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북위(선비) 본문
신채호
선비족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나라의 중간에 선 탓에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나라를 도우면 한나라가 이기는 식으로 양국의 승패를 좌우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선비(鮮卑)라 불린 종족이다. 선비족이 조선의 서북쪽인 몽골 지역에 거주하다가 흉노족 모둔에게 패해 본거지를 잃고 외흥안령·내흥안령1) 부근으로 이주했다는 점은 제2편 제3장(제3편 제2장 조선 분립 이후의 신조선의 착각인 듯하다_옮긴이)에서 서술했다.
그 뒤 선비족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여전히 선비라고 불렸고, 또 하나는 오환(烏桓)이라고 불렸다. 둘은 언어나 풍속이 거의 동일했다. 이들은 짐승 고기를 먹고 짐승 가죽을 입으며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했다. 각각 읍락에 나뉘어 살았는데, 전체 부족을 관할하는 대인(大人)이 있고 읍락마다 부대인(副大人)이 있었다. 그들은 대인이나 부대인의 명칭으로 자기네 성(姓)을 만들었다. 그들은 투쟁을 즐긴 탓에 젊은 사람을 존대하고 늙은 사람을 천대했다.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일이 생기면 나무에 새긴 신표로 각 집단을 소집했다. 모든 소송은 대인이 결정했고, 지는 사람은 소나 양으로 배상했다.
조선이 모둔에게 패한 뒤, 선비와 오환은 조선에 복속하지 않고 도리어 조선 열국을 침략했다. 고구려 초에 유류왕은 이 점을 염려해서 부분노의 전략에 따라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그런 뒤 왕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는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부분노가 지휘하는 부대는 샛길로 은밀히 선비국의 후면으로 진입했다. 왕이 먼저 전투를 벌이다가 거짓으로 패주했다. 그러자 선비는 소굴을 비우고 급히 추격했다. 이 틈에 부분노가 소굴을 기습적으로 점령한 뒤 왕의 군대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여 선비의 항복을 받고 속국으로 삼았다.
오환의 경우에는, 한무제가 위우거를 멸망시킨 뒤 이들을 권유하여 지금의 직예성·산서성 등지인 우북평·어양·상곡·안문(雁門)·대군 일대에 정착시킨 다음에 흉노족에 대한 정찰을 맡도록 했다. 그 뒤 소제(한나라 소제_옮긴이) 때에 오환이 날로 번성하자, 그 당시 한나라 권력자인 곽광은 이들이 후일에 걱정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이에 오환이 과거에 흉노족 모둔에게 참혹하게 패했던 역사를 들춰내어 오환으로 하여금 모둔의 무덤을 파헤쳐 지난날의 원수를 보복하라고 부추겼다. 그러자 흉노의 호연제 선우는 대노해서 정예 기병 2만으로 오환을 쳤다. 오환이 한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한나라는 3만 병력을 보내 구조한다 하고는 그냥 멀리서 관망했다. 그러다가 흉노가 철군하자 오히려 오환을 습격하여 무수한 학살을 자행했다. 이로써 오환은 쇠약해져서, 다시는 한나라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 왕망 때에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도록 하고 그들의 처자를 각 주군(州郡)에 볼모로 보냈다. 그런 뒤 ‘흉노를 전멸하기 전에는 처자들이 귀환할 수 없다’고 압박하자, 오환에는 이에 원한을 품고 도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자 왕망은 볼모로 잡은 처자들을 학살했다. 이 참혹함이 매우 심했다.
왕망이 망하고 중국이 혼란스러워지자, 고구려 모본왕이 이를 틈타 요동을 회복한 뒤 양평성의 명칭을 예전의 고구려 명칭인 오열홀로 고쳤다. 그러고는 선비와 오환을 규합하여 중국을 자주 공격했다.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한나라를 중흥한 뒤, 요동군을 지금의 난주로 옮기고 고구려를 막기 위해 채동(蔡彤)2)을 요동태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채동은 전쟁에서 자주 불리해지자, 선비 추장 편하에게 재물을 주고 오환 추장 흠지분을 살해하도록 했다. 그러자 모본왕이 선비와 오환을 다시 타일러 공동작전을 펴니, 한나라의 전략이 다시 궁색해졌다. 이에 한나라는 매년 2억 7천만 전(錢)을 고구려·선비·오환 3국에 공물로 납부하기로 조약을 맺고 휴전을 했다.
한나라를 이긴 뒤로 매우 교만해진 모본왕은 아플 때는 사람을 안석(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_옮긴이)으로 삼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삼고 그 사람이 꼼짝하면 목을 베어 죽였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시종인 두노가 왕의 베개가 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친구 앞에서 울며 사정을 하소연하니, 친구는 “나를 보살펴주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했다. 지금 임금은 포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다. 너는 그를 죽여라”고 했다. 이에 두노는 칼을 품고 있다가 왕을 찔러 죽였다. 모본왕이 피살된 뒤, 신하들은 모본왕의 태자가 못나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태조를 맞이해서 왕으로 세웠다.
〈고구려 본기〉는 대주류왕 편 이후로 분명히 연대가 삭감됐다. 참고로 쓸 만한 자료는 모본왕 편 이후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연도 삭감의 흔적을 은닉하기 위한 허위의 내용이다. 모본왕은 대주류왕의 증손이나 4대손 정도일 것이다. 또 모본왕 때 요동을 회복했다는 기록이 〈고구려 본기〉에는 없지만, 요서의 10성(城)을 수축한 태조대왕 3년 이전에 요동을 한 차례 회복했음이 명백하다. 또 《후한서》 〈동이 열전〉에서는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약탈하자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뢰로 회유하니, 다시 머리를 숙였다”3)고 했지만, 《후한서》 〈채동 열전〉에서는 해마다 전(錢) 2억 7천만을 주었다고 했다. 이는 세공(歲貢)이지, 은혜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1)
선비족 모용씨의 강성
선비족은 항상 고구려에 복속했었다. 용맹한 단석괴도 명림답부의 통제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발기의 난 때문에 요동을 잃고 약해지자, 선비족은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붙었다. 후한 말기에 원소와 조조가 대립할 때, 선비족과 오환족은 원소에게 붙었다. 원소가 망한 뒤에 조조는 서기 207년 7월의 장마를 이용해서, 노룡새1) 500리를 몰래 나와 선비족과 오환족을 불시에 공격해 그들의 소굴을 파괴했다. 이로써 오환족은 쇠망했다. 선비족은 나중에 가비능이란 자가 나타나자 다시 강성해져서 후한의 유주와 병주를 자주 침략했다. 이에 후한 유주자사 왕웅이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하자, 선비족은 다시 쇠약해졌다.
서기 250년 무렵, 선비족에서는 우문씨·모용씨·단씨·탁발씨라는 4부가 패권을 다투었다. 그중 모용씨에서 모용외란 인물이 용맹하고 명석하여 이 부족이 가장 강성해졌다. 이들은 창려 대극성 즉 지금의 동몽골 특묵우익 부근을 거점으로 사방을 약탈했다. 당시 중국의 위·촉·오 삼국이 다 망하고 진(晋)나라 사마씨가 중국을 통일했지만, 모용외에게 자주 패배하는 바람에 요서 일대가 항상 소란스러웠다. 어떤 역사가들은 모용씨의 거점인 창려가 지금의 난주 부근이었다고 말하지만, 《진서》 〈무제 본기〉에서 “모용외가 창려를 침략했다”고 한 것을 보면 모용씨의 창려는 지금의 난주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모용씨의 창려는 훗날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이 도읍을 둔 용성(龍城)과 멀지 않은 곳이라고 봐야 한다.(2)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서기 197년 발기의 반란 이후부터 서기 370년 고국원왕의 말년까지는 고구려의 중쇠시대였다. 하지만 미천왕 시대는 이 시기에서 가장 나은 시기였다.
필자는 예전에 환인현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때 그곳의 문인이자 만주족인 왕자평에게 들은 말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고구려 때 우굴로란 대왕이 있었다. 신분이 낮을 때에 처지가 불우해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하면서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다.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을 우굴로(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라고 하는 것은 그 대왕의 이름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렇게 걸식할 정도로 곤궁하면서도 대왕은 요동을 경영할 뜻을 늘 품고 살았다. 그래서 요동 각지에서 걸식할 때에, 산천의 형세와 도로의 원근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갖고 다니며 길가에 뿌렸다. 자신이 다닌 길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지금도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다.”
우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는 을불뿐이므로, 우굴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의 소싯적 이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천왕은 서기 300년부터 331년까지 31년간 재위한 제왕이다. 그 31년간의 역사는 선비족 모용씨와 혈전을 벌인 역사다. 축소된 〈고구려 본기〉와 과장된 《진서》를 종합한 뒤 그중에서 진실에 가까운 것을 골라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현도군의 회복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 또다시 한나라의 소유가 됐다는 점은 앞에서 서술했다. 즉위한 이듬해에 현도군을 공격한 미천왕은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평양에 옮기고, 재위 16년에 마침내 현도성을 점령했다.
2) 낙랑군의 회복
한무제 때 한사군의 하나였던 낙랑군은 대대로 이동이 매우 잦았다. 대체로 요동 땅에 잠정적으로 설치한 것으로서, 평양의 낙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고구려 본기〉 동천왕 편에 나오듯, 위나라 군대가 낙랑으로 물러날 때에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평양 천도 이후에도 위나라·진(晋)나라의 낙랑태수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중국의 낙랑이 조선의 평양인 남낙랑이었다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도읍인 동시에 중국 낙랑군의 군청 소재지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천하에 어찌 이처럼 모순적인 역사적 사실이 있었겠는가.
미천왕이 낙랑을 점령한 것은 재위 14년째인 서기 313년1)이었다. 당시 진나라 사람인 장통이 낙랑·대방 두 군(대방도 요동에 잠정적으로 설치된 군이다. 장단이나 봉산의 ‘대방국’과는 다르다)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미천왕이 장통을 공격하자, 항거할 힘이 없는 장통은 모용외의 부장인 낙랑왕 모용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모용준은 구원하러 나왔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모용준은 장통을 꾀어 천여 호의 민가를 데리고 모용외에게 투항하도록 했다. 이에 모용외는 류성(柳城) 즉 지금의 금주(錦州) 등지에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에 임명했다. 한편,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소유가 됐다.
3) 요동 승전
요동군청 소재지는 양평 즉 지금의 요양이었다. 《진서》에서는 “미천왕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배하자 화친을 구걸했다”고 했지만, 《양서》에서는 “을불이 요동을 자주 침략했다. 모용외가 막을 수 없었다”라고 하여 모용외가 미천왕에게 항상 패배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두 기록이 상호 모순된다.
《진서》는 당태종 때 지어진 책이다. 당태종은 요동이 중국의 요동이었던 것처럼 위조함으로써 자국 신민(臣民)을 고무하고 고구려에 대한 전쟁 열기를 일으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이전 왕조의 역사서인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 등에 적힌 조선 관련 기사, 특히 고구려 관련 기사를 상당 부분 조작했다. 이 정도였으니 자기 시대에 편찬한 《진서》는 어떠했겠는가. 따라서 《양서》에 기록된 내용이 진실일 것이다. 당시는 현도와 낙랑이 정복된 뒤였으니, 겨우 몇 개 현(縣)만 남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정도로만 언급한다.
