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환국과 신석기문화(25)

 

6. 25 궁산문화(弓山文化); 6000년 전~5000년 전

 

북한에서 1950년 온천 궁산유적을 처음 발굴한 이후 이 지역의 신석기시대 물질문화양상에 대하여 명명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1957년 봉산 지탑리유적의 발굴에서 궁산문화는 전기와 후기(1기와 2)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평양 금탄리유적 발굴보고서에서 금탄리를 1·2 문화층으로 나누어보고 이를 기존의 궁산문화에 후행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궁산문화는 4기의 편년 틀을 갖추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금탄리 1·2 문화층을 궁산문화속에 포함시키면서 궁산문화 4기 편년체제가 공식화된다. 그 이후 평양 남경유적의 발굴(19791981)을 통해 남경 1기와 2기를 설정함으로써 궁산 4기를 2단계로 세분하게 되어, 현재 궁산문화는 5기의 편년체제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북한에서는 고고문화의 설정을 체계화시키면서 청천강 이남 및 남한 전역을 포함하는 둥근밑 토기문화를 운하문화라는 하나의 문화로 설정하고 궁산문화는 그 하부의 지방 유형으로 파악하고 있다.

 

궁산 1기 유적으로는 궁산유적의 일부와 지탑리유적 1지구 1호 주거지가 대표적이다. 이 단계는 타래문 등의 곡선계 문양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순수한 3부위 구분시문토기를 중심으로 한다. 구연부 문양은 점열문이 많으며 소수의 단사선문이 있다. 동체부 문양은 종주어골문으로 대표되며, 기타 능형문, 횡주어골문도 소량 확인된다. 평저발형토기에는 구연부 점열문 아래에 능형문이나 점열파상문을 부가문으로 시문한 예들도 확인된다. 저부 문양은 사선대문, 횡주어골문이 기본이 된다. 전체적으로 문양이 매우 정연하게 시문되며, 평저발형토기는 동체부 이하가 무문으로 남겨진 예들이 많은 반면 첨저 심발형토기는 3부위 시문이 엄격하게 잘 지켜졌다. 기종은 크게 심발과 발, 무경호, 뚜껑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형 발형토기는 주로 평저인 반면 나머지 기종은 첨·원저를 이루고 있다.

 

궁산2기는 지탑리유적 2지구 2호 및 3호 주거지 조사성과를 토대로 1기와 분리되었으며 봉산 마산리유적 조사를 통해 그 양상이 더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궁산유적의 일부, 온천 용반리유적의 일부, 청단 소정리유적 2지점 1, 3지점 1·2, 인산군 주암리유적 등이 이 단계에 해당하는 유적들이다. 이 단계의 가장 큰 특징은 타래문, 중호문으로 대표되는 곡선계 점열문의 등장이다. 기본적인 시문규칙은 궁산 1기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여 구연문으로는 여전히 점열문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구연문과 동체문 사이에 부가문(또는 어깨문)이 시문되는 사례가 많아지며 부가문으로는 주로 중호문이 많다. 동체부에는 새로이 타래문이 단독으로 시문되기도 하며 원저발의 경우는 중호문이 동체문이 되기도 한다. 동체부의 기본문양은 여전히 종주어골문이다. 그러나 궁산1기의 종주어골문에 비해 상하로 압축된 형태의 종주어골문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저부 문양은 사선대문과 횡주어골문이 주로 시문되어 이전 단계와 유사하다. 궁산2기의 기종구성은 1기와 마찬가지로 심발과 발, 호로 크게 대별된다.

 

그런데, 지탑리유적 1지구에서는 주거지 퇴적층과 주거지 밖 유물로 보고된 소위 변형빗살무늬토기라고 하는 일군의 토기가 있다. 이 토기들은 지탑리유적 2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기차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북한에서는 기본적으로 궁산 3기 단계의 유물로 편년하고 있다. 그러나 한영희, 미야모토[宮本一夫]는 궁산 1기와 2기의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어 차이가 있다.

 

궁산 3기는 금탄리유적 조사를 통해 금탄리 1문화층과 2문화층이 설정되고 난 후, 이들이 궁산문화 내로 공식적으로 편입되면서 설정되었다. 주요 유적으로는 금탄리 1문화층, 평안남도 증산 용덕리, 덕천군 남양리, 영변 세죽리 7호 주거지 등을 들 수 있으며, 황해도에도 청룡리, 반월동, 소정리 1지점 등의 유적이 있다. 궁산3기 토기는 금탄리 1식토기로 불리며 기본적으로 3부위 구분시문이 사라지고 기면에 23종의 문양을 교대로 반복시문하는 문양패턴이 주류를 이룬다.

