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 (26)서울 암사동유적 본문
《환국-가사라국》
6. 환국과 신석기문화(26)
6.26 서울 암사동유적 – 6200년 전~3400년 전(6200∼3400 B.P.)
『사적 제267호.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153-157 일대에 위치한다. 한강변 자연 제방상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신석기시대의 마을유적으로서는 가장 대규모에 속하며 주거지와 함께 야외 화덕자리,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와 각종 석기 등이 확인된 대표적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암사동유적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 많은 양의 유물이 노출되면서 일본인 학자 요코야마[橫山將三郞]의 지표조사에 의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국내 학자들에 의해 소규모의 발굴조사나 지표조사 등을 통해 유적의 성격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대학교 김정학에 의해 1960∼64년에 걸쳐 6회의 지표조사와 간단한 시굴이 이루어졌고, 1968년에는 한국대학박물관협회가 주관한 국내 최초의 대학연합발굴이 이루어졌으나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의해 조사된 구역만 보고가 이루어져 2기의 주거지가 보고되었다. 1971년에서 1975년에 걸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본격적인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암사동유적이 대규모의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임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1971년에 주거지 8기, 1973년에 주거지 1기, 1974년에 주거지 6기, 1975년에 주거지 11기와 적석유구 1기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조사 성과에 힘입어 1979년 암사동유적은 사적 제267호로 지정 되었다. 이후 유적공원을 조성함에 따라 다시 1983년과 1984년에 긴급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때 2기의 주거지가 새로이 조사되었다. 1988년 공원조성과 함께 유물전시관도 건립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1998년 전시관 확장에 따른 조사에서도 3기의 주거지가 추가로 조사되었으며 이후 암사동유적 관리계획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암사동유적에는 지표 아래 크게 3개의 문화층이 존재하고 있다. 제1문화층으로 불리는 최하층은 신석기시대에 해당된다. 여기에서는 현재 총 30기 가까운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아직 조사되지 않은 지역의 면적까지 고려하면 암사동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주거지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2문화층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확인된 바 있으며 최상층에 해당되는 제3문화층에서는 6각형 주거지 등의 삼국시대 백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암사동유적은 신석기시대뿐 아니라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사람들에 의해 점유되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사동유적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총 33기인데, 평면형태는 말각 방형이나 원형을 띠고 있으며 방형이 우세하다. 규모는 평균적으로 원형보다 방형이 큰 편이다. 기둥은 뚜렷한 경우는 4주식이 확인되는데, 집의 네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얹은 후 그 위에 서까래를 걸친 형태로 추정되며 이럴 경우 집은 밖에서 볼 때 원뿔형이나 사각뿔의 형태를 하게 된다. 주거지 중앙에는 노지(爐址)가 있는데 할석이나 천석을 돌린 위석식으로 평면 원형과 방형이 있다. 대체로 주거지 평면형태와 노지의 평면형태가 일치한다. 75-2호주거지에서는 노지의 남쪽에 토기를 거꾸로 박아놓은 시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시설은 북한지역의 온천 궁산, 봉산 지탑리, 평양 금탄리 유적 등에서 이미 발견된 바 있는데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독특한 시설이다. 이 시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불씨나 곡물, 도구 등을 저장, 보관하기 위한 시설로 생각된다.
