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2. 고조선의 강역 - 갈석산은 어디인가? 본문
정인보
즉 장성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요동인 셈이다. 장성은 그 터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시대에 따라 이름이 변경되기 일쑤인 강이나 산에 비하면 확실한 기준점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시황본기〉 〈몽염전〉 〈흉노전〉 등에서 모두 장성이 요동에서 끝난다고 적고 있는데 거기에 언급된 장성이 끝나는 지점은 지금의 산해관이므로 이곳이 바로 고대의 요동이었음이 확실하다. 만약 이곳이 '요'의 '동'쪽이라면 장성은 요수를 가로질러 흘러야 할 것이다. 《통전(通典》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갈석산은 한대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진나라의 장성이 요수를 동쪽으로 가로질러 여기에서 시작되며【또는 그치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기록이 옳다면 장성이 갈석산【진황도(秦皇島) 바다】에서 끝난다는 것과 동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 요수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장성이 동쪽으로 가로질러 해안으로 이어지는 그 근처에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흐름을 마주하는 강이라면 지금의 난하밖에 없으므로 이 난하가 바로 고대의 요수인 셈이다.(1)
윤내현
이제 장성에 대해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에 중국측이 쌓았던 장성은 연장성과 진장성이 있었다. 연장성은 전국시대 연나라가 쌓은 것이고 진장성은 중국이 통일된 후 진제국이 쌓은 것이다.
燕장성에 대해서는 사기 「흉노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는 秦나라와 趙나라가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장성을 쌓았음을 말하면서 燕장성에 대해서도,
燕나라도 장성을 쌓았는데 造陽으로부터 襄平에 이르렀다. 上谷 · 漁陽 · 右北平 · 遼西 · 遼東郡을 설치함으로써 胡를 방 어하였다.
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 사실이 확인된다. 하나는 燕장성은 造陽으로부터 襄平에 이르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上谷 · 漁陽 · 右北平 · 遼西 · 遼東 등의 郡은 연장성의 안쪽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秦장성에 대해서는 사기 「몽염열전」에,
秦이 이미 천하를 병합하고 곧 몽염으로 하여금 30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융적을 북쪽으로 몰아내게 하고 하남을 회수하 였다.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에 의하고 변경의 험한 곳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臨조로부터 시작하여 遼東에 이르렀는데 그 길이는 만여 리나 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만리장성이라 부르는 진장성인 것이다. 그런데 진상성은 전구간을 완전히 새로 쌓았던 것이 아니다. 진제국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 燕 · 趙 · 秦 등의 나라가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장성을 보수하여 연결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秦長城의 동쪽 끝부분은 그전에 燕나라가 쌓았던 장성이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리고 앞 절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秦 始皇帝 · 秦 二世皇帝 · 西漢 武帝 등이 국경지역을 순행하면서 동북쪽으로 가장 멀리 도달했던 곳은 난하 하류 동부유역에 있는 碣石山지역이었다. 碣石山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선상에 위치해 있었고 진제국과 서한제국의 요동군은 갈석산을 경계로 하여 그 서쪽의 난하 하류유역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2)
심백강
이상에서 인용한 자료들을 살펴보면 요수의 발원지로서 백평산, 위백평산, 갈석산, 지석산, 요산 등의 지명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요수의 발원지로서 등장하는 산이 너무 많다. 이렇게 많은 산 중에서 어떤 산이 과연 요수의 발원지인지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자료를 차분히 분석해보면 대요수의 발원지는 백평산 또는 위백평산이고 지석산, 갈석산, 요산은 소요수의 발원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요수의 발원지인 지석산과 갈석산은 이르만 다를 뿐 실제는 같은 산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석산은 우리말로 숫돌 산이고 갈석산은 빗돌 산이란 뜻이다. 숫돌이나 빗돌은 그 모양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그 산 정상에 네모반듯하면서 길쭉길쭉하여 숫돌이나 빗돌처럼 생긴 돌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어서 그 지역사람들이 빗돌 산, 또는 숫돌 산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면 요산이란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설문해자』에 "요자는 멀 원자와 같은 뜻이다"라고 하였다. 요수를 중원에서 바라볼 대 가장 멀리 떨어진 강이라 해서 중국인들이 멀리 있는 강이란 의미로 요수라 호칭했다. 이런 것을 미루어보면 갈석산이 한족의 입장에서 볼 때 산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이라 하여 요산으로 불렀을 수 있다.
