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 (1)제주도 고산리유적 본문
《환국-가사라국》
6. 환국(9000년 전~6000년 전, BC7198~BC3898)과 신석기문화(1)
6.1 가장 오래된 신석기마을 제주도 고산리유적 - 10,000년 전~8000년 전
출처; 2008년 7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5) 1만 년 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上)〉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7181739475&code=900305
'제주 고산리 유적' 전경 << 연합뉴스 DB >>
출처;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50615095600056
▲ 한반도 최초의 신석기 유적지인 제주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412호) ⓒ제주의소리
출처 : 제주의소리, 〈제주 고산리서 한반도 최고 집단주거지 발굴〉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18167
고산리유적은 해발고도가 15~20m 내외의 평탄한 해안저지대에 위치하며, 북동쪽으로 당산봉이 있고 남쪽에는 수월봉이 자리하고 있다. … 고산리 일대에는 제주도에서도 보기 드문 저평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으며, 음용수 이용이 가능한 샘과 풍부한 용천수가 해안을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어 신석기시대 이래로 마을이 형성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산리유적은 신석기시대 가장 오래된 마을로 형성 년대는 1만 년 전으로 보고 있다. 지표조사(1992년)와 발굴조사(1994년ㆍ1997년ㆍ1998년)를 진행하여, 원형움집터 등 주거지 33동과 움구덩(수혈유구) 522기, 야외화덕(야외노지) 11기, 돌무지(집석유구) 1기, 도랑(구상유구) 3기를 확인하였는데 인골은 확인되지 않았다.
신석기시대의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산리식토기와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 등 다양한 토기류 1,000여 점과 후기구석기시대의 눌러떼기수법으로 제작된 화살촉과 찌르개ㆍ긁개ㆍ뚜르개ㆍ홈날석기를 포함한 성형석기와 돌날, 박편, 석재, 망치돌, 어망추, 갈돌, 갈판 등 99,000여 점, 옥귀고리 1점도 출토되었다. 타제석기 재료인 석재와 장신구인 옥귀고리는 제주에 산지가 없으므로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베리아 남부와 일본에서 확인되는 좀돌날 몸돌과 유사한 좀돌날과 몸돌도 출토되었다.
제주도는 구석기시대 후기 이래 인류가 생활한 것으로 판단되며,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전환되는 시점에 제주도에서는 고산리문화가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 고산리유적 주거지 단계설정 개념도. <사진 제공=제주문화유산연구원>
출처; 제주의소리, 〈국내 '최고' 제주 고산리 유적.."활용은 언제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32567
▲ 제주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412호)에 대한 시.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 특히 왼쪽 상단의 결상이식(귀고리) 유물은 제주에서 처음 발굴된 신석기시대 귀고리 유물이다. ⓒ제주의소리
출처; 제주의소리, 〈제주 고산리서 한반도 최고 집단주거지 발굴〉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18167
▲ 토기류 일괄. <사진 제공=제주문화유산연구원>
출처; 제주의소리, 〈국내 '최고' 제주 고산리 유적.."활용은 언제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32567
고산리유적의 기원은 연해주지역이라고 보고 있고, 고산리 문화를 창조한 사람들은 8000년 전쯤 융기문과 지(之)자문 토기문화의 주인공들로 교체된다고 한다.
『고산리유적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연해주 지역에서 동해안을 거쳐 들어왔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연해주 지역에서 서해를 거쳐 들어온 것이다. 토기로 본다면 고토기(원시형무문양토기)의 발생과 관련이 있는데, 섬유질토기가 관건이다. 석기로 본다면 좀돌날문화에 있어 돌날기법은 동북아시아의 기본적인 석기제작 방식이다. 고산리유적에서 좀돌날기법과 양면조정기법(눌러떼기수법)이 공존한다는 것은 좀돌날기법의 변용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고산리유적)
『결론적으로 말해 1만 년 전 이전엔 황해는 바다가 아니라 표고 20~30m 정도 되는 완만한 평원지대였으며, 랴오둥(遼東) 반도에서 흘러오는 여러 개의 강줄기가 주변 대지를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평원이나 혹은 강줄기를 따라 남으로 향해 제주도에 닿아 정착했다는 게 강창화의 결론이다.
