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25/03 (30)
력사를 찾아서

■ [한민족의 시원, 만주]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2) 중국보다 앞선 문명, 하늘 열고 평화국가로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닌 역사 유물 쏟아져북한 고립-남한 상실,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우리 민족 상고사를 위부터 다시 정리하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 나라, 단군의 고조선이다. 구전되어 오던 상고사를 기록한 에 따르면 환인의 한나라는 약 3,300년간 지속됐다.그럼 이 시대의 왕은 몇 명이나 됐을까? 이 기간이면 최소 70~80명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전해 내려오는 이름은 7명밖에 없다. 7명이 통치한 나라의 역사가 3,300년이나 되니까 1명당 약 500년씩 통치한 셈인데 그러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그 수많은 통치자 중에 워낙 오래된 얘기라 현재까지 이름이 남아있는 사람은..

729년 발해의 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탈고한 것으로 전해지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서. 연대기. 원문은 발해문이었다고 하며 약 300년 뒤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현재의 국한문본은 1959년 정해박(鄭海珀)이 한문본을 다시 번역한 것이라 하나, 발해본은 물론 한문본도 오늘에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되고 있으며, 다른 상고사서와 비교하여볼 때 그 기본틀이 다르지 않아, 면밀한 분석과 재평가가 요망되고 있는 사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대야발의 서문에 이어 제1편 전단군조선, 제2편 후단군조선, 제3편 기자조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장 이경직(李庚稙)의 중간서(重刊序)와 신채호(申采浩)의 중간서가 부록되어 있다. 특히, 신..

신라의 학자 박제상이 저술한 것으로 전하는 『징심록』 중 일부를 1953년에 박금이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복원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징심록』의 15지(誌) 가운데 맨 처음에 실린 지(誌)의 이름으로, 파미르고원으로 추정되는 마고성의 황궁씨로부터 시작한 1만 1천여 년 전의 한민족 상고사를 기록하고 있다. 김시습이 저술한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에 의해 원본 『징심록』과 그 속에 있던 『부도지』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현존하는 『부도지』는 1953년 울산에 있던 영해 박씨 55세손인 박금의 복원본을 말한다. 『환단고기』처럼 전수과정의 의문점이 남아 있다. 신라 때 영해 박씨의 선조인 박제상(朴堤上, 363~419)의 저술로 알려진 『징심록(澄心錄)』의 15지(誌) 가운데 맨 처음에..

한뫼 안호상(1902년(고종 39)~1999년)은 본관 탐진(耽津)출생지 경상남도 의령이다. 해방 이후 초대 문교부장관, 경희대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민족사상연구가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한뫼. 경상남도 의령 출생. 안석제(安奭濟)의 독자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집안 어른인 홍문각 교리를 역임한 항일운동가 안효제(安孝濟)와 독립운동가이자 실업가인 안희제(安熙濟)의 뜻에 따라 신학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19년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을 다니면서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의 사상을 연구하는 일에 뜻을 두었다. 1922년에는 상해에 가서 독일국립동제대학(獨逸國立同濟大學)에 재학중 김구·안창호·신채호·이시영·전진한·조소앙·이동녕 등 민족지도자들..

최태영(崔泰永, 1900년 3월 28일 ~ 2005년 11월 30일)은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이다. 한국인 최초로 1925년에 법학 정교수가 되어 한국 근대 법학의 초기에 보성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상법·민법·헌법·국제법·행정법·법제사·법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며 법학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여러 저서를 출간하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1919년 메이지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법학부에서 수학하여 법철학 및 상법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수 및 강사로 일하면서 경신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변호사 자격을 인증받은 뒤, 1946년부터 부산대학교 교수 겸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1947년..

김석형은 해방 이후 「리조병제사」, 「조선통사」, 「초기 조일관계 연구」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15년에 대구에서 태어나 1996년에 사망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북한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전념하며 북한 역사학 정립에 기여했다. 특히 주체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체계화하는 작업을 주도하였다. 대구 출생이며, 변호사 김의균(金宜均)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구한말 법관양성소 출신으로, 해방 후 미군정 시대에 경상북도 도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김석형은 1946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한국사 ..

홍이섭(1914년~1974년)은 해방 이후 『조선과학사』,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이고, 아버지는 홍병선(洪秉璇)이다. 1933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서울기독교청년회학교 교사가 되었다. 8·15 광복 이후 국학대학,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1953년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 뒤 사학과장·문과대학장·동방학연구소장·출판부장 등 교내 보직을 맡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광복 이후 줄곧 교수직에 있으면서, 학계와 사회 각 분야의 학술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서울특별시 문화위원회 학술부위원·해군본부 전사편찬실편수관·역사학회회장·고시위원회 보통고시위원·문교..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터전이었고,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 [한민족의 시원, 만주]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0-01-14 14:25 평화인권단..

손진태(孫晋泰)(1900년 12월 28일~미상)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학자이다. 1920, 1930년대에는 주로 현지 조사에 기초한 왕성한 민속 자료 수집과 동서양의 방대한 문헌 섭렵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 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광복 후에는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며 민족사 연구의 성과들을 집성하고 교육 관료로서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민속 · 역사학자, 교육 관료. 본관 밀양(密陽). 출생지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주요 저서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조선민족사개론(상)』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는 1900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우리와 해부학적으로 같은 호모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등장했다. 그런데 인류는 이보다 훨씬 짧은 약 1만 년 전에야 신석기 농업을 시작했고, 7000년 전에야 문명을 탄생시켰다. 지난 1만 년 동안을 지질학적으로 홀로세(Holocene)라 한다. 인류는 홀로세 전에 구석기 삶을 영위했다. 인류가 오랫동안 문명을 탄생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후변화 리포트] 지구 망치는 인류 그린란드 누크 부근의 피요르드. 기후변화로 그린란드의 빙하 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10만 년 동안 북반구 고위도의 기온 변화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기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빙하기에는 중고위도 지역까지 빙하 지역이 확장됐고, 해양으로부터 수증기 증발이 적어 사막이 넓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