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배가 10척, 통일신라·조선시대 각 1척이며, 국내에서 발굴됐지만 중국 고선박이 2척입니다.
발굴 장소는 인천 옹진부터 전남 진도·완도에 이르기까지 서남해에 집중돼 있습니다.
발견 당시 모습을 보면, 운항 중이거나 정박 상태에서 침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고선박은 겨우 1척인데, 고려시대 배는 10척으로 훨씬 많이 발굴됐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미스터리입니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고, 조선시대에 조선술·항해술이 더 발전해 침몰한 배가 적을 수 있다는 분석 등이 나올 뿐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 14척의 고선박, 역사를 증언하다
왼쪽부터 고려시대 청자운반선 ‘태안선’에서 나온 ‘청자 퇴화문두꺼비모양 벼루’(보물 1782호), 고려 선박 ‘마도2호선’에서 발견된 ‘청자 상감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보물 1783호).
바다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고선박은 ‘영흥도선’이다. ‘안압지선’과 더불어 2척뿐인 통일신라시대 배다. 인천 옹진군 영흥면 섬업벌 해저에서 2013년 발굴됐는데, 선체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710~774년으로 나타났다.
선체는 철제 솥 10여점과 도기 등 유물에 눌린 길이 약 6m, 너비 1.4m가 남아 있다. 황금빛을 내는 당시 최고급 도료인 황칠이 발견돼 화제를 모았으며, 주변 해저에선 수백점의 청자 등이 흩어져 있어 또 다른 배가 침몰해 있을 가능성도 높다.
<조선왕조실록>에 1392~1455년 사이 200척이 이곳(태안 안흥량)에서 침몰됐다고 기록될 정도다. ‘배 무덤’이라 불리던 곳이 지금은 ‘수중문화재의 보물창고’ ‘바다의 경주’라고 평가받는다.
고려 고선박은 경기 안산시 대부도 해역에서도 ‘대부도선’ ‘대부도2호선’이 확인됐다. 또 다른 고려 배로는 ‘신안 안좌도선’(전남 신안군 안좌도), ‘군산 십이동파도선’(전북 군산시 십이동파도), ‘목포 달리도선’(전남 목포시 달리도), ‘완도선’(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이 있다.
이들 고선박이 발굴되면서 비로소 고려 선박의 구조와 형태, 당시 해상운송 루트나 체계, 중국 배와의 특성 비교, 실린 유물을 바탕으로 한 각종 연구 등이 가능해졌다.
지금까지 수중발굴된 고선박과 해저 유물들은 목포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의 보존센터·해양유물전시관에서 자세한 설명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수중고고학의 중요성, 이해를 높이기 위해 체험교육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 운영 중이다.(1)
태안 앞바다 해저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대섬 인근 해저에서 침몰 고려선박이 발견되고 여기서 2만여 점에 이르는 고려청자가 수습된 일은 이제 '수중의 경주'를 알리는 신호탄에 지나지 않는다고 국립해양유물전시관(관장 성낙준)은 해저 속 상황을 전했습니다.
9백년만에 빛보는 고려청자들
(태안=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대섬 앞바다 속에서 침몰한 고려시대 청자운반선에 실린 청자들. 12세기 중반 전남 강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최소 1만2천점의 청자들은 대섬 앞바다에서 침몰한 뒤 약 9백년만에 빛을 보게 됐다. 지난 5월 청자 한 점을 뒤집어 쓴 주꾸미가 이 지역 어민의 그물에 잡히면서 발굴이 시작됐다. << 잠수협조 -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jihopark@yna.co.kr
해저 곳곳에 유물..'수중의 경주' 불리기도
9백년만에 빛보는 고려청자들
(태안=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대섬 앞바다 속에서 침몰한 고려시대 청자운반선에 실린 청자들. 12세기 중반 전남 강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최소 1만2천점의 청자들은 대섬 앞바다에서 침몰한 뒤 약 9백년만에 빛을 보게 됐다. 지난 5월 청자 한 점을 뒤집어 쓴 주꾸미가 이 지역 어민의 그물에 잡히면서 발굴이 시작됐다. << 잠수협조 -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jihopark@yna.co.kr
이를 입증하듯 대섬 해저 발굴에 이어 해양유물전시관은 최근 이곳에서 10㎞ 가량 떨어진 마도(馬島) 해저에서도 무려 515점에 달하는 고려청자 뭉치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태안 앞바다 해저에는 도대체 얼마 만한 유물이 가라앉아 있을까?
