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6.6 다음카페 분자인류학논단 초재의 《고인골 게놈 데이타로 알아보는 한국인의 기원》(2)~6.10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본문
《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6.6 다음카페 분자인류학논단 초재의 《고인골 게놈 데이타로 알아보는 한국인의 기원》(2)~6.10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대야발 2024. 2. 10. 15:32《만주와 한반도 12,000년 전~ 2,000년 전 년대기》
6.6 다음카페 분자인류학논단 초재의 《고인골 게놈 데이타로 알아보는 한국인의 기원》
4. F-statistics
다음은 한국인을 포함하는 몇 개의 D-statistics의 결과를 가지고, 그 의미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그림 18) D-stat (Korean,Chinese-Han, Ancient East-Asians, Mbuti)
위의 D-statistics 그래프는 한국인과 중국 한족이, 선사시대의 여러 동아시아 고인골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 지 비교하는 것으로서, 오른쪽에 0 보다 큰 값이 나온 샘플들은 중국 한족보다 한국인과 보다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거나, 혹은 한국인과 보다 많이 혼혈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왼쪽의 0보다 적은 값이 나오는 샘플들은 중국한족과 보다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거나, 중국한족과 한국인보다 많이 혼혈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붉은색으로 표시된 것은 Z-score가 절대값 |3| 이상으로 이러한 차이가 의미있다는 것이고, |3|이하인 것은 이러한 차이에 크게 의미를 두기 어렵다고 해석하면 된다.
위의 그래프에서 북방에 있었던 샘플들은 거의 한국인과 보다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특히, 연해주방면의 보이스만, 얀코브스키, 그리고, 죠몽인과 몽골고원 북부의 신석기인은 확실히, 한국인이 중국 한족보다 높은 비율로 이들과 유전자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Z-score가 절대값 |3|이하로서, 명확하지는 않으나, 말레이시아나 베트남의 신석기인, 금석병용기인이나 대만의 한본과 공관문화인 등의 남방에서 나온 샘플들은 한족과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 있지만, 대부분의 선사시대 북방에 위치한 유적들에서 나온 고인골들이 유전적으로는 현대 중국 한족보다는 한국인에 가깝다는 것은 현재 한반도에 있는 한국인의 조상은 산동성에 있었던 협의의 ‘동이’나 혹은 ‘흉노’나 ‘선비족’과 같은 중국 북방에 있었던 어떤 인구집단에서 유래했거나, 아니면, 중국 북방과 한반도에 걸쳐서, 한국인과 유전적 유사한 사람들이 중국 북방에 살았는 데, 한반도의 한국인은 유전자 구성에 큰 변화없이 유지된 반면에, 중국 북방에 있는 사람들은 남방으로부터 북상한 여러 인구집단과의 혼혈이나 격변 등으로 현대 중국 한족과 같이, 남방성이 강한 쪽으로 유전자 구성이 바뀐 결과일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반도에 있는 선사시대 고인골의 유전자 자료도 많이 출토되고, 분석되어야 정확한 답을 얻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 한국인의 자료로도 이 문제에 대해서, 약간의 힌트를 얻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앞서의 여러 논의들을 통해서, 동아시아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구석기말기에서 신석기 초기부터 인구구조상의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도 북한 학계에서 주장하듯, 구석기 시대 ‘승리산 사람’이나 ‘룡곡 사람’와 같은 구석기 시대 인구집단로부터 수십만년 동안 변함없이, 단일민족으로 이어내려 온 것이 아니라, 신석기 초중기(주변부인 한반도에까지는 대륙보다 약간의 시간의 격차 있을 것이므로, 신석기 중기까지 내려와야 할 것이다.)에 대륙에서 어떤 인구집단이 한반도로 와서, 이 집단이 한반도의 주류 인구집단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만일, 신석기 초중기에 중국 북방에 있던 어떤 인구집단이 여러 다른 루트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요동에서 압록강을 통해서, 한반도 서북부로 진입해서, 계속 남하해서, 중부와 남부에까지 확산하였다고 가정하자. 그 과정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과의 어느 정도 혼혈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 집단이 신석기 초기부터 그대로, 외부 유입 없고, 인구 구조상의 큰 변동없이 이어져 내려 왔다면, 지리적 근접성이 이집단과 대륙의 선사시대 인구집단 사이의 유전자간의 친소관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륙에서 가까운 한반도 서북부가 대륙의 선사시대 사람들과 가장 가깝고, 중부와 남부 등 아래로 내려갈수록 근접한 정도가 약해질 것이다. 그렇지만, 신석기 이래로, 한반도 내부에서 어떤 사건들로 인해서, 자주 지역들간의 인구가 뒤섞이는 일이 발생했다면, 한반도 지역들간의 대륙의 선사시대 인구집단과 유전적 근접성에 있어서, 어떤 의미있는 차이를 보기 어려울 수도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떠한지 아래 D-statistics 그래프로 확인해 보자.
(그림 19) D-stat (Korean,Kor-south, Ancient East-Asians, Mbuti)
위의 D-stat그래프는 앞서의 D-stat 그래프와 유사한 구성이지만, HumanOrigin Dataset의 Korean을 중국 한족이 아니라, 한국인 중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남부지방사람들인 이루어진 Kor_South와 비교하고 있다. 이 그래프에서 나타난 결과는 지리적 근접성이 대륙의 여러 선사시대 인구집단과의 유전적 친소관계를 결정할 것이라는 앞서의 가정과는 다소 괴리된 결과를 보이고 있다. 특히, 섬서성의 석묘(Shimao,石峁)문화인과는 한반도 남부사람(여기서는 경상남도2명, 전라남도 3명의 샘플)들이 의미있게, HumanOrigin의 한국인(아마도 한반도중부지역)보다 유전적으로 가깝거나, 이들과 유전적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석묘문화인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어떤 집단이 한반도 중부에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한반도 남부에 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앞서의 분석에서 하가점 상층문화의 outlier나 유민문화와 같은 북방성분이 강한 인구집단도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과 보다 유전적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이 결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현대 한국인와 선사시대 북방의 여러 인구집단이 현대 중국 한족보다 유전적으로 가까운 것은, 단순히, 신석기 초기부터, 중국 북방과 유전적 유사한 사람들이 한반도에 살아서가 아니라, 이후에도 선사시대 중국 북방의 여러 인구집단들이 한반도으로 유입되어서, 한반도 내 인구집단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상세한 탐구는, 한반도 내 선사시대 여러 시기와 지역의 고인골이 발굴되고, 유전자 데이타가 분석되고, 중국이나 일본 등지의 다른 동아시아 여러 지역과 비교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은 f3-statistics 결과인데, 한국인, 일본인, 중국-한족에 대해서, 선사시대와 현대의 여러 인구집단들이 유전적으로 가까운 정도를 알 수 있다. 앞서의 여러가지분석들과 그 결과가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 있고, 이 결과를 통해서, 앞서한 여러 분석들을 다시 확증할 수 있다. 수치가 클수록 가까운 것으로, 가장 가까운 30개 인구집단까지만 보여준다.
(그림 20) f3-stat (Korean,Test, Mbuti)
1920년대 Schmidt등에 의해서, Austroasiatic, Austronesian, Tai-Kadai, Hmong-Mien등의 언어가 원래 하나의 공통조어에서 갈라져 나갔다는 Austric어군설을 내놓은 바가 있는 데, Admixture에서 ISEA(Inland South East Asian)가 높은 집단들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현대 Sino-Tibetan언어학계의 권위자인 Laurent Sagart는 Sino-Tibetan 과 Austronesian을 하나로 묶은 Sino-Austronesian어설을 내놓은 바가 있다. 여기에 더해, George van Driem등은 기왕의 Austric어군에 Sino-Tibetan까지 포함하는 Macro-Austric어군 혹은 East-Asiatic어군설을 제안하였다.
Sino-Tibetan은 원Austric계 대부분 언어사용집단이 벼농사의 확장과 관련되는 것과 달리, 조와 기장 등 건조농업 작물의 확장을 기반으로 확장된 언어로 보지만, Sino-Tibetan의 절대 다수인 Sinitic 사용자 중에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인구가 더 많다. 그리고, Sino-Tibetan에서 일부 부계하플로 D가 우세한 티벳어사용집단을 제외하고, 대부분 이들 Austric과 Sino-Tibetan어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집단은 거의 대다수가 부계 하플로 O가 다수이다.
이전의 Austric어군설에 일본어를 포함시키자는 학자도 있었는 데, 어쨌든, 한국어와 일본어 사용집단은 이들 Macro-Austric혹은 East-Asiatic의 대부분 인구집단과 비슷하게 부계하플로 O가 다수이고, 또한 쌀을 주식으로 함에도 이 언어집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한국어와 일본어는 지속적으로 동아시아 북부의 알타이어계 집단과 더 많이 연관을 시켰으나, 현재는 일단 둘 다 국제 언어학계에서 Language Isolated로서 어떤 다른 언어와 연관이 희박한 고립어로서 분류되어 있다. 그러나, 앞의 현대 동아시아인의 Admixture분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어와 일본어 사용자는 중국 한족, She, Miao 등 농경 위주의 민족들과 유사한 성분을 많이 지니며, 알타이어계의 Oroqen, Daur, Hezhen, Ulchi, Mongola 등과는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민족들은 수렵채집이나 유목을 위주로 하며, 부계 하플로 C와 N이 부계 하플로 O보다 우세하다.
한국인은 f3-statistics의 결과에서 선사시대 인구집단으로는 요하유역의WLR_MN(홍산문화 반랍산)이나 연해주지역의 Boisman문화인과 같이, 한반도와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의 고인골과 가까운 결과가 나오지만, 현대 동아시아 인구집단으로는 일본인이나 중국 한족과 같은 주로, 농경을 주요한 생업경제의 수단으로 한, 인구집단들과 유전적으로 근접하다는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현대 동아시아 집단에는 한국인, 일본인과 같이, 요하유역의 선사시대인들과 연관된 역사시대에 존재했던 여러 민족들인 선비족, 실위인, 거란족, 여진족 등이 이미 사라졌고, 아마도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웠을 수도 있는 현대 중국의 만주족은 거의 북방 한족에 흡수되어 북방한족과 유전적으로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중국 한족들과 결과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인과 보다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이전에 여러 분자인류학 연구들에서, 한국인과의 유전적 거리가 가깝다고 생각한 북방한족인 산서성(山西省) 한족보다 금년 2020년에,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지인 성도(중국은 각 성마다 성의 수도가 있고, 이를 省都라 한다.)인 무한(武漢)이 있어서 유명해진 양자강 중류의 호북성(湖北省) 한족이 더 가깝다고 나온 것이다. 아래의 일본인과 동아시아의 선사시대와 현대의 여러 인구집단의 유전적 거리를 비교한 f3-statistics의 결과(그림21)에서도 역시, 양자강 유역의 호북성 한족이 산서성한족보다 일본인과의 유전적 거리가 가깝게 나오고 있다.
호북성 한족은 중국의 북방과 남방을 가르는 지리적 경계로 가장 널리 이용되는 진령산맥(秦嶺山脈)과 회하(淮河)를 기준으로 보면, 남방한족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으나, 광서장족자치구나 광동성으로 대표되는 남방한족과 산서성이나 동북3성의 한족으로 대표되는 북방한족의 중간 쯤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호북성 한족과 같은진령산맥과 회하 이남의 한족은 그 이북의 산동성, 하남성, 섬서성, 산서성 등의 한족이 밀농사를 위주로 하여, 면요리를 주로 먹는 것과 대비하여, 쌀농사를 위주로, 쌀밥을 주식으로 한다. 위의 표에서 보다 남방의 복건성(福建省) 한족은 예상과 비슷하게, 산서성 한족보다 더 거리가 멀게 나오는 데, 한국인과 가까운 것은 위도상으로는 한국보다 남쪽이지만, 중국 전체로 보면, 대략 중간정도에 위치한 화중지역의 쌀농사를 위주로 하는 양자강 중하류 유역의 한족들이다. 이후의f4-statistics를 사용한 분석에서 더 자세히 여기에 대해 다룰 것이다.