암사동유적에서는 매우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은 토기와 석기들이다. 토기는 크기와 관계없이 대부분 첨저의 포탄형을 하고 있다. 소형토기 등에서 평저가 보이지만 소량이다. 이 토기들에는 거의 전면에 걸쳐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부위별로 서로 다른 문양을 시문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구분계 빗살무늬토기라고 불린다. 구연부에는 주로 단사선문을 눌러서 시문하였고 조문이나 점열문, 격자문 등도 확인된다. 동체부에는 종주어골문이나 횡주어골문을 침선으로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횡주어골문에는 단치구와 다치구로 시문한 것이 있는데, 다치구로 시문한 횡주어골문은 문양 단위가 크고 찰과상으로 얕게 시문되었으며 저부문양이 생략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다치구에 의한 찰과상 횡주어골문은 한강유역을 포함한 중부지역에서만 국한되어 확인되는 것으로 대동강유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외에도 동체부에는 능형문, 점열 타래문 등 여러 형태의 문양이 시문된다. 구연과 동체부 사이에는 중호문이나 격자문 등 다양한 문양을 채워넣기도 한다. 저부는 횡주어골문, 사선대문, 방사상문 등으로 시문하였다. 이와 같이 토기의 전면에 문양을 가득 채워 넣은 것이 암사동 빗살무늬토기의 큰 특징이자 한강유역 신석기시대 토기문양의 특징이다. 물론 전면을 찰과상 횡주어골문으로 시문한 동일계토기나 토기의 가운데 부분이나 아랫부분에 문양을 그려 넣지 않고 비워두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아예 문양을 새겨 넣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소수이다.
토기 이외에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식량을 얻거나 생활재료들을 가공하는데 사용되었던 석기들이다. 석기는 크게 용도에 따라 식량 획득용 도구, 벌채, 목공용 도구, 굴지구, 식량처리용 도구, 공구 등으로 나누어진다.
식량획득용 도구는 석촉, 창, 그물추, 채집에 사용되었을 굴지구(堀地具) 등이 있다. 암사동유적에서 나온 석촉은 단면 렌즈상의 무경양익촉이나 단면 편육각형의 삼각촉 형태로 모두 마제이다. 창 역시 갈아서 만들었다. 그물추는 작은 강돌을 골라 양쪽 끝을 깨트려 홈을 만든 일반적 형태이다. 그물추를 통해 그물어로의 존재를 알 수 있지만 암사동유적에서는 동물뼈가 남아 있지 않아 어떤 물고기를 잡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점, 다른 유적의 예 등을 고려하면 주로 잉어나 붕어 등을 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물추는 매우 많은 양이 출토되기 때문에 당시에 물고기 잡이가 매우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열매나 뿌리를 먹는 식물 등의 채집에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 없어 채집용의 도구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뿌리를 먹는 식물의 경우는 땅을 파야하므로 굴지구는 채집용 도구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암사동유적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 중에서 도토리 열매가 발견된 바 있다. 도토리는 참나무과 열매의 총칭으로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도토리가 전국적으로 분포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매우 유용한 먹을거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여러 유적에서 도토리가 많이 확인되었고, 남부지역에서는 도토리의 저장구덩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농경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굴지구로 따비형석기 및 괭이형석기가 다량 확인되었고 수확도구로 생각되는 낫이 발견된다. 따비형석기는 보습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지탑리유적의 것과 비교했을 때 대부분 소형에 해당된다. 괭이형석기는 대부분 타제로 제작되었고 폭이 좁은 장조형이다. 낫은 마제와 타제가 모두 보인다. 이러한 유물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놓은 것으로 보아 암사동유적 주민들은 수렵·채집·어로 이외에 초기농경을 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암사동유적에서 실제 곡물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주변 유적들의 예를 보면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조와 기장을 재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마산리, 경기도 시흥 능곡동 유적, 부산 동삼동패총 등에서 실물로 조나 기장이 확인되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식량을 가공 처리하는데 사용되었던 도구로는 갈돌과 갈판, 고석이 있다. 봉상 갈돌과 말안장형 갈판이 기본적인 형태이다. 거의 매 주거지마다 확인되고 있는 기본 도구 중 하나이다. 식량의 획득과 가공, 조리에 사용된 도구 이외에는 벌채 목공용의 각종 합인석부와 단인석부, 대팻날, 석착 등이 다량으로 출토된다. 암사동유적에서는 전면마연석부도 있지만 인부만을 마연한 합인과 단인의 석부류들이 더 많다. 합인석부는 횡단면 원형이나 타원형, 렌즈형 등이 일반적이고 지탑리나 궁산 유적에서 보이는 사릉부(四稜斧)는 확인되지 않는다.
