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고구려(10) - 고구려 문화유산(14) 고구려 세계문화유산(14) 쌍영총 본문
쌍영총은 통로에 2개의 커다란 8각기둥이 세워져 있어 붙인 이름입니다. 쌍기둥무덤이 되겠습니다.
벽화의 종류로는
널길 동벽의 우차도 · 개마무사도 · 여인행렬도,
서벽의 기마인물상도,
앞방 입구 통로 동벽의 험상궂은 얼굴의 역사,
널방 동벽의 남녀행렬도,
현실 북벽에 있는 묘주인부부의 초상 · 남녀시종 · 쌍현무 등이 있습니다.
5세기 말엽을 전후하여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됩니다.
고구려 벽화고분을 대표하는 고분 중 하나인 쌍영총의 앞방 전경. 8각 돌기둥과 앞방 벽, 그리고 천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출처; 연합뉴스, 쌍영총 앞방 전경 (daum.net)2006. 8. 29.
『고구려 쌍영총 벽화, 눈으로 직접 본다
높이 168.7㎝, 너비 182.7㎝. 어른의 몸체 크기만한 1600년 전 벽화편으로 다가가자 가슴이 떨렸다.
곱게 화장한 1600년 전 고구려 여인들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입술에 색칠하고 볼에는 연지를 찍었다. 그들은 순박하면서도 야무진 표정으로 맞은편의 모자 쓴 고구려 청년들을 바라보며 열을 지어 서 있다. 시선을 옮기니 바로 위쪽에 당당한 표정으로 갑옷을 차려입은 개마무사가 보이고, 그 옆쪽엔 한가로이 소가 끄는 수레를 모는 시동이 있다. 다시 위쪽을 주시하면 깃발을 들고 걸어가는 남성들의 행진 모습이 자리한다. 5세기 말 도읍 평양을 중심으로 우아하게 농익은 고구려 벽화미술 특유의 도상인 ‘남녀거마도’(男女車馬圖)다.
‘빛의 과학’전에 처음 공개된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주요 이미지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 여인상을 가까이에서 찍은 모습. 갸름한 얼굴에 순박한 눈매가 인상적이다.
코로나19 재확산 사태로 곡절 끝에 지난달 말 재개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의 특별전 ‘빛의 과학, 문화재의 비밀을 밝히다’(11월15일까지)의 하이라이트는 사상 처음 관객에게 공개된 고구려 쌍영총 벽화편이다. 이 유물은 1913년 일본 학자들이 평양 외곽의 평안남도 용강읍의 고구려 고분 쌍영총에서 처음 조사했던 무덤 내부 벽화들 가운데 일부로 원래 널길 동쪽 벽에 붙어 있었다. 1920년대 혹은 1930년대 훼손돼 떨어진 것을 당시 국립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수습해 소장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까지는 일제강점기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복원도만 알려져 있다가 박물관이 전격적으로 벽화편을 대중 앞에 공개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고적도보>에 나온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 복원도. 오늘날 학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쌍영총의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고구려 벽화는 북한이나 중국 만주의 석실무덤에 있어 실물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뜻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은 전시에 조각편이 등장한 쌍영총과 개마총을 비롯해 감신총, 고산리 1호분, 운봉리 고분 등의 벽화 조각을 무려 262건 401점이나 소장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박물관이 수집한 뒤 해방 이후 그대로 인수해 보관해온 것들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총독부 당국과 일본 학자들은 1910년 평남 대동군 대성산성 고분 조사를 시작으로 1941년 평남 중화군 진파리 고분군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했다. 이들 가운데 벽화무덤만 30기에 이르렀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벽화편은 일제의 이런 적극적인 조사의 부산물이다.
이상한 점은 수집된 벽화 조각편 가운데 구체적인 수습·수집 경위에 대한 기록이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편은 최소한 80년 이상의 수장 내력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대중에 선보였던 것은 쌍영총 고분의 널길 서쪽 벽에 붙어 있다 수습된 말 탄 기마무사상을 그린 조각이 유일하다. 그나마 이 조각도 주로 복제품으로 선보였을 뿐이다.