(그림 21) f3-stat (Japanese,Test, Mbuti)
(그림 22) f3-stat (ch_Han,Test, Mbuti)
(출처; 카페 분자인류학논단, cafe.daum.net/molanthro/I4qd/138)
5. f-statistics-2
이번에는 앞의 글, f-statistics-1에서 나타난 일반적인 예측과 틀리게 나타나는 현상, 즉, 한반도 남부지역 사람들이 수도권보다 더 중국 섬서성의 해생불랑문화인 석묘문화(Shimao)인들과 유전적으로 더 가깝게 나타난 것과, f3-statistics에서 북방한족인 산서성 한족보다 양자강 중류의 호북성 한족이 한국인에 유전적으로 더 가깝게 나오는 것 등의 원인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답을 구하고, 아울러 한국인의 조상 및 기원과 관련되어 논쟁의 대상이 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분자인류학적 접근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를 현대 동아시아의 광범위한 여러 인구집단을 비교대상으로 하고, 한국인 샘플에 대해서도 지역별로 더 세분화시켜 f4-statistics를 통해서, 탐구해 보기로 한다. 쟁점이 되는 문제들은 많지만, 현재 수준에서 f-statistics로 접근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한반도에 살던 선사시대인들과 많은 교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일본열도의 죠몽인과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관계가 있는가?
2) 요하유역 문화인 홍산문화, 하가점하층문화, 하가점상층문화인들은 한국인과 다른 동아시아인들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가? 이들 문화의 고인골은 유전적으로 한반도의 어느 지방과 가까운가?
3) 산동성지역 Bianbian이나 Boshan, Xiaogao, Xiaojingshan인들은 후에 대문구문화, 산동용산문화 등으로 이어지고, 산동성지역에 살던 이들을 진한통일 이전을 다룬 사서에서 동이(東夷)로 일컫는다. 진한 이후에 중국사서에서 동북지방에 살던 한국인의 조상을 포함한 여러 민족을 동이라고 했는 데, 현재 역사학계의 주류는 동이의 개념이 춘추전국시대에서 진한통일 이후 변화했기 때문에, 산동성의 동이와 한국인과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4) 황하유역은 중국 한족들의 기원이 된 화하족이 발생한 지역으로, Sino-Titetan어군이 기원이 되는 지역으로, 한국인들과는 요하유역이나 산동성지역에 비해, 관계가 먼 것으로 여겨졌으나, 한국인의 부계 하플로를 보면, 황하유역 기원이 유력하고, 실제 중국 한족들에게서 가장 높은 비율로 나오는 M117이나 F444가 각각 거의 10%에 가까운 비율로 나오고 있다. 황하유역 선사시대인들은 상염색체상으로도 부계하플로와 같이, 한국인과 관계가 있는가?
5) 오르도스식 청동기라 하여, 중국 북방 초원지대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유물들이 한반도에서 많이 출토된다. 이것은 어떤 경로로, 어느 집단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6)한반도 서해안에 있는 분구묘는 중국 양자강 하류지역에 있는 토돈묘와 유사한 양식이라 한다. 이렇게 유사한 무덤을 만든 사람들은 유전적으로도 어떤 관계가 있을까?
7) 앞서의 여러 비교 결과를 통해서, 연해주지역의 선사시대인들이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옛 발해의 영역이기도 한 이 지역에 살았던 발해의 주류라는 말갈족과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어떠한가?
이번에 비교대상이 되는 현대의 동아시아 인구집단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먼저 중국 북방의 Daur는 몽골어계에 속하고, Hezhen와 Oroqen은 퉁구스어계에, 그리고, 러시아 아무르강과 연해주지역에 거주하는 Ulchi도 퉁구스계에 속한다. Mongola는 중국 내몽골자치구의 몽골인이 아닌, 몽골인민공화국의 할흐(Khalkha) 몽골인이다. 그리고, 동북방은 아니지만, 중국 서북방 청해성(靑海省)의 Tu(土族)은 선비족 토욕혼의 후예라고도 하고, 칭기스칸 몽골군이 이 지역에 주둔하여 남은 이들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Bonan(保安族)도 녕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에 거주하는 몽골어계이며, Salar(撒拉族)은 청해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어계 민족이다.
중국 한족은 Han으로 표시되는 HGDP에 나오는 샘플들은 HGDP에서 중원의 하남성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하남성지역의 샘플이기 보다는 중국 남북의 여러 지역 샘플을 모은 것이다. 왕전초 논문에 나온 중국 각 지역 샘플로는 가장 북방인 북경 서쪽의 Han_Shanxi 산서성(山西省) 한족부터, 약간 남쪽으로 황해 연안의 Han_Shandong 산동성(山東省) 한족, 황해를 따라서 계속 아래로 내려가면서 Han_Jiangsu 강소성(江蘇省)한족, Han_Zhejiang 절강성(浙江省) 한족, Han_Fujian 복건성(福建省)한족, 가장 남쪽의 Han_Guangdong 광동성(廣東省) 한족이 있다. 그리고, 강소성에서 내륙의 서쪽으로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 발원지로 유명해진 무한(武漢)이 있는 Han_Hubei 호북성(湖北省) 한족, 하나의 직할시이면서, 인구가 3천만에 이르는 Han_Chongqing 중경(重慶)의 한족, 더 상류로 가면, 산지로 둘러싸여서, 외부에서 접근이 어렵지만, 내부에는 너른 분지가 있어서, 삼국시대 유비집단이 세운 촉나라의 근거지가 되었고, 현재에도 인구가 8300만에 이르는 Han_Sichuan사천성 (四川省)한족이 있다.
Tibeto-Burman계의 민족으로는 왕전초 논문에, 6개 지역의 티벳인들이 나오는 데, 수도인 Lhasa티벳인만을 이번 비교에 넣었으며, 호북성과 호남성,귀주성 등지의 거주하는 Tujia(土家)족, 그리고, 운남성의 려강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Naxi족이 있다.
운남성에는 Tai-Kradai계열을 대표하는 Dai(傣族)가 있고, 광서장족자치구의 Maonan(毛南)도 Tai-Kradai계열로서, 장족(壯族)대신 택한 이유는 장족은 주로 평지에 거주하며 주위의 다른 민족들과 혼혈이 많은 데 비해, 모남족은 산지에 비교적 혼혈이 적은 광서지역 토착의 성분을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주요한 남방계 민족으로 Hmong-Mien계의 중국의 양자강 남부지역과 동남아시아에까지 폭넓게 분포하는 Miao(묘족)과 절강성 남부와 복건성북부에 거주하는 She(서족)이 있다. 그리고, Austronesian계열로 대만원주민 Ami와 Atayal이 있다.
일본인은 HGDP에 나오는 Japanese외에 새로 PGP(Personal Genome Project)에 참가한 23andme에서 검사받은 일본인 샘플을 Jpn_23andme로 추가하였다.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HGDP의 Japanese는 일본에서 동북방면의 니이가타현에서도 외딴 섬에서 나온 샘플로 동북지역 죠몽인성분이 높아서, 일본인 전체를 대표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23andme의 샘플들은 그 수도 얼마 안되고, 지역도 명시되지 않아서, 어느 정도 편향이 있는 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동북의 외딴 섬에서만 나온 Japanese보다는 일본인을 보다 잘 대표할 수 있다고 본다. 후에 나오는 f4-statistics의 여러 결과들을 통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샘플로는 HumanOrigin 데이타셋에 나온 한국인 샘플 수도권 서울의 Korean외, Kor_kb(경북), Kor_kn(경남), Kor_jn(전남), Kor_jj(제주) 등으로, 23andme나 Wegene 등을 DTC(Direct to Customer)유전자 검사회사를 통해 측정한 샘플들을 추가하였다. 비록, 이들 지역 각각을 대표하는 샘플들의 수는 2~3명으로 적지만, 이 샘플들을 사용한 f-statistics을 실행하기에 중복되는 SNP수가 적어서, 이번 비교에 포함되지 못한 여러 다른 DTC회사들인 23mofang, LivingDNA, Myheritage 등을 통해 검사한 다른 한국인 샘플 데이타를 이용하여 실행한 이전 f-statistics과 유사한 결과를 보였으므로, 앞으로 더 많은 샘플을 통한 검증에서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대표성이 있는 결과로 본다.
위의 현대 동아시아 집단에 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이번 분석에 동아시아지역의 모든 인구집단이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언어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중요하고 대표적인 인구집단들과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내 세분화된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집단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고 보며, 한국인과 고인골 데이타들의 관계를 아는 데, 필요한 인구집단들은 거의 이 범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 죠몽인
이번 F4-statistics는 맨 앞에, 선사시대 동아시아인을 놓고, 그 다음에 Outgroup인 Mbuti 피그미인, 세번째에는 한반도 중부 서울의 현대 한국인, 그리고, 4번째에는 Test집단으로 다른 현대의 동아시아인 집단이 나온다. 수직으로 된 황색 선이 f4값이 0이고, 그 오른쪽의 양의 값이 나오면, 선사시대 동아시아인, 여기서는 죠몽인과 한국인 및 비교가 되는 Test집단과의 관계에서, 한국인이 이 동아시아인 집단보다 죠몽인과 혼혈이 더 많이 되었거나, 유전적으로 공유하는 성분이 많다는 것으로, 황색선 왼쪽으로 f4 값이 음이면 4번째에 있는 Test집단의 현대 동아시아인이 한국인보다, 죠몽인과 혼혈이 더 많이 되었거나, 유전적으로 더 공유하는 성분이 많다고 해석한다. D-statistics와 마찬가지로, 수평의 error_bar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Z-score가 |3|보다 클 때, 이 결과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림23) f4-stat (Jomon,Mbuti,Korean,Test)
한국인보다 죠몽인에게서 가장 거리가 먼 집단으로, 죠몽인과 같이 부계하플로 D가 많은 티벳인이 나오는 데 이것으로 볼 때도 부계하플로와 같은 Uniparental marker가 유사한 집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상염색체상에서 유전적 거리가 가깝게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티벳인 D부계하플로는 D1a1와 D1a2이고, 죠몽인과 현대 일본인은 D1b인 데, 위의 f-statistics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두 집단은 분리된 시간(D1a의 TMRCA 45,000년 전)이 아주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양상 안다만제도의 Onge인은 티벳인과 달리, 죠몽인과 같은 부계하플로 D1b 에 속하는 데, 상염색체 분석에는 죠몽인은 이 Onge인과도 공유하는 유전적 성분이 거의 없다는 결과도 있다(Gakuhari et al. 2020). 이 결과들은 죠몽인이 동아시아인을 형성한 주류 인구집단들과 아주 오래 전에 분리된 독특한 인구집단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Daur, Oroqen, Hezhen 등의 북방계 민족들과 Dai나 여러 중국 한족들도 한국인보다 죠몽인에게서 거리가 멀다고 나온다.
반면에, HGDP의 Japanese일본인이나 23andme의 Jap_23andme일본인들은 예상할 수 있듯이, 서울의 한국인보다 죠몽인에 확실히 가깝다. 그리고, 오호츠크해를 사이에 두고, 홋카이도 및 사할린섬의 죠몽인들과 교류를 하였을 연해주와 아무르강 유역의 Ulchi인도 서울의 한국인보다 죠몽인에 가까와 보이고, 급한 조류로 인해 거리가 멀지는 않지만, 선사시대인의 기술로는 항해가 어렵다고 여겨졌던 오키나와 남쪽 끝의 야에야마제도(八重山諸島)와 대만섬 사이에 최근 교류를 한 흔적이 발굴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죠몽인과 대만 원주민 사이에도 어떤 유전적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반영하듯 Ami와 Atayal도 서울의 한국인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죠몽인에 가깝다는 결과가 나온다. Ulchi인과 대만원주민 Ami와 Atayal의 죠몽인과의 관계에 대한 위의 f4-statistics결과는 Kanzawa-Kiriyama et. 2019 <Late Jomon male and female genome sequences from the Funadomari site in Hokkaido, Japan>에 나온 분석결과들과도 거의 일치한다.
