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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고려

3. 고려 고고학 (7) 고선박 신안선

대야발 2024. 12. 1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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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 보물선 신드롬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당시 발굴된 신안보물선에서 값진 고려청자와 송·원대 도자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수중 발굴은 물의 흐름, 기상조건, 기압차이 등에 따라 매우 한정된 시간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짝이 없고, 고가의 발굴 장비와 많은 예산이 필요합니다.

 

수중고고학은 신안보물선 발굴 전까지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학문이었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급속히 발전했습니다.

 

 

 

신안보물선 발굴 당시 해군 조사 모습.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어부 그물에 걸린 도자기 6점의 가치

 

신안보물선은 1975년 8월 처음 확인됐다. 어부 최모씨 그물에 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온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다른 어부들은 도자기가 올라오면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거나 집으로 가져가 개밥그릇이나 재떨이로 썼다. 최씨도 도자기의 중요성을 몰랐지만,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동생은 달랐다.

 

 

동생의 관심으로 신안군청에 신고해 나온 감정 결과, 중국 송·원대의 도자기였다. 그 이듬해 침몰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무려 700년 동안 깊은 바닷속에 잠들었던 보물선이 비로소 물 위로 떠올랐다.

 

 

이듬해 9월 도굴꾼이 잠수부를 고용해 유물을 건져내 팔려다 검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에도 도굴이 잇달아 일어났고, 발굴 해역 주민들도 도굴에 가담했다.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관계 당국은 조사를 서둘렀지만 수중발굴 경험이 없던 탓에 유물을 건져 올릴 수 있는 도구나 장비도 딱히 갖추지 못했다.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 국립중앙박물관과 해군해난구조대 등이 합동조사단을 꾸렸다.

 

 

 

신안보물선 발굴 현장에서 나온 도자기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보물선의 발굴 위치는 전남 신안군 증도 해역이다. 증도는 전남 목포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40㎞ 떨어진 섬이다. 발굴 현장은 증도와 임자도에서 각각 4㎞ 떨어진 해역이었다.

 

 

여기서 1976년 10월 26일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발굴이 시작됐다. 이후 약 10년 동안 조사가 이어진다.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물의 흐름이 바뀌는 정조 시간에만 발굴할 수 있었다. 수심은 평균 20m 정도였는데, 수중 시야가 좋지 않고 조류가 빨라 조사에 어려움이 상당했다.

 

 

1977년 제3차부터 바둑판 모양의 철재로 된 ‘그리드’를 설치해 육상 발굴처럼 조사 결과를 기록했다. 해군이 발굴하고, 학자들은 유물과 도면을 정리했다. 이렇게 해 선박과 송·원대 도자기 등 무려 2만 4000여점이 최종 출수됐다.

 

 

 

 

신안보물선에서 찾은 목간. 중국 원 영종 3년(1323년)을 의미하는 ‘지치삼년’이 새겨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보물선의 국적은 뜨거운 관심사였다. 고려냐, 중국이냐, 아니면 일본이냐로 의견이 속출했다. 연구 결과 중국 선박으로 최종 밝혀졌다.

 

 

신안보물선에서 나온 ‘지치삼년’(至治參年)이라고 새겨진 목간의 글씨가 중국 원 영종 3년(1323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가와 연대가 확인된 것이다.

 

 

선박의 구조는 어땠을까. 당시는 고려시대로, 우리나라에서 수중발굴된 선박은 모두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지만 신안선은 중국 선박으로 배 밑이 ‘V’자 모양인 첨저선이었다.

 

 

신안보물선은 중국 푸젠 지역 첨저선으로, 수심이 깊은 해역에서의 운항과 파도를 가르기에 적합하고, 배를 만들 때 무사 항해와 안녕을 기원하는 보수공이 있어 중국 선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보수공은 선수·선미 용골재 연결부에 위치한다.

 

 

선수 수직접합면 원형 구멍에는 청동거울을 넣었고 선미에는 송대 화폐인 태평통보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했다. 선체는 모두 720여편(조각)으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여년 동안 보존처리 후 복원했다. 추정 실물 크기는 길이 34m, 폭 11m, 깊이 3.7m이다.

 

 

●신안보물선에 고려인들도 승선한 듯

 

신안보물선의 유물은 도자기 2만여점, 금속품 1000여점, 자단목 1000여점, 향신료, 약제품, 석제품, 목제품, 유리·골각제품, 동전 28t(약 800만개) 등이다.

 

 

도자기는 길이 50~70㎝, 너비 40~60㎝, 높이 40~60㎝ 정도 나무상자에 10~20개씩 포개서 끈으로 묶어 적재했다. 배의 균형을 잡고자 자단목을 배 밑에 골고루 깔고 그 위에 28t이나 되는 동전을 쌓았다. 동전 상단에는 도자기와 칠기·금속제품 등을 수납했다.

