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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 1945년 38선, 1945년~1948년 미군정, 1948년 분단 그리고 1948년~1949년 반민특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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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 1945년 38선, 1945년~1948년 미군정, 1948년 분단 그리고 1948년~1949년 반민특위

대야발 2021. 3. 2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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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공화국 : 이승만정부(1948년 7월 24일 ~1960년 4월 27일)

 

 

 

 

■ 38선, 미군정, 분단

 
 
 

 

"38도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38도 이남은 우리가, 이북은 당신들이 점령합시다."

 

 

최근 공개된 여러 문서들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이미 한반도 국경에 도착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자,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부 정책과장보가 찰스 본스틸 전쟁부 정책과장과 함께 서울과 인천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군사경계선으로 38선을 긋자는 미국의 제의를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분단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서 정작 놀라운 것은 트루먼 대통령 등 당시 미국의 관계자들이 나중에 밝혔듯이, 소련이 이를 덥석 받아들인 것이다. 멀리 떨어진 미국과 달리 소련은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소련이 38선에 반대하고 훨씬 남쪽에 경계선을 하자고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이 바로 분단이라는 비극의 시초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38선 표시석을 바라보니, 가슴이 더욱 아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의 이 같은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일성은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독립된 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1945년 미소 양국에 의해 이루어진 군사적 분단이 항구적인 분단체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1)

 

 

 

 

 

제 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제 3조: 모든 사람은 즉시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 아래 발표하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에 방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며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 1호다.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해방군'으로 행세했던 소련군과 달리,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후 남한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이 포고령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군정법령집 ⓒ손호철

 

 

전후 한반도 운명을 결정지은 신탁통치와 분단이라는 두 문제를 모두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다. 1943년 3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앤서니 이든 영국 외상과의 만남에서 한국 신탁통치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고 카이로회담 준비모임에서도 신탁통치안을 강조했다.

 

 

그는 이해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은 '적절한 시간에' 독립시킨다는 안, 따라서 '적절한 시간 이전'까지는 신탁통치를 한다는 신탁통치안을 제시했다. 처칠이 '적절한 시간'을 '적합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로 고쳐 신탁통치안을 의결했다(사실 위임통치를 제일 먼저 제안한 이는 이승만으로, 그는 1919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탄원했다가 신채호가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매국역적'이라고 비판하는 등 임시정부에서 강한 반발을 야기했고 결국 다른 문제들까지 겹쳐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다).

 

 

▲ DMZ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카이로회담 사진.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가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처음 제안했다. ⓒ손호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정국에서 미국은 즉각 독립을 주장했지만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가짜뉴스를 미군의 공식기관지인 '성조지', 그리고 미국의 통신사를 통해 퍼트렸고 이를 '동아일보' 등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이승만이 좌파들을 '소련의 주구'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한 중립적 연구가 보여주듯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구속자의 90%가 좌파일 정도로 좌파들이 민족주의운동을 주도했으나, 신탁통치 논쟁을 통해 우파=민족주의, 좌파=소련의 주구라는 엉뚱한 공식이 생겨났다.

 

 

▲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반탁시위 사진 ⓒ손호철

 

 

 

 

분단도 미국이 제안한 것이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이미 한반도 국경에 도착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자,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38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을 소련에 제안했고, 이를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분단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군정의 정치 자문이었던 베닝 호프가 잘 지적했듯이, 일제의 악랄한 수탈로 인해 해방 당시 "남한은 스파크만 일으키면 폭발할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아니 일본의 패망이 알려지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구성했고 미군정 도착 전인 1945년 9월 6일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성립을 선포했다.

 

 

한국 정치의 세계적 대가인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에는 "한국혁명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그리고 "외국군의 점령이 없었으면, 인공이 수개월 내에 한반도를 지배했을 것이다."