 

주요 문양은 기면전체를 몇 개의 구획대로 나누는 구획문이라 할 수 있는데, 다치의 횡선문 또는 다치압날문이 있고, 그 내부를 충진하는 문양으로 삼각집선문이 주로 사용되며 기타 횡주어골문, 능형집선문 등도 보인다. 저부에는 횡주어골문이 시문되는 예가 많다. 호형토기에는 전단계의 특징을 잇는 것으로 보이는 침선화한 타래문이 확인된다.

 

기종은 크게 심발형과 호형토기로 나뉜다. 앞 단계까지 존재했던 평저발형토기가 보이지 않는데, 유적 수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현상으로 생각된다. 심발형토기는 내만하고 배가 부른 기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태토에 활석이 많이 첨가되는 것도 이 단계의 큰 특징이다. 이 단계, 이 지역의 토기가 주변의 넓은 지역 즉 한강유역, 금강하구, 강원 영동지역 등에서 소량씩 확인된다.

 

궁산 4기는 금탄리 2문화층, 금탄리2식토기로 대표된다. 주요한 유적으로는 금탄리유적, 남경유적, 평양 장촌유적, 표대유적 등을 들 수 있다. 금탄리2식토기의 기본적인 특징은 전면 또는 저부를 제외한 전면에 횡주어골문을 시문하는 동일계토기, 띠대문, 1열의 융기문 등을 들 수 있고, 기형상에서 외반구연이 많아지며 배가 부르고 저부가 원저화하는 경향이 많아지는 특징을 들 수 있다. 또한 무문양토기가 현저하게 많아지는 현상도 이 단계에 두드러진다. 남경유적의 조사를 계기로 남경1기와 2기라는 2개의 소단계로 세분되었다. 남경 1기는 주로 활석질태토로 2기와 구분된다. 기종은 여전히 심발형, 발형, 호형토기로 나눌 수 있다. 심발형토기에는 저장용으로 생각되는 초대형의 토기가 두드러진다. 활석 첨가 태토가 이 단계의 이른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사라지고 모래질 태토로 바뀌게 된다.

 

궁산문화의 주거지는 시기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궁산 1·2기의 주거지는 지탑리유적 1지구 1호주거지, 2지구 2·3호 주거지, 궁산유적의 예를 볼 때 방형 및 원형 평면이 기본이다. 내부시설로는 주거지 중앙에 위석식의 노지가 있으며, 기둥배치는 일관되지는 않으나 기본적으로 4주식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 주거지 내부시설 중 특이한 것은 노지 근처에 설치된 토기 저장시설(?)이다. 대형토기의 저부를 떼어내고 거꾸로 주거지 바닥에 박아 넣은 시설인데, 이 시설에 대해서는 저장시설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나 구체적으로 어떤 용도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궁산 1기부터 보이며 궁산 3기의 예는 아직 없지만 궁산 4기에도 보이기 때문에 궁산문화 전 기간을 통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외의 시설로는 반원상으로 돌출한 출입시설이 지탑리와 마산리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궁산 3기가 되면 금탄리나 남양리, 용덕리 유적에서 보듯이 새로이 장방형주거지가 등장한다. 내부시설 중 노지는 기본적으로 수혈식이 사용되는데, 주거지의 정중앙에서 벗어나 단벽 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평면형은 원형 또는 ()방형이며 노지 주위를 점토로 돌리거나 바닥에 점토를 바른 예가 확인된다. 이러한 노지형태는 궁산4기로 이어지게 된다. 궁산 4기의 주거지는 크게 2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형태는 방형 평면 주거지로 주공이나 노지는 잘 확인되지 않으나 위석식 노지가 확인되기도 한다. 주로 소형이다(금탄리 5호 주거지, 남경 37호 주거지 등). 다른 한 형태는 장방형 평면에 긴 복도식 출입구를 가진 주거지로 내부에는 중앙에 ()방형 노지가 있는 형태이다(남경 12호 주거지, 소정리 1·2지점). 이러한 주거지 중에는 2단 굴광을 한 예도 보인다. 남경유적 31호 주거지는 2단 굴광에 내부공간은 대형 장방형 평면을 하고 있으나 복도식 출입시설은 보이지 않는다.