암사동유적은 오래전부터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알려져 왔다. 대동강유역과의 대비를 통해 궁산1, 2기와 병행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그런데 암사동유적에는 대동강유역에는 보이지 않는 다치구에 의한 찰과상 횡주어골문이 가장 많이 존재하고, 궁산3기에 해당하는 금탄리1식토기가 확인되는 등 유적의 존속 시기를 단순히 궁산1, 2로만 한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에는 암사동유적이 전기 후반부터 중기에 걸쳐 존속했던 것으로 보려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으나, 암사동유적 내에서 층위적으로 이를 분리하기가 어려운 점이 문제가 된다.
최근 주변지역에서 암사동유적보다 단순한 구성을 보이는 토기상이 확인되는 취락유적의 조사가 증가하고 있으므로 암사동유적의 편년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연대는 기원전 4000∼3000년 사이가 많으나 기원전 4000년을 넘어서는 연대와 2000년대로 떨어지는 연대도 일부 있다.
암사동유적은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첨저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가장 먼저 출현한 지역이 암사동을 포함한 중서부지역이라는 점에서 첨저 빗살무늬토기문화의 등장과 확산을 이해하는데 암사동유적은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된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와 취락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도 역시 암사동유적은 중심적 역할을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암사동유적으로 대표되는 중부지역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동쪽과 남쪽 대부분 지역의 신석기문화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토기의 문양이나 형태, 주거지의 형태 등으로 볼 때 동해안이나 남부지역의 신석기문화는 중기가 되면 암사동유적과 같은 중부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화가 크게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곡물의 재배와 같은 새로운 기술과 생업방식도 같이 확산된다. 즉 중서부 이남의 신석기문화 전반에 걸쳐 암사동식의 생업방식과 문화가 확산되고 정착되는 것이다. 암사동유적은 이러한 점에서 한반도 중서부 이남지역의 신석기시대 문화상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된다.(임상택)』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사전, 신석기시대편, 암사동유적,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43)
『……
암사동유적의 방사성탄소연대값은 많으나 6200∼3400 B.P. 사이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나며 5000 B.P. 정도가 중심연대로 보인다. 토기무늬의 변천을 이용한 시기구분을 보면 토기의 대부분이 입술·몸체·밑 부분을 구분하여 무늬를 베푼 구분계 전면시문형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신석기 전기의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탄소연대측정값과 형식분류의 관점이 대체로 잘 맞아들고 있어 암사동유적의 연대는 한국의 신석기시대에서 전기 늦은 무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빗살무늬토기와 민토기 사이의 이른바 과도기형 토기의 존재가 거론되며, 이 같은 현상은 바로 이웃한 미사리 유적에서도 드러나고 있음에 비추어 사람들이 암사동에서 신석기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살았다고 볼 수 있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서울 암사동 유적(─巖寺洞遺蹟))]
『한국일보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신비로운 신석기 마을 암사동...거대도시 서울의 시작점이었다
입력 2022.02.19 11:00 수정 2022.02.19 16:46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16> 암사동,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
구글 위성사진으로 본 암사동 유적의 위치(왼쪽)와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상·중·하부의 문양이 다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석기시대와 함께 나타난 정착 생활은 현대문명에 이르게 한 인류의 집합적 발명이다. 한편으로는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의 팬데믹 역시 사람들이 정착해 모여 살면서 출현한 현상이다. 암사동은 한반도 안에서 정착 생활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마을 유적이자,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머나먼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착 생활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유물은 토기다. 이동 생활 때는 토기 같은 물품을 제대로 간수할 수 없다. 한국고고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얼마 전 작고한 사라 넬슨(Sarah M. Nelson) 교수가 소개한 이후, 세계 고고학에서 신석기시대의 한반도를 설명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유적이 바로 암사동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 빗살무늬토기 문화의 대표로서 회자되는 곳이다.
암사동, 서울의 동쪽 끝
녹지로 구성된 암사동 선사유적공원. 우측상단에 암사대교가 보인다.