쌍영총 널길 동벽 벽화편의 적외선 촬영 이미지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에서 지난해와 올해 작업해 ‘빛의 과학’전에 처음 내보였다.
고구려 벽화편의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이렇게 홀대를 받는 것엔 속사정이 있다. 1904년 평남 강서군수 이우영이 사신도로 유명한 강서대묘 안에 들어가 벽화를 확인한 것을 계기로, 20세기 초 고구려 벽화는 일본 학계는 물론 서구 학계에서도 중요한 역사 유적으로 집중 탐구 대상이 됐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민심을 자극했다. 외지 연구자들이 몰려들자 주민들 사이엔 벽화 무덤 속 회벽이 신통한 영약 재료여서 외지인들이 찾아온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회벽을 갈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돌면서 벽화무덤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고구려 벽화 전문가인 전호태 울산대 교수는 “20~30년대 이런 속설 때문에 평안도 일대의 고구려 벽화무덤 상당수가 파괴·훼손에 직면했고, 유적의 정비 보존을 위해 파견된 당국자들이 벽화 파편을 급히 거둬 박물관에 가져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쌍영총 벽화편과 함께 처음 공개된 개마총 벽화편의 적외선 촬영 사진. 태양 안에 다리 셋 달린 삼족오와 구름무늬 등이 보인다.
안타까운 것은 벽화편들을 수습하고 보관하는 데 급급하다 보니 기록이 전혀 남지 않았고, 후대 학예사들도 유물의 내력과 정확한 연고를 알지 못해 사실상 수장고에 파묻히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전시에 나온 쌍영총의 행렬도 벽화편과 개마총의 삼족오 무늬 파편들은 이런 방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세상에 나왔다.
지난해 보존과학부와 고고역사부 학예사들이 적외선과 엑스선 투과 기술을 활용해 정밀한 도상을 확인하고 연고 무덤을 밝힌 성과를 업고 출품된 것이다. 쌍영총은 국내 학자들에게 전혀 개방된 적이 없고 개마총은 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됐다. 박물관 쪽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쌍영총과 감신총의 다른 벽화 조각편들도 별도로 해체 보존 처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1)
"쌍영총 벽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머리를 튼 ‘얹은 머리’를 하고 있다.
안악2호분의 여인은 가체를 얹으면서 머리숱을 풍성하게 보이게 했다.
삼실총 벽화의 ‘얹은머리’ 여인은 상당히 맵시있게 처리된 스타일을 뽐내고 있다.
덕흥리 고분의 여인은 머리 형태를 아주 간결하게 돌돌 말아 정수리 위에 올려 고정한 ‘뭉치머리’를 선보이고 있다. 시쳇말로 ‘똥머리’ 스타일이다.
덕흥리 고분과 수산리 벽화분의 인물들은 ‘쌍상투 머리’를 하고 있다. 주로 신분이 낮은 하녀나 광대들 같다.
또 무용총의 시녀와 무용수는 머리를 뒤로 내린 ‘채머리’ 스타일이다. ‘푼기형 머리’도 있다.
삼실총에서 보듯이 뒤로 빗어 넘긴 상태에서 양쪽 볼과 귀 사이로 애교머리처럼 흘러내리도록 한 스타일이다."
『벽화 속 ‘빨간 립스틱의 화장남과 화장녀’…“고구려인은 패션피플”[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범상치 않고 그대의 손을 만져보니 솜처럼 부드럽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의 한 귀절이다. “온달과 결혼 할래!”를 외치다가 쫓겨난 평강공주가 누추한 온달 집을 찾았다.