박용안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린 최종 빙하기의 해안선과 강줄기. 중국 대륙과 한반도가 육지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제주 고산리에서 확인된 식물성 고토기(사진 오른쪽). 아무르강 유역의 고토기(왼쪽)와 유사하다.
…… 자, 다시 요약해보자. 지금으로부터 1만1000~1만 년 전 중국 동북과 연해주 사이인 아무르 강에서 살던 사람들이 내려와 지금의 제주도에 정착했다고 치자. 그들은 세형돌날문화와 식물성 섬유질을 보강한 고토기를 사용한 후기 구석기 최말기~신석기의 여명기, 즉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를 풍미한 ‘경계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산리 문화를 창조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런 뒤 융기문과 지(之)자문 토기문화의 주인공들로 교체된다. 이때가 8000년 전쯤이다. 이후 제주도는 광범위한 동이의 문화권이 되어 문화의 연속성이 이루어지고 지금에 이른다.』{출처;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6) 1만 년 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上), (下)}
고산리식토기는 식물성섬유질토기인데 이러한 토기는 연해주지역과 일본에서도 확인된다. 연해주지역 아무르강 중하류의 가샤와 그로마투하유적, 또 일본의 센부꾸지 가미구로이와, 구즈하라자와, 마나미카지자와, 가즈사카유적에서 이러한 섬유질토기가 나왔다. 제주도 내 유적도 증가하고 있는데 김녕리, 강정동, 오등동, 삼양동 삼화지구, 외도동, 도두동, 예래동, 성읍리유적 등이 있다. 연해주 아무르토기(BC14000년)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이고 그 다음이 일본 조몬토기(BC10,500년)이고 그 다음이 제주 고산리토기(BC10,000년)이다.
김찬곤은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9]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8- 제주도 고산리식토기 무늬〉에서 흙 반죽에 풀대를 섞은 것이 아니라 그릇을 빚은 다음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본다.
『〈사진128〉을 보면 여느 신석기 그릇과 달리 무늬를 새기거나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릇 표면을 보면 뭔가 무늬가 있다. 이 무늬는 풀대 자국이다. 그릇을 찰진 흙으로 빚은 다음 표면에 풀대를 듬성듬성 붙이고 넓적한 돌 같은 것으로 가볍게 두드려 그릇 겉면에 박히게 했다. 이렇게 빚은 그릇을 그늘에 말린 뒤 불에 구우면 불 속에서 풀대가 타고 자국이 남는다. 이 자국이 아래 그릇처럼 기이한 무늬가 된 것이다.
▲ 〈사진128〉 제주 고산리식토기. 높이 25.6cm.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평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사진129〉 고산리식토기 조각. ⓒ 제주국립박물관
흙 반죽에 풀대를 정말 섞었을까?
일단 이 그릇과 관련하여 학계에 잘못 알려진 것부터 정정할 필요가 있다.
고산리식토기라 하는 원시무문토기는 빚을 때 바탕흙(胎土)에 풀 같은 유기물을 첨가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나왔다.
-이건무·조현종, 《선사 유물과 유적》(솔, 2003), 69쪽
여기서 이건무·조현종은 이 토기를 '무문토기', 즉 무늬가 없는 토기로 본다. 그런데 이 그릇의 겉면 풀대 자국은 고산리 신석기인이 일부러 낸 무늬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밝히겠다.
또 흔히 고산리식토기 하면 어느 글을 읽어도 흙 반죽에 풀을 섞었다는, '보강제'로 풀을 넣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이것을 알려면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그릇을 찍어 보든지 아니면 깨뜨려 봐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봤다는 연구 성과물은 아직 없다.
