의 근간을 차지해왔다. 따라서 한국고대의 역사도 그러한 정치와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중국은 고대부터 다민족국가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어는 민족이나 종족이든 중국 영토 안에 거주한 사람들은 모두 중국의 구성요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천하()사상의 또 다른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중국학자들은 역사를 민족 단위가 아닌 영역 중심으로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만주역사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어느 민족에 역사가 있었든 현재는 중국의 영토이므로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후 동북공정이 시작되면서 보다 노골화되어 아예 고조선 이전과 고조선 · 고구려 · 발해의 역사는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으로 서술되었다. 이것이 중국학자들이 방신촌 무덤을 비롯한 이 지역 유적과 유물들의 국적을 선비족에서 북연으로 수정한 까닭일 것이다.

한국학자들은 이러한 점들은 소홀히 하고 중국학자들이 선비족 무덤이라고 한 내용을 비판과 분석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 한국 고대 문화의 다양한 내용들이 삼연()문화 즉 북방문화 또는 선비족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관련성으로 무분별하게 연결시켜졌다. 한반도와 만주지역 무덤들에서 출토되어지는 모든 유물들의 통시적인 양식사를 고찰하지 않은 채 중국학자들이 북연 또는 선비족 무덤이라고 한 내용을 비판과 분석 없이 받아들여, 한반도 남부와 만주 집안지역의 한국 고대 문화의 다양한 내용들이 삼연()문화 즉 북방문화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관련성으로 무분별하게 연결시켜졌다.

우리 문화를 보고도 우리문화인 줄 모르고 남의 문화라고 해놓고 거기서 다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 민족문화의 원류를 한결같이 밖에서 찾아야 하는지 걱정이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첫째는 동천왕이 조양으로 천도한 평양성시기에 요령성의 북표현 방신촌과 원태자촌 및 전초구 출토의 금제관식들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방신촌에서 출토된 금으로 만든 관테둘레장식은 앞과 뒤로 금제관식을 꽂아 만든 금관양식이 당시 고구려 고유의 관장식 기법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특히 금제관식에 보이는 달개장식과 불꽃문양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관모장식의 특징으로 독창적 양식으로 발전되어 이웃나라에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금관이 선비족에 미친 영향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2013. 11. 29., 박선희)

 

 

▒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8. 정복왕조 출현의 전조(前兆): 흉노의 쇠퇴와 만주 선비족의 등장

  •  홍원탁
  •  승인 2005.02.17 00:00

Fall of Xiong-nu and Rise of Manchurian Nomad Xianbei Replacing Xiong-nu

화평을 미끼로 한족들로부터 온갖 재화를 갈취 해 오던 몽골고원의 흉노족이 내분으로 몰락하고, 요서 초원의 소위 동호(東胡)라는 선비(鮮卑)족이 대체세력으로 나타나, 중국대륙에 본격적인 이민족 정복왕조의 등장을 예고하게 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정복왕조 출현의 전조(前兆): 흉노의 쇠퇴와 만주 선비족의 등장

洪元卓 (서울대 교수)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

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과 북으로 양분되자, 조정관료인 장궁(臧宮)은 흉노의 약세를 틈타 “고구려,” 오환, 및 선비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었다. 1 당시 광무제는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신조를 강하게 피력했다. 49년, 광무제는 푸짐한 선물과 국경무역을 제공해 선비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명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58년 이후에 후한 조정이 선비 부족장들에게 정기적으로 갖다 바친 금액은 년간 2억 7000만냥에 달했는데, 그 규모는 같은 기간 동안 남흉노에게 바친 것의 세배에 달하였다. 2

드디어 화제(和帝, 88-105) 즉위 직후인 89-93년 기간 중, 선비-남흉노-후한의 연합군이 오르콘 지역의 북흉노를 섬멸했다 살아남은 흉노 중 일부는, 몽골고원으로부터 계속 서쪽으로 달아나 발카하쉬와 아랄 초원지대를 경유해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에 까지 이르렀다. 이들 서방으로 달아난 흉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그 후손들이 “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374년경에 볼가강과 돈강을 건너 로마제국을 침공했다 441년부터 아틸라의 지휘를 받아 유럽대륙을 유린 하다가, 아틸라가 453년에 죽자, 훈족은 러시아 초원지대로 철수했다. 

선사시대에 인도 북부와 이란에 정착했던 아리안족은 서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계곡으로 내려와 모헨조다로의 드라비다 문명을 파괴해 버렸다 그 잔혹상은 옛 인도의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 선명하게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7세기-3세기 기간 중에는 스키타이라는 이름으로, 또 그 이후에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남부 러시아와 시베리아 서부의 목초지대를 점거하였다. 흉노족부터 시작해 후대에 몽골고원의 투르크와 몽골족들이 계속 서방으로 밀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아리안족과의 혼혈이 심화되었다. 난폭한 관행 탓에 역사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들 보다 유전적 유동성이 훨씬 높았다. 3  기하학적 형상으로 정형화된 스키타이 동물 예술품은, 동물형상을 주제로 정형화된 오르도스 흉노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모두 신변장식용이었다 스키타이족과 흉노족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고기만을 먹고, 천막 속의 모피 위에서 잠을 자며, 술잔으로 쓰기 위해 적의 두개골을 사냥했다.  

만주 서부의 선비족들은 흉노족의 내란 덕분에 독립을 되찾고, 잔존 북흉노족의 대다수와 그들 영토를 흡수 병합하였다. 퉁구스족에 비해 선비족의 문화가 몽골(혹은 투르크)적인 것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비족의 전통은 흉노족과는 달리 선출된 지도자가 제한된 지휘권만을 갖는 약한 부족연맹체였다. 크고 적은 부족장들은 이따금 개성이 강한 지도자의 영도 하에 단합을 하기도 하지만, 흔히 이들 작은 부족들은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제가끔 중국 왕조의 조공체제에 개별적으로 가입했다. 통치권이 세습되고 중앙집권화된 흉노족의 체제와는 달리, 선비족은 세습보다는 평등적 정치체제를 강조하였다. 북흉노의 쇠망이 묵특에게 정복당했던 선비 세력의 재기를 가능케 한 것이다. 4

후한 조정은 중소 선비 부족장들과 기꺼이 직접 거래를 했다. 많은 부족장들에게 그럴듯한 칭호를 수여하고, 각종 물자를 제공 함으로서, 유목민 부족들의 분열을 조장하려 했다. 변경지역의 한족 관리들은 중소 부족장들에게 지위에 걸맞은 칭호와 선물은 물론, 교역을 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면서, 그들이 개별적으로 조공체제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질투심이 강한 수많은 부족장들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조정의 보조금을 얻을 수 있도록 개별적인 거래를 하는 전략을 구사 해, 선비족 중소 부족장들 스스로가 초원지대의 단결과 중앙집권화를 반대하게끔 유도했던 것이다. 5 

Barfield (1989: 85)에 의하면, 후한 시대인 AD 108년 당시, 선비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중소 부족들은 120 개에 달했으나, 흉노의 이름으로 기록된 부족들의 수는 초원지역 전체를 통해 20여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출된 선비족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 부족이 통합된 군사작전을 벌려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 부족간의 단합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당시 선비족이 채택한 전략은, 흉노와 마찬가지로, 중국본토를 야만적으로 습격해서 약탈을 한 다음 초원지대로 퇴각을 하는 것이다 보상금 혹은 교역량을 크게 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를 반복하고, 수적인 열세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중국본토를 점령하지 않았다.

공세적인 군사전략은 무관과 상인들의 출세 기회를 확대했기 때문에, 유교전통으로 훈련된 중국 조정의 문관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Jagchid and Symons, 1989, p. 54). 문신들은 진시황과 한무제가, 쉽게 평정 할 수도 없고, 중국에 편입시킬 수도 없는 땅을 놓고 흉노와 벌인 전쟁을 아주 졸렬한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조공 형식으로 포장한 유화정책을 통해 화평과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문관들은, 유목민들과 끊임없이 싸우기 보다는 그들에게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좋은 전략이라고 믿었다. 6  그러나 AD 300년 이후에 북중국을 정복한 만주 출신 정복왕조들이 채택한 전략은, 한족 조정의 전략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몽골고원의 투르코-몽골 유목민들을 아주 힘들게 만들었다.  

한족 왕조들이 흉노에 이어 선비 등 유목민들과 대치한 시기(BC 206-AD 316)는 로마제국이 게르만 민족과 대치하고 있던 시기와 대충 일치했다(BC 272-AD 395). 실크로드로부터 물자를 갈취하는 흉노를 좇아내기 위해, 후한(後漢) 조정은 반초(班超)와 그의 아들 반용(班勇)을 파견하여 94-127년 기간 중 타림분지 전체를 정복했다. 그 결과, 서역으로 가는 길이 열려 불교와 그레코-헬레니즘 양식의 간다라 예술이 전파되었고, 유라시안 대륙의 서쪽 끝과의 교류도 증진되었다.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로마제국은 소빙하기 (小氷河期, BC 400-AD 300) 전반을 통해 번영을 구가했으나, 4세기, 지구 온난화 회복시작에 동반된 가뭄은 온갖 종류의 북방 야만족들이 준동하게 만들었다. 4세기는 북중국에서 5호16국시대(304-439)가 시작되는 시기와 일치하며, 유럽에서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374-453)과 일치한다. 로마 사람들한테 흉노 노릇을 하고 있던 게르만족들은, 4세기 초, 란인강으로부터 흑해에 걸쳐 전 로마제국 북방 국경선에 포진을 하고 있었다. 374년 이후의 훈족 침입은 연쇄반응을 촉발했다 미친 듯이 쫓는 훈족과 정신 없이 쫓기는 게르만족들에 의해 유럽전체가 황폐화 되었다.

Lamb(1995: 160-1)은 “우리가 카스피해 수면 높이의 변화와, 간헐적 강과 호수, 그리고 신강과 중앙아시아의 유기되어 버려진 거주지들에 대한 연구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4세기에 들어 한발이 극에 달해 실크로드 통행은 정지 상태에 빠졌었다 이러한 증거에 비추어 보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생활터전인 목초지대를 휩쓴 가뭄이, 야만 유목민족들과 그들에 쫓겨 떠돌이 신세가 된 종족들로 하여금, 서쪽 유럽대륙으로 밀려가는 연쇄반응을 촉발 해, 마침내는 로마제국을 쇠퇴시켰다는 Huntington의 (1907년)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8 (2005. 2. 12.)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Jagchid and Symons (1989: 63) 참조.  

後漢書 卷十八 列傳第八 … 後匈奴飢疫 自相分爭… 建武 二十七年 宮…上書曰 … 諭告高句麗烏桓鮮卑攻其左 發河西四郡 … 如此 北虜之滅 

2. Twitchet and Loewe (1986: 443)을 참조. 이 모든 비용은 산동과 강소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Jagchid and Symons (1989: 33)을 참조.

3.  Cavalli-Sforza (2000: 82)  

4. Barfield (1989: 86-87) 참조. 후한서(後漢書)는 AD 177년에 올려진 상소문의, “(북)흉노가 달아 난 이후, 선비 무리는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흉노가 차지하고 있던 땅을 점거하고, 1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떠들어 대는데, 정제된 금속과 연철(鍊鐵)도 이 선비 반도들 손에 들어가 있습니다. 한족 이탈자들은 선비의 땅으로 달아나 그들의 참모 노릇을 합니다. 선비족의 무기는 옛 흉노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말들은 더욱 빨라졌습니다”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45) 참조. 후한서 185년 조에는,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선비족들이 걸핏하면 국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평화스럽게 지내는 해가 거의 없다. 그자들은 중국의 힘을 존경하거나, 중국의 관용을 고맙게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국경시장에서 교역을 할 때만 진귀한 중국 재화들을 값싸게 얻기 위해 복종을 하는 체 하며 나타난다 그들은 교역으로부터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손에 넣자마자 본성을 나타내 해를 끼친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46) 참조.

後漢書 卷九十 烏桓鮮卑列傳第八十 … 自匈奴遁逃 鮮卑强盛 據其故地 稱兵十萬 … 精金良鐵 皆爲賊有 漢人逋逃 爲之謀主 兵利馬疾 過於匈奴 
後漢書 卷四十八 列傳第三十八 鮮卑隔在漠北 …故數犯障塞… 唯至互市 乃來靡服 苟欲中國珍貨… 計獲事足 旋踵爲害 

5.  Barfield (1989: 246-249) 참조. Jagchid and Symons(1989: 24-51)에 의하면, 한족 조정은 때로는 이간질을 하여 선비 부족장들 사이에 싸움을 부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유목민 지도자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국경에 교역시장을 제공해 평화를 샀다.