 

궁산문화의 주거지는 이와 같은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원형 또는 방형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변화하는 양상은 주변지역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강 이남지역에 방형계 주거지가 궁산 2·3·4기 단계에서도 크게 유행하는데 반해 평안남도 황해지역은 궁산3기 단계부터 장방형주거지가 등장하여 궁산4기 단계에는 장방형주거지가 유행하는 것은 차이점이라 하겠다. 또한 현재까지 자료로 보는 한 후기 단계에 이르기까지 하천변 충적지가 주요한 입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도 주변지역과 다른 점이다. 주변지역에서는 후기로 가면서 구릉상 입지가 현저해지기 때문이다.(임상택)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 고고학 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539)

 

 

6.25.1 온천 궁산유적 6000년 전~5000년 전(BC 4000~BC 3000)

 

북한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마을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

 

1950년에 북한의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고고학부에서 발굴하여 움집 5기와 6개의 구덩을 찾았다. 집자리는 대개 원형이며 바닥은 찰흙으로 다졌고 화덕爐址과 기둥구멍이 드러났다. 화덕 곁에서는 밑창을 떼어내고 거꾸로 박아놓은 큰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 속에 녹색 염토가 굳어 있는 것은 유기물이 썩은 것으로 보인다. 즉 저장을 위한 움이었을 것이다.

 

광량만에 닿은 벌판의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는 해발 100m 미만의 구릉 가운데에는 궁산마을에 접한 2개의 언덕이 있다. 이 중 남쪽의 해발 20m의 것을 소궁산이라고 한다. 유적은 이 소궁산의 동남쪽으로 향한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1호 집자리는 120130깊이의 둥근 형태로 지름은 5.65.8m이다. 테두리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남아 있는 기둥구멍은 모두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원추형 집으로 판단된다. 바닥은 단단하게 다졌다. 집자리 중앙부에는 지름 8090의 원형에 가까운 30깊이의 화덕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깨진 판돌조각을 올려 놓았다.

 

3호 집자리는 제1호에서 서북쪽으로 약 50m 거리에 있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표에서 120130깊이의 풍화된 암반층에 있었고 화덕자리가 있었다. 4호 집자리는 밑테두리 지름 5.25.5m, 윗테두리 지름 약 6.2m로 불규칙하였다. 깊이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점점 얕아져서 남쪽 끝은 55였으나 남쪽 일부가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었다.

 

바닥은 5두께로 진흙으로 다졌고, 중앙 부분에 지름 약 80, 길이 약 20규모의 화덕이 있었고 안은 재로 가득 차 있었다. 화덕 옆에는 토기가 거꾸로 놓여 있고 밑부분은 없어져 있었다. 이 토기 안에는 조개껍데기와 생선뼈 등이 담겨 있었고 판돌로 덮여 있었다.

 

2호 집자리는 제4호 집자리가 폐기되고 난 뒤에 퇴적된 조개껍데기를 들어내고 마련된 것이다. 깊이는 약 70에 이르나 파괴되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남북 85, 동서 75규모의 화덕이 있었고 그 둘레는 진흙으로 테두리를 만들었다.

 

5호 집자리는 제2호 집자리의 동남쪽 약 200m 거리에 있었다. 긴축長軸을 동북-서남선상에 두고 있는 부정형 원형이다. 중앙부의 길이 5.2m, 동북쪽 너비 2.9m, 서남쪽 너비 4m이다. 동남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는 화덕은 남북 약 50, 동서 약 70, 중앙부 길이 약 35이다.

 

출토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편·민무늬토기편·돌촉石鏃·돌창편石槍片·그물추漁網錘·갈돌·돌괭이石鋤·돌도끼石斧·돌대패·돌끌石鑿·숫돌砥石·뼈송곳骨錐·뼈바늘骨針등 다수가 있다. 이 유적은 유구 및 출토유물을 통해볼 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시기를 달리하는 주거지유적임이 분명하다.

 

이 유적은 서해안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며 이곳의 문화상을 궁산문화라 부른다. 1·3·4호 집자리는 궁산문화 1기로 BC 4000년 기에 해당하며, 2·5호 집자리는 궁산문화 3기로서 BC 3000년 기 중반으로 편년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용강궁산리유적(龍岡弓山里遺蹟))]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A%A9%EA%B0%95%EA%B6%81%EC%82%B0%EB%A6%AC%EC%9C%A0%EC%A0%81&ridx=0&tot=4341

 

6.25.2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유적; 6000년 전~ 5500년 전(BC4000BC3500)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에 위치한다. 주변으로는 서흥천이 흐르고 있으며 유명한 지탑리토성이 위치한 곳이다. 지탑리유적은 1954년 지탑리토성을 지표조사하는 과정에서 시대를 달리하는 유물을 확인한 후 1957년에 발굴조사 하였다. 지탑리유적은 크게 I 지구와 지구로 나뉘는데, I 지구는 지탑리토성 내 동북모서리 부근에 위치하며, 지구는 I지구로부터 동남방향으로 약 750m 떨어진 지점의 반전차 참호가 굴착된 곳을 선정하여 발굴조사 하였다. I 지구는 1957413일부터 56일에 걸쳐 발굴하였으며 층위단면 조사를 위해 522일에 하루 더 조사하였다. I 지구에서는 8×6m의 구획을 3개 굴착하였는데, 신석기시대 주거지 1(1호주거지), 고대의 건축유구인 주춧돌을 확인하였다. 지구에서는 8×6m의 구획을 6개 굴착하였는데, 신석기시대 주거지 2(2·3호 주거지) 및 파괴된 주거지 1, 팽이형토기 관련 문화층을 조사하였다.