한국인과 죠몽인의 관계를 지역별로 나누어서 살펴 보면, Admixture분석에서 일본인의 거의 절반 정도 죠몽인 성분이 나온, 제주도인이 서울의 한국인보다 죠몽인에 의미있게 가깝다고 나온다. 그 다음, 전남과 경북이 서울 사람보다 약간 죠몽인에 가깝게 나오지만 큰 의미를 두기 어렵고, 일본과 가장 거리가 가깝고, 신석기 시대부터 흑요석 무역 등을 통해서, 일본열도의 선사시대인과 가장 교류의 역사가 깊은 경남지역은 서울지역과 죠몽인과의 유전적 거리가 거의 차이가 없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전남지역의 전방후원분을 남긴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서 온 사람들 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한반도 인구집단에 남긴 흔적은 미미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남의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에 묻힌 사람들이나, 경남의 가야에 온 일본열도인들은 죠몽인과의 혼혈이 거의 안 된, 한반도인들과 분리가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죠몽인과의 유전적 거리로 일본열도인의 영향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큐슈 서북부의 사세보야요이인과 같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 확실한 부계하플로 O1b2a(47z)에 속하는 샘플이 현대일본인보다 휠씬 높은 죠몽인 비율을 보여 주는 것을 볼 때, 야요이시대부터 이미 죠몽인과의 혼혈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사세보야요이인과 한반도 각 지역 사람들과의 f-statistics분석도 하려고 했으나, 사세보야요이인의 데이타 퀄리티가 좋지 않아서, 실행할 수 없었다. 차후에, 보다 많은 야요이시대인이나 고분시대 초기 일본열도인의 고인골 자료가 나온다면, 이 자료들을 통해서, 다시 이 부분에 대한 검증을 시도해 볼 것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서, 특별히 일본인들과의 연관이 크지 않은 제주도가 의미있게 죠몽인과의 유전적 거리가 가깝고, 전남이나 경남지역과 같은 일본인과의 교류의 역사가 확인가능한 지역에서 그러한 영향이 적은 수도권지역인과 죠몽인과의 유전적 거리가 별차이가 없는 것은 한반도 남단 전체에 이러한 신호가 평탄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고, 이것은 오래 전 선사시대(아마도 구석기) 죠몽인이 거쳐간 흔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변방인 일본열도나 티벳지역이 동아시아에 오래 전에 진입한 인류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듯이, 한국인들의 거주지역에서 변방인 제주도는 한반도인들에게서 많이 사라진 오래 전 선사시대인들의 신호를 상염색체 방면에서 더 많이 보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홍산문화인
그림24) f4-stat(WLR_MN,Mbuti,Korean,Test)
우하량유적과 함께 홍산문화를 대표하는 WLR_MN 반랍산유적에서 나온 고인골과 한국인 및 다른 동아시아 인구집단을 비교한 위의 그래프를 보면, 한국인 내부의 지역별 인구집단을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동아시아 인구집단이 서울의 한국인보다 홍산문화인과의 거리가 더 먼 것으로 나타난다. Ulchi인과 Hezhen 두 퉁구스계 민족이 약간 차이가 나게 가깝고, 중국의 여러지역 한족 중에는 유일하게 산동성 한족, 그리고, 두 일본인 집단 등이 한국인 만큼은 아니지만, 홍산문화인에 어느 정도 근접해 있을 뿐이다. 이로써 볼 때, 현대의 동아시아 인구집단 중에, 상염색체상으로 확실히 홍산문화인과 연관을 주장할 수 있는 집단은 한국인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한국인 중에서 전남지역은 서울지역보다 홍산문화인과의 거리가 약간 멀고, 서울, 경남, 제주, 경북의 순으로 홍산문화인과 유전적 공유성분이 높다고 나오지만, 그리 큰 의미 있는 차이는 아니다. 한국인과 홍산문화인이 공유하는 유전적 성분이 다른 동아시아인 집단에 비해 높은 것에 대한 원인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 원래 홍산문화인과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 존재했던 한국인의 조상인구집단이 홍산문화인과 유전적으로 유사했다. 즉, 현대 한국인은 신석기 초중기이전부터 한반도에 존재했던 홍산문화인과 유사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계승되어 내려온 사람들이다.
2) 홍산문화가 소멸된 뒤, 요서지역에서는 소하연문화-하가점하층문화-하가점상층문화 등으로 이어지는 데, 이들 중에 홍산문화와 유전적으로도 강한 계승관계를 지닌 어떤 인구집단이 한반도로 대거 이주하여, 현대 한국인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위 1)의 추정에도 언제부터 홍산문화와 유전적으로 유사한 사람이 존재했는 지에 따라서, 다른 모델이 나올 수 있다. 즉, 세석기(Microlithic)을 사용하기 시작한 구석기 후기부터 요서와 한반도에 공통적으로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했는 지, 혹은 실제로, 한국인의 조상과 홍산문화인은 일종의 형제간으로서, 홍산문화 이전의 소하서, 흥륭와, 조보구문화의 등의 신석기 문화 어느 한 시기에서 갈라져서, 한쪽은 그대로 요서에 남아 홍산문화를 이루어내고, 한반도로 이주한 쪽은 빗살무늬토기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현재 데이타로 볼 때, 큰 차이는 아니지만, 앞에서 죠몽인과 같은 비교적 오래 전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제주도인이 서울지역보다 홍산문화인과 가까운 것을 볼 때, 홍산문화인과 가까운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한반도에 정착한 시기는 오래 된 것으로, 청동기 이전 신석기 시대에 이미 그랬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보겠지만, 하가점하층문화나 하가점상층문화인 역시, 한국인과 공유하는 유전자가 많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후에 한반도에 유입된 사람들이 공헌한 것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의 고인골에서 데이타가 나와 각각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 홍산문화의 부계하플로그룹 구성비율 문제
한국인과 홍산문화인와의 연관은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에서 나온 고인골의 모계하플로와 대응을 통해서도 이미 서술된 바 있고, 고고학자들 중에도 홍산문화의 제단, 적석총 등의 묘제, 옥기 등을 통해서, 한국문화의 연관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에서 나온 고인골의 부계 하플로 측정에서 6개의 샘플 중에서 N1(XN1a,N1c)이 4, C2이 1, O3a 1가 나왔는 데(Cui et al. 2013), 이 비율이 현대 한국인의 부계하플로 그룹 비율과 크게 다르므로, 홍산문화와 한국인과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분자인류학 연구자도 아니고, 논문으로 이러한 주장을 펴낸 것은 아니지만, 네이버의 역사 커뮤니티나 블로그 등을 근거지로 지속적으로 분자인류학에 대한 편향되고, 잘못된 정보를 퍼뜨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에 여기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앞서, 죠몽인과 한국인, 현대 티벳인이나 안다만제도의 Onge인과의 f4-statistics의 결과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부계하플로나 모계 하플로와 같은 Uniparental Marker는 인구집단간의 유전적 연관을 추정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 부계 하플로를 결정하는 SNP는 인간의 염색체가 가진 30억개의 염기 중 극히 일부인 수천개 정도에 불과하다. 인구집단간의 유전적 친연관계를 결정하는 데, 전체적인 상염색체에서의 유전적 거리가 어떠한 지를 이것을 판단할 수 있는 데이타가 있다면, 그것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인구집단간의 유전적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 고인골에 나타난 부계하플로나 모계 하플로를 참조한다면, 부계하플로 N1이나 O2와 같은 매크로 하플로그룹의 비율이 아니라, 구체적인 하위 하플로그룹의 유형을 검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선사시대 유적에서 나온 고인골에서 Y하플로그룹을 측정가능한 것은 고인골의 훼손이나 오염 등의 문제로 적은 수로 한정되어 있다. 유적에서 나온 고인골 가운데, 일부의 아주 적은 수의 고인골만이 Y하플로그룹 측정이 가능하다. 그래서, 고인골에서 측정된 Y부계하플로로 현대 인구집단과의 비교를 위해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추정을 할 수 없는 몇 개 안되는 샘플들에서의 하플로그룹 비율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인골 데이타로는 충분한 하위 하플로그룹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가능한 정도까지 하위하플로를 탐색해서, 이 구체적인 하위하플로 그룹이 대응하는 현대 인구집단에 존재하는 지를 알아 보는 것을 우선시한다. 즉, 이 경우 정량적인(quantitative) 분석보다는, 정성적인(qualitative) 분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홍산문화에서 6개 샘플 중에서 66%로 부계하플로 N1(XN1a,N1c)이 나왔는 데, 부계하플로 N1(XN1a,N1c)이 이렇게 높은 비율로 나오는 현대 인구집단은 동아시아에서는 찾을 수 없고, 시베리아의 일부 우랄계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Nganasan, Khants, Mansi, etc) 이다. 어차피 이들에게는 홍산문화의 계승자로 한국인만 아니라면, 다른 어떤 인구집단이 되든 상관없을 것이므로, 이들도 홍산문화의 계승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홍산문화에 나타나는 하플로 N1의 하위유형이 무엇이며, 이 하위 하플로그룹이 일치하는 지를 살펴야 한다. 즉, 하플로N1의 서로 다른 하위 하플로가 각 인구집단에 나타나면, 그 비율이 아무리 비슷하든, 두 인구집단은 관련이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특정 인구집단이 전체 상염색체나 모계하플로 방면에서는 큰 변화가 없이 지속성이 있더라도, 통시적인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계하플로의 구성비율은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징기스칸의 부계하플로로 알려진 C2a의 star-cluster와 같은 부계하플로가 급격하게 확장해서, 중앙아시아지역의 여러 인구집단에서 부계하플로 구성비가 많이 바뀌었지만, 대부분의 인구집단은 이전과 같이, Turkic계열의 언어를 말하고, 상염색체 전체의 구성은 유사하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상염색체상으로 가깝고, 모계하플로의 구성비는 매우 유사하지만, 부계하플로에 있어서, 현대 일본인에게서 하플로 D가 지역에 따라서 30~40%에 이르게 높게 나타나지만, 한국인에게서는 2%정도로 낮다. 분자인류학 연구 초기 단계에 이러한 한국인과 일본인의 부계하플로 구성비에서 하플로 D의 큰 차이만 보고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적으로 동질적인 인구집단에서 분화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견해가 있었다. 이것은 일본열도에서도 아마도 역사시대에 부계 하플로 D의 특정 하위 하플로가 급격히 확장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 데, 이렇게 부계하플로는 사회적 선택(social selection)에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에, 원래 유전적 동질성이 강한 집단이라 하더라도, 분화된 이후에,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면, 그 구성비율은 잘 변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위유형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고, 매크로 하플로그룹으로 분류된 부계하플로의 구성비율만으로, 시대가 다른 두 집단간의 유전적 유사성을 확인하려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주류는 언제 형성되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북한 학계는 구석기시대에 존재한 ‘승리산사람’과 같은 집단이 연속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라하고, 혹자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인이 주류가 되었다라고, 청동기시대에 한반도에 진입한 집단이 주류라고 하고, 또는 철기시대의 점토대토기를 만들었던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한국인도 지구상의 거의 모든 다른 인구집단처럼, 단일한 종족이 수만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시기에 한반도로 진입한 여러 다른 인구집단이 혼혈하여, 생긴 것이고, 이 서로 다른 인구집단은 아마도 부계하플로의 비율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중국 동북지역의 선사시대 유적에서 나온 고인골들의 부계하플로 비율을 보면, 홍산문화와 소하연문화시기까지 하플로 N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다가, 하가점하층문화에서부터 하플로 O의 비율이 점차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홍산문화시기 한반도에 존재한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었던 집단도 홍산문화인과 비슷하게, 하플로 N1의 비율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에 빗살무늬토기가 성행한 것과 유사한 시기에 핀란드, 폴란드 등의 북동유럽에서 Comb Ceramic Culture라고 해서, 역시 사선으로 빗금을 그은 무늬가 있는 토기가 나타났고, 유럽고고학계에서는 이 토기가 시베리아나 북중국 등의 아시아방면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현재 핀란드나 에스토니아와 같은 우랄계 언어를 사용하는 북동유럽의 국가에서 부계하플로 N1의 비율이 높은 데, 현대 핀란드인에서 부계하플로 N1은 약 60%의 비율로 절대 다수 이고, 주변의 스웨덴,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러시아 등지에서도 20~40%로 높은 비율로 나온다.