漢書 卷九十四下 匈奴傳第六 十四下 莽將嚴尤諫曰 …中國罷耗…而天下稱武 是爲下

6. Barfield (1989: 246-249)

홍원탁 wthong@wontockhong.pe.kr

 

9. 2원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북위(北魏,) 출현의 예고

  •  홍원탁
  •  승인 2005.02.24 00:00

Commencing the Dual System: the Yan Kingdom of Mu-rong Xianbei

 

4세기 5호16국 시대에 모용외와 그 후계자들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정주 (漢族) 농민을 다스리는 관료적 행정조직과 (鮮卑族) 유목민을 다스리는 부족적 군사조직을 분리한 2원적(二元的) 통치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웠다. 요서 초원지대는 부족 전통에 따라 군사적으로 조직을 하고, 요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도시민들은 중국식으로 문관이 다스리는 2원제도를 운용했다 북위, 요, 금, 원, 청 등 후대의 모든 이민족 정복왕조들은 모용선비(慕容鮮卑)족이 창안한 2원제도를 개선 발전시켜 중국 대륙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모용선비 전연은, 359년에 중원을 점령한 후, 특이하게 빠른 속도로 중국화 되었다. 360년, 150만 명의 한족(漢族) 오합지졸을 징집해 남쪽의 동진(東晉)과 서쪽의 전진(前秦)을 정복하려 했다 370년, 전연은 부견(符堅)에 의해 멸망되었다. 하지만 전연은 365년에 낙양을 점령했었고, 단기간이나마 북중국 일대를 점령하여, 본격적 정복왕조인 북위(北魏, 386-534) 출현의 전조가 되었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인 만주 유목민-삼림족들이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과 자신들 고유의 군사적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심장부를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2005 by Wontack Hong&nbsp;All rights reserved

 

 

2원(二元)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정복왕조(北魏,) 출현의 예고 

 

홍원탁(서울대 교수) 

 

홍산문화 (紅山, 4,000-3,000 BC) 이후의 남만주 문화의 발전과정은, 특히 상나라에 앞섰던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 2,000-1,500 BC)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분명한 연속성을 유지하였다.  소위 주 무왕이 소공(召公)에게 기원전 1027년에 봉해주었다는 북연(北燕)은 전국시대(403-221 BC)에 와서야 비로서 중국왕조 역사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민족, 언어, 문화 등의 측면에서 볼 때, (북)연이 기원전 311년경에 정복을 했다는 란하(灤河), 대능하 (大凌河) 주변의 요서지역은 원래 중국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목민적 성격이 강한 청동기 하가점 상층문화(1100-300 BC)는 하북지역의 연 왕국(1027-222 BC)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홍산문화를 공유하면서 알타이 계통 언어를 사용했던 원시 선비-예맥족들이 바로 요서지역 전체의 주 구성원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연은 기원전 222년에 진 시황제에게 정복되었다. 그런데 사기를 보면, 묵돌이 기원전 209년경 흉노부족을 통일하고 선우가 될 무렵, 선비족의 세력이 전성기에 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비족은 바로 이 신흥 흉노 제국에 복속되고 만다.

 

선비족들은 2세기 중, 단석괴(檀石槐, 156-81)의 영도 하에, 짧은 기간이나마 하나의 제국을 이룩했었다. 이 단명의 선비제국은 몽골고원의 흉노 세력을 일시적으로 대체했었다 그 후, 한 동안 약세 이었다가, 한족 왕조들이 쇠퇴함에 따라, 4세기에 모용선비 연(前燕, 349-70; 後燕, 384-408; 西燕, 385-94; 南燕, 398-410) 왕국들을 세울 수 있었고, 5세기에 와서는 최초의 북중국 정복왕조인 탁발선비 북위(386-534)를 세우게 되었다.

 

▲ Xianbei Tomb Painting excavated at the Zhao-yang area

 

 

후한의 쇠망은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된다 188년에 영제(靈帝)가 죽은 후, 한의 통치자들은 지방 군벌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요동은 190년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公孫度, 公孫康)에 의해 점거되었는데, 이들은 196-220년 기간 중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연(燕)왕이라 자칭하던 공손연(公孫淵)는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원정군에 의해 239년에 살해당하였다. 중국의 삼국시대(三國, 220-265) 기간 중에는 선비의 작은 부족장들이 위 조정과 개별적으로 흥정을 하면서 변경의 많은 지역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위 조정은 국경 밖의 유목민에게는 후한 보조금을 주면서 국경무역을 허락하였고, 국경 안의 부족들에 대해서는 간접지배 정책을 유지하였다. 단명의 서진(西晉, 265-316) 역시 위의 정책을 답습하였다.

 

285년에 모용선비 부족장이 된 모용외(慕容廆, r.285-333)는 곧바로 부여를 공격했다. 286년에는 (기원전108년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복 한 이래 한족들이 정착한) 요하 유역의 농경지대를 공격했다. 요하 유역은 중국이 통일되면 한족 제국에 흡수 통합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무정부상태의 혼란기에는 제일 먼저 중원의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지역이었다. 2 하긴 중국대륙의 한족 통치자들 역시 동북 변경지대를 그리 중시하지 않았고,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었다.  

 

291-305년 기간 중, 중국대륙 전역에 내란이 일어났다. 위와 서진의 볼모정책 덕분에 중국 황실 내에서 성장하고 중국화된 새로운 유형의 흉노족 지도자가 선우가 되어, 311년에 낙양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사로잡아 서진을 유린했다. 3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자 진 황족의 일부는 남쪽으로 달아나, 317년에 양자강을 장벽으로 삼아 건강(建康, 지금의 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동진을 세웠다. 5세기에 게르만족에 의해 황폐화된 로마를 콘스탄티노플이 대신하였던 것처럼, 남경은 589년까지 장안과 낙양의 역할을 대신했다.   

 

 

▲ Former Yan Art Objects from the Zhaoyang-Beipiao area: (top) gilt-bronze saddle plates; (second) gold hat ornaments with disk pendants; (third) gilt-bronze horse ornament; and (bottom) bronze deer-shaped object Watt, et al. (2004: 124, 130)

 

 

Ledyard(1983: 331)는 “317년”을 중국 역사상,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하나의 분기점으로 이해한다. 중국 대륙의 주요 부분이, 아니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한족이 아닌 이민족에 의해 점령된 역사적 전환점이 바로 317년 이라고 생각한다.

 

흉노족이 북중국에 처음으로 세운 전조(前趙, 304-329)는 너무 중국식이었기 때문에 몽골 초원지대의 토박이 흉노 부족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고 내분의 씨앗을 키웠다. 반대로, 두 번째 조나라(319-349)는 지나치게 흉노식이였기 때문에 중국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마지막 흉노왕의 아들은 후궁 하나를 식탁에서 구울 정도로 극악무도했다 한다. 4

 

당시 만주의 선비족은 더 이상 순수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상당기간 요하 유역을 점령하여 농민과 도시민을 지배해왔었다. 선비족은, 요서 초원지대는 부족 전통에 따라 군사적으로 조직을 해 다스리고, 요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도시민들은 중국식 문민 관료제도로 다스리는 2원(二元)적 통치조직을 운용했다 문민 관료는 절대로 부족들로 구성된 군대의 지휘관이 되지 못하였다 Barfield(1989: 97-99, 106)에 의하면, 모용 선비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5호16국 시대(304-439)에 (정주 농경지역에 대한) 관료적 행정조직과 (목초지 유목민을 상대로 하는) 부족적 군사조직을 분리한 2원적 통치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운 것이다.

 

모용 선비족은 그들 자신의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이전에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 국경 안에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살았었다. 모용외는 국가를 세워 기초를 다질 때, (모용씨의 국가를 한 개의 중화제국으로 발전시켜 보려는 의도를 가진) 수많은 중국 관리들과 학자들의 조언과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한족 자신의 사마씨 황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흉노의 지배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수 많은 중국 관료들이, 당시와 같은 정치적인 혼란기에, 요동 땅의 작은 나라에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모용씨 측에 가담했다. 그들은, 중국식으로 교육을 받은 모용선비 지배자를 통치자로 모시면서, 이상적인 중국식 조정을 조직하고, 모용씨의 국가를 점차 서쪽으로 또 남쪽으로 확장 해 나가도록 도왔다. 5 모용외는, 중국식 행정규율과 정부 운영 조직을 도입하고, 자신의 군대에 훌륭한 무기와 갑옷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다. 6

 

Fairbank(1992: 111-2)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중국적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목민적인 2원제도는 4세기부터 남만주 지역에서 출현하는데, 후대 몽골족과 만주족 정복왕조를 거치면서 거대한 제국 전체를 장악하고 지키는 통치체제로 완성되었다. 덕으로 다스린다는 유교적 신화가 있지만, 왕조의 출발 자체가 바로 군사력에 의한 것이고, 황제 중심의 전제적 체제는 지배자가 반란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을 가졌을 때만 존속이 가능 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왕조가 확립되면 관료체제는 결국 문관에 의해 운영되게 마련이다. 유교 전통으로 훈련 받은 문관이 군사전문가로 변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개중에는 유능한 무관이 나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군사기술은 유목 정복자들의 주 특기였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인 만주 유목민들이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과 자신들 고유의 군사적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심장부를 점령하고 지배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식 국가조직은 왕의 형제들을 봉토를 받는 친왕(親王)의 신분으로 만들어, 높은 지위를 즐기며 살게 한다. 실제로 중국 왕조의 친왕들이 흔히 봉토의 수입을 가지고 한가롭고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했으나, 모용씨 왕의 형제나 아들들은 정부 내의 가장 중요한 직책을 부여 받았고, 모두가 다 군대의 장군으로 봉직했다. 전연(前燕)이 성취한 정복들의 거의 대부분이 왕의 형제나 삼촌들의 탁월한 전략과 지도력 덕분이었다. 7 

 

모용외와 그 후계자들은 느슨한 연맹체 형태의 부족 집단을 이원적 통치체제의 국가로 변모시켰다. 15세에 족장이 된 모용외는 일직이 농업과 관료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국식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모용황(慕容皝, r.333-49)은 337년에 스스로 연(燕)왕이라 칭하면서, 유목민과 농경민 모두를 지배하였다. 8 연은 전국시대에 중국대륙 동북방에 있었던 왕조의 이름이었다. 모용 선비는 오늘날의 북경을 포함하는 하북성의 북부지역까지 강역을 확장하였다. Schreiber(1949-55: 378)에 의하면, 모용 선비족이 최초에 점거한 지역이 고대 연나라 영토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연이라는 이름이 부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모용선비가 352년에 중원을 정복하자, 모용씨 조정의 한족 관료들이 제일 먼저 모용준(r.349-60)에게 황제라 칭할 것을 권했다 황제의 조정 형태가 되면 한족 관리들 자신이 좀더 높은 칭호의 직위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권유를 한 것이다. 9 모용준이 360년에 죽자, 유능한 동생인 각(恪) 대신에 11세의 어린애인 위(暐, 360-70)가 제위에 올랐다. 중국화 현상이 너무 빨랐고, 결과적으로 전연 역시 빠르게 해체될 수 밖에 없었다. [후대의 정복왕조들이 중국화를 경계하게 된 반면교사 역할을 한 것이다.] 

 

일찍이 모용준은 서부와 남부 전투에서 승리를 하자 남쪽의 한족왕조 진(東晉)과 서쪽 부견의 진(前秦)을 정복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359년 초, 모용준은 자신이 당시에 정복한 모든 주와 군에 명을 내려 군 복무가 가능한 한족(漢族) 장정에 대한 현황을 조사한 다음, 각 가구에 남자 한 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장정들은 모두 징집하도록 명령했다. 모용준은 150만 명의 보병 대군을 자신의 지휘하에 확보할 계획이었다. 10 

 

당시 전연 정부의 부패상이 얼마나 절망적 이었는가는 대신 신소(申紹)의 상소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상소문의 일부는 새로 징집된 군대에 관련된 내용이다: “과거 우리 궁사와 기병들의 용맹은 진(秦)과 진(晉)나라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했었다. 우리 (鮮卑) 병사들은 언제나 구름같이 몰려들고 질풍같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즘 (징집된 漢族) 병사들은 약속된 시간에 모이지도 않고, 전투에는 쓸모가 없는 것일까? 지방 관리들이 가난하고 약한자들에게 제일 먼저 군역과 조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전장과 노역에 끌려 나가는 자나 집에 남아있는 자나 모두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 고통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모두 도망을 치고, 농사와 양잠을 돌보는 자가 없게 된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우려는 의지다.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병사가 전투에 실제 참가하지 안을 때에는 평상시의 생업을 계속할 수 있게 허용되어야 한다” 11 

 

섭정 모용각은 367년에 죽었다. 어린 황제는 정사에 관심이 없었다. 모용선비는 365년에 낙양을 점령했었으나, 370년에 부견에게 정복된다. 진서 편찬자들에 의하면, 연나라 말기에 병사들이 부패한 조정에 너무나도 실망을 했었기 때문에, 모용평(慕容評)이 [아무리 훌륭한 지휘관이었더라도] 죽기로 공격을 해오는 부견의 군대를 격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12

 

Schreiber (1956: 125)는, “모용씨가 중국화 되자 한족 고위 관료들뿐만 아니라 남조(南朝)까지 모용씨를 존경을 했다”고 말한다. 얼마나 비꼬는 찬사인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중국: 황금시대의 여명 - 200년부터 750년까지”라는 주제로 (2004. 10. 12. - 2005. 1. 23.) 전시회를 열었는데, 오늘날 요녕성의 서부에 위치한 조양(朝陽)과 북표(北票) 지역에서 발굴되고 모용 선비 고유의 유물로 확인된 상당수의 청동기와 금동제품들이 전시되었다 전시 내용을 책자로 펴낸 Watt(2004: XIX)등은 모용 선비의 예술품에 나타난 전형적인 도안 형태들을 얼마 후에 중국대륙의 북위와 한반도의 신라 예술품에서 다시 보게 된다고 말한다.