지금 당장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릇을 확대해 보는 수밖에 없다. 〈사진128〉은 해상도가 아주 높다. 크게 확대해서 보면 흙 반죽에 처음부터 풀대를 넣어 반죽했는지, 아니면 그릇을 빚은 다음 풀대를 그릇 표면에 두드려 붙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릇을 빚은 다음 나중에 덧붙인 것으로 본다.
흙 반죽에 처음부터 풀대를 섞었다는 말은 상식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된다. 풀대는 그릇을 구울 때 탈 수밖에 없다. 구덩이를 파고 아래에 나뭇가지를 놓고 굽더라도 불 온도는 600도 정도 된다. 이 온도면 그릇 표면뿐만 아니라 흙속에 있는 풀대도 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풀대 공간이 생겨 물이 샐 수 있고 그릇이 잘 깨질 수밖에 없다.
이 그릇의 무늬를 읽을 때는 자신이 직접 고산리 신석기 그릇 장인이 되어야 한다. 한 신석기인이 고산리 산 낮은 언덕에서 흙을 파 왔다고 치자. 우선 신석기 장인은 흙 속에 있는 돌이나 나무뿌리 같은 것을 골라낼 것이다. 큰 모래 알갱이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그릇이 매끄럽게 빚어지고 구워도 단단하다. 그릇을 빚어 본 신석기인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자명한 상식이다. 그래서 고산리 신석기인이 흙 반죽에 일부러 풀대를 넣었다는 것은 상식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뭔가 표현하고자 했다.
또 하나, 세계 신석기인들은 그릇에 무늬를 새기거나 그렸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거의 모든 나라 신석기인들은 그릇에 비와 구름을 가장 많이 그렸다. 한반도 신석기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석기 1만 년 동안 달, 별, 해, 사람 같은 것은 새기지 않았다.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릇 겉면에 하늘 속 물, 하늘(경계), 하늘 아래 구름, 구름에서 내리는 빗줄기, 이 비가 흘러가는 심원의 세계를 새겼다. 제주도 신석기인 또한 마찬가지다. ……
▲ 〈사진142-3〉 제주 고산리 유적 제2구역에서 나온 고산리식토기 조각. 《제주 고산리유적Ⅰ(2구역)》(2017, 제주고고학연구소) ⓒ 제주고고학연구소
위 〈사진142-3〉을 〈사진129〉와 견주어 보면 구름무늬가 얼마나 자연스러워졌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사진143〉의 동그랗게 말린 풀대와 풀잎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이렇게 하니 구름무늬가 훨씬 자연스럽고 슬립(slip) 효과도 났다. 고산리 신석기 장인은 마침내 1차원 그릇 평면에 3차원 입체 구름을 거의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세계 신석기 미술사에서 고산리 말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신석기 조몬인이 그릇 아가리에 3차원 입체 구름을 아주 빚어 붙였다면 제주도 고산리 신석기인은 1차원 그릇 표면에 3차원 입체 구름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 한국미술의 기원이 입체화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국미술의 기원이 '추상미술'이 아니라 '리얼리즘, 사실주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2019년 2월 1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9]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8- 제주도 고산리식토기 무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08699
한편 김찬곤은 덧띠무늬토기(융기문토기)에서 우리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는 이 덧띠 무늬 세 가닥 가운데 어느 한 가닥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하면서, 가장 위 한 가닥은 하늘(天)이고, 그 아래 두 가닥은 구름(雲)이라고 보았다.
▲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 높이 27cm.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형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토기가 중요한 까닭은 한국미술의 시원이자 기원이기 때문이다. 〈사진113〉 대전선사박물관, ‘처음 만난 토기, 제주 고산리 유적’ 전시 포스터. 이 특별전은 오는 2월 28일까지이다. ⓒ 국립제주박물관
『1988년 1월, 당시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생 강창화씨가 고산리 소식을 듣고 이곳을 찾았다. 한겨울이라 바닷바람이 여간 시린 게 아니었다. 그는 직접 조사를 해보고 싶어 저 멀리 경상북도 경산에서 제주까지 달려왔다. 그는 맑은 눈으로 고산리 일대를 샅샅이 살폈다.