이 북동유럽의 N1은 홍산문화의 부계하플로 N과는 하위 하플로유형은 달라서, 이 지역은 거의 N1c에 속한다. Cui et al. 2013 논문에서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에서 나온 고인골의 부계하플로가 N1(xN1a,N1c)로 표기되는 데, 이는 하플로 N1중에서 N1a와 N1c(M178)는 eXclude, 곧 배제한다는 의미이다.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에서의 높은 부계하플로 N1의 비율을 보고, 이것이 현대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러시아, 폴란드 등의 북동유럽에서의 높은 부계하플로 N1의 비율과 유사하기에, 홍산문화가 소멸된 후, 그 후예들이 핀란드로 이동한 것이다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N1 아래 서로 다른 하위하플로가 있고, 이 하위하플로 중에 N1a,N1c 등은 이미 분리된 지 적어도 10,000년이 넘고,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의 고인골은 N1c가 없으므로, 핀란드인은 홍산문화와는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Comb ceramic culture에서 발굴된 고인골에서 하플로 N1이 다수는 아니지만,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북동유럽에 등장함으로서, Comb ceramic의 아시아적 기원과 하플로 N1의 등장이 서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부계하플로 하위 유형이 북동유럽과 같은 N1c인지 혹은 홍산문화와 유사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반도 주위의 신석기 시대 요서지역과 산동성지역(후리문화) 모두 하플로 N의 비율이 높았고, 시베리아 혹은 북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Comb ceramic토기가 등장하던 시절 북동유럽에 하플로 N1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가 유행하던 시기, 부계하플로 N이 다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서지역에서 하플로 O는 홍산문화에서도 존재했지만, 그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 이 비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데, 그것은 최근에, 우하량 유적의 최고 등급 대묘에서 나온 고인골의 부계하플로가 O2a2b1(M117)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여러 역사적 사례에서 증명하듯이, 사회적 계급 분화가 진행될수록 수장급에 자원이 집중되기에, 다른 외부적인 유입이 없어도, 홍산문화시기에 최고급 수장이 하플로 O였다면, 이후에, 홍산문화 내에서 부계하플로 O의 비율이 증가했을 것이다.
이런 내부적인 요인 외에, 더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 이후에 나타나는 하가점하층문화, 하가점상층문화 등에 지속적으로 하플로 O가 다수인 황하유역이나 중원지역으로부터 인구유입이 암시되고 있다. 현재 학계의 주류 의견은 청동기시대 요동방면에서 한반도로 진입한 집단이 한국인의 주류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이는 데, 이들 청동기시대 요동방면에 존재했던 인구집단은 황하유역에서의 인구집단 유입 외에, 발해만을 사이에 두고, 산동성방면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는 데, 산동성방면에도, 홍산문화와 같이, 하플로 N이 다수였던 후리문화 이후에는 대문구문화, 산동용산문화 등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하플로 O가 다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방면에서의 하플로 O의 인구 유입이 결국, 현재와 같이, 현대 한국인의 부계하플로 그룹 비율이 홍산문화인과 다르게 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과정이 일시적으로 한 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수 천년에 걸쳐서, 완만하게 이루어졌고, 새로 요서나 요동지역에 등장한 하플로 O그룹은 그 전부터 존재한 집단에 천천히 동화되어 갔기에, 위의 f4-statistics의 결과와 같이, 비록 부계하플로그룹의 구성비율은 다르지만, 현대 한국인이 홍산문화인과 유전적 성분을 가장 많이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 한국인에게 존재하는 하플로 O도 원래 출발지였던 황하유역의 황토고원이나 산동성의 교동반도 혹은 더 남쪽으로 강소성 일대 등에서 기원했을 유전자도 여전히 지니고 있는 데, 이러한 흔적은 뒤에 나올 f4-statistics의 다른 분석들을 통해서, 확인할 것이다.
덧붙여서,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의 부계하플로를 측정한 Cui et al. 2013 <Y Chromosome analysis of prehistoric human populations in the West Liao River Valley, Northeast China> 이라는 논문 자체도 문제가 있는 데, 우선 중국인 연구자들의 고질적인 나쁜 습관을 따라, 부계하플로를 측정한 고인골을 시퀀싱한 raw data를 공개하여 제공하지 않는다. 논문에 나온 가설을 다른 연구자들도 검증할 수 있도록 제공해야 할 Raw data를 잘 내놓지 않는 중국인 연구자들의 문제는 2020년이 된 지금에서도 잘 개선이 안 되고 있는 데, 하버드 대학이나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와 같은 외국의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를 제외하고, 자기들 국내 연구자들끼리 한 연구에서는 논문에서 데이타를 공개했다고 하고, 사이트를 적어 놓았는 데, 막상 그 사이트에 가서 다운로드를 받으려면 Lock이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raw data 대신 supplement에서 측정된 Y-SNP와 Y-STR값을 제공하는 데, Y-SNP하플로와 Y-STR이 통상적으로 매칭되기 어려운 샘플들이 있다, 즉 이 논문의 저자들이 Y-SNP하플로도 제대로 측정했는 지를 의심할만한 정황이 있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raw data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이 논문에서 저자들이 측정했다는 대략적인 하플로 그룹외에, 하부의 어떤 유형을 나타내는 SNP가 양성인지 음성인지 확인할 수 없다. 물론 홍산문화의 고인골 데이타 자체의 퀄리티가 낮아서, 매크로 하플로 그룹 분류외에 더 하위 단계의 하플로를 결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이 논문에서 내놓은 결과와 같이, 특정 하위 하플로를 대표하는 SNP의 음양성 여부만 확인하기 쉬운 데, 실은 이 대표적인 SNP외에도, 그와 평행하는 많은 SNP들이 있고, 하플로 그룹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이후에, 평행하는 SNP의 숫자가 증가한다. Raw data가 제공되었다면, 2013년 당시에는 확인하지 못한, 이러한 하위하플로그룹을 대표하는 SNP와 평행하는 여러 SNP들의 음양성여부를 통해서, 하위 하플로그룹을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 논문에 나온 매크로 부계하플로 측정 결과만으로는 한국인과의 관련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고, 2020년 또 다른 홍산문화의 반랍산유적에서 나온 고인골 데이타로 상염색체에 대한 분석을 실행할 수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홍산문화인과 한국인과의 유전적 관련성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로서 유효성을 가지기 어렵고, 개략적인 참고자료로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molanthro/I4qd/140)
3) 하가점하층문화인
그림25) f4-stat(WLR_LN,Mbuti,Korean,Test)
하가점하층문화 이도정자(二道井子) 유적의 선사시대인은 앞의 Treemix, PCA, Admixture 분석 등을 통해서, 황하유역에서 온 성분이 이전 시대 홍산문화인에 비해 급격히 늘어나, 요하유역보다는 화하족의 기원지라 여겨지는 황하유역 선사시대인과 묶여질 수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었다. 여기 f4-statistics에서도 앞의 홍산문화 반랍산의 선사시대인과 달리, 중국 한족들이 한국의 서울지역과 이도정자 고인골과의 유전적 거리가 거의 차이가 없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산동성, 절강성, 강소성 등 황해 연안에 위치한 지역들의 한족들이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데, 한국인은 전체적으로 중국 한족보다 약간 더, 그리고, 다른 동아시아인집단보다는 차이가 확실하게 이도정자인과 유전적으로 공유하는 성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 집단에서는 제주도인이 서울지역보다 명확히 이도정자 선사시대인들과 거리가 먼 것을 볼 수 있는 데, 오히려, Japanese와 Jpn_23andme의 두 일본인 집단이 제주도인보다 황하유역인에 유전적으로 더 가깝고, 경남, 경북, 전남은 거의 차이가 없이, 서울지역 사람보다 이도정자 선사시대인에 가깝다. 이도정자인은 홍산문화인과 달리, 지리적으로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황하유역 성분이 많기 때문에, 이들이 원래부터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과 유전적으로 유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도정자인과 한국인이 유전적으로 거리가 가까운 것은 이들 이도정자인의 후예들이 한반도로 대거 이주했고, 이들의 이주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한반도 토착인 성분이 많은 제주도인이 이들과 거리가 멀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그래프에서, 경북, 경남, 전남의 세 인구집단이 비록 절대값 |3|이 넘는 의미있는 차이는 아니지만, 수도권사람들과 상당한 차이로 이도정자인들과 유전적 성분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이들이 연해주방면에서 동해안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서해쪽에서 왔기에, 전남지역이 미세하게 경북, 경남보다 이 성분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도정자인과 유사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이, 요동-한반도 서북부-중부-남부로 이어지는 육로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경로에 따라, 한반도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 요동에서 직접적으로 해로를 통하여, 충청도나 전북의 해안에 도착하여, 한반도에서 확장을 시작한 집단과 관계가 있지 않나하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송국리문화인이나 마한의 지배세력 등이 그 후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차후, 한반도의 서해안 유적들에서 고인골의 유전자가 데이타가 나온다면, 이러한 추정에 대한 확인이 가능해질 것이다.
하가점 하층 문화가 홍산문화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유적 둘레에 성을 쌓은 것이다. 하가점 하층 문화 유적에 나타나는 성곽 축조방식은 1)돌을 잘라서 쌓은 것, 2) 성문 밖에 방어를 위해서 또 하나의 옹문(瓮門)을 만드는 것, 3) 성벽에 마면(馬面) 이라 하여 삼면이 경사진 벽으로 튀어나온 망루를 만드는 것, 4) 성곽 내에 제사를 위한 제단이 있는 것 등 약간 앞선 시기인 4300년 전에 축조된 섬서성 신목현의 중국 내 선사시대 최대 규모의 성곽유적인 석묘유적과 유사한 점이 많으므로, 이 석묘유적의 성곽을 만든 이들과 하가점 하층 문화인들이 어떤 관계가 있을 거라는 견해도 있다(王禹浪, <东北古代民族筑城源流及文化特征述论> 2018). 석묘유적은 앙소문화가 북상하면서, 남하해 온 홍산문화인을 만나, 만든 해생불랑문화의 하나로 여겨지는 데, 이 점에서 하가점하층문화는 단순히 지역적으로만 홍산문화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황하 중상류까지 진출했던 홍산문화의 후예들이 다른 문화와 융합한 후, 다시 돌아와 우회적으로 계승한 문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가점하층문화가 같은 황하유역이라도 용산문화와 같은 중원지역이 아니라, 석묘문화와 같은 중원과는 다소 떨어진, 해생불랑문화의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한국인에게도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 황하유역 성분의 기원이 어디인지, 왜 석묘문화성분이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에 높게 나타나는 지의 원인에 대해서, 보다 근접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즉, 석묘문화와 같은 황하유역 성분은 직접적으로 한반도에 도입된 것이 아니라, 하가점하층문화와 같이, 지역적으로 문화적으로 보다 근접한 중간 지점을 통해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하가점하층문화의 발달된 축조술은 이후에, 중국 동북지방에 존재한 여러 민족들에 전해지는 데, 실제적으로, 잦은 이동으로 고정된 거주지나 인구가 집중된 도시가 없었던 유목이 주가 된 흉노, 선비, 실위 등의 민족들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기 어렵고, 반농반목의 예맥계통, 그리고 이후에 부여와 고구려가 하가점하층문화인의 성곽축조 전통을 이어갔다고 볼 수 있다.
약 4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이도정자 유적은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들에서 일반적으로 돌로 석성을 쌓은 것과는 달리, 부여나 백제의 성과 같이, 판축기법으로 토성을 쌓고, 성곽둘레에는 환호를 만들었다. 집 자체도 흙을 이용해서 지었고, 이 흙으로 만든 집들과 성곽이 튼튼해서, 대부분 무너지지 않고, 도로나 가마터와 같은 다른 시설들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서, 중국에서는 급작스런 화산폭발로 화산재에 덮여서, 건축물등의 현장이 잘 보존된 이탈리아의 폼페이 유적과 비슷하다고 해서, ‘동방의 폼페이’라고도 불린다.