 

▲ Tomb Paintings of Farming unearthed at the (top) Zhao-yang area; (middle) Jiayu-guan 酒泉嘉峪關 area, Gan-su; and (bottom) 高台酪駝城 area, Gan-su.

 

조양에서 발굴된 한 쌍의 말 안장에 새겨진 (새와 다른 동물들을 품은 6각형들의) 투과형 문양은 모용 선비 고유의 기법인데, 후에 북위로 전파된다. Watt(2004: 125)등은, 이 문양이 같은 시대에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왕국의 한국사람들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사실 이런 문양들은 신라에서만 채택된 것이 아니라, 가야에서도, 또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열도의 야마토 왕국에서도 채택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양식과 문양에 아주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유물들이 선비족의 유적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370년, 선비족의 연나라는 부견(苻堅)의 전진(前秦, 351-394)에 의해 정복된다 부견을 흔히 탕구트(티벳)족 출신이라 하지만, 돌궐-몽골 계통의 지배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중국 전체의 새로운 주인이 된 부견은, 동진(東晋, 317-420)을 정복하려고 남쪽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였지만, 383년의 비수(肥水)전투 패배로, 전진 왕조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탁발이란 이름의 선비족은 그들 본거지인 성락(盛樂)으로부터 병주(幷州)로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북위를 세운 탁발규(拓拔珪)는 398년에 만리장성을 넘어 산서성 북쪽으로 쳐들어와 평성(平城, 오늘날의 大同)에 수도를 정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9 (2005. 2. 19)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각주] 

1. Guo (1995b: 148-9, 179) 참조. 

 

2. Barfield (1989: 105)  

 

3. Barfield (1989: 99) 

 

4. Grousset (1970: 58) 

 

5. Schreiber (1949-55: 374-5, 424) 참조. 모용외는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가령(家令)들을 제정했는데, 그 중 하나는: “농업은 국가의 근본이므로 농업의 진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晉書 卷一百八 載記 第八 慕容廆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 廆…言曰 稼穡者 國之本也 不可以不急  

 

6. Schreiber (1949-55: 401) 참조. 

 

7. Schreiber (1956: 121-2) 참조. 모용황은 자신의 부친이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을 대한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대했다. 그는 황태자를 앞장 세우지 않았고, 유능한 왕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어느 왕자이든 높이 존경했다. 모용황은, 한족 관료들이 맹렬히 반대를 안 했다면, 태자 준(儁)을 제쳐놓고 수(垂)에게 제위를 승계시킬 생각까지 했었다. 당시 모용준은 42세에 제위를 승계했다 

 

8. Barfield (1989: 109-111) 와 Gerhardt Schreiber, “The history of former Yen dynasty,” Monumenta Serica, Vol. 14 (1949-55: 374-480) and Vol.15 (1956: 1-141) 참조. 모용외가 아들에게 훌륭한 중국식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모용황은 중국 고전에 능통했고, 중국의 전통적 교육방법을 존중하게 되었다. Schreiber가 李昉 (925-96)의 太平御覽에서 인용.  

 

晉書 卷一百八 載記第八 慕容廆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晉書 卷一百九  載記第九 慕容皝 … 尙經學魏書 列傳 慕容廆 ..父涉歸..遷邑遼東…死 廆代領部落 ..死 子元眞代痲自稱燕王 置官如魏武輔漢故事 …征高麗[341] 大破之…子儁統任…建國十五年[352] ..置百官  

 

9. 그러자 모용준은 한족 관습을 흉내 내, “우리 본향이 사막과 목초지이며 우리는 본래 야만인이었다”고 말하며 한족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다가, 353년 1월에 “나는 중국 백성들의 권유로 부덕하나마 제위에 오른다”며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Schreiber (1956: 31-35) 참조. 

 

10. Schreiber (1956: 54-5) 참조. 360년 정월, 모용준이 병석에 누어있을 당시, 359년 겨울까지 지연되었던 새로운 군대의 징집이 본격적으로 집행되고 있었다. 모든 주와 군으로부터 징집된 장정들이 수도로 집결하면서, 작당한 도둑떼가 들끓었고, 산적들이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습격을 하여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晉書 卷一百十 載記第十 慕容儁 儁于是復圖入寇 兼欲經略 關西 乃令州郡校閱見丁 精覆隱 漏率戶留一丁 餘悉發之欲使步 卒一百五十萬 期明年大集 將進 臨洛陽 爲三方節度 武邑劉貴 上書極諫 陳百姓凋弊 召兵非法 恐 人不堪命 有土崩之禍... 乃 改爲三五占兵… 是時兵集 鄴城 盜賊互起 每夜攻劫 晨昏 斷行 

 

11. 晉書 卷一百十一 載記第十 慕容暐 其尙書左丞申紹上疏曰 …弓馬之勁 秦晉所憚 雲騎風馳 國之常也 而比赴敵後機 兵不速 濟者何也 … 遂致奔亡 ... 退離 蠶農之要 兵豈在多 貴於用命 宜嚴制軍科 務先饒復 習兵敎戰 使偏伍有常 從戎之外 足營私業 Schreiber (1956: 82-6) 참조

 

12. Schreiber (1956: 128) 참조 

 

10. 이원통치체제의 유지: 첫 정복왕조 북위(拓跋鮮卑 北魏)의 출현

  •  홍원탁
  •  승인 2005.02.27 00:00

Maintaining the Dual System: Northern Wei of Tuoba Xianbei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통치 체제를 답습 해,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 탈발규(r.386-409)는 모용선비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흡수했고, 모용 선비족 지배층은 북위조정 내에 지배 귀족층을 구성하는 주요 씨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북위의 문민 관료제도는 한족들 또한 탁발 조정으로 끌어들였다. 북위는,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국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침략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二元的)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후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몽골족의 원(元)을 제외한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선비족 예술의 특유한 양식은 북위의 평성(平城)시대 전반을 통해 지속되었고, 섬서와 녕하성에 자리잡았던 북주시대 까지도 존속하였다. 탁발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사람이 만든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탁발선비 북위(拓跋鮮卑 北魏)의 이원통치체제 유지  

 

첫 정복왕조의 출현 
                                                              
 

홍원탁 (서울대 교수) 

 

모용선비족 보다 더 후진적이었다는 탁발선비족  

 

만주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 해 가장 유목민적이었던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통치 체제를 답습 해,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 탁발선비 왕국은 처음에 대(代)라 칭했다. 341년, 대의 지배자 시이지안(r.338-76)은 모용황(r.333-49)의 누이동생인 자신의 처가 죽자 황(皝)에게 또 다른 공주를 처로 삼도록 보내달라고 청했다. 모용황은 그 대가로 말 1천 필을 요구했다. 그러자 시이지안은 아주 무례한 태도로 거절을 했다. 343년, 모용황이 태자 준(r.349-60)과 평(評)에게 군사를 주어 탁발선비족을 공격하게 하자 시이지안은 부족을 이끌고 산 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344년, 시이지안은 모용황의 딸을 신부로 맞이 해 오도록 동생 질(秩)을 연나라에 보냈다. 몇 달 후, 모용황은 사신을 보내 자기한테도 공주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시이지안은 자신의 누이 동생을 황에게 시집 보냈다. 1 376년에 부견이 군대를 보내 대를 공격했을 때 시이지안은 무리를 이끌고 산속으로 달아나 숨어 있다가 죽었다.

시이지안의 손자인 탈발규(r.386-409)는 396년에 북위(386-534) 황제라 선포하고 모용선비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흡수했다. 2 모용 선비족 지배층은 탁발 북위(386- 534) 조정 내에 지배 귀족층을 구성하는 주요 씨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북위의 문민 관료제도는 한족들 또한 탁발 조정으로 끌어들였다. 

 

2005 by Wontack Hong &nbsp; All rights reserved.

 

 

탁발어와 선비어는 동일한 언어이었다. 북위는 후에 서위와 동위로 양분되고, 동위는 북제(550-77)가 된다. 북제(北齊) 때 쓰여진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을 보면, 북제 조정에 봉직하는 한족 관리가 선비 고관들의 눈에 들어 출세길이 열리도록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선비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나온다. 3 탁발선비 지배층은 북중국을 정복한 후, 자신들 군대를 지휘할 때 계속 선비 언어를 사용했다. 4 하지만 후에 탁발 북위가 중국화 하자, 이들 군사 명령어(鮮卑號令) 중 많은 부분이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탁발 선비의 언어는 아마도 거란어의 직계 조어(祖語)이었을 것이다. 5

 

이원제도의 유지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조직 덕분에 보급이 잘되는 기병대를 보유했던 북위는 초원지대 깊숙이 원정군을 보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부족들은 부대 단위로 조직되어, 할당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국경수비 공동체의 구성원 역할을 하였다. 6 부족민과 군사에 관련된 문제는 각 부족 고유의 전통에 따라 처리되었다. 정복된 한족 거주지역은 한족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고위직은 대부분 선비 귀족들이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한족들의 이상은 능력주의 사회인데 반해, 유목민족들은 세습적 귀족제도를 고수했다. 북중국 귀족가문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정복왕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대부분 독차지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국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 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후대 정복왕조들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Barfield(1989: 105)는 “한(漢)이 멸망하고 첫 번째 만주족 정복국가(탁발북위)가 등장하기까지는 150년이 걸렸고, 당이 망하고 나서는 75년이 걸렸으나, 명(明)이 망할 때는 거의 동시에 만주족 정복왕조가 들어섰다. 한족 왕조가 망하고 나서 정복왕조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점점 단축되었지만, 그 방식은 똑같았다”고 말한다.

 

▲ Tomb Paintings of Ox Wagons excavated at the Zhao-yang area

 

한족 왕조들은 방어를 위해 장성을 쌓거나, 엄청난 선물과 교역특혜를 제공하거나, 대규모 공격을 반복하는 정책 중 하나를 택했었다. 그러나 북중국을 점령한 만주족 왕조들의 전략은, 적대적인 유목민 부족장들을 혼인정책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어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적대적인 부족들이 합심하여 동맹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경쟁관계에 있는 부족장들을 지원하거나, 성장 가능한 부족세력을 초장에 깨 버리는 방식이었다. 만주족 지배자들과 군대는 초원의 실상을 완전히 파악하기 때문에, 초원지대의 사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만주족은 단순히 초원의 적을 패배시키기보다는, 주민과 가축들을 한꺼번에 모두 빼앗아 감으로서 유목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려 했다. 7

 

439년에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 태무제(太武帝, 423-52)는, 일찍이 429년에 오르콘강 유역의 유연(柔然) 몽골을 정벌할 때, “한족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다. 망아지나 암소 떼들이 호랑이나 늑대 무리를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유연 몽골은 여름철에는 북쪽에서 방목을 하고, 가을에는 남쪽으로 내려오며, 겨울이 되면 우리 국경을 침범한다. 우리는 그들이 여름철에 목초지에서 방목을 하고 있을 때 공격을 하면 된다. 숫말들은 암말을 쫓아다니고, 암말은 새끼들 돌보기에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들은 모두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덮쳐서 그들을 목초지와 물가에서 쫓아내면, 며칠도 안돼서 모두 포로가 되거나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8

 

중국화 되고, 불교의 영향으로 무기력하게 되고 

 

북위 조정이 마침내 중국화되고, 불교의 영향으로 무기력해지자, 국경정책도 옛 한족왕조들 모양으로 성벽을 쌓고 지키거나 유목민들에게 화평의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이 되었다. 9 북위의 효문제(孝文帝, 471-499)는 중국식으로 황제중심의 전제체제를 확립한다며 정부 관직을 온통 한족으로 채우기 시작했고, 494년에는 수도를 선비족 고향에 가까운 평성(平城, 현재의 大同)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는 심지어 조정 내에서 선비 언어의 사용을 금지해버렸다. 