 

 

배에서 발견된 도자기는 고려와 원, 일본에서 사용한 것들로 2만여점에 달한다. 침몰한 배에서 도자기가 대량으로 나온 사례는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드문 사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우리나라 유물은 청자 매병과 청자 베개, 선원들이 배 위에서 사용하던 청동숟가락 등이 있다. 고려청자는 12~13세기 강진 사당리요와 부안 유천리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중국에서 수집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인이 쓰던 것으로 보이는 숟가락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려인들도 승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신안보물선의 항로나 유물로 봐서는 고려를 거쳤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고려 왕실과 귀족들에게는 중국의 영향으로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 취향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갖춘 공예의 발전을 이끌어 고품질 상감청자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 유물로는 세토매병과 나막신, 칼코 등이 있다. 일본 가마쿠라시대는 중국과 외교 관계가 중단된 상태였지만,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교류는 활발했다.

 

 

차 마시고, 향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선종사찰,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인사와 상급 무사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었고 이런 문화를 즐기고자 관련 기물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이와 관련한 유물들이 향로, 향합, 꽃병, 잔, 주전자 등이다.

 

 

신안선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도자기·토기류로, 2만 660여점에 이른다. 도자기는 청자와 청백자가 다수였는데 대부분 중국 용천요와 경덕진요계였다. 도자기 분류로 편년과 생산지 등도 밝혀냈는데, 이렇게 대량으로 출수된 도자기는 지금까지도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유례가 드물다.

 

 

금속 유물은 1000여점으로 분향구, 불교의식구, 주방용구, 생활용구, 금속정 등 다양했다. 금속덩어리인 금속정은 녹여서 불상이나 기타 기물 제작에 사용하고자 했을 터다. 주석정과 철정이 340여점으로 가장 많고 ‘왕구랑’(王九郞)이라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특히 ‘경원로’(慶元路)가 새겨진 청동추 덕분에 선박 출항지가 중국 경원로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목제유물로는 목간, 목기발, 목제반, 칠기완, 자단목 등이 나왔다. 목간 360여점은 화물표이니만큼 화물주·적재품 단위 등을 밝히는 데 요긴하게 쓰였고 침몰연대를 분석하는 데에도 사용됐다.

 

 

이 중 목간에서 언급한 ‘도후쿠지’(東福寺)는 일본 교토시 도잔구에 있는 임제종 사찰을 가리킨다. 1319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325년 가마쿠라 막부의 도움으로 재건됐다. ‘도후쿠지’ 목간은 1323년 도후쿠지 사찰 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는 신안보물선을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묵인 아래 파견된 무역선으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식물류는 후추, 은행, 빈낭(기호식품), 여지(과일) 씨 등이 나왔다. 이러한 식물은 한약재와 향료 등이 거래되거나 구급약, 혹은 식용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며 당시 해상운송의 규모와 교류 정도를 가늠케 한다.

 

 

 

 

 

 

 

●출항한 신안보물선, 최종 목적지는

 

신안보물선의 항로는 두 갈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추정은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항에서 연안 항로를 따라 온저우 등을 거쳐 칭위안으로 북상해 무역품을 싣고 고려, 일본으로 향하는 항로다.

 

 

중국 저장성 칭위안항을 출발한 배는 고려 개경을 중간 기착지로 삼았을 것이다. 배의 발굴 지점은 한중 항로인 서남해사단항으로, 기상재해 등 돌발 상황으로 인해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른 추정은 중일 무역이 활발했던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항이 목적지인 항로다. 중국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직항하던 무역선이 남송·원대의 중국과 일본 간 주요 무역품이던 도자기와 동전들을 싣고 표류하다 침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화물주는 일본인과 기관의 대리인 등이 많았으며 목간에 새겨진 ‘조자쿠암’(釣寂巖), ‘하코자키’(筥崎) 등은 규슈의 사찰로, 하카다항과 관련이 있다.

 

 

 

신안보물선은 700년 가까이 물속에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 13~14세기 생활상을 알려줬다. 전남 목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에 신안보물선을 복원해 전시해 놨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출항지는 청동추에 새겨진 대로 ‘경원로’이다. 칭위안은 현재 중국 저장성 닝보 지역으로 남송대에 광저우, 취안저우와 더불어 국제항으로 성장한 곳이다. ‘지치삼년육월삼일’(至治參年六月二日) 목간은 신안선이 6월 남풍 시기에 출항했음을 알려준다.

