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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5) - 고조선 후예 ‘훈 제국’ 세워…유럽 민족 대이동 ‘폭풍’ 불러 본문
고조선 후예 ‘훈 제국’ 세워…유럽 민족 대이동 ‘폭풍’ 불러 | 중앙일보 (joongang.co.kr)
고조선 후예 ‘훈 제국’ 세워…유럽 민족 대이동 ‘폭풍’ 불러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1〉
‘고조선 문명’은 한국 문명의 기원일 뿐 아니라, 세계 최초 5대 문명의 하나이다. 고조선 국가가 서기전 108년 해체될 때, 고조선 서변 국경을 지키던 기마민족 일부는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다시 그중의 일부는 유럽에 진출하여 새 국가를 건설하고 고조선 언어와 문명을 전파했다. 이번 연재에서 고조선 문명의 후예들이 유럽에 들어가서 수행한 여러 가지 활동 가운데 한국인과 유럽인들이 알아두어야 할 ‘증거가 확실한 몇 가지 큰 일’을 소개하려고 한다. 인류의 편견 없는 소통과 교류, 협동을 위해서다.
고조선 문명의 후예인 훈족(Huns, 중국 호칭 흉노족)이 4세기 후반에 유럽에 들어가서 거대한 ‘훈 제국’을 세우고, 유럽 민족 대이동을 일으키며 결국 거대한 서로마 제국을 붕괴시켰다면 아마 대부분 놀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우선 훈족이 고조선 문명의 후예인가부터 물을 것이다. 훈족은 고조선 연방 제국의 서변에 거주하던 ‘산융(山戎)’이라는 유목 기마족인데, 서방을 방위하던 후국족이 그들이었다. ‘융’은 군사집단의 뜻이다. 당시 그들은 자신을 반드시 훈(Hun)이라고 불렀다.
고조선 문명, 세계 첫 5대 문명 중 하나
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제국을 건설했던 훈족의 왕 아틸라(406~453)가 이끄는 기병대. [그림 The Creative Assembly]
고조선은 훈 족장에게 ‘두만’(만 명 사령의 뜻)의 직책을 주었다. ‘두만’은 총사령관의 고조선 말이었다. 훈의 두만 성명은 단자(檀柘)였다. 성을 ‘檀’으로 쓴 것은 고조선 왕족 계열의 정체성을 취한 것이다. 훈족 두만의 군대는 기병부대였다. 모두 큰 활과 창을 썼으며, 모든 기병이 말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법(騎射法)의 달인으로서 막강한 군대였다. 두만과 아틸라(Attila)칸을 포함하여 모든 훈족의 종교는, 7세기 아르메니아 사가 모오제에 의하면, 탱그리칸(Tangri-quan)신을 조상신으로 모셨다. 즉 단군 신앙이었다. 전쟁 전에는 소의 어깨뼈로 점을 치는 예언 점술사(占術師)의 말을 일단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중국(하·상·주)의 주(周)가 고조선과 친했던 상(商)을 멸망시킨 후인 BC 771년 훈이 주(周)를 공격하여 수도 호경(鎬京)을 점령했다. 주나라는 훈에 패배하여 동쪽으로 천도하는데, 이후부터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되고 조정은 약화되어 군웅이 할거하였다. BC 664년에 고중국동주의 제(齊) 황공(桓公)이 조(曺)·허(許)·노(魯)·연(燕)·진(晋) 등과 고중국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조선을 공격해서 조·주 전쟁이 일어났다. 산융(훈)·고죽·불령지·불도하가 고조선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중국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훈’이 이 전쟁 때 고조선 연합군의 주력이었는데 훈이 고조선 후국이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후조선 멸망 후 두만의 아들 모돈(冒頓, 모돌)은 BC 3세기에 훈족의 독립을 선언하고 ‘탱그리고도단우(撑犁孤塗單于)’라는 호칭의 황제에 올랐다. 훈족 황제 호칭을 ‘單于’라 쓰고 중국과 한국에서는 ‘선우’라고 읽는데, 원래는 ‘단우’라는 고조선·훈어이다. ‘단=檀=單’이고 ‘하늘’의 뜻이며, ‘우’는 ‘왕·황제’의 뜻이다. ‘단우’는 ‘천왕(天王)’ ‘천제(天帝)’의 뜻이다. 모돈은 자기가 단군조선의 계승자임을 주창한 것이었다.
