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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나라시대(1) - 열국의 분립 본문

여러나라시대/여러나라시대

여러나라시대(1) - 열국의 분립

대야발 2024. 5. 2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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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조선상고사

열국의 분립

삼신설이 파탄되어 삼한에 대한 믿음이 추락하니, 이것은 유사 이래 조선 최대의 위기가 되었다. 일부 인민들은 신인()과 영웅의 허위성을 깨닫고 자치촌·자치계 같은 것을 설립했다.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일을 결정하고자 한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증거로는 진한부·변한부 같은 것이 있다. 이 외에도 역사책에 누락된 것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미신을 타파하고 우주와 인생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등장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는 조선보다 문화가 저급한 예()·선비·흉노·왜 같은 야만족들뿐이었다. 진보에 도움이 될 만한 벗들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장구한 문화를 보유했지만, 왕권을 옹호하는 사상과 학설밖에 없었으므로 중국의 문화를 수입한 것은 도리어 민중의 진보를 방해했다. 이 때문에 민중의 지력은 낮아지고 구세력의 뿌리는 두터워졌다.

이에 제왕의 후예들은 조상 전래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고, 민간의 영웅들은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고자 했다. 조선에 속한 소국들은 대국이 되기를 희망했고, 대국들은 더욱 더 확장되기를 희망했다. 지도자들 중에는 신수두님(대단군)이라고 자칭하는 자, 신한(진왕)이라고 자칭하는 자, 말한(마립간)이라고 자칭하는 자, 불구래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있었다. 어떤 자들은 천상에서 하강했다고 하고, 어떤 자들은 해외에서 떠내려 왔다고 하고, 어떤 자들은 태양의 정기로 태어났다고 하고, 어떤 자들은 알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등, 전통적인 미신 신앙을 이용하여 민중을 유혹하거나 위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중세력의 새싹인 자치단체들이 정복을 당해 소멸하고 세력쟁탈의 난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이것은 열국쟁웅시대로 이어졌다.(1)

 

 

조선상고사

열국 연대의 정정

삼조선이 붕괴한 뒤 신수두님·신한·말한·불구래 등을 참칭하는 자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열국 분립의 형국을 조성했다는 점은 이미 서술했다. 열국의 역사를 말하려면, 열국의 연대부터 언급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 역사서에서 열국의 연대가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열국의 연대가 삭감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먼저, 고구려 연대가 삭감된 사정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고구려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 21년인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어 문무왕 8년(서기 668년)에 망했으므로 존속 연수가 705년이 된다고 일반 역사가들은 말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망할 당시 “900년이 채 못 되어 80세의 대장에게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서가 유행했다. 예언서가 비록 요망한 책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인심을 동요케 하는 도화선이 된 것을 보면, 문무왕 8년 당시에 고구려 존속 햇수가 팔백 몇 십 년 이상은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점을 본다면,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근거한 705년설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또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시조인 추모왕의 12대손이다. 하지만 광개토왕릉비문에는 “17대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1)에게 전해졌다”는 구절이 있다. 이 점을 보면, 광개토왕은 시조 추모왕의 12대손이 아니라 17대손이다. 이처럼 세대를 빠뜨린 점을 보더라도, 705년설은 믿을 수 없다.

《삼국사기》에서는 위우거(우거, 위만의 손자)가 멸망한 지 72년 만에 고구려가 건국됐다고 했다. 하지만 《북사》 〈고구려 열전〉에서는 막래()가 부여를 복속시킨 뒤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세웠으며, 이때 고구려를 고구려현으로 불렀다고 했다. 《해동역사》에서는 ‘막래’가 모본()의 오자가 아닐까 하고 말했다. 하지만 막래는 ‘무뢰’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우박이란 뜻이자 신()이란 뜻이다. 이것은 대주류왕(대무신왕, 고구려 3대 왕_옮긴이)의 이름인 무휼과 발음이 같다.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동부여를 정복한 것은 대주류왕이다. 따라서 막래는 모본왕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다. 막래 즉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으니, 고구려 건국이 한사군 설치보다 백 몇 십 년 이전임이 분명하다. 고구려 당시에 알려진 예언서와 주몽의 자손이 세운 비문이 명확히 알려주고 있고, 또 외국인이 듣고 기록한 것이기는 하지만 《북사》에서도 알려주고 있으니 고구려 연대가 백 몇 십 년 삭감된 것은 확실하다.