태안 앞바다서 또 대규모 청자 인양
(서울=연합뉴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태안 지역 마도(馬島) 앞바다에 대한 긴급탐사와 수중 발굴조사를 최근 실시한 결과 연판문대접을 비롯한 고려청자 515점을 인양했다. 청자는 꾸러미(줄) 단위로 출토되는 양상으로 출토되며 종류 또한 다양하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제공>>
그 구체적인 수치에 대해 해양유물전시관 측은 함구로 일관한다. 도굴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성 관장은 "그것을 밝힐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면서 "다만 이 시점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해저 곳곳에 청자가 널려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해저 발굴에 종사하는 진호신 학예연구사는 해저 사정을 "유물의 지뢰밭", "수중박물관"이라는 말로 비유했다.
태안 앞바다에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진 학예사는 이곳이 안개와 암초와 조류의 3박자가 맞아떨어져 선박의 좌초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걸맞게 태안 앞바다는 고려-조선시대에는 안흥량(安興粱)이라 불리면서 난행량(難行梁)으로 꼽혔다. 난행량이란 통행이 어려운 여울목 같은 곳이란 뜻이다.
고려청자 보물선 특별전
(목포=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전남 목포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개막한 '고려청자 보물선-강진,태안. 그리고' 특별전에서 관람객들이 해저유물이 출토될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선박을 살펴보고 있다. <관련기사 참조> minu21@yna.co.kr
이는 실제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 3년(1403)에만 34척이 이곳에서 침몰했으며, 태종 14년(1414) 한 해에만 무려 66척에 이르는 조운선이 침몰하거나 좌초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다소 의외인 점은 태안 앞바다는 물론이고 연안 해저에서 발견된 선박은 모두 고려시대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자 해양유물전시관과 태안군청은 더욱 바빠졌다. 당장 전시관은 내년부터 현지사무소를 운영하기로 했으며, 태안군청은 이곳에 인양 유물을 전문적으로 전시할 박물관 건립과 해양유물조사 전문 국책 연구소 설립을 정부당국에 강하게 요청하기 시작했다.
항로 알려준 목간(木簡)
(목포=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23일 전남 목포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개막한 '고려청자 보물선-강진,태안. 그리고' 특별전에서 공개된 목간(木簡). 목간은 비행기의 블랙박스처럼 선박의 항로와 화물의 수취인 등 정보가 기록돼 고려시대 생활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련기사 참조> minu21@yna.co.kr
하지만 여건은 좋지 않게 돌아간다.
당장 해양유물전시관만 해도 태안 앞바다 조사인력을 빼내 새만금 방조제 건설 일환으로 다음달에는 매립 예정인 야미도 일대 조사에 투입될 예정이다.
나아가 해양유물전시관은 해저유물 발굴인양을 위해 크레인을 장착한 전용 해저발굴선 1척이 필요하다고 정부 당국에 예산 편성을 요청했으나 "야단만 맞았다"고 한다.(2)
태안 해저 청자 운반선, 주꾸미가 물어오린 청자 대접이 실마리가 돼 발견된 ‘주꾸미 보물선’이 12세기 초 전남 강진에서 귀족들한테 주문받은 청자를 싣고 개성으로 가던 배임이 확인됐습니다.
2007년 10월 11일 문화재청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충남 태안 대섬 인근해역에 침몰한 고려시대 청자운반선의 2차 발굴결과를 발표하고 그동안 인양한 청자 가운데 이형 청자와 목제 물품 꼬리표를 공개했습니다. 1976년 발굴된 신안선에서 중국 목제 꼬리표가 발견된 적은 있지만 수중에서 고려시대 꼬리표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安永戶(안영호) 등 개경의 수취인이 금방 쓴 듯 선명하다. 함께 공개한 두꺼비형 벼루와 청사자형 향로는 지금까지 보고된 바 없는 이형청자다. 사진 연합뉴스
폭 3cm 내외 두께 7~8mm의 목판에 먹으로 쓴 꼬리표는 모두 네 가지.
이 가운데 ‘耽津亦在京隊正仁守了’(탐진역재경대정인수료)라고 쓴 꼬리표는 ‘탐진(강진의 옛이름)이 개경(개성의 옛이름)의 대정(종9품 벼슬) 인수(인명 추정)에게’라고 풀이된다.
뒷면에는 ‘00載船進’(00재선진)은 ‘00가 배(의 특정부위)에 실음’이라고 쓰여있다. 이로써 태안 청자운반선이 강진에서 개성으로 운반하던 청자를 실은 배임이 확인된다고 문화재청 쪽은 밝혔다.
또 다른 꼬리표 ‘崔大卿 宅上’(최대경 댁상)은 ‘최대경 댁에 올림’으로 풀이된다. ‘대경’이 종3품 벼슬아치를 높여부르는 칭호이다.