고조선, 훈 족장에게 ‘두만’ 직책 줘
고조선 연방 제국의서변에서 고조선을 지키는 역할을 해오던 막강한 유목 기마 민족 ‘산융’은 위만조선 멸망(BC 108) 후 한나라 무제(武帝)가 이끄는 새 기병 부대의 총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몽골고원으로 후퇴하였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BC 57년경에는 왕위 계승문제로 권력투쟁이 일어나서 흉노는 호한야(呼韓邪) 단우의 ‘동흉노’와 질지(郅支) 단우의 ‘서흉노’로 분열되었다. 두 흉노는 전쟁을 하여서흉노가 패배하였다. 동흉노는 중국에서 후한(後漢)이 수립된 후 다시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흉노는 AD 72년 후한의 공격을 받고 서방으로 이동하여 몽골고원을 떠났다.
남흉노도 ‘한’(漢)족 장군들이 AD 349년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흉노족을 대대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으므로 서방 이동을 감행하게 되었다.
흉노족은 서방으로 이동하여 카스피해 북쪽 볼가강과카마강이 합류하는 지역의 초원지대에서 상당 기간 정착해 유목생활을 하면서 힘을 배양했다. 흉노족은 한발이 장기화되어 목초지가 메마르게 되자 AD 375년경 볼가강을 건너서 동유럽 판노니아 평원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인 동(東)고트(Goths)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신민으로 삼았다.
훈(흉노)족의 동아시아식 경기병(輕騎兵) 부대, 강력한 활, 질풍노도 같은 기동성,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기습·돌격, 위장 후퇴로 적의 튼튼한 대오를 분산시킨 후 전격적 급반전 역공의 기마전술 등을 유럽민족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연속 패하였다. 훈족은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를 정복하여 이곳을 자기의 정착지로 삼고 ‘훈족의 땅’(The Land of Huns, Hungary)이라고 칭하였다. ‘가리(gary)’는 흉노어로 ‘땅’의 뜻이었다. ‘가리’는 현대 몽골어에서도 ‘땅’의 뜻이다. 훈족은 이어서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내쫓았다. 정착지를 빼앗긴 서고트족은 AD 378년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로마 영토로 이주해서 자치권을 획득했다가, 410년에 4일간 로마를 약탈하고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 정착하였다. 프랑크족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의 북부에, 부르군드족은 갈리아 지방의 남부에 이동 정착하였다.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 북부로 남하 이동하였다. 라인강 유역에 거주하던 반달(Vandal)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통과하여 지금의 아프리카 튀니시아 지방에 정착해서, 455년 로마시를 습격 약탈하기도 하였다.
아틸라 외모, 영락없는 동아시아인
훈족의 유물. 1 군마의 안면 갑구(4세기). 2 금과 보석으로 된 팔지(5세기). 3 아틸라의 검(4세기). [사진 Walters Art Museum]
유트족과 색슨족은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섬에 들어가 선주민 켈트족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각각 소왕국을 세웠다. 수에비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통과하여 지금의 포르투갈에 수에비 왕국을 세웠다. 훈족의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 점령과 정착을 계기로 게르만인을 비롯한 모든 유럽민족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민족대이동 중에 각처에서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것이 마치 훈족이 행한 것처럼 전해졌다. 이 시기 민족대이동이 현재의 유럽 각 민족의 정착이 되었다.