그러다 제주 국토방위군이 파 놓은 참호에 닿았다. 뭔가 느낌이 왔다. 그는 참호에 들어가 마치 구덩이를 스캔하듯 훑으며 차근차근 살폈다. 그렇게 한참 참호를 살펴보는데, 뭔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가만 조심히 흙을 걷어내니 분명히 토기 조각이었다. 그의 손은 떨렸다. 기원전 1만 년 전, 지금으로부터 1만2000년 전, 우리나라 그릇 역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릇을 대학원생 강창화가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되자 발굴조사를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하지만 조사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991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 〈사진118〉 1988년 강창화 씨가 찾은 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 조각. 〈사진119〉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덧띠무늬토기 조각. 구름 띠 위 빗금은 수분(물기)을 표현한 것이다. 〈사진120〉 경기도 연천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 조각. 이 조각은 아가리 쪽에 ‘하늘 속’ 물(水)을 새겼다. ⓒ 국립제주박물관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22년째인데도
〈사진118〉 고산리 덧띠(융기) 무늬와 〈사진119〉 부산 동삼동 덧띠 무늬를 보면 아주 닮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비슷한 무늬가 나오면 두 지역의 영향 관계부터 따진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밝혀내지 못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은 최대 기원전 6000년까지 내려잡을 수 있고, 제주 고산리 유적은 기원전 1만 년까지 내려간다.
그렇다면 굳이 영향 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제주 고산리에서 부산 동삼동으로 이러한 무늬가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토기를 놓고 영향 관계부터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무늬가 무엇인지, 무엇을 '구상'으로 한 것인지 먼저 밝혀야 한다. 이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22년째 되어 간다. 그런데도 우리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는 이 덧띠 무늬 세 가닥 가운데 어느 한 가닥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
한국미술사의 시작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덧띠무늬토기)를 들 수 있고, 이 토기야말로 우리 한국미술의 시원이고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토기의 무늬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국미술의 시원과 기원을 밝혀내는 일이기도 하다.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을 읽은 독자라면 이 무늬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112〉 그릇 무늬에서 가장 위 한 가닥은 하늘(天)이고, 그 아래 두 가닥은 구름(雲)이다. ……
신석기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미술'
〈사진122〉 고산리 융기문토기에 대해 국립제주박물관은 아래와 같이 풀이하고 있다.
"토기는 대부분 고산리식 토기로 불리는 원시무문토기와 융기문토기, 소량의 압인문토기가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는 아가리 부근에 3줄의 점토 띠를 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로 태선융기문과 유사하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의 역사와 문화》(통천문화사, 2001), 33쪽
참으로 어려운 설명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구절은 "아가리 부근에 3줄의 점토 띠를 에스(S)자 모양으로 곡선화 시킨 기하학 무늬"라는 말이다. 이 말을 우리 말법으로 고쳐 쓰면, '아가리 쪽에 흙 띠 석 줄을 에스(S)자 모양으로 덧붙인 기하학 무늬'쯤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무엇을 새롭게' 알려주는 설명글이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흙 띠 세 가닥을 보는 눈도 잘못되었다. 가장 위 아가리 쪽 한 가닥은 아가리와 반듯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고, 밑에 두 가닥만 구불하게 붙였다.
유홍준은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과 더불어 제주 고산리 덧띠무늬토기를 설명하면서 이 '덧띠 무늬'를 '추상 무늬'라 한다.