 

▲ Xianbei Tomb Paintings(of Former Yan) excavated in 1982 at the Zhao-yang 袁台子 朝陽 area, across the Daling River, Liao-xi

 

효문제의 아버지는 수도승이 되기 위해 왕위를 버릴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북위의 지배자들은 애당초 유교적 편견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불교를 전폭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식 간다라 불교예술에서 영감을 얻어 그토록 신비한 모습의 거대한 (불상) 조각작품들을 만들었다. Grousset(1970: 66)은 “포악한 전사들도 일단 보살의 자비심에 감화를 받게 되면, 인도주의적인 계율을 받아들여, 본래의 호전성을 잊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아예 자기방어 조차도 소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유목민 정복자들이 중국화 되어, 새로 나타난 유목민족에게 망하던지, 아니면 한족에게 쫓겨나게 되는 순간이 항상 찾아온다. Twitchett(1979: 97)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한때 북위의 국경선을 지키던 군 부대들은, 한족들이 하던 식으로, 범죄자들을 내다버리는 쓰레기장이 되었고, 관료들의 착취 대상이 되어,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한 반항집단으로 변했다. 마침내 524년에 북방의 국경지대를 수비하던 선비족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선비 예술의 특유한 형태 

 

중국대륙 북부의 탁발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선비족들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했던 옛 박트리아와 교류가 있었고, 로마 통치하의 중동과 교역을 했으며, 초기적 불상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와도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0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5호16국 시대)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사람이 만든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 (맨손으로 빚어 만든)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한국사람들은 이런 모양의 토기에 너무나도 친숙한 것이다. 

 

선비족 예술의 특유한 양식은 북위의 평성(平城)시대 전반을 통해 지속되었고, 섬서와 녕하성에 자리잡았던 북주시대 까지도 존속하였다. 11 

 

534년에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갈라졌다. 이민족적인 요소가 훨씬 강했던 서위는 557년에 북주(北周, 557-81)가 되어, 577년에 북제를 정복하고 579년에 진(陳)의 강북 땅을 차지해,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북중국을 재통일할 수 있었다. 수(隋, 581-618) 나라는 선비족 북주의 후계자로서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0 (2005. 2. 26.)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각주] 

1. 魏書 卷一 序紀 第一 
昭成皇帝諱什翼犍痲烈帝臨崩... 建國二年 [339] … 慕容元眞妹爲皇后…四年 [341]…皇后慕容氏崩… 七年 [344] 遣大人長孫秩迎后慕容氏元眞之女於境 … 慕容元眞… 求交婚…以烈帝女妻之
魏書 卷二 太祖紀 第二 
太祖道武皇帝 諱珪 昭成皇帝之嫡孫 獻明皇帝之子 … 年六歲昭成崩 …苻堅遣將…國衆離散

資治通鑑 卷九十七 晉紀十九 
建元元年 [343] … 代王什翼犍復求婚於燕 燕王皝使納馬千匹爲禮 什翼犍不與又倨慢無子壻禮 … 皝遣世子儁 帥前軍師評等 擊代 什翼犍帥衆避去 燕人無所見而還  

Schreiber (1949-55: 473) 참조. 

 

2. Barfield (1989: 106)  

 

3. Schreiber (1949-55: 388) 참조.  
齊朝有一位士大夫 曾經對我說 我有一個孩子 已經十七歲了 懂得一些書信 公文的書寫 我敎他學習鮮卑語和彈琵琶 只要稍稍掌握一些 就可以用這些本領去 爲公卿們效力了 沒有不受寵的道理 這也是一件很重要的事情 

 

4. 隋書經籍志의 鮮卑號令을 인용. Schreiber (1949-55: 387-8) 참조.

 

5. Janhunen (1996: 190-191)  

 

6. Barfield (1989: 118-119)  

 

7. Barfield (1989: 112, 124)  
 
8. Grousset (1970: 62-63) 참조. 

 

9. Barfield (1989: 124) 참조. Jagchid and Symons(1989: 145)에 의하면, 북위의 탁발선비족 지배자들은 다른 유목국가 혹은 한족과의 결혼에 의한 동맹관계 수립을 꺼려하였다. 그들의 혼인 정책은 주로 유목민 혹은 다른 독립국가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북위 사회 안으로 흡수융합 시키기 위한 결혼에 국한되었었다. 북위가 국경무역과 공물(貢物)교환이란 한족 방식의 방어정책을 계속 기피하다가 마침내 그 방침을 변경한 것은 경종(敬宗, 528-530)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었는데, 이는 북위가 534년에 몰락하기 겨우 6년 전 이었다.  

 

10. Watt, et al. (2004: XIX)  
 
 11. Watt, et al. (2004: XIX)  

 

 

  • 기자명오종홍 
  • 입력 2017.04.17 12:15
  • 수정 2017.05.11 13:08

사고전서, 금석문은 고대요수는 난하 또는 그 서쪽이라고 하다...

미사협 청주강연 심백강의 사자후(2)

 

‘한단고기’를 위서로 모는 강단사학계,

그렇다면 ‘사고전서’를 통해서 바른 역사 보여 주겠다...

 

지난 서기2017.4.7. 충북 청주시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미래로가는 바른역사 협의회(미사협)가 주최한 바른역사 순회강연 청주편이 진행되었다. 이날 강사로 참여한 민족문화연구원 심백강 원장은 사고전서에 나오는 새로운 자료를 선보였다. 특히 조선의 서쪽 강역으로 가늠되는 고대의 요수 위치를 밝혔다.

심백강 원장은 이처럼 사라진 우리의 대륙역사를 ‘사고전서’를 통해서 찾아냈다. ‘사고전서’는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어 관련 연구자들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심원장 처럼 찾아내서 정리하는 학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역사에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조선의 대륙역사를 찾아내는 단체나 인물은 심백강 원장 외에는 현재까지 보이지 않는다. 심백강원장은 이날 강연에서 중국 정사류는 명. 청대에 정치권력의 입맛에 바꾸었을지는 몰라도, 외전으로 내려오고 있는 시가집, 문집은 손이 덜 탔다고 했다. 심원장이 ‘사고전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사고전서’가 나오기 전에는 사료들이 다 흩어져 있어 관련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다. 역사연구에서 사실상 중국25사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청나라 건륭제때 중국인 학자 3천여 명을 동원하여 십년이 넘게 연구하여 정리한 사고전서(8만권수록) 덕분에 손가락 몇 번 움직여 필요한 사료를 다 얻게 된 것이다. 강단식민사학계에 의해서 위서, 가짜로 취급받은 한단고기에 나오는 참역사가 ‘사고전서’에 나오는데 수레로 가득한 분량만큼이나 된다고 했다.

특히 ‘사고전서’에는 시가집, 문집류까지 실려져 있다. 그런데 정치권력이 정사류는 왜곡했을지는 몰라도 당나라 왕들이 직접 쓴 시는 바꾸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당나라 왕이 남긴 시문을 통해서 오히려 대륙에 존재한 조선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다고 했다. 심원장은 이러한 시 몇 수를 직접 수첩에 적어 와서 칠판에 적으면서 생생한 조선의 역사를 밝혀 나갔다.

먼저 ‘무경총요’를 꺼내 들었다. 북경에서 고북구를 가는데 조선하를 건너간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씨조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군의 조선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무경총요’는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전에 나온 사료다. 조선이 중국 북경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했다. ‘태평환우기’에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는 조선성이 있었다고 나온다고 했다. 북경과 하북성 지역에 조선하가 있었고 조선성이 있었다면 거기 조선 땅이 아니였냐는 것이다.

선비족 모용은의 비석문도 제시하였다. 비문에 ‘조선건국고죽위군朝鮮建國孤竹爲君’이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선비족 모용은의 비문에 조선이 나온다는 것은 선비족 자신의 뿌리가 조선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백이숙제의 고죽의 임금이라고 표시한 것을 통해서 조선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고죽은 현재 하북성의 난하인근으로 나온다. 조선이 중국하북성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비문은 지금으로부터 1천5백 년 전의 남북조시대 유신이라는 사람이 쓴 비문이다.

 

▲ 심백강 원장은 이날 강연에서 새롭게 찾아낸 시문헌을 통해서 고대 요수는 현재의 북경 서쪽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심백강 원장은 산해경을 통해서도 조선이 대륙에 있었음을 밝혔다. 먼저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이름에 주목하여 책에 경이라고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산해경이라고 한 것은 최고의 책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산해경山海經은 서기전 6세기경에 차이나China의 산과 바다의 지리를 기록한 최고의 책을 말하는 것이다. 동양에서 최초로 나온 지리서라고 했다. 그런데 이 산해경에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위치상으로 볼 때 오늘날 차이나의 발해 모퉁이로 하북성 동북방향이라고 했다. 심백강 원장은 맹자에도 북해를 발해라고 하고 있다며, ‘산해경’의 북해는 발해라고 고증했다.

심백강 원장은 수양제가 요해에서 전쟁하다 죽은 자의 장례를 치러 줬다(收葬遼海戰亡詔)는 조서를 통해서도 조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조서의 요해가 발해라고 했다. 왜냐하면 차이나에서 볼 때 멀리 있는 바다를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서의 내용을 보면 요서군 에다가 분향소를 차리고 죽은 자를 제사지냈다고 한다. 강단식민사학계의 주장처럼 수양제가 대동강유역의 평양을 치다가 대패해서 수나라 병사들이 죽었다면 압록강 유역 서쪽 지역에서 장사지내고 제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요서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것은 결코 현재의 평양이 당시 고구려의 평양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심백강 원장은 당나라 때까지 요수가 어디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도 제시했다. 당나라 왕, 세민이가 요동성을 침략하고 나서 쓴 시가 전해오는데 그 속에 결정적인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당나라 왕이 직접 쓴 시라 후대에 누가 개작을 하거나 변조했을 수 도 없다고 했다.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요동성에서 달을 바라보다: 검은 달빛이 휘영청 밝다. 맑은 빛이 요수와 갈석을 비춘다. 말을 멈추고 환도를 굽어본다. 우두커니 서서 요망한 기운이 멸하기를 관망한다(遼城望月: 玄免月初明 (맑을)증輝照遼碣 駐蹕佑丸都 竚觀妖氣滅).”

세민이가 요동성을 무너뜨리고 요동성에 올라 쓴 시다. 여기서 요갈遼碣이 나오는데 이는 요수와 갈석산을 말한다. 이는 요수와 갈석산이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갈석산은 아무리 동쪽으로 이동해도 하북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재의 난하 하류 동쪽에 표시되어 있다. 이 갈석산을 기준으로 볼 때 당시 요수는 난하이 거나 더 서쪽의 어떤 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다음 구절에는 말을 멈추고 환도성을 굽어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환도성도 이 요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 요기妖氣가 멸망하기를 관망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요기는 고구려를 가리킨다는 것이 심백강 원장의 설명이다.

심백강 원장은 이러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동안 제도권 강단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냐며 질타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자료 몇 개만 가지고 70년 동안 되풀이 할 뿐, 이러한 연구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명나라와 청나라 때 사료를 다시 인쇄하고 찍어내면서 글자를 바꾸고 뺏기 때문에 이러한 당왕 세민이의 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심백강 원장은 강연을 마치면서 우리역사가 바뀌려면 우리의 의식과 생각이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역사의 지평을 반도에서 대륙으로 넓히면 우리의 의식과 생각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고구려 출신 북위(北魏) 황태후 묘지 확인 (daum.net)

입력 2004. 11. 8. 05:08수정 2004. 11. 8. 05:08
 

문소황태후와 그 일가족, 민경삼 교수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3살에 부모를 따라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왕조인 북위(北魏.386-534)에 들어가 후궁을 거쳐 황태후 지위까지 오른 고구려 출신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 고조용(高照容.469-519) 묘지명(墓誌銘)이 중국에서 확인됐다.

그의 딸과 사위이자 조카, 또 다른 조카 묘지명도 아울러 밝혀졌으며, 이외에도주로 북위 왕조에서 활약한 고구려 혹은 요동(遼東) 출신자나 그 후예 9명의 묘지명도 아울러 공개됐다.

충남 천안 소재 백석대학 중국어과 민경삼(閔庚三. 37) 교수는 중국 역대왕조도읍인 뤄양(洛陽)과 시안(西安) 일대 출토 고대 묘지명을 조사한 결과 현재까지 100여 점을 헤아리는 고대 한인(韓人) 계통 사람들의 묘지명을 확인했다고 7일 말했다.

 

이 중 북위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년)인 원굉(元宏)의 귀인(貴人ㆍ후궁의 한 등급)이 되었다가, 그의 아들인 원각(元恪)이 제위를 이어 세종(世宗) 선무제(宣武帝ㆍ재위 500-515년)가 되자 황태후(皇太后)에 책봉된 문소황태후와그 일가족 묘지명은 특히 관심을 끌고 있다.

문소태후 묘지명은 출토 장소와 시기가 정확하지 않은 가운데 `낙양출토역대묘지집승"(洛陽出土歷代墓誌輯繩)이라는 묘지명 탁본집에서 그 존재가 확인됐다.