또 갈석산은 요수가 발원한 산이므로 여기에 근거하여 요산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갈석산, 지석산이 그곳에 거주하던 토착민들이 부르던 산 이름이라면 요산은 중원에서 중국인들이 사용한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갈석산, 지석산, 요산은 명칭은 다르지만 사실은 동일한 산에 대한 다른 명칭이었던 것이다.
역사상에서 요녕성이나 길림성이나 한반도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갈석산은 하북성에 위치하고 있었던 산인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3)
이덕일
‘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 사서 하나도 없어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③ 낙랑군은 어디 있었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그러나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2천여년 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역시 일제 식민사관이 아니라 낙랑군 설치 당시의 시각으로 그 위치를 찾아야 한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도 역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일제시대 <사학잡지>에 쓴 ‘진장성동단고(秦長城東端考: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대한 논고)’에서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본 것을 비판없이 따른 것에 불과하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군색함 자인한 이병도 ‘황해도설’ 한국 주류사학계 무작정 받아들여
“수성현(遂城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뜻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군색하기 때문에 ‘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 ‘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전8권)>은 이나바와 이병도의 주장대로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만리장성 관광단을 모집해서 외화 획득에 나서야 할 일이지만 지난 2천년 동안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중국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낙랑군 수성현을 수안 근처로 표시했으면 갈석산도 그 부근에 그려놔야 하는데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은 한반도 깊숙이 그려놓고도 갈석산은 본래 위치대로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놓았다. 중국측 동북공정 논리의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昌黎)현을 주목해야 한다.
갈석(碣石)은 ‘돌(石)로 새긴 비석(碣)’이 있다는 뜻인데 비석을 세운 인물은 진시황(秦始皇)이다.
서기전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상식이다.
그럼 지금의 창려현이 옛날에는 수성현이었는지를 알아보자. 고대 지명은 왕조 교체에 따라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여러 사서(史書)를 추적해야 한다. <수서(隋書)> ‘지리지’는 수성현은 11개 속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창(新昌)현이라고 적고 있다. 신창현은 후제(後齊) 때 조선현을 편입한 곳이다. 신창현은 수나라 문제 18년(598) 때 노룡현으로 개칭되는데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河北道)조는 창려현이 노룡현에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수성현의 속현이었던 신창현이 당나라 때 창려현이 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창려현이 과거 수성현의 일부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비정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수안군 건치연혁’에는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今名:수안)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에 수안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고려 태조 23년(940)에 수안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유일한 근거가 수(遂)자인데 그마저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서 아무리 빨라도 10세기 이전에는 ‘수(遂)’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못 본체하고 황해도 수안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1913년 세키노(關野貞) 같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 곧 옛 조선현으로 만들어졌지만 식민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반론이 일었다. 고대 수도는 관방(關防), 즉 방어시설이 가장 중요한데 대동강변 토성은 사방이 탁 트인 낮은 구릉지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는 반론이었다.
<사기> ‘조선 열전’은 고조선의 우거왕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적고 있지만 대동강변 토성 주위에는 험준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는 또 “우거왕이 굳세게 성을 지켜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적고 있는데, 대동강변 토성은 반나절도 지키기도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낙랑군의 실제 치소를 찾자는 게 아니라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그런 대동강변 토성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에서 보듯이 한국 주류 사학계에 의해 오늘도 ‘올바른 역사’로 주장되고 있다."(4)
신종근
한사군은 북한 평양에 있었을까?
기자명신종근 객원기자 입력 2020.04.11 00:13수정 2020.05.10 00:28
우리 머리역사복원 첫걸음은 한사군 위치를 찾는 것이다.
<한서> 가연지 열전,
<한서>, <후한서> 낙랑군의 열구현 위치는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은 중국 하북성 갈석선 인근이라고 증거
한사군(漢四郡)은 북한에 있었나? 고대 요동(遼東)에 있었나?
두 번째 이야기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중국 동북공정 및 일본 극우파와 남한 강단사학은 모두 북한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서기전 108년에 설치한 낙랑군(樂浪郡) 및 한사군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고조선 강역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사군(漢四郡) 중에서 중심인 낙랑군의 위치를 알면 나머지 3군도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대략 파악할 수 있다.