 

 

소련의 목표가 북한에 친소 좌파정부를 세우는 것이듯이, 미국의 목표는 남한에 친미적인 우파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문제는 소련과 달리 미국의 목표는 한반도, 구체적으로 남한의 상황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 1년 뒤인 1946년 8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중 자본주의를 지지한 사람은 14%에 불과한 반면에 70%는 사회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작해 있었던 '한국혁명'을 분쇄하고 자신들이 바라는 친미 우파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77%에 달하는 좌파지향적인 민중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이 선택한 것은 친일 관료들, 특히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민중들을 수탈하던 친일 경찰을 중용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미군정 고위 관료의 회고다.

 

 

"너희들이 기계를 이길 수는 없다. 기계란 마을 순사와 지주로부터 도지사에 이르는 권력을 쥐고 있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기계는 우리가 여기(남한-인용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발견한 그대로이다.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볼 때, 이는 이상적인 셋업이다. 그것은 군대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단추만 누르는 것이다. 그러면 경찰들이 대갈통을 부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일본 지배 하에서 35년간 이를 배웠다. 왜 우리가 이들이 아는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미국은 단추만 눌렀고, 친일 경찰들은 일제하에서 배웠듯이 '민중들의 대갈통'을 부쉈다.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인 미군정사는 이 문제를 정확히 서술하고 있다. "질서 있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한국이 한국민들을 기쁘게 하고 이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내는 것보다 중요했다."

 

 

▲ 1946년 10월 2일 미군정 하에서 대구 시민들이 시위(대구10월항쟁)를 벌이고 있다. 미국립문서기록청 자료

 

 

미국은 친일파 중용 이외에도 일제 소유이던 농지를 모두 자신들이 소유하고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으며 식량 정책에서도 실패했다. 그 결과, 1946년 미군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최초의 민중항쟁인 대구 10월항쟁을 시작으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추수봉기'가 일어났다. 미군정은 이를 친일 경찰 등을 동원해 진압하고 극우 세력이 자리 잡도록 만들었다.

 

 

주목할 것은 해방 후 맥아더가 이끈 두 개의 미군정 간의 차이이다. 즉 남한의 미군정과 일본 미군정의 차이다. 두 나라에서 친미적인 우익정권을 세운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내용적으로 기이한 역설을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그것은 미국이 전범국가인 일본에선 민중친화적인 '개혁'을 주도했다면, 정작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한국에는 민중억압적인 극우체제로 몰고 간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군정은 일본에서는 일본이 다시 파시즘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농지개혁, 재벌 해체, 노동조합 설치 등을 실시했다. 맥아더가 한국 점령 후 제일 먼저 한 것 중에 하나가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면, 일본 점령 후 제일 먼저 한 것은 노동조합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 결과, 3만5000개의 노동조합이 생겨나 650만 명이 가입했고, 첫 선거에서 사회당이 제1당으로 부상해 첫 내각으로 사회당-민주당 연정이 출범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보통선거권을 주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을 제공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조선공산당과 같은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건준 같은 중도좌파 온건진보 세력도 공산주의 등으로 몰아 탄압하고 이승만이 이끄는 극우정권을 만들었다.

 

 

한 정치학자는 "일본민주주의는 미군정의 산물"이라고 썼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부활을 막기 위해 일본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만들어놓았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일본민주주의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준 선물"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처럼 미국은 전범국인 일본에는 민주주의를, 전범국가의 피해자인 우리에게는 극우독재를 선물했다.

 

 