순암 안정복 선생은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 왕족인 안승을 책봉할 때 언급한 “햇수가 앞으로 800년이 된다”2)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고구려의 존속 기간이 축소됐다고 언급한 바 있다. ‘햇수가 곧 800년이 된다’에서 ‘8’은 ‘9’로 고쳐야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존속 기간을 삭감한 뒤 ‘900’을 ‘800’으로 고쳐 고구려의 존속 기간이 705년인 것처럼 위조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존속 기간이 삭감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건국의 선후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던 고대의 풍조와 관련되어 있다. 추모와 송양이 도읍을 건립한 순서를 놓고 서로 다툰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건국이 고구려·백제보다 뒤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 기록상의 세대와 연도를 삭감하여 양국이 신라 건국 이후에 세워진 것처럼 만들었다. 동부여·북부여 같은 나라들은 신라인들이 감정을 품을 만한 대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존속 기간을 백 몇 십 년이나 줄였으므로 고구려·백제의 조상 격인 동부여의 존속 기간과 함께 고구려·백제의 형제 격인 가야·옥저 등의 존속 기간까지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이전 역사서에서 고구려 건국 원년으로 설정한 시점보다 백 몇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190년의 전후 수십 년간을 동·북부여, 고구려가 분립한 시기로 잡고, 나머지 모든 열국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의 역사를 서술하기로 한다.

깊이 읽기 광개토왕은 주몽의 몇 대손?

《삼국사기》에서 “광개토왕은 주몽왕의 12대손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내용을 종합하면 그런 결론이 나온다. 누구는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는 누구의 동생이고 하는 식의 기록을 종합하면 그 같은 결론이 나온다.

기록대수근거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 -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1
“유리왕은 주몽의 원자” 1
“대무신왕은 유리왕의 3남” 2 《삼국사기》 권14 〈고구려 본기〉2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아우” 2
“모본왕은 대무신왕의 원자” 3
“태조대왕은 유리왕의 6남인 재사의 아들” 3 《삼국사기》 권15 〈고구려 본기〉3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동생” 3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막내동생” 3 《삼국사기》 권16 〈고구려 본기〉4
“고국천왕은 신대왕의 차남” 4
“산상왕은 고국천왕의 아우” 4
“동천왕은 산상왕의 아들” 5 《삼국사기》 권17 〈고구려 본기〉5
“중천왕은 동천왕의 아들” 6
“서천왕은 중천왕의 차남” 7
“봉상왕은 서천왕의 태자” 8
“미천왕은 서천왕의 아들인 돌고의 아들” 9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태자” 10 《삼국사기》 권18 〈고구려 본기〉6
“소수림왕은 고국원왕의 아들” 11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의 아우” 11
“광개토왕은 고국양왕의 아들” 12

위와 같이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태왕이 추모태왕의 12대손인 것처럼 해놓았지만, 광개토태왕릉비문에서는 12대손이 아니라 17대손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비문에서는 “(추모)왕께서는 세자에게 유언으로 명령을 내리시면서 왕도로써 통치를 진흥시키도록 했다”라고 한 다음에 “대주류왕께서 왕업을 이어받은 뒤 17대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고 했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광개토태왕은 추모태왕의 12대손이 아니라 17대손이다. 부모와 자식의 나이차는 평균 30년 정도다. 그래서 1세대는 보통 30년으로 계산된다. 따라서 추모태왕과 광개토태왕이 5세대나 더 벌어진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150년 정도 더 벌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원전 37년이 아니라 기원전 190년 전후 수십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고구려가 건국되었을 것이라는 신채호의 관점은 5×30=150이라는 공식에 입각한 것이다.(2)