온달은 부재중이었다. 시각장애인인 온달의 노모는 공주가 들어서자 몸에서 나는 향을 느꼈다. 노모는 솜처럼 부드러운 공주의 손을 잡고 “그대처럼 천하의 귀한 분이 올 곳이 못된다”고 했다.
고구려벽화분에서 보이는 짙은 화장의 흔적. 연술연지(립스틱)은 물론 볼에도 백분이나 홍분을 발랐고, 곤지까지 찍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전호태 교수 설명
■평강공주의 몸에서 향기가 났다
하기야 공주로 태어나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터질세라’ 궁궐에서 고이 자란 분이 아니던가. 그런 분이 누추한 온달의 집을 방문했다. 그랬으니 몸에서 향기가 나고, 손은 솜처럼 부드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달리보면 어떨까.
공주가 향이 나는 분을 발랐거나, 혹은 향주머니를 지녔을 수도 있다. 또 공주가 각종 세안제를 발라 ‘솜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을 갖게 된 것일 수도 있다. 6세기 중엽 편찬된 <제민요술>(농업기술서)는 “고운 등겨를 끓인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문질러 말린 다음 향유와 성분이 비슷한 면지와 손약을 발라 피부를 부드럽고 매끈하게 만든다”고 했다.
다른 고분에서도 입술과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모습이 역력하게 보인다. 얼굴은 지워졌어도 연지, 곤지 등 화장의 흔적은 남아있다.|전호태 교수 설명
평강공주 만큼은 아니더라도 한반도와 그 이북에서 터전을 잡고 살던 사람들은 예부터 ‘깨끗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 <후한서> <북사> <남사> <양서> 등 당대의 중국사서는 고구려인 이야기를 쓰면서 빼먹지 않은 구절이 하나 있다.
‘고구려인들은 깨끗함을 좋아한다(潔淸自喜 혹은 潔淨自憙)’는 것이다.
비단 고구려 뿐이 아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한’조는 “변진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아름답고 의복이 깨끗하다”고 했다.
<양서>와 <남서>는 “백제인들은 키가 크고 깨끗하다”고 썼다. 중국 입장에서 이른바 ‘동이족’은 ‘깨끗한 사람들’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500여년 뒤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도 “옛 사서에 ‘고려인들은 모두 깨끗하다’고 했는데, 와서 보니까 과연 깨끗하다”고 했을까. 서긍은 “그런 고려인들은 ‘중국인들은 때가 많다’고 손가락질했다”고 전한다.
한마디로 고구려를 비롯해서 백제·신라 뿐 아니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깔끔쟁이’ ‘멋쟁이’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
357년에 조성된 안악3호분의 여주와 시녀 일부는 윗입술은 검정색, 아랫입술은 빨간색으로 칠했다.|전호태 교수 설명
■가체머리, 애교머리…
그래도 ‘증거를 대라’고 끝끝내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겠다. 그런 의심쟁이들에게 줄 결정적인 증거자료가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이 간행하는 <고고학지>(29집·2023년 12월)에 관련 논문(전호태 울산대 교수의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인의 화장과 화장품’)이 실렸다. 그 김에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고구려인들의 헤어스타일부터 잠깐 훑고 지나가자. 헤어스타일은 엄청 다양하다.
안악3호분의 여주인과 시녀들의 패션이 무척 화려하다. 여주와 시녀를 가릴 것없이 가체를 얹은 헤어스타일도 눈에 띈다. 장식이 약간 차이가 난다. 얼굴은 백분을 바른 듯 허여멀건하고 말끔히 밀어낸 눈썹 위에 화장먹으로 새로 그렸다. |전호태 교수 설명
먼저 안악3호분의 여주인과 시녀에게서 보이는 헤어스타일(‘고리튼 머리’)을 한번 살펴보자.
357년 축조된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두고 ‘고국원왕설’(북한학계)과 ‘동수설(중국계 귀화인·남한학계)’ 등이 맞서고 있다. 어떤 경우든 고구려 최상층의 고분이다. 그래서인지 등장 인물들의 헤어스타일이 예사롭지 않다.