서울 어디든 한강 남쪽 올림픽대로변은 아파트가 병풍처럼 서 있지만, 동쪽 끝 암사동 유적공원만은 푸른 소나무 숲속에 원시시대 고깔모양 집들이 복원돼 있어 '탈서울문명'의 낯선 풍광을 보여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변의 구릉 꼭대기에 있던, 오늘날 암사(巖寺, 바위절)로 불리는 백제시대 사찰 백중사(伯仲寺)에서 내려다보는 한강 모습은 아마 그때도 절경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명 학자인 서거정(徐居正)도 시를 통해 ‘산 모습이 물에 의해 끊어지고(山形臨水斷)...마음에 먼지가 저절로 사라진다(胸襟自不埃)’라고 읊고 있다.
백제시대만 해도 이곳이 서울의 중심지였다. 백제 왕성으로 보는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부터 하남의 미사리에 이르는 지역에서 백제시대 여(呂)자형 주거지들이 모래 땅 속에서 무수히 발굴된 것이 그 증거다.
1979년 사적 지정 후 조성된 암사동 선사유적 공원에는 8만㎡에 이르는 평평한 땅에 멋진 소나무숲이 복원된 움집을 덮고 있다. 이 소나무들은 공원 조성 이후 심은 것들이지만 신석기시대 풍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멀지 않은 한강 나루 이름이 소나무 언덕이라는 뜻의 송파(松坡)였기 때문이다.
발굴된 주거지와 층위를 전시하는 보호각(위)과 내부의 발굴된 집자리 모습
서울 지하철 암사역에서 이어지는 도로변 정문 입구에 들어서니, 타원형으로 된 유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최근 실시된 발굴 현장을 보존해 전시하는 곳이다. 1970년대 초반에 발굴된 움집을 전시한 공간에서는 신석기시대 생활을 주제로 하는 실감형 디지털 예술영상전시를 볼 수 있다. 암사동 유적공원에서 86아시안게임의 성화를 채취했기 때문인지 일찍부터 정비가 잘 되어 박물관이나 전시관 말고도 공원 내 편의시설이나 어린이를 위한 체험교육공간이 많다. 가깝게 있으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소나무 그림자가 일렁이는 벤치에서 책을 읽고 싶은 곳이다.
대홍수로 드러난 빗살무늬 유적
유적 서쪽은 조선시대 중부내륙 교통의 요지였던 광나루가 자리한 천호동이다. 동쪽에는 암사가 있는 낮은 산이 강쪽으로 삐죽이 나와 있다. 한강은 암사동의 응봉(鷹峯)과 광장동의 아차산이 양쪽의 벽처럼 서 있어서 하폭이 좁다. 이곳을 통과한 강물은 암사동 지역에서 넓어지게 되어 유속이 떨어져 강자갈과 모래를 쌓게 된다. 여의도나 미사리섬도 그러한 강 흐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하천퇴적 지형은 강의 흐름 변화에 따라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암사동은 제방 역할을 하는 올림픽대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매년 홍수 걱정을 하던 곳이었다. 신석기시대 풍요로운 마을의 재난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까지 지속되었던 셈이다. 을축년 대홍수(1925년) 때 이 지역이 침수돼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 그러한 과정을 보여준다.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등 일본 고고학자들이 이때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를 시베리아 신석기시대의 고아시아족이 사용하던 소위 캄 케라믹(Kamm-keramik, 독일어로 빗살무늬라는 뜻) 문화의 한 자락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했고, 오랫동안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기원이라고 생각되었다.
원조 빗살무늬토기의 수수께끼
빗살무늬토기 편이 보여주는 다양한 문양들
암사동 유적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현재 우리나라 중서부 해안지역에서 암사동 유적이 가장 오래된 연대를 갖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장 전형적 문양으로 장식된 토기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빗살무늬는 토기의 표면에 음각으로 길고 짧은 선들을 연속해서 긋거나 찍어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토기의 아가리부분, 몸통부분 그리고 아랫부분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교한 문양을 넣은 것이 가장 전형적인 형태다.
