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선이 발견된 신안 앞바다. 평균 수심 20미터 내외이며 바닥이 진흙으로 이뤄져있다. 조류가 세차고 복잡하며, 물이 흐리기로 유명한 곳이다.|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도록
■신품 도자기가 2만여점 세트로
1976년 10월 말 늦가을의 차디찬 바닷물을 헤치고 1차긴급발굴을 마쳤는데, 청자 52점을 포함해서 112점의 도자기를 건져올렸다.
본격발굴작업 끝에 해저 20m에 가라앉은 난파선은 길이 34m, 폭 11m로 측정됐다.
1977년부터 2척의 해군함정(장병 240명)과 해난구조대 요원(심해잠수사 60여 명)이 발굴을 담당했다. 1984년까지 9년 동안 11차례의 인양 결과는 경이로웠다.
유물은 총 2만3502점에 달했고,
동전 800만개(28톤),
자단목(아열대산 최고급 가구 목재) 1017개,
선체조각 445개가 나왔다.
260톤의 선적량을 갖고 있던 배는 모두 140톤의 물품을 적재했다.
그 많은 화물 중에 가장 큰 부피와 양을 차지한 것은 도자기와 동전, 자단목 원목이었다.
난파선에서 인양된 도자기는 무려 2만661점이었다.
청자가 1만2359점,
청백자·백자는 5303점에 달했다.
인양된 도자기의 모습은 흥미로웠다.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완형의 신품들이었다. 같은 종류의 그릇을 10개나 20개씩 포개 끈으로 묶은 다음 나무상자에 넣어 포장한 것이었다. 이 무슨 뜻인가. 이 배가 상품을 싣고 가던 대형 무역선이라는 얘기다.
동전과 함께 배 밑바닥에서 쌓여있던 자단목. 1000여 본이 있었다. 아마도 일본의 대형 사찰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자재였을 것이다.
목간을 읽어 복원한 바에 따르면 난파선은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 4월22~24일과 5월11일, 6월1~3일 세 차례에 걸쳐 하물을 선적한 뒤 경원(지금의 저장성 닝보·浙江省 寧波)을 떠나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경원로(慶元路)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추가 인양된 것이 바로 그 출발점의 단서이다.
도착지는 하카다(博多·후쿠오카)였을 것이다. 목간 중에는 ‘하코자키궁(거崎宮)’ ‘조자쿠암(釣寂巖)’ 등 하카다(후쿠오카)에 있는 신사와 사찰 이름이 보이는데, 14세기 일본의 주요출항지가 바로 이 항구였다.
경원로라는 글자를 새긴 청동추. 물건을 선적한 곳이 중국 경원 즉 지금의 저장성 닝보였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그 무서운 침몰의 순간
배에서 인양한 생활용품들로 당시의 선상생활을 가늠할 수 있다.
즉 선박 안에는 선원, 상인, 승려 및 사찰 관계자, 화주 등이 삼삼오오 모여 국수, 튀김, 야채, 고기요리를 해먹었다.
후추와 생강, 정향을 사용해서 청동제 솥과 냄비, 깔때기, 도마에서 요리했으며, 식사는 낡은 백자사발과 접시를 사용했다. 간식으로는 여지, 복숭아, 은행, 잣, 밤을 먹었다. 배 안의 승려들은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불상과 각종 공양구를 동원해서 예불을 올렸다. 탑승자들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바둑과 장기, 주사위 놀이도 했다. 그렇다면 이 배는 왜 침몰의 순간을 맞이했을까.
나무패에 기록된 마지막 선적일자, 즉 6월3일이라는 날짜가 마음에 걸린다. 물론 ‘음력’임을 감안해야 한다. 원래 고려·조선시대 조운의 원칙은 4월쯤 배를 띄우고 5월 안에 한강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태풍이 불기 시작하는 음력 6월부터는 항해에 각별히 조심해야 하며 7월~8월 사이엔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배를 띄울 수 없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 줄은 모르지만 배는 음력 칠월 보름 이전에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博多) 항에 도착하려 했다. 배는 6월3일 중국 닝보에서 마지막 선적을 마치고 고려의 연안을 따라 신안 앞바다를 통과할 때 태풍을 만난 것은 아닐까.
신안선에서 발견된 7점의 고려청자.
■고려청자는 왜?
앞서 잠깐 일별했지만 신안선에서 확인된 유물가운데 가장 눈에 띈 것은 역시 2만점이 넘는 도자기였다. 이중 중국 저장성(浙江省) 용천요(龍泉窯) 생산품이 60%인 1만2000점에 달했다. 용천요 가마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음을 알 수 있다. 7점의 고려청자가 확인된 것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매병(입이 작고 어깨선이 풍만하며 몸체가 서서히 좁아지는 병)과 상형 연적(코끼리 형태의 벼루 먹 그릇), 완(주발), 베개, 뚜껑, 잔받침 등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적은 수의 고려청자가 무역선에 선적됐을까. 고려청자 가운데 매병은 당시 중국에서 대대로 전해진 골동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시기가 침몰당시 보다 100년 이상 앞선 13세기 전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고려청자 6점은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매병과 달리 6점의 청자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신형이다. 그러나 고려청자의 수량이 너무 적으니 주된 무역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서긍의 고려 기행문인 <고려도경>은 “고려의 비색청자는 천하제일”이라 호평했다. 그랬으니 고려청자가 중국인들의 애호품으로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애호가들이 소장했던 고려청자 7점이 왜 신안선에 실렸는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배 밑에 자단목을 깐 이유
출토품 가운데 가장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배 밑바닥에서 잔뜩 쌓인채 발견된 자단목 1017본과 동전 28톤이었다.