‘여주’(여주인공)는 조선시대 떠구지(가체 위에 장식한 나무틀)처럼 고리 같이 생긴 틀을 가체 안으로 통과시켜 연결하고 여기에 각종 장식을 달아 마무리했다. ‘여주’ 옆에 보이는 시녀들도 장식이나 형식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과시하고 있다.
주방, 우물가, 푸줏간, 방앗간 등에서 일하는 여인들도 비슷하다. 다만 장식품이나 일부 꾸미는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나타낼 뿐이다. 안악3호분 시대, 즉 4세기 중반을 풍미한 고구려인의 헤어스타일을 짐작해볼 수 있다.
주방 및 푸줏간, 우물가, 방앗간 등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헤어스타일도 화려하다. 안악3호분 시대, 즉 4세기 중반을 풍미한 고구려인의 헤어스타일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밖에 하늘을 나는 천녀와 주악녀 등에서 보이는 ‘비천계’도 보인다. 중심에 고리를 만들고 뒤와 옆으로 내린 날개 같은 헤어스타일이다. 무용총(거문고 타는 여인)과 덕흥리 고분(완함을 연주하는 여인)에서 보인다.
또 쌍영총 벽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머리를 튼 ‘얹은 머리’를 하고 있다.
안악2호분의 여인은 가체를 얹으면서 머리숱을 풍성하게 보이게 했다.
삼실총 벽화의 ‘얹은머리’ 여인은 상당히 맵시있게 처리된 스타일을 뽐내고 있다.
덕흥리 고분의 여인은 머리 형태를 아주 간결하게 돌돌 말아 정수리 위에 올려 고정한 ‘뭉치머리’를 선보이고 있다. 시쳇말로 ‘똥머리’ 스타일이다.
덕흥리 고분과 수산리 벽화분의 인물들은 ‘쌍상투 머리’를 하고 있다. 주로 신분이 낮은 하녀나 광대들 같다.
또 무용총의 시녀와 무용수는 머리를 뒤로 내린 ‘채머리’ 스타일이다. ‘푼기형 머리’도 있다.
삼실총에서 보듯이 뒤로 빗어 넘긴 상태에서 양쪽 볼과 귀 사이로 애교머리처럼 흘러내리도록 한 스타일이다.
일제강점기에 벽화를 보고 그린 남포 쌍영총 인물의 모사도. 두 여인(시녀로 추정)의 볼과 입술에 연지를 바르고 눈썹 밑에 짙은 색조 화장을 했다. |전호태 교수 설명
■빨간 색, 검은 색 립스틱
그렇다면 화장은 어떨까. 화장한 인물들이 보이는 가장 오래된 벽화고분은 역시 356년 축조된 안악3호분이다.
앞서 밝혔듯이 안악3호분은 등장 인물들의 헤어스타일, 즉 화려한 ‘고리튼 머리’가 돋보이는 고분이다.
그런데 이 고분의 ‘여주’와 오른쪽 시녀를 보라. 아랫 입술만 점찍듯 빨간 립스틱(연지)을 칠했다. 윗입술은 까맣다.
반면 왼쪽 두 시녀는 아래 위 입술이 모두 붉다. 또 방앗간, 주방, 우물가, 푸줏간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입술도 빨간 립스틱을 점찍듯 칠했다. 덧붙여 등장인물들의 얼굴은 백분을 바른 듯 하얗다. 또한 눈썹 모양도 마치 그린 듯 또렷하다.
볼연지를 둥글게 찍는 곤지 중에는 반달 모양(옥도리 벽화분)도과 꽃모양(천왕지신총) 으로 변화시킨 케이스도 보인다.|전호태 교수 설명
우선 립스틱을 살펴보자. 왜 어떤 이들은 아래 위 입술을 모두 빨간 립스틱으로 칠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래=빨간’, ‘위=검은 색 립스틱(혹은 맨 입술)’으로 했을까. 여기서 전호태 교수가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를 소환한다.
