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고구려 문화유산 (12) 고구려 세계문화유산 - 각저총 본문
임기환교수는 각저총(씨름무덤)의 축조 시기는 5세기 초반 혹은 중반으로 추정하고, 광개토대왕 · 장수왕 때로 고구려인들의 활달한 기운이 넘치고 있다고 하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역시 씨름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각저총의 씨름그림 한 장면에는 고구려가 고조선 이래의 문화 전통 위에서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전통성과 국제성을 동시에 갖춘 문화를 향유하였던 모습이 담겨 있으며, 바로 이런 점이 오늘 우리가 고구려 역사에서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이라고 보았습니다.
임기환교수 [고구려사 명장면-33] 각저총 씨름도가 말하는 고구려의 전통과 개방성
『무용총과 마치 쌍둥이 무덤처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벽화고분이 각저총(씨름무덤)이다. 각저총의 축조시기는 5세기 초반 혹은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무용총보다는 다소 앞설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광개토왕, 장수왕 때로 고구려인들의 기상이 한껏 펼쳐지는 시기답게 벽화에서도 그런 활달한 기운이 넘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뭐니 뭐니 해도 무덤의 이름이 유래한 씨름도이다.
널방 왼쪽 벽면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고, 그 오른쪽으로 나무 아래에서 두 역사가 어깨를 맞대고 서로 힘을 응축시켜 막 시합을 시작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수염난 노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마치 심판을 보는 듯한 장면이다. 씨름을 하는 복장이나 씨름 자세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씨름과 별반 차이가 없어서, 마치 천오백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에 재현되는 느낌이다.
씨름을 하는 두 인물 중 왼쪽 인물의 얼굴은 보면 초승달처럼 날카로운 눈매에 큼직한 매부리코로 묘사되고 있어, 동북아시아계 인물은 분명 아니고, 서역(西域)계 인물로 추정된다. 그 상대인 오른쪽 인물의 얼굴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고구려인의 얼굴이다.
사실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씨름이나 수박희 그림에서 이런 서역계 인물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장천1호분 앞방 오른쪽 벽화의 씨름도, 무용총 널방 안벽 천장고임의 수박희 그림, 안악3호분 앞방 벽화의 수박희 그림 등등을 꼽을 수 있다. 나중에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서역계 인물이나 서역계 문물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따로 살펴보고자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몇 가지 사례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도록 하겠다. 다만 서역계 인물을 포함한 두 사람이 등장하는 씨름그림 한 장면을 통해서 고구려 사회가 다종족 국가였으며, 그만큼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었음은 충분히 유념해야겠다.
무용총 수박도
안악3호분 수박도
다음 주목할 것은 씨름하는 인물 오른쪽의 노인상이다. 얼굴은 지워져 잘 보이지 않지만, 긴 수염과 백발에 지팡이를 집고 있는 모습으로 충분히 노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실 수많은 고구려 고분 벽화 중에서 노인 모습은 매우 드물다. 무덤 주인공이 나이가 들어 이른바 노인이 되어 죽은 경우도 있을 텐데, 대개 주인공도 노인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앞서 살펴본 안악3호분의 주인공 동수도 69세로 죽었고, 덕흥리고분의 유주자사 진도 77세로 사망하였는데, 벽화에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은 장년의 모습뿐이다. 무덤 안의 생활 풍속도가 내세에도 현세와 같은 생활이 재현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내세에서도 여전히 장년이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살기를 기원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예부터 꿈꾸는 것이 불로장생이라는 점을 무덤 주인공의 묘사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씨름도에서 심판을 보는 듯한 인물을 노인 모습으로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 고구려인들이 즐겨 했던 씨름판에서 노인들이 심판을 보았을 수도 있겠다. 또 실제로 그러했건 아니건 간에 노인들이 삶의 경륜과 지혜로 올바른 심판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었지도 모르겠다. 