 

 

신안보물선과 유물은 14세기 전후 해양 실크로드 무역의 실증이며 고려·일본 유물도 출수돼 한중일 관련성도 증명한다. 당시 중국 범선의 무대는 고려·일본과 동남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였다.

 

 

신안보물선이 고려를 경유해 일본으로 갔는지, 아니면 바로 일본으로 갔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출수가 우리나라 해역인 것은 분명한 만큼 우리나라가 해양 실크로드의 일원이었음을 대변한다.

 

 

신안보물선 수중발굴은 우리나라를 아시아 수중고고학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복원된 신안보물선의 선체와 다양한 도자기, 자단목, 목간, 금속제품 등 유물은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전시하고 있다.(1)

 

 

 

 

 

 

 

신안선이 발견된 신안 앞바다. 평균 수심 20미터 내외이며 바닥이 진흙으로 이뤄져있다. 조류가 세차고 복잡하며, 물이 흐리기로 유명한 곳이다.|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신품 도자기가 2만여점 세트로

 

1976년 10월 말 늦가을의 차디찬 바닷물을 헤치고 1차긴급발굴을 마쳤는데, 청자 52점을 포함해서 112점의 도자기를 건져올렸다.

 

본격발굴작업 끝에 해저 20m에 가라앉은 난파선은 길이 34m, 폭 11m로 측정됐다.

 

1977년부터 2척의 해군함정(장병 240명)과 해난구조대 요원(심해잠수사 60여 명)이 발굴을 담당했다. 1984년까지 9년 동안 11차례의 인양 결과는 경이로웠다. 

 

 

유물은 총 2만3502점에 달했고,

동전 800만개(28톤),

자단목(아열대산 최고급 가구 목재) 1017개,

선체조각 445개가 나왔다.

260톤의 선적량을 갖고 있던 배는 모두 140톤의 물품을 적재했다.

그 많은 화물 중에 가장 큰 부피와 양을 차지한 것은 도자기와 동전, 자단목 원목이었다.

난파선에서 인양된 도자기는 무려 2만661점이었다.

청자가 1만2359점,

청백자·백자는 5303점에 달했다.

 

 

인양된 도자기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완형의 신품들이었다. 같은 종류의 그릇을 10개나 20개씩 포개 끈으로 묶은 다음 나무상자에 넣어 포장한 것이었다. 이 무슨 뜻인가. 이 배가 상품을 싣고 가던 대형 무역선이라는 얘기다.

 

 

동전과 함께 배 밑바닥에서 쌓여있던 자단목. 1000여 본이 있었다. 아마도 일본의 대형 사찰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자재였을 것이다.

 

 

 

 

 

 

목간을 읽어 복원한 바에 따르면 난파선은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 4월22~24일과 5월11일, 6월1~3일 세 차례에 걸쳐 하물을 선적한 뒤 경원(지금의 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을 떠나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경원로(慶元路)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추가 인양된 것이 바로 그 출발점의 단서이다.

 

 

도착지는 하카다(博多·후쿠오카)였을 것이다. 목간 중에는 ‘하코자키궁(거崎宮)’ ‘조자쿠암(釣寂巖)’ 등 하카다(후쿠오카)에 있는 신사와 사찰 이름이 보이는데, 14세기 일본의 주요출항지가 바로 이 항구였다.

 

 

경원로라는 글자를 새긴 청동추. 물건을 선적한 곳이 중국 경원 즉 지금의 저장성 닝보였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그 무서운 침몰의 순간

 

배에서 인양한 생활용품들로 당시의 선상생활을 가늠할 수 있다.

즉 선박 안에는 선원, 상인, 승려 및 사찰 관계자, 화주 등이 삼삼오오 모여 국수, 튀김, 야채, 고기요리를 해먹었다.

 

 

후추와 생강, 정향을 사용해서 청동제 솥과 냄비, 깔때기, 도마에서 요리했으며, 식사는 낡은 백자사발과 접시를 사용했다. 간식으로는 여지, 복숭아, 은행, 잣, 밤을 먹었다. 배 안의 승려들은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불상과 각종 공양구를 동원해서 예불을 올렸다. 탑승자들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바둑과 장기, 주사위 놀이도 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왜 침몰의 순간을 맞이했을까.

 

 

나무패에 기록된 마지막 선적일자, 즉 6월3일이라는 날짜가 마음에 걸린다. 물론 ‘음력’임을 감안해야 한다. 원래 고려·조선시대 조운의 원칙은 4월쯤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태풍이 불기 시작하는 음력 6월부터는 항해에 각별히 조심해야 하며 7월~8월 사이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배를 띄울 수 없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 줄은 모르지만 배는 음력 칠월 보름 이전에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博多) 항에 도착하려 했다. 배는 6월3일 중국 닝보에서 마지막 선적을 마치고 고려의 연안을 따라 신안 앞바다를 통과할 때 태풍을 만난 것은 아닐까.