훈(Hun, 흉노)족은 그사이에 중부 유럽에 ‘훈 제국’을 세웠는데, 아틸라(Attila)칸 때에는 그 영역이 동쪽은 우랄산맥과 카스피해, 서쪽은 알프스산맥, 북쪽은 발트해, 남쪽으로 다뉴브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아틸라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를 몇 미터 앞에서 본 동로마 역사가 프리스쿠스(Priscus)의 기록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프리스쿠스는 “그는 키가 작고 어깨가 넓었으며, 머리는 매우 컸고, 눈은 작았다. 수염이 성기게 나 있고, 머리털은 흰 머리가 섞여 있었다. 코는 납작하였고, 피부색은 엷은 갈색이었다. 출신 족에 의한 특징이 현저하였다”고 하였다. 즉 아틸라의 외모는, 서양 초상 그림과는 전혀 달리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이었다.
아틸라와 그의 정치를 분석적으로 연구한 엣셰(Katalin Escher)와 레베딘스키(Lebedensky)에 의하면, 아틸라는 언제나 검소하고, 솔직했으며, 매우 겸손하고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황금을 전혀 탐하지 않았으며, 거두어들인 황금을 모두 통치자금에 쓰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조선 연방을 서변에서 지키던 소수의 훈(산융)족이 ‘말’을 동력으로 하여 유럽에 들어가서 AD 4~5세기 서·북·동유럽을 포괄하면서 동·서 로마제국에 맞서는 거대한 ‘훈 제국’(Hun‘s Empire)을 건설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훈’과 ‘흉노’
‘훈’족은 동아시아에 있을 때도 자기를 ‘훈’(Hun)족이라고 했다. ‘사람’‘따뜻한 사람’의 뜻이라고 한다. 몽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고중국에서 다른 민족에게 나쁜 뜻 한자를 붙여 작명하는 악습으로 ‘훈’을 비하하여 ‘흉노’(匈奴)라고 주로 칭했는데, ‘흉측한 노예’라는 뜻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뒤에 ‘흉노’(匈奴)라는 호칭을 썼지만 훈육(葷粥)과 훈육(薰育)으로도 나온다. 『맹자』에는 훈죽(獯鬻)으로 나온다. 여기서 훈(Hun)을 葷, 薰, 獯 등 여러 글자로 표기한 것은 흉노족이 자기를 훈(Hun)으로 호칭한 것을 동일 음차(音借) 표기한 것이고, 粥, 育, 鬻 등은 비하하는 의미를 붙인 꼬리표기이다. 비칭 꼬리표기를 떼어버리면 흉노족이 곧 훈(Hun)족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
‘훈족 제왕’ 아틸라, 동·서로마 무너뜨려 유럽 지형 리셋 | 중앙일보 (joongang.co.kr)
‘훈족 제왕’ 아틸라, 동·서로마 무너뜨려 유럽 지형 리셋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2〉
‘훈족 제왕’아틸라는 두 차례의 발칸전쟁을 통해 동로마 제국을 속령으로 삼았다. 그림은 1870년 모르 탄 작품 ‘아틸라의 만찬’, 헝가리국립미술관 소장. [그림 위키미디어]
훈족 제왕 아틸라는 서양 사가들의 편견에 찬 혹평과 달리, 최후의 시기만 보아도 스마트하고 위풍당당하며 매우 영민한 리더였다.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디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아 평화조약을 잘 이행하지 않았다. 훈 제국 고트족 출신 장수를 송환하지 않고, 도리어 훈 제국 공격용 장수로 기용했다. 동로마 마르고스(Margos) 주교의 동로마 영내 훈 왕족 무덤 도굴 사건이 발생하자, 아틸라는 441년~442년 동로마 원정에 나섰다. ‘제1차 발칸전쟁’이라고 부른다. 동로마 속령들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지고, 아틸라 군대는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접근했다.