희귀한 노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씨름 장면이 주된 그림이지만 그 왼쪽 나무 그림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벽면의 한가운데 천장까지 높게 그려진 나무는 단순히 씨름도의 배경이 아니라 벽면 오른쪽의 씨름도와 왼쪽의 건물과 집안 풍경을 구분하는, 즉 전체 벽면 그림을 분할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각저총에는 나무가지를 X 형태로 교차시킨 나무들이 여러 벽면에 그려져 있는데, 이런 나무 그림이 주요 주제로 그려진 점이 각저총 벽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씨름도 옆의 나무 그림은 이리저리 뻗은 나뭇가지에 잎은 다 떨어지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가지 끝에 푸른색 잎 비슷한 형태를 달고 있다. 덩어리처럼 그려진 이런 잎의 묘사는 중국 한나라 때 화상석에 자주 나타나는 수목 그림을 연상시킨다. 혹은 지금도 집안 지역에 가면 볼 수 있는 잎이 덩어리지듯이 돋는 가래추자나무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나무줄기와 가지들은 모두 자색이고, 가지 끝의 잎은 연녹색으로 묘사하였는데, 윤곽선이 없이 채색으로만 그렸다. 이런 묘사법은 뚜렷한 윤곽선으로 표현한 씨름도 인물 그림과는 기법상에 차이가 나타난다. 당시 화공들이 여러 가지 표현 기법을 대상과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구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커다란 나무의 여러 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검은 색으로 표현된 새 4마리가 앉아 목을 길게 빼고 지저귀는 듯한 모습은 건조한 나무 표현과는 달리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나무 둥지 좌우에는 두 마리 동물이 서로 등 돌리고 서 있는 듯한 모습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 왼쪽의 동물은 호랑이 형상이고, 오른쪽은 곰의 형상이다.
곰과 호랑이 그림
곰과 호랑이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달라는 이야기가 금방 생각날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4마리 새가 깃들어 있는 나무도 단순히 나무 그림만으로 볼 수는 없겠다. 우리나라 전통 솟대에서 보듯이 새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이다. 따라서 신의 전령 역할을 하는 새가 깃들어 있는 나무는 신성한 나무, 즉 단군신화의 신단수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곰과 호랑이의 묘사도 잘 살펴보면, 모두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고, 마치 사람처럼 서 있는 모습이다. 곰이야 본래 그렇게 생겼다고 치고, 호랑이는 이른바 호랑이 무늬의 특징이 있을 법하지만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 지난 회에서 살펴본 무용총 수렵도에서 도망가는 호랑이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된 점을 고려하면, 호랑이를 검은색으로 표현한 것도 묘사력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처럼 서 있는 모습이나 검은색으로 단조롭게 묘사한 것은 마치 인간이 되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게다가 곰과 호랑이가 나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에서 서로 경쟁관계에 있거나, 결코 우호적인 관계로 보이지 않는 점도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의 추정이 조금 지나칠지 모르지만, 신단수 그리고 곰과 호랑이는 고조선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의 내용을 절로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군신화의 모티브가 고조선의 주변 지역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는 귀한 역사적 증거를 하나 확보하게 된다. 이를 통해 고구려 문화가 고조선 이래의 문화 전통의 기반 위에 형성되었음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 그림에서 단군신화의 핵심인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신 환웅의 존재는 찾아지지 않는다. 사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하늘신인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고구려인들이 주몽 말고 다른 어떤 하늘신의 혈통을 갖는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각저총의 씨름그림 한 장면에는 고구려가 고조선 이래의 문화 전통 위에서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전통성과 국제성을 동시에 갖춘 문화를 향유하였던 모습이 담겨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오늘 우리가 고구려 역사에서 배워야 할 귀중한 교훈의 하나이다.』(1)
이기환기자는 씨름이 이미 1600~1700년전 고구려와 서역이 친선경기를 벌일만큼 ‘글로벌 스포츠’였음을 일러주며, 씨름이 단순히 특정지역의 놀이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무형유산이자 인류 다양성의 원천임을 ‘각저총’ 벽화가 상징해주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각저총 벽화 등에 등장하는 고구려 씨름이 고려-조선을 거쳐 세시풍속의 다양한 놀이 형태로 퍼졌지만 씨름의 원형은 지금까지 변치않고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곧 지금 비록 땅은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씨름은 1600~1700년 이상 공동체의 얼을 담아 지켜온 무형유산이라고 보았습니다.