이 묘지명(59.5 x 49.5cm)은 일부 훼손됐으나, `魏文昭皇太后山陵誌銘幷序"(위문소황태후산릉묘지명병서)라는 제목 아래 대략 20여 행에 20여 글자가 확인된다.

여기에는 묘주(墓主)인 문소황태후 고조용에 대해 `기주 발해 수인"(冀州 渤海蓚人) 출신으로 효무제의 귀인(貴人)이었다가 뒤에 아들이 즉위하자 황태후로 책봉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문소황태후는 `위서"(魏書)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계통인 아버지 고양(高양<風+易>)과 어머니 개씨(蓋氏) 사이에서 난 4남3녀 중 가운데 딸로서, 13살(482년) 이전에 가족을 따라 "발해"에서 북위로 왔다가 황제의 어머니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또 기존 문헌 기록에 의하면 문소황태후는 작은오빠인 고언(高偃)의 딸을 아들인 선무제(宣武帝)의 비로 들이는 한편 큰오빠인 고곤(高琨)의 아들 고맹(高猛)은역시 자기 소생인 장락장공주(長樂長公主) 원영(元瑛)과 혼인케 했다.

민경삼 교수는 문소황태후 외에 그 일가족인 원영과 고맹, 작은오빠 고언의 아들인 고정(高貞)의 묘지명도 확인했다.

 

이 외에도 민 교수는 중국 산시(陝西)성박물관(일명 시안비림<西安碑林>) 소장`원앙칠지재장석"(鴛鴦七誌齋藏石)이라는 묘지명 탁본집에서 고구려 출신 혹은 그후예로 간주되는 한인(韓人) 9명의 묘지명도 찾아냈다.

이들은 대체로 6-7세기 중국에서 활동한 동이족(東夷族) 출신으로, 각각 실명이▲왕정(王禎) ▲왕기(王基) ▲부인왕씨(夫人王氏) ▲이거란(李渠蘭) ▲공손의(公孫의<개견 변에 奇>) ▲공손략(公孫略) ▲고승호(高僧護) ▲고규(高규<糾에서 실사 변대신 벌레 충 변>)이다.

백 교수는 "묘지명은 중국과 고구려 사이의 교류나 이민에 관한 실상을 전해주고, 문헌기록에서 탈락한 정보를 보충하고 있다"면서 "중국에는 이런 묘지명이 수없이 많은 만큼 이에 대한 꾸준한 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있음> taeshik@yna.co.kr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고구려가 북위에 책봉 준 자료 있다" (daum.net)

입력 2004. 9. 9. 06:17수정 2004. 9. 9. 06:17
 

[오마이뉴스 오동선 기자]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김우준 교수가 중국이 한때 한국의 지방정권이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를 입수했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김 교수는 평화방송 시사 프로 <열린 세상 오늘>과 9월 8일과 9일 이틀에 걸친 전화 통화에서 "조공, 책봉과 관련한 자료를 입수했다. 고구려가 "북위"에 책봉을 주었다는 자료"라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이와 관련해 "우리가 (책봉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북위에 책봉을 주었다고 돼 있다. (이것은) 중국이 (한때) 우리의 속국이거나 지방 정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 관련 사료를 정리 중이며 내주 초에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오히려 한때 한국의 속국이었거나 지방정권이었음을 보여주는 이런 사료가 공개될 경우 한중간 역사 논쟁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김 교수는 오래 동안 간도 문제와 고구려사 문제를 연구해 온 학자다.

김 교수는 이어 "분명히 내가 입수한 명나라 시기의 고지도나 북송시기 고지도에는 요동 지방이 한국 땅으로 돼 있고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이 아닌 만주와 한반도 국가로 일관되게 표기돼 있다"며 "중국의 태도를 보면서 (관련 자료들을) 단계적으로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중국 학계가 자율성이나 합리성이 결여돼 있다. 또 중국이 시민 사회가 없어 나름대로 정부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 학술적 차원의 해결은 어렵다고 본다"고 말하고 "(중국이) 이미 (역사를) 왜곡한 상태다. 따라서 외교적 차원, 정치적 차원의 해결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계속해서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국제적인 압력을 넣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김우준 교수와의 인터뷰다.

 

- 중국의 역사 왜곡과 관련해 개인적으로 수집 중인 반박 자료가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개인적으로 고구려사 문제와 간도 문제와 연결해서 고지도를 수집해왔다. 아직 공개 안 한 것을 단계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 미 공개 내용 중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돼 있나?

 

"제가 입수한 명나라 시기의 고지도나 북송시기 고지도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 발해와 더불어 만주 및 한반도 국가로 표기돼 있다. 요동 지방이 한국 땅으로 돼 있고, 분명히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이 아닌 만주와 한반도 국가로 일관되게 표기돼 있다. 또 조공 책봉과 관련한 자료도 입수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고구려가 북위에 책봉을 주었다. 우리가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북위에 책봉을 주었다고 돼 있다. 중국이 우리의 속국이거나 지방 정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자료다. 이런 자료들이 있고 또 간도 문제와 관련된 자료도 있다. 중국의 태도를 보면서 단계적으로 공개하겠다."

 

- 언제쯤 공개할 예정이십니까?

 

"현재 관련 사료들을 정리하는 중이다. 내주 초쯤에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것은 한반도 통일을 꺼리는 중국이 유사시에 북한에 친중 괴뢰 정권을 세우려는 의도가 있다는 보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일단 정부 차원에서는 논의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학계나 국회 차원의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은 동북 공정을 중단하지 않았고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구두 양해가 있었지만 그것은 구속력이 없고 중국 학계가 자율성이나 합리성이 결여돼 있다. 또 중국에는 시민사회가 없어 나름대로 정부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 학술적 차원의 해결은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외교적・정치적 차원의 해결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계속해서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국제적인 압력을 넣을 필요가 있다."

 

- 고구려사 왜곡과 관련, 지난달 우리 정부가 중국과 맺은 구두양해의 이면에는 우리 정부가 영토 문제, 즉 간도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묵시적 합의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이 같은 보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도 내용이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고구려사 왜곡 문제는 역사 문제고 간도 문제는 영토 문제이기 때문에 바로 연결될 수 없다고 본다."

 

- 만일 이같은 묵시적 합의가 사실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못된 것이다. 간도 영유권 문제는 상당히 전략적인 카드인데 우리가 일부러 포기할 필요가 없다."

 

/오동선 기자<hr noshade color=#FF9900>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오동선 기자는 평화방송 라디오 시사프로 <열린 세상 오늘>의 PD입니다.

- ⓒ 2004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백제-북위와의 전쟁은 실재 있었는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동성왕의 수수께끼

차태헌  | 기사입력 2015/08/10 [14:02]

 


[플러스코리아타임즈 = 차태헌] 5세기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북방 기마 민족의 발흥으로 한족들은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나고 이 양자강 이남에서 진 송 제 양의 한(漢)족의 단명한 왕조들이 교체가 되고있는 상황이었다. 이 중국 남조의 국가들중의 하나인 남제의 정사를 기록한 남제서에는 우리가 실제 역사라고 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록이 존재한다.

그것은 당시 동북아시아 최강국인 선비족의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다. 그것도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동원한 대규모 전쟁이고 전쟁의 기간도 수년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표문을 올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백제의 장군들에게 백제 동성왕이 작위를 수여하고 중국 남제에게 이를 추인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이다.
 
춘추필법으로 쓰여져서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광양 태수등 중국 하북지역의 태수직을 받는 형식이지만 실제 상황은 북위를 물리친 백제가 하북 지방의 원주인인 한족들에게 통치권을 이양받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만일에 이 전쟁이 실제 역사라면 5세기 말 동북 아시아 최강국은 선비족에게 밀려난 한족도 아니고 북방을 차지했던 선비족도 아닌 바로 백제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남제서에서는 많은 부분을 이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서 할애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분을 보자

이 해에 위(魏) 나라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군사를 습격하도록 하여 크게 무찔렀다.제 명제 2년(495)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길, " 지난 경오년 (490 ) 에 험윤 (북위)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쳐들어 왔으나, 사법명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반격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밤에 번개같이 들이치고 도망가는 것을 따라가서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 남제서 동이열전 백제 -

전쟁의 양상을 볼 때에 이 전쟁은 절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남부의 백제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한반도 남부까지 올 수 있는 방법은 당시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고구려를 통과하고 내려오거나 아니면 선박에 기병 수십만을 태우고 해양항로를 통해서 오는 두가지인데 어느것 이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럴 이유도 없다.

결국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봐야하는데 이 믿기 어려운 전쟁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기록하고 있는 다른 사서가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에는 남제서가 기록한 백제 북위 전쟁과 같은 시기에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성왕 10년(서기 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

중국 남제서에는 전쟁의 진행 양상 그리고 이후의 논공행상까지 타국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에 반해 자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오히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략하다. 역시 이 부분에서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의 정치적 편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은 역사가 이전에 정치인이었고 유학자였다.  그리고 북벌을 주장했던 서경파를 진압한 당사자이기도하다.
 
신채호와 같은 여러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삼국사기는 적극적으로 위작을 한 부분은 없지만 대륙의 한(韓)민족 역사에 대해서 축소하고 누락 시킨 부분이 많다. 김부식은 남제서 이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백제 구사(舊史)를 통해서 이 전쟁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전쟁은 김부식이 생략하거나 누락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전쟁이었기에 마지못해 한 줄이라도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김부식의 저 짧은 기록은 이 전쟁이 그 당시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헌적으로 고찰해보면 중국 정사와 삼국사기에 2개의 전쟁이 같은 시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전쟁은 실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전쟁은 남제서를 기준으로 볼 때에 490 ~ 495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다. 그러나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과 그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실질적으로 국가 멸망의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15년 후에 백제가 이런 대규모 전쟁을 할 여력이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점령당한 백제의 서남부에 어떤 고고학적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주 지역은 여러 대형 고분들이 존재해 있는데, 이 고분군들에서는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 금동관중 가장 화려한 금동관이 출토되었고 환두대도와 금동신발등 , 여러 백제 계열 부장품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기존에 백제에 없던 옹관도 같이 출토가 되는데 이 옹관은 청동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유의 매장풍습이다.
 
이덕일씨의 주장에 따르면 20세기초 이곳을 처음 발굴했던 일본인 학자들이 반남 고분군의 화려한 부장품들에 대한 보고서만 작성하고 이후 도굴을 방조하여 당시에 보고서에 기록된 유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다만 이후 출토된 유물과 보고서로 추측해보면 이 세력은 상당히 국제적인 세력이라는 것이 추측이 가능하다.
 
여지승람 익산조에서는 이 지역에 말통( 末通 ) 대왕의 능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 동성왕은 일본서기에는 말다 (末多) 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중국 정사와 삼국사기에는 모대 (牟大)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여지승람의 말통대왕과 연결이 되는데 그렇고 보면 이 지역에 백제계열 유물뿐만 아니라 다른 한반도 고유 양식인 옹관묘등이 출토되는 상황이 이해가 된다.

동성왕은 백제 왕족으로서는 특이하게 신라귀족과 결혼한 왕이다. 단순하게 백제 동성왕과 신라 여인의 개인적인 결혼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 시기에 백제와 신라는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나주 고분군은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은 열도 출신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이 당시에 열도에 백제의 후왕으로 가 있었던 곤지의 후계자였을 것이다. 당시 열도에서는 백제와 한반도 고유의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는 전방후원분이 축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전남 나주에서 이런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475년 한반도 백제가 실질적으로 멸망 상태에 있었지만, 그 15년 후에 백제가 북위와 대륙에서 전쟁해서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한반도 백제는 멸망하였지만 열도와 한반도에는 여전히 백제 신라 가야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장수왕의 남하로 위기 의식을 겪었고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동성왕이 있었던 것이고, 나주의 고분군들은 이렇한 사실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하나 의문점이 있다. 그렇다면 백제 동성왕은 한민족 역사에 있어서 살수대첩에서 승리한 을지문덕 정도의 영웅이라고 하는 것이 되는데,삼국사기 동성왕 기록은 어째서 그를 폭군으로 기록하였을까? 그리고 왜 같은 백제인에 의해서 살해된 것일까?

이렇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서기라고 하는 사료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고 이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 이 시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단순히 가공 윤색의 차원을 넘어서 5세기 당시 백제 후왕과 가야게열 왜왕들이 다스리던 열도 지역에 가공의 일본 천황을 창작하여 삽입한 위사(僞史)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동성왕이 통치하던 시기와 같은 시기에 무열 천황이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본서기는 책의 대부분이 자신들이 창작한 가공의 천황들의 권위를 높이는 것에 할애된 책이다. 그 일본서기에서 유일하게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무열천황이다.

