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환국(1) - 환국: 유라시아의 동쪽, 한반도가 가장 앞선 지역이었던 이유 본문
김석동
고조선 이전 태백산 아래 환인·환웅의 배달국 있었다
- 인사이트코리아
- 입력 2019.08.01 09:50 수정 2019.08.01 09:51
땅 넓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중국은 ‘동북공정’ 역사침탈
기록이 말하는 환국의 역사
고려 충렬왕 때 일연(1206~1289년)이 지은 <삼국유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조선 이전에도 나라 또는 통치자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桓因)이 있었다(제석을 이른다). 서자부에 환웅께서 계셨다. 항상 천하에 뜻을 두었으며, 인간 세상을 탐구했다. 아버지께서 자식의 뜻을 아시고 삼위태백을 살펴보시니 가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이에 천부인 삼개를 전수하시고, 그 이치로써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께서 무리 3000명을 이끌고 가셨다. 태백산 정상(즉 태백은 현재의 묘향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셨다. 이름하여 신시이며, 환웅천왕이시다.”
이 기록은 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손보기 교수가 보관하다 연세대에 기증한 조선 초기 간행본인 <삼국유사> 파른본의 내용이다. 한편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정덕본(正德本)에는 환인이 환국으로 기록돼 있다.
이같이 조선조에 발간된 <삼국유사>의 판본들에서는 두 가지 기록 (환인-환국)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조선 시대에는 상고 역사의 시작인 환인, 환국을 같이 인식하고 있었던 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수산(修山) 이종휘는 조선 후기 영조·정조 때의 학자로 <수산집>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이 문집의 일부인 <동사(東史)>에서 고조선, 삼한, 부여·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는데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단군본기(檀君本記)>를 서술했다. 그는 고조선을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나라로 인식하고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를 전개했다. 그리고 환인-환웅-단군-부루(夫婁)로 이어지는 세계(世系)를 밝혔다. 고조선 이전에도 세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음은 <동사> 단군본기의 기록이다.
“조선왕 단군의 할아버지는 신인(神人) 환인(桓因)이다.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서자가 있었다. 환웅은 태백산에 살았는데 신웅(神龍)의 이적으로 박달나무 아래서 (단)군을 낳았기 때문에 단군(君)이라고 이름했다.”
1462년 조선 세조 8년 권람이 쓴 <응제시주(應製詩社)>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에게 서지부에 대인 아들이 있었는데 웅(雄)이라 불렀다.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교화하고자 뜻이 있었기에 천부인을 받으시고 3000명을 거느리고 신단수 아래로 내려 오셨으니 이름하여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불렀다.”
영의정을 지낸 조선 후기 현종·숙종 때 문인 남구만은 <약천집(藥泉集)>에서 <삼국유사>를 인용해 환국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옛 기록의 설명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제석을 이른다. 서자부 환웅께서 계셨다.”
조선 영조·정조 시대의 성리학자 유광익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풍암집화(楓巖輯話)>에서 <삼국유사>의 환국을 인용하고 있다. 내용은 <약천집>과 같다. 조선 중기 중종·인종 시대의 문신인 정황의 <유헌집(遊軒集)>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책상 위의 티끌은 3년의 세월이 두텁게 쌓였구나. 나라의 근본이 하나의 깃발로 휘날리는구나. 어찌 환국을 삼가 기억하지 않겠는가?”
조선 후기 영조·정조 시대의 문신 이복휴는 상고 시대부터의 우리 역사를 시로 읊은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 환국을 기록했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국이란 나라가 있었다. 서자부 환웅께서 계셨다. 환국에는 환인이 계셨고, 환인에게는 환웅께서 계셨다. 부친께서 자식에게 명하기를…”
조선 시대 후기 순조·헌종 시대의 문신 홍경모는 그의 문집 <관암전서(冠巖全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잡기에 이르기를 조선 이전에 환국이 있었으며, 제석의 서자부에 환웅께서 계셨다. 천부삼인을 전수받으시고 그 무리들과 더불어 태백산 아래로 이주하시니라. 그 산 위에 신단수가 있었다. 옛날에 환웅은 신시의 천왕이셨다. 그리고 환웅의 자손이 단군이라 불렀다.”
이외에도 고려 충렬왕 13년 1287년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 <조선왕조실록(세종, 단종, 성종, 선조, 현종, 영조, 정조 편)>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도 환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아래는 위서 논란이 있으나 주목할 만한 사서들이다. 여기서 환국과 환인의 기록을 살펴보자.
환국 역사 3000년, 배달국으로 이어져
신라 시대 승려 안함로가 지은 <삼성기 상(三聖記 上)>과 고려 공민왕 때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 하(三聖記 下)>, 고려 말 행촌 이암이 지은 <단군세기(檀君世記)>, 이암의 현손이며 조선 연산군·중종 시대 학자인 이맥(李陌)이 편찬한 <태백일사(太白逸史)>, 고려 공민왕 때 범장(范樟)이 저술한 <북부여기(北夫餘記)> 등의 사서를 일제강점기인 1911년 계연수가 한 권의 책으로 엮어 <환단고기(桓檀古記)>라고 이름 지었다. 이 사서들에서 기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삼성기 상>의 기록이다.
“우리 환국을 세운 것은 아주 오랜 옛날이다. 한 신이 사백력의 하늘에 있으면서 유일한 신이 되어 밝은 빛을 우주에 비추었다. 이에 권능으로 형체를 변하여 만물을 생기게 하였으며 오래 살면서 그것을 보고 항상 즐거워했다. 지극한 기를 타고 다니니 묘함이 자연과 어울렸고, 형체가 없이도 보며, 하는 것이 없어도 만들며, 말하지 않고 행했다. 어느 날 동녀 동남 800명을 흑수와 배산 땅에 내려 보냈다. 이때 환인은 감군이 되어 하늘에 살면서 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 이것을 환국이라 하며 환인을 친제환인씨 또는 안파견이 라고도 한다. 7세를 이어 내려왔으나 그 햇수는 알 수가 없다.”
<삼성기 하>에도 다음의 기록이 있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부유하고 또 수도 많았다. 처음에 환인이 천산에 살면서 도를 얻어 오래 살고 몸에는 병이 없었다. 하늘을 대신해 사람을 교화해 싸움이 없게 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을 내어 일을 하므로 굶주림과 추위가 없었다. 혁서 환인, 고시리 환인, 주우양 환인, 석제임 환인, 구을리 환인으로 이어져 지위리 환인에 이르렀다. 지위리 환인을 혹 단인이라고도 한다. 고기에 말하기를, 파내류 산 아래에 환인 씨의 나라가 있었다. 천해 동쪽 땅을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 리, 동서가 2만여 리인데 이것을 모두 환국이라 한다.…7세를 이어 그 역년이 모두 3301년인데….”
또 <태백일사>에도 환국 기록이 있다.
“전에 말하기를, 삼신의 뒤를 환국이라 하고 환국은 하느님이 사는 나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신은 환국보다 먼저 있었으며 나반이 죽어서 삼신이 되므로 삼신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다.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삼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삼신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환인이 삼신을 대신하여 환국의 천제가 되었다.”
