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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정은 상해를 떠나 여러 곳을 전전했고 독립운동가들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남경·진강·항주·가흥 등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이 도착하고 김규식이 돌아오자 선생은 임정 재건작업을 주도했고 1933년 말부터 1935년까지 약 2년간 국무위원과 임정수반을 맡았다. 임정에 합류한 선생은 조직을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해 임정의 기능을 회복해 나갔으며 은신 중인 김구와도 협력에 나섰다. ■ 항일 언론부터 무장투쟁까지 이끈 전천후 독립운동가2025. 2. 15. 00:02━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⑭ 우강 양기탁우강(雩岡) 양기탁은 1871년 평양 소천에서 한학자인 부친 양시영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양시욱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

1926년 12월. 지리멸렬하던 임정에서 잠시 국무령을 맡았던 이동녕(1869~1940)은 그간 주목받지 못한 후배 운동가에게 자리를 넘겼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도 하겠다는 이가 없어 억지로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임정 최고 지도자에 오른 이가 바로 김구(1876~1949)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리더십 잃은 통합 임정.. 3대 구심점 '이·창·만' 모두 떠나.. '채소장수' 윤봉길의 폭탄, 꺼져가던 임정 불씨 살렸다서울신문 류지영기자 2019. 1. 17. 03:36 2부 통합과 갈등 : 상하이 시기 ③ 임정, 외교에서 투쟁으로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이 집회 장소로 사용했던 기독교 교회 ‘무얼탕’.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도 여기서 열렸다.상하이 ..

일제는 이와 같은 신민회의 항일적인 성격을 알아내고 이 기회에 식민통치의 장애 세력을 뿌리뽑겠다는 목표 아래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혐의'는 1910년 12월에 압록강 철교준공 축하식에 데라우치가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암살을 모의했다는 터무니없는 조작이었다. 이와 같은 각본을 꾸민 일제 경찰은 1911년 9월 윤치호ㆍ이승훈ㆍ양기탁ㆍ유동열ㆍ안태국 등 전국에서 600여 명의 애국지사를 검거, 투옥하였다. ■ '105인사건' 날조하여 애국자 탄압오마이뉴스 김삼웅기자 2018. 10. 15. 16:06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24회] 일제가 사상전향을 위해 꾸며낸 첫번째 사건 ▲ '안악사건' 동지들 백범이 환국한 후 안악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동지들과 함께 찍은 모습. 앞줄 왼쪽이 김홍량ⓒ 기록사..

정인보(1893년(고종 30)~미상)는 해방 이후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등을 저술한 학자.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정경시(鄭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 · 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 · 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정인보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장도빈(1888년(고종 25)~1963년)은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 출신. 봉구(鳳九)의 둘째아들이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논진(필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 내각과..

유득공(1748년(영조 24)~1807년(순조 7))은 177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컸다. 그 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하였다.”고 주장해 민족주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영암(泠庵)·고운당(古芸堂). 아버지는 사인(士人) 유춘(柳瑃)이다. 저서로는 『경도잡지(京都雜志)』·『영재집(泠齋集)』·『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앙엽기(盎葉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