위급해진 테오디시우스 2세는 서로마 군사령관 아에디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에티우스가 달려와 아틸라에게 자기 아들을 인질로 맡기며 사정하여 평화조약 준수를 서약했다. 아틸라는 국경지대의 동로마 측 군사 요새를 모두 파괴하여 훈족에 대한 침략 진지를 없애버린 후에 443년 전선에서 귀환했다.
10만 기병 이끌고 이탈리아 진군
445년 형 브레다가 사망하여 아틸라가 훈 제국의 단독 제왕이 된 후에, 아틸라가 전쟁을 자제한다는 사실을 안 동로마는 또 조공 공납금 지불을 미루었다. 도망해 들어간 훈 제국 신민 게르만 족 병사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평화조약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아틸라는 446년 다시 동로마 원정에 나섰다. ‘제2차 발칸전쟁’이라고 부른다. 동로마 속령들이 속속 아틸라에게 항복했다.
매우 다급해진 테오디시우스 2세는 정무관 아나톨리우스를 보내 항복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휴전을 요청했다. 동로마의 조건은 ①국경선에서 동로마 쪽으로 5일 거리 이내의 비무장지대 설치 ②전쟁 배상금 황금 6000 리브레(약 2700kg) 지불 ③매년 조공액 3배 인상, 2100리브레(약 945kg)씩 공납 등이었다. 이렇게 ‘아나톨리우스 협정’은 전쟁 배상금 지불까지 서약을 했으니 객관적으로는 ‘항복’이었다. (약속만 지키면) 동로마 제국은 훈 제국의 속령이 된 것이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아틸라는 참혹한 전쟁을 피하여 동로마의 ‘항복’을 받고 전투 없이 귀환하였다. 449년 테오디시우스는 환관들과 아틸라 ‘암살 음모’를 꾸몄다. 훈의 사절단 일원인 에데콘을 매수하고, 하수인으로 동로마 통역 비길라스를 시켜 아틸라를 시해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동로마의 음모를 모른 채 친선사절단에 동행한 인물이 당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에데콘은 동로마 친선사절단이 아틸라의 궁전에 도착하자 암살 음모를 아틸라에게 고해 버림으로써, 암살 음모는 무산됐다.
아틸라는 451년 원정 구실로 로마의 속령 갈리아 지방을 호노리아(Honoria)의 지참금으로 요구하면서 20만 명(훈족 기병 10만, 동고트 등 게르만 족 보병 10만)을 인솔하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 지방으로 향했다. 서로마의 군사령관인 갈리아 총독 아에티우스가 20만(로마군과 서고트왕 데오도리크의 군대, 절대다수가 보병) 대군을 인솔하고 대응하였다. 대결전은 451년 6월 20일 카탈루니아 평원에서 있었다. ‘카탈루니아 대전투’ ‘살롱 대전투’라 부른다. 양축 군은 처절한 혈투를 벌였다. 에드워드 기본에 의하면 하루 전투에 16만2000명이 전사했다. 결과는 ‘무승부’였다. 서양 사가들은 로마가 처음으로 아틸라를 참패시킨 승리라고 썼다. 증거로는 아틸라 군대의 철수를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훈의 기병대는 전진과 후퇴를 자유자재로 해서 뚫리지 않으면 철수하여 다른 뚫릴 곳을 공격한다. 철수가 전혀 패전이 아니다. 더구나 최근 연구는 이 전투에서 서고트왕이 전사하고, 서로마 사령관 아에티우스가 아틸라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아틸라군이 철수했음이 밝혀졌다. 구태여 승패를 더 따진다면 전사자 대부분은 양측 보병들이었고, 아틸라 기병대는 병력을 대부분 온존시킨 채 철수한 것이었다. 그 증거는 1년 후에 나타났다.