<삼성밀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파내류 산 밑에 환인 씨의 나라가 있었다. 천해의 동쪽 땅도 파내류국이라 하는데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 리 동서가 2만여 리이다. 이것을 통틀어 환국이라 한다.”
<조대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 백성들의 생활이 부유하고 풍족했다. 처음에 환인이 천산에 있으면서 도를 얻어 오래 살고 몸을 다스려 병이 없었다.”
1075년 조선 숙종 때 북애(北崖)가 쓴 <규원사화(揆園史話)>에도 관련된 기록이 있다. <규원사화>는 고려 공민왕 때 이명이 <진역유기(震域遺記)>와 40여 사서를 바탕으로 쓴 것이라 하는데 <진역유기>는 예로부터 존재하던 고대 사서 <조대기(朝代記)>를 보고 썼다고 한다. 이 사서는 1972년 국립중앙도서관의 이가원·손보기·임창순 3인의 고서심의위원이 1675년에 작성된 진본임을 확인하고 귀중본으로 지정한 책이다.
“상계(上界)에는 문득 하나의 큰 신(神)이 있었으니 그는 환인이요 온 세상을 다스리는 무량(無量)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727년에 저술한 <단기고사(壇記古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환씨전(桓氏典)에, 동방에 부여족이 태백산 부근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중 환인은 관대하고 도량이 커서 가옥의 건축과 의복제도를 시작하고, 아들 환웅을 낳으니, 그 뛰어난 모습을 호걸이라 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 상고사와 관련해 고조선 건국 이전 최초의 나라 또는 통치자로 생각해볼 수 있는 환국-환인에 대해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삼성기 상·하> 와 <태백일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환국은 넓이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달했다 한다. 또 환국의 군장인 환인은 7대를 이었고 환국이 지속된 역년이 3301년이라 한다. 단군을 군장으로 하는 고대 국가인 고조선마저도 한편의 민족설화나 신화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단군 이전의 상고 역사는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대목이다.(2)
안경전
"9000년 전 한민족이 세운 환국이 인류문명의 뿌리"
"인류 문명은 9,000년 전 한민족의 시원(始原) 조상인 환족이 세운 환국(桓國)에서 시작됐습니다. 중국과 일본, 서양의 잘못된 역사관에 오염된 강단 사학자들의 안목으로는 이 같은 역사의 제대로 된 진면목을 제대로 밝혀낼 수 없습니다."
증산도 안경전(58) 종도사(宗道師)는 <환단고기(桓檀古記)> 편찬 100주년을 맞아 18일 대전 증산도 교육문화회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안 종도사는 30년 간 <환단고기>에 직접 역주를 달고 전체 500여쪽에 이르는 해제를 덧붙인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 발행)을 20일 펴낸다.
<환단고기>는 신라 고승 안함로(579~640)가 펴낸 <삼성기>(상)와 원동중의 <삼성기>(하), 고려 이암(1297~1364)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조선 이맥(1455~1528)의 <태백일사> 등 5종을 1911년 운초 계연수가 한 권으로 묶어 편찬한 책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우리나라 역사는 9,000년 전 환국에서 시작됐으며 고조선의 경우 47명의 단군이 기원전 2,333~기원전 239년까지 2,096년 동안 통치했다. 영토는 동쪽으로는 한반도의 동해에 미치고, 북쪽으로는 헤이룽장(黑龍)강을 지나 시베리아까지, 남쪽으로는 규슈(九州)와 일본 본토까지, 서쪽으로는 몽골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고 한다.
안 종도사는 "이처럼 강대한 고조선을 고려ㆍ조선의 사대주의자들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한반도 북부에 국한된 소국(小國)으로 줄여 놓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한국과 중국 일본의 얽히고 설킨 국제관계를 거치는 동안 줄곧 왜곡, 조작돼 한국인에게조차 망각돼버린 한민족과 인류의 뿌리 및 원형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 종도사는 이어 "중국인들이 팔괘를 그려낸 복희씨가 자기들 조상이라 받들지만 실제 복희씨는 동이족의 문명을 연 시조"라며 "그가 활동했던 부여의 발원지도 동이문화의 발상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의 공개 시점 등을 이유로 위서(僞書)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안 종도사는 초대 교주 안운산 종도사의 셋째 아들로 지난 2월 안운산 종도사가 선화(仙化ㆍ별세)한 뒤 제2대 종도사에 입극(立極ㆍ취임)했다.(2)
이진아
한반도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했다?
- 기자명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20 16:05
[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 동아시아사 1부
빠르게 흔들려가는 21세기의 지구. 그 위에 자리한 한반도의 우리는 이 가속적인 변화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야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간은 언제나 역사를 되돌아봐왔다.
그런데 역사를 보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달랐다. 문자가 없는 시대와 사회에서는 이야기를 통해 예전에 있었던 일을 전해주었다. 고대 그리스나 인도, 동아시아의 신화에서 아직까지 남태평양 원주민 사회에서 살아있는, 옛날이야기에 노랫가락을 붙여 들려주는 풍습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역사는 항상 스토리텔러의 입에서 현재의 버전으로 새로 탄생했다. 문자가 있는 사회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일을 현재라는 렌즈에 비추어봤던 것이라는 점, 지금까지 이 연재를 통해서 여러 번 확인했다.
21세기의 역사 보기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요즘 많이 들리는 ‘융합의 역사’라는 키워드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구비전승도 무시하지 말고 기록이라고 다 맹신할 일은 아니라는 반성은 20세기 후반부터 역사학의 새로운 트렌드로 커져왔다. 옛 기록 속에서 기후 등 환경조건을 찾아서 새로운 역사 읽기에 통합하려는 환경역사학도 또 다른 트렌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여기 덧붙여 지난 세기 말부터 문자는 물론 구전에도 담겨져 있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지며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간이 쓴 기록이 아니라 ‘지구가 쓴 기록’, 혹은 ‘지구에 새겨져 남아 있는 기록’을 읽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몇 억 년 전부터 현재까지 있었던 기후변화나 지구자기장 변화의 역사가 선을 보이고 있다.
21세기의 역사는 이렇게 새롭게 확장된 인간 지성의 산물까지도 통합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연재의 기본 전제다.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도 그 전제에 따라 새롭게 읽혀져야 한다고 본다.
유물과 유적으로 해석한 문명발상지론
역사학에 있어서 ‘문명발상지론’이라는 게 있다. 인간이 다른 집단사회 생활을 하는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만이 보이는 특성을 갖는 고도의 문명생활을 시작한 것이 언제 어디서였느냐는 것이다. 19세기말 유럽의 박물학자들에 의해 처음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 화두는 이후 새로운 유적지들이 발굴될 때마다 크고 작은 수정을 거치면서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이 키워드로 자료를 찾으면, 상당히 다양한, 때로는 디테일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콘텐츠들이 난무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의 어떤 사회가 문명생활을 했느냐 아니냐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양하지만, 대체로 도시 형성, 식량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전문직 종사자의 존재, 계급 분화, 국가 수준의 조직 등이 거론된다. 이런 기준으로 지금까지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유역, 이집트 나일 강 유역, 인도 인더스 강 유역, 중국의 황하 유역, 이 4개 지역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발생했을 것으로 꼽혀왔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 서북부 바깥쪽에 위치한 ‘요하’라는 강 유역에서 고대문명의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세계역사학계의 정설들을 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유물들은 요하 유역에서 인간들이 집단을 이루며 고도의 문화생활을 하며 살았던 흔적을 보여주는데, 그 연대가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 1000년까지의 것 정도로 추정된다.
