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광개토태왕 (4)
력사를 찾아서
1946년 5월14일이었다.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 경주 노서리 140호분(돌무지덧널무덤)을 파고 있던 국립박물관 조사단이 ‘발굴 일지’의 표현대로 ‘쎈세이순’한 명문 유물을 찾아냈다. 고급의 청동제 그릇 밑바닥에 아로새겨진 ‘광개토대왕(재위 391~412)’, 그 분의 묘호가 빛났다. 해방 후 첫번째 ’우리 손 발굴’에서 이뤄낸 개가였다. 당시 신문(동아일보 5월25일)의 보도처럼 명문 유물의 착안점은 두가지였다.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그릇에서 보이는 #(井) 부호(글자). 광개토대왕 사후 3년 후인 415년 제작된 청동그릇 밑바닥의 16자 글자 위에 수수쎄끼를 내듯 새겨져 있다. 이 #(井)자는 호우총보다 50~100년 전 조성된 국내성의 ..
'광개토대왕릉비'는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에 있는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릉비입니다. 중국,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고 합니다. 비석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묘비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고구려의 건국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역사를 다룬 부분입니다.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을 기술한 둘째 부분입니다. 제3면 8행부터 제4면 9행까지는 능비의 건립 및 수묘인에 관한 부분입니다. 『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
고구려의 발흥목차1)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2) 동부여와 고구려의 알력3) 대주류왕의 동부여 정복4) 대주류왕의 낙랑 정복1)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그는 타고난 용력과 활쏘기 솜씨를 갖고 있었으며, 과부 소서노의 재산을 발판으로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왕검 이래의 신화를 교묘히 이용하여 난생 신화를 만들어 고구려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열국의 신뢰를 받아 조선을 정신적으로 통일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영웅담을 중국 각지에 전파하여 중국 제왕과 인민들이 자신을 교주로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신라 문무왕은 “남해(南海)에서 공을 세우고 북산(北山)에서 덕을 쌓았다”며 추모를 찬양했고,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공자를 반대한 후한시대 학자 왕충은 추모의 행적을 ..
신채호 조선상고사선비족 대 고구려의 관계고구려와 한나라의 중간에 선 탓에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한나라를 도우면 한나라가 이기는 식으로 양국의 승패를 좌우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선비(鮮卑)라 불린 종족이다. 선비족이 조선의 서북쪽인 몽골 지역에 거주하다가 흉노족 모둔에게 패해 본거지를 잃고 외흥안령·내흥안령1) 부근으로 이주했다는 점은 제2편 제3장(제3편 제2장 조선 분립 이후의 신조선의 착각인 듯하다_옮긴이)에서 서술했다.그 뒤 선비족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여전히 선비라고 불렸고, 또 하나는 오환(烏桓)이라고 불렸다. 둘은 언어나 풍속이 거의 동일했다. 이들은 짐승 고기를 먹고 짐승 가죽을 입으며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했다. 각각 읍락에 나뉘어 살았는데, 전체 부족을 관할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