4) 극성 전투
서기 320년, 미천왕은 선비족 우문씨·단씨 및 진(晋)나라 평주자사 최비와 연합하여 모용외의 서울인 극성을 쳤다. 그러자 모용외는 네 나라를 이간시켰다. 이 때문에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나고, 우문씨와 최비는 모용외와 싸우다가 대패했다. 이에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如奴子)는 사성(詞城)을 지키다가 모용외의 장수인 장통에게 패했다. 이상은 《진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사실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여노자는 고노자(高奴子)의 오자인 것 같지만, 모용외를 여러 차례 격파한 명장인 고노자가 장통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은 의심스럽다. 또 고노자가 봉상왕 5년 이후로 〈고구려 본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가 그 즈음에 사망했다는 뜻인데, 그런 그가 근 40년 만에 갑자기 출현하는 것은 이상하다. 따라서 위의 내용은 조작된 기록일 것이다.(3)
광개태왕의 환도성 천도와 선비족 정복
태왕은 야심이 넘치고 군사전략이 출중한 동시에, 동족에 대한 사랑도 많았다. 백제를 공격한 것도 백제가 일본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지, 영토를 탈취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태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방의 강력한 선비족을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성과 직예성 등지를 소유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남방과의 전쟁은 소극적 의미밖에 없었고, 북방과의 전쟁만이 적극적 의미를 띠었다.
태왕은 지금의 개평 부근에 있었던 제5도읍인 안시성으로 천도한 뒤, 선비족 모용씨와 10여 년간 전쟁하면서 항상 상대의 허점을 이용해 선비족 군대를 기습적으로 격파했다. 요동 땅에서부터 지금의 영평부인 요서까지 차지하니,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던 후연왕 모용수도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이은 후연왕 성(盛)과 희(熙) 같은 중국 역사상의 대(大)영웅들도 다들 꺾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천 리의 영토를 고구려에 내줄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그 존호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했다.
그런데 《진서》에서는 “고구려왕이 연나라(후연_옮긴이) 평주의 숙군성을 침략하자 평주자사 모용귀가 도주했다”라고 한 것을 빼고, 그 외에는 항상 후연이 승리한 것처럼 기록했다. 왜 이랬을까? 《춘추》에서 북적(北狄)이 위나라를 멸망시킨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처럼, 외부와의 전쟁에서 패한 사실을 숨기는 것은 중국 사관들이 습성이다. 사실, 모용씨의 후연이 망하고 탁발씨의 북위가 강해진 것도 태왕이 후연을 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또 동진의 유유(劉裕)가 일어나 선비족과 강족을 꺾고 또 유송(劉宋)의 고조가 황제가 될 기반을 닦은 것도 태왕이 후연을 친 것과 간접적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완고한 습성을 고수하느라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서기 5세기 초반에 중국 정세가 바뀐 실제 원인이 은폐된 것이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태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왕이 작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서》보다 더 신뢰성이 높다. 그런데 선비족 정벌에 관한 내용이 한 구절도 기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예전에 태왕의 비석을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간 적이 있다. 그곳 여관에서 만주족인 영자평이란 소년을 만났다. 그와의 필담에서 나온 비석에 관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비석은 오랫동안 풀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영희(만주족)가 이것을 발견했다. 그 비문에서 고구려가 영토를 빼앗은 부분은 모두 다 칼과 도끼로 도려내져 있었다. 그래서 식별 가능한 문구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뒤 일본인이 이것을 차지한 뒤 영리를 위해 비문을 탁본해서 팔았다. 이때 문구가 깎인 곳을 석회로 바르다 보니, 더욱 더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내용이 첨부됐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태왕이 선비족을 정복한 전공이 비문에 없는 것은 그런 내용이 삭제됐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태왕이 평주를 함락한 뒤 선비족의 쇠락을 틈타 계속 진격했다면, 태왕이 개척한 영토는 그 존호 이상으로 넓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후연 신하인 풍발이 후연왕 모용희를 죽이고, 후연에서 벼슬하던 고구려왕 후손 고운을 북연의 천왕으로 옹립하고 태왕에게 보고했을 때였다. 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면서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종족 간의 도리를 정하고 전쟁을 그쳤다. 이로써 태왕의 서진정책은 종언을 고했다. 태왕은 백제 근구수왕이 즉위하기 전년인 374년에 태어나서 391년에 즉위하고 412년에 죽었다. 향년 39세였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의 비문은 지금의 봉천성 집안현 북쪽 2리쯤에 있다. 높이는 약 21척이다. 서기 ○○○○년에 만주족인 영희가 발견해서(영희가 처음 탁본을 입수한 것은 1903년이다) 탁본해보니 비문에 빠진 글자가 많았다. 그 뒤 일본인이 비석을 입수한 뒤 탁본하여 판매했다. 이때는 빠진 글자를 석회로 발라 덧붙였다. 학자들은 그것의 실제 모습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4)
박선희
고구려 금관이 선비족에 미친 영향
그림 21, 22, 22-1. 북표현 서관영자 북연 풍소불 무덤 출토 금제관식
평양성시기 고구려의 금관은 주변민족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령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북연 풍소불(馮素弗) 무덤 출토의 금제관식 및 금제관(그림 21, 22, 22-1, 23)과 내몽고자치구 달무기(達茂旗) 출토의 금제관식이다.
요령성 북표현 서관영자에 위치한 석곽묘는 북연의 풍소불 무덤이라고 밝혀졌다.1) 풍소불은 오호십육국시대 후연의 모용운을 이어 왕위에 오른 천왕 풍발의 동생이다.2) 광개토대왕 17(408)년에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후연왕 모용운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어 화친을 맺었다.3)
모용운은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성이 고(高)씨였는데,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가 태자로 있을 때 그를 양자로 삼아 모용씨 성을 하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그를 종족의 예로 대했던 것이며, 모용운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처럼 북연이 갖는 고구려 혈통의 내용과 풍소불 무덤이 위치한 지역이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점을 볼 때,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이 한민족의 문화적 성격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발굴자들도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철로 만든 갑편과 말갑옷 조각 및 금동으로 만든 등자(그림 24)의 경우는 그 형태가 중국의 것과 달라 중국의 유물로 편입시키지 못하고 있다.4)
철로 만든 갑옷 조각은 그 형태에서 긴 장방형과 아래가 둥근 장방형을 주된 양식으로 하고 있는데, 이 같은 양식은 고조선과 이를 계승한 여러 나라 갑옷의 고유양식이다.
그림 23. 북표현 서관영자 북연 풍소불 무덤 출토 금제관
그림 24. 풍소물 무덤 출토 금동등자
또한 말갑옷은 한민족이 중국이나 북방지역보다 약 2세기 정도 앞섰기5) 때문에 이는 고구려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철투구의 경우도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투구 전체를 주물을 부어 만든 것을 사용했고,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것처럼 장방형의 갑옷조각을 연결하여 만든 철투구는 사용하지 않았다. 등자의 경우도 발굴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출토된 등자 가운데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이른 연대의 것이라고 하였는데 중국의 등자 사용연대가 고구려보다 늦기 때문이다.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등자는 고구려 등자의 고유한 양식을 보인다.6) 그 밖에 은과 동으로 만든 허리띠 역시 끝모습이 나뭇잎모양으로 된 한민족의 고유양식을 나타낸다.
이상의 분석된 내용을 근거로, 북연의 문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았거나 고구려의 것을 수입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금제관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나뭇잎모양의 장식이 달린 금제관식은 고구려의 것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 서술한 요령성 북표현 방신촌에서 출토된 금으로 만든 꽃가지모양의 장식과 유사한 관식이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되었다. 이 관식이 금으로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소머리 위에 뿔처럼 뻗어나간 줄기의 끝에 새순 또는 움모양의 나뭇잎이 줄기 끝에 장식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말머리 위에 뿔이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고 끝에 새순 또는 움모양의 나뭇잎이 장식되어 있다(그림 25, 26).
발굴자들은 이 유물이 북조시대(420~588년)에 속하는 선비족의 것이라고 했다.7) 이 유물은 북표현 방신촌에서 출토된 관식과 유사한 형식을 하고 있어, 선비족이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한민족이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생산하고 사용한 연대는 고조선시대부터이며, 중국이나 북방지역에서는 장식단추나 원형 또는 나뭇잎모양의 장식기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림 25, 26. 내몽고자치구 달무기 유적 출토 금제관식
따라서 선비족에게 갑자기 출현한 이 같은 관식은 고구려로부터의 영향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의 관식은 나무줄기를 표현했으나 이 달무기의 관식은 소와 사슴의 뿔을 묘사한 모습이며 나뭇잎모양의 장식도 모두 위로 향해 있는 등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선비족의 양식을 보여준다. 선비족은 고구려 초기에는 중국에 의한 호시(互市)나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통하여 고구려와 접촉이 비교적 활발했다.
호시의 상황은 『후한서』 「오환선비동이전」에 따르면, 동한 광무제 건무(光武帝 建武) 25(49)년 이후 명제(明帝, 57년) · 장제(章帝, 76년) · 화제(和帝, 89~104년)시기에 오환과 선비족은 장기적으로 영성(寧城)에서 호시를 하였다. 이 영성은 상곡(上谷)에 위치하는데 상곡은 지금의 하북성 선화(宣化) 서북쪽으로 한(漢)시대에 유주(幽州)에 속하는 지역이다. 이를 확인시켜주는 실제 예로 달무기에 근접한 내몽고자치구 화림격이현에 위치한 동한 고분벽화의 ‘영성도(寧城圖)’에 ‘영시중(寧市中)’이라는 방제(榜題)가 보이는데8) 이는 동한이 영성에 ‘호시’를 설치하고 북방민족들과의 무역과 왕래의 장소로 삼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본왕 때부터 미천왕때까지 줄곧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였는데, 동한 광무제에서 화제에 이르는 시기 유주지역에 여러 차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고구려가 요동태수와 화친을 하여 국경을 정상화시키거나 요동태수에게 패하는 등 동한이 영성에 호시를 설치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시기로 호시를 통하여 중국과 선비족 및 고구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우호적인 경우를 보기로 들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태조왕 69(122)년에 고구려는 선비의 군사 8천여 명을 데리고 중국의 요동지역을 공격하는 등 우호적인 접촉을 갖기도 하였다. 이후 3세기 말 무렵에 이르러 중국의 정권 내부가 혼란한 틈을 타서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하던 선비는 성장을 하게 되며, 줄곧 고구려를 침략하거나 화맹을 맺기도 했다. 이 같은 끊임없는 고구려와 선비의 접촉과 충돌은 선비가 고구려의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을 것이다.
따라서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은 아래 부분은 선비족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윗부분은 고구려의 고유양식인 나뭇잎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구나 내몽고자치구 달무기에서 출토된 금제관식과 북연의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은 모두 연대가 5~6세기에 걸쳐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금제관식인 요령성 북표현 방신촌 출토의 금제관식과 요령성 조양현 십이태향 원태자촌 출토 금제관식 그리고 요령성 조양 전초구 출토의 금제관식은 이보다 약 2~3세기 정도 앞서 출현한 것이므로, 달무기와 풍소불 무덤에서 출토된 금제관식에 시간적으로 충분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령성 출토 금제관식의 국적 재검토에서 서술했듯이 중국학자들은 방신촌 무덤을 처음 발굴했을 당시에는 북연(北燕)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다. 발굴자들은 이 무덤의 국적을 선비족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이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중국학자들은 이 무덤을 다시 북연의 무덤이라고 명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기 이전 준비과정에 있을 때였다. 중국학자들이 방신촌을 중심하여 북표와 조양 등지의 문화가 고구려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모를리 없다. 앞의 첫 페이지에서 설명했듯이 그들은 이 지역에 대한 유물 분석에서 고구려적 특징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고학의 유물특징에서 뿐만 아니라 문헌자료에 존재하는 북연의 종족성격을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삼연이 위치하고 있던 지역이 고대 한민족의 거주지역이었던 점도 잘 알고 있다. 삼연(三燕)은 전연(前燕)과 후연(後燕), 북연(北燕)으로 전연과 후연은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지만 북연은 고구려 사람이 세운 나라라는 점이다. 북연은 407~436년에 존속했던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高雲)이 후연(後燕)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운 나라로 광개토대왕은 사신을 보내 후연 왕 모용운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어 화친을 맺기도 했었다. 따라서 북연문화에는 고조선과 이를 계승한 고구려문화의 특징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중국학자들은 오늘날 만주가 그들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고대부터의 연고권을 주장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중국은 고대부터 천하는 중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천하(天下)사상이 그들 정치사상의 근간을 차지해왔다. 따라서 한국고대의 역사도 그러한 정치와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중국은 고대부터 다민족국가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어는 민족이나 종족이든 중국 영토 안에 거주한 사람들은 모두 중국의 구성요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천하(天下)사상의 또 다른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중국학자들은 역사를 민족 단위가 아닌 영역 중심으로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만주역사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어느 민족에 역사가 있었든 현재는 중국의 영토이므로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후 동북공정이 시작되면서 보다 노골화되어 아예 고조선 이전과 고조선 · 고구려 · 발해의 역사는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으로 서술되었다. 이것이 중국학자들이 방신촌 무덤을 비롯한 이 지역 유적과 유물들의 국적을 선비족에서 북연으로 수정한 까닭일 것이다.