그 중 기원전 4500년대에서 300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의 유물들은 당시 이곳 사람들이 국가 규모의 집단과 사회체계를 이루고 살았다고, 즉 지금 학계의 일반적 기준으로 보아 ‘문명단계’에 이르렀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대체로 인정되고 있는 4대문명 발상지 중 가장 빠른 곳보다 1000년 앞서며, 황하문명보다는 2500년이 앞선다. 제5의 문명발상지가 등장해서, 사실상 제1의 문명발상지임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세계사가 다시 쓰여야할만 한 상황이다.
중국 내에서는 역사가 숨 가쁘게 다시 쓰이고 있는 중이다. 오랜 세월 중국의 주류 세력이었던 한족은 적어도 문자기록이 있었던 때부터 황하문명을 자신들의 시원으로 삼고, 자기 나라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보아 ‘중국(中國)’이라고 불렀다. 만리장성 이남에서 양쯔강까지, 역사시대에 한민족 국가들이 자리했던 곳을 중원(中原), 즉 세계 가운데 있는 터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서 동서남북, 즉 현재 만주와 한반도, 몽골, 위구르 자치구, 중국 남부 및 동남아시아 지역을 모두 오랑캐, 즉 야만족이라고 불렀다. 수천 년 동안 한족 중심의 중국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어 왔던 ‘중화사상’의 핵심이다.
그 오랑캐의 땅 중 일부인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천 년 이상 빠르고 이미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이는 고도로 정교한 문명의 잔재들이 속속 발굴된 것이다. 수천 년 간 중국인들의 정신적 근간이 되어왔던 중화사상이 뿌리부터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발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웠다.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예로부터 중화민족이며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이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국가가 주도하는 요하지역 연구 프로젝트다. 그 핵심은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원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곤란한 문제가 내재해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 중 대다수가 중국의 것과는 판연히 다르며, 한반도 국가들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 유물과 유적이 속했던 연대에 이 지역에 있었던 나라를 규명하자면, 동아시아의 모든 기록들을 검토해볼 때 해당되는 국가가 ‘고조선’밖에 없다는 점도 있다.
기원전 6000년, 요하문명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었던 사해·흥륭와 문화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귀걸이가 출토되었다. 이 옥귀걸이와 꼭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도 출토되었다. 기원전 4500년 홍산문화의 여신묘에서는 곰과 관련된 부장품들이 많이 나와서 홍산인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곰 토템족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기원 신화인 단군신화의 내용이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2000년이 되면 하가점 하층문화로 옮겨간다. 이 시기 유물로 발견되는 돌로 쌓은 성에서는 ‘치’라고 하는, 성 전면에 돌출된 구조물이 눈에 띤다. 성에 접근하는 적들을 활로 막아내기 위해 궁수들을 배치한 탑과 비슷한 것인데, 중국에는 이런 구조물이 있는 성이 없고, 고구려의 성에서만 발견된다.
이밖에도 요하와 한반도 전역의 연계성을 확실히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자료의 하나가 비파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이란, 칼날 부분이 비파와 비슷한 곡선을 보이고 있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청동의 검을 말한다. 발굴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이것이 제사지내는 의례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됐다. 주로 의례의 장소에서 많이 나왔고 제작하기 힘들어 보이는 정교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 한반도 여기저기서 많이 출토되면서 좀 더 실용적인 목적, 즉 무기로 사용됐으리라는 추론이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비파형 동검이 가리키는 역사
다른 문화권의 검과는 판연히 다른 비주얼을 갖고 있는 이 동검은 한반도에서는 함경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지금의 랴오닝 성, 즉 요하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또 거기서 가까운 북경 인근 하이허(海河) 유역에서 소량 발굴될 뿐이며, 그 남쪽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인이 최근까지 자기 문화의 시원이라고 했던 중원지역에서 출토되는 검들은 위 그림에서 보듯 비파형 동검과는 전혀 다른 일자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 중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기원전 12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의 비파형 동검이 기원전 8세기 이전의 것이라고 한다. 즉 비파형 동검은 요하 문명의 가장 마지막 시기인 하가점 상층문화(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까지) 시대에 사용됐던 것이다.
이 동검을 기준으로 본다면 동아시아의 과거 판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7000년부터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이는 요하 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은 서쪽으로는 북경 인근 하이허 유역에서 동남쪽으로는 한반도 대부분을 터전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이허 이남의 중국 지역, 즉 불과 얼마 전까지도 중국인들이 ‘중화(中華)’라고 하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된 문명 발상지임을 자부했던 지역의 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선 국가 문명을 이룩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문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자명한 사실은 현재 왜곡되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고 있다.
“요하문명은 중국인의 선조가 구축했던 문명으로 중국의 문화적 유산이다. 그것이 나중에 한반도 전체로 확산됐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 주최 국제학술회를 거치면서 다듬어져 영어와 중국어로 온라인 공간을 도배하고 있다.(6)
유라시아의 동쪽, 한반도가 가장 앞선 지역이었던 이유
- 기자명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12 10:20
[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
요하문명 관련 담론과 관련해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첫째, 요하문명의 주역들은 정말로 중국인의 조상이라기보다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조상이었을까? 둘째, 그렇다면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문명이 앞선 곳이었을까? 그리고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그렇다’고 주어지면 자연스럽게 세 번째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이 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일단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부터 생각해보자. 굳이 중국이 막고 있는 ‘동북공정’ 대상 지역이 아니더라도 이미 충분한 고고학적 증거가 나왔다. 대표적인 키워드는 ‘빗살무늬 토기’다. 빗살무늬 토기는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서 출토되는 신석기 시대 토기로, 진흙을 빚어 빗살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 넣은 것이 특징이다. 세계적으로 고고학적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지난 세기, 우리는 이 토기가 시베리아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져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배웠다.
하지만 최근 탄소 동위원소 측정법으로 간단하고 정확하게 유물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면서 가장 오래된 빗살무늬 토기의 역사가 바뀌었다. 사실상 가장 오래된 토기는 제주도를 비롯한 한국의 남서해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며, 다음으로 일본 규슈 지방과 요하 지방 순인 것으로 밝혀졌다. 빗살무늬 토기는 바이칼 호 서쪽 시베리아 지역에서 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도 발견되는데, 모두 한반도에서 나오는 것보다 많게는 7000년 이상 지난 다음인 기원전 4000년 이후의 것들이다.