 

 

조선상고사

열국의 강역

열국의 존속 기간만 삭감된 게 아니라 강역도 거의 축소되었다. 북방에 있었던 나라가 수천 리 남쪽으로 옮겨진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강역이 축소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경덕왕이 북방의 주군()을 상실한 뒤 북방의 지명과 유적을 남방으로 옮긴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고려1)가 쇠약한 탓에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과거의 지리를 기록할 때 북방 국가를 또한 남방으로 옮긴 것이 두 번째 이유다. 그래서 조선의 지리에 관한 근거들이 수없이 뒤바뀌었다. 근세에 한백겸과 안정복의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수정되기는 했지만, 열국시대의 지리는 아직까지 제대로 고증되지 않았다. 이에 관한 대략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부여에 관한 설명이다. 신조선은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다.

하나는 북부여다.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을 두었다. 《삼국지》에서 “현도군의 북쪽 1천 리”라고 했으므로 아사달은 지금의 하얼빈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기존의 학자들은 아사달이 지금의 요령성 개원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동부여다. 동부여는 갈사나에 도읍을 두었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북벌’했다고 했으므로, 고구려의 동북쪽인 지금의 훈춘 쪽이 동부여였다. 그런데도 기존의 학자들은 갈사나가 지금의 강릉이라고 말했다.

셋째는 남부여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 동부여가 양분됐다. 하나는 기존의 갈사나에 머문 북동부여이고, 또 하나는 남방에 새로운 갈사나를 건설하니 곧 남동부여다. 전자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고 국호를 없앴다. 후자는 문자왕 3년(서기 494년)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됐다. 남동부여는 함흥에 있었다. 그런데도 기존의 학자들은 남동부여의 강역뿐 아니라 명칭조차 몰랐다.

둘째는 사군(, 한사군_옮긴이)에 관한 설명이다. 위만이 동쪽으로 건너간 곳에 있었다는 패수는 《위략》의 만반한이다. 이곳은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문번한으로 오늘날의 해성·개평 등지다. 지금의 헌우락이 바로 그곳이다. 한무제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위만의 옛 땅이므로, 한문제가 건설한 사군은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내에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기존 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강원·함경도 등과 고구려 도성인 지금의 환인 등지에서 찾으려 했다.

셋째는 낙랑국에 관한 설명이다. 낙랑국은 한나라 낙랑군과 별개로, 지금의 평양에 세워진 나라다. 기존 학자들은 둘을 혼동했다.

이 외에, 고구려·백제의 초기 도읍이나 신라·가야의 위치는 기존 학자들이 고증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주군() 명칭 혹은 전투 현장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 옮겨서 설치한 지명에 따라 표기됐다. 그래서 틀린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가능한 한 교정하면서 열국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한다.

깊이 읽기 고구려의 건국 연대 추측

다른 자료를 토대로 할 경우, 좀더 정확하게 고구려의 건국 연도를 계산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항복한 것은 보장왕 27년 9월 12일이다. 양력으로는 668년 10월 22일이다. 이로부터 6, 7개월 전인 보장왕 27년 2월(양력 3월 18일에서 4월 16일까지)에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종과 가언충 간에 고구려 문제에 관한 대화가 있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편에 이 대화가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가언충은 “올해는 고구려 건국 900년이 되는 해입니다”라고 말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나라다. 그래서 그 어느 나라보다도 고구려를 많이 연구했다. 이런 나라가 고구려의 건국 연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았을 리 없다. 따라서 서기 668년이 고구려 건국 900주년이라는 당나라 신하의 말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기원전 233년에 건국됐다는 말이 성립한다. 참고로, 북한 학계에서는 압록강 일대의 고구려 무덤들을 근거로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가 건국됐다고 말한다.(3)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열국의 분립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네이버 지식백과] 열국 연대의 정정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3) [네이버 지식백과] 열국의 강역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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