고구려 각저총에 새긴 '씨름' 유네스코 유산의 향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선 씨름은) 힘이 세야 이긴다하되 꾀가 있으면 더욱 용하다.”
17~18세기 한·일 교류의 상징인물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의 조선어 학습지인 <교린수지>(交隣須知)가 설명한 조선씨름의 특징이다. 일본의 스모(相撲)과 달리 힘보다는 기술을 강조하는 한국씨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지고보면 한국의 씨름과 비슷한 무예이자 놀이는 세계 어느 곳이나 다 존재한다. 각 대륙과 지역에 160여종의 씨름이 분포하고 있다니 말이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신체활동이니, 씨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놀이이자 스포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전세계 각 나라와 종족은 주어진 자연환경과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저마다 개성있는 씨름을 발전시켜왔다.
예컨대 일본의 스모는 물론이고, 몽골의 부흐와 우즈베키스탄의 크라쉬, 터키의 그레스, 스페인의 루차 카나리아, 스위스의 쉬빙겐, 아일랜드의 팽은 물론이고 세네갈의 람브 등이 ‘유사 씨름’의 형태이다.
■고구려 대 서역의 씨름대결
한국 씨름의 첫번째 기록은 1600~17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만주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 벽화(4~5세기 추정)에 등장하는 씨름 장면이 그것이다.
벽화에 나타난 씨름의 방식은 짧은 바지를 입고 오른쪽 어깨를 맞대고 상대의 허리띠를 잡는 왼씨름이다.
역시 고구려고분인 장천 1호분에서 보이는 싸름장면. 씨름이 삼국시대부터 사랑받아온 놀이이자 스포츠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한국씨름을 보는 듯 하다. 앞편의 장사는 고구려인이고, 큰 눈과 메부리코가 특징인 뒤편의 장사는 서역인인 듯 하다. 씨름 경기는 4마리 새가 앉은 나무 아래에서 한 노인이 보고있는 가운데 열리고 있다. 이 노인은 심판인 듯 하다. 나무 옆에는 곰과 호랑이가 앉아있다. 곰과 호랑이라면 단군신화의 ‘필’이 확 풍기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딘가 신성한 곳에서 펼쳐지는 씨름경기라는 얘기인가. 역사는 벽화중 씨름 장면이 유독 돋보이는 이 고분에 특별히 씨름고분이라는 뜻인 각저총(角抵塚)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씨름경기에 임하는 두 장사의 그림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앞쪽의 장사는 고구려인인 듯 싶은데, 뒤편의 장사는 서역인인 듯 싶다. 큰 눈과 메부리코가 매우 인상적이다. 이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있지만 고구려인과 서역인의 씨름대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씨름 벽화가 각저총에서만 그려진 게 아니다. 역시 고구려 고분인 장천 1호분의 벽화에도 흐릿한 씨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외교사절 관람용 스포츠
씨름은 권법의 일종인 수박(手搏)과 함께 호신무예로서 중시되거나 외국사신이나 손님에게 그 나라, 혹은 그 가문의 힘을 과시하는 의전용 유희로 유행되기도 했다. 136년 부여왕이 한나라를 방문했을 때 씨름을 관람했고, 642년(백제 의자왕 2년) 백제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연회 자리에서 씨름을 관람한 예가 있다.
1343년(충혜왕 후 4년) 2월 왕이 궁궐에 나가 용사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관람했다.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도 사신의 요구로 개경 시가의 누각에 나가 격구와 씨름을 구경하고 상도 주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들어앉은 태종은 1419년(세종 1년) 아들인 세종과 함께 한강변에서 씨름을 구경했다. 이후 씨름을 ‘잡기(雜技)’로 여겨 국왕이 관람하는 씨름 경기는 점차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외국 사신의 관람 요청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1426년(세종 8년) 명나라 사신이 목멱산에 올라 활을 쏘고 씨름경기를 관람했다.