그 결과 우리는 미군정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극우정치에 의해 고통을 받아야 했고 지금도 그 여파로 고통을 받고 있다. 나아가 미군정의 종식과 함께 떠났던 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다시 날아와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받아 우리 군을 지배하고 우리 땅에 항구적으로 주둔하며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 이승만, 김구를 만나고 있는 하지 미군정사령관 사진이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아, 일본이 망하다니, 흑흑흑." 젊은 장준하는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친일파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다가 도주해 광복군에 합류한 민족투사로, 1945년 8월 미국의 OSS(CIA의 전신)와 국내에 진입해 한반도를 해방하는 군사작전을 훈련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하지 못해 한반도의 미래가 걱정되어 일본 패망소식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일제는 지금은 복원된 광화문 자리에 조선총독부청사를 지었다. 1945년 9월 이곳에서 미군정과 일본 조선총독부 간의 항복조인식이 있었고 미군은 이를 중앙청(Capital Hall)이라고 부르며 청사로 사용했다. 정부수립 후 중앙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김영삼 정부가 일제의 유산을 없앤다며 폭파해 이제는 그 잔해들만 독립기념관 야외공원에 남아있다. 첨탑 등 그 잔해들을 보고 있자 문득 장준하가 생각났다. 맞다. 미소에 의한 분단과 미소군정 등 해방 후의 비극은 모두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해방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미군정 사무실이 있었던 중앙청은 철거되어 일부가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나는 충분히 제국주의자이다 (…) 나는 우리의 영향을 이 나라까지 확장함으로써 이 나라에 혜택을 줬다고 확신한다. (…) 우리의 제국주의는 나쁜 제국주의가 아니었다." 미군정 사령관이었던 존 하지 장군이 미군정에 대해 한 자평이다. 제국주의이되 '나쁜 제국주의'는 아니었다? 그럼 '좋은 제국주의'란 말인가? 묘한 주장이다.

 

 

미군정이 좌파세력을 분쇄하지 않아 남한 민중의 의사대로 좌파정권이 들어섰다면 남한도 북한과 같이 한심한 길을 갔을 것인데, 자신과 미국이라는 '좋은 제국주의' 덕분에 한국이 자유와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한 마디로, 뉴라이트 극우파들이 주장이다. 이는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회적 현상을 과정의 정당성 등은 무시하고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결과론'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

 

 

물론 현재의 우리 사회는 '헬조선' 등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비교하면 '천국'에 가깝다. 하지만 남한 민중이 자기의 길을 갔다면 북한식이 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우리에게 세습 등 봉건적인 왕정에 가까운 북한이냐, 아니면 황금만능과 헬조선의 남한사회냐는 양자택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식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중간의 선택치'가 있었다.

 

 

순수 가정으로, 미군정이 아니었으면 현존 사회주의 비슷한 길을 갔을 것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자주적 결정'이라는 문제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우리는 우리의 길을 선택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진로를 대신 결정해 줄 수는 없다.(2)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약칭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이다. 1948년 9월 7일 제헌국회에서는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켰다.

반민특위는 그 산하에 배치되어 있는 특별경찰대를 활용하여 일제시대의 친일 기업가였던 박흥식, 일본군 입대 선전에 참여한 최남선·이광수 등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등 친일파들을 색출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친일파를 대거 기용한 이승만 정부의 반대로 활동이 지지부진하였고 1949년 6월 6일 특별경찰대가 강제 해산당하면서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였다. 곧 국회 중도파가 특위기간을 단축하였고 동년 10월에 완전히 해체되었다.(3)

 

 

 

 

'저승사자'. 김근태 의원을 고문을 해서 감옥살이를 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별명이다. 하지만 이근안 이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한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즉 '원조 저승사자'가 있다. 그것도 일제를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악독한 친일 고문경찰이 있으니, 그 이름은 노덕술이다.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쪽 죽여 버리지요." 1930년대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시위에 참석했다가 고문당한 김재학의 조카의 증언이다. 김재학뿐만이 아니라 박일형, 김규직, 유진흥, 문재순, 추학, 차일명. 노덕술이 고문한 독립운동가들의 일부다.

 

 

그는 동래경찰서 재직 중인 1928년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박일형을 고문했고, 부산 제2상업학교 동맹휴교 배후를 캔다고 김규직, 유진흥을 고문해 김규직은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동래고등보통학교가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석방을 위한 동맹휴학을 벌이자 문재순, 추학, 차일명 등을 잡아다가 고문했다. 고문 덕으로 그는 조선인 경찰로는 최고위직에 올랐고 두 번이나 상을 받았다.

 

 

"찬성 103명, 반대 6명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었습니다." 1948년 9월 7일 제헌국회는 역사적인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제정했다. 대한민국 국회가 제정한 3번째 법이다. 친일경찰에 의존하고 있는 이승만은 이 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정부가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법안에 서명했다.