우선 자단목을 보자. 자단목은 단향(檀香)으로 일컬어진다. 인도나 동남아,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데, 불상이나 고급 가구, 공예품의 원자재다.
신안선 밑바닥에 가장 먼저 적재한 자단목은 길이 2m 내외였다. 직경은 10~15㎝ 짜리가 가장 많았지만 40㎝가 넘는 것도 심심치않게 보였다. 표면에는 한자 부호나 숫자, 혹은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지중해 지역과 서남아시아에서 온 상인들이 원산지를 드나들며 남긴 흔적일 것이다.
왜 자단목을 배의 맨 밑바닥에 실었을까. 배의 무게중심, 즉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해도 배의 균형만 맞추려고 실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일본의 후쿠오카나 교토의 사찰에 대불을 건축하려 했던 승려와 상인들이 이 자단목을 사용하려 했을 것이다. 자단목은 특히 불가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목재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전후부터 불교와 힌두교에서 사랑받았으며, 조각품이나 장식품, 고급가구 등에 사용됐다. 따라서 신안선이 실린 자단목 역시 일본의 승려들이 소형불상이나 목탁을 만드는데 필요했을 것이다. 사찰과 귀족들의 가구에도 활용했을 것이다.
신안선을 축소 복원한 모습. 밑바닥에 뾰족한 첨저선이다.
■동전은 희대의 수수께끼
화려한 도자기에 가려서 그렇지 신안선에서 확인된 엄청난 양의 동전은 희대의 수수께끼였다.
처음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7차 발굴 때까지는 약 3t에 그쳤다. 그런데 1983년 9월30일까지 진행된 8차 발굴에서 동전이 터졌다. 침몰선 내부를 가득 채운 토사를 빨아들이려고 흡인호스를 들이댔는데, 거기서 동전노다지가 끌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984년 10~11차 발굴까지 그렇게 빨아들인 동전은 무려 2만8018㎏, 즉 28t이 넘었고 수량으로는 800만개에 이르렀다.
이 어마어마한 동전은 배 밑바닥에 쌓아둔 자단목 위에 실려 있었다. 동전은 대부분 끈에 꿴 채였다. 끈은 비록 썩었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었다. 인양 과정에서 동전의 소유주마다 달아둔 목패가 나왔다. 주인들이 자신의 동전에 주인표시를 내놓은 것이다. 인양된 동전을 검토하니 놀라웠다. 신안선은 가히 동전박물관이었던 것이다.
배에서 확인된 동전은 66종에 이르렀다. 신(기원후 8~23년)에서 제작된 화천(14년) 및 후한의 오수전(25~219년)부터 원나라 지대통보(1310년)까지 1300년 동안 중국에서 제작·유통된 동전이 하염없이 쏟아진 것이다. 신-후한-당-북송-남송-요-금-원 및 서하시대까지…. 심지어 안남(베트남)에서 만든 동전(천복통보·天福通寶)까지 나왔다. 이 발굴로 우리나라는 중국 동전 세계 최다 보유국이 되었다.
신안선에서 쏟아져나온 동전들. 28톤 800만개의 동전이 나왔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동전 800만개의 의미
그렇다면 신안선에 실린 어마어마한 동전의 실체는 무엇일까. 왜 상인들은 동전을 닥치는대로 실었을까.
동전은 우선 자단목과 함께 밸러스트(ballast·배의 무게중심을 잡으려고 바닥에 놓는 물건)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작 배의 균형이나 잡으려고 그 엄청난 동전을 실었을 리는 만무하다.
지금까지 연구로는 대략 두가지 견해로 해석된다.
즉 중국 동전을 수입해서 그대로 일본에서 사용하려 했다는 설과,
청동대불을 조성하기 위한 재료로 수입하려 했다는 설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당시 중국본토를 지배했던 원나라가 동전의 유통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전은 배 밑바닥에 자단목과 함께 꾸러미째 쌓여있었다.
원나라의 주요 화폐는 지폐(교초와 보초)였다. 원나라 때 정식으로 주조된 동전은 딱 두 차례에 불과했다. 그것이 1310년 발행된 지대통보와 대원통보였다.
이 두 동전은 신안선에서 확인되어 신안선의 침몰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그런데 원나라 조정은 그마저 딱 1년 만에 사용금지 시킨다.
원나라 황제 인종은 “새 동전이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옛 동전을 혼용할 수밖에 없으니 수많은 불편을 야기시킨다”(<원사>)면서 폐기를 지시했다. 인종은 그러면서 “다시 지폐인 교초와 보초를 사용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니까 원나라에서 동전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것이다. 다만 원나라는 동전을 해외무역 때 금 은 및 상품으로 교환하는 것은 허락했다. 결국 신안선에 실린 28t의 동전은 일본과의 교역품으로 중국에서 반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