김홍도의 풍속화 중 씨름도. 씨름이 저잣거리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대중 스포츠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가 왕년엔…” 이항복의 씨름 무용담
16세기 들어 씨름을 둘러싼 무용담이 속출했다.
예컨대 이항복(1556~1618)은 14~15세에 씨름과 공차기를 잘해서 길거리에 맞설 자가 없었다고 한다.(<백사집>)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1567~1596)도 유생 시절 씨름으로 지역 장사를 쓰러뜨렸다.(<용호한록>)
1557년(명종 12년) 대사헌 오겸 등은 “진사 김홍도(1524~1557)가 부친의 장례를 마친지 얼마후에 동료들과 함께 장기와 바둑을 두고 혹은 씨름을 겨룬 사실을 알고도 제대로 문책하지 못했다”면서 사임을 청했다. 같은 시기인 1565년(명종 20년) 명종은 강섬(1516~1594)을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으로 임명했는데, 이때의 <명종실록> 기자는 “강섬은 한성판윤 같은 중책을 맡을 자격이 없었다”고 꼬집었다. 그 이유는 “강섬이 (13살에 죽은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1551~1562)의 묘를 지킬 때 재실에서 씨름판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씨름은 사대부마저 물불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씨름은 명종 시기, 즉 16세기 중엽 민중의 세시풍속으로 깊숙히 뿌리박는다. 당대의 문신인 소세양(1486~1562)의 문집인 <양곡선생집>을 보면 단옷날 서울 거리에서 씨름과 그네뛰기 하는 풍경이 등장한다.
북한의 씨름 장면. 상의를 입고 경기를 펼치는 모습이 남측과는 다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선에 불어닥친 씨름 광풍
이 뿐이 아니다. 단옷날에 요즘의 민속장사씨름대회가 열려 각지의 장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는 기사도 나온다.
“호남의 풍속에 단옷날이면 관아 마당에 모여 씨름판을 벌여 우승한 자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그러자 먼 곳에서 식량을 싸가지고 오는 자도 있었다.”(<송자대전> ‘부록 최신록’)
특히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 지역인 여산 작지골이나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금산 직지사는 씨름경기자 자주 열리던 곳이었다.
<동국세시기>는 “해마다 단오가 되면 금산 직지사에서 씨름을 했는데, 수천 수만명이 구경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단옷날 씨름 풍속이 종종 과열현상까지 빚었던 모양이다.
1560년(명종 15년) 동궁(세자궁)의 별감 박천환이 시강원(세자의 교육기관)에 와서 “저잣거리에서 양반의 무리에게 집단구타당했다”고 호소하는 실록(<명종실록>) 기사가 흥미롭다.
“제(박천환)가 단옷날 세자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양반의 무리를 만났는데, 억지로 각저(씨름) 놀이를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제가 거부하자 그들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의복과 갓을 찢고 회사문(回謝文)까지 찢었습니다.”
세자궁 소속 관리가 모욕을 당한 이 일 때문에 단옷날 씨름(각저)대회는 금지됐다.
“사대부의 종이라도 이렇게 모욕을 당하면 안되는데 하물며 궁중의 별감이랴. 별감을 집단 구타한 자들을 끝까지 잡아들이라. 그리고 지금 이후 각저(씨름)과 도박, 답교놀이 등은 엄금하라.”(<명종실록>)
20세기초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 씨름은 장소 불문, 나이 불문으로 펼쳐진 놀이였다.