 

지탑리유적 I지구의 층위는 표토층-(중세문화층)-고대문화층-원시문화층으로 구분된다. 고대문화층(5060)에서는 주춧돌과 벽돌무지, 돌무지, 다량의 기와 및 화분형토기, 철재(鐵滓) 등이 출토되었다. 원시문화층(2030)은 사질양토층으로 1호주거지(G1)가 조사된 지점에서는 주거지퇴적층(사질점토층)-점토층-바닥층(검은 재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께 10의 점토층은 주거지가 화재로 폐기되는 과정에서 지붕에 덮였던 흙이 무너져 내려 퇴적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점토층 위에서 출토된 것은 주거지퇴적층 유물로 분류하였다. 주거지퇴적층과 고대문화층에 의해 교란된 층에서는 활석질의 변형빗살무늬토기, 석면 혼입의 무문양토기, 팽이형토기, 마치와 메, 편암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바닥층에서는 활석질의 변형빗살무늬토기나 석면질의 무문양토기는 출토되지 않았고, 첨저의 석면질 빗살무늬토기, 평저의 점선무늬 토기, 화살촉, 창끝, 도끼 갈돌과 갈판 등이 출토되었다. 바닥층에서는 퇴적층에서 출토되었던 마치와 메, 편암조각 등은 출토되지 않았다. 이처럼 토기와 석기에서 집자리퇴적층과 바닥층은 서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이를 시간에 따른 차이로 해석하였다. 원시문화층 아래는 모래층의 생토층으로 중간 중간에 자갈층이 끼어 있어 본래 하상층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

 

I 지구의 1호 주거지는 평면 방형으로 네 변이 각각 6.7m, 6.65m, 7.35m, 7.m로서 서남과 동남변이 약간 더 긴 형태이다. 주거지 어깨선은 지표하 120의 생토층에서 확인되었으며 주거지의 깊이는 4050정도이다. 주거지의 바닥과 네 벽면은 점토를 발랐는데, 바닥은 두께 약 10, 북벽은 무려 100에 달하고 나머지 벽은 약 20의 점토를 보강하였다. 점토는 굳게 다져진 상태였다. 집은 화재로 폐기되어 내부에서는 다량의 재와 목탄이 노출되었다. 벽가를 따라서는 타다 남은 기둥의 흔적들이 확인되었지만 바닥에서 기둥구멍의 흔적은 찾지 못하여 바닥 위에 바로 기둥을 세웠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출입구는 동남쪽과 동북쪽 두 곳에서 확인되었는데, 동남쪽 출입구는 집밖으로 직경 0.8m의 반원상 돌출부가 경사지게 확인되었으며 동북쪽에서는 집안으로 길이 1.1m, 너비 0.25m의 계단상 출입구가 설치되었다. 노지는 주거지 중앙에 위치하며, 평면 타원형으로 장경(長徑) 1.11.2m이다. 0.15m 깊이의 수혈을 파고 수혈 벽면을 따라 14개의 규암질 자갈돌을 돌린 위석식노지 형태이다. 노지 내부에는 부드러운 재가 가득 차 있었고, 돌들과 주변 흙은 불을 맞아 검붉게 변해있었다. 노지는 1차에 걸쳐 확장되었는데, 처음 노지는 동서 장경 0.8m의 타원형이었다. 이 노지 남쪽에 잇대어 토기저부를 잘라내고 거꾸로 하여 바닥에 박아놓은 토기 저장구멍이 설치되었는데, 노지가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이 토기 저장구멍 위로 노지의 남벽 돌이 놓이게 되었다. 확장한 노지의 남벽에 잇대어서도 동일한 토기 저장구멍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토기 저장구멍은 주거지 남쪽에서 2, 서남쪽 및 동남쪽 확인되어 총 6개였다. 이러한 토기들은 구경 3565의 대형 토기들로 석면이 혼합되고 기벽이 얇은 것들이다. 주거지 바닥에서 3040깊이로 거꾸로 박은 토기 내부바닥은 산화철 성분이 엉켜서 굳어진 5정도의 붉은색 모래층이 확인되었고, 노지 옆의 것은 내부에서 유기질이 썩은 듯한 녹색의 점토층이 깔려 있었다. 토기저장구멍 내에서는 종종 석기가 출토되는데, 화덕 곁의 토기저장구멍에서는 완형의 갈돌과 갈판 한쌍, 파손된 갈판 1, 약간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출입구쪽의 토기 저장구멍들에서는 작은 그물추 10여 점이 출토되었다. 보고자들은 이 시설을 낟알이나 도구를 저장하는 용도로 판단하였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제자리에 엎어 놓은 상태로 발견된 토기들도 여러 점 확인되었다. 토기편들 중에는 화재시 불을 맞아 회색으로 변한 것들이 많았다. 석기도 석촉, , 도끼, 갈돌 및 갈판, 그물추 등이 출토되었는데 갈판은 완형의 것만 4점이나 되며 파손된 것도 23개체분 출토되었다. 토기는 주로 벽가를 따라 확인되었으며 일부는 화덕자리 부근에서 확인되었다. 석기는 토기저장구멍 내에서 발견된 것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벽가를 따라 확인되었으며 완형의 갈돌과 갈판의 경우는 동북과 서북쪽에서 출토된 것은 한 쌍씩 뒤집어 놓은 상태로 확인되었다.