빗살무늬 토기와는 다른 유럽형 신석기 토기인 반트세라믹은 기원전 5500년 무렵부터 나타난다. 중국 본토에서는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가 나타나지 않으며, 가장 오랜 토기로는 황허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양샤오 문화의 채색도기가 기원전 5000년 정도에 해당된다. 물론 요하지역에서는 즐문토기가 많이 나온다.
신석기 시대 기술혁명 중 하나로 꼽히는 토기제작은 세계적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처음 시작됐으며, 그것도 다른 지역에 비교해서 최소한 5천 년 이상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요하문명은 한반도의 다른 문명과 연속선상에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 조상이 그렇게 대단한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정말 그랬을까…?’ 가깝게는 서구문화를 모든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현대사회의 분위기, 그보다 앞서서는 일제강점기에 주도면밀하게 만들어진 식민사관, 그보다 먼저, 그리고 훨씬 오랜 기간 중국이 해온 한민족 역사 축소 및 왜곡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서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을 풀어주는 마법의 열쇠, 기후변화와 생태학적 조건들을 통합해서 다시 보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난 후 찾아온 온난기 초기에는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발해만까지가 지구상에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지역이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만2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가던 시점에서 이미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연결하고 있던 땅은 수면 위에 잠기고 서해안의 너른 갯벌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 갯벌은 온난화 및 서해안의 침강 경향으로 인해 그때보다 갯벌의 폭이 훨씬 좁아진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뛰어난 조건을 갖춘 생태계다.
농업이 주된 생산방식이 되기 이전의 수렵채취 사회에서는 생산성 높은 갯벌의 존재가 인간 정주지 조건의 제1순위였다. 조개를 쉽게 캘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식단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간주돼 왔던 동물성 단백질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렵채취 시대의 인간집단은 우선적으로 그런 곳에서 정주하려 했고, 거기 오래 살면서 먹고 남은 조개껍질을 버려 ‘패총’을 형성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패총의 규모가 크고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은 우리나라 서해안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서해안은 인간 정주에 가장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라는 방증이 될 수 있다.
빙하기 다음에 온 온난기 동안 점점 더 넓어져 온 서해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중국 동해안이, 동쪽에는 한반도 서해안이 나란히 펼쳐져 북쪽 발해만에서 만난다. 1만2천 년 전의 동아시아를 보여주는 위 왼쪽 그림으로 보자면 중국 쪽이 훨씬 더 넓은 갯벌을 형성했을 것 같고, 따라서 훨씬 더 많은 인간들이 일찍부터 모여 살았을 것 같다. 하지만 왼쪽의 지형 및 해류 지도와 함께 보면 사실은 정반대의 상황, 즉 중국 쪽보다 한반도 쪽이 훨씬 더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이는 일단 바닷물의 온도 차이에서 온다. 한반도 서해안 쪽으로는 난류, 즉 따뜻한 바닷물이 흐른다. 필리핀 동남해역에서 일본열도 쪽으로 흐르는 거대 난류 쿠로시오에서 갈라져나온 황해난류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데, 한반도 서안에서는 역시 난류인 서한연안류가 되어 흐른다. 같은 바다인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 동안 쪽에는 발해만에서 남쪽 방향으로 한류인 연안류가 흐른다. 따라서 똑 같이 서해안을 끼고 있어도 한반도 서해안에는 난류의 영향으로 해양생물과 미생물이 풍부하게 사는 갯벌이 형성되며, 중국 동해안은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난류와 함께 지리 및 지형적 조건으로 인한 기후의 차이도 있다. 같은 위도이면서도 중국 동해안 쪽보다 한국 서해안 쪽이 온난하며, 서쪽으로 바다가 있기 때문에 습기가 충분히 공급된다. 이에 비해 중국은 서쪽으로는 차고 건조한 육지가, 동쪽으로는 찬 해류가 흐르는 바다가 있어서, 한반도 쪽에 비해 한랭건조한 기후를 형성하게 된다.
다음으로는 산지생태계와 해양생태계의 균형 문제다. 오른쪽 지형도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은 해안에서 아주 먼 곳에 대규모 산지가 있고, 거기서부터 바다까지는 거의 평야다. 지도상으로 볼 때는 평야가 많아 좋을 것 같지만, 가까이 산지가 없는 이런 평야는 비옥도가 떨어진다. 이에 비해 한반도는 동쪽 바닷가에 연해서 높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어, 거기서 오는 영양물질이 서쪽에서 평야를 이루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기 때문에 서쪽 평야지대까지 풍부한 영양물질이 공급된다. 이것은 하류 평야지대의 생산성과 함께 갯벌 생태계의 생산성도 높여준다.
이런 생태학적 조건은 앞서 세계사 편에서 봤던 메소포타미아나 유럽의 이베리아나 이탈리아 반도 등에도 해당되지만, 한반도의 경우엔 여기서 플러스알파의 차이가 더해진다. 유럽이나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한반도에는 토양침식이 일어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큰 바다가 가까이 있으면 공기는 맑을지 몰라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쉽게 토양이 침식된다. 한 번 쓸려 내려간 표토층이 다시 회복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 거대한 땅덩이의 동쪽 끝에 자리한 한반도에는 중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산지에서 불어오는 흙먼지가 늘 공급되기 때문에 표토층 소실 염려 없이 지속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농업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큰 변화 없이 농사를 지속해서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흙먼지는 토기 제작이 가장 먼저 발달하게 된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유라시아 대륙 쪽에서 불어오는 흙먼지 중 무거운 입자는 중국 동해안 및 서해에 떨어지고 고운 입자만 한반도에 도착하여, 토기의 원료인 좋은 점토를 충분히 형성해주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해볼 때 토기 제작 면에서 한반도가 세계에서 단연 앞선 역사를 자랑한다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토기만 발달한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비옥한 땅은 항상 가장 강한 자가 사는 땅이었다. 잘 먹어서 체력이 월등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장 강한 자로 만들어주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7)
윤복현
유네스코는 한반도-만주를 '문명시원지'로 공식화해야
서해지역의 마고문명에서 단군조선 낳은 요하지역의 한국.배달문명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10/05 [12:05]
전제:유네스코는 공식적으로 현인류문명의 시원지을 한국으로 인정.발표해야 한다
일본왕실의 뿌리는 백제인들임을 주장하는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라는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은 존 카터 코벨과 앨런 코벨이 함께 저술하였으며 여러 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단군조선을 인정하고 현인류문명의 기원을 한국이라 말하고 있다. 책의 내용에는 현인류문명의 시원지로써 서해지역까지 추적하지 못한 한계성이 있지만, 만주지역을 현인류의 시원지역으로 유네스코가 인정했다며 다음과 같은 것이 보인다.
"유네스코(국제연합 교육 과학 문화기구)에서 인류의 기원이 이집트가 아니고 한국이라 할 수 있는 증거는 요동성 근방 만주지역에서 대량의 탄미가 발견함으로 시작됩니다. DNA검사결과 자연산이 아닌 교배종이란것이 판명됨으로서 농사기술이 첨단과학을 이룩했던 것으로 판명됩니다. 군량미로 생각되며 불에 탄 흔적으로 보아 대단한 전쟁이 있었던 듯 하며,1만 7천년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사람의 DNA검사결과 평균 수명이 1000세입니다.고조선 이전의 왕국을 인정합니다. 노예제도가 없었던 유일한 환국의 역사를 유네스코에서 인정합니다. 사람이 하늘이라 믿는 신앙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수가 없는 사상입니다."