삼국사기에서 동성왕을 폭군으로 묘사한 임류각을 세우고 진기한 동물들을 길렀다는 표현과 같은 표현이 무열천황 8년 기록에도 나온다. 아마도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의 저본(底本)이 되었을 구 ( 舊 ) 백제사에 나온 동성왕에 대한 기록을 반도계열 사서인 삼국사기와 열도의 신라 백제인들이 창작한 위사인 일본서기가 같은 원전의 기록을 참조하였을 것이다. 이 기록을 삼국사기는 인용하고 일본서기는 변형하여 위사僞史를 만드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찌기 단재 신채호는 일본서기의 성덕 태자 기록은 백제 근구수 태자의 기록을 베껴서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성왕을 모티브로 일본서기 무열기가 창작되었다면, 반도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왕이 폭군으로 기록되는 점과 천황에 대한 아부가 대부분인 일본서기에서 유일하게 폭군으로 기록된 무열 천황의 수수께끼 같은 기록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란 것을 알게된다. 이 일본서기 무열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7년 夏 4월 백제의 왕이 사아군(斯我君)을 통해 조공하였다. 따로 표를 올려 ," 먼저 번에 조공을 간 사신 마나(麻那)는 백제왕의 골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사아(斯我)를 보내어 천황을 섬기게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무열기 7년

물론 이 시기에 열도에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섬겨야 하는 일본 천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정사의 왜왕과 일본서기의 천황은 일치하는 인물이 하나도 없는데, 역시 일본서기의 천황들은 가공인물들인 것이다. 실제 역사는 일본 열도의 백제 후왕을 교체하는 내용이 백제 구사舊史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시기는 백제 동성왕 즉 모도왕에서 무녕왕 사마왕 ( 斯摩王) 으로 교체가 되는 시점이다. 마나와 사아 그리고 모도왕과 사마왕이 음운상으로 대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는 열도의 동성왕의 아들이 열도의 백제 후왕을 하였으나 무녕왕의 아들로 교쳬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마나를 백제왕의 골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성왕은 신라 여인과 결혼하였고 마나는 백제인 신라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였을 것이다. 열도의 신라 백제 세력을 등에 업고 대륙에서 전쟁을 한 동성왕 자체도 순수하게 백제인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마 이것이 대륙에서 북위와 전쟁해서 승리한 위대한 대왕을 반도 백제인들이 암살한 이유였을 것이다. 반도 백제인들의 입장에서는 신라인의 피가 섞인 백제왕과 후왕들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동성왕은 백제의 왕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 그리고 열도에 걸친 백제 신라 가야 세력을 모두 통치하는 대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당시 동북아 최강자중의 하나였던 북위와 전쟁해서 승리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반도의 백제인들로부터 암살을 당하고 폭군이라는 오명을 쓴 채 역사에 기록되어 잊혀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백제 가야 신라 세력의 특성이 모두 나타나는 동성왕의 나주 고분군은 일본 학자들, 그리고 일부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에 의해서 왜인의 유적이라 불리기도 하는 등의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中 역사학자 "모용 선비족은 黃帝의 후예" (daum.net)

입력 2007. 2. 28. 15:58수정 2007. 2. 28. 15:58
 

전혀 뿌리 다른 이민족을 '염황자손'으로

"황제족의 중국 북방 활동설 신뢰성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이돈관 특파원 = 4세기에서 5세기까지 지속된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 시기 5호의 하나인 연(燕)나라를 세워 북방의 패권을 다투던 모용선비(慕容鮮卑)족이 사실은 중국의 전설적 제왕인 황제(黃帝)의 후예라는 주장이 한 역사학자에 의해 제기됐다고 중국 언론이 27일 보도했다.

이는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 존재했던 모든 고대 국가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이른바 '다민족 통일국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순수 한족과 전혀 다른 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공인돼 온 고대 이민족을 중국인들이 민족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황제의 후예라고 강변하는 셈이어서 주목된다.

 

지금까지 중국인들에게 흉노(匈奴)족, 갈(갈<羊+曷>)족, 강(羌)족, 저(사람인변 없는 低)족 등과 함께 고대 소수민족의 하나로 알려져온 모용 선비족을 황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시의 삼연(三燕)문화연구소 레이광전(雷廣臻) 회장.

역사학 교수이기도 한 레이 회장은 "모용선비족이 문자를 갖지 못해 그 족속에 관한 내용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 밖에 없었지만 황제의 후손이라는 기억은 아주 명확하게 갖고 있었다"면서 몇몇 역대 전적의 기록을 그 증거로 들었다.

레이 회장에 따르면, 명(明)나라 양신(楊愼)의 '승암시화(昇巖詩話)' 가운데 "모용씨는 헌원(軒轅)의 후손임을 자처했다"고 돼있는데 이 헌원이 바로 황제다. '산해경(山海經)'에도 "북적(北狄)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황제의 후손을 시균(始均)이라 하고 시균은 북적에서 나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후대에 나온 '진서(晉書)'와 '북사(北史)'는 이 같은 산해경의 언급을 인용, "시균은 선비족의 시조"라고 기술했다. 특히 진서에는 진나라에 의해 '선비도독'으로 봉해진 모용외(慕容외<廣에서 黃대신 鬼>)에 대해 "창려극성(昌黎棘城)의 선비인이고, 웅(熊)씨의 후손인 그의 선조는 대대로 북이(北夷)에 살았으며 동호(東胡.흉노)라고 했다"고 돼있다.

레이 회장은 "진서에 나타나는 '창려극성'은 지금의 랴오닝성 이(義)현이고, 이른바 '웅씨의 후예'라는 것은 바로 황제의 후손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서에 모용선비가 도읍한 곳으로 나와 있는 '자몽지야(紫蒙之野)'는 고증 결과 서요하(西遼河) 상류, 즉 대흥안령 이남, 연산(燕山) 이북의 광대한 지구으로서 이 곳은 바로 최근 20-30년 동안 고고학자들이 주목해온 홍산문화(紅山) 구역"이라고 밝혔다.

 

중국고고학회 궈다순(郭大順) 상무이사는 이와 관련, 황제족은 북방 유목.어렵부락의 특징대로 자주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기 때문에 정처가 없었다면서 "요하문명이 제시하고 있는 내용, 앙소(仰韶)문화와 홍산문화의 남북접촉 등의 문화관계로 볼 때 5제(五帝) 전기의 여러 대표적 인물들이 북방에서 활동했다는 주장은 신뢰성이 있다"고 말했다.

1981년 새롭게 제시된 '다민족 통일국가론'을 뒷받침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중국 고고.역사학계 는 동북공정 본격 착수 전인 1996-2000년에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추진, 전설적인 나라로 여겨지던 하(夏)를 실제 존재했던 국가로 공식화해 중국의 역사시대를 1천229년이나 끌어올렸다.

이어 2001-2005년에는 제1차 '중화문명탐원(中華文明探源)공정'이라는 대규모 역사 프로젝트를 통해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알려진 '3황5제(三皇五帝)'를 실제 역사에 편입해 자국의 역사를 1만여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지난해부터 현재 제2차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 황제 = 염제(炎帝) 신농(神農) 등과 함께 중국의 전설적 제왕들인 3황5제에 포함되는 가상의 인물이다. 치우(蚩尤)의 난을 평정하고 천자가 됐으며, 집.의복.배.수레.활 등을 발명하는 한편 문자.음률(律).도량형.의술.달력 등을 제정한 중국 문명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진다.

중국인들을 일반적으로 '염황자손(炎黃子孫)'을 자처하며 염제와 황제를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으나 불멸의 중국 고대 사서인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전설이라며 아예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은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 황허(黃河)풍경명승구에 '염황 2제 조각공원'을 건설하고 이곳에 세계 최대 규모인 높이 106m의 염제와 황제(黃帝)의 조각상(염황 2제 조각상)을 공사 착수 20년 만에 완공했다.

◇ 모용 선비 = 모용씨는 흉노(동호)를 구성한 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선비의 한 세력. 중국 진(晉)나라와 고구려 사이 요동(遼東).요서(遼西) 지방을 무대로 활동한 선비족 내부에서는 3세기 이후 모용씨와 우문씨(宇文氏), 단씨(段氏), 척발씨(拓跋氏) 등 4개 세력이 주도권 다툼을 벌인 끝에 4세기 초 모용씨가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당시 모용 선비의 우두머리가 모용외(269-333년)였고,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황<皇+光>. 297-348년)이 세워 스스로 초대 왕이 된 전연(前燕)은 5호16국의 5호 가운데 하나로 한창 때의 강역은 현재의 산시(山西)성, 허난(河南)성, 안후이(安徽)성, 장쑤(江蘇)성, 랴오닝(遼寧)성의 일부에 걸쳐 있었다.

모용황은 서기 339년 고구려 서북방의 중요 거점인 신성(新城)을 공격한데 이어 342년에 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가는가 하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갔다가 돌려주기도 했다.

모용 선비는 370년 전연이 망한 뒤 다시 후연(後燕), 남연(南燕), 북연(北燕)을 잇달아 세웠으나 마지막 모용 선비의 왕국인 북연이 436년 북위(北魏)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완전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랴오닝성 차오양은 전연, 후연, 북연 등 3개 모용 선비 국가가 도읍했던 곳이어서 '삼연고도(三燕古都)'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don@yna.co.kr

 

 

[이덕일의 한국통사] 중국의 북연도 고구려 왕족이 세운 나라 | 5호 16국 시대 북연과 고구려 장수왕과 관계

2020. 8. 10.

https://youtu.be/p6YD4UV0GaM?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이덕일의 한국통사] 고구려 여인은 어떻게 위나라 황후가 됐을까 | 북위를 통치했던 고구려 귀족 일가의 숨겨진 이야기

2020. 8. 13.

https://youtu.be/u_dKp_v0XTk?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이덕일의 한국통사] 고구려 형제가 지배한 북위 선비족과 패권 다툼 이후 수나라 당나라 건국 주역되다

2020. 8. 21.

https://youtu.be/Jhocyzv_CmM?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Xianbei - Wikipedia

 

The Xianbei (/ʃjɛnˈbeɪ/simplified Chinese: 鲜卑; traditional Chinese: 鮮卑; pinyinXiānbēi) were an ancient nomadic people that once resided in the eastern Eurasian steppes in what is today MongoliaInner Mongolia, and Northeastern China. The Xianbei were strongly suggested to be a multilingual, multi-ethnic confederation consisting of Mongolic (who spoke either Pre-Proto-Mongolic[1], or proto-Mongolic[2][3][4] and para-Mongolic[4]), Tungusic[5] and Turkic peoples.[1][6] They originated from the Donghu people who splintered into the Wuhuan and Xianbei when they were defeated by the Xiongnu at the end of the third century BC. The Xianbei were largely subordinate to larger nomadic powers and the Han dynasty until they gained prominence in 87 AD by killing the Xiongnu chanyu Youliu. However unlike the Xiongnu, the Xianbei political structure lacked the organization to pose a concerted challenge to the Chinese for most of their time as a nomadic people.

After suffering several defeats by the end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 Xianbei migrated south and settled in close proximity to Han society and submitted as vassals, being granted the titles of dukes. As the Xianbei MurongTuoba, and Duan tribes were one of the Five Barbarians who were vassals of the Western Jin and Eastern Jin dynasties, they took part in the Upheaval of the Five Barbarians, initially as allies of the Jin before dissociating from them and declaring their autonomy. During the Sixteen Kingdoms period, the Xianbei founded several short-lived states in northern China.[7][8]

The Xianbei were at one point all subjected to the Di-led Former Qin dynasty before it fell apart not long after its defeat in the Battle of Fei River by the Eastern Jin. In the wake of the Former Qin's collapse, the Tuoba formed the Northern Wei dynasty and eventually reunited northern China, ushering China into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period. The Northern dynasties, all of which were either led or heavily influenced by the Xianbei, opposed and promoted sinicization at one point or another but trended towards the latter and had merged with the general Chinese population by the Tang dynasty.[9][10][11][12][13] The Northern Wei also arranged for ethnic Han elites to marry daughters of the Tuoba imperial clan in the 480s.[14] More than fifty percent of Tuoba Xianbei princesses of the Northern Wei were married to southern Han men from the imperial families and aristocrats from southern China of the Southern dynasties who defected and moved north to join the Northern Wei.[15]

Etymology[edit]

Figure of a Xianbei warrior from the Northern Dynasties (286–581 AD) era. The figure wear a covered "wind hat", trousers, short upper tunic and a cape tied around the neck, designed to protect against the wind and dust.