한국학자들은 이러한 점들은 소홀히 하고 중국학자들이 선비족 무덤이라고 한 내용을 비판과 분석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 한국 고대 문화의 다양한 내용들이 삼연(三燕)문화 즉 북방문화 또는 선비족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관련성으로 무분별하게 연결시켜졌다. 한반도와 만주지역 무덤들에서 출토되어지는 모든 유물들의 통시적인 양식사를 고찰하지 않은 채 중국학자들이 북연 또는 선비족 무덤이라고 한 내용을 비판과 분석 없이 받아들여, 한반도 남부와 만주 집안지역의 한국 고대 문화의 다양한 내용들이 삼연(三燕)문화 즉 북방문화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관련성으로 무분별하게 연결시켜졌다.
우리 문화를 보고도 우리문화인 줄 모르고 남의 문화라고 해놓고 거기서 다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 민족문화의 원류를 한결같이 밖에서 찾아야 하는지 걱정이다.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첫째는 동천왕이 조양으로 천도한 평양성시기에 요령성의 북표현 방신촌과 원태자촌 및 전초구 출토의 금제관식들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방신촌에서 출토된 금으로 만든 관테둘레장식은 앞과 뒤로 금제관식을 꽂아 만든 금관양식이 당시 고구려 고유의 관장식 기법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특히 금제관식에 보이는 달개장식과 불꽃문양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관모장식의 특징으로 독창적 양식으로 발전되어 이웃나라에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5)
홍원탁
8. 정복왕조 출현의 전조(前兆): 흉노의 쇠퇴와 만주 선비족의 등장
2005.02.17
Fall of Xiong-nu and Rise of Manchurian Nomad Xianbei Replacing Xiong-nu
화평을 미끼로 한족들로부터 온갖 재화를 갈취 해 오던 몽골고원의 흉노족이 내분으로 몰락하고, 요서 초원의 소위 동호(東胡)라는 선비(鮮卑)족이 대체세력으로 나타나, 중국대륙에 본격적인 이민족 정복왕조의 등장을 예고하게 된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
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과 북으로 양분되자, 조정관료인 장궁(臧宮)은 흉노의 약세를 틈타 “고구려,” 오환, 및 선비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었다. 1 당시 광무제는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신조를 강하게 피력했다. 49년, 광무제는 푸짐한 선물과 국경무역을 제공해 선비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명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58년 이후에 후한 조정이 선비 부족장들에게 정기적으로 갖다 바친 금액은 년간 2억 7000만냥에 달했는데, 그 규모는 같은 기간 동안 남흉노에게 바친 것의 세배에 달하였다. 2
드디어 화제(和帝, 88-105) 즉위 직후인 89-93년 기간 중, 선비-남흉노-후한의 연합군이 오르콘 지역의 북흉노를 섬멸했다 살아남은 흉노 중 일부는, 몽골고원으로부터 계속 서쪽으로 달아나 발카하쉬와 아랄 초원지대를 경유해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에 까지 이르렀다. 이들 서방으로 달아난 흉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그 후손들이 “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374년경에 볼가강과 돈강을 건너 로마제국을 침공했다 441년부터 아틸라의 지휘를 받아 유럽대륙을 유린 하다가, 아틸라가 453년에 죽자, 훈족은 러시아 초원지대로 철수했다.
선사시대에 인도 북부와 이란에 정착했던 아리안족은 서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계곡으로 내려와 모헨조다로의 드라비다 문명을 파괴해 버렸다 그 잔혹상은 옛 인도의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 선명하게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리안족은 기원전 7세기-3세기 기간 중에는 스키타이라는 이름으로, 또 그 이후에는 여러 다른 이름으로 남부 러시아와 시베리아 서부의 목초지대를 점거하였다. 흉노족부터 시작해 후대에 몽골고원의 투르크와 몽골족들이 계속 서방으로 밀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아리안족과의 혼혈이 심화되었다. 난폭한 관행 탓에 역사적으로 여자들은 남자들 보다 유전적 유동성이 훨씬 높았다. 3 기하학적 형상으로 정형화된 스키타이 동물 예술품은, 동물형상을 주제로 정형화된 오르도스 흉노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모두 신변장식용이었다 스키타이족과 흉노족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고기만을 먹고, 천막 속의 모피 위에서 잠을 자며, 술잔으로 쓰기 위해 적의 두개골을 사냥했다.
만주 서부의 선비족들은 흉노족의 내란 덕분에 독립을 되찾고, 잔존 북흉노족의 대다수와 그들 영토를 흡수 병합하였다. 퉁구스족에 비해 선비족의 문화가 몽골(혹은 투르크)적인 것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비족의 전통은 흉노족과는 달리 선출된 지도자가 제한된 지휘권만을 갖는 약한 부족연맹체였다. 크고 적은 부족장들은 이따금 개성이 강한 지도자의 영도 하에 단합을 하기도 하지만, 흔히 이들 작은 부족들은 자치권을 행사하면서 제가끔 중국 왕조의 조공체제에 개별적으로 가입했다. 통치권이 세습되고 중앙집권화된 흉노족의 체제와는 달리, 선비족은 세습보다는 평등적 정치체제를 강조하였다. 북흉노의 쇠망이 묵특에게 정복당했던 선비 세력의 재기를 가능케 한 것이다. 4
후한 조정은 중소 선비 부족장들과 기꺼이 직접 거래를 했다. 많은 부족장들에게 그럴듯한 칭호를 수여하고, 각종 물자를 제공 함으로서, 유목민 부족들의 분열을 조장하려 했다. 변경지역의 한족 관리들은 중소 부족장들에게 지위에 걸맞은 칭호와 선물은 물론, 교역을 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면서, 그들이 개별적으로 조공체제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질투심이 강한 수많은 부족장들이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조정의 보조금을 얻을 수 있도록 개별적인 거래를 하는 전략을 구사 해, 선비족 중소 부족장들 스스로가 초원지대의 단결과 중앙집권화를 반대하게끔 유도했던 것이다. 5
Barfield (1989: 85)에 의하면, 후한 시대인 AD 108년 당시, 선비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중소 부족들은 120 개에 달했으나, 흉노의 이름으로 기록된 부족들의 수는 초원지역 전체를 통해 20여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출된 선비족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 부족이 통합된 군사작전을 벌려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 부족간의 단합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당시 선비족이 채택한 전략은, 흉노와 마찬가지로, 중국본토를 야만적으로 습격해서 약탈을 한 다음 초원지대로 퇴각을 하는 것이다 보상금 혹은 교역량을 크게 하기 위해 전쟁과 평화를 반복하고, 수적인 열세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중국본토를 점령하지 않았다.
공세적인 군사전략은 무관과 상인들의 출세 기회를 확대했기 때문에, 유교전통으로 훈련된 중국 조정의 문관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Jagchid and Symons, 1989, p. 54). 문신들은 진시황과 한무제가, 쉽게 평정 할 수도 없고, 중국에 편입시킬 수도 없는 땅을 놓고 흉노와 벌인 전쟁을 아주 졸렬한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조공 형식으로 포장한 유화정책을 통해 화평과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문관들은, 유목민들과 끊임없이 싸우기 보다는 그들에게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고 좋은 전략이라고 믿었다. 6 그러나 AD 300년 이후에 북중국을 정복한 만주 출신 정복왕조들이 채택한 전략은, 한족 조정의 전략과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몽골고원의 투르코-몽골 유목민들을 아주 힘들게 만들었다.
한족 왕조들이 흉노에 이어 선비 등 유목민들과 대치한 시기(BC 206-AD 316)는 로마제국이 게르만 민족과 대치하고 있던 시기와 대충 일치했다(BC 272-AD 395). 실크로드로부터 물자를 갈취하는 흉노를 좇아내기 위해, 후한(後漢) 조정은 반초(班超)와 그의 아들 반용(班勇)을 파견하여 94-127년 기간 중 타림분지 전체를 정복했다. 그 결과, 서역으로 가는 길이 열려 불교와 그레코-헬레니즘 양식의 간다라 예술이 전파되었고, 유라시안 대륙의 서쪽 끝과의 교류도 증진되었다.
따뜻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로마제국은 소빙하기 (小氷河期, BC 400-AD 300) 전반을 통해 번영을 구가했으나, 4세기, 지구 온난화 회복시작에 동반된 가뭄은 온갖 종류의 북방 야만족들이 준동하게 만들었다. 4세기는 북중국에서 5호16국시대(304-439)가 시작되는 시기와 일치하며, 유럽에서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374-453)과 일치한다. 로마 사람들한테 흉노 노릇을 하고 있던 게르만족들은, 4세기 초, 란인강으로부터 흑해에 걸쳐 전 로마제국 북방 국경선에 포진을 하고 있었다. 374년 이후의 훈족 침입은 연쇄반응을 촉발했다 미친 듯이 쫓는 훈족과 정신 없이 쫓기는 게르만족들에 의해 유럽전체가 황폐화 되었다.
Lamb(1995: 160-1)은 “우리가 카스피해 수면 높이의 변화와, 간헐적 강과 호수, 그리고 신강과 중앙아시아의 유기되어 버려진 거주지들에 대한 연구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4세기에 들어 한발이 극에 달해 실크로드 통행은 정지 상태에 빠졌었다 이러한 증거에 비추어 보면,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생활터전인 목초지대를 휩쓴 가뭄이, 야만 유목민족들과 그들에 쫓겨 떠돌이 신세가 된 종족들로 하여금, 서쪽 유럽대륙으로 밀려가는 연쇄반응을 촉발 해, 마침내는 로마제국을 쇠퇴시켰다는 Huntington의 (1907년)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6)
동아시아 역사 강의: 1-8 (2005. 2. 12.)
[각주]
1. Jagchid and Symons (1989: 63) 참조.
後漢書 卷十八 列傳第八 … 後匈奴飢疫 自相分爭… 建武 二十七年 宮…上書曰 … 諭告高句麗烏桓鮮卑攻其左 發河西四郡 … 如此 北虜之滅
2. Twitchet and Loewe (1986: 443)을 참조. 이 모든 비용은 산동과 강소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Jagchid and Symons (1989: 33)을 참조.
3. Cavalli-Sforza (2000: 82)
4. Barfield (1989: 86-87) 참조. 후한서(後漢書)는 AD 177년에 올려진 상소문의, “(북)흉노가 달아 난 이후, 선비 무리는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흉노가 차지하고 있던 땅을 점거하고, 1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떠들어 대는데, 정제된 금속과 연철(鍊鐵)도 이 선비 반도들 손에 들어가 있습니다. 한족 이탈자들은 선비의 땅으로 달아나 그들의 참모 노릇을 합니다. 선비족의 무기는 옛 흉노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말들은 더욱 빨라졌습니다”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45) 참조. 후한서 185년 조에는,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선비족들이 걸핏하면 국경을 침범하기 때문에 평화스럽게 지내는 해가 거의 없다. 그자들은 중국의 힘을 존경하거나, 중국의 관용을 고맙게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국경시장에서 교역을 할 때만 진귀한 중국 재화들을 값싸게 얻기 위해 복종을 하는 체 하며 나타난다 그들은 교역으로부터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것을 손에 넣자마자 본성을 나타내 해를 끼친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46) 참조.