낙랑군의 위치를 알려면 낙랑군이 존재했던 당시에 쓰여진 1차 사료(史料)나 그 사료를 보고 쓴 고대 사료를 근거로 판단해야 한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중국의 1차 사료를 일부 살펴보자.
2. 《한서(漢書)》 〈가연지열전(賈捐之列傳)>
《한서》〈가연지열전〉에는 “(한나라 강역이)동쪽으로는 갈석을 지나 현도, 낙랑으로써 군을 삼았다(東過碣石以玄菟、樂浪為郡)"라고 말하고 있다.
한(漢)나라에서 상서령(尙書令)을 역임한 가연지(賈捐之:?~서기전 43년)는 낙랑군 설치 후 50여년 후의 인물이다.
갈석산(碣石山) 부근에 낙랑군과 현도군이 있었다는 뜻인데, 한(漢)나라 때 갈석산은 현재 중국 하북성 창려현에 있다.
갈석산은 진시황(秦始皇)을 비롯해서 한 무제(漢武帝), 조조(曹操)까지 9명의 황제가 올랐다고 해서 ‘9등(九登)황제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산이다.
3.《한서漢書》 및 《후한서後漢書》의 낙랑군 열구현(列口縣)의 위치
낙랑군은 지금으로 치면 도(道) 단위의 행정구역으로서 산하에 약 25개의 속현(屬縣)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열구현(列口縣)인데, 《후한서》〈군국지郡國志〉에는 “곽박이 《산해경》 주석에서 말하기를, ‘열은 강이름이다. 열수는 요동에 있다’〔列口(郭璞注山海經曰, “列, 水名, 列水在遼東”)〕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열구(列口)는 열수(列水)라는 강의 하구에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그 열수가 고대 요동(遼東)에 있었다는 뜻이다.
《한서》는 반고(班固:서기 32년~서기92년)가 지은 전한(前漢:서기전 302년~서기 220년)의 역사서이고, 《후한서》는 남조(南朝) 송(宋:420~479)의 범엽(范曄:398~445)이 지은 후한(後漢:서기 25년~220년)의 역사서이다.
그런데 이 역사서들은 모두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갈석산 부근에 있으며, 낙랑군 열구현이 고대 요동(遼東)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5)
출처:
1. 미국 LA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 근무하는 교수, 교사, 교민들과 함께한 '21세기 동아시아 역사 전쟁과 한국'이라는 주제 발표 자료. 2019.11
2.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김병기, 2006, 역사의 아침.
김봉렬
진 장성의 동쪽 끝은 어디인가(3)?
기자명김봉렬 입력 2016.05.11 10:29수정 2016.05.13 13:04
진 장성이 북한 평양까지 왔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
이에 동조하는 동북아역사재단과 국내 식민사학계...
앞 2회차 글을 요약하면 ‘우공갈석’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 낭아산)이라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사실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첫째, 『사기집해』(사료 B-4)와 『한서』지리지(사료 B-6)에 의하면 항산의 동북쪽에 갈석산이 접하여 있다고 하였다. 항산은 예로부터 중국 5악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으로 너무나 유명한 산이다. 오늘날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 곡양현에 위치한 대무산(大茂山, 일명 신선산, 해발1,898M)이다. 갈석산은 이 대무산과 동북쪽으로 접하고 있으므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둘째, 중국 남송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그림 5>의 『기주협우갈석도冀州夾右碣石圖』에 갈석산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기주협우갈석도』(사료 B-7)에 의하면 갈석산의 위치가 역수易水 등에서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산이 오른쪽에 있다고 하였다. 역수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흐르는 거마하拒馬河이다. 갈석산은 거마하의 하류 서쪽에 위치하므로 오늘날의 백석산이 분명하다.
셋째, 갈석산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는 사실인데, 오늘날 현대 과학은 시대별 황하 하류의 흐름과 해수면의 높이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라 우임금 시절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의 위치를 과학적으로도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602년 이전의 고대 황하는 그 하류의 흐름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로 흘렀다. 그리고 당시에는 해수면의 높이가 지금보다 높아서 보정시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그림 6> 참조). 그러므로 ‘우공갈석’인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은 정확하게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다.