태양으로 상징되는 광명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지향한 한국의 강강술래를 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한 유네스코가 "현인류의 기원을 한국으로 인정한다."면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역시 동방(동북아시아 지역)은 현인류문명의 빛이였다는 인류사적 사실로 세계가 인정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유네스코가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기위해 고고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기로 한다. 1만년 이전을 기준으로 세계 최초에 해당하는 '대한민국(한국)' 문화유산은 다음과 같다.
언어(한국어:세계언어의 조상어는 한반도사투리, 인도유럽어의 기원이 되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는 인도로 들어 온 고대 한국인들의 언어)와 문자(중국의 한자,몽골문자.슈메르 설형문자.인도문자.유대인들의 히브리문자.페니키아인들의 알파벳 문자의 기원이 되는 신시배달국의 녹도문자)의 시원민족이다.
1)선박 만들기 세계 최초 8천년 전(경남 창녕군 부곡면 출토) - 고대 한반도인들은 해양족 2)고래잡이 세계 최초 8천년 전(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 3)쌀농사 세계 최초 1만 5천년 전(충북 청원군 출토) - 중국과 인도의 쌀의 조상은 유전학적으로도 한반도 쌀 4)신석기 세계 최초 2만년 전(전남 장흥군 출토) 5)토기 세계 최초 만 수천년전(제주도 고산리 출토) 6)고인돌 및 천문 세계 최초 8천년 전(전남 화순군) 7)빗살무늬토기 세계 최초 8천년전(강원도 양양군 출토) 8)인류의 인문학의 발전을 가져다 준 세계최초 금속활자 직지심경 개발 9)세계최초 자연화약 및 화포개발(고려 최무선) 10)세계최초 로켓 신기전 개발(조선) 11)세계최초 철갑선 개발(이순신과 호남인들) 12)세계 최초 체세포 줄기세포개발(황우석연구팀) 13)세계최대 규모의 서울 한강지역의 전방후원분 등등
계획적인 좌뇌(이성뇌)와 즉홍적이고 감정적인 우뇌(감성뇌)를 조화롭게 사용할 줄 아는 한국인들은 세계적으로 두뇌가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유전학적으로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뇌속의 한민족 유전자를 부활시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때다. 인류사와 접맥시켜 한민족사를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기술함으로 바로 세움으로써 현인류문명에 크게 공헌해 온 자랑스러운 1만년의 민족임을 선언하고 민족기강과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고 하루에도 수 없이 터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건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서로가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이념이 살아 숨쉬는 대한민국을 만들 때이다.
서해의 마고문화를 계승하여 유라시아 초원과 만주를 연결하는 요하지역에 꽃핀 배달문명
1.현인류의 시원 마고문명의 중심지는 1만년 전 육지였던 서해지역
세계 개들의 조상은 유전학적으로 동북아시아 개들이다(미국 생물교과서). 그러면 동북아시아 개들의 조상은 유전학적으로 누구인가? 그건 마고문명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서해지역 진도의 진돗개로, 영리하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대한민국 명견인 진돗개는 동북아시아 개들의 DNA를 모두 가지고 있다. 고대 한국인들의 서쪽으로 이동하여 건설한 이집트(아이집터) 피라미드 벽화에도 개가면 그림이나 개 그림들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고대에 한국인들이 이동하면서 개들을 사육하여 사냥에 이용하고 육식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문명의 특성과 동일한 중국의 요하문명 또한 1만년 전 중국과 한반도 연결되어 육지였던(호주 시드니 대학 지질학과 연구결과 보고서 내용) 서해지역의 마고문명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고는 여성통치자다.황하문명의 뿌리가 되는 요하문명의 특징도 마고를 상징하는 여신을 숭배하는 모계문화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고인돌과 지리산에서도 마고전설이 서려 있다.
한반도와 연결되는 '발해연안벨트문명'이라고도 불리워지는 홍산배달문명이 존재하는 요하지역은 한인 한국과 한웅 배달국의 문명중심지로 중심산은 천산과 태백산이였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성을 중앙 아시아 지역 파미르 고원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건 잘못된 논리다. 마고성은 서해지역에 존재했으며 마고성에서 북문을 통하여 천산지역으로 간 사람이 한인씨의 조상인 황궁씨임으로 서해지역의 마고성 북쪽이면 정확히 요하지역의 천산이며, 요하문명은 고고학적으로도 이제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문명의 생명수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삼족오 설화와 관련한 천제 준이 살았다는 대황지역에 속하는 압록강지역에는 환인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2.고산숭배신앙을 가진 고대 한국인들의 나라 한국과 배달국의 역사활동의 중심지역
서해 마고지역이 바다가 되면서 마고 대다수는 거리가 가깝고 땅이 비옥한 한반도지역으로 대거 이동하여 '한(환)을 의미하는 태양숭배와 모계중심의 마고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여 정착하였다. 그래서 단군3조선 중에서 한반도지역을 마한.마조선이라고 불리운 것이다.그리고 훗날 부여(고구려.백제),흉노.선비족(신라.가야) 등 기마부대를 통하여 한반도.일본지역의 마한족을 지배하게 되는 북방계 한국인들의 조상이 되는 황궁씨는 북쪽지역으로 계속 이주하여 요하를 거쳐 바이칼호수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온화했던 시베리아 지역의 날씨가 추워지자 다시 남하하여 조상인 황궁.유인씨의 터전인 요하지역으로 이주하여 모계중심의 마고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던 곰족과 융합하여 배달문명을 낳고 단군조선을 낳은 것이다.
고대로부터 한국인들에게 있어 높은 산은 광명의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태양과 비를 내리는 하늘과 통하는 장소로 생각되어 제사를 지내는 지성소였다. 동북아시아인들의 고산숭배가 여기서 나왔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아즈텍 등 사막이나 평지로 이동하여 살게 된 한국인들은 산이 없기 때문에 피라미드나 지구라트를 만들어 제천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단군조선이전에 배달문명이 자리한 요하지역를 역사의 중심무대로 삼고 있었던 배달국과 한국의 중심산은 요하지역의 천산.태백산이었지 백두산은 아니였다.