後漢書 卷九十 烏桓鮮卑列傳第八十 … 自匈奴遁逃 鮮卑强盛 據其故地 稱兵十萬 … 精金良鐵 皆爲賊有 漢人逋逃 爲之謀主 兵利馬疾 過於匈奴
後漢書 卷四十八 列傳第三十八 鮮卑隔在漠北 …故數犯障塞… 唯至互市 乃來靡服 苟欲中國珍貨… 計獲事足 旋踵爲害
5. Barfield (1989: 246-249) 참조. Jagchid and Symons(1989: 24-51)에 의하면, 한족 조정은 때로는 이간질을 하여 선비 부족장들 사이에 싸움을 부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단순히 유목민 지도자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국경에 교역시장을 제공해 평화를 샀다.
漢書 卷九十四下 匈奴傳第六 十四下 莽將嚴尤諫曰 …中國罷耗…而天下稱武 是爲下
6. Barfield (1989: 246-249)
9. 2원통치조직의 창시: 모용선비의 연(燕) 정복왕조(北魏) 출현의 예고
2005.02.24
Commencing the Dual System: the Yan Kingdom of Mu-rong Xianbei
4세기 5호16국 시대에 모용외와 그 후계자들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정주 (漢族) 농민을 다스리는 관료적 행정조직과 (鮮卑族) 유목민을 다스리는 부족적 군사조직을 분리한 2원적(二元的) 통치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웠다. 요서 초원지대는 부족 전통에 따라 군사적으로 조직을 하고, 요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도시민들은 중국식으로 문관이 다스리는 2원제도를 운용했다 북위, 요, 금, 원, 청 등 후대의 모든 이민족 정복왕조들은 모용선비(慕容鮮卑)족이 창안한 2원제도를 개선 발전시켜 중국 대륙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모용선비 전연은, 359년에 중원을 점령한 후, 특이하게 빠른 속도로 중국화 되었다. 360년, 150만 명의 한족(漢族) 오합지졸을 징집해 남쪽의 동진(東晉)과 서쪽의 전진(前秦)을 정복하려 했다 370년, 전연은 부견(符堅)에 의해 멸망되었다. 하지만 전연은 365년에 낙양을 점령했었고, 단기간이나마 북중국 일대를 점령하여, 본격적 정복왕조인 북위(北魏, 386-534) 출현의 전조가 되었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인 만주 유목민-삼림족들이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과 자신들 고유의 군사적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심장부를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홍산문화 (紅山, 4,000-3,000 BC) 이후의 남만주 문화의 발전과정은, 특히 상나라에 앞섰던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 2,000-1,500 BC)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분명한 연속성을 유지하였다. 1 소위 주 무왕이 소공(召公)에게 기원전 1027년에 봉해주었다는 북연(北燕)은 전국시대(403-221 BC)에 와서야 비로서 중국왕조 역사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민족, 언어, 문화 등의 측면에서 볼 때, (북)연이 기원전 311년경에 정복을 했다는 란하(灤河), 대능하 (大凌河) 주변의 요서지역은 원래 중국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목민적 성격이 강한 청동기 하가점 상층문화(1100-300 BC)는 하북지역의 연 왕국(1027-222 BC)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홍산문화를 공유하면서 알타이 계통 언어를 사용했던 원시 선비-예맥족들이 바로 요서지역 전체의 주 구성원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연은 기원전 222년에 진 시황제에게 정복되었다. 그런데 사기를 보면, 묵돌이 기원전 209년경 흉노부족을 통일하고 선우가 될 무렵, 선비족의 세력이 전성기에 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비족은 바로 이 신흥 흉노 제국에 복속되고 만다.
선비족들은 2세기 중, 단석괴(檀石槐, 156-81)의 영도 하에, 짧은 기간이나마 하나의 제국을 이룩했었다. 이 단명의 선비제국은 몽골고원의 흉노 세력을 일시적으로 대체했었다 그 후, 한 동안 약세 이었다가, 한족 왕조들이 쇠퇴함에 따라, 4세기에 모용선비 연(前燕, 349-70; 後燕, 384-408; 西燕, 385-94; 南燕, 398-410) 왕국들을 세울 수 있었고, 5세기에 와서는 최초의 북중국 정복왕조인 탁발선비 북위(386-534)를 세우게 되었다.
후한의 쇠망은 184년 황건적의 난으로 시작된다 188년에 영제(靈帝)가 죽은 후, 한의 통치자들은 지방 군벌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요동은 190년부터 238년까지 공손씨 (公孫度, 公孫康)에 의해 점거되었는데, 이들은 196-220년 기간 중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연(燕)왕이라 자칭하던 공손연(公孫淵)는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원정군에 의해 239년에 살해당하였다. 중국의 삼국시대(三國, 220-265) 기간 중에는 선비의 작은 부족장들이 위 조정과 개별적으로 흥정을 하면서 변경의 많은 지역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위 조정은 국경 밖의 유목민에게는 후한 보조금을 주면서 국경무역을 허락하였고, 국경 안의 부족들에 대해서는 간접지배 정책을 유지하였다. 단명의 서진(西晉, 265-316) 역시 위의 정책을 답습하였다.
285년에 모용선비 부족장이 된 모용외(慕容廆, r.285-333)는 곧바로 부여를 공격했다. 286년에는 (기원전108년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복 한 이래 한족들이 정착한) 요하 유역의 농경지대를 공격했다. 요하 유역은 중국이 통일되면 한족 제국에 흡수 통합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무정부상태의 혼란기에는 제일 먼저 중원의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지역이었다. 2 하긴 중국대륙의 한족 통치자들 역시 동북 변경지대를 그리 중시하지 않았고,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당한 자치권을 주었었다.
291-305년 기간 중, 중국대륙 전역에 내란이 일어났다. 위와 서진의 볼모정책 덕분에 중국 황실 내에서 성장하고 중국화된 새로운 유형의 흉노족 지도자가 선우가 되어, 311년에 낙양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사로잡아 서진을 유린했다. 3 316년에 장안이 함락되자 진 황족의 일부는 남쪽으로 달아나, 317년에 양자강을 장벽으로 삼아 건강(建康, 지금의 南京)에 수도를 정하고 동진을 세웠다. 5세기에 게르만족에 의해 황폐화된 로마를 콘스탄티노플이 대신하였던 것처럼, 남경은 589년까지 장안과 낙양의 역할을 대신했다.
▲ Former Yan Art Objects from the Zhaoyang-Beipiao area: (top) gilt-bronze saddle plates; (second) gold hat ornaments with disk pendants; (third) gilt-bronze horse ornament; and (bottom) bronze deer-shaped object Watt, et al. (2004: 124, 130)
Ledyard(1983: 331)는 “317년”을 중국 역사상,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하나의 분기점으로 이해한다. 중국 대륙의 주요 부분이, 아니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한족이 아닌 이민족에 의해 점령된 역사적 전환점이 바로 317년 이라고 생각한다.
흉노족이 북중국에 처음으로 세운 전조(前趙, 304-329)는 너무 중국식이었기 때문에 몽골 초원지대의 토박이 흉노 부족들로부터 호감을 사지 못하고 내분의 씨앗을 키웠다. 반대로, 두 번째 조나라(319-349)는 지나치게 흉노식이였기 때문에 중국 백성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마지막 흉노왕의 아들은 후궁 하나를 식탁에서 구울 정도로 극악무도했다 한다. 4
당시 만주의 선비족은 더 이상 순수한 유목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상당기간 요하 유역을 점령하여 농민과 도시민을 지배해왔었다. 선비족은, 요서 초원지대는 부족 전통에 따라 군사적으로 조직을 해 다스리고, 요하 유역에 거주하는 농민과 도시민들은 중국식 문민 관료제도로 다스리는 2원(二元)적 통치조직을 운용했다 문민 관료는 절대로 부족들로 구성된 군대의 지휘관이 되지 못하였다 Barfield(1989: 97-99, 106)에 의하면, 모용 선비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5호16국 시대(304-439)에 (정주 농경지역에 대한) 관료적 행정조직과 (목초지 유목민을 상대로 하는) 부족적 군사조직을 분리한 2원적 통치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세운 것이다.
모용 선비족은 그들 자신의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이전에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 국경 안에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살았었다. 모용외는 국가를 세워 기초를 다질 때, (모용씨의 국가를 한 개의 중화제국으로 발전시켜 보려는 의도를 가진) 수많은 중국 관리들과 학자들의 조언과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한족 자신의 사마씨 황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흉노의 지배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수 많은 중국 관료들이, 당시와 같은 정치적인 혼란기에, 요동 땅의 작은 나라에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모용씨 측에 가담했다. 그들은, 중국식으로 교육을 받은 모용선비 지배자를 통치자로 모시면서, 이상적인 중국식 조정을 조직하고, 모용씨의 국가를 점차 서쪽으로 또 남쪽으로 확장 해 나가도록 도왔다. 5 모용외는, 중국식 행정규율과 정부 운영 조직을 도입하고, 자신의 군대에 훌륭한 무기와 갑옷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다. 6
Fairbank(1992: 111-2)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중국적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목민적인 2원제도는 4세기부터 남만주 지역에서 출현하는데, 후대 몽골족과 만주족 정복왕조를 거치면서 거대한 제국 전체를 장악하고 지키는 통치체제로 완성되었다. 덕으로 다스린다는 유교적 신화가 있지만, 왕조의 출발 자체가 바로 군사력에 의한 것이고, 황제 중심의 전제적 체제는 지배자가 반란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을 가졌을 때만 존속이 가능 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 왕조가 확립되면 관료체제는 결국 문관에 의해 운영되게 마련이다. 유교 전통으로 훈련 받은 문관이 군사전문가로 변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개중에는 유능한 무관이 나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군사기술은 유목 정복자들의 주 특기였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혁신적인 만주 유목민들이 중국식 관료조직의 효율성과 자신들 고유의 군사적 장점들을 모두 취합하는 이원적 통치체제를 만들어 중국대륙의 심장부를 점령하고 지배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식 국가조직은 왕의 형제들을 봉토를 받는 친왕(親王)의 신분으로 만들어, 높은 지위를 즐기며 살게 한다. 실제로 중국 왕조의 친왕들이 흔히 봉토의 수입을 가지고 한가롭고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했으나, 모용씨 왕의 형제나 아들들은 정부 내의 가장 중요한 직책을 부여 받았고, 모두가 다 군대의 장군으로 봉직했다. 전연(前燕)이 성취한 정복들의 거의 대부분이 왕의 형제나 삼촌들의 탁월한 전략과 지도력 덕분이었다. 7
모용외와 그 후계자들은 느슨한 연맹체 형태의 부족 집단을 이원적 통치체제의 국가로 변모시켰다. 15세에 족장이 된 모용외는 일직이 농업과 관료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국식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모용황(慕容皝, r.333-49)은 337년에 스스로 연(燕)왕이라 칭하면서, 유목민과 농경민 모두를 지배하였다. 8 연은 전국시대에 중국대륙 동북방에 있었던 왕조의 이름이었다. 모용 선비는 오늘날의 북경을 포함하는 하북성의 북부지역까지 강역을 확장하였다. Schreiber(1949-55: 378)에 의하면, 모용 선비족이 최초에 점거한 지역이 고대 연나라 영토와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연이라는 이름이 부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자명할 것이다.