지금까지 사료 B-1~B-7을 통하여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하였던 ‘우공갈석’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임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료 B-2는 ‘우공갈석’을 설명한 것인데 다시 한 번 살펴보자.
B-2 : “『지리지』는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또 『수경』은 말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 인듯하다.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군의 갈석이다.” 『사기색은』
사료 B-2에서는 ‘북평군 여성현’에 위치한 갈석산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 그리고 ‘요서 임유현’에 위치한 갈석산 등 3개를 인용하면서, ‘아마도 갈석산이 두 개 인듯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료 B-2에서 언급된 3개의 갈석산 중에서 두 개는 같은 갈석산을 가리키며, 나머지 하나는 다른 갈석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군의 갈석이다’고 하였으므로, ‘북평군 여성현’의 갈석산은 ‘우공갈석’으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다.
그러면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는 구절의 갈석산은 ‘우공갈석’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다른 갈석산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자. 『태강지리지』의 갈석산이 ‘우공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 주변에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였는지 여부와 그곳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백석산의 동쪽에는 수성遂城이라는 지명과 만리장성의 유지가 지금도 남아있다(<그림 7> 참조). 뿐만 아니라 중국 송나라에서 편찬된 사서인 『무경총요』에는 이곳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B-8 :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현의 땅이다. 진秦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무경총요』
사료 B-8의 기록에서 송나라 수성현이자 전국시기 무수현의 땅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를 가리킨다. 이 기록을 통하여 ‘우공갈석’인 백석산(또는 낭아산) 일대에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는 구절의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은 ‘우공갈석’인 백석산(또는 낭아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사료 B-2에서 말한 ‘북평군 여성현’의 갈석산과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같은 ‘우공갈석’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사료 B-2에서 ‘요서 임유현’에 있다는 갈석산은 백석산(또는 낭아산)과 다른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은 어떤 산인지 살펴보자.
B-9 : “항산은 북악으로 중산 곡양현 서북쪽에 있다.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 대우가 그 돌을 뚫어 오른쪽을 끼고 황하를 받아들이게 했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올랐는데, 바닷물이 서쪽으로 침범하기를 세월이 흘러 그 산을 삼켰으므로 물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恒山為北嶽, 在中山上曲陽縣西北, 碣石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 大禹鑿其石, 夾右而納河. 秦始皇、漢武帝皆嘗登之, 海水西侵, 歲月逾甚, 而苞其山. 故言水中矣).” 『수경주』 ‘우공산수택지소재’
사료 B-9에서 보듯이 ‘요서 임유현’에 있다는 갈석산은 발해의 바다속으로 빠져서 사라져버렸다는 갈석산이다. 앞에서 살펴본 ‘북평군 여성현’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우공갈석’인 백석산(또는 낭아산)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갈석산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태강지리지』(사료 A-1)의 사료는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며, 이곳이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임을 나타내는 사료였다.
윤내현, 이덕일 등 다수의 민족사학자들은 이 『태강지리지』(사료 A-1)의 사료를 가지고 ‘낙랑군 수성현’과 ‘만리장성의 동단’을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해석하였다. 그 이유는 현재 갈석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있기 때문인데, 이 노룡현의 갈석산은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인 요나라(916년 ~ 1125년) 시대에 본래의 갈석산(백석산 또는 낭아산)이 이곳으로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이다(필자의 저서『고조선으로 가는 길』62~74쪽 참조).