한인씨가 살고 있던 파나루산은 천산(하늘산)으로 지금의 요하지역의 한산(罕山 1929m), 혹은 서한산이라고 부른다. 선비족의 동족인 오한족의 근거지가 되는 오한산(烏桓山)이라고도 했다. 서한산의 정상에는 평지가 있고, 그 중앙에는 홍지수(泓池水)라는 연못이 있는데 천지(天池)라고도 불렀다. 홍지수가 홍익인간의 뿌리라는 의미일까? 태백산에는 조천지(朝天池)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백두산 천지로 생각할 수 없다. 백두산 천지는 기원전 200년의 폭발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래로 동북방 지역을 역사활동무대로 삼았던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단군조선 이래 요서지역의 번조선이 위만세력과 한나라에게 붕괴되고 진시황의 진나라와 한무제의 한나라의 동방진출로 인하여 요서.요하지역의 단군조선유민들이 백두산과 가까운 동북 만주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요하지역의 천산과 태백산을 대신하여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백두산 주변의 숙신족·읍루족·말갈족·여진족·만주족 등도 그들 민족의 성산으로 숭앙하여 역사화·전설화·신격화했다. 고려출신의 신라왕족의 후손인 김함보 후예의 나라인 청나라의 번영도 태산(泰山)·장백산(長白山) 지맥설(支脈說)을 통해서 풍수지리상으로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백두산정계비).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측에 속한다.
지금의 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대규모 화산폭발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인 고려시대 초기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선조 30) 8월 26일, 1668년(현종 9) 4월, 1702년(숙종 28) 4월 14일의 3번의 분화가 기록되어 있다.천지를 만든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매우 강대하여 화산재가 대류권 상층까지 올려져서 이곳에서 부는 강한 서풍인 제트기류에 의해서 백두산에서 약 1,000㎞ 떨어진 일본의 동북지방 북부에서 홋카이도[北海道] 남부까지 흩어져 있다.
이 화산재는 그 성분이 천지 주변의 회백색 부석과 같으며, 가까운 동해 밑바닥에서는 10㎝ 내외의 두께이고 멀리 떨어진 일본 북부에서는 5㎝ 내외로 보다 엷어진다. 일본에서는 이 화산재가 헤이안[平安] 시대 후기의 유물포함층에 존재하여 10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두산 정상부에서 부석으로 덮여 있는 탄화된 나무등걸을 이용한 탄소 동위원소 연대측정값도 1050±70년 B.P.(B.P.는 before present의 약자로 1950년을 기준하여 그 이전의 연대값을 나타냄), 1120±70년 B.P.를 나타낸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은 천지 밑 62~67㎞ 깊이의 상부 맨틀 암석 중 방사능 원소들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열에 의해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녹아서, 지하 3~5㎞ 깊이의 마그마 챔버에 모였다가 자체압력이 증가하면서 지각의 약선대를 따라서 분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제3기말에서 제4기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대규모 화산폭발이 나타나면서 마그마의 저장고였던 마그마 챔버가 함몰되어 천지의 칼데라를 만든 후 화산활동은 차츰 약화되면서 휴화산이 되었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요하지역(흑수.백산)으로 이주해 온 한인씨.한웅씨
[한단고기]에 보면 "우리 한(桓)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斯白力:지금의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 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氣)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남동녀 800이 흑수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 왔는데 이에 한님(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天帝桓因)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했다. 한님은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내용의 요지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한인씨가 흑수 백산의 땅으로 이주해 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국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단고기]는 "천해 동쪽 파나루산 아래 한국이 있는데, 모두 12나라며, 동서 2만리 남북5만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천해는 바이칼 호수를 의미한다. 따라서 바이칼 호수 동쪽에 위치한 한국의 중심지는 파나루산(하늘산=한산)아래 요하지역에 위치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인씨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다가 기후변화로 인하여 남하하여 요하지역에 중심지을 정하여 마고문명을 계승한 한문명을 일으켰으며 유라시아-아메리카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가 된다.
계속해서 한웅씨의 이주와 배달국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자."뒤에 한웅(桓雄)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한인=광명신을 받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내용을 보면 한웅씨족은 한인씨족임을 알 수 있고 교통의 중심지를 천평으로 정하니 천평이 바로 청구라는 것이며, 신시를 도읍으로 삼고 나라이름을 배달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배달민족이라고 할 때는 한웅의 배달국을 기준으로 삼는 말이며 단군민족이라고 할 때는 단군한국조선을 기준으로 삼는 말이니 한인의 한국민족이나 한웅의 배달민족이나 단군의 단군민족이나 조선민족이나 모두 동일한 유라시아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한겨레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한단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인씨의 터전은 바이칼 호수와 몽골초원을 통하여 완만한 홍안령 산맥을 넘어 요하지역으로 이주해 오기 전까지는 기후가 온화해서 유목생활하기가 좋았던 시베리아 지역이였음을 알 수 있고, 기후가 추워지자 따뜻한 남쪽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종족이 바로 한인씨의 후예 한웅족임을 알 수 있으며, 고고학적으로도 중국 황하문명의 근원이며, 이집트.아즈텍 피라미드 연대보다 1천년이 훨씬 넘는 초기 석석총들이 널려 있고, 서양문명의 뿌리가 되는 슈메르문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하문명의 중심지가 되는 요하지역이 한웅족이 정착한 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심산은 현재의 백두산이 아닌 요하지역의 태백산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천산지역은 서해지역에 위치한 마고성이 점점 바다가 되면서 마고족이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질 때에서 마고의 율려를 반드시 회복하겠다며 북문을 통하여 천산지역으로 이주하여 도를 닦았다는 황궁씨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양심의 자유율법(율려)이 통했던 마고시대의 도맥을 계승한 황궁씨는 유인씨의 조상이고 유인씨는 한인씨의 조상이다. 율려국가란 예컨대 주인없는 가게라도 양심적으로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 가는 사람들의 나라를 의미한다.
3.고고학적 사료(위서로 취급받는 '한단고기'의 기록내용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고학적 자료로는 한인씨의 한국의 중심지역과 관련한 파나루산이 있던 부하진은 인류 최초의 복골(卜骨)이 출현한 유적지가 있다. bc3300년의 유적이라고 밝혀졌으니 은나라의 복골은 이보다 1000년 뒤의 것이다. 또한 주변 고성터의 흔적을 보면 bc3300년 이전의 유물과 유적 발견도 기대된다. 뒤에 흉노에 패망한 동호족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오환산, 혹은 선비산이라고도 하였다. 선비족이 터전으로 삼은 오환산주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작업은 한인씨가 한국의 중심지로 삼았을 지역의 실체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웅이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요하지역으로 들어와서 가장 높은 산 위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것이다. 이 홍산문화권에서 가장 높은 산은 난하灤河와 서요하西遼河의 북쪽 가지가 발원하는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서 높이는 2067m다. 이 대광정자산이 태백산 혹은 불함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한검이 나라를 개국한 곳도 바로 불함산이였다. [한단고기]는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갗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生靈)들을 두루 교화 하였다." 단군한검이 불함산(태백산)에 올라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개국을 선포한 낸 후에 첫 도읍지로 삼았다는 아사달 또한 한국과 배달국의 문명을 유지하고 있는 요하지역의 조양(아침태양=아사달)이였다. 조양지역은 고고학적으로 단군조선의 상징인 비파청동검이 최대로 발굴되는 지역이다. 따라서 조양은 옛 조선의 도읍지라는 중국문헌의 기록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지역이다.