모용선비가 352년에 중원을 정복하자, 모용씨 조정의 한족 관료들이 제일 먼저 모용준(r.349-60)에게 황제라 칭할 것을 권했다 황제의 조정 형태가 되면 한족 관리들 자신이 좀더 높은 칭호의 직위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권유를 한 것이다. 9 모용준이 360년에 죽자, 유능한 동생인 각(恪) 대신에 11세의 어린애인 위(暐, 360-70)가 제위에 올랐다. 중국화 현상이 너무 빨랐고, 결과적으로 전연 역시 빠르게 해체될 수 밖에 없었다. [후대의 정복왕조들이 중국화를 경계하게 된 반면교사 역할을 한 것이다.]
일찍이 모용준은 서부와 남부 전투에서 승리를 하자 남쪽의 한족왕조 진(東晉)과 서쪽 부견의 진(前秦)을 정복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359년 초, 모용준은 자신이 당시에 정복한 모든 주와 군에 명을 내려 군 복무가 가능한 한족(漢族) 장정에 대한 현황을 조사한 다음, 각 가구에 남자 한 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장정들은 모두 징집하도록 명령했다. 모용준은 150만 명의 보병 대군을 자신의 지휘하에 확보할 계획이었다. 10
당시 전연 정부의 부패상이 얼마나 절망적 이었는가는 대신 신소(申紹)의 상소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상소문의 일부는 새로 징집된 군대에 관련된 내용이다: “과거 우리 궁사와 기병들의 용맹은 진(秦)과 진(晉)나라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했었다. 우리 (鮮卑) 병사들은 언제나 구름같이 몰려들고 질풍같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즘 (징집된 漢族) 병사들은 약속된 시간에 모이지도 않고, 전투에는 쓸모가 없는 것일까? 지방 관리들이 가난하고 약한자들에게 제일 먼저 군역과 조세를 부과하기 때문에 전장과 노역에 끌려 나가는 자나 집에 남아있는 자나 모두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 고통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모두 도망을 치고, 농사와 양잠을 돌보는 자가 없게 된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우려는 의지다.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병사가 전투에 실제 참가하지 안을 때에는 평상시의 생업을 계속할 수 있게 허용되어야 한다” 11
섭정 모용각은 367년에 죽었다. 어린 황제는 정사에 관심이 없었다. 모용선비는 365년에 낙양을 점령했었으나, 370년에 부견에게 정복된다. 진서 편찬자들에 의하면, 연나라 말기에 병사들이 부패한 조정에 너무나도 실망을 했었기 때문에, 모용평(慕容評)이 [아무리 훌륭한 지휘관이었더라도] 죽기로 공격을 해오는 부견의 군대를 격퇴시킨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12
Schreiber (1956: 125)는, “모용씨가 중국화 되자 한족 고위 관료들뿐만 아니라 남조(南朝)까지 모용씨를 존경을 했다”고 말한다. 얼마나 비꼬는 찬사인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중국: 황금시대의 여명 - 200년부터 750년까지”라는 주제로 (2004. 10. 12. - 2005. 1. 23.) 전시회를 열었는데, 오늘날 요녕성의 서부에 위치한 조양(朝陽)과 북표(北票) 지역에서 발굴되고 모용 선비 고유의 유물로 확인된 상당수의 청동기와 금동제품들이 전시되었다 전시 내용을 책자로 펴낸 Watt(2004: XIX)등은 모용 선비의 예술품에 나타난 전형적인 도안 형태들을 얼마 후에 중국대륙의 북위와 한반도의 신라 예술품에서 다시 보게 된다고 말한다.
▲ Tomb Paintings of Farming unearthed at the (top) Zhao-yang area; (middle) Jiayu-guan 酒泉嘉峪關 area, Gan-su; and (bottom) 高台酪駝城 area, Gan-su.
조양에서 발굴된 한 쌍의 말 안장에 새겨진 (새와 다른 동물들을 품은 6각형들의) 투과형 문양은 모용 선비 고유의 기법인데, 후에 북위로 전파된다. Watt(2004: 125)등은, 이 문양이 같은 시대에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왕국의 한국사람들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사실 이런 문양들은 신라에서만 채택된 것이 아니라, 가야에서도, 또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일본열도의 야마토 왕국에서도 채택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양식과 문양에 아주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유물들이 선비족의 유적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370년, 선비족의 연나라는 부견(苻堅)의 전진(前秦, 351-394)에 의해 정복된다 부견을 흔히 탕구트(티벳)족 출신이라 하지만, 돌궐-몽골 계통의 지배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중국 전체의 새로운 주인이 된 부견은, 동진(東晋, 317-420)을 정복하려고 남쪽에서 대규모 전쟁을 벌였지만, 383년의 비수(肥水)전투 패배로, 전진 왕조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탁발이란 이름의 선비족은 그들 본거지인 성락(盛樂)으로부터 병주(幷州)로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북위를 세운 탁발규(拓拔珪)는 398년에 만리장성을 넘어 산서성 북쪽으로 쳐들어와 평성(平城, 오늘날의 大同)에 수도를 정했다(7)
동아시아 역사 강의: 1-9 (2005. 2. 19)
[각주]
1. Guo (1995b: 148-9, 179) 참조.
2. Barfield (1989: 105)
3. Barfield (1989: 99)
4. Grousset (1970: 58)
5. Schreiber (1949-55: 374-5, 424) 참조. 모용외는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가령(家令)들을 제정했는데, 그 중 하나는: “농업은 국가의 근본이므로 농업의 진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晉書 卷一百八 載記 第八 慕容廆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 廆…言曰 稼穡者 國之本也 不可以不急
6. Schreiber (1949-55: 401) 참조.
7. Schreiber (1956: 121-2) 참조. 모용황은 자신의 부친이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을 대한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대했다. 그는 황태자를 앞장 세우지 않았고, 유능한 왕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어느 왕자이든 높이 존경했다. 모용황은, 한족 관료들이 맹렬히 반대를 안 했다면, 태자 준(儁)을 제쳐놓고 수(垂)에게 제위를 승계시킬 생각까지 했었다. 당시 모용준은 42세에 제위를 승계했다
8. Barfield (1989: 109-111) 와 Gerhardt Schreiber, “The history of former Yen dynasty,” Monumenta Serica, Vol. 14 (1949-55: 374-480) and Vol.15 (1956: 1-141) 참조. 모용외가 아들에게 훌륭한 중국식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모용황은 중국 고전에 능통했고, 중국의 전통적 교육방법을 존중하게 되었다. Schreiber가 李昉 (925-96)의 太平御覽에서 인용.
晉書 卷一百八 載記第八 慕容廆 … 太康十年 … 敎以農桑 法制同于上國
晉書 卷一百九 載記第九 慕容皝 … 尙經學魏書 列傳 慕容廆 ..父涉歸..遷邑遼東…死 廆代領部落 ..死 子元眞代痲自稱燕王 置官如魏武輔漢故事 …征高麗[341] 大破之…子儁統任…建國十五年[352] ..置百官
9. 그러자 모용준은 한족 관습을 흉내 내, “우리 본향이 사막과 목초지이며 우리는 본래 야만인이었다”고 말하며 한족 신하들의 권유를 물리치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다가, 353년 1월에 “나는 중국 백성들의 권유로 부덕하나마 제위에 오른다”며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Schreiber (1956: 31-35) 참조.
10. Schreiber (1956: 54-5) 참조. 360년 정월, 모용준이 병석에 누어있을 당시, 359년 겨울까지 지연되었던 새로운 군대의 징집이 본격적으로 집행되고 있었다. 모든 주와 군으로부터 징집된 장정들이 수도로 집결하면서, 작당한 도둑떼가 들끓었고, 산적들이 새벽부터 해 질 때까지 습격을 하여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晉書 卷一百十 載記第十 慕容儁 儁于是復圖入寇 兼欲經略 關西 乃令州郡校閱見丁 精覆隱 漏率戶留一丁 餘悉發之欲使步 卒一百五十萬 期明年大集 將進 臨洛陽 爲三方節度 武邑劉貴 上書極諫 陳百姓凋弊 召兵非法 恐 人不堪命 有土崩之禍... 乃 改爲三五占兵… 是時兵集 鄴城 盜賊互起 每夜攻劫 晨昏 斷行
11. 晉書 卷一百十一 載記第十 慕容暐 其尙書左丞申紹上疏曰 …弓馬之勁 秦晉所憚 雲騎風馳 國之常也 而比赴敵後機 兵不速 濟者何也 … 遂致奔亡 ... 退離 蠶農之要 兵豈在多 貴於用命 宜嚴制軍科 務先饒復 習兵敎戰 使偏伍有常 從戎之外 足營私業 Schreiber (1956: 82-6) 참조
12. Schreiber (1956: 128) 참조
10. 이원통치체제의 유지: 첫 정복왕조 북위(拓跋鮮卑 北魏)의 출현
2005.02.27
Maintaining the Dual System: Northern Wei of Tuoba Xianbei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통치 체제를 답습 해,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 탈발규(r.386-409)는 모용선비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흡수했고, 모용 선비족 지배층은 북위조정 내에 지배 귀족층을 구성하는 주요 씨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북위의 문민 관료제도는 한족들 또한 탁발 조정으로 끌어들였다. 북위는,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국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침략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二元的)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후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몽골족의 원(元)을 제외한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선비족 예술의 특유한 양식은 북위의 평성(平城)시대 전반을 통해 지속되었고, 섬서와 녕하성에 자리잡았던 북주시대 까지도 존속하였다. 탁발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사람이 만든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모용선비족 보다 더 후진적이었다는 탁발선비족
만주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 해 가장 유목민적이었던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통치 체제를 답습 해,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 탁발선비 왕국은 처음에 대(代)라 칭했다. 341년, 대의 지배자 시이지안(r.338-76)은 모용황(r.333-49)의 누이동생인 자신의 처가 죽자 황(皝)에게 또 다른 공주를 처로 삼도록 보내달라고 청했다. 모용황은 그 대가로 말 1천 필을 요구했다. 그러자 시이지안은 아주 무례한 태도로 거절을 했다. 343년, 모용황이 태자 준(r.349-60)과 평(評)에게 군사를 주어 탁발선비족을 공격하게 하자 시이지안은 부족을 이끌고 산 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344년, 시이지안은 모용황의 딸을 신부로 맞이 해 오도록 동생 질(秩)을 연나라에 보냈다. 몇 달 후, 모용황은 사신을 보내 자기한테도 공주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시이지안은 자신의 누이 동생을 황에게 시집 보냈다. 1 376년에 부견이 군대를 보내 대를 공격했을 때 시이지안은 무리를 이끌고 산속으로 달아나 숨어 있다가 죽었다.
시이지안의 손자인 탈발규(r.386-409)는 396년에 북위(386-534) 황제라 선포하고 모용선비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흡수했다. 2 모용 선비족 지배층은 탁발 북위(386- 534) 조정 내에 지배 귀족층을 구성하는 주요 씨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북위의 문민 관료제도는 한족들 또한 탁발 조정으로 끌어들였다.
