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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유형원은 조선후기 『반계수록』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622년(광해군 14)에 태어나 1673년(현종 14)에 사망했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32세 이후 전라도 부안에 은거하다가 사망했다. 이때 체험한 농촌생활을 토대로 경세제민의 정책론인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이 책은 100년 뒤 영조의 칭찬을 받고 간행되었다. 그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의 이상론이 되었고, 그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으로 자리잡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외 다방면의 저작이 있었다고 하나 목록만 전해진다. 서울 출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9세손이다. 현령 유위(柳湋)의 증손자이고, 할아버지는 정..

한백겸(1552년(명종 7)~1615년(광해군 7))은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강원도안무사,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정선군수 한승원(韓承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천군수(文川郡守)한여필(韓汝弼)이고, 아버지는 판관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鄭逑)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선릉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재직중 병으로 사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자살..
안정복은 조선후기 「치통도」·「동사강목」·「천학문답」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12년(숙종 38)에 태어나 1791년(정조 15)에 사망했다. 어려운 초년을 보내며 독학으로 유교 경전과 병서·불교·노자·소설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독서했고 역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35세에 이익의 문인이 되면서 학문이 더욱 깊어졌고 실학적 경세론을 펴기도 했다. 1772년에 세자익위사 관원으로 세손의 교육을 맡은 인연으로 정조 집권 후 지방관으로 나가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기는 기회도 가졌다. 천주교가 사회문제가 되자 철저히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조선 후기에,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서인 『동사강목』을 저술하였으며,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천주교 배척에 앞장선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

중국 헤이룽장성 동북부에 있는 면적 12만 km²의 삼강평원에서는 두만강, 연해주 일대에서 발굴된 집자리, 토기와 비슷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에서 발흥한 옥저 계통의 문화가 삼강평원까지 북상한 흔적이다. 농사를 지어 생활했던 옥저인은 북쪽에서 찾은 기름진 땅에서 300여 년간 살며 거대한 성터를 일궜다. 이곳에서는 250여 기의 성터가 발견됐고, 이 중 가장 큰 성터는 풍납토성의 규모를 능가한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전 근무지가 과거 옥저의 영토였던 함경북도 녹둔도다. 북방민족의 영토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옥저와 읍루' 펴낸 강인욱 교수삼강평원 성터, 옥저 문화 밝혀읍루..
러시아 연해주에서 2300년 전의 옥저 온돌(쪽구들)과 발해 온돌이 한꺼번에 확인됐다.2007년 6월28일부터 8월3일까지 러시아 조사단과 함께 연해주 체르냐치노 발해유적을 발굴한 한국전통문화학교 발굴단(단장 정석배)은 주거지 1기에서 발해 온돌과 옥저 온돌을 차례로 발굴했다. ◇옥저·발해 온돌이 한꺼번에=지난 7월22일이었다.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의 눈이 빛났다. 발굴단은 이미 이 발해 주거지에서 발해시대 쪽구들(부분 온돌) 1기를 확인한 바 있다. 그때 확인한 발해 쪽구들의 길이는 4.5m가량이었고, 아궁이 일부와 ‘ㄷ’자 모양의 구들이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날 발해인들이 버린 생활 폐기물 구덩이를 파다가 바닥 땅부분에 불에 탄 흙(소토) 2줄기를 본 것이다. “아, 이건 옥..

옥저(沃沮, 기원전 3세기 ~ 285년)는 함경남도 영흥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하였고, 어물과 소금 등의 해산물이 풍부했는데,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다. 신랑과 신부가 어린 나이에 약혼을 하고, 신부가 신랑 집에서 살다가 어른이 되면 예물을 주고 신부를 데려오는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가매장한 후에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묘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는 세골장도 있었다. 그 입구에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죽은 자의 양식으로 하였다. 고구려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한 옥저는 조위의 고구려 정벌의 여파로 동천왕 ..

『고려사』에 보면 건녕 3년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도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고 합니다[여기서 왕융은 고려 태조의 부친으로 후일 추존하여 고려의 세조(世祖)가 되는 분입니다].[原文] 乾寧三年 丙辰 以郡歸于裔裔大喜以爲金城太守 世祖說之曰 大王若欲王朝鮮肅愼卞韓之地 莫如先城松嶽以吾長子爲其主 裔從之使太祖築勃禦塹城仍爲城主 時太祖年二十(『高麗史』太祖紀).그런데 이상하죠? 왕융이 궁예에게 “대왕께..

《대동사강》(大東史綱)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쓴 책으로, 단군조선에서 대한제국 순종 황제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근거가 되는 사료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규장각학사 민경호(閔京鎬)의 서문에 의하면, 역사와 야승을 수 년간 모아 엮었다고 한다. 오진영(吳震泳)이 교정을 보았다. 출간사항 1929년(쇼와 4년), 대동사강사에서 상·하 2권으로 출간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상권 1권과 하권 2권이 보관되어 있다. 1974년, 경문사에서 상·하권을 합본하여 출간하였다. 권초에 '동국역대제왕전수통도(東國歷代帝王傳授統圖)'가 그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기씨조선 이후로는 기씨조선, 한, 부여, 예, 맥, 옥저, 숙신 등의 여러 나라로 나뉘었으며, 이들이 서로 합쳐지고 나뉘면서 단씨조선-기씨조선-마한..

대종교의 제2대 교주인 김교헌(1867~1923)은 주요 경전 『신고강의(神誥講義)』, 『신리대전』, 『회삼경(會三經)』, 『신사기(神事記)』, 『조천기(朝天記)』, 『신가집(神歌集)』 등의 편찬을 주관한 대종교의 이론가임과 더불어 치열한 민족사학자이다. 그는 특히 대종교의 종사(倧史)인 『신단실기(神壇實記)』와 민족통사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당명은 보화(普和), 뒤에 이름을 김헌(金獻)이라고도 하였다. 수원(지금의 화성시 비봉면 구포리)에서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공조판서 김창희(金昌熙)이며, 어머니는 풍양조씨로 판관을 지낸 조희필(趙熙弼)의 딸이다. 1885년 정시 문과에 급제, 한림옥당 · 병조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