 

지구에서는 2개의 완전한 주거지와 1기의 파괴된 주거지를 확인하였는데 2호 주거지에서 서남쪽으로 11m 떨어진 곳에 3호 주거지가 위치하며, 그 사이에 파괴 주거지가 있다. 2호 주거지는 모가 죽은 방형으로, 어깨선은 동변 4m, 남변과 서변 4.2m, 북변 4.4m로 넓이는 17이며 바닥은 15로 바닥 면적이 작아 벽선이 완만하게 기울어 있다. 깊이는 0.50.6m이다. 주거지 중앙의 노지는 위석식이며 깊이 0.34m, 면적 56이다. 내부에는 재도 있으나 섬록암, 판암제 석재, 반제품, 돌마치 등이 출토되었다. 노지 동쪽에 잇대어서는 토기저장구멍 자리로 생각되는 수혈이 확인되었다. 주거지 바닥에서는 작은 수혈이 여러개 확인되었으나 기둥 배치는 정연하지 않다. 동남모서리에서 계단상 출입구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노지를 중심으로 서부와 북부에서는 석기가, 그 반대편에는 주로 토기가 출토되었다. 주거지 바닥의 남쪽에서는 두 개의 토기가 거꾸로 묻힌 채 확인되었다. 토기 내부에서는 재나 유기질이 썩은 듯한 회색토가 있었으며, 큰 토기 내부에서는 불에 탄 뼈도 출토되었다.

 