“검은 연지 입술 위에 칠하고…희거나 검거나 본 모습 잃어 화장이 끝나면 울고 있는 것 같네….”(백거이의 ‘시세장’)
8~9세기까지도 검은 립스틱(연지)도 화장법의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세기 편찬된 농서인 <제민요술>은 “연지(립스틱) 주된 재료는 소의 골수인데, 잇꽃(홍화) 추출물인 ‘홍’을 넣으면 붉어지고, 다른 것을 넣으면 넣은 것의 색이 된다”고 했다. 이제야 안악3호분의 ‘여주’와 일부 시녀가 아래는 빨간, 위는 까만 립스틱을 찍은 이유가 드러난다. 각자의 취향에 따른 화장법이었던 것이다.
고구려 벽화에는 다양한 헤어스타일의 남녀가 보인다. 덕흥리 고분에서는 시쳇말로 ‘똥머리’로 일컬어지는 ‘뭉치머리’와 두 개의 상투를 트는 ‘쌍상투머리’가 보인다.
■하얀 분 바르고, 눈썹 밀어 그리고…
또 안악3호분의 등장 인물이 얼굴이 허여멀건하고, 눈썹이 그린 듯 또렷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국시대 초나라 애국시인 굴원(기원전 343~278)의 시(‘초사’)를 보자. “백분 바른 얼굴, 검게 그림 그린 눈썹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고 윤기가 흐른다”고 읊었다. 안악3호분 시대보다 700년이나 앞서, 눈썹을 그리는데 쓰인 화장먹과, 얼굴을 하얗게 만들 백분(白粉)이 존재했음을 알린다.
무엇보다 <제민요술>에 “백분 상자에 정향을 가득 넣어두면 분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는 구절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고구려 평강공주의 몸에서 향내가 났다는 게 과장이나 거짓이 아니라는 얘기다.
안악3호분 여인들의 잘 장돈된, 매끈한 눈썹은 또 어떤가. 후한시대 유희(생몰년 미상)이 지은 <석명>은 “눈썹 화장은 눈썹 위에 먹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썹을 깎아낸 뒤 그 위에 그려넣는 것”이라 했다.
물론 안악3호분의 화가가 자의적으로 눈썹을 또렷하게 그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석명>의 설명대로 눈썹을 밀고, 그 위에 깔끔하게 그려넣는 것이 당대 고구려의 화장법일 수도 있다. 이와같은 입술 립스틱 장면은 지안(集安)의 벽화고분인 각저총(5세기 전반)의 시녀들에게도 보인다.
삼실총 여인들의 헤어스타일도 다양하다. 단정하고 단아한 얹은 머리가 눈길을 끈다.
■양귀비 손수건은 빨개~
비단 백분과 연지(립스틱) 뿐이 아니다. 안악3호분의 시대보다 50여 년이 지나자 유행이 진화한다.
5세기초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평남 순천 동암리벽화분의 귀족부인과 시녀의 얼굴에는 입술연지 외에 볼연지가 보인다.
5세기 전반의 연탄 송죽리벽화분에는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의 마부가 등장한다. 이 마부의 볼에 홍조가 띄었고 입술도 붉다. 헤어스타일 등으로 미뤄보면 영락없는 여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부라는 역할을 감안한다면 남성일 가능성도 짙다.
