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원나라 (6)
력사를 찾아서
따라서 실제 고려 천리장성은 요하를 따라 길림성 장춘 서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축조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고구려 천리장성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고구려 천리장성이 실은 고려 천리장성이었을 수도 있고 고구려 천리장성을 고려가 개축(改築)한 것일 수도 있다. [강동 6주를 찾아서 ⑥] 고려 천리장성은 어디에?고려 천리장성의 위치와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들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입력 2023.12.10 20:33수정 2023.12.11 08:31 사서의 기록을 통해 본지에서 밝힌 고려 강동 6주의 위치와 고려 천리장성을 표시한 지도.(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고려 천리장성 우선 『고려사』에 기록된 천리장성의 기록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고려사』 권..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한국사로서의 금의 역사'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면서 역사학적, 민족학적, 영역적, 관계사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김 교수는 그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로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혹 고려)에서 옮겨 온 유이민이고 나라를 세울 때 협력한 발해 유민들은 곧 고구려계"라면서 "아골타 근족들의 혼인 대상 민족은 요양에 거주하던 발해 귀족의 여식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고조선(단군조선,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까지 강대한 국가를 유지·경영하다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 내로 위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러나 만주지역에서의 우리 역사는 여기서..

“몽골제국 시대에 왕실 간 결혼 때문에 고려는 ‘사위의 나라’로 불렸다. 이제 한국은 몽골에 ‘형(兄)’이 됐다. 오늘날 몽골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한국을 본보기로 삼고 있다. 그들은 한국 TV프로·음식·음악·대중문화를 즐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한국은 몽골인의 의식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에서 몽골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앞으로 한국인들이 한국과 몽골 사이의 역사적 고리와, 한국이 몽골의 ‘형’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주 많다.” ■ 아시아가 서구 지성 발전에 큰 역할, ‘종교의 자유’ 가치 칭기즈칸서 유래중앙선데이, 김..

1970년대 중반 보물선 신드롬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당시 발굴된 신안보물선에서 값진 고려청자와 송·원대 도자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수중 발굴은 물의 흐름, 기상조건, 기압차이 등에 따라 매우 한정된 시간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짝이 없고, 고가의 발굴 장비와 많은 예산이 필요합니다. 수중고고학은 신안보물선 발굴 전까지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학문이었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급속히 발전했습니다. 신안보물선 발굴 당시 해군 조사 모습.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어부 그물에 걸린 도자기 6점의 가치 신안보물선은 1975년 8월 처음 확인됐다. 어부 최모씨 그물에 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온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다른 어부들은 도자기가 올라오면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거나..

고려 시대의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고려의 개혁을 위해 몸부림쳤던 한 왕이 있었다. 그 왕은 바로 고려의 제 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지속된 원(元)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自主性)을 되찾고자 노력했고,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돈'(辛旽)이라는 인물을 중용해 정치, 사회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펼치고자 했다. ■ [역사줌인] 고려의 마지막 개혁혼이 꺼지다 '공민왕 피살'최경식2021. 7. 10. 03:39 고려의 마지막 개혁 군주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좌절 고려 제 31대 왕 '공민왕'과 부인 '노국대장공주'. 국립고궁박물관 그러나 기성 세력들의 극심한 반발과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 대내외적인 반란 및 침입 등으로 결국..

거대한 전쟁 속에서 몽골에 고려는 금나라와 송나라의 배후세력이라는 지정학적 가치가 있을 뿐 군사전략상으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몽골 군대가 고려와 벌인 아홉 번의 전투는 정부 없는 나라를 약탈하는 수준이지, 본격적인 전쟁은 아니었다. 더구나 몽골은 1259년 몽케 대칸이 남송을 원정하는 도중에 죽자 내분과 혼란에 빠졌다. 결국 동생인 쿠빌라이 칸이 뒤를 잇고, 1271년 국호를 원으로 개칭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쿠빌라이의 편을 들어 외교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본다. 그 결과 유리한 조건으로 1270년 개경으로 돌아가고 항복해 쿠빌라이의 부마국이 됐다. 군사력을 갖추고, 국제질서의 상황을 간파해가면서 유연성과 배짱을 겸한 고려 무신정권의 외교 전략은 현실감이 부족한 지금의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