3호 주거지는 원형에 가까운 말각방형으로 각변 3.2m, 3.2m, 3.8m, 4m로 면적은 약 12이다. 바닥은 점토로 다졌으며 중앙에 장경 1.1m, 단경 0.9m, 깊이 0.2m 의 타원형 노지가 위치한다. 노지에서는 돌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원래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노지 주변에서는 토기 저장구멍자리로 생각되는 수혈이 2개 확인되었다. 기둥자리는 정연하지 않으며, 동남변에서 계단상의 출입구가 확인되었다. 지구 1구획에서는 파괴된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보습이나 토기가 일괄로 출토되는 양상을 확인하였으나 주거지 윤곽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1호 주거지에서는 30여 개체에 달하는 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는 기본적으로 장란형을 띠며 일부 평저의 토기가 있다. 태토에는 석면을 많이 섞었으며 활석을 함께 섞은 것도 많다. 문양은 전면에 걸쳐 시문하였으며, 구연부에는 주로 점열문을, 동체부에는 종주어골문으로 세로로 그은 이깔잎무늬를 주로 시문하였다. 저부쪽에는 횡사선대문이나 횡주어골문을 시문하였다. 일부 평저토기에는 구연 점선 문양 아래 파상점열문을 한 줄 돌리기도 하였다. 당시 보고자들은 장란형의 토기와 평저계 토기를 서로 다른 계통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주거지 출토 석기는 활촉, 창끝, 도끼, 갈돌 및 갈판, 숫돌, 그물추, 마치, 닦음돌 등이 있다. 이 중 도끼는 전면을 잘 마연한 합인사릉부(蛤刃四稜斧)로 특징적이다. 갈돌은 총 9, 갈판은 7점이 출토되어 양이 많다. 갈돌은 단면 원형, 반원형의 봉상이며, 갈판은 대체로 평면 장방형으로 사용에 의해 중앙이 오목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거지 퇴적층 및 각 구획에서 출토된 토기들 중에는 주거지 바닥 출토 토기와 차이를 보이는 것이 많은데, 태토에 활석을 다량으로 혼입하고, 첨저보다는 원저가 많은 특징이 있다, 특히 문양에서 구연부 점열문 밑 동체부에 침선으로 거치상의 이중구획을 하고 그 내부에 격자문을 채워 넣은 것이 많다. 이 토기를 보고자들은 소위 변형 빗살무늬토기로 부르고 있다. 여기에는 가로고리형의 손잡이가 붙은 것도 여러 점이다. 석기들도 주거지 바닥층보다 다량 출토되어 석촉 40여 점, 도끼 14, 갈돌 36, 망치류 60여 점, 편암제 박편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 퇴적층은 층위와 유물상에서 바닥층에 후행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구의 토기는 여전히 석면을 혼입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고, 활석을 혼입한 것도 상당량에 이른다. 구연부는 점선열문이 시문되는 전통이 강하며, 동체부에는 종주 어골문 이외에 점열에 의한 타래문(점선물결무늬, 파상점선문)이나 중호문을 시문한 것들이 새로이 유행하게 된다. 석기상에서도 농경과 관련되는 굴지구인 대형의 보습 또는 따비형석기가 60여 점이나 출토되었고 낫도 8점이 출토되었다. 보습 중에는 길이가 65에 이르는 대형도 있다. 이외에 갈돌 및 갈판, 도끼와 자귀, , 석촉과 찔개살, 그물추, 숫돌, 망치류, 고석 등 기타 석기들은 I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외에 2호 주거지에서 토기에 담긴 탄화곡물이 출토되었는데, 정확한 감정은 거치지 않았고 조 또는 피로 보고되었다. 2호 주거지에서는 석면덩어리도 출토되었다.

 

지탑리유적은 중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I 지구와 지구의 유물 차이에 근거해 궁산문화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볼 수 있게해 준 유적이다. 지탑리 I 지구 단계는 현재 궁산 1기로, 지탑리 지구는 궁산 2기로 불리는 시기로 중서부지역에서는 가장 이른 전기 단계인 기원전 4000년 이전3500년 무렵에 해당된다.

 

지탑리유적은 학사적으로 궁산문화의 첫 세분을 가능하게 해준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궁산문화 주거지의 특징을 잘 밝혀준 유적이기도 하다. 또한 지구의 보습류와 낫 등 농경관련 도구와 조 또는 피로 보고된 탄화곡물의 확인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신석기시대의 농경 관련 자료를 구체적으로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북한에서는 신석기시대 갈이농사가 이 단계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았으며 남한 학계에서도 지탑리를 위시한 봉산 마산리, 서울 암사동 유적 등의 이른 단계에 초기농경이 실시되었다고 보는 것이 널리 수용되고 있다. (임상택)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지탑리유적,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302)

 

 

6.25.3 황해북도 봉산군 마산리유적; 6000년 전(BC 4000)

 

황해북도 봉산군 마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은 봉산역에서 서쪽으로 1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산역에서 남쪽으로 0.5정도 가면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서흥강에 이른다. 이 서흥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1정도 내려가면 강을 건너가는 철교가 나타나는데, 유적은 바로 서흥강 오른쪽 기슭의 철교 주변에 분포되어 있다. 유물이 산포된 범위는 40,000에 달하는데, 철교 서쪽의 30,000의 범위에서만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은 1987년에서 1988년까지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신석기시대 주거지 12, 고조선시기의 주거지 10기와 무덤 1기가 조사되었다. 표토층인 30정도의 검은모래층 밑에 황색모래흙층이 60120정도 쌓여 있으며, 그 아래에 70정도의 황색모래층과 원 토층인 모래자갈층이 차례로 쌓여 있다.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황색모래층을 파고 조성되어 있다.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4개의 발굴지점 중 제1지점과 제2지점에서 조사되었는데, 1지점에서는 10기의 주거지(1·2·3·5·6·7·15·18·ㄱ호·18·ㄴ호·21), 2지점에서는 2기의 주거지(8·9)가 발굴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모두 방형이며, 규모는 45m로 중소형에 해당한다. 화덕자리는 주거지의 중앙에 1기씩 설치되었는데, 돌을 돌려 만든 위석식 화덕자리로 규모는 1m 내외이다. 주거지 바닥은 대부분 진흙을 펴고 다졌으며, 일부에서는 불을 지펴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들 주거지에서 주목되는 점은 출입구시설과 저장시설이다. 출입구시설은 반원형으로 돌출된 형태로 확인되는데, 이러한 출입구시설은 서울 암사동, 온천 궁산 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중서부지역의 이른 시기 주거지의 출입구시설로 판단된다. 또한 3호와 7, 21호 주거지 내부의 화덕자리 옆에서 빗살무늬토기의 바닥을 잘라내고 거꾸로 뒤집어 박아놓은 저장시설이 조사되었는데, 출입구시설과 마찬가지로 암사동과 궁산 유적에서 동일한 형태의 저장시설이 확인되고 있어 중서부지역의 이른 시기 주거지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밖에 15호 주거지에서는 움벽에 점토를 바른 흔적이 확인된다.