 

 

 

신안선에서 발견된 7점의 고려청자.

 



 

■고려청자는 왜?

 

앞서 잠깐 일별했지만 신안선에서 확인된 유물가운데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 2만점이 넘는 도자기였다. 이중 중국 저장성(浙江省) 용천요(龍泉窯) 생산품이 60%인 1만2000점에 달했다. 용천요 가마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음을 알 수 있다. 7점의 고려청자가 확인된 것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매병(입이 작고 어깨선이 풍만하며 몸체가 서서히 좁아지는 병)과 상형 연적(코끼리 형태의 벼루 먹 그릇), 완(주발), 베개, 뚜껑, 잔받침 등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적은 수의 고려청자가 무역선에 선적됐을까. 고려청자 가운데 매병은 당시 중국에서 대대로 전해진 골동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시기가 침몰당시 보다 100년 이상 앞선 13세기 전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고려청자 6점은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매병과 달리 6점의 청자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신형이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수량이 너무 적으니 주된 무역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긍의 고려 기행문인 <고려도경>은 “고려의 비색청자는 천하제일”이라 호평했다. 그랬으니 고려청자가 중국인들의 애호품으로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애호가들이 소장했던 고려청자 7점이 왜 신안선에 실렸는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배 밑에 자단목을 깐 이유

 

출토품 가운데 가장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배 밑바닥에서 잔뜩 쌓인채 발견된 자단목 1017본과 동전 28톤이었다.

우선 자단목을 보자. 자단목은 단향(檀香)으로 일컬어진다. 인도나 동남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데, 불상이나 고급 가구, 공예품의 원자재다.

 

신안선 밑바닥에 가장 먼저 적재한 자단목은 길이 2m 내외였다. 직경은 10~15㎝ 짜리가 가장 많았지만 40㎝가 넘는 것도 심심치않게 보였다. 표면에는 한자 부호나 숫자, 혹은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지중해 지역과 서남아시아에서 온 상인들이 원산지를 드나들며 남긴 흔적일 것이다.

 

왜 자단목을 배의 맨 밑바닥에 실었을까. 배의 무게중심, 즉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해도 배의 균형만 맞추려고 실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일본의 후쿠오카나 교토의 사찰에 대불을 건축하려 했던 승려와 상인들이 이 자단목을 사용하려 했을 것이다. 자단목은 특히 불가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목재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전후부터 불교와 힌두교에서 사랑받았으며, 조각품이나 장식품, 고급가구 등에 사용됐다. 따라서 신안선이 실린 자단목 역시 일본의 승려들이 소형불상이나 목탁을 만드는데 필요했을 것이다. 사찰과 귀족들의 가구에도 활용했을 것이다.

 

 

 

신안선을 축소 복원한 모습. 밑바닥에 뾰족한 첨저선이다.

 

 

 

■동전은 희대의 수수께끼

 

화려한 도자기에 가려서 그렇지 신안선에서 확인된 엄청난 양의 동전은 희대의 수수께끼였다.

처음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7차 발굴 때까지는 약 3t에 그쳤다. 그런데 1983년 9월30일까지 진행된 8차 발굴에서 동전이 터졌다. 침몰선 내부를 가득 채운 토사를 빨아들이려고 흡인호스를 들이댔는데, 거기서 동전노다지가 끌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84년 10~11차 발굴까지 그렇게 빨아들인 동전은 무려 2만8018㎏, 즉 28t이 넘었고 수량으로는 800만개에 이르렀다.

이 어마어마한 동전은 배 밑바닥에 쌓아둔 자단목 위에 실려 있었다. 동전은 대부분 끈에 꿴 채였다. 끈은 비록 썩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었다. 인양 과정에서 동전의 소유주마다 달아둔 목패가 나왔다. 주인들이 자신의 동전에 주인표시를 내놓은 것이다. 인양된 동전을 검토하니 놀라웠다. 신안선은 가히 동전박물관이었던 것이다.

 

 

배에서 확인된 동전은 66종에 이르렀다. 신(기원후 8~23년)에서 제작된 화천(14년) 및 후한의 오수전(25~219년)부터 원나라 지대통보(1310년)까지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동전이 하염없이 쏟아진 것이다. 신-후한-당-북송-남송-요-금-원 및 서하시대까지…. 심지어 안남(베트남)에서 만든 동전(천복통보·天福通寶)까지 나왔다. 이 발굴로 우리나라는 중국 동전 세계 최다 보유국이 되었다.