■씨름으로 청나라 장수 죽인 무용담
씨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와중에는 적군과의 백병전 개념으로 훈련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중에 휘하 장수와 수군들에게 4차례 씨름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씨름을 선상 군사 훈련의 하나로 여겼을 뿐 아니라 오랜 전쟁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한 진작책으로 활용한 것이 틀림없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간 김여준은 청나라 장수 우거와 씨름판을 벌여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세기에 편찬된 <해동속악부>는 “김여준과 우거의 씨름은 단순한 씨름이 아니라 주먹까지 쓰는 격투 씨름이었으며, 결국 청나라 장수인 우거가 쓰러져 죽는 것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김여준은 ‘단순 살인이 아니라 군대에서 무용을 겨루다 일어난 일’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조선 씨름은 청나라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조선씨름은 이후 청나라 사신의 접대용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청나라 사신들은 조선에 올 때마다 씨름 구경을 원했다. 씨름판은 조·청 국경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의주·평양·황주·개성의 주요 지역마다 열렸다. 씨름꾼은 1667년(현종 8년) 60명에서, 1676년(숙종 2년) 200명으로 늘어났다. 경기는 연승제로 진행되었는데, 한사람이 5연승을 거두면 상급을 받았다. 씨름은 이렇게 온 백성이 즐기는 놀이로 변모한 역사를 갖고 있다.
■각저총 씨름의 관전포인트
씨름의 장구한 역사를 굳이 돌이켜 볼 필요도 없다.
앞서 훑어본 4~5세기 무렵의 각저총 벽화는 왜 인류가 공동으로 지켜가야 할 무형유산인지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씨름은 지금도 전세계 160여종이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이미 1600~1700년전 고구려와 서역이 친선경기를 벌일만큼 ‘글로벌 스포츠’였음을 일러준다. 즉 씨름이 단순히 특정지역의 놀이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무형유산이자 인류 다양성의 원천임을 ‘각저총’ 벽화가 상징해주고 있다.
또하나 놓쳐서는 안될 관전포인트가 있다. 각저총 벽화의 주인공이 다름아닌 고구려인이며, 무엇보다 그 경기 모습이 지금의 한국씨름과 흡사하다는 점이다. 특히 씨름의 형태가 전세계 160여종에 달한다지만 한국 씨름만의 특징이 도드라진다.
그것은 다른 나라의 ‘씨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샅바’라 할 수 있다. 씨름꾼을 샅바꾼이라 할만큼 샅바는 한국씨름을 대표한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간 펼쳐진 씨름 대결. 씨름은 별다른 기술없이도 즐길 수 있는 놀이이다.|문화재청 제공
■남녀노소와 외국인까지 즐길 수 있는 샅바씨름
샅바를 잡으니 맨몸이나 허리띠 만으로 잡고 하는 씨름보다 승부를 내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게다가 다리와 허리에 매는 한국 특유의 샅바 덕분에 다리씨름의 다양한 기술이 생겼다.
상대의 다리를 지레대로 삼아 공격하고, 상대의 다리를 잡아 다양한 기술로 승부를 내는 것이 한국 씨름의 특징이다. 힘이 약한 사람도 샅바를 이용한 기술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면 승리할 수도 있다. 그랬으니 아메노모리 호슈가 ‘힘보다 꾀가 있어야 좋다’고 평한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씨름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2013년에 벌어진 외국인 씨름대회. 샅바를 잡으면 강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서 무너뜨릴 수 있다.|문화재청 제공
부상의 염려가 거의 없는 모래판이나 매트에서 샅바라는 끈 하나만으로도 상대와 겨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맨처음 샅바를 잡아보는 이 누구나, 심지어는 외국인까지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씨름을 즐길 수 있다. 선수 뿐이 아니라 모이는 사람, 누구나 참여해서 즐기는 놀이가 바로 씨름인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국의 샅바씨름을 ‘고려기(高麗技)’라 따로 불렀다. 중국의 씨름인 ‘솔각’과 일본의 스모(相撲)가 손동작 위주인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특징들은 각저총 벽화 등에 등장하는 고구려 씨름이 고려-조선을 거쳐 세시풍속의 다양한 놀이 형태로 퍼졌지만 씨름의 원형은 지금까지 변치않고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지금 비록 땅은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씨름은 1600~1700년 이상 공동체의 얼을 담아 지켜온 무형유산이라는 뜻이다.』(2)
<주>
(1) 각저총 씨름도가 말하는 고구려의 전통과 개방성 (daum.net)2017. 11. 30.
(2) 고구려 각저총에 새긴 '씨름' 유네스코 유산의 향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2018. 11. 1.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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