 

또한 유적의 주거지는 규모나 구조상에서 큰 차이가 없는 방형 주거지로 구성되어 있고, 배치상의 정형성 없이 23기의 주거지가 모여 있는 양상이 관찰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전체 마을을 관통하는 배치구조가 23기를 단위로 하는 소군집의 병렬배치구조임을 의미하며, 서로 모여 있는 23기의 주거지가 생산과 소비의 하나의 단위(세대)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유물은 보습, 갈돌, 도끼, 자귀, 대팻날, , , , 활촉, 어망추, , 가락바퀴, 시문구, 숫돌 등과 100여 개체 분량의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되었다. 7호 주거지에서는 탄화된 조의 낟알이 출토되었다. 토기의 기형은 단지, 바리 등이 있으며, 새겨진 문양으로는 점열문, 횡주어골문, 종주어골문, 타래문, 단사집선문 등이 확인된다. 유적은 주거지의 구조나 유물갖춤새로 보아 봉산 지탑리유적 2기층과 유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중서부지역의 신석기시대 전기(기원전 4000년 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구자진)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마산리유적,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729)

 

6.25.4 평양 남경유적; 5000년 전(BC 3000)

 

평양시 삼석 구역 호남리(湖南里) 남경 부락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1979~1981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하였다. 유적은 남경부락 앞 벌판, 대동강 오른쪽 기슭에 있다. 유적이 있는 곳에서 강을 따라 내려가면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북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삼각주가 이루어져 있고 남강 건너편에 금탄리(金灘里) 유적이 있다. 지표조사에서 유적분포 범위는 50,000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경유적은 신석기시대 문화층으로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무덤 및 역사시대에 걸친 문화층들이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집자리(住居址)12?17?31?32?37호 등 5기가 조사되었다.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2가지로 나타나는데, 12?17?32호 집자리는 방형(方形)이며 31?37호 집자리는 장타원형 또는 말각장방형(抹角長方形)이다. 집자리 바닥에는 진흙을 바르고 다졌으며 내부 중앙을 파고 주위에 돌을 둘러 화덕()을 만들었다. 31호 집자리는 바닥이 아래?위로 단이 져 있어 주목되는데, 아랫단은 윗단에서 1.6m 정도 깊은 곳에 있으며 화덕은 아랫단의 가운데를 파고 설치하였다. 윗단에서는 각종 토기와 그물추(漁網錘) 2,000여 개, 갈돌(石棒), 갈판() 등이 나왔다. 아랫단에서는 그물추 600여 개, 갈돌 10여 개, 좁쌀 1, 도토리알, 뼈 부스러기, 석기를 비롯하여 다수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렇게 집의 규모가 평균이상이며 내부에 다시 움이 있어 집이 상?2단으로 나뉘는 경우는 가까운 금탄리(金灘里) 11호 집자리나 암사동(岩寺洞) 6호 집자리에서도 확인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공공건물, 창고 또는 마을회관 등으로 여겨지며 서해안지방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신석기문화의 한 특징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 집자리에서는 간석기(磨製石器)로서 도끼(), 자귀(手斧), 대패날, 슴베없는 활촉(無莖式石鏃), 돌칼(石刀), 갈돌, 갈판, 숫돌(砥石)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그물추, 발화석, 무늬새기개도 나왔다. 그물추에는 각각의 크기에 따라 다른 굵기의 실이 묶였던 흔적이 남아있다. 토기의 출토량은 매우 많아 31호 집자리에서만 형태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 94개체나 나왔다. 토기 가운데 민그릇(無文土器)이 약 25% 정도를 차지하는데 기형상으로 단지(), 바리(), , 컵 등 작은 그릇들이 많으며 바탕흙(胎土)에는 주로 모래가 섞여 있다. 특히 무늬 없는 단지류는 금탄리에서 나온 것과 같은 형태로, 여기에 뾰족한 밑굽과 입술을 덧대면 서북지방의 팽이형토기(角形土器)로 보인다는 점에서 팽이형토기의 자생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무늬토기(有文土器)에는 모래와 활석(滑石)을 섞은 것이 많으며 문양은 크게 생선뼈무늬(魚骨文)와 짧은 가로금무늬(短斜線文)로 대별된다. 어골문의 경우 그릇 전면에 걸쳐 시문되어 있다. 이 토기들은 대개 ??()??으로 분류될 만큼 대형인데, 크기는 56×70×8414의 배수로 커지고 있다고 분석되었다. 덧무늬(隆起文) 목단지 1점과 번개무늬(雷文)가 있는 목단지 1점은 중국 동북지방의 郭家村 유적에서 나온 것과 거의 같다. 세로방향으로 고리손잡이가 붙은 토기도 있다.