붉게 얼굴 화장을 한 경우는 중국에서도 단적인 예를 찾을 수 있다. 즉 “당 현종(재위 712~756) 때 양귀비(719~756)가 땀을 닦은 손수건은 언제나 복숭아 빛으로 물들었다”(<개원천보유사>)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나라 시인 이산보(미상)의 시(조춘미우·早春微雨)’는 “너울너울 춤추는…소맷자락…붉게 화장한 두 볼엔 빨간 땀방울 방울방울 떨어진다”고 읊었다. 당대 중국에서도 ‘볼빨간 화장’이 유행했다는 얘기다. 홍연지는 잇꽃(홍화)를 재료로 삼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용총 ‘춤추는 여인’은 머리를 뒤로 늘어뜨린 ‘채머리’이다. 삼살총의 ‘얹은머리’ 여인은 고분벽화에서 가장 맴시있게 처리된 스타일을 뽐내고 있다. 삼실총의 ‘푼기명 머리’ 여인은 양쪽 볼과 귀 사이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이것을 ‘애교머리’라 한다.
■상현달·매화꽃 문양 곤지
5세기 중엽이후 조성된 고분의 등장인물 중에는 입술+볼연지 외에도 곤지까지 붉게 칠하는 경우가 생긴다.
남포 옥도리 벽화분과 순천 천왕지신총, 남포 수산리벽화분, 쌍영총(5세기 말·귀족부인) 등이 그렇다.
그런데 볼연지를 둥글게 찍는 곤지 중에는 상현달(둥근 반달) 모양으로 변화를 준 경우(옥도리 벽화분)도 있다. 또 천왕지신총의 귀족부인은 꽃모양 곤지로도 볼 수 있는 문양이 보인다.
당나라 때 편찬된 <장태기>는 “(남북조 시대) 송 무제(363~422)의 딸인 수양공주가 이마 한가운데 매화를 그린 것에서 유래하여 수 문제 때 궁중여인들이 얼굴을 오색화로 장식했다”고 했다.
이와같은 색다른 화장법이 고구려에 전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대 고구려에서 자생·유행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마에 연지를 넣어 꽃모양은 물론이고, 옥도리 벽화분처럼 상현달 모양도 그렸을 수 있다. 고구려 독자적인 화장법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성들이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까지 발랐다. |전호태 교수 설명
■볼빨간~화장
고구려 화장법 중에서 눈길을 끄는 벽화가 둘 있다. 하나는 남포 쌍영총 널길 벽화이다.
벽화에 등장하는 두 여인(시녀로 추정)의 화장이 인상적이다. 볼과 입술에 연지를 바르고 눈썹 밑에 짙은 색조 화장을 했다.
또 장천 1호분의 등장인물을 보라. 예불 중인 남녀 가운데 여자(귀족여인)는 립스틱을 바르고 얼굴은 옅은 화장을 했다.
그런데 공연을 펼치고 있는 오현금 연주자와 무용수는 어떤가.
무용수는 더하다. 얼굴 전체가 짙은 홍조, 즉 ‘볼빨간~’이다. 악기 연주자와 댄서 등은 공연을 위해 무대분장을 한 셈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붉은 색을 내는 홍연지가 고구려에서 독자기술로 개발되고 대중화했음을 웅변하고 있다.
만약 홍연지가 보이는 순수한 수입품이라면 평범한 무용수나 시녀가 그렇게 짙게 바를 수 있겠냐는 것이다.
5세기 중엽 즈음 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에서 잇꽃(홍화·연지의 재료)의 재배와, 거기서 얻은 홍연지·홍분의 제조·유통이 대중화 했음을 알 수 있다.
수산리고분의 남자시종들(왼쪽 사진)은 보기에도 맵시있고 멀끔한 꽃미남들이다. 송죽리 고분의 ‘마부’는 여성의 미모가 연상될 정도로 허리가 잘룩하고 얼굴선이 곱고 희며 입술은 붉다. 그러나 ‘마부’인만큼 남성일 가능성도 크다.
■짙은 화장 속 꽃미남
여성은 그렇다치고 남성은 어떤가. 고구려는 아니지만 신라에 심상치않은 기록이 있음을 알고 있다.
<삼국사기>는 <신라국기>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한다. <신라국기>는 768년(혜공왕 4) 당나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신라를 방문하고 돌아간 고음(생몰년 미상)이 편찬한 신라 견문록이다.
