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고구려수도 (3)
력사를 찾아서
고구려는 시조 동명성왕 때(BC 37년) 졸본(광개토태왕릉비에는 '홀본') 현 랴오닝성 환인 오녀산성에 첫 도읍을 하였고, 2대 유리왕 때(3년) 지린성 집안(지안)에 있는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10대 산상왕 때(209년) 같은 지린성 지안의 환도성으로 두 번째 천도한 후, 20대 장수왕 때(427년) 현 북한의 평양으로 마지막 천도해서 3번 천도했다고 합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수도에 대한 학계의 통설은 1940년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나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의 학설을 집대성해 발표한 내용이 그대로 견지돼 온 것입니다. 출처;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신동아 (donga..
세계문화유산 오녀산성은 요녕성(랴오닝성) 본계시(번시시) 환인현 오녀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됩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홀본성(忽本城)이라고 하고, 삼국시대 관련 다른 기록들은 대첼 졸본성(卒本城)이라 쓰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수도를 홀승골성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녀산성 성벽 전체 둘레가 4574m에 이르는데, 그중 4189m는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 동쪽과 남쪽 그리고 정상부의 주요 계곡부에만 총 길이 565m 정도 인공 석축 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합니다.(1) 이형구교수는 요동반도는 고조선의 강역이지만 고구려가 3세기에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4세기 말 광개토대..
고구려의 다물이념 지금까지 필자는 고구려가 그 말기에 수 당과 충돌하기 전까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대외관계 기록(주로 전쟁기록)을 살펴보면서 고구려 대외전쟁의 기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 대외전쟁의 성격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첫번째 단게는 추모왕(서기 전 37~20년) 때부터 민중왕(서기 44~47년) 때까지로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지반을 확립하는 시기였다. 두번째 단계는 모본왕(서기 48~52년) 때부터 미천왕(서기 300~330년) 때까지로서 지금의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 기간에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나 신라와는 거의 마찰이 없었다. 백제와는 동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화평을 유지하였고, 신라와는 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