 

 

 

신안선에서 쏟아져나온 동전들. 28톤 800만개의 동전이 나왔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동전 800만개의 의미

 

그렇다면 신안선에 실린 어마어마한 동전의 실체는 무엇일까. 왜 상인들은 동전을 닥치는대로 실었을까.

동전은 우선 자단목과 함께 밸러스트(ballast·배의 무게중심을 잡으려고 바닥에 놓는 물건)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작 배의 균형이나 잡으려고 그 엄청난 동전을 실었을 리는 만무하다. 

 

 

지금까지 연구로는 대략 두가지 견해로 해석된다.

즉 중국 동전을 수입해서 그대로 일본에서 사용하려 했다는 설과,

청동대불을 조성하기 위한 재료로 수입하려 했다는 설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당시 중국본토를 지배했던 원나라가 동전의 유통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전은 배 밑바닥에 자단목과 함께 꾸러미째 쌓여있었다.

 

 

 

원나라의 주요 화폐는 지폐(교초와 보초)였다. 원나라 때 정식으로 주조된 동전은 딱 두 차례에 불과했다. 그것이 1310년 발행된 지대통보와 대원통보였다.

 

이 두 동전은 신안선에서 확인되어 신안선의 침몰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런데 원나라 조정은 그마저 딱 1년 만에 사용금지 시킨다.

 

원나라 황제 인종은 “새 동전이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옛 동전을 혼용할 수밖에 없으니 수많은 불편을 야기시킨다”(<원사>)면서 폐기를 지시했다. 인종은 그러면서 “다시 지폐인 교초와 보초를 사용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니까 원나라에서 동전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것이다. 다만 원나라는 동전을 해외무역 때 금 은 및 상품으로 교환하는 것은 허락했다. 결국 신안선에 실린 28t의 동전은 일본과의 교역품으로 중국에서 반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2)

 
 
 
 

 

 

■동전 800만개의 정체

 

그렇게 수장되어 700년 남짓 만에 모습을 드러난 유물 중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아무래도 중국제 도자기였죠.

그런데 이번 학술대회 발표문 중 에노모토 와타루(가本涉)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의 논문(‘일본과 원나라 무역의 시박사 무역과 밀무역’)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이 신안선에 밀수품이 다량 적재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건데요.

 

 

그 밀수품이란 선체의 밑바닥에 쌓여있던 자단목(1017개) 위에 덮여있던 800만개의 동전이라는 겁니다. 무게가 28t에 달했습니다. 동전은 대부분 끈에 꿴 채로 확인되었는데요. 끈은 비록 썩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었어요.

 

 

인양 과정에서 동전의 소유주마다 달아둔 목패가 나왔습니다. 그 종류 또한 다양했습니다. 66종에 달했는데요.

신(기원후 8~23)에서 제작된 화천 및 후한의 오수전(25~219)부터 원나라 지대통보(1310)까지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동전이 끊임없이 쏟아진 겁니다. 심지어 안남(베트남)에서 만든 동전(천복통보·天福通寶)까지 나왔습니다.

 

 

 

 

신안 보물선에서 출토된 동전. 총 갯수가 800만개나 되었고 무게가 28t에 이르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신안선에 밀수품이 존재했다?

 

그런데 ‘동전 800만개=밀수품’일 수 있다는 주장이 학술대회에서 제기된 겁니다. 발표자는 몇가지 사례를 듭니다.

즉 신안선이 출항하기 70여년 전인 1250년대 남송의 관리 포회(1182~1268)가 경원 일대에서 동전의 해외 유출 상황과 그 대책을 논한 장계를 남송 조정에 올리는데요.

 

 

“일본선이 경원(공인무역항)에 도착하기 전에 (무역이 불허된) 인근 지역에 들러 동전을 공공연히 (불법) 거래…일본인이 좋아하는 것은 동전 뿐…중국인들은 일본선이 가져오는 물건을 싯가의 10분의1로 구입…시장의 동전이 동이 날 지경….”

 

 

또 신안선 출항 후 17년 정도 뒤인 1340년 무렵 원나라 문인 허유임(1287~1364)이 “(중국 남부 해안)에서 ‘섬나라 오랑캐(島夷·일본인)’와 (불법)거래가 빈번하게 이뤄졌는데, 관청에서 통제할 수 없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당시 중국에서는 동전 수출이 금지되어있었는데요. 여기에 남송대에 이르러 지폐와 동전 병행정책을 펴기 시작했는데요.(1160년대) 게다가 금나라(1215)와 원나라(1270)가 동전 사용을 금지하고 지폐(보초와 교초) 사용을 공식화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 동전이 화폐의 기능을 잃게 되었죠.