“<신라국기>에는 ‘신라가 귀인 자제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선발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이름을 화랑이라고 했고, 나라사람들이 모두 떠받들며 섬겼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진흥왕’)
신라 시대 화랑은 짙은 화장을 한 ‘꽃미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성들이 얼굴에 하얀 분을 바르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까지 발랐다.
예컨대 가장 이른(357년) 안악3호분 벽화 무덤주인과 신하들, 행렬도의 인물들을 보라. 입술이 또렷하고 붉다. 남포 덕흥리·순천 동암리·수산리·지안 삼실총·개마총 벽화분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연탄 송죽리 벽화분에 그려진 마부는 만약 남성이라면 어떤가. 여성의 미모가 연상될 정도로 얼굴선이 곱고 희며 입술은 붉다.
“온달과 결혼 할래!”를 외치다가 쫓겨난 평강공주가 누추한 온달 집을 찾았다. 시각장애인인 온달의 노모는 공주가 들어서자 몸에서 나는 향을 느꼈다. 노모는 솜처럼 부드러운 공주의 손을 잡고 “그대처럼 천하의 귀한 분이 올 곳이 못된다”고 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백분거사의 화장법
비단 고구려·신라 뿐이 아니라 당대 중국 남성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조 송나라 때 인물인 유의경(403~444)의 <세설신어>는 “삼국시대 관료 겸 사상가인 하안(193?~249)이 늘 분통을 지니고 다니며 얼굴에 바르고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신경 썼다”고 했다. 또 같은 유의경의 <유명록>은 ‘시장에서 백분 파는 아가씨에게 흠뻑 빠져 매일 백분을 사갔던 부잣집 아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밖에 안지추(531∼591)의 <안씨가훈>은 “재산깨나 있고, 신분 지위가 있는 (남북조) 양나라 사내들은 너나없이 향내를 옷에 쐬고 수염을 말끔히 밀었으며, 분 바르고 연지를 찍었다”고 개탄했다.
<삼국사기>는 <신라국기>를 인용하면서 ‘신라가 귀인 자제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선발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이름을 화랑이라고 했고, 나라사람들이 모두 떠받들며 섬겼다”고 전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의 시인·묵객들이 늘 백분통을 지니고 다니며 ‘얼굴에 톡톡’ 거렸다. 그러니 고구려 고분의 남성들 역시 화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참 예전에는 고구려 벽화고분 하면 주로 무덤 주인공이 중국인이니 고구려인이니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사실 지금도 그 논쟁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요즘같은 글로벌 시대에 국적을 둘러싼 설왕설래는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논쟁’인가.
예컨대 안악3호분의 ‘동수’나 덕흥리 고분의 ‘진’이 중국인 망명객이라 치자. 그렇다손치더라도 고구려에 귀화해서 수십년간 이 땅에서 터전을 잡고 묻혔다면 고구려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그런 논쟁 말고, 벽화 속에 담겨있는 1500년전 고구려인들의 삶 속으로 퐁당 빠져보자.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인의 풍속도를 찬찬히 살펴보자. 한가지만 보더라도 그렇게 유행했던 남성 화장이 1500년만에 서서히 부활하고 있지 않은가.(이 기사를 위해 전호태 울산대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2)
<참고자료>
전호태, ‘고분벽화로 본 고구려인의 화장과 화장품’, <고고학지> 29집, 국립중앙박물관, 2023
이은주,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여성들의 머리 형태 연구-고리 튼 머리와 얹은 머리를 중심으로’, 조선대 석사논문, 2008
김용문,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머리모양과 화장문화’, <고구려발해연구> 17권, 고구려발해학회, 2004
유지효, ‘한국여성의 전통화잔문의 연구’, 전남대 박사논문, 2005
박보영·황춘섭, ‘한국, 중국, 일본 여성의 색조화장문화’, <복식> 39권, 한국복식학회, 1998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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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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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고분벽화(古墳壁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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