탁발어와 선비어는 동일한 언어이었다. 북위는 후에 서위와 동위로 양분되고, 동위는 북제(550-77)가 된다. 북제(北齊) 때 쓰여진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을 보면, 북제 조정에 봉직하는 한족 관리가 선비 고관들의 눈에 들어 출세길이 열리도록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선비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나온다. 3 탁발선비 지배층은 북중국을 정복한 후, 자신들 군대를 지휘할 때 계속 선비 언어를 사용했다. 4 하지만 후에 탁발 북위가 중국화 하자, 이들 군사 명령어(鮮卑號令) 중 많은 부분이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탁발 선비의 언어는 아마도 거란어의 직계 조어(祖語)이었을 것이다. 5
이원제도의 유지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조직 덕분에 보급이 잘되는 기병대를 보유했던 북위는 초원지대 깊숙이 원정군을 보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부족들은 부대 단위로 조직되어, 할당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국경수비 공동체의 구성원 역할을 하였다. 6 부족민과 군사에 관련된 문제는 각 부족 고유의 전통에 따라 처리되었다. 정복된 한족 거주지역은 한족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고위직은 대부분 선비 귀족들이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한족들의 이상은 능력주의 사회인데 반해, 유목민족들은 세습적 귀족제도를 고수했다. 북중국 귀족가문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정복왕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대부분 독차지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국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 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후대 정복왕조들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Barfield(1989: 105)는 “한(漢)이 멸망하고 첫 번째 만주족 정복국가(탁발북위)가 등장하기까지는 150년이 걸렸고, 당이 망하고 나서는 75년이 걸렸으나, 명(明)이 망할 때는 거의 동시에 만주족 정복왕조가 들어섰다. 한족 왕조가 망하고 나서 정복왕조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점점 단축되었지만, 그 방식은 똑같았다”고 말한다.
▲ Tomb Paintings of Ox Wagons excavated at the Zhao-yang area
한족 왕조들은 방어를 위해 장성을 쌓거나, 엄청난 선물과 교역특혜를 제공하거나, 대규모 공격을 반복하는 정책 중 하나를 택했었다. 그러나 북중국을 점령한 만주족 왕조들의 전략은, 적대적인 유목민 부족장들을 혼인정책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어 자기편으로 만들거나, 적대적인 부족들이 합심하여 동맹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경쟁관계에 있는 부족장들을 지원하거나, 성장 가능한 부족세력을 초장에 깨 버리는 방식이었다. 만주족 지배자들과 군대는 초원의 실상을 완전히 파악하기 때문에, 초원지대의 사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만주족은 단순히 초원의 적을 패배시키기보다는, 주민과 가축들을 한꺼번에 모두 빼앗아 감으로서 유목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려 했다. 7
439년에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 태무제(太武帝, 423-52)는, 일찍이 429년에 오르콘강 유역의 유연(柔然) 몽골을 정벌할 때, “한족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다. 망아지나 암소 떼들이 호랑이나 늑대 무리를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유연 몽골은 여름철에는 북쪽에서 방목을 하고, 가을에는 남쪽으로 내려오며, 겨울이 되면 우리 국경을 침범한다. 우리는 그들이 여름철에 목초지에서 방목을 하고 있을 때 공격을 하면 된다. 숫말들은 암말을 쫓아다니고, 암말은 새끼들 돌보기에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들은 모두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덮쳐서 그들을 목초지와 물가에서 쫓아내면, 며칠도 안돼서 모두 포로가 되거나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8
중국화 되고, 불교의 영향으로 무기력하게 되고
북위 조정이 마침내 중국화되고, 불교의 영향으로 무기력해지자, 국경정책도 옛 한족왕조들 모양으로 성벽을 쌓고 지키거나 유목민들에게 화평의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이 되었다. 9 북위의 효문제(孝文帝, 471-499)는 중국식으로 황제중심의 전제체제를 확립한다며 정부 관직을 온통 한족으로 채우기 시작했고, 494년에는 수도를 선비족 고향에 가까운 평성(平城, 현재의 大同)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는 심지어 조정 내에서 선비 언어의 사용을 금지해버렸다.
▲ Xianbei Tomb Paintings(of Former Yan) excavated in 1982 at the Zhao-yang 袁台子 朝陽 area, across the Daling River, Liao-xi
효문제의 아버지는 수도승이 되기 위해 왕위를 버릴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북위의 지배자들은 애당초 유교적 편견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불교를 전폭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으며, 그리스식 간다라 불교예술에서 영감을 얻어 그토록 신비한 모습의 거대한 (불상) 조각작품들을 만들었다. Grousset(1970: 66)은 “포악한 전사들도 일단 보살의 자비심에 감화를 받게 되면, 인도주의적인 계율을 받아들여, 본래의 호전성을 잊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아예 자기방어 조차도 소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유목민 정복자들이 중국화 되어, 새로 나타난 유목민족에게 망하던지, 아니면 한족에게 쫓겨나게 되는 순간이 항상 찾아온다. Twitchett(1979: 97)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한때 북위의 국경선을 지키던 군 부대들은, 한족들이 하던 식으로, 범죄자들을 내다버리는 쓰레기장이 되었고, 관료들의 착취 대상이 되어,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한 반항집단으로 변했다. 마침내 524년에 북방의 국경지대를 수비하던 선비족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선비 예술의 특유한 형태
중국대륙 북부의 탁발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선비족들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했던 옛 박트리아와 교류가 있었고, 로마 통치하의 중동과 교역을 했으며, 초기적 불상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와도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0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5호16국 시대)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사람이 만든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 (맨손으로 빚어 만든)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한국사람들은 이런 모양의 토기에 너무나도 친숙한 것이다.
선비족 예술의 특유한 양식은 북위의 평성(平城)시대 전반을 통해 지속되었고, 섬서와 녕하성에 자리잡았던 북주시대 까지도 존속하였다. 11
534년에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갈라졌다. 이민족적인 요소가 훨씬 강했던 서위는 557년에 북주(北周, 557-81)가 되어, 577년에 북제를 정복하고 579년에 진(陳)의 강북 땅을 차지해,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북중국을 재통일할 수 있었다. 수(隋, 581-618) 나라는 선비족 북주의 후계자로서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8)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0 (2005. 2. 26.)
정리: 강현사 박사
[각주]
1. 魏書 卷一 序紀 第一
昭成皇帝諱什翼犍痲烈帝臨崩... 建國二年 [339] … 慕容元眞妹爲皇后…四年 [341]…皇后慕容氏崩… 七年 [344] 遣大人長孫秩迎后慕容氏元眞之女於境 … 慕容元眞… 求交婚…以烈帝女妻之
魏書 卷二 太祖紀 第二
太祖道武皇帝 諱珪 昭成皇帝之嫡孫 獻明皇帝之子 … 年六歲昭成崩 …苻堅遣將…國衆離散
資治通鑑 卷九十七 晉紀十九
建元元年 [343] … 代王什翼犍復求婚於燕 燕王皝使納馬千匹爲禮 什翼犍不與又倨慢無子壻禮 … 皝遣世子儁 帥前軍師評等 擊代 什翼犍帥衆避去 燕人無所見而還
Schreiber (1949-55: 473) 참조.
2. Barfield (1989: 106)
3. Schreiber (1949-55: 388) 참조.
齊朝有一位士大夫 曾經對我說 我有一個孩子 已經十七歲了 懂得一些書信 公文的書寫 我敎他學習鮮卑語和彈琵琶 只要稍稍掌握一些 就可以用這些本領去 爲公卿們效力了 沒有不受寵的道理 這也是一件很重要的事情
4. 隋書經籍志의 鮮卑號令을 인용. Schreiber (1949-55: 387-8) 참조.
5. Janhunen (1996: 190-191)
6. Barfield (1989: 118-119)
7. Barfield (1989: 112, 124)
8. Grousset (1970: 62-63) 참조.
9. Barfield (1989: 124) 참조. Jagchid and Symons(1989: 145)에 의하면, 북위의 탁발선비족 지배자들은 다른 유목국가 혹은 한족과의 결혼에 의한 동맹관계 수립을 꺼려하였다. 그들의 혼인 정책은 주로 유목민 혹은 다른 독립국가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북위 사회 안으로 흡수융합 시키기 위한 결혼에 국한되었었다. 북위가 국경무역과 공물(貢物)교환이란 한족 방식의 방어정책을 계속 기피하다가 마침내 그 방침을 변경한 것은 경종(敬宗, 528-530)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었는데, 이는 북위가 534년에 몰락하기 겨우 6년 전 이었다.
10. Watt, et al. (2004: XIX)
11. Watt, et al. (2004: XIX)
김운회
선비족도 고조선의 한 갈래, 고구려와 형제 우의 나눠
중앙선데이
입력 2011.03.13 04:36
1 고조선 후예들이 외부의 공격으로 몰려 집결한 곳으로 후에 선비족 발상지로 알려진 알선 동굴. 헤이룽장성과 몽골이 접하는 지역에 있다. 선비족은 AD1세기께 이곳을 떠나 초원으로 이동했다. 이 지역을 흐르는 강이 아리하(阿里河)인데 이 이름은 아무르강, 압록강, 한강, 알천(경주)에 반영돼 있어 민족 이동의 징표가 된다.
⑨ 고조선의 계승자들
고조선 멸망 뒤 유민 일부는 고조선 남부와 해안을 중심으로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과 연합해 고구려를 건국한다. 다른 갈래들은 고조선 북부에서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으로 불리며 할거했다. 크게 보면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눠지고, 선비오환부는 다시 모용부(慕容部)·탁발부(拓拔部)·우문부(宇文部)·단부(段部) 등으로 분류된다.
BC 2세기 한나라는 ‘흉노’를 견제하는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 요하상류의 동호(東胡·선비오환부)를 한나라 5부 북쪽으로 옮기려 했다(後漢書 烏桓鮮卑列傳). 그런데 흉노가 이를 간파해 동진하자 동호는 선비산(鮮卑山)과 오환산(烏桓山)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이들을 선비 또는 오환으로 부르게 됐다(烏桓鮮卑列傳)고 한다. 이들의 명칭이 시기에 따라 임의로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전국책(戰國策)에 “조(趙)나라… 동으로 연나라와 동호의 경계가 있다” 하고 사기에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와 산융(山戎)이 있고 이들은 각기 흩어져 계곡에 거주하고 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했다(匈奴列傳)”고 하는데 동호 지역이 모두 고조선 영역이다. 따라서 동호는 고조선인들을 말한다.
그런데 오환이 처음 나타나는 사기의 기록엔 “연나라는… 북으로 오환부여, 동으로 예맥조선과 서로 접하고 있다(貨殖列傳 烏氏<502E>)”고 한다. 이 기록은 흉노의 동진으로 동호가 오환산으로 들어가 오환족이 됐다는 후한서와 어긋나 의심스럽다. 또 부여는 북만주 일대이므로 연나라 ‘북’이라면 고조선 지역인데 사기는 이를 오환 지역으로 본 것이다. 결국 부여와 조선이 모두 예맥의 국가인데 ‘오환부여’니 ‘예맥조선’이니 하므로 오환은 예맥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오환산은 적산(赤山), 즉 울라간(Ulagan)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오주(烏州)는 원래 오환의 땅으로 요하(遼河)·오환산(烏桓山) 등이 있으며 경주(慶州)에는 적산(赤山)이 있다”고 한다. 오환산은 현재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츠펑(赤峯)이다. 츠펑은 몽골어로 ‘울라간 하다(Ulagan Hada)’라고 하는데 원사(元史)에도 적산(赤山)으로 명기돼 있다. 붉은 산(울라간)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사달’ ‘조선’과 연관되지만 아직 구체적인 문헌적 연계는 찾지 못하고 있다.
흉노와 후한의 대치 국면에서 고조선은 번영하지만 한 무제의 침공으로 흉노는 후퇴하고 고조선은 멸망한다(BC 108). 많은 유민이 발생하고 이들 대부분은 잡거(雜居)한다. AD 46년을 전후해 북방 일대는 메뚜기의 습격으로 수천 리가 붉게 변하고 초목이 말라 죽어 황무지가 되는 등 천재지변이 발생한다(後漢書 南匈奴列傳). 흉노는 내분으로 남북 흉노로 분열했다(48년). 이를 틈타 고조선의 후예(또는 동계)인 오환선비는 흉노를 막남(莫南) 지역까지 몰아 오르도스(현재 네이멍구(內蒙古) 바우터우 인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後漢書 卷90 烏桓鮮卑列傳).