 

 

주목할 것은 제헌국회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중도좌파적인 여운형, 우파인 김구도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을 영속화한다는 이유로 선거에 참가하지 않아 '친일지주(친일경찰 정도의 친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들이 다수였던 한민당과 일부 소장파 의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조차도 친일 청산은 거부할 수 없는 민족적 과제라고 생각해 반민법을 제정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명동에 사무실을 얻고 활동에 들어갔다. 임정 문화부장 출신으로 국회의원이었던 김상덕이 위원장을 맡은 특위는 조사위원회 이외에도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특위는 일본국과 조선총독부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경찰과 군부대, 헌병대 등에서 첩자 등으로 활동한 자, 위안부와 학도병 강제징용을 권유하거나 찬양한 자 등으로 반민족행위를 정의하고 이에 해당되는 7000명을 파악하여 검거에 들어갔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만든 식민지박물관에는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에 관련된 자료, 반민특위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 이천민주화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반민특위 위원들 사진 ⓒ손호철

 

 

1949년 1월 8일, 제1호로 화신백화점 사장이자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이승만 정부의 비호 아래 해외로 도피하려다가 체포됐다. 이어 일본밀정이었던 이종형 대동신문 사장, 유명 문인 이광수와 최남선 등이 잡혀왔다. 이들은 자신이 민족지도자들이라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모두 황국신민이 됐을 것이다." 이광수의 변명이다. 말이라도 못하면 덜 미울 텐데,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광수, 최남선 등 변절한 주요 친일 인사 사진 ⓒ손호철

 

 

반민특위는 여자 60명을 포함한 682명을 조사해 모두 305명을 체포했고, 자수 61명, 영장취소 30명, 193명은 도주 등으로 체포하지 못했다. 특히 문제는 악독한 친일경찰을 심판하는 일이었다. 친일경찰의 핵심인 노덕술 등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반민특위 핵심부와 정부 요인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이를 위해 고용한 백인태가 자수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도주하던 노덕술은 결국 체포되어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됐다. 자신의 손발이 잡히자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 투사이니 석방하라"고 요구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이승만은 내무부 차관 장경근을 통해 조작이라는 비판을 듣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터트리고 반민특위를 직접 공격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김약수 등 반민특위에 적극적이었던 소장파 '진보적' 의원들이 남로당과 접촉하고 공산당에 협조했다고 구속한 사건이다.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끌려가는 친일파들(이천민주화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손호철

 

 

1949년 6월 6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날 중 하나다.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경찰 80명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조사 서류를 강탈해간 것이다. 이어 9000명의 경찰들이 사실상의 반민특위 해체를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국회는 반민특위의 원상복귀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반민특위 습격이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며 거부했다. 국회는 이같이 국회를 무시하는 대통령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의원내각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반민특위 문제에서 1952년 부산정치파동의 단초가 만들어진 것이다('손호철의 발자국' 10. 부산정치파동 <프레시안>, 2021년 3월 29일자 참조).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이를 담당했던 대표적인 공안검사인 오제도 검사가 후에 "사실은 무죄였다"고 밝히는 등 논쟁이 많은 사건이다. 설사 국회 프락치 사건이 조작이 아니고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민특위를 해체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국민 다수가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바랐던 친일파 처벌이 북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나? 북한보다 더 강하게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이, 남한은 친일정부라는 오명을 벗고 북한과 정통성에서 떳떳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나?

 

 

이승만은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교포들이 보내준 돈으로 '편안하게' '호화생활'을 하며 외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만큼 그 의미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친일파라고는 할 수 없는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사람이다(나중에 탄핵을 당했지만). 문제는 그런 그가 왜 여론의 압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노덕술 같은 사람을 구해 중책에 맡겼느냐는 것이다.