문제는 이러한 토기가 가장 오래된 층, 즉 6,000~7,000년 전의 층에서 나오고 그 이후 층에서는 문양의 면이 줄어들거나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새로운 문화가 등장할 때는 엉성한 시제품이 나오다가 점차 정교한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암사동 유적이 지속되는 적어도 3,000년 이상의 시간 속에서는 빗살문 양식이 정교한 것에서 엉성한 것으로 퇴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 선사시대의 수수께끼다.
빙하시대 동안 지속된 구석기시대가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언저리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는데 암사동의 신석기 유적이 나타날 때까지 거의 4,000년 동안 한반도 지역에는 뚜렷한 유적들이 보이지 않는다. 암사동 사람들의 출현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더구나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 일본이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적어도 1만5,000년 전에 토기가 나타난 곳이다.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정착촌들은 아마도 빙하시대가 끝나는 1만8,000년 전 황해 저지대에 흐르는 큰 강들에서 시작되었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에 오래된 토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수수께끼다. 빗살무늬토기 역시 지금은 바다가 된 황해 저지대의 큰 강변들에서 출현하고 발전하다 그 극성기에 암사동에 출현하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추론이 사실이라면 황해 해저에 많은 신석기시대 유적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1만 년의 토기문화 공백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후세 고고학도들의 숙제다.
암사동 사람들
복원된 신석기시대 움집들(위)과 2017년 발굴 당시의 상황. 탄화돤 서까래들이 중심을 향하고 있어 고깔모양의 지붕임을 보여준다.
암사동 유적에서 현재까지 44기의 신석기시대 움집 주거지들이 발굴되었다. 그래서 유적공원에는 고깔모양의 집들을 복원해 두었다. 평면이 원형인 것이 많고 대부분 중심에 불자리가 있고 움이 깊은 것을 보면 추운 겨울을 대비한 것 같기도 하다. 주거지들이 모두 한 시대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채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기적 홍수에 마을이 잠기면 아픈 마음을 안고 새롭게 집을 지었을 것이다. 그래서 토층전시관에서 볼 수 있듯이 수천 년 동안 깊이 5미터가 넘는 모래층이 쌓이기도 했던 것이다. 홍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지속적으로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은 그만큼 먹거리 환경이 좋았음을 의미한다.
중앙영상홀에 복원된 움집 안의 가족. 도토리를 가공하는 모습이다.
암사동은 강과 산이 연속해 있어서 선사인들이 안정적으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생태 환경이다. 그렇다고 해도 겨울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을이면 집집마다 온갖 겨울용 먹거리들을 저장하느라 바빴을 것이고 움집 안 곳곳에 걸어두었을 것이다. 박물관 중앙영상홀에 복원된 움집을 보면서 섣달 긴긴 밤 불자리 옆을 지키며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암사인 가족들의 단란한 행복이, 휴대폰을 쳐다보고 사는 우리들의 저녁보다 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적에서 한강을 보고 싶다
한강은 암사동 신석기인들의 생명줄이었다. 수많은 그물추가 이들의 삶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지금의 올림픽대로는 벽이 되어 유적과 한강을 단절하고 있다. 유적공원에서 암사 선사인의 눈에 비쳤던 솔밭 사이로 한강이 반짝이고 샛강에서는 바람에 갈대가 일렁이는 풍경을 감상해볼 날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올림픽대로 위로 연결되는 암사초록길 공사를 보면서 느끼는 아쉬움이다. 매년 10월 열리는 신석기축제에서의 세계유산 지정을 위한 시민들의 열정적 염원이 머지않아 결과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한다.
암사동 출토 그물추(왼쪽)와 곡류나 열매를 갈고 빻는데 사용된 각종 갈돌들
글·사진=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출처; 한국일보,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신비로운 신석기 마을 암사동 ... 거대도시 서울의 시작점이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21114500004615)
<참고자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고고학사전, 신석기시대편, 암사동유적,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5&idx=104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서울 암사동 유적(─巖寺洞遺蹟))]
한국일보,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신비로운 신석기 마을 암사동 ... 거대도시 서울의 시작점이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2111450000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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