아틸라 초상. [그림 위키미디어]
452년 아틸라는 훈족 기병 10만을 인솔하고 방어가 약한 서로마 제국 본국(지금의 이태리 반도)으로 진군했다. 서로마 황제는 갈리아 총독·군사령관 아네티우스에게 긴급방어 출동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서로마 황제에게 긴급히 안전한 동로마 제국에 피란할 것만 권고하고 출병하지 못했다. 아직 ‘카탈루니아 대결투’의 손실을 회복하지 못해 출정해도 참패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아틸라의 기병부대는 첫 방어선 아퀼레이아에서 약간의 저항을 받았을 뿐, 나머지 도시들은 거의 무혈 입성하였다. 당시 수도 베로나도 마찮가지였다. 아틸라의 군대가 지금의 밀라노를 점령한 후 로마를 향하여 남진하고 있을 때, 서로마 황제의 요청을 받은 바티칸의 교황 레오(Leo) 1세가 평화 교섭을 하러 아틸라를 찾아왔다.
레오 1세 교황과 아틸라 사이에 협약이 이루어지자 아틸라는 부하들의 항의를 달래가며 진군을 중지시키고 철수를 시작하였다. 레오 1세-아틸라 협약의 내용은 비밀에 묻혀 있다. 단지 레오 1세가 로마 도시 파괴의 방지를 요청해서 아틸라가 수용했다는 것과 아틸라의 다음 원정 행선지가 사산 왕조 페르샤 왕국이라고 말해서 서로마에 평화가 왔음을 알린 것뿐이었다.
레오 1세의 비밀협약은 무엇일까? 왜 서양 사가들은 밝히지 않을까? 필자는 서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 이상의 조건으로 아틸라에 항복했다고 추정한다. 그랬으니까 다음 행선지가 중동의 왕국이라고 교황에게 말해준 것이 아니겠는가?
기병 부대, 철제 등자 등 유럽에 전수
아틸라는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의 궁전으로 귀환해 속령 게르만 족 제후의 딸 일디코(Ildico)와 결혼한 뒤 연회에서 술에 취해 침실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늦게 기척이 없어 호위병들이 들어가 보니 아틸라는 피가 흥건한 가운데 사망해 있었고, 신부는 울고 있었다. 아틸라의 죽음에는 독살, 복상사, 타살 등 각종 설과 추측이 난무하지만 아직도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아틸라의 죽음은 허망했지만 아틸라는 당시 동·서 로마의 어느 황제보다도, 당시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의 어느 족장보다도, 잔인하거나 포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신사적이었다. 그는 누구도 암살하지 않았으며, 배신자 외에는 누구도 처형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살해와 약탈은 게르만족 족장들이 자행한 것을 아틸라에게 돌려 기록한 것들이었다. 아틸라에 대한 재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틸라 사망 후 훈 제국은 아들들이 승계했으나, 지켜낼 능력이 부족해 469년 멸망했다.
아틸라의 ‘훈 제국’은 단명했으나,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 유럽에 민족대이동을 일으켜 전체 유럽의 정치 지형이 완전히 개편되었다. 훈 제국 이후의 유럽 각 민족 이동 결과 정착지가 지금의 각 민족과 국가의 위치가 되었다.
둘째, 로마 패권 하의 평화체제(Pax Romana)가 붕괴되어, 결국 고대사회체제가 해체되고 중세 사회체제가 시작되었다. 셋째, 동방 고조선 문명의 다른 기마민족인 아발(Avars), 불가르(Bulgars), 마잘(Magyars) 그리고 투르크(Turks) 족들의 유럽 진출의 길을 열어 주었다. 넷째, 군사 조직상 기병 부대의 편제와 전술, 기마 용구를 유럽에 전했다.