Paul Pelliot tentatively reconstructs the Later Han Chinese pronunciation of 鮮卑 as */serbi/, from *Särpi, after noting that Chinese scribes used 鮮 to transcribe Middle Persian sēr (lion) and 卑 to transcribe foreign syllable /pi/; for instance, Sanskrit गोपी gopī "milkmaid, cowherdess" became Middle Chinese 瞿卑 (ɡɨo-piᴇ) (> Mand. qúbēi).[16]

According to Schuessler, however, the Later Han Chinese pronunciation of 鮮卑 is /sian pie/, and he does not reconstruct syllables ending in -r for this stage. His reconstruction of the Later Han pronunciation of 室韋 is /śit wui/.[17]

On the one hand, *Särpi may be linked to Mongolic root *ser ~*sir which means "crest, bristle, sticking out, projecting, etc." (cf. Khalkha сэрвэн serven), possibly referring to the Xianbei's horses (semantically analogous with the Turkic ethnonym Yabaqu < Yapağu 'matted hair or wool', later 'a matted-haired animal, i.e. a colt')[18] On the other hand, Book of Later Han and Book of Wei stated that: before becoming an ethnonym, Xianbei had been a toponym, referring to the Great Xianbei mountains (大鮮卑山), which is now identified as the Greater Khingan range (simplified Chinese: 大兴安岭; traditional Chinese: 大興安嶺; pinyinDà Xīng'ān Lǐng).[19][20][21]

Shimunek (2018) reconstructs *serbi for Xiānbēi and *širwi for 室韋 Shìwéi < MC *ɕiɪt̚-ɦʉi.[22]

History[edit]

Mural paintings of court life in Xu Xianxiu's Tomb, Northern Qi Dynasty, 571 AD, located in TaiyuanShanxi province

Origin[edit]

Warring States period's Chinese literature contains early mentions of Xianbei, as in the poem "The Great Summons" (Chinese: 大招; pinyinDà zhāo) in the anthology Verses of Chu[23] and possibly the chapter "Discourses of Jin 8" in Discourses of the States.[24][25][a]

When the Donghu "Eastern Barbarians" were defeated by Modu Chanyu around 208 BC, the Donghu splintered into the Xianbei and Wuhuan.[39] According to the Book of the Later Han, "the language and culture of the Xianbei are the same as the Wuhuan".[40]

The first significant contact the Xianbei had with the Han dynasty was in 41 and 45, when they joined the Wuhuan and Xiongnu in raiding Han territory.[41]

In 49, the governor Ji Tong convinced the Xianbei chieftain Pianhe to turn on the Xiongnu with rewards for each Xiongnu head they collected.[41] In 54, Yuchouben and Mantou of the Xianbei paid tribute to Emperor Guangwu of Han.[42]

In 58, the Xianbei chieftain Pianhe attacked and killed Xinzhiben, a Wuhuan leader causing trouble in Yuyang Commandery.[43]

In 85, the Xianbei secured an alliance with the Dingling and Southern Xiongnu.[41]

In 87, the Xianbei attacked the Xiongnu chanyu Youliu and killed him. They flayed him and his followers and took the skins back as trophies.[44]

Xianbei Confederation[edit]

After the downfall of the Xiongnu, the Xianbei established their confederation in Mongolia starting from AD 93.

In 109, the Wuhuan and Xianbei attacked Wuyuan Commandery and defeated local Han forces.[45] The Southern Xiongnu chanyu Wanshishizhudi rebelled against the Han and attacked the Emissary Geng Chong but failed to oust him. Han forces under Geng Kui retaliated and defeated a force of 3,000 Xiongnu but could not take the Southern Xiongnu capital due to disease among the horses of their Xianbei allies.[45]

The Xianbei under Qizhijian raided Han territory four times from 121 to 138. .[46] In 145, the Xianbei raided Dai Commandery.[47]

Around 155, the northern Xiongnu were "crushed and subjugated" by the Xianbei. Their chief, known by the Chinese as Tanshihuai, then advanced upon and defeated the Wusun of the Ili region by 166. Under Tanshihuai, the Xianbei extended their territory from the Ussuri to the Caspian Sea. He divided the Xianbei empire into three sections, each ruled by twenty clans. Tanshihuai then formed an alliance with the southern Xiongnu to attack Shaanxi and GansuHan dynasty successfully repulsed their attacks in 158, 177. The Xianbei might have also attacked Wa (Japan) with some success.[48][49][50]

In 177 AD, Xia Yu, Tian Yan and the Tute Chanyu led a force of 30,000 against the Xianbei. They were defeated and returned with only a quarter of their original forces.[51] A memorial made that year records that the Xianbei had taken all the lands previously held by the Xiongnu and their warriors numbered 100,000. Han deserters who sought refuge in their lands served as their advisers and refined metals as well as wrought iron came into their possession. Their weapons were sharper and their horses faster than those of the Xiongnu. Another memorial submitted in 185 states that the Xianbei were making raids on Han settlements nearly every year.[52]

Three Kingdoms[edit]

Xianbei warrior horsemen armed with long bows. Northern Qi dynasty (北齊 550–577 CE), Taiyuan, Shanxi Province.[53]

The loose Xianbei confederacy lacked the organization of the Xiongnu but was highly aggressive until the death of their khan Tanshihuai in 182.[54] Tanshihuai's son Helian lacked his father's abilities and was killed in a raid on Beidi in 186.[55] Helian's brother Kuitou succeeded him, but when Helian's son Qianman came of age, he challenged his uncle to succession, destroying the last vestiges of unity among the Xianbei. By 190, the Xianbei had split into three groups with Kuitou ruling in Inner MongoliaKebineng in northern Shanxi, and Suli and Mijia in northern Liaodong. In 205, Kuitou's brothers Budugen and Fuluohan succeeded him. After Cao Cao defeated the Wuhuan at the Battle of White Wolf Mountain in 207, Budugen and Fuluohan paid tribute to him. In 218, Fuluohan met with the Wuhuan chieftain Nengchendi to form an alliance, but Nengchendi double crossed him and called in another Xianbei khan, Kebineng, who killed Fuluohan.[56] Budugen went to the court of Cao Wei in 224 to ask for assistance against Kebineng, but he eventually betrayed them and allied with Kebineng in 233. Kebineng killed Budugen soon afterwards.[57]

Kebineng was from a minor Xianbei tribe. He rose to power west of Dai Commandery by taking in a number of Chinese refugees, who helped him drill his soldiers and make weapons. After the defeat of the Wuhuan in 207, he also sent tribute to Cao Cao, and even provided assistance against the rebel Tian Yin. In 218 he allied himself to the Wuhuan rebel Nengchendi but they were heavily defeated and forced back across the frontier by Cao Zhang. In 220, he acknowledged Cao Pi as emperor of Cao Wei. Eventually, he turned on the Wei for frustrating his advances on another Xianbei khan, Sui. Kebineng conducted raids on Cao Wei before he was killed in 235, after which his confederacy disintegrated.[58]

Many of the Xianbei tribes migrated south and settled on the borders of the Wei-Jin dynasties. In 258 Tuoba Liwei's people settled in Yanmen Commandery.[7] The Yuwen tribe settled between the Luan River and Liucheng. The Murong and Duan tribes became vassals of the Sima clan. An offshoot of the Murong tribe moved west into northern Qinghai and mixed with the native Qiang people, becoming Tuyuhun.[41] The Qifu tribe initially settled around the Yellow River in Ningxia before moving inwards to Longxi Commandery. A branch of the Tuoba, the Tufa tribe, settled in the Hexi corridor. In 270, their chieftain, Tufa Shujineng, became the leader of a multi-ethnic rebellion against the Jin dynasty in Qin and Liang provinces but was defeated in 279 by Ma Long.[48]

Sixteen Kingdoms, Nirun and Northern Wei[edit]

Northern dynasties horseman

Northern Wei cavalry

Northern Wei cavalry

The third century saw both the fragmentation of the Xianbei in 235 and the branching out of the various Xianbei tribes.

Around 308 or 330 AD, the Rouran tribe was founded by Mugulü, but formed by his son, Cheluhui.[59] The Xianbei tribes TuobaMurong and Duan submitted to the Western Jin dynasty as vassals, the Tuoba were made Dukes of Dai, the Murong were made Dukes of Liaodong, and the Duan were made Dukes of Liaoxi. The three Xianbei tribes initially fought on the Western Jin side against the Xiongnu-led Han-Zhao state during the Upheaval of the Five Barbarians. They eventually withdrew from the conflict to focus on their respective fiefdoms as the Jin was driven out from northern China. Mass number of Chinese officers, soldiers and civilians fled south to join the Eastern Jin or north to join the Xianbei duchies which remained in direct communication with the Eastern Jin in southern China, receiving orders.

The Xianbei founded several of the Sixteen Kingdoms. Around the Hebei region, the Murong ruled over the Former Yan (337–370), Later Yan (384–407) and Southern Yan (398–410). In Gansu, the Qifu established the Western Qin (385–431) while the Tufa established the Southern Liang (397–414). Other states that they established but are not considered as part of the Sixteen Kingdoms were the Tuoba Dai (310–376), Duan Qi (350–356) and Western Yan (384–394).

The Xianbei people were all subjected to the Di-led Former Qin empire before its defeat at the Battle of Fei River and subsequent collapse in 383. Among the many people that broke away from the empire were the Tuoba Xianbei, who established the Northern Wei (386–535), which was the first of the Northern Dynasties (386–581). In 439, the Northern Wei conquered the last of the Sixteen Kingdoms, completing China's transition into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period.[60][61][62]

Xianbei belt buckles, 3–4th century AD

Sinicization and assimilation[edit]

Emperor Xiaowen of Northern Wei established a policy of systematic sinicization that was continued by his successors. Xianbei traditions were largely abandoned. The royal family took the sinicization a step further by changing their family name to Yuan. Marriages to Han elite families were encouraged.

The Northern Wei started to arrange for Han Chinese elites to marry daughters of the Xianbei Tuoba royal family in the 480s.[14] More than fifty percent of Tuoba Xianbei princesses of the Northern Wei were married to southern Han Chinese men from the imperial families and aristocrats from southern China of the Southern dynasties who defected and moved north to join the Northern Wei.[63] Some Han Chinese exiled royalty fled from southern China and defected to the Xianbei. Several daughters of the Xianbei Emperor Xiaowen of Northern Wei were married to Han Chinese elites, the Liu Song royal Liu Hui (刘辉), married Princess Lanling (蘭陵公主) of the Northern Wei,[64][65][66][67][68] Princess Huayang (華陽公主) to Sima Fei (司馬朏), a descendant of Jin dynasty (266–420) royalty, Princess Jinan (濟南公主) to Lu Daoqian (盧道虔), Princess Nanyang (南阳长公主) to Xiao Baoyin (萧宝夤), a member of Southern Qi royalty.[69] Emperor Xiaozhuang of Northern Wei's sister the Shouyang Princess was wedded to The Liang dynasty ruler Emperor Wu of Liang's son Xiao Zong 蕭綜.[70]

When the Eastern Jin dynasty ended, Northern Wei received the Han Chinese Jin prince Sima Chuzhi (司馬楚之) as a refugee. A Northern Wei Princess married Sima Chuzhi, giving birth to Sima JinlongNorthern Liang Xiongnu King Juqu Mujian's daughter married Sima Jinlong.[71]

In 534, the Northern Wei split into an Eastern Wei (534–550) and a Western Wei (535–556) after an uprising in the steppes of North China inhabited by Xianbei and other nomadic peoples.[72] The former evolved into the Northern Qi (550-577), and the latter into the Northern Zhou (557-581), while the Southern Dynasties were pushed to the south of the Yangtze River. In 581, the Prime Minister of Northern Zhou, Yang Jian, founded the Sui dynasty (581–618). His son, the future Emperor Yang of Sui, absorbed the Chen dynasty (557–589), the last kingdom of the Southern Dynasties, thereby unifying much of China. After the Sui came to an end amidst peasant rebellions and renegade troops, his cousin, Li Yuan, founded the Tang dynasty (618–907). Sui and Tang dynasties were founded by Han generals who also served the Northern Wei dynasty.[73][74] Through these political establishments, the Xianbei who entered China were largely merged with the Chinese, examples such as the wife of Emperor Gaozu of TangDuchess Dou and Emperor Taizong of Tang's wife, Empress Zhangsun, both have Xianbei ancestries,[75] while those who remained behind in the northern grassland emerged as later powers to rule over China as Mongol Yuan dynasty and Manchu Qing dynasty.

In the West, the Xianbei kingdom of Tuyuhun remained independent until it was defeated by the Tibetan Empire in 670. After the fall of the kingdom, the Xianbei people underwent a diaspora over a vast territory that stretched from the northwest into central and eastern parts of China. Murong Nuohebo led the Tuyuhun people eastward into central China, where they settled in modern Yinchuan, Ningxia.