 

 

신안선에서 인양된 동전. 배 가장 아랫부분에 깔려있던 자단목 위에 총 66종류의 동전이 놓여있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밀수품은 동전 28t

 

일본쪽 사정은 어떨까요. 일본에서는 683~958년까지 13종의 동전이 발행되었는데요.

그런데 동전을 주조하는 비용보다 액면가치가 높은 화폐를 유통시킨게 문제였어요. 수도 조영에 필요한 경비 등을 마련해려고 발행한 겁니다. ‘주조비용<액면가치’의 차액에서 얻은 재정수입을 노린거죠.

 

그러나 이렇다보니 민간에서 동전을 마구 찍어내는 밀조(密造)가 이뤄졌고요. 그럴 때마다 기존의 동전은 10분의 1로 평가절하됐죠. 그러니 동전은 화폐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죠.

 

결국 일본에서 동전은 11세기말이 되면 거의 유통되지 않았답니다.(고은미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

그래서 중국의 동전이 대량으로 수입·유통된 겁니다.

 

 

정리해볼까요. 중국에서 동전은 수출금지 품목이었지만 (동전이 사라진) 일본에서는 그 수요가 생겼고요.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싯가의 10분의 1의 가치로 일본 물품을 살 수 있었죠. 그러니 어떻게 되었을까요. 동전의 밀수출입이 성행했던 겁니다.

 

 

그 당시 신안선이 출항한 경원은 공인된 무역항이었는데요. 그러니 경원항에서는 정상적인 물품을 싣고요. 인근 지역에서는 동전과 같은 밀수품을 선적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번에 발표된 일본학자의 논문입니다.

신안선에 28t이나 선적된 그 어마어마한 동전이 실은 ‘밀수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니….

 

 

1195년(남송 영종)에 주조한 경원통보(왼쪽)와 1068~1077년(북송 신종) 연간에 만든 희령원보(가운데), 1310-1311년(원 무종) 시대에 제작된 지대통보.|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동전을 화폐로 사용?

 

신안선 뿐 아니라 일본으로 (밀)수입된 동전은 어떻게 화폐로 활용되었을까요.

현재 일본에서 출토되는 동전은 낱개가 아니라 꾸러미 단위로 묶여 있거나 묶여있는 흔적이 역력하다는데요.

 

 

예컨대 100개씩 꿴 한 꾸러미 10개를 모아 1관 단위로 만든거죠. 신안선에서도 66종의 다양한 동전이 인양되었죠.

일본에서는 그렇게 다양한 동전의 구성비를 일정하게 맞춘 흔적이 보인답니다.(고은미 교수)

 

 

그런 면에서 신안선에서 보이는 꾸러미 흔적이 심상치않습니다.

실제 12~15세기 일본에서 수많은 중국 동전이 시중에 유통됐다는 방증자료가 있는데요.

 

 

즉 동전을 사용하거나 보관하는 모습은 승려 잇펜(一遍·1239~1289)의 생애를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수입한 중국 동전을 사용한 1187년의 토지매매기록도 있어요.

 

 

 

■청동대불 조성용?

 

그러나 단순환 화폐로만 쓰이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컨대 신안선의 동전이 ‘청동대불 조성용’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유통되던 동전은 동의 함유량(개당 4g에 동 80%)이 높은 양질이어서 그 가치가 높았답니다.

 

 

<송사>는 “동전 10점을 녹이면 정련된 동 1량을 얻는데 그것으로 청동기를 만들면 5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지·식화하2·전폐)고까지 했습니다. 반면 일본의 동 수요량은 늘고 있었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던 시기였죠.

 

 

불교의 극락세계로 왕생한다는 말법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에따라 경통(經筒·경서와 경문을 넣는 통)과 청동대불의 주조가 대거 이뤄졌는데요. 그런데 일본의 ‘3대 대불’ 중 하나인 ‘가마쿠라 대불(鎌倉大佛·1185~1392)의 금속성분을 분석하자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납 성분이 19.57%에 달했는데요.

 

 

이게 의미심장한 분석입니다. 신안선에서 인양된 북송 시기의 동전 5개를 분석한 결과 납성분이 21.13~45.40%였던 겁니다.