 

보고자들은 이곳의 연대를 2기로 나누어 바탕흙에 활석을 섞어 만든 토기들이 나오는 12?17?37호 집자리를 ??남경 1(南京 1)??, 바탕흙에 모래만 섞어 쓰는 31?32호 집자리의 토기 및 유물들을 ??남경 2(南京 2)??로 나누었다. 이는 신석기 후기에서 청동기시대로 가면서 토기 바탕흙의 비짐이 모래 위주로 단일해진다는 최근의 주장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나 집자리의 평면형태가 뒤섞여있다는 점에서 재고의 여지도 있다. 남경 1기는 궁산문화 4, 남경 2기는 금탄리 2기이자 궁산문화 4기의 더 늦은 시기로 보고있다. 남경유적 1기와 2기의 절대연대는 각각 B.C. 3000년 기의 전반과 후반에 편년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는 집자리 22기가 드러났다. 집자리들은 서로 중복되어 있고, 출토 유물과 집자리 구조 등에 따라 3시기로 나뉜다. 청동기시대 1기에 해당하는 집자리는 7(6?7?9?30?33?34?36)가 나왔다. ~서 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긴네모꼴 평면구조를 이루고 크기는 작은 편이다. 1기의 집자리들은 기둥구멍(柱孔)이 없으며, 네 벽체가 경사진것과 수직인 것이 있다. 집자리의 바닥은 진흙과 불로 다졌으며 모두 화재의 흔적이 관찰된다. 팽이형토기가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2기의 집자리는 8(3?4?5?10?11?18?19?20)로 남~북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다. 2기에 해당하는 집자리는 집자리 중앙에 기둥구멍이 없고 네 벽을 따라 통나무를 벽체 골조로 촘촘히 세우거나 집자리 중앙에 장축을 따라 기둥구멍을 3개 두고 벽가에 가는 통나무를 세웠다. 팽이형토기와 함께 미송리형토기(美松里型土器)를 특징으로 한다. 3기에 속하는 것은 6(1?2?8?13?14?15)가 있는데 남~북을 장축으로 하는 것은 2기의 것과 같으나 집자리의 규모가 커졌다. 팽이형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생산 도구로는 반달돌칼(半月形石刀), 갈돌 등 농경과 관련된 도구들이 출토되며, 1기의 36호 집자리에서 오곡의 낱알이 나오고, 2기의 11호 집자리에서 기장이 나온 것을 보면 농사짓기가 활발했던 사실을 증명해준다. 돌화살촉(石鏃)과 그물추(漁網錘) 등 수렵, 어로와 관련된 유물들도 나온다.

 

남경유적을 발굴하여 드러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지역에서 농경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좁쌀이 직접 출토되었다는 점, 저장용으로 쓰였을 대형의 독들이 10여 개나 나오는데 지름이 84나 되는 것도 있다는 점, 벌채를 하는데 주로 쓰이는 간석기 종류가 발달하였다는 점, 이어지는 청동기시대의 문화층에서 오곡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 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물추의 실감 흔적은 이미 실잣기도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남경유적은 청동기시대의 36호 집자리와 거기에서 나온 오곡(, 수수, 기장, , ) 때문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 집자리의 연대는 북한 최초로 자체 측정된 방사성탄소연대로 B.C. 992±172, 1024±70년이 나왔다.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사전(2001), 남경유적,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1379)

 

 

<참고자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궁산문화,

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53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용강궁산리유적(龍岡弓山里遺蹟))]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A%A9%EA%B0%95%EA%B6%81%EC%82%B0%EB%A6%AC%EC%9C%A0%EC%A0%81&ridx=0&tot=4341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지탑리유적,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302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신석기시대편, 마산리유적,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729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사전(2001), 남경유적,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2&idx=1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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