 

 

그 답은 해방정국의 구조적 상황에 있다. 해방정국은 일제 강점기에 좌파가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77%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바라는 등 기본적으로 좌파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분위기여서, 그 같은 친일경찰이 아니면 그의 수족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모두 잘 아는 이야기지만, 이승만의 반민특위 공격 후 친일파는 해방 후 현대사의 승자로 승승장구해 왔다. 임종국의 선구적인 친일문학연구와 이를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노력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된 뒤 60년이 지난 2009년 뒤늦게 5207명(중복자 포함)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을 실은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정부 차원에서도 노무현 정부 들어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활동을 벌여 제1차 106명, 제2차 195명, 제3차 705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이 명단에는 일왕에서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육사로 입학해 일본군으로 근무한 박정희가 빠져 논란이 됐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너무 늦었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이들 중 노덕술 등 225명은 정부에서 훈장 등 서훈을 받았는데, 2019년 현재 25명에 대한 서훈이 취소됐고 노덕술 등 200명에 대한 서훈은 친일 판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고 있다.

 

 

친일 청산의 실패는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한국 정치의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 정치의 기본 프레임은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파는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리버럴)' 세력을 '친북좌파'라고 공격하고, 자유주의 세력은 우파를 '친일'이라고 공격하는, '친북 대 친일'이라는 낡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일부 민주당지지 세력이 보수 우파에 대해 행하는 가장 쉬운 공격수단이 '토착왜구'라고 이름 붙이고 '죽창가' 운운 하는 것이다. 21세기 들어서도, 이 같은 시대착오적인 프레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반민특위의 실패로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자처벌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 명동에 가면 롯데백화점 건너편 쪽에 옛 KB국민은행 명동본점 건물이 있다. 반민특위가 있던 곳으로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쓴 이 같은 표시석을 만들어 1층 화단에 설치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곳에 가보니 표시석은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니, 잘 보이지 않도록 주차장 옆으로 옮긴 것이다. 표시석은 반민특위처럼 이렇게 찬밥 대접을 받았다.

 

 

▲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어 반민특위 터에 설치했던 표시석. 최근 그 터에 호텔이 건설되면서 철거해 식민지박물관 입구에 설치했다. ⓒ손호철

 

 

 

표시석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건물이 팔려 호텔 건설이 시작되자 일본 관광객을 우려한 호텔 측은 표시석의 철거를 요구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결국 이 표시판을 철거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연구소가 새로 만든 식민지역사박물관(청파로 소재) 문 앞에 세워 놓았다.(4)

 

 

 

 

 

<자료출처>

 

 

 

(1) 분단의 상징 '38선'은 누가, 어떻게 그었나? (pressian.com) 2021.06.11.

 

 

 

(2) '점령' 포고한 미군정에 아직도 고마워해야 하나? (pressian.com) 2021.07.05.

 

 

 

(3)https://ko.wikipedia.org/wiki/%EB%B0%98%EB%AF%BC%EC%A1%B1%ED%96%89%EC%9C%84%ED%8A%B9%EB%B3%84%EC%A1%B0%EC%82%AC%EC%9C%84%EC%9B%90%ED%9A%8C

 

 

 

(4)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71123120439014 2021.07.12.

 

 

 

 

<참고자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002

 

 

 

대한민국 제1공화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독립운동가로서 정치인으로서, 백범이 후세에 남긴 교훈 (pressian.com) 2021.07.0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국호논쟁의 전말…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 - 경향신문 (khan.co.kr) 2017.08.30 

 

 

 

박정희‧전두환도 이승만에 비하면… (pressian.com)2021. 07. 21. 

 

 

 

“보도연맹원 대부분 억울한 양민” (hani.co.kr)한겨레 2007.11.14

 

 

 

[하성태의 사이드뷰] <도올아인 오방간다> 마지막회 녹화 현장에서 확인한 '나무'하성태(woodyh)2019.03.23 

 

 

 

 

 

대한민국의 대통령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7인의대통령]조정훈·하태경, 7명의 대통령 돌아보며 오늘날 필요한 리더십 찾는다 | 서울경제 (sedaily.com)2021. 07. 07. 

 

 

 

"그때 일제 경관이 청년들을 쏴.." 전기공이 쓴 역사 (daum.net) 201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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