고조선은 2세기께 선비족을 중심으로 재통합된다. 옛 고조선의 북부인 요서 지역에서 단석괴(檀石槐)는 후일 칭기즈칸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단석괴는 광활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을 동·중·서부로 나눠 각각 대인을 배치했다. 동부는 현재의 허베이(河北) 핑취안(平泉)~랴오양(遼陽), 중부는 탕산(唐山)~베이징(北京), 서부는 베이징~둔황(敦煌)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단석괴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구력거(丘力居)로 이어진다. 황제를 칭한 그는 영역을 확장해 청주·서주·유주·기주 등 네 주를 점령했다(三國志 魏書오환전). 3세기 초에는 구력거의 조카 답돈(踏頓:?~207)이 황제위를 이었다. 당시 북중국의 실력자였던 원소(袁紹:? ~ 202)는 답돈과 우호 관계를 맺고 친척의 자식을 자기 딸로 꾸며 시집을 보냈다(魏書 무제기). 답돈은 위 무제 조조(曹操)의 정벌 때 참수됐다. 이 시기를 전후로 고구려는 옛 고조선 남부 지역인 요하에서 벗어나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가비능(軻比能:?~235)이 여러 부족을 통솔해 위(魏)나라와 대립하다 암살되자 분열돼 모용부·탁발부·우문부·단부로 재편됐다. 이들 가운데 모용부가 가장 강해 전연(前燕:337∼370)과 후연(後燕:384∼409)을 건국했다.
4세기엔 ‘조선’이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난다. 진서에 “모용외가 건무(후한 광무제의 연호) 초에 정벌 전쟁을 하여 공이 크게 쌓여 조선공(朝鮮公·조선왕)에 봉해졌고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晉書 卷109)”고 했다. (고)조선의 이름이 고구려 아닌 모용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진서에는 모용외(慕容<5EC6>)가 조선공에 봉해진 뒤 모용황(재위 337∼348)이 이를 계승하자 내분이 일어났고, 모용황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험독(險瀆)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晉書 卷109). 수경주(水經注)나 청나라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에 따르면 이 지역이 바로 현재 베이징 인근으로 과거의 고죽국이다. 이로써 베이징 인근~요동에 이르는 고조선 옛 지역은 조선왕 모용외·모용황이 회복했다.
고조선이 멸망 450여 년 만에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 것이다. 조선왕 모용황은 기존의 고조선 영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남하해 북중국 주요부를 대부분 장악했다.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호를 연(燕·전국시대 연과는 다름)이라고 했다. 이런 현상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국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후연은 모용운(慕容雲)으로 이어진다. 진서(晉書)는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의 양자로 조부는 고화(高和)인데 고구려의 한 족속이다(慕容雲傳)”고 한다. 모용운은 즉위 후 성을 다시 고(高)씨로 하고 광개토대왕이 사신을 보내어 종족(宗族)의 예를 베풀자(408년), 시어사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함으로써 종족 간의 유대감을 표시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용씨 세력이 약화된 뒤 탁발씨가 대두해 건설한 국가가 북위(北魏:386∼534)다. 북위 헌문제(454∼476)는 ‘고구려를 정벌해 달라’며 472년 백제 개로왕이 국서를 보내자 꾸짖으며 장수왕을 두둔했고, 장수왕에게 딸을 보낼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헌문제의 아들 효문제(471~499) 탁발굉은 고구려 왕족 고조용(高照容:469~519)을 황후로 맞았는데, 그녀가 유명한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로 다음 황제인 선무제(499~515)를 낳았다(魏書 文昭皇太后列傳). 선무제의 등극에 황족 일부가 반발하자 문소황태후의 오빠인 고구려의 고조(高肇)가 대군을 몰고 와 북위 조정을 장악했고, 남조 송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기도 했다(502).
“491년 장수왕이 서거하자, 북위의 효문제가 부음을 듣고 흰 위모관과 베로 지은 심의를 입고 동교(東郊)에서 거애(擧哀)하였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효문제는 천자(天子)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서거한 듯한 애도의 정을 보였다.
이 같은 전연·후연·북위·고구려의 관계는 모용부·탁발씨·고구려가 중국 북부 지역에 서로 다른 나라를 만들었지만 ‘고조선의 후예’라는 인식을 공유했음을 보여 준다.
6세기 북위의 멸망 수·당시대(7~10세기)가 열렸다. 수·당나라는 선비족 전통과 중국 한족(漢族)의 발달된 문화를 결합해 퓨전(fusion) 통치체제를 구성했다.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楊堅)은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이었고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은 양견의 이종사촌이었다. 전 서울대 박한제 교수는 호한융합(胡漢融合) 또는 호한체제(胡漢體制)라고 평가한다. 동아시아 최초의 거대 국제 국가 당은 ‘선비(鮮卑)의 나라’지만 한화가 극심했고 중국도 한·당나라를 중화의 꽃으로 보고 있어 이 시기를 고조선의 고유성(固有性)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나라는 그 정체성을 중립적, 비한비이(非漢非夷)로 파악해야 한다. 이 시기는 많은 북방민족이 한족으로 귀화 또는 편입했고 만리장성 이북에서 북방민의 고유성이 많이 상실되는 계기가 됐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만주에서 거란·고구려·발해가 유지했다.
10세기 번성했던 거란(요나라 중심세력)은 우문부의 후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뒤 남은 사람들로 후에 거란으로 불렸다. 위서에는 “거란국은 고막해(庫莫奚)의 동쪽에 있는데 고막해와 같은 민족으로… 선조는 동부 우문의 별종이고 처음 모용원진(慕容元眞)에게 격파돼 송막지간(松漠之間)으로 달아나 숨었다(魏書 庫莫奚 契丹)”고 기록했다. 송막지간은 현재 네이멍구다.
요사(遼史)는 “요나라는 그 선조가 거란이고 본래는 선비의 땅이다. 요택(遼澤)에 살았다(“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 居遼澤中” 遼史 地理志)”고 한다.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는데 연나라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밀려간 서쪽 국경 지역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요사는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했고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 遼史 地理志2)”이라고 기록한다. 고조선의 후예인 거란(동호의 후예)은 모용부·탁발부 등 타 부족의 기세에 눌려 지냈지만 이전의 북위, 수·당과 달리 고조선의 고유 전통을 유지하면서 고조선의 옛 지역을 모두 회복하고 더욱 세력을 키워 중원으로 진출했다.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9)[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5183008
차태헌
백제-북위와의 전쟁은 실재 있었는가?
동성왕의 수수께끼
차태헌 | 기사입력 2015/08/10 [14:02
[플러스코리아타임즈 = 차태헌] 5세기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북방 기마 민족의 발흥으로 한족들은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나고 이 양자강 이남에서 진 송 제 양의 한(漢)족의 단명한 왕조들이 교체가 되고있는 상황이었다. 이 중국 남조의 국가들중의 하나인 남제의 정사를 기록한 남제서에는 우리가 실제 역사라고 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록이 존재한다.
그것은 당시 동북아시아 최강국인 선비족의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다. 그것도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동원한 대규모 전쟁이고 전쟁의 기간도 수년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표문을 올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백제의 장군들에게 백제 동성왕이 작위를 수여하고 중국 남제에게 이를 추인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이다.
춘추필법으로 쓰여져서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광양 태수등 중국 하북지역의 태수직을 받는 형식이지만 실제 상황은 북위를 물리친 백제가 하북 지방의 원주인인 한족들에게 통치권을 이양받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만일에 이 전쟁이 실제 역사라면 5세기 말 동북 아시아 최강국은 선비족에게 밀려난 한족도 아니고 북방을 차지했던 선비족도 아닌 바로 백제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남제서에서는 많은 부분을 이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서 할애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분을 보자
이 해에 위(魏) 나라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 군사를 습격하도록 하여 크게 무찔렀다.제 명제 2년(495)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길, " 지난 경오년 (490 ) 에 험윤 (북위)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쳐들어 왔으나, 사법명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반격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밤에 번개같이 들이치고 도망가는 것을 따라가서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 남제서 동이열전 백제 -
전쟁의 양상을 볼 때에 이 전쟁은 절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남부의 백제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한반도 남부까지 올 수 있는 방법은 당시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고구려를 통과하고 내려오거나 아니면 선박에 기병 수십만을 태우고 해양항로를 통해서 오는 두가지인데 어느것 이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럴 이유도 없다.
결국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봐야하는데 이 믿기 어려운 전쟁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기록하고 있는 다른 사서가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에는 남제서가 기록한 백제 북위 전쟁과 같은 시기에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성왕 10년(서기 488), 위(魏)나라가 병사를 보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
중국 남제서에는 전쟁의 진행 양상 그리고 이후의 논공행상까지 타국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에 반해 자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오히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략하다. 역시 이 부분에서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의 정치적 편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은 역사가 이전에 정치인이었고 유학자였다. 그리고 북벌을 주장했던 서경파를 진압한 당사자이기도하다.
신채호와 같은 여러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삼국사기는 적극적으로 위작을 한 부분은 없지만 대륙의 한(韓)민족 역사에 대해서 축소하고 누락 시킨 부분이 많다. 김부식은 남제서 이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백제 구사(舊史)를 통해서 이 전쟁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전쟁은 김부식이 생략하거나 누락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전쟁이었기에 마지못해 한 줄이라도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김부식의 저 짧은 기록은 이 전쟁이 그 당시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헌적으로 고찰해보면 중국 정사와 삼국사기에 2개의 전쟁이 같은 시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전쟁은 실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전쟁은 남제서를 기준으로 볼 때에 490 ~ 495년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다. 그러나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과 그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실질적으로 국가 멸망의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15년 후에 백제가 이런 대규모 전쟁을 할 여력이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점령당한 백제의 서남부에 어떤 고고학적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주 지역은 여러 대형 고분들이 존재해 있는데, 이 고분군들에서는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 금동관중 가장 화려한 금동관이 출토되었고 환두대도와 금동신발등 , 여러 백제 계열 부장품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기존에 백제에 없던 옹관도 같이 출토가 되는데 이 옹관은 청동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유의 매장풍습이다.
이덕일씨의 주장에 따르면 20세기초 이곳을 처음 발굴했던 일본인 학자들이 반남 고분군의 화려한 부장품들에 대한 보고서만 작성하고 이후 도굴을 방조하여 당시에 보고서에 기록된 유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다만 이후 출토된 유물과 보고서로 추측해보면 이 세력은 상당히 국제적인 세력이라는 것이 추측이 가능하다.
여지승람 익산조에서는 이 지역에 말통( 末通 ) 대왕의 능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 동성왕은 일본서기에는 말다 (末多) 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중국 정사와 삼국사기에는 모대 (牟大)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여지승람의 말통대왕과 연결이 되는데 그렇고 보면 이 지역에 백제계열 유물뿐만 아니라 다른 한반도 고유 양식인 옹관묘등이 출토되는 상황이 이해가 된다.
동성왕은 백제 왕족으로서는 특이하게 신라귀족과 결혼한 왕이다. 단순하게 백제 동성왕과 신라 여인의 개인적인 결혼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 시기에 백제와 신라는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나주 고분군은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동성왕은 열도 출신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이 당시에 열도에 백제의 후왕으로 가 있었던 곤지의 후계자였을 것이다. 당시 열도에서는 백제와 한반도 고유의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는 전방후원분이 축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전남 나주에서 이런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475년 한반도 백제가 실질적으로 멸망 상태에 있었지만, 그 15년 후에 백제가 북위와 대륙에서 전쟁해서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한반도 백제는 멸망하였지만 열도와 한반도에는 여전히 백제 신라 가야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장수왕의 남하로 위기 의식을 겪었고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동성왕이 있었던 것이고, 나주의 고분군들은 이렇한 사실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하나 의문점이 있다. 그렇다면 백제 동성왕은 한민족 역사에 있어서 살수대첩에서 승리한 을지문덕 정도의 영웅이라고 하는 것이 되는데,삼국사기 동성왕 기록은 어째서 그를 폭군으로 기록하였을까? 그리고 왜 같은 백제인에 의해서 살해된 것일까?