이처럼 흙을 이용해서 집을 짓고, 돌이나 흙으로 성을 쌓은 것에 능한 것은 황하유역 용산문화 시기의 여러 유적들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홍산문화에서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정착생활과 농경 위주의 경제 등의 생활양식과 새로운 기술들이 그저 문화전파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인구집단의 이주와 함께 했음을 상염색체 분석의 결과로 알 수 있다. 토기류에서는 한반도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는 보기 힘든 황하유역에서 기원하는 삼족기 등이 많이 보이는 데, 이것으로 볼 때, 이도정자인과 같은 하가점 하층문화인이 집단적으로 한반도로 곧바로 이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들 하가점하층 문화인들이 약 3300년 전 이 문화가 소멸된 이후, 새로운 유목경제 위주의 하가점 상층문화가 성립되기 전까지 약 300년의 공백이 있는 데, 이 기간 동안, 기후가 한랭하고 건조해져 농경이 어려운 요서지역을 떠나, 기후가 보다 온난하고, 농경에 적합한 요동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이들이 한반도 서북부에 나타나는 미송리형 토기와 지석묘 등으로 대표되는 쌍방문화나 경남 진주 남강 일대에도 나타나는 각목돌대문토기, 석관묘를 남긴 마성자문화와 같은 한반도와 보다 연관성이 높은 집단에 합류한 후, 한반도로 이동했을 것이다.
● 현대 한국인의 O2 3대 부계하플로의 연원
앞의 절에 나온 <홍산문화인의 부계하플로 구성비율문제>에서 잠깐 거론했던 문제, 즉, 현대 한국인에게서 홍산문화인과 달리 하플로 O그룹이 높게 나타나는 데, 그 중에 중국 한족에도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O2a(M324)의 3대 부계하플로가 어느 시기에 한반도로 왔는 지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여기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동아시아에는 하플로 O그룹이 여러 인구집단에서 다수로 나타나고, 그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 한족에게서는 이 하플로 O 그룹 중에, O2a(M324) 아래의 하위하플로가 우세하고, 이 중에서 O2a1c(JST002611, 중국 한족 중에 약 15%), O2a2b1a1(M117, 중국 한족 중에 약 17%), O2a2b1a2(F444, 중국 한족 중에 약 12%), 이 세 개의 주요한 부계 하플로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O2a2b1(M134) 아래의 주요한 두 부계 하플로인 M117이나 F444 는 황하유역에서 기원한 것이 유력한 데, JST002611의 기원은 아직 분명하지 않은 데, 원래, 황하유역이 아닌, 양자강 중류의 팽두산(彭頭山)문화나 굴가령(屈家領)문화가 기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원이 어디든, 중국 전역에의 확장은 황하중류의 하남용산문화나 황하하류의 산동용산문화 혹은 이후의 이리두문화나 악석문화 등에 합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이므로, 여기서 광의의 황하유역으로 넣는다.
이들 O2의 3대 부계하플로는 한사군의 낙랑군이나, 한국 많은 가문의 족보에 나오는 대로 통일신라시기 8학사 등의 이주로 통해서, 한국인에 합류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한사군 이전의 기자조선을 한민족에 대한 중화의 식민화 시작으로 보는 중국인이 더 많으나, 기자조선의 실재에 부정적인 여러 견해가 나와 있고, 설사 실재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인들이 생각하듯 한반도 중남부에 자리잡은 국가는 아니라, 현재의 하북성지역 작은 방국이였을 가능성이 크므로, 여기서 고려하지 않는다.
중국의 중화주의자들 중에는 이러한 M117(한국인 KRGDB 중 10.2%), F444(한국인 KRGDB 중 8.9%) 나 JST002611(한국인 KRGDB 중 9.2%) 등 O2의 3대 부계하플로로 불리는 유형이 한국인에게도 10% 에 가까운 비율로 중국 한족과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한국인은 중국 한족의 하위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적지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족(漢族, 곧 원래는 인류학적 의미의 동일한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인구집단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漢나라의 백성이라는 의미)이라는 명칭이 시작되고, 춘추전국시대까지 서로 다른 나라에서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인구집단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진한통일 이후에 이주한 이들이 있다하더라도 개별적으로 들어온 소수이고, 한국인 O2a의 대부분은 화하족(동이,북적,서융,남만 등의 사이와 구별되는 중원의 민족, 곧 서주의 개창이후, 서주의 봉건질서에 편입된 지역의 사람들)이나 한족이 본격적으로 생성되기 이전에, 하가점하층문화인이나 후에 나오는 하가점상층문화인의 이동을 통해서 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고려해 볼 수 있다.
첫째, 현대 한국인에 나타나는 M117이나 F444, JST002611의 하위하플로 유형이 중국 한족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 중국 한족의 M117은 그 아래 F438 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한국인은 F438과 평행한 여러 다른 하위 하플로들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난다. F444의 경우에도 한국인에는 중국 한족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F46 아래의 하위 하플로뿐만 아니라, Y30485나 전주 이씨 이성계 가문의 부계하플로로 추정되는 S24684가 속한 F743 등의 다양한 하플로유형이 나타난다. JST002611의 경우, 중국 한족의 경우는 F632아래 하위하플로가 대다수이나, 한국인의 경우에는 몽골족 등 북방민족에게 많이 나타나는 F2180 아래의 하위하플로가 다수이다(징기스칸의 부계하플로를 다룬 논문들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23mofang에서 측정한 중국 내몽골자치구 황금가족 보르치긴씨 다수의 부계하플로는 F2180아래의 하위하플로이다). JST002611의 경우, 한국인과 일본인의 경우, F11 아래 기존의 하위하플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유형도 나타나는 데, 이들의 존재로 볼 때, JST002611의 일부 하위하플로는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조상들에 합류한 시기는 M134 아래의 두 하위 하플로 M117이나 F444보다 오래된 신석기 시대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였거나, M134가 합류한 것과는 다른 루트(양자강 하류지역에서 직접적으로 도해?)를 통해 진입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한사군 이후에, 화하족의 이주를 통해서, M117이나 F444, JST002611등이 유입되었다면, 그 기원지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에는 화하족에 주로 나타나는 F438이나 F46, F632 아래의 하위하플로가 다수여야 하나, 그렇지 않고, 인구가 20배 이상 많은 중국 한족과 유사하게 M117이나 F444, JST002611의 여러 다양한 하위 하플로 유형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한국인에게서의 이 3대 부계하플로는 중국 한족에서 분기한 하위 집단이 아니라, 중국 한족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이전에 이미 분리된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앞서 언급했듯이,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의 최고급 대묘에서 이미 M117이 보인 것을 볼 때, 한국인의 O2a2b1(M134)는 홍산문화 시기 이미 요서지역에 존재한 이들이 더 이른 시기에 한반도에 진입하였을 수도 있으나, 대부분은 황하유역에서 보다 많은 이주민들이 합류한 하가점하층문화인들이 주류가 되어, 한반도로 진입하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사실은, 은왕조가 무너지고, 서주가 건국된 기원전 10세기 이래로, 중국에서 가장 널리 확장한 부계하플로인O1a1a1a1a1a1(F492)의 현대 한국인 집단에서의 비율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부계하플로 측정은 이미 20년 전에 시작되었으나, PCR기법에 의한 매우 한정된 수의 SNP에 대한 측정이 주가 되었고, 2010년대 이후로 Y염색체에 대한 전장유전체 분석(full sequencing) 이 보편화됨으로써, 비로소 부계하플로에 대한 여러 하위하플로 유형에 대한 전면적인 탐색이 가능하게 되었다.
각 부계 하플로 그룹의 하위하플로 유형에 대한 전면적인 탐색으로 밝혀진 중국인의 부계하플로 연구에서 밝혀진 주목할만한 사실은, 현대 중국 한족에게서 다수인 주요 세 부계하플로 그룹인 황하유역에서 유래한 M117이나 F444 혹은 동이(東夷)로 불리는 산동성이나 강소성지역의 확장중심이라 생각된 JST002611의 하위하플로들이, 화하족이 본격적으로 확장을 시작한 서주시기(B.C.10세기 즈음) 이후에 가장 널리 확장한 부계하플로가 아니라, 의외로 양자강 하류 백월(百越)족의 부계하플로 여겨진 O1a아래의 F492(TMRCA를 3,300년 전 정도 본다)가 가장 맹렬한 확장을 한 부계하플로이라는 것이다.
M117, F444, JST002611의 주요 하위하플로들은 서주(西周)의 개국 휠씬 이전인 홍산문화, 앙소문화, 용산문화, 대문구문화 등의 신석기시대 농경 위주의 경제 확산과 더불어, 이미 확장을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M117, F444, JST002611이 한족이 아닌 타민족들에게 나타나거나, 한족과 비슷한 비율로 보여도, 그것이 이전에 일반적으로 해석하듯이, 중국 한족이 진한시대 이래로, 소수민족 지역에 정치적 군사적으로 활발히 진출한 결과라 할 수 없고, 신석기시대에 화하족의 조상에게서와 비슷하게, 농경의 확장과 더불어 나타난 부계하플로의 확장이고, 각 하플로별로 10%에 가까운 비율은 신석기 말기에 동아시아 각지로 확산되기 전의 인구집단에서의 비율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F492에 대한 이러한 분석이 나온 이후에, F492가 자신의 부계하플로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F492는 양자강 하류의 백월(百越)이 아니라, 화하족의 기원인 황하유역이 기원지로서, 서주왕조의 부계하플로가 곧 F492라고 주장하고 있고, 현재도 F492의 기원이나 서주왕조의 부계하플로를 둘러싸고, 중국에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화하족이 기원한 앙소문화나 용산문화에 속하는 유적에서 2018년부터 제법 많은 고인골에 대한 부계하플로 측정 결과가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 F492은 이 중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고, 서주왕조의 방계로 알려진 려국(驪國)의 고분에서 출토된 고인골 부계하플로는 N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현재까지의 증거로 볼 때는 현대 중국 한족에서 F492의 빈도가 가장 높은 양자강 하류의 절강성(14%)과 강소성(9%) 등이 여전히 F492이 확장을 시작한 지점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현대 중국 한족이 북방에 위치한 산서성 한족이나 동북3성 한족 등을 고려해도 한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상염색체상에서 남방쪽으로 치우치는 것으로 나오는 데, 현대 중국 한족과 한국인 및 일본인의 부계 하플로 구성비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이 O1a(M119), 특히 F492의 구성비이므로, 양자강 하류 남방에서 유래한 F492와 같은 부계하플로의 확장이 상염색체상에서도 일정한 작용을 했으리라고 본다.