Art[edit]

Xianbei head ornament with horse motif. Northern Dynasties (A.D. 386 - 581)

Northern Wei earrings. Northern Wei Dynasty, 5th century

Art of the Xianbei portrayed their nomadic lifestyle and consisted primarily of metalwork and figurines. The style and subjects of Xianbei art were influenced by a variety of influences, and ultimately, the Xianbei were known for emphasizing unique nomadic motifs in artistic advancements such as leaf headdresses, crouching and geometricized animals depictions, animal pendant necklaces, and metal openwork.[76]

Leaf headdresses[edit]

Main article: Buyao

The leaf headdresses were very characteristic of Xianbei culture, and they are found especially in Murong Xianbei tombs. Their corresponding ornamental style also links the Xianbei to Bactria. These gold hat ornaments represented trees and antlers and, in Chinese, they are referred to as buyao ("step sway") since the thin metal leaves move when the wearer moves. Sun Guoping first uncovered this type of artifact, and defined three main styles: "Blossoming Tree" (huashu), which is mounted on the front of a cap near the forehead and has one or more branches with hanging leaves that are circle or droplet shaped, "Blossoming Top" (dinghua), which is worn on top of the head and resembles a tree or animal with many leaf pendants, and the rare "Blossoming Vine" (huaman), which consists of "gold strips interwoven with wires with leaves."[77] Leaf headdresses were made with hammered gold and decorated by punching out designs and hanging the leaf pendants with wire. The exact origin, use, and wear of these headdresses is still being investigated and determined. However, headdresses similar to those later also existed and were worn by women in the courts.[76][77]

Animal iconography[edit]

Another key form of Xianbei art is animal iconography, which was implemented primarily in metalwork. The Xianbei stylistically portrayed crouching animals in geometricized, abstracted, repeated forms, and distinguished their culture and art by depicting animal predation and same-animal combat. Typically, sheep, deer, and horses were illustrated. The artifacts, usually plaques or pendants, were made from metal, and the backgrounds were decorated with openwork or mountainous landscapes, which harks back to the Xianbei nomadic lifestyle. With repeated animal imagery, an openwork background, and a rectangular frame, the included image of the three deer plaque is a paradigm of the Xianbei art style. Concave plaque backings imply that plaques were made using lost-wax casting, or raised designs were impressed on the back of hammered metal sheets.[78][79]

Horses[edit]

The nomadic traditions of the Xianbei inspired them to portray horses in their artwork. The horse played a large role in the existence of the Xianbei as a nomadic people, and in one tomb, a horse skull lay atop Xianbei bells, buckles, ornaments, a saddle, and one gilded bronze stirrup.[80] The Xianbei not only created art for their horses, but they also made art to depict horses. Another recurring motif was the winged horse. It has been suggested by archaeologist Su Bai that this symbol was a "heavenly beast in the shape of a horse" because of its prominence in Xianbei mythology.[78] This symbol is thought to have guided an early Xianbei southern migration, and is a recurring image in many Xianbei art forms.

Figurines[edit]

Xianbei figurines help to portray the people of the society by representing pastimes, depicting specialized clothing, and implying various beliefs. Most figurines have been recovered from Xianbei tombs, so they are primarily military and musical figures meant to serve the deceased in afterlife processions and guard their tomb. Furthermore, the figurine clothing specifies the according social statuses: higher-ranking Xianbei wore long-sleeved robes with a straight neck shirt underneath, while lower-ranking Xianbei wore trousers and belted tunics.[81]

Buddhist influences[edit]

Xianbei Buddhist influences were derived from interactions with Han culture. The Han bureaucrats initially helped the Xianbei run their state, but eventually the Xianbei became Sinophiles and promoted Buddhism. The beginning of this conversion is evidenced by the Buddha imagery that emerges in Xianbei art. For instance, the included Buddha imprinted leaf headdress perfectly represents the Xianbei conversion and Buddhist synthesis since it combines both the traditional nomadic Xianbei leaf headdress with the new imagery of Buddha. This Xianbei religious conversion continued to develop in the Northern Wei dynasty, and ultimately led to the creation of the Yungang Grottoes.[76]

Language[edit]

XianbeiNative toRegionEthnicityEraLanguage familyLanguage codesISO 639-3

Serbi
Xianbei state
Mongolian–Manchurian grassland
Xianbei
c. 3rd century BC – c. 3rd century AD

Painting of the Tuoba-Xianbei Northern Zhou general Li Xian (504–569 AD)

The Xianbei are thought to have spoken Mongolic or Para-Mongolic languages, with early and substantial Turkic influences, as Claus Schönig asserts:

The Xianbei derived from the context of the Donghu, who are likely to have contained the linguistic ancestors of the Mongols. Later branches and descendants of the Xianbei include the Tabghach and Khitan, who seem to have been linguistically Para-Mongolic. [...] Opinions differ widely as to what the linguistic impact of the Xianbei period was. Some scholars (like Clauson) have preferred to regard the Xianbei and Tabghach (Tuoba) as Turks, with the implication that the entire layer of early Turkic borrowings in Mongolic would have been received from the Xianbei, rather than from the Xiongnu. However, since the Mongolic (or Para-Mongolic) identity of the Xianbei is increasingly obvious in the light of recent progress in Khitan studies, it is more reasonable to assume (with Doerfer) that the flow of linguistic influence from Turkic into Mongolic was at least partly reversed during the Xianbei period, yielding the first identifiable layer of Mongolic (or Para-Mongolic) loanwords in Turkic.[4]

It is also possible that the Xianbei spoke more than one language.[83][84][5][1]

Anthropology[edit]

According to Sinologist Penglin Wang, some Xianbei had mixed west Eurasian-featured traits such as blue eyes, blonde hair and white skin due to absorbing some Indo-European elements. The Xianbei were described as white on several occasions. The Book of Jin states that in the state of Cao Wei, Xianbei immigrants were known as the white tribe. The ruling Murong clan of Former Yan were referred to by their Former Qin adversaries as white slaves. According to Fan Wenlang et al. the Murong people were considered "white" by the Chinese due to the complexion of their skin color. In the Jin dynasty, Xianbei Murong women were sold off to many Han Chinese bureaucrat and aristocrats and they were also given to their servants and concubines. The mother of Emperor Ming of JinLady Xun, was a lowly concubine possibly of Xianbei stock. During a confrontation between Emperor Ming and a rebel force in 324, his enemies were confused by his appearance, and thought he was a Xianbei due to his yellow beard.[85] Emperor Ming's yellowish hair could have been inherited from his mother, who was either Xianbei or Jie. During the Tang dynasty, the poet Zhang Ji described the Xianbei entering Luoyang as "yellow-headed". During the Song dynasty, the poet and painter Su Shi was inspired by a painting of a Xianbei riding a horse and wrote a poem describing an elderly Xianbei with reddish hair and blue eyes.[86]

There was undoubtedly some range of variation within their population. Yellow hair in Chinese sources could have meant brown rather than blonde and described other people such as the Jie rather than the Xianbei. Historian Edward H. Schafer believes many of the Xianbei were blondes, but others such as Charles Holcombe think it is "likely that the bulk of the Xianbei were not visibly very different in appearance from the general population of northeastern Asia."[83] Chinese anthropologist Zhu Hong and Zhang Quan-chao studied Xianbei crania from several sites of Inner Mongolia and noticed that anthropological features of studied Xianbei crania show that the racial type is closely related to the modern East-Asians, and some physical characteristics of those skulls are closer to modern Mongols, Manchu and Han Chinese.[87]

Genetics[edit]

A genetic study published in The FEBS Journal in October 2006 examined the mtDNA of 21 Tuoba Xianbei buried at the Qilang Mountain Cemetery in Inner Mongolia, China. The 21 samples of mtDNA extracted belonged to haplogroups O (9 samples), D (7 samples), C (5 samples), B (2 samples) and A.[88] These haplogroups are characteristic of Northeast Asians.[89] Among modern populations they were found to be most closely related to the Oroqen people.[90]

A genetic study published in the Russian Journal of Genetics in April 2014 examined the mtDNA of 17 Tuoba Xianbei buried at the Shangdu Dongdajing cemetery in Inner Mongolia, China. The 17 samples of mtDNA extracted belonged to haplogroups D4 (four samples), D5 (three samples), C (five samples), A (three samples), G and B.[91]

A genetic study published in the American Journal of Physical Anthropology in November 2007 examined 17 individuals buried at a Murong Xianbei cemetery in Lamadong, Liaoning, China ca. 300 AD.[92] They were determined to be carriers of the maternal haplogroups J1b1, D (three samples), F1a (three samples), M, B, B5b, C (three samples) and G2a.[93] These haplogroups are common among East Asians and some Siberians. The maternal haplogroups of the Murong Xianbei were noticeably different from those of the Huns and Tuoba Xianbei.[92]

A genetic study published in the American Journal of Physical Anthropology in August 2018 noted that the paternal haplogroup C2b1a1b has been detected among the Xianbei and the Rouran, and was probably an important lineage among the Donghu people.[94]

A full genome analysis published in November 2023 analyzed the genomic data of nine Xianbei individuals (ca. 200 CE to 300 CE), together with previous published Xianbei samples, covering almost the entire period of Xianbei as well as pre- and post-Xianbei periods, and found that the Xianbei displayed a homogenous population with nearly exclusive Ancient Northeast Asian ancestry. The authors further remark that these results are consistent with an Amur River region, specifically around the Greater Khingan mountain range area, origin for the ancestral Xianbei population. Early Xianbei did not display signs of admixture from surrounding groups, while later Xianbei displayed limited amounts of admixture with "late Xiongnu-Sarmatian-like" and Han Chinese ("Yellow River farmer-like") groups. Later Xianbei in Northern China adopted an agricultural lifestyle and mixed with the local population, contributing to the genetic history of Northern China.[95]

 
Northern Qi hunting scene
 
Northern Qi hunting scene

Notable people[edit]

Female Xianbei figure

Pre-dynastic[edit]

  • Tanshihuai (檀石槐, 130–182), Xianbei leader who led the Xianbei State until his death in 182
  • Kebineng (軻比能, died 235), a Xianbei chieftain who lived during the late Eastern Han dynasty and Three Kingdoms period
  • Tufa Shujineng (禿髮樹機能, died 279), a Xianbei chieftain who lived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Sixteen Kingdoms[edit]

Yan[edit]

Dai[edit]

Northern dynasties[edit]

Painting depicting a Xianbei Murong archer in a tomb of the Former Yan (337–370).

"Nirun" and Rouran[edit]

Tribe[edit]

Khaganate[edit]

Sui Dynasty[edit]

Tang Dynasty[edit]

Modern descendants[edit]

Most Xianbei clans adopted Chinese family names during Northern Wei Dynasty. In particular, many were sinicized under Emperor Xiaowen of Northern Wei.

The Northern Wei's Eight Noble Xianbei surnames 八大贵族 were the Buliugu 步六孤, Helai 賀賴, Dugu 獨孤, Helou 賀樓, Huniu 忽忸, Qiumu 丘穆, Gexi 紇奚, and Yuchi 尉遲.

The "Monguor" (Tu) people in modern China may have descended from the Xianbei who were led by Tuyuhun Khan to migrate westward and establish the Tuyuhun Kingdom (284–670) in the third century and Western Xia (1038–1227) through the thirteenth century.[96] Today they are primarily distributed in Qinghai and Gansu Province, and speak a Mongolic language.

The Xibe or "Xibo" people also believe they are descendants of the Xianbei, with considerable controversies that have attributed their origins to the Jurchens, the Elunchun, and the Xianbei.[97][98]

Xianbei descendants among the Korean population carry surnames such as Mo 모 (ChinesepinyinWade–Gilesmu (shortened from Murong)), Seok Sŏk Sek 석 (ChinesepinyinshíWade–Gilesshih (shortened from Wushilan 烏石蘭), Won Wŏn 원 (ChinesepinyinyuánWade–Gilesyüan (the adopted Chinese surname of the Tuoba)) and Dokgo 독고 (Chinese獨孤pinyinDúgūWade–GilesTuku (from Dugu)).[99][100][101][102][103][104][105]

Notes[edit]

  1. ^ Zhang Zhengming (2017) accepts the reading 鮮卑[26] (also seen in the early 19th century version published by Jinzhang bookstore (錦章図書局) in Shanghai[27]) as the ethnonym of the people who accompanied the Chu. However, 鮮卑 Xianbei is likely a scribal error for 鮮牟 Xianmou (as in other versions like Sibu Congkan (四部叢刊),[28] or Siku Quanshu (四庫全書)[29]). Eastern Wu scholar Wei Zhao states that the 鮮牟 Xianmou were an Eastern Yi nation,[30][31] while the 鮮卑 Xianbei were of Mountain Rong origin.[32][33] The apparent scribal error results in contradicting statements, apparently by Wei Zhao, that the Xianbei were an Eastern Yi nation[34] and a people of Mountain Rong origin.[35] Huang Pilie (1763-1825) states that the reading 鮮卑 Xianbei was inauthentic and identifies the 鮮牟 Xianmou with 根牟 Genmou, an Eastern Yi nation conquered by the Lu state in the 9th year of Duke Xuan of Lu's reign (600 BCE).[36][37][38]
 

 

 

<참고자료>

 

분자인류학논단 | 탁발선비... - Daum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 오환족 - Daum 카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