커발한 환웅은 태백산에 내려왔다가 신시 목엽산에서 웅씨족과 결합하고 그 곳에 수도 아사달을 두고 시장을 열어서 문물을 모이게 하였다. 그러나 환웅의 도성은 다시 남쪽 청구, 그의 처음 개척지 천평으로 옮겨갔다. 한웅족과 웅녀족의 피를 직통으로 받은 단군족에게는 태백산(불함산)이 한웅천황이 강림했던 성산이지만 환웅에게는 그가 사냥하고 순수했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도자기는 갈도(褐陶)로서 홍산문화의 전형인 채도彩陶가 아니다. 즉 환웅이 강림하여서 마고문화를 유지하는 웅녀족과 결합까지 하였으나 정착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웅녀족도 환웅족을 따라서 남천하여 능원현(凌源縣)의 우하량(牛河梁)에 자리잡고 그 곳에 살던 기존의 호족(예穢족=호랑이 토템족)을 밀어낸 것으로 보인다.
환웅, 웅녀의 만남은 이미 반만년전에 실재로 존재했던 사실이 이 나리사대 돌조각품으로 증거된다. 이 석조물들처럼 곰 부족의 여자가 소원하여 환웅의 씨를 얻어서 득세를 하고 호랑이족 예穢의 영역을 획득해 나간다. 그리고 그 서쪽의 임서현林西縣 쌍정雙井 백음장한白音長汗 유적지에서는 35cm 높이의 임신한 여신상生育女神像이 나왔다.
웅녀족이 환웅과 함께 예족의 땅을 빼앗아 옮겨간 곳으로 홍산문화의 정수격인 요녕성 능원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최상단의 여신묘를 중심으로 반경 5km 안에 6개 지점에 걸쳐서 약 20개의 대형 적석총과 제단 등이 있다. 남쪽에 금자탑金字塔이라는 제사 건축지는 3단 원형 제단으로서 아랫단의 직경이 60m, 윗단의 직경이 40m에 이르고 그 위에 봉토를 하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200m X 200m 규모의 신석기 석성 터가 남아있다.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거의 홍산문화 유물이며 청동기는 일체 없지만 제단의 규모, 왕릉의 규모가 세계적이라서 중국 역사학계에 역사적 쇼크를 주었다. 우하량 적석총 홍산문화는 시기적으로는 약 5,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왕릉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이 우하량 지역을 웅산熊山이라고 고려하면서 유웅씨有熊氏와 그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公孫軒轅, 그리고 황제의 손자 고양왕 전욱顓頊등의 조상으로 고려한다. 그리고 최상부의 여신묘는 복희와 부부였던 여와신女媧神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여와신은 복희와 함께 뱀으로 형상화되기는 했어도 곰은 아니었다. 이곳 여신묘에는 특별하게도 곰의 턱뼈가 부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홍산문화 적석총의 주인은 환웅족과 곰족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홍산문화 특유의 피라미드형의 적석총 묘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의 적석총, 서울 송파의 적석총, 경주의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우하량에서는 홍산문화의 최정수라고 할수 있는 각종 옥기들이 최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옥조룡(玉彫龍)이 대표적으로 많고, 구름무늬 옥패(玉牌), 옥벽(玉璧), 쌍련옥벽(雙聯玉璧), 삼련옥벽(三聯玉璧), 옥종형기(玉琮形器), 옥탁(玉鐸), 옥완(玉瑗), 옥비식(玉臂飾), 옥고(玉[]), 옥고형기(玉[]形器), 옥거북이, 새조각, 수면형(獸面形) 옥패식 등이다.우하량의 도기는 용린문(龍鱗文) 흑도(黑陶), 홍도(紅陶), 자도(紫陶) 등 채도가 많이 나오는데 종합하면 매우 강력한 신권 국가 체제라고 할 수 있다.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 복희伏犧인데, 점복술로 인하여 여와복희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 낙랑을 거쳐 진陳으로 갔는데 산서성을 다스리다가 산동성으로 갔다.
내몽고 오이길목륜하烏爾吉沐淪河 유역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화富河溝文化는 약 5300년전에 시작되었는데, 촌락의 방이 원형인 것이 추가되고有方形、圓形兩種 방 중앙에 화로 구덩이有灶坑가 나타나고 불을 피워서 추위를 막고 음식을 끓여 먹었고, 그외 뼈를 불에 구워서 점을 치는 복골卜骨이 나왔다. 이는 중국 최초의 복골이며 은허의 복골 문화가 본래 홍산문화 신시의 복희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즉 은나라 은허 문명은 바로 홍산 문화와 용산문화의 후손이다. 동시에 은나라 갑골 상형 문자도 여기서 발생하여 전래된 것이다. 배달국의 녹도문자에서 유래한 한자漢字도 중국인들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한국민족이 홍산문화에서 개발한 기호로서 만들어진 양의 문자이다.
요하지역의 홍산배달문화의 특징
1) 홍산문화의 첫 번째 특징은 한반도지역을 기원으로 두어야 하는 유물로써 한반도를 출발점으로 유라시아 지역에 분포된 빗살무늬토기를 들 수 있다.
2) 홍산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역시 한반도 마한인들의 특징으로써 다양하고 정교한 옥기다. 용, 돼지용, 물고기, 거북이, 매미, 부엉이 등과 같은 다양한 토템, 그리고 옥벽玉壁、옥환玉環、구름무늬장식勾云纹佩飾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3) 홍산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역시 한반도 마한인들의 고인돌양식과 동일한 돌무덤이다. 돌을 쌓은 적석총積石冢도 나타나고 석곽石槨 무덤과 석관石棺 무덤도 나타난다. 석관무덤은 요녕성 우하량牛河梁, 하북성 평천平泉 위장圍場 당산唐山 적봉시 홍산紅山과 하가점夏家店, 영성寧城 등에 존재한다.
4)네번째 특징인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거주했던 고대 한국인들의 특징인 화로를 이용한 난방과 역시 불을 이용한 복골의 출현이다.
5) 다섯번째 또한 한반도지역에 분포한 암각화의 기록이다. 태백산이었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서요하의 지류인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百岔河 계곡를 따라서 신석기 시대부터 암각화가 발달해 있다. 강안을 따라서 100리에 걸쳐서 약 140개의 암벽에 가지가지 주제로 벽화가 남아있다. 바로 바다와 강에서 고기를 잡던 1만년이전의 마고족들이 한반도와 요하지역으로 이동하여 어로활동을 바위에 그린 것이다.
그런데 요하지역의 암각화는 여러곳의 암화와 비교하여 암각화 주제 중에 사슴이 유독하게 많다.사슴은 기후변화로 인하여 요하지역으로 이주해 내려오기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한인.한웅족의 먹이의 상징이다. 부여가 원래 사슴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반면에 부루는 늑대를 가리킨다는데 단군 부루가 산동에 세운 낭사군 낭사대琅邪臺도 늑대의 낭狼이다.