이렇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서기라고 하는 사료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고 이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서 이 시기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단순히 가공 윤색의 차원을 넘어서 5세기 당시 백제 후왕과 가야게열 왜왕들이 다스리던 열도 지역에 가공의 일본 천황을 창작하여 삽입한 위사(僞史)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동성왕이 통치하던 시기와 같은 시기에 무열 천황이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본서기는 책의 대부분이 자신들이 창작한 가공의 천황들의 권위를 높이는 것에 할애된 책이다. 그 일본서기에서 유일하게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무열천황이다.
삼국사기에서 동성왕을 폭군으로 묘사한 임류각을 세우고 진기한 동물들을 길렀다는 표현과 같은 표현이 무열천황 8년 기록에도 나온다. 아마도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의 저본(底本)이 되었을 구 ( 舊 ) 백제사에 나온 동성왕에 대한 기록을 반도계열 사서인 삼국사기와 열도의 신라 백제인들이 창작한 위사인 일본서기가 같은 원전의 기록을 참조하였을 것이다. 이 기록을 삼국사기는 인용하고 일본서기는 변형하여 위사僞史를 만드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찌기 단재 신채호는 일본서기의 성덕 태자 기록은 백제 근구수 태자의 기록을 베껴서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성왕을 모티브로 일본서기 무열기가 창작되었다면, 반도 사서인 삼국사기에서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왕이 폭군으로 기록되는 점과 천황에 대한 아부가 대부분인 일본서기에서 유일하게 폭군으로 기록된 무열 천황의 수수께끼 같은 기록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란 것을 알게된다. 이 일본서기 무열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7년 夏 4월 백제의 왕이 사아군(斯我君)을 통해 조공하였다. 따로 표를 올려 ," 먼저 번에 조공을 간 사신 마나(麻那)는 백제왕의 골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사아(斯我)를 보내어 천황을 섬기게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무열기 7년
물론 이 시기에 열도에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섬겨야 하는 일본 천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정사의 왜왕과 일본서기의 천황은 일치하는 인물이 하나도 없는데, 역시 일본서기의 천황들은 가공인물들인 것이다. 실제 역사는 일본 열도의 백제 후왕을 교체하는 내용이 백제 구사舊史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시기는 백제 동성왕 즉 모도왕에서 무녕왕 사마왕 ( 斯摩王) 으로 교체가 되는 시점이다. 마나와 사아 그리고 모도왕과 사마왕이 음운상으로 대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는 열도의 동성왕의 아들이 열도의 백제 후왕을 하였으나 무녕왕의 아들로 교쳬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마나를 백제왕의 골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동성왕은 신라 여인과 결혼하였고 마나는 백제인 신라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였을 것이다. 열도의 신라 백제 세력을 등에 업고 대륙에서 전쟁을 한 동성왕 자체도 순수하게 백제인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마 이것이 대륙에서 북위와 전쟁해서 승리한 위대한 대왕을 반도 백제인들이 암살한 이유였을 것이다. 반도 백제인들의 입장에서는 신라인의 피가 섞인 백제왕과 후왕들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동성왕은 백제의 왕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 그리고 열도에 걸친 백제 신라 가야 세력을 모두 통치하는 대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당시 동북아 최강자중의 하나였던 북위와 전쟁해서 승리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반도의 백제인들로부터 암살을 당하고 폭군이라는 오명을 쓴 채 역사에 기록되어 잊혀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백제 가야 신라 세력의 특성이 모두 나타나는 동성왕의 나주 고분군은 일본 학자들, 그리고 일부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에 의해서 왜인의 유적이라 불리기도 하는 등의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10)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선비족 대 고구려의 관계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네이버 지식백과] 선비족 모용씨의 강성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3) [네이버 지식백과] 미천왕의 요동 승전과 선비족 축출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4) [네이버 지식백과] 광개태왕의 환도성 천도와 선비족 정복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5)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금관이 선비족에 미친 영향 (고구려 금관의 정치사, 2013. 11. 29., 박선희)
(6) ▒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7) ▒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8) ▒홍원탁 교수2▒ (hongwontack.pe.kr)
(9) 선비족도 고조선의 한 갈래, 고구려와 형제 우의 나눠 | 중앙일보 (joongang.co.kr)2011.03.13
(10) 백제-북위와의 전쟁은 실재 있었는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차태헌 | 기사입력 2015/08/10 [14:02]
<참고자료>
선비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북위 (북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 스스로 조선의 후예라고 비석에 쓰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기자명오종홍 2017.04.17
中 역사학자 "모용 선비족은 黃帝의 후예" (daum.net) 2007. 2. 28.
전혀 뿌리 다른 이민족을 '염황자손'으로
"황제족의 중국 북방 활동설 신뢰성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이돈관 특파원 = 4세기에서 5세기까지 지속된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 시기 5호의 하나인 연(燕)나라를 세워 북방의 패권을 다투던 모용선비(慕容鮮卑)족이 사실은 중국의 전설적 제왕인 황제(黃帝)의 후예라는 주장이 한 역사학자에 의해 제기됐다고 중국 언론이 27일 보도했다.
이는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 존재했던 모든 고대 국가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이른바 '다민족 통일국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순수 한족과 전혀 다른 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공인돼 온 고대 이민족을 중국인들이 민족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황제의 후예라고 강변하는 셈이어서 주목된다.
지금까지 중국인들에게 흉노(匈奴)족, 갈(갈<羊+曷>)족, 강(羌)족, 저(사람인변 없는 低)족 등과 함께 고대 소수민족의 하나로 알려져온 모용 선비족을 황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랴오닝(遼寧)성 차오양(朝陽)시의 삼연(三燕)문화연구소 레이광전(雷廣臻) 회장.
역사학 교수이기도 한 레이 회장은 "모용선비족이 문자를 갖지 못해 그 족속에 관한 내용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 밖에 없었지만 황제의 후손이라는 기억은 아주 명확하게 갖고 있었다"면서 몇몇 역대 전적의 기록을 그 증거로 들었다.
레이 회장에 따르면, 명(明)나라 양신(楊愼)의 '승암시화(昇巖詩話)' 가운데 "모용씨는 헌원(軒轅)의 후손임을 자처했다"고 돼있는데 이 헌원이 바로 황제다. '산해경(山海經)'에도 "북적(北狄)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황제의 후손을 시균(始均)이라 하고 시균은 북적에서 나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후대에 나온 '진서(晉書)'와 '북사(北史)'는 이 같은 산해경의 언급을 인용, "시균은 선비족의 시조"라고 기술했다. 특히 진서에는 진나라에 의해 '선비도독'으로 봉해진 모용외(慕容외<廣에서 黃대신 鬼>)에 대해 "창려극성(昌黎棘城)의 선비인이고, 웅(熊)씨의 후손인 그의 선조는 대대로 북이(北夷)에 살았으며 동호(東胡.흉노)라고 했다"고 돼있다.
레이 회장은 "진서에 나타나는 '창려극성'은 지금의 랴오닝성 이(義)현이고, 이른바 '웅씨의 후예'라는 것은 바로 황제의 후손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서에 모용선비가 도읍한 곳으로 나와 있는 '자몽지야(紫蒙之野)'는 고증 결과 서요하(西遼河) 상류, 즉 대흥안령 이남, 연산(燕山) 이북의 광대한 지구으로서 이 곳은 바로 최근 20-30년 동안 고고학자들이 주목해온 홍산문화(紅山) 구역"이라고 밝혔다.
중국고고학회 궈다순(郭大順) 상무이사는 이와 관련, 황제족은 북방 유목.어렵부락의 특징대로 자주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기 때문에 정처가 없었다면서 "요하문명이 제시하고 있는 내용, 앙소(仰韶)문화와 홍산문화의 남북접촉 등의 문화관계로 볼 때 5제(五帝) 전기의 여러 대표적 인물들이 북방에서 활동했다는 주장은 신뢰성이 있다"고 말했다.
1981년 새롭게 제시된 '다민족 통일국가론'을 뒷받침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중국 고고.역사학계 는 동북공정 본격 착수 전인 1996-2000년에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추진, 전설적인 나라로 여겨지던 하(夏)를 실제 존재했던 국가로 공식화해 중국의 역사시대를 1천229년이나 끌어올렸다.
이어 2001-2005년에는 제1차 '중화문명탐원(中華文明探源)공정'이라는 대규모 역사 프로젝트를 통해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알려진 '3황5제(三皇五帝)'를 실제 역사에 편입해 자국의 역사를 1만여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지난해부터 현재 제2차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 황제 = 염제(炎帝) 신농(神農) 등과 함께 중국의 전설적 제왕들인 3황5제에 포함되는 가상의 인물이다. 치우(蚩尤)의 난을 평정하고 천자가 됐으며, 집.의복.배.수레.활 등을 발명하는 한편 문자.음률(律).도량형.의술.달력 등을 제정한 중국 문명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진다.
중국인들을 일반적으로 '염황자손(炎黃子孫)'을 자처하며 염제와 황제를 중화민족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으나 불멸의 중국 고대 사서인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전설이라며 아예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
중국은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 황허(黃河)풍경명승구에 '염황 2제 조각공원'을 건설하고 이곳에 세계 최대 규모인 높이 106m의 염제와 황제(黃帝)의 조각상(염황 2제 조각상)을 공사 착수 20년 만에 완공했다.
◇ 모용 선비 = 모용씨는 흉노(동호)를 구성한 부족 가운데 하나였던 선비의 한 세력. 중국 진(晉)나라와 고구려 사이 요동(遼東).요서(遼西) 지방을 무대로 활동한 선비족 내부에서는 3세기 이후 모용씨와 우문씨(宇文氏), 단씨(段氏), 척발씨(拓跋氏) 등 4개 세력이 주도권 다툼을 벌인 끝에 4세기 초 모용씨가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당시 모용 선비의 우두머리가 모용외(269-333년)였고,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황<皇+光>. 297-348년)이 세워 스스로 초대 왕이 된 전연(前燕)은 5호16국의 5호 가운데 하나로 한창 때의 강역은 현재의 산시(山西)성, 허난(河南)성, 안후이(安徽)성, 장쑤(江蘇)성, 랴오닝(遼寧)성의 일부에 걸쳐 있었다.
모용황은 서기 339년 고구려 서북방의 중요 거점인 신성(新城)을 공격한데 이어 342년에 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가는가 하면 부왕인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갔다가 돌려주기도 했다.
모용 선비는 370년 전연이 망한 뒤 다시 후연(後燕), 남연(南燕), 북연(北燕)을 잇달아 세웠으나 마지막 모용 선비의 왕국인 북연이 436년 북위(北魏)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완전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랴오닝성 차오양은 전연, 후연, 북연 등 3개 모용 선비 국가가 도읍했던 곳이어서 '삼연고도(三燕古都)'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don@yna.co.kr
"고구려가 북위에 책봉 준 자료 있다" (daum.net)2004. 9. 9.
[이덕일의 한국통사] 중국의 북연도 고구려 왕족이 세운 나라 | 5호 16국 시대 북연과 고구려 장수왕과 관계
https://youtu.be/p6YD4UV0GaM?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이덕일의 한국통사] 고구려 여인은 어떻게 위나라 황후가 됐을까 | 북위를 통치했던 고구려 귀족 일가의 숨겨진 이야기
https://youtu.be/u_dKp_v0XTk?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이덕일의 한국통사] 고구려 형제가 지배한 북위 선비족과 패권 다툼 이후 수나라 당나라 건국 주역되다
https://youtu.be/Jhocyzv_CmM?list=PLRAmvpNm4pmknMclNbv8SQ0DcEnzu63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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