 

신안선에서 출토된 북송 시기의 동전과 가마쿠라 불상의 성분이 비슷하다는 거죠. 그렇다면 가마쿠라 대불이 바로 북송에서 수입한 동전을 녹여 조성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두 가지 견해 모두 일리가 있어요. 그래서 수입 동전 중 일부는 화폐로, 일부는 청동대불용으로 나눠 썼다는 수정론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자단목에 쓰여진 다양한 먹글씨. 일종의 물품꼬리표인 글씨지만 그 내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김병근의 논문에서

 

 

 

 

■명품 원목에 새겨진 부호

 

이번 학술대회에서 또하나 눈길을 끈 발표문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신안선 밑바닥에 적재한 자단목 1017점의 주인공입니다.인도나 동남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데요. 박달나무처럼 단단해서 불상이나 고급 가구, 공예품의 원자재죠.

그런데 자단목마다 표면에 새겨진 한자 부호나 숫자, 혹은 아라비아 숫자가 주목을 끄는데요.

 

 

한자 중에는 ‘대일(大一)’명이 51점으로 가장 많고요. 그 뒤를 ‘일정(一丁·32점)’과 ‘품(品·13점)’, ‘팔(八·10점)’자 가 잇고 있습니다. 이외에 ‘주칠호(宙柒號)’와 ‘대길(大吉)’, ‘일본(一本)’, ‘팔팔(八八)’, ‘대+십(大+十)’, ‘품(品)’명 자단목도 있습니다.

 

 

자단목에 새겨진 다양한 한자. 한자가 새겨진 자단목은 106점 확인됐다. 자단목의 소유주를 표시한 듯 하다.|김병근의 논문에서

 

 

 

 

로마자를 새긴 자단목이 241점이나 되고요. 이중 Y, L, E, T. V 등은 유럽인이 원자재를 생산지에서 사들였다는 표시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자단목에 새겨진 로마자. 자단목의 개수를 표시한 것일 수 있다. 이집트나 유럽의 상인들이 수입해가던 곳에서 나는 자단목을 신안선에 실었다는 얘기도 된다.|김병근의 논문에서

 

 

 

이와 함께 ‘본(本)◈’처럼 글자와 문양이 복합적으로 표현된 명문도 보이고요. 삼각형, 원, 꽃무늬, ‘원안의 팔(八)자와 이(二)’자 문양도 흥미롭습니다. 이밖에 삼각형이나 동그라미, 산(山) 모양의 문양도 독특한데요.

그동안 이러한 명문과 문양, 부호를 두고 이 자단목의 소유주나 상단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했는데요.

 

 

 

 

자단목에 새겨진 다양한 형태의 기호문양. 한자와 로마자 같은 부호가 섞여있다. 글자와 문양이 복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있다. 삼각형과 원, 나뭇잎, 원 안에 든 팔(八)과 삼(三)이 새겨진 문양도 보인다.|김병근의 논문에서

 

 

 

 

■일본 무사 가문의 문장?

 

그런데 이번에 열린 학술대회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주인’이 조심스럽게 특정되었습니다.

즉 자단목에 기재된 문자와 문양 가운데 상당수가 중세 일본의 무사 및 유력 가문의 문장(紋章), 즉 가문(家紋·가문의 표지로 정한 문양)일 가능성이 짙다는 견해입니다.(정순일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기존 연구에서 ‘품(品)’과 ‘클로버’, 두 겹(세 겹) 육각형 문양, 글자 이(二)에 동그라미를 친 것으로 읽었던 문양이 그렇다는 겁니다. 예컨대 ‘세 개의 비늘(三つ鱗·미쓰우로코)’ 문양은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직을 계승하며 가마쿠라(鎌倉·1185?~1333) 시대의 지배자로 군림한 ‘호조(北條)씨’와 관련된 물품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 무사가문에서 쓰인 괭이밥 문양의 문장과 신안선 자단목의 괭이밥 문양. 비슷하다. |위키피디아 일본·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또 ‘동그라미에 두 줄 그은 문양(丸に二つ引き·마루니 후타쓰히키)’ 역시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가문인 ‘아시카가(足利)씨’와의 연관성이 제기됐습니다. 이밖에도 신안선 적재 화물을 포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름모, 세 개의 별(동그라미), ‘대길(大吉)’ 등 나무상자 겉면의 문양 또한 일본 열도의 특정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정순일 교수)

제가 여기저기 검색해보니 자단목의 ‘괭이밥(片餐·가타바미)’ 문양은 일본의 여러 무사 가문의 문장으로 쓰이고 있더군요.