이 F492는 한국인에게서는 가장 많은 샘플이 모이고, 하위하플로그룹의 비율까지 알 수 있는 KRGDB 데이타에서 0.14%로 나타나는 데, 이는 한반도에 인접한 길림성 한족(3.1%)이나 요령성 한족(2.7%)에 비해서도 현저히 적은 극히 소수라 할 수 있다. F492을 일부에서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인 월나라왕 구천의 부계하플로라 하는 데, 이것의 사실여부와는 별도로, F492는 춘추시대말부터 월나라의 황해 연안과 양자강하류유역에서, 그리고 산동성을 기점으로 중국 북부로, 초나라와의 통합 후에는 양자강 중상류의 내륙으로, 진한통일 후에는 중국전역으로 확장했을 것이다. 월나라는 경쟁관계였던 오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여, 후에는 산동성남부지역까지 차지하였고, 수도도 한때는 현재 산동성 지역인 낭야에 두었고, 월왕 구천은 춘추시대 최후의 패자(覇者)로 여러 제후들 위에 군림했다. 이 시기 월나라의 이러한 세력 확장이 F492가 양자강유역과 황해안을 따라 산동성지역까지 확장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나, 본격적인 중국 전역에의 확장은 진한시대가 되어서야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의 근거는, 전국시대 말기에 가장 넓은 영토를 거느리고, 가장 생산력이 높은 지역을 차지한 국가가 양자강 하류가 근거지였던 월나라까지 정복한 초나라이고, 진한통일 이후에 각지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한 무제시기의 활발히 행해진 정복전쟁 등에 파견할 시, 이 초나라 출신이 가장 높은 비율이었을 것이다. 한왕조가 아직 개창하기 전이지만, 유방의 군사들이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불러 항우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사면초가(四面楚歌) 고사는 그 만큼 군대 내에 초나라 병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진나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서, 천하의 쟁패를 놓고, 경쟁한 두 영웅, 항우와 유방의 출신지도 초나라로서, 한왕조를 건립한 유방은 현재의 강소성 서주인 패현(沛縣) 출신으로서, 고향에서부터 출발하여, 같이 반란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후에 공신이 되어, 높은 지위를 누리고, 널리 부계하플로를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이 중에는 F492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F492이 약 3000년 전 화하족이 역사에 주역으로 등장한 서주 시대 이래의 가장 폭발적으로 확장한 부계 하플로라면, 통일된 한제국에서 대략 2000년 전 이래로 중국 한족의 확장과 가장 연관된 부계 하플로는 바로 한고조 유방 본인 가계의 부계 하플로일 것이다. 현재 한고조 유방의 부계M117-F438-F155아래의 F813이 유력하다고 추정한다. 중국 유전자회사 23Mofang에 의하면 F155는 중국 한족 중에 약 2%로, F813은 그 중 절반이상의 비율을 차지한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걸쳐, 사서에 거의 흔적이 없었던 중국 劉씨는 유방의 등장과 더불어 진한대 이후에야 역사에 나타나, 현재는 李,王,張,劉,陳의 중국 5대 성씨 중 하나가 되었고, 중국인 중 그 비율이 5%에 달하는 대성으로, 다른 여러 부계하플로그룹에 다양하게 퍼져 있지만, 특히 F813중에 류씨의 비율이 20%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KRGDB에 F155는 0.14%, F813은 0%로 검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진한시기 이후, 한족이 널리 확장되었다면, 이 시기에 맹렬히 확장한 F492과 F813이 같이 포함되어 있어야 할 것이나, 현대 한국인에 이 화하족과 한족을 대표하는 하플로는 극히 낮게 나타난다. 이 사실과 앞서 거론한 3대 부계 하플로의 하위하플로 비율에서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볼 때, 한국인에게서 나타나는 중국 한족과 공통된 부계하플로들은 진한시기 이후에 확장한 결과라기보다는 그 이전 시대에 확장한 그룹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 주요한 원천은 황하유역 이주민의 영향이 명확한 하가점하층문화인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molanthro/I4qd/141)
6.7 블로그 《실증환인환웅단군》
『1. 중국이나 태국에서 가장 한국적 문화를 많이 간직하여 당나라 때 이주한 고구려 후예로 여겨지던 라후족이 Y, F, K 등 고대 유전자를 주로 가졌다. 그러나 몽고 유전자가 섞이지 않은 것은 이들이 압록강 남쪽 사람들이고, 그들 스스로 강서에서 왔다고 하므로 대동강 서쪽 강서군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들은 고대 마한 유전자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고려된다. 가장 오래된 고대 유전자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출발지에서보다 변화하지 않고 보존되는 현상이 종종 있다. D 유전자는 일본 아이누족과 티벳 산중, 인도양의 안다만 섬 같은 고립된 지역에 보전되어 있다.
2. 원시 몽골유전자 C그룹은 3만 년 전에 시베리아로 이동하여 북만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환웅 시대 이전에 원시 몽골유전자 C그룹이 들어오지 않았다.
3. D그룹이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티벳과, 티벳과 이웃한 요족瑤族에 남고, 남쪽으로는 인도양 안다만 섬으로 가고, 북쪽을 돌아서 몽골 유전자 C1과 동행하여 함께 일본에 건너갔는데, 이는 한국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를 돌아서 사할린을 통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D와 동행한 C1이 일본에는 9%이지만 한국에는 전혀 없다. 아이누족 유전자인 D는 일본에서 30%에나 이르지만한국에는 3%에 못 미친다. 따라서 D는 일본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4. 북방으로 우회한 원시 몽골 유전자 대신에 한반도에는 3만 5천 년 전 아랄해에서 출발한 Y, F, K 그룹유전자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이는 한반도에 살았던 라후족 유전자로도 확인된다. 이 유전자들은 알타이를 거쳐 중국 황하를 지나왔는데, 황하 남북에 사는 약 20%인구가 K유전자를 가졌다. K나 F, Y 등은 중국을 거쳐 만주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온 것이 확인된다. 중국에도 F 유전자는 5% 이내로 적은데, 일찍 K로 변형을 일으켰던 것이다. Y, F, K와 뒤에 일어난 O그룹까지도 아직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모습과 다름없는 흑인의 피부색을 가졌었다. 이는 7000년 전의 양자강 하구 하모도 유골도 마찬가지로 흑인형(negroid)이었다.
5. K그룹이 시베리아에서 NO그룹을 발생하고 N그룹은 러시아를 지나 스칸디나비아로 가면서 백인이 된다. 시베리아의 NO그룹에서 O그룹(M175)이 35,000년 전에 발생하는데, O그룹은 그곳에서 P그룹을 발생시켜서 대부분의 유럽인의 조상이 되게 한다.
6. O그룹(M175)은 중앙아시아로부터 티벳에 들어와서 다시 동아시아의 세 방향으로 퍼졌다. 약 2만 년 전에 O그룹은 광동성 해안 지방에서 O1(M119)그룹을 발생시키고, 또 다른 O그룹은 우수리강, 흑룡강에 이르러서 O2 (P31)그룹을 발생시키고, 역시 또 다른 O그룹은 운남지방에서 O3(M122)그룹을 발생시켰다. 광동의 요족이 O3를 발생시켰을 가능성이 높은데 인도의 아리안족이나 드라비다족에게는 O3가 없다. 즉 드라비다족의 언어와 O3그룹의 언어는 유사한 것이 많지만 혈통적 관련은 적다.
7. O2는 북경 동북의 요녕성에서 중심이 되고 한반도에까지 들어왔고, O3는 중국 해안을 따라 한반도로 들어왔다. 중국은 O3(M122)의 전국적 확산을 신석기시대 쌀농사의 확산으로 추정해왔는데 사실과 다르다. O3의 일본까지 확산이 다른 북부 지역과의 확산과 별 차이가 없으므로 15,000년 전에 있었던 한반도와 일본 분리 이전에 O3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쌀농사와 관련없는 구석기시대 수렵족 O3의 확산으로 보인다.
8. 한반도 동북부의 O2그룹은 흑룡강에서 흙을 구워서 질그릇을 개발하였다. 이는 일본 북부에 16,000년된 유적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한반도 동북방의 아무르강 유역에서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질그릇의 개발은 씨앗 열매나 채소류의 소화력을 증가시켰다. 특히 사냥이 어려운 한겨울에 음식거리로 마른 곡물이 먹거리의 중심이 된다. 즉 질그릇의 발명이 자연 상태 곡물 채집과 농경 생산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는 컴퓨터의 발명이 정보산업을 일으킨 것과 마찬가지로 질그릇이 농업을 일으킨 것이다. O2그룹과 O3그룹은 한반도의 태백산맥을 경계로 하였을 것이다. 요동반도까지 한반도 서쪽이 주로 O3그룹이고, 태백산맥 동쪽과 길림성, 흑룡강성을 포함한 북부 지역이 O2그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9. 15,000전 한반도 충북 청원 소로리에서 쌀농사가 시작되었다. 야생 벼의 원산지는 중국, 인도 등일 것이지만 이를 처음으로 재배 경작한 것은 한반도인이다. 이때 한반도에서 쌀농사를 지은 종족의 주 유전자는 O3(O122)였고, 처음으로 도입된 농사는 한반도 신석기인의 인구폭발을 일으켰다. 인구폭발 와중에 O3e(O134)가 한반도에서 생겨나서 O3와 함께 한반도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세상으로 아직 농사가 확산되지 않았으니, 기존의 종족들은 대부분 과일 채집과 동물 사냥으로 살았다. 이무렵 O2그룹도 역시 농사 혁명으로 O2b그룹을 발생시켰는데 이들은 좀더 추운 지방의 작물들을 재배했을 것이다.
10. 12,700년 전 영거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천년 혹한기가 시작되고, 한반도의 쌀농사족은 기장쌀, 보리 등 혹한에 견디는 농사로 전환하거나, 쌀농사를 계속하기 위해 중국 전역으로, 특히 중국 남쪽 해안으로 이주하였다. 농사를 모르는 민족은 천년 혹한기 동안 사냥의 한계로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고, 대신에농사짓는 한민족은 더 많아져서 중국의 대부분 인종은 한반도에서 다시 남쪽으로 회귀한 O3와 한반도에서 발생한 O3e로 대체된다. 한반도에서 O3, O3e는 삼한족三韓族을 구성했다.
11. 한반도 북부와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에 산재해 있던 O2그룹은 한반도에서 일찍이 농사 기술을 배워서 만주 북부로 퍼졌다. O2는 북방 몽고족이 들어오기 전에 한반도 동부에서 O2b로 분지되고, 이들은 점차 세력을 넓혀서 요녕성에 남아있던 O3와 함께 예족穢族을 구성했다. (단, 이들 O2그룹과 O3그룹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4세기 무렵의 백제 전기 시대다.)
12. 천년 혹한기 끝에 단 수년 만에 급격한 기온 상승으로 인하여 11,600년 전부터 인류는 고원으로 피신하고 고원 문화가 발달한다.
<환단고기-삼성기>에 환인족의 선조인 "나반(那盤)"과 "아만(阿曼)"이 아이사타에서 만나 환인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는 환인국의 형성 전이다. "나반"의 "나"는 나르, 즉 태양의 의미를 가졌고 이는 쿠르드 언어에 남아있다. 이집트의 태양신은 "라"이다. 우리말에서는 "날. 낮"이 그 파생어다. 또한 드라비다어로서 누반은 기장쌀이다. 노란색의 어원이 태양 나일 것이고, 태양의 노란색과 건조 기후에 적합한 기장쌀의 노란색 때문에 기장쌀은 태양빛 곡물로서 이름을 누반이라고 했을 것이다. 한편 "아만"은 몽고어로서 "하나"라는 의미다. 첫 번째라는 뜻도 된다. 즉 나반과 아만의 만남은 O그룹의 드라비다어와 C그룹의 몽고어가 만난 것이고, 한반도에서 올라간 만주의 농사족이 시베리아의 수렵족 중에서 에웬키족과 만나 그들을 농사족으로 바꾼 것이다. 11,600년 전의 환인족 유전자는 한반도에서 발생한 O3e1이 된다.
13. 아만의 에벤키족의 유전자는 지역별로 세 종류가 있다. 시베리아-에벤키, 극동(오호츠크)-에벤키, 만주-에벤키 등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종족은 고대 유전자인 Y와 N그룹이 많이 남아있는 시베리아 에벤키로서 퉁구스라고도 불리웠다. O3e그룹의 나반이 드라비다어(당시 한반도 고어였다)를 사용하면서, 만주로부터 시베리아 에벤키족의 일부가 살던 "아이사타"에 들어가서, 기장쌀 농사를 가르치고, 그 결과로서 만주 에벤키족이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주에벤키가 탄생한 위치는 "아이사타 阿耳斯陀"라고 했는데, 중간의 이耳는 ㄹ 발음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본래 "알-사타" 라고 고려되며 이는 흥안령산맥과 바이칼호수 중간의 내몽고 우랑카이고원에 위치한 울리아스크(東烏珠穆沁旗縣)로 추정된다. 울리아스크는 흑인(negroid)에 의한 농경족 문화로 추정된다. 따라서 농경으로 인해 북방에서 상당한 인구 증가가 되고 당시 시베리아 몽골인중에서 주류로 성장하게 된다. 11600년부터 8200년 사이에 오랑캐고원에서 이루어진 환인족의 문화는 농경족과 수렵족 두 문화권의 결합으로 뛰어난 발전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흑색을 숭상하여 검은 칠을 남겼는데 옥조각에 입힌 광물성 흑칠의 비밀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14. 8,200년 전 200년 혹한이 찾아왔다. 오랑캐고원은 혹한 속에서 도저히 농사짓기에 부적당해서 환인족이 사방으로 흩어져간다. 이때 서남쪽 내몽고로 내려간 환인족은 내몽고 중심인 인산(陰山)에 자리잡아서 알유족(에벤키족의 옛이름)이 되고, 인산산맥에 암각화를 새기는 암각화 문화를 만드는데 이는 한반도 동남해안에도 흔적이 있다. 이때 알유족과 반대로 동남쪽 흥안령 산맥을 넘어 새한산(塞罕山 = 혹은 서한산西罕山)으로 진출한 것이 환인족의 환국이다. 반면에 남쪽 난하 지역으로 진출한 산융족(험윤)도 있다.