"덧띠무늬토기는 그릇을 성형한 다음 이를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표면에 굵은 띠를 서나 가닥 덧붙인 아주 세련된 토기다. (……) 덧띠 장식에는 자연스런 추상 무늬 효과도 있고 느릿한 동감과 진한 손맛이 느껴진다. (……) 이런 덧띠무늬토기에서는 모던아트modern art의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 예술에서나 볼 수 있는 현대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데 원초적 삶의 건강성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예술성을 앞세운 모던아트의 그것보다 더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눌와, 2012), 26-28쪽
여기서 유홍준은 '융기문토기'라 하지 않고 '덧띠무늬토기'라 한다. 이것은 아주 알맞게 정정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융기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인데, 〈사진112〉의 그릇 무늬는 저절로 융기한 것이 아니라 고산리 신석기인이 '일부러' 흙띠(덧띠)를 붙여 '무언가'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융기문'보다는 '덧띠무늬'가 더 알맞다. 그런데 그는 이 덧띠무늬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덧띠가 그릇을 더 '단단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든지, 모던 아트의 '원초적인 삶'이 살아 있다 하고, 결국 국립제주박물관의 설명글처럼 '추상 무늬'로 보는 것이다.
▲ 〈사진123〉 고산리 덧띠무늬토기 그림.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놓고 보니 꼭 우동 그릇 같다. 이 그릇은 높이가 27cm, 아가리 지름이 50cm나 되는, 아주 커다란 물독이다. 〈사진124〉 미국 미시시피 알칸사스 신석기 토기. 구름이 한 가닥이지만 한 가닥을 석 줄로 그렸다. 고산리와 알칸사스 신석기 토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무늬라 할 수 있다. ⓒ 김찬곤
유홍준과 거의 같은 풀이는 김원룡·안휘준의 <한국미술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한국미술사 관련 책 가운데 기본서라 할 수 있는데, 2003년 개정판을 내면서도 한국미술의 기원 고산리 덧띠무늬토기는 다루지 않았다.
"덧무늬는 아마 토기 아가리에 보강을 목적으로 감아 돌렸던 끈에 착안하여 발생하였다고 생각되는데, (……) 빗살무늬토기에서처럼 덧무늬들이 모두 비구상의 기하학적 무늬라는 것이 우리 신석기시대 도안의 공통적 성격이라 하겠다." -김원룡·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시공사, 2016), 36-37쪽
토기 부분은 김원룡이 썼을 것이 분명한데, 그는 덧띠의 기원을 그릇 아가리 쪽에 감았던 끈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세계 신석기 미술사나 문양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다. 또 신석기 무늬를 '비구상의 기하학적 무늬'라 단정하는데, 이 또한 잘못된 전제다.
지금까지 나는 한반도 빗살무늬토기를 다루면서 빗살무늬가 희랍의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석기 미술을 '비구상의 미술'로 보고 있다. 이는 한반도 신석기인이 1만 년 남짓 '추상미술'을 했다는 말이고, 우리 미술의 시작을 추상미술로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동안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 글에서도 밝혔듯이 한반도 신석기인의 무늬는 철저히 구상(천문, 구름, 비)에서 왔고(앞 글 '빗살무늬는 과연 암호일까?' 참조 바람), 그런 만큼 한반도 신석기인의 미술은 추상미술이 아니라 '구상미술'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겠다.』
<참고자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고산리유적,
https://portal.nrich.go.kr/kor/journalUsrDtlView.do?menuIdx=801&idx=&d_idx=2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주 고산리유적,
연합뉴스, 2015-06-15, 〈제주 고산리 선사유적 추가 발굴조사 내달 착수〉,
https://www.yna.co.kr/view/AKR20150615095600056
제주의소리, 2013.07.30., 〈국내 '최고' 제주 고산리 유적.."활용은 언제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32567
제주의소리, 2012.10.10., 〈1만 년 전 신석기인, 쪽방에 모여 살았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21137
제주의소리, 2012.07.24. 10:24, 〈제주 고산리서 한반도 최고 집단주거지 발굴〉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18167
2008년 7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5) 1만 년 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上)〉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7181739475&code=900305
2008년 7월 25일자 경향신문 기사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6) 1만 년 전의 세계 제주 고산리(下)〉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07251649515&code=900305
2019년 1월 21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8] 빗살무늬토기의 비밀7-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의 석 줄 띠무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05225
2019년 2월 1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19]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8- 제주도 고산리식토기 무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08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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