 

 

 

 

자단목에 기재된 문자 및 문양의 상당수가 중세 일본의 무사 및 유력 가문의 문장(紋章), 즉 가문(家紋)일 수 있다는 견해가 제기됐다.|출처:정순일의 논문에서

 

 

 

일본 가마쿠라(鎌倉·1192?~1333) 시대의 지배자로 군림한 ‘호조(北條)’씨와, 역시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가문인 ‘아시카가(足利)씨’의 가문. 신안선 인양 자단목의 문양과 비슷하다.|출처:위키피디아 일본

 

 

 

그래서 제가 ‘가문(家紋·かもん)’을 검색해보았는데요. 예부터 스스로의 가계, 혈통, 집안, 지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표시했답니다. 일본에서 현재 241종류 5116문 정도의 개별 가문이 있다고 합니다. 무사 시대에 들어 펼쳐진 크고작은 전쟁에서 피아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답니다. 훗날엔 묘지나 가구, 또는 선박에까지 붙이는 관습이 퍼졌고요.

 

 

‘세키가하라 전투(關ヶ原合戰合·1600) 병풍’.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전쟁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일본·일본 기후(岐阜)시 역사박물관 소장

 

 

제가 이 논문이 분석한 자단목의 문양과 일본 지식백과 등에 등장하는 무사 가문의 문장을 비교해보았는데요.

비슷한 문양이 제법 있더라구요. 흥미로운 문제제기여서 향후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기사를 위해 정순일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와 고은미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 김병근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3)

 

 

 

 

 

2016년 신안선 발견 40돌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특별전에 나온 유물 2만여점입니다.

 


1976~84년 전남 신안 바다 속에 가라앉은 700여년전 원나라 교역선(신안선)은 수중발굴 과정에서 2만4천여점이나 되는 도자기, 향료, 고급목재(자단목), 금속공예품, 동전류, 생활유물들을 토해냈습니다.

 

 

 

 

신안선 출토 유물을 가득 채운 전시장의 진열장들.
 
 
 
 
 
 
신안선에서는 중국 송대 건요에서 만든 흑유완들도 나왔다. 일본인들이 ‘천목다완’이라고 부르면서 찻그릇으로 애지중지했던 물건이다.
 
 
 
 

 

 

 

 

막대한 수량의 출토품 대부분을 진열장에 일일이 꺼낸 전시장.

 

 

 

 

 

 

최종 기착지가 일본 교토의 도호쿠사(동북사)로 적힌 신안선 화물의 목간표찰들.
 
 
 

 

 

 

 

 

특별전 전시장 중심부에는 접시, 대접, 사발 등 선적됐던 도자기들과 동전·자단목 더미 등의 거대한 진열장들이 여기저기 들어차있다.

 

이 선적물들은 해상실크로드로 불리는 당대 동아시아 해상교역로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엄청난 물동량을 지닌 대동맥이었는지를 실증한다.

 

원 나라는 13세기 고려와 협공해 일본을 치려다 실패했지만, 일본과 중국 사이 300km 넘는 해역에는 11세기 북송시대 이래로 세계 굴지의 원양항로(남로)가 개설되어 있었다.

 

북송·남송시대 일본은 이 바닷길로 중국과 직교역을 벌였다. 고려와 원 사이의 교역량을 훨씬 압도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닝보, 취안저우 등 중국 교역항과 일본 하카타 항 사이에 차와 동전, 도자기, 가구, 향신료, 서책, 불교경전 등이 쉴 새 없이 배에 실려 오갔다.

 

훗날 일본문화의 특징이 된 선불교 예술과 다도문화가 이 남로를 통해 전해졌다. 일본의 승려와 귀족, 무사들은 남송 사대부 귀족문화의 흐름에 크게 매혹되어 앞다퉈 중국 상인에게 도자기와 향로, 향, 꽃병 등의 구입을 부탁했다.

 

전시장 도입부에 배 안에서 나온 고대 중국 복고풍의 제기들과 차, 향, 꽂에 관련된 기물들을 소개하면서 당시 일본의 차, 향, 꽃 감상문화에 얽힌 기록, 그림들을 같이 비교해 선보인 건 이런 맥락을 더듬어보려는 의도일 것이다.(4)

 

 

 

 

 

 

 

 

<자료출처>

 

 

 

(1) 어부들의 개밥그릇·재떨이로 '천덕꾸러기'.. 700년 만에 보물로 깨어난 침몰선 도자기 (daum.net)서울신문.2021. 2. 15. 

 

(2) "700년 전 침몰한 신안보물선…수출금지품 800만개 실은 밀수선"[이기환의 Hi-story] (daum.net) 2023. 12. 4. 

 

 

(3)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608171308001

 

 

(4) 40년 수장고에 묻어놨던 신안선 보화들 이제야 다 꺼냈다 (hani.co.kr)2016-07-28 

 

 

 

 

<참고자료>

 

 

신안선에서 태안선까지 해저발굴의 궤적 (daum.net)연합뉴스 2007.07.24 

 

 

 

36년간 꼭꼭 숨겨뒀던 신안 해저유물 어디서 났을까 (daum.net) 2019.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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