15. 꾸준한 기온 상승으로 6,000년 전 지구의 해수면이 오늘날과 같아졌다. 2만 년 전에 비해 100m 이상 높아진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기후의 온난화로 북방 시베리아 진출이 쉬워졌다. 이때 C3그룹 유전자를 가진 바이칼의 브리야트족이 시라무렌강 유역에 도래한다. 환인의 서자라고 표현된 환웅은 원시 몽고족의 방계민족인 것이고 브리야트족은 우리말로 부여족인 것이다. 배달국, 밝은 땅에 살던 이들 문화의 특징은 붉은 색깔이다. 이전까지 빗살무늬 토기와 달리 홍산문화는 붉은 색을 칠한 채도문화가 가장 큰 특징이다. 붉은 칠과 울란우데(적봉), 울란바토르, chita赤塔 등은 모두 붉은 색을 숭상하는 지명이다.
16. 한편 산동반도의 임치(臨淄)에서 역사적인 연대에 따른 유전자분석이 있었다. 즉 2,500년 전 유골의 유전자와 2,000년 전의 유골의 유전자, 현대인의 유전자를 일본 도쿄대학에서 분석한 것이다. 2500년 전은 치우의 후손인 용산문화 이후 제나라 지배하의 임치이나, 임치는 치하(淄河)변으로서 4,800년 전의 치우 후손과 밀접하다. BC1,236년 단군 색불루때에 포고씨를 청주 땅 엄에 세웠다는 기록도 있고, BC461년 단군 물리 때에 박고씨를 청주에 세워 엄국(고엄국은 산동곡부曲阜에 있었다)이라고 하였었다는 기록도 있다. 단군 색불루 이후 환웅족 부여인이 오르도스 고원에 진출하여, 환인족 알유인과 스키타이 금속문화를 일으켰고, 이 청동 예술 문화가 스키타이인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었다. 당시 <사기>에는 양성(凉城)의 적적인(赤翟人)과 중산국(中山國)의 백적인(白翟人)들이 있었으니 이들도 관련된다. 2000년 전은 한나라 시대이고 진시황의 통일 이후로서 동이인東夷人들을 많이 북쪽과 동쪽으로 물리치고 제나라 사람들이 살았다고 보여 진다. 연구 결과는 2500년 전의 임치인(치우 후손)은 유럽인과 같은 유전자를 가졌고, 2000년 전의 임치인은 위구르인과 키르키즈인의 중간이었다. 그리고 현재 임치인은 몽골인과 한국인의 중간이었다. 즉 4888년 전의 치우나 그 후손인 2400년 전의 청구인은 검은 얼굴의 유럽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용산문화의 특징은 검은 질그릇의 흑도문화黑陶文化이기 때문이다. 또한 청동기물의 수면문(獸面文)이 특징인데 이는 아랍인의 얼굴을 과장한 것일 수 있다. 신라 때 아랍인 처용의 얼굴 가면으로 귀신을 쫓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중국 최초로 말을 기른 것이다. 치우족은 현재 만주에 남아있는 석백족(sibe)의 선조로 고려된다. 석백족은 러시아인에 많은 N그룹과 유럽인에 나타나는 P그룹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석백?伯은 지비犀毗, 선비?卑(이것도 시비로 읽어야 한다. 흉노의 왕칭인 선우도 치우에서 유래한 것이니 시우로 읽어야 옳다.), 시비矢比, 등 다양하게 표기를 하며 하이라얼의 실위산 아래 사는 부족도 있다. 이는 모두 치우의 발음과 관련된다. 석백족은 사내가 태어나면, 활과 화살을 매단 새끼줄을 대문에 거는 풍습이 있고, 어려서부터 말타기를 가리킨다. 또한 10세에 완전한 활을 주고, 평생 활과 화살을 신물로 여겨서 남녀가 결연할 때의 매개로 삼기도 한다. 이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데 이는 치우의 구려(九黎=句麗=狗) 후손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백족은 특이하게 정월 16일을 말흑절(抹黑節)이라고 하는데 악귀를 쫓고 밀의 풍년을 위해서 뺨에 검은 칠을 하는 명절(抹黑節)이다. 솥바닥의 검은 그을음을 쓰기도 한다. 대문 앞 큰 길에 검은 재를 뿌리기도 한다. 그 외 존경을 위해 노인의 이마에 검은 점을 찍기도 한다. 즉 검은 것을 숭상하는 것이 치우 용산문화의 유물이다. 여러 가지로 석백족은 치우의 후손으로 고려되는데 현재 치우를 전혀 생각지 못하고 대신 관우를 섬기고 있다. 현재 치우를 섬기는 것은 묘족(苗族)이다. 묘족이 한나라 이전에 임치에 살았다고 추정된다. 치우가 황제를 꺾으면서 남하하여 산동반도 임치에서 묘족을 배경으로 황하 동부의 하북과 양자강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것이다. 』
6.8 이홍규의 《한국인의 기원》
이홍규는 《한국인의 기원》 맺음말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고 있다.
『요하문명은 알타이어의 고향이고, 우리말이 알타이어에서 나온 언어라면, 우리 민족의 기원 문제는 결국 5만 5,000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동으로 이동하여 8,000년 전 요하문명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가로 귀결된다. 물론 이 문명이 나타나기 전 요하 부근, 만주, 한반도, 중국 대륙에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위와 같이 탐색해 온 고고학적, 유전학적, 언어학적 관찰들을 바탕으로 하여 아래와 같은 추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①가장 먼저 이 지역에 살았던 인류는 당연히 북경인 계열의 직립인이었다.
②이후 아프리카를 떠나 동남아를 통해 이동해 온 신인류가 이 지역으로 이동해 들어왔다. 이들은 이미 네안데르탈인과의 혼혈을 통해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선조와는 다른 체질을 갖고 있었다. Y염색체 D형을 가진 사람들은 최소 1만 5,000년 이전, C형을 가진 사람들은 1만 2,000년 이전에 도착하였다. 이 신인류는 직립인을 대체했으며, 일부는 아마 직립인과 혼혈을 일으켜 덴-다익어를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③약 3만 5,000년~4만 년 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현대적 모습의 현생인류’는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제3의 인류(데니소바인)와 혼혈을 일으키고, ‘현대적 행동양식의 현생인류’가 되어 후기구석기 문화를 만든다. 마이크로세팔린-D 유전형은 이때 얻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④시베리아에 고립돼 있던 ‘현대적 행동양식의 현생인류’로부터 ‘현대적 두개골을 가진 현생인류’가 진화했다. 중앙아시아에서 형성된 Y염색체 K-NOP형을 가진 사람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처음 북방어(보레안어)를 사용했고, 동쪽에 살던 사람들이 서서히 우랄-알타이어의 원형을 발달시켰을 것이다. 그들의 친척뻘인 P, NO, Q, R등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럽, 시베리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이즈음 바이칼 호 부근에는 남방을 통해 이동해 온 C형 Y염색체 유전형을 가진 사람과 B, C, D 등의 미토콘드리아 DNA 유전형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으나 더 연구해야 할 숙제이다.
⑤2만 2,000~3만 4,000년 전 빙하기가 최고점에 이른 가장 추웠던 시기에 바이칼 호 부근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몽골리안의 원류가 네오데니 현상을 통해 진화해 나온다. 이 사람들은 Y염색체 유전형 O를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강풍과 추위에 적응하면서 체열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다부지고 뭉툭한 체형을 발달시키고, 찬바람에 대처하기 위해 눈은 작고 가늘게 찢어지고, 추위로부터 안구를 보호하기 위해 ‘몽고주름(눈꺼풀의 두 겹 지방층)’이 발달된다. 몸이 얼어붙지 않게 하기 위해 체모의 숫자는 줄어든다.
⑥약 1만 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바이칼 호 부근에 있던 원-몽골리안들은 남하하여 앞서 도착해 살고 있던 남방계 사람들과 섞인다. 이 사람들은 O형의 Y염색체 유전형을 가지고 있었고, A, N9, X등의 미토콘드리아 DNA 유전형을 가진 여성들을 동반하였다.
⑦요하 부근으로 남하한 원-몽골리안들은 이 지역에 들어와 살고 있던 남방계 사람들과 섞이면서 새로운 문명을 발달시켰다. 요하문명이 나타나고, 알타이어가 형성된다.
⑧원-몽골리안들의 남하는 계속되어 덴-코카시안어를 쓰던 남방계 사람들과 섞이면서 중국어와 앙소문화 등 황하문명을 이루는데 중심적 역할을 한다.
⑨동남아시아와 남방계 중국인은 Y염색체 유전형 O3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데, 바이칼 호 부근에서 형성된 O*형 사람들의 일부가 더 남쪽으로 내려가 현지인들과 혼혈을 일으키며 홀로세 동안 크게 늘어난 결과로 해석된다.
⑩Y염색체 유전형 O2b형을 가진 남자들이 우리나라, 만주, 일본에 많이 살고 있으며, 요하문명의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도 많이 살고 있고, 인도네시아, 미크로네시아, 태국, 베트남 등에도 상당수 살고 있다. 한편 중국의 요녕성, 산동반도 사람들과 우리나라, 일본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DNA 유전형 분포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여성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현지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몽골리안은 바이칼 지역에서 그 원형이 잉태되고, 다양한 루트로 한반도, 중국 북부, 유라시아, 북아메리카로 이동해 간 사람들로서, 요하 부근에서 남방계 사람들과 섞이면서 동아시아 최초의 요하문명을 만들었다. 이 사람들은 알타이어를 사용했고, 한국인의 원형이자 우리 문화의 원형을 만들었다. 한반도를 지나 바다를 건너간 사람들은 일본 문화를 만들었고,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남방계 사람들과 함께 중국 문명을 만드는 주류 세력이 되었으며, 이들은 시노-티베트어를 사용하면서 몽골리안의 문화적 정체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따뜻한 현지 기후와 현지인들에 동화되면서 원-몽골리안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많이 남기지 못하였다.(출처; 이홍규, 한국인의 기원, 255쪽~258쪽)
6.9 신용하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2019년 5월 15일 문화일보 기사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① 인류 초기 ‘고조선문명’의 발견
; 동굴 많은 한반도서 빙하기 견딘 인류, ‘동아시아 문명’ 창조하다〉
▲ 최후 빙기 때 동아시아 해안선과 구석기인의 이동 방향.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졌고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다. 고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유일한 동해안이었으며,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이동해 오다가 바다에 막혀 정착한 종착지였다. 신용하 교수 제공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① 인류 초기 ‘고조선문명’의 발견
해 가장 먼저 뜨는 동아시아로 인류 선구자들 대장정끝 정착
옛 한반도 한강·대동강 일대 사람들 모여드는 곳으로 부상
농업 발달·인구밀집·지적집단 세 조건 갖춘 한반도 문명 발생
『우리는 학교에서 인류 최초의 독립 문명으로서 ① 수메르 문명(약 5500년 전) ② 이집트 문명(약 5100년 전) ③ 인더스 문명(약 4200년 전) ④ 고중국(황하) 문명(3600년 전)의 4대 문명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초기에 독립 문명으로서 이 4대 문명이 주변으로 파급돼 그 후 인류 고대 위성(衛星) 문명들을 형성·발전시켜서 인류가 문명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낡고 너무 부족한 학설이다. 유라시아 대륙 가장 동쪽에, 고중국 문명 형성의 기원이 된 것으로, ‘고조선 문명’(약 5000년 전)이라는 거대 문명이 하나 더 있었다. 이것은 태양이 가장 먼저 솟는 땅을 찾아 동방 끝으로 이동해 왔다가 정착한 고(古) 한반도 출신 신석기 말기·고대 초기인들이 신석기 시대 ① 한강 문화 ② 대동강 문화 ③ 요하(遼河) 문화를 하나의 인과적 체계로 묶어서 규모가 큰 찬란한 문명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사를 바꿔 써야 할 새로운 문명이다. 이것이 ‘고조선 문명’이다. 토인비도 6개의 유산된 초기 문명이 더 있었다고 유보해 뒀었다. 이번 문화일보 연재에서는 이 새 인류 문명을 탐구해 나가기로 한다.