또다른 꼬리표 ‘00安永戶付沙器一<果+衣>’(00안영호부사기일과)는 ‘(00는 재경으로 추정)개경의 안영 집에 사기 한 꾸러미를 보냄’으로 풀이된다.
나머지 꼬리표는 수취자 없이 ‘壽福’(수복)이라는 수결만 표시돼 있다.
이날 이두식 표기를 풀이해 준 최연식 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는 더 많은 목간이 발견되면 좀더 정확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발표장에 참석한 한 인사는 꼬리표 뒷면의 수결이 ‘수복’이란 수결이 아니라 무사항해와 도자기가 깨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부적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사진은 태안 청자운반선에서 나온 목제 물품 꼬리표. ‘崔大卿 宅上’(최대경 댁상)은 ‘최대감 댁 올림’ 정도로 풀이된다. 정자체 글씨와 ‘최대감’ 표기로 보아 청자 수취인이 성만 대도 알 만한 고관으로 추정된다.
꼬리표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최대경 댁상’. ‘대경’은 조선시대의 ‘대감’ 정도의 뜻으로 성만 대고 이름을 대지 않아도 알만한 고위층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꼬리표가 휘갈겨 쓴 것과 달리 정자체로 정성스럽게 쓴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인양된 청자들의 상한선을 12세기 초로 잡는 것과 관련해 고려 최씨 무신정권기의 특정인물과 관련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또 꼬리표 상의 대경, 대정 등 수취인들이 직위가 벼슬아치들이어서 고려청자가 궁중뿐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이 뒷받침된다. 꾸러미마다 꼬리표가 달려 있고 청자의 품질이 다양한 점으로 미루어 청자는 개경 거주 귀족들의 주문을 받아 납품하는 방식으로 청자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모두 1만9000여점의 청자가 인양되었다면서 이 가운데 청자사자형향로와 청자철화퇴화문두꺼비형벼루를 공개했다.
청사자형향로는 향불을 담는 세발그릇과 사자를 조각한 뚜껑으로 되어 있는데, 뚜껑에는 구멍이 뚫려 사자의 몸을 통해 입으로 향연이 나오도록 돼 있다. 사자는 앞발을 뒷발에 다소곳이 얹은 채 앉은 모양으로 수염과 이빨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으며 몸에는 소용돌이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날 도자기를 감정한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장은 이런 모양을 처음 본다면서 고려시대인들의 해학과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자는 굽는 과정에서 터진 듯 갈라져 있었다. 인양작업에 참여한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문환석 과장은 하자가 있는 물품은 주문자한테 서비스로 끼워준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또 처음 발견된 두꺼비형 청자벼루는 피부의 융기와 눈동자를 철화와 백퇴화로 표현하고 입과 다리는 음각으로 표현하였으며 등 부분에 먹을 가는 연당과 연지를 만들고 유약을 칠하지 않았다.
이날 청자대접, 접시, 완, 잔, 단지, 바릿대 등도 함께 공개됐는데, 청자바닥에 내화토를 칠한 점, 접시의 아가리 부분에 음각선이 돌려진 점, 대접 등에 음각된 물고기와 앵무 문양이 가로가 아닌 세로인 점 등으로 미루어 청자 제작연대를 최대 12세기 초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가마에 고온으로 구울 경우 도자기의 유약이 흘러내리면서 자기가 바닥에 눌러붙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의 바닥에 칠하는 물질이 무엇인가로 도자기의 연대를 따지는데 1300도에서도 녹지 않는 내화토는 12세기 초까지 쓰이고 그 뒤에는 규석이나 모래가 사용된다.
이날 청자유물을 감정한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 관장은 참외형 주전자의 주둥이와 손잡이가 작은 점, 상감청자가 발견되지 않은 점도 이처럼 연대를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했다.(3)
2007년 5월 14일 밤이었는데요. 충남 태안 안흥항 인근에서 주꾸미를 잡던 어민 김용철씨는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꿈을 꾸었답니다. 어민들 사이에서 ‘물꿈’은 길몽이랍니다. 다음날 아침 태안 대섬 앞바다로 조업을 나간 김씨는 통발에서 주꾸미 800여 마리를 낚았답니다. 그중 푸른 빛깔의 접시를 발로 끌어안고 있던 주꾸미 한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10척 중 7~8척이 침몰”
1123년(인종 1)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을 볼까요.