백분하 암각화에는 수렵화, 부엉이형 인물화, 군무화群舞畵, 생식화生殖畵, 천체성수화星宿畵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성자에서도 사냥 기마도 같은 암화가 보인다.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예술로 추정하지만 일부는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현되어 신석기에 암각화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암각화 주제가 주로 사냥과 목축이므로 유목민족의 생활이기에 환웅족이 마고족에 해당하는 곰족의 요하지역으로 유입되었다는 증거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하지역의 홍산배달문화의 범위는 동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서쪽으로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 남쪽으로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북으로는 서요하(西遼河) 북쪽까지 광할한 지역이다. 홍산문화는 대략 bc4800년에서 bc2200년까지인데 [한단고기韓檀古記-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기록상의 환웅시대인 bc3898년에서 bc2333년까지와는 하한(下限)이 거의 일치한다. 웅녀족과 같은 곰 토템을 현재도 가진 에벤키(鄂溫克, ewenki)족은 퉁구스tungus, 또는 색륜索倫, solong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들은 지금 내몽고의 흑룡강 가까운 최북부 하이라얼시와 몽고, 소련 바이칼호변, 그리고 예르니아강 퉁구스카, 사하공화국 야쿠트공화국까지 퍼져 사는 겨우 수만명의 희소 종족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슴을 키우고, 곰, 멧돼지를 사냥하는 유목민이며, 지야지신(치우기?)을 경배하고 또 산신과 불의 신, 그리고 곰을 숭상한다. 또한 그들 사회에서 무당은 신분이 높은데 이들로 인해 샤만 연구가 생겨났다. 아무튼 이들의 유목 생활 풍습이 백분하 계곡의 암각화이기도 하다.
단군조선에서 고추모의 고구려까지를 [한단고기]는 이렇게 전한다.
"뒤에 신인왕검께서 불함산(요하지역 태백산=한웅천황이 강림한 산)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갗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었으니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익혀 여러 생령(生靈)들을 두루 교화 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시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에게 명하여 글자로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회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우에겐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병진(B.C.425)년, 주나라 고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 바꾸고 백악으로부터 또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에 8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 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B.C.2333)년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니 그 햇수가 2096년을 헤아렸다. 임술(B.C.239)년 진나라 시황B.C.246~206)때 신인이신 대해 모수께서 웅심산에서 일어났다. 정미(B.C.194)년 한나라 혜제때 연나라 추장이였던 위만이 기자조선을 강탈하자 기준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다길을 택해서 멀리 망명하였다. 이로부터 삼한의 무리는 거의 한수의 남쪽으로 옮겨 갔으나 한떼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하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년(BC108년) 한나라의 무제때에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위만조선의 왕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이라 했다. 을미(B.C.86)년 한나라 소제(B.C.87~74)때,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흉노.선비.부여.진조선유민의 나라)의 옛 땅이다. 계해(B.C.58)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따라서 세계 각지에 현인류문명을 낳은 부모민족답게 인류중심국가로 우뚝 서야 할 대한민국 국통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만년 이전의 마고문명(중심지:1만년이전에 중국과 한반도가 연결되어 육지였던 서해지역)=>황궁.유인씨(중심지:만주 천산지역)=>한인씨 한국(중심지:바이칼호수.시베리아)/시베리아 기후변화로 인하여 많은 한국인들 유라시아.아메리카로 이동하여 배달.요하.황하.슈메르.인더스.이집트.그리스.마야.잉카.아즈텍 등 현인류문명 건설 =>한웅씨 신시배달국(중심지:요하.만주)=>한검씨 한국=고씨 조선(중심지:요하.만주)=>해모수 부여(중심지:만주) =>고추모 고고리(중심지:만주)=>대진국(중심지:만주)/거란에게 멸망 후 황족들 고려로 망명 =>왕건의 고려(중심지:한반도) *일제에 국권을 상실하고 지금의 대한민국 정신상태를 썩게 만든 500년의 얼빠진 소중화 사대주의 조선(중심지:한반도)=>순환론에 따라 민족사와 민족정신회복을 통하여 원시반본으로 부활하는 대한민국.(4)
<주>
(1) 고조선 이전 태백산 아래 환인·환웅의 배달국 있었다 < 김석동이 쓰는 한민족이 쓰는 경제DNA - 인사이트코리아 (insightkorea.co.kr)2019.08.01
(2) "9000년 전 한민족이 세운 환국이 인류문명의 뿌리" (daum.net)2012. 6. 18.
(3) 한반도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했다? - 시사저널 (sisajournal.com)
(4) 유라시아의 동쪽, 한반도가 가장 앞선 지역이었던 이유 - 시사저널 (sisajournal.com)
(5) 유네스코는 한반도-만주를 '문명시원지'로 공식화해야: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9/10/05
<참고자료>
환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민속이야기] 칠월칠석 - 견우와 직녀는 ‘인류시조 나반과 아만’ 설화 - 천지일보 (newscj.com)2017.08.24
개천절은 역사 왜곡이다? - 인천in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인터넷신문 (incheonin.com)2016.10.12
9천년 한민족사-안경전 상생방송 이사장의 『환.. : 네이버블로그 (naver.com)2014-07-01
˝빛은 동방에서 !˝-한민족의 뿌리 사상: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3/09
한국고대사를 새로 쓰는 사람들의 주장: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3/17
˝천해(바이칼) 동쪽˝의 나라 환국(桓國):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08/04/12
동이족 이야기 - 9000년 역사의 역대 왕계표 (siddham.kr)
우리민족의 역사는 9200년 전부터 시작 되었..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동아시아의 황해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환국과 사서기록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환국의 초기유적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한(韓)민족의 고대국가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한국고대사 한국이 세계최초인것들(다음카페)
https://cafe.daum.net/121315/CK3e/152
단군조선은 허구적 신화가 아닌 실제 역사 《SBS》, 2008.10.3.
https://youtu.be/-iizCQSsPRk?list=PLRAmvpNm4pmlK0pL_6QCe3gXPm9VfISJz
송준희교수 환국
https://youtu.be/7BQlizvzv4g?list=PLRAmvpNm4pmlK0pL_6QCe3gXPm9VfISJz
우리역사의진실_우리나라 최초의 나라 환국12연방_1편
https://youtu.be/KYutJjWLuPQ?list=PLRAmvpNm4pmlK0pL_6QCe3gXPm9VfISJz
원방각을 해석할수 있는 문화원전이 환국의 신교우주론에서 나온 천부경
https://youtu.be/Kz19dV_07gA?list=PLRAmvpNm4pmlK0pL_6QCe3gXPm9VfISJz
동이족의 어원은 퉁구스이며 아홉 개의 한국을 의미한다 | 김정민 박사와 함께하는 고대조선 3부
수메르문명에 대한 환단고기의 기록, 환국시대 우르국과 수밀이국이 있었다
https://youtu.be/Cm-TZuQx65Q?list=PLRAmvpNm4pmlK0pL_6QCe3gXPm9VfISJz
'환국시대 > 환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국(3) - 《환국은 어디인가?》 (1) (0) | 2024.05.12 |
---|---|
환국(2) - 신석기시대 고고학(2) (0) | 2024.05.11 |
환국(2) - 신석기시대 고고학(1) (1) | 2023.11.29 |
[김운회의 新고대사]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부록 : 그림으로 보는 고조선 (0) | 2020.08.29 |
[실증환인환웅단군역사] (2) | 2017.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