호노리아(Honoria)
서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의 딸. 호노리아가 애인 시종무관장을 황제로 만들려다 음모가 발각되어 시종무관장은 처형되고 호노리아는 동로마에 보내져 14년이나 연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450년 호노리아는 자기를 구해 서로마에서 지위를 되찾아줄 인물로 아틸라를 선택했다. 정략결혼을 위한 청혼이었다. 서로마 제국 정복을 구상하던 아틸라는 이 청혼을 정략적으로 수락하고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요구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는 놀라서 이를 수락한 후 귀찮은 호노리아와 환관을 서로마로 환송해 버렸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
“5세기 로마 호령한‘훈족’은 한민족”
몽골리안 반점·편두형 골상 등 인체 특징 유사 … 마상 무예·동복 문양도 선조들과 같아
- 이종호/ 과학사 연구가, 전 과학기술원 기계공학과 겸직교수
- 입력2003-09-18 14:40:00
- 한민족의 북방사를 주로 다루는 ‘백산학회’ 회보(제66호, 8월30일 발매)에 유럽에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에게 같은 시기 한반도에 있었던 신라 가야 고구려의 지배계층과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는 이종호씨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프랑스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과학사 쪽에 관심이 더 많은 이종호씨로부터 훈족과 신라 가야 고구려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을 들었다.(편집자)
이탈리아의 크리프타 아프레시아 교회에는 훈족 병사(왼쪽)가 몸을 돌려 뒤따라오는 로마 병사에게 활을 쏘는 그림이 있다(작은 그림). 이 그림은 중국 지안(集安)의 고구려 무용총에서 나온 고구려 무사의 수렵도(큰 그림)와 비슷하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동양에서 치열한 정복사업을 펼칠 때 서양에서도 한민족의 일족인 훈족이 서양문명사를 새로 쓰게 하는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서기 375년, 기마민족인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게르만족인 동고트를 공격하자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고, 서고트는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당시 동양에선 광개토대왕 전성기
이로써 로마제국 안에 게르만족이 들어와 살게 됐는데 이로부터 100여년 뒤인 476년, 로마제국은 게르만인 오토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게르만족은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로 흩어져, 새로운 정착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을 만들었다. 이는 훈족에 의해 유럽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최근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에 따르면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인 것으로 보인다.
훈족은 흉노(匈奴·북방 기마민족을 통칭한다)가 원류인데, 흉노는 진시황 시대인 기원전 3세기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 민족과 혈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심한 부침을 겪었는데 이때 흉노에 속해 있던 한민족의 원류 중 한 부류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하고 또 한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하여 가야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에게서 몽골리안 반점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둘째, 훈족이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아 교회의 프레스코화(畵)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몸을 돌려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서 나온, 말을 탄 채 활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의 모습과 똑같다.
셋째, 훈족의 머리 골상이 편두(偏頭·cranial deformation·일명 납작머리로 불리는 인공적으로 변형시킨 두개골)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에서 프랑스의 칼바도스 지방에까지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 곳곳에 있는 분묘에서 머리의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고, 머리에 고랑 같은 주름이 있으며 머리통이 긴 두개골을 발견하고 이를 ‘편두’로 명명했다.
편두를 한 훈족의 두개골(위).아래는 김해 예안리에서 나온 가야시대의 편두(왼쪽)와 정상적인 두개골을 비교한 것이다.
반면 훈족에게서는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족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를 만드는 풍습을 갖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역시 편두를 한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신라 지역의 지배계층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기마민족의 상징적인 유물로 유명한 크고 작은 동복(銅·cup cauldrons)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다섯째,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다. 1924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91호인 기마인물상 토기를 보면 말 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다. 게다가 이 무덤의 주인도 편두였다.
여섯째,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우리나라의 금관 장식 등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 형상(‘出’자형 장식)과 녹각(鹿角)형 장식이 많은데 이는 북방에 살던 사람들이 한반도에 정착했음을 나타낸다.