고인류학자들의 통설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 종(種)은 약 5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해 진화하면서 먼저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약 250만 년 전에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손 쓴 사람(homo habilis)’이 됐으며, 약 170만 년 전에 꼿꼿하게 걷게 된 ‘곧선사람(homo erectus, 原人)’이 됐고, 약 20만 년 전에 돌을 깨 불을 사용하는 ‘슬기 사람(homo sapiens)’이 됐으며, 약 10만 년 전에는 지혜가 더욱 발전한 ‘슬기슬기 사람(homo sapiens sapiens, 新人)’도 출현하게 됐다. 이 ‘슬기슬기 사람’의 두뇌 용량이나 사고 능력은 현대인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돼 있다.
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건너와서 각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곧선사람’ 단계부터다. 그러나 활발한 이동은 ‘슬기 사람’과 ‘슬기슬기 사람’ 단계라고 설명되고 있다. 진화고고학에서는 ‘곧선 사람’부터 이들을 모두 합쳐서 ‘구석기인’이라고 호칭한다. 이 시기는 지구 전체가 더워서 시베리아에서도 아열대 식물 열매가 열리고 매머드와 공룡이 살았다. 어디에서나 식료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구석기인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인간 무리(bands)를 이뤄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방향으로 분산 이동했다.
구석기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맹수들과 함께 매일 찾아오는 밤의 어둠이었다. 그러므로 가장 용기 있고 호기심 많은 구석기인 무리는 태양이 맨 먼저 솟아올라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밝은(光明) 아침이 먼저 찾아오는 해 뜨는 동방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 형세를 이루게 됐다. 고한반도와 연해주는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이고 그 동쪽은 깊은 태평양 바다(동해와 오호츠크해)다. 그러므로 이곳은 해(태양) 뜨는 동쪽을 향해 수만, 수십만 년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해 온 구석기인 무리의 인류사적 대장정이 누적된 ‘종착역’(terminal) 같은 지역이었다.
유라시아 대륙 동단 고한반도와 연해주 지역에 구석기인이 처음 도착한 것은 100만∼70만 년 전 무렵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으로, 평안남도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유적(약 100만∼70만 년 전)과 절골 유적(약 93만 년 전), 충북 단양군 도담리 금굴 유적(약 70만 년 전)이 이미 발굴돼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한반도·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발굴 보고된 주요 구석기 유적이 50개가 넘는다.
그러나 약 5만3000년 전 구석기 인류에게 대재앙이 닥쳐왔다. 지구 기후의 급격한 변화로 혹한의 ‘최후 빙기’가 닥쳐온 것이다. 태양광선의 95% 이상이 먼지에 가려져 5% 이하만 지구 표면에 닿았다. 이 시기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위 40도 이북 지역은 긴 겨울에는 모두 얼어붙은 동토(凍土)가 돼 생물이 생존할 수 없었다. 예컨대 우랄 지역의 1월 평균 온도는 영하 30도였다. 수마트라 섬 적도의 평균 온도는 8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유라시아 대륙 구석기인들은 북위 40도 이남의 생존 가능한, 따뜻한 지역의 동굴을 찾아 이동한 소수 구석기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멸했다.
동아시아에서도 최후 빙기에 북위 40도 이북 지역에서는 인류가 상주(常住)하지 못했다. 물론 여름에는 사냥감을 뒤쫓아 북위 40도 이북에서 사냥하면서 계절적 일시 거주는 했다. 그러나 북위 40도 이북에 집단 상주지를 형성하고 문명을 만들지는 못했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선은 한반도 신의주와 중국 베이징(北京)을 지나간다. 그러므로 고한반도의 압록강 최하류와 고중국의 베이징 이북은 최후 빙기 약 4만 년 넘게 인류가 상주할 수 없는 얼어붙은 동토였다. 그러므로 한국민족이 시베리아 고(古)아시아족에서 기원했다거나, 톈산산맥 또는 바이칼 호수에서 기원해 내려왔다는 학설은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절의 낡은 학설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 이남 지역에서 구석기인들이 혹한을 피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가장 많은 지역이 바로 산지가 비교적 많은 고한반도였다. 한반도의 자연 동굴 총수의 90% 이상이 석회암 동굴이다. 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카르스트(Karst) 지형 석회암 지대는 한반도 중부 차령산맥·소백산맥 일대에 가장 잘 발달해 있다. 이 지역이 고한반도 ‘제1동굴지대’다. 그다음이 멸악산맥 일대의 ‘제2동굴지대’다. 중국에서는 남방 양쯔강 유역과 광시(廣西)성·구이저우(貴州)성·윈난(雲南)성 지역에 가야 석회암 동굴 지대가 나온다. 고한반도는 최후 빙기 겨울철 동토에 연접한 북방한계선의 매우 추운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동아시아 최대 석회암 동굴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에, 기존 고한반도의 구석기인과 유라시아 대륙 동남부 해안을 따라 남방에서 꾸준히 이동해 올라온 구석기 신인(슬기슬기 사람)이 합쳐져서, 이 기간에도 종착지 고한반도는 세계 인구밀집 지역의 하나가 됐다.
또한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져 고중국 관내와 이어졌고, 대만과 중국 본토와도 이어졌으며,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기 때문에, 고한반도는 전체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 유일한 동해안이었다. 최후 빙기에도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꾸준하게 이동해 들어오다가 바다에 막혀 더 동쪽으로 갈 수 없어서 정착하는 종착지가 고한반도였다.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인류는 최후 빙기의 대재난 시대를 견뎌내고 새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지구 주변의 먼지가 걷혀 태양광선이 모두 땅에 닿으면서 기후가 대체로 오늘날처럼 온난해졌다. 지구 기후가 온난화되자 유라시아 대륙의 동토에 인접해 있던 구석기인들은 모두 동굴에서 나와 부근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새로운 용구로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만들어 사냥·어로·식료 채집을 하면서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구석기인이 신석기인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된 것은 신석기인들의 농업경작(agriculture) 시작이었다. 종래 사냥과 채집으로 한 가족을 부양하는 데 수천 에이커의 토지가 필요했던 데 비해, 농경을 시작하면서 약 25에이커의 토지로 충분해졌다. 그러나 농업경작이 어느 곳에서나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비옥한 토지, 온난한 기후, 풍부한 물과 함께 야생종(野生種)을 인공적으로 재배하고 육성하려는 의지를 가진 현명한 인간 집단이 필요했다. 농업경작은 신석기인을 특정 지역에 장기간 정착시켰다. 인간의 유랑 시대를 정착 시대로 바꾼 것이다. 농경 마을과 읍락이 형성되고 이것은 대대로 전승됐다. 신석기인의 토지에 결부된 농업경작의 장기 정착은 인류 사이 수천 개의 상호 소통되지 않는 언어족을 만들어 냈다.
사회학적으로 신석기 농업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혁명적 사회변동을 가져왔다. 식량 생산 공급의 잉여 증가는 인구 증가를 결과했다.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분배 과정에서 갈등과 투쟁을 자주 발생시켰다. 갈등과 투쟁을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위임받은 우두머리와 그 집단이 출현했다. 가족들이 집합해 씨족이 형성되고, 씨족들이 통합해 부족이 형성됐다. 부족들 사이에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면, 패배한 부족의 포로는 노예가 되고 승리한 부족장과 그의 무장들은 노예를 소유하는 세습 귀족이 돼, 신분과 계급이 발생했다. 부족장들은 다른 부족들을 통합해 대부족장 또는 군장(chief)이 되고 준(準)국가인 군장사회(chiefdom)를 형성했다. 강력한 군장은 다른 군장을 통합해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
또한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농업에 통합돼 있던 수공업을 분리시켰고,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교환을 중심으로 한 상업이 분화됐다. 수공업의 발전으로 강한 생산용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연동과 주석의 합금인 청동기를 발명·제조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철기 제조가 시작됐다. 이 최초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바로 신석기 농업혁명, 청동기와 철기 제조, 고대 국가의 형성, 신앙의 통일, 언어의 통일과 문자 발명, 초기 과학과 문화예술의 성립 발전 등이었다.
따라서 인류 최초의 문명은 말기 신석기인이 거주한 모든 지역에서 균등하게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일찍 농업경작이 성립 발전하고, 인구가 밀집되고, 지적 성능을 활용한 과학적 수공업 기술이 성립되고, 고대 국가가 형성된 특정 지역에서 형성되고 탄생했다. 이 최초의 특정 지역 구심점이 유라시아 대륙의 두 곳에 뚜렷이 출현했다. 그 하나가 동방 고한반도의 한강과 대동강 유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고조선 문명’이다. 다른 하나가 서방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초승달 지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51501032912000001)
6.10 김찬곤의 《차근차근 한국미술사》
▲ 기원전 1만 4천 년 전 한반도와 중국, 일본은 이렇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동해는 바다가 아니고 커다란 ‘호수’였다. 위 지도에서 ‘후기 구석기인(또는 초기 신석기인)’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강이 흘러 바다와 만나는 지점(빨간 동그라미)이다. 이곳은 ‘갯벌’이 발달해 먹을 것이 넘쳐났다. 하지만 이때는 홍수가 잦았던 홍적세 말기(그도 홍수가 가장 심했던 적도 지방), 거기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는 간빙기였다. 유럽 고고학자들은 조그만 호수 흑해에 물에 찰 때 하루에 120미터씩 뭍이 잠겼다고 한다. 아마 이곳 갯벌 지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구석기인들은 서둘러 남쪽 베트남, 동쪽 일본, 북쪽 제주도로 몸을 피했을 것이다. 거기서 한 무리는 다시 부산 동삼동 쪽으로, 다른 무리는 지금의 서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동해(그때는 호수) 서쪽에 살았던 구석기인(또는 초기 신석기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서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되었다. 같은 빗살무늬토기라 하더라도 제주도, 서남해안, 암사동, 동북 지역 토기의 무늬가 다른 것은 바로 이 같은 사정 때문이다. ⓒ 일본고고학
『세계 신석기인들은 농사를 짓기 전부터 비와 구름을 그릇에 새겼다. 그런데 세계 신석기 그릇 가운데 서울 암사동 신석기인처럼 하늘 속 물 층을 〈사진30-33〉처럼 섬세하게 새긴 그릇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구석기 홍적세 때 겪었던 물과 홍수에 대한 공포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의 황해, 신석기 이전에는 뭍이었던 중국 산둥반도와 인천 사이 어디쯤에 살았던 구석기인이었을지 모른다.
특히 암사동 신석기인의 '하늘 속 통로'는 황해북도 지탑리와 함경북도 서포항 빗살무늬토기에서만 볼 수 있고, 한강 아래 신석기 유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충분히 하나의 가설로 세울 수 있다. 구석기 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시작될 때 지금은 바다이지만 서쪽 육지가 물에 잠기자 한 무리는 중국 동북 쪽 랴오허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다른 한 무리는 동쪽 한반도 암사동으로 삶터를 옮겼을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황해북도 지탑리로, 거기서 다시 위로 함경북도 서포항까지 올라갔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5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