이 노룡현의 갈석산은 가짜 갈석산이므로 당연히 그곳에 수성현遂城縣이 설치되었다는 기록도 없으며, 진나라 만리장성의 흔적도 없다. 그러므로 『태강지리지』(사료 A-1)의 기록을 가지고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나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비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태강지리지』(사료 A-1)의 사료를 가지고 갈석산과 낙랑군 수성현 및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태강지리지』(사료 A-1)의 사료는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갈석산을 설명하는 기록이므로 낙랑군 수성현과 갈석산 및 만리장성의 동단은 모두 황하하류가 흘렀던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지, 한반도 평양일대에서 찾는 것은 갈석산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거나,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의 교활한 역사왜곡의 산물이다. 한반도 평양에는 황하하류가 흐른 적이 없으므로 갈석산도 없으며, 수성현遂城縣이 설치되었다는 기록도 없으며, 진나라 만리장성의 흔적도 없다. 그러므로 『중국역사지도집』에서 『태강지리지』(사료 A-1)의 기록을 가지고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나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 일대로 비정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4회에서 계속)(6)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다섯 번째)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제3회)
▲ <그림 1> 각종 갈석산과 황하 및 해안선 변천도 : 황하 및 해안선의 변화는 Tristram R Kidder(워싱턴대 교수) & Yijie Zhuang(런던대학 연구원)의 공동논문『Archaeology of the Anthropocene in the Yellow River region, China, 8000-2000 cal. BP, The Holocene』을 참조하였다.(7)
<주>
(1) 정인보, 조선사연구, 우리역사연구재단, 269-270쪽
(2)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185-188쪽
(3) 심백강,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바른역사, 110-111쪽
(4)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③ 낙랑군은 어디 있었나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 사서 하나도 없어 (hani.co.kr)2009-05-27
(5) 한사군은 북한 평양에 있었을까?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20.04.11
(6) 진 장성의 동쪽 끝은 어디인가(3)?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김봉렬 2016.05.11
(7) 조선(단군)의 대륙강역, 갈석산으로 찾는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김봉렬 2016.10.18 12:25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비봉출판사, 2007
정인보, 조선사연구, 우리역사연구재단, 2012
문정창, 고조선사연구, 한뿌리, 1969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2018
유엠부틴, 고조선연구, 아이네아스, 2019
윤내현, 고조선연구, 일지사, 1994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6
윤내현, 우리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 만권당, 2016
윤내현, 고조선연구 상·하, 만권당, 2016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만권당, 2017
윤내현, 한국고대사, 만권당, 2021
신용하,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0
신용하,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연구, 2017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8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참좋은세상, 2007
심백강,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바른역사, 2021
심백강,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바른역사, 2021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6
김운회,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 역사의 아침, 2012
정형진, 고깔모자를 쓴 단군, 백산자료원, 2003
정형진, 한반도는 진인의 땅이었다, 알에이치코리아, 2014
두명의 민족사학자, 대륙 조선(단군)을 밝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6.08.30
현재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갈석산은 한나라때 갈석산이 아니다.
황순종: 갈석산에 9명의 황제가 올랐다고 하고 갈석궁이 진시황의 것이라고 하는데, 유물 유적이 별로 없다. 갈석궁이라는 곳에 보이는 것은 병마용 조금 있고 성터도 별로 없고, 주춧돌 흔적정도가 있었다. 그런데 고고학을 전공한 영남대 정인성 교수는 이것을 가지고 한나라 때 가져온 것이라고 하면서 진시황 때 것이라고 틀림없다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는 진시황이 이 갈석산에 온 적이 없다. 당시는 조선의 강역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조조가 지은 시도 있다고 하는데, 조조가 창해를 보고 지었다는 ‘관창해’시다. 그런데 이 갈석산에서 보면 관창해가 안 된다. 이 갈석산은 바다로부터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다. 현지인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바다가 거의 안 보인다고 한다.
오히려 남쪽으로 임해서 바다를 보아야 한다. 현재 갈석산은 진시황뿐만 아니라 조조도 온 적이 없다. 실제는 개인적으로 볼 때 북경 쪽으로 보인다. 현장에서 의견을 다투고 있는 가운데 내가 이쪽은 확실히 아니라고 했는데도 조선일보는 정인성 교수의 견해를 위주로 실어 주었다.
갈석산 지명은 중국에 여러 군데 있다. 산해관 옆의 현재 갈석산은 진시황이 올 수 없는 곳이다. 2천 년 전에 하나라 우시기에 물을 다스리면서 전국을 9주로 나눈다고 하였고 그 때의 갈석산이 처음 나온다. 그 갈석이 지금의 갈석산이라고 한다. 하우 때부터 진시황 때를 따지면 그 시기가 2천 년간이다. 춘추 전국시대에 동쪽으로 잠식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재 갈석은 그 당시 갈석산이 아니다.
두 민족사학자, 조선(단군)의 대륙강역을 밝히다(2)기자명편집부 입력 2016.09.02 15:19수정 2016.09.0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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