세계 3대 제국 건설한 아틸라왕
지금까지 훈족과 한민족을 연계시키지 못한 것은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의 원류를 흉노(몽골-투르크계)로 인식했으나, 그들의 지배집단을 동양계(몽골계)가 아닌 서양계의 투르크 민족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투르크인은 한자로는 돌궐(突厥)로 표기하며 서융(西戎)에 속한다. 투르크계는 6세기 중엽 몽골계 유목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오스만투르크 대제국을 거쳐 현재 터키공화국를 이루었다. 훈족을 투르크족으로 예단한 것은 동로마 황제들이 훈족 지도자들을 알타이어로 ‘강한 사람’을 뜻하는 ‘투르크 왕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지 20년 후, 즉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한 지 20년이 지난 395년에 징기스칸, 알렉산더대왕과 함께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395∼453)가 탄생했다.
아틸라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쿠스나 요르다네스에 의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로마는 훈족에게 공물을 주면서 화친을 맺어 게르만족을 견제했다. 따라서 당시의 외교 관례에 따라 아틸라는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인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자랐다.
훈족이 사용한 동복과 이 동복을 말 잔등에 올려놓은 신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 토기.국보 138호 가야 금관과 국보 188호 신라 천마총 금관에서는 사슴뿔형 장식과 나무 형상의 出자 장식이 보인다. 이 금관은 편두를 한 남자 머리에 맞을 정도로 작은 것이 특징이다(왼쪽부터 시계 방향).
443년 블레다가 사망하자 아틸라가 훈족의 단일 지도자가 돼 훈제국을 건설했다. 이때 아틸라가 지배한 지역은 남으로는 도나우 강 남쪽의 발칸반도, 북으로는 발트 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서로는 프랑스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였다. 치하의 종족 수만 45개 족에 이르렀다.
이 시기 아틸라로 하여금 국제전에 개입하게 하는 여인이 등장했다. 450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는 동생을 황제직에서 밀어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발각돼, 동로마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자 호노리아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아틸라에게 자신의 금반지를 보내며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반지를 보내는 것은 구혼을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아틸라는 서로마 황제에게 지참금으로 로마 제국의 절반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의 요청을 거절한 뒤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켜버렸다.
서로마한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451년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메츠와 랑스, 오레앙 등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가 파죽지세로 서로마 근거지까지 접근하자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이자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훈족과 적대 관계인 게르만족을 규합하여 대항했다.
451년 6월20일, 프랑스의 트루아(파리 동남쪽 약 210km) 서쪽에서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로 불리는 ‘살롱 대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양쪽에서 각각 20여만 명이 참전했고 전사자만 15만여 명에 달한 대규모였다. 결과는 무승부였는데 서로마측으로서는 아틸라의 공격을 막아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틸라는 살롱 대전투 후 곧바로 근거지인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 452년 또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탈리아반도로 공격해 들어간 아틸라 군은 아퀼레이아를 점령한 후 파두, 베로나, 피비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훈족의 공격을 피해 해안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베니에티암(Veni etiam,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고 외쳤는데, 이 말이 변해 지금의 베네치아라는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아틸라와 훈족의 종말은 너무나 어이없었다. 453년 아틸라는 일디코 또는 힐디코로 불리는, 유명한 게르만민족의 대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크림힐트로 나오는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시체로 발견됐다.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들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그가 잠들자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학자들은 결혼식 날 과음해 질식사한 것으로 보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인해 살해됐다고 추정한다.
아틸라왕 사망 후 훈제국 곧 분열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아들인 덴기지크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으나 많은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은 곧바로 분열돼, 469년 훈제국은 동로마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에 패한 후 대다수의 훈족은 동쪽의 카스피해 북부로 귀향했지만, 일부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쪽과 크림반도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몇몇 종족은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에 정주했다. 이때 훈족의 일부가 발라니아에 잔류했다가 후일 마자르인과 합쳐져 헝가리 민족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에 있는 세켈리족은 자신들의 선조가 훈족이고, 자신들이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루마니아는 드라큘라 백작 이야기가 나온 곳이기도 한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는 드라큘라의 원조는 아틸라인 것으로 보인다. 드라큘라의 모델로 알려진 드라큘라 백작(1431∼1476)은 1000년 정도 후대의 사람이다.