“안흥량 물길이 격렬한 파도 때문에 열 물과 충돌하고, 암초 때문에 위험하므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옛날엔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이 누차 침몰했기 때문에 ‘난행량(難行梁)’이라 했는데, 훗날 사람들이 ‘편(安)하고 흥(興)하라’는 염원을 담아 ‘안흥량’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안흥량’은 인당수(황해도)·손돌목(강화도)·울둘목(전남) 등과 함께 ‘4대 험로’로 꼽혔습니다.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인양된 ‘태안선’에서 확인된 인골의 모습. 인골은 정면을 위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오른쪽 팔을 펴져 있었다. 어깨뼈와 척추가 정면에서 살짝 들려져 있었다. 비운의 고려선원은 겹겹이 쌓인 청자 꾸러미 아래 깔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탈출을 위해 팔을 뻗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청자더미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안흥량은 해안선의 출입이 가장 심하고 다수의 섬이 분포돼있는 데다 수중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조류의 변화가 심합니다.
여기에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로 물살이 더욱 빨라지죠. 간조(썰물) 때나 계절적으로 풍랑이 거셀 때 안흥량을 통과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습니다. <승정원일기> ‘1667년 윤 4월9일’조는 “안흥량을 왕래하는 선박 중 뒤집혀 침몰하는 것이 10척 중 7~8척에 이르고…한 해에 바람을 만나 사고가 많으면 40~50척에 달한다”고 기록했어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안흥량을 통과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라·경상·충청도 등에서 거둔 세곡(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서울(개경·한양)로 운반하는 ‘피할 수 없는’ 조운선의 항로이기 때문이었죠.
충남 태안 앞바다의 안전운항을 관리했던 조선 수군지휘소에서 확인된 ‘무량수각’ 현판. ‘무량’ 부분에 낙관처럼 쓰인 단어가 있다. ‘구롱(口弄·농담)’이다. 무량수각은 ‘무병장수’를 바라며 쓴 현판이다. 그러나 이 해역에서 해난사고가 빈발하자 훗날 누군가가 ‘무병장수는 무슨! 농담(구롱)이야!’라는 풍자 문구를 써놓았을 것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
그렇게 거센 풍랑 속에 빨려 들어간 ‘난파선’이 이제와서 ‘보물선’이 되어 떠오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원래 주꾸미를 잡으려면 그물에 소라 껍데기를 달아놓습니다. 그러면 주꾸미가 그 안에 들어가 알을 낳은 뒤 입구를 자갈 같은 것으로 막아놓는데요. 그런데 문제의 주꾸미는 자갈이 아닌 청자접시로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겁니다.
이 사실이 태안군청에 신고되었구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발굴에 돌입했는데요. 발굴 3일만(7월6일)에 수심 15m 정도에서 95도 가량 기울어진 침몰선의 선체가 드러났습니다. ‘태안선’이라는 공식명칭이 붙은 이 난파선의 별명이 있죠.
‘주꾸미가 찾아낸 고려청자선’이었죠.
고려시대 침몰선인 ‘태안선’에서 포장된 그대로 적재 되어있던 ‘신상’ 명품 고려청자. 침몰선에서는 총 2만3815점의 유물이 인양되었고, 그 가운데 2만3771점이 자기였고, 절대다수가 12세기에 제작된 청자였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2만3815점의 인양유물 가운데 2만3771점이 자기였구요. 절대다수가 12세기에 제작된 청자였습니다.
대부분의 청자들은 완충재(짚)와 목재를 이용하여 끈으로 묶어 포장한 그대로 쌓여있었습니다.
‘태안선’에서는 ‘두꺼비 모양 벼루’도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 다리를 웅크리고 고개를 든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그중의 백미는 사자머리 모양 향로 2점(보물)이었습니다. 두 점 모두 날카로운 이빨과 매섭게 뜬 눈이 예사롭지 않지만 마냥 무서워할 수 없는 해학적인 모습입니다. 또 ‘퇴화문(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무늬) 두꺼비형 벼루’도 올라왔는데요.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 다리를 웅크리고 고개를 든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힘찬 기운이 느껴지죠.
태안선 출토유물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것은 ‘사자모양 향로’이다. 두 점 다 보물로 지정됐다. 출토된 사자 모양 향로 두 점 모두 날카로운 이빨과 매섭게 뜬 눈이 예사롭지 않지만 마냥 무서워할 수 없는 해학적인 모습이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사자모양 향로와 두꺼비 벼루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태안선에서는 명문 목간도 다수 인양됐는데요.
이중에는 ‘탐진(耽津·강진) 재경(在京·개경)…’과 ‘최대경댁상(崔大卿宅上·최대경댁에 올림)’ 등의 목간이 주목됩니다. ‘강진에서 제작된 청자가 개경의 왕실이나 귀족층(최대경 등)에 납품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