서양인들은 아틸라에게 ‘잔인한 약탈자이자 파괴자’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 이러한 비난이 따르은 것은 동양인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심장부까지 점령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호령했고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시아의 동북방을 호령했다.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신라(진한)와 보다 친연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같은 한민족이다.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이 비슷한 시기에 동·서양을 호령한 것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크게 기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로마 무너뜨리고 유럽사를 다시 쓴 훈족: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훈족은 투르크 아닌 몽골계 - 정책뉴스 | 뉴스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korea.kr)
훈족의 출현①…한족에 쫓겨난 흉노의 후예인가 - 아틀라스뉴스 (atlasnews.co.kr)
[훈족이야기]스키타이 민족의 생활과 풍습 - 오를리의 네버 앤딩 스토리 (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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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삼국지의 중화주의를 경계하자”
기사입력 2004-12-12 17:45 |최종수정2004-12-12 17:45
송민섭 기자
출처; [학술]"삼국지의 중화주의를 경계하자” - 세계일보 (segye.com)
고증에서 해석으로, 중국 '촉한공정'과의 싸움
2005.01.10 17:10:00
<서평> 김운회의 <삼국지 바로읽기>를 보고
출처;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5792
멕시코서 '最古最大' 마야유적 발견.."10m높이 1.4km 인공고원"
이주영 입력 2020.06.04. 06:01 댓글 460개
출처; https://news.v.daum.net/v/20200604060106761
고대 마야문명 도시 잇는 길이 100㎞ ‘하얀 길’ 찾았다
입력 : 2020.03.18 14:00 ㅣ 수정 : 2020.03.18 14:00
https://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318601009&wlog_tag3=daum#csidx454f337eb9eff30a255123e4ca8e527
고대 마야문명 초기문자 새겨진 2000년 전 비석 발견
입력 : 2020.03.12 10:30 ㅣ 수정 : 2020.03.12 10:30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s://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312601005&wlog_tag3=daum#csidx6d083842c970f1e90960676093c12ee
마야 문명 멸망 ‘수수께끼’, 첨단 과학기술로 풀리다
입력 : 2018.10.14 16:19:00 수정 : 2018.10.14 16:47:2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0141619001&code=940100
[와우! 과학] 과테말라 밀림서 6만 개 넘는 마야문명 유적 발견
입력 : 2018.08.20 16:28 ㅣ 수정 : 2018.08.2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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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컴퓨터?..2100년 전 '안티키테라 기계' 비밀 일부 풀었다
윤태희 입력 2021. 03. 15. 13:26 댓글 139개
news.v.daum.net/v/20210315132601175
터키 아나톨리아 고대 도시에서 2000년 전 해시계 발견
입력 2020.04.20. 10:33 댓글 56개
터키관광부, "뛰어난 한국 해시계 보다 6세기 앞서"
시계바늘 그림자 계절별로 달리 읽도록 정교히 설계
https://news.v.daum.net/v/20200420103320518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천하제일의 명검들, 모두 '운석'으로 만들었다?
최종수정 2019.08.13 14:59 기사입력 2019.06.18 15:34
대기권 통과하며 자동 제련된 '운철검', 강도 및 내구성 우수
극소수 귀족들의 무기였던 철의 보편화...전쟁규모도 거대해져
https://www.asiae.co.kr/article/20190618153442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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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시간 | 2018-11-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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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민들, 지구 반대편 멕시코로 넘어갔다?http://www.nocutnews.co.kr/news/4724992#csidxa2f18c63823fa15951afc8c63b3b14e2017-01-27
마야 문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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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의 원류 | 아메리카로 건너간 우리민족의 언어적 증거 (손성태) - Daum 카페
세종은 왜 북방민족과의 연분 내세웠을까
등록 :2015-08-17 18:34
강인욱 교수 ‘유라시아 역사기행’ 펴내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047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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