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2. 고조선의 강역 - 패수는 어디인가? 본문
패수는 어디인가?
신채호
불조선과 진나라·한나라의 관계
연나라왕 희희(姬喜)는 진시황제에게 패해 요동으로 천도했다. 불조선은 이전부터 연나라를 증오했기 때문에, 진나라와 동맹하여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얼마 후 진시황제는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고 요동에 접근했다. 이로써 불조선과 진나라가 국경을 정하게 됐다. 양국은 오늘날의 헌우락(패수_옮긴이) 이남 수백 리를 중립지대로 정하고 양국 인민의 주거를 금지했다. 《사기》에서 말하는 진고공지(秦故空地, 진나라 때의 옛 공터라는 의미_옮긴이)는 이것을 가리킨다.
《위략》에서는 당시 불조선왕의 이름이 부(否)라고 했다. 그러나 《위략》처럼, 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쓴 《삼국지》 및 《후한서》의 〈동이 열전〉에는 ‘부’가 기록되지 않았다.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동부여왕 해부루를 ‘부’로 와전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여기서는 불조선왕 부(否)를 인정하지 않겠다.
기원전 200년에 기준이 불조선왕이 되었다. 그 후 진승·항우·유방 등이 모반하여 진나라에서 대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상곡·어양·우북평 등지의 조선 유민과 연나라·제나라·조나라의 중국인들이 난을 피해 귀화했다. 기준은 이들이 서방의 중립지대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했다. 기준은 한나라와 조약을 체결하여, 중립지대는 불조선이 소유하고 헌우락을 국경으로 삼았다. 《사기》 〈조선 열전〉에서는 “한나라가 흥하고 ······ 패수에 이르러 국경을 삼았다”고 했고, 《위략》에서는 “한나라가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삼자,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에서 경계를 이루었다”고 했다. 두 기록에 나오는 패수는 다 헌우락을 가리킨다. 불조선과 연나라가 만반한을 경계로 삼았다가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두 책의 패수는 다 헌우락을 가리키는 게 명백하다. 옛날 학자들이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한 것도 큰 잘못이지만, 최근 일본의 시라토리 구라키치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한 것도 커다란 망언이다. 패수에 관한 이야기는, 앞 절의 만반한과 다음 절의 왕검성과 대조해볼 필요가 있다.(1)
정인보
기준(箕準), 위만이 도읍을 정한 곳은 모두 왕검성이었다. 왕검성은 《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험독(險瀆)이다. 험독은 낙랑(樂浪)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의 패수는 지금의 해성현(海城縣) 서남쪽에 있는 어니하(淤泥河)의 옛 이름이다.【한서 지리지, 요사 지리지, 원사 지리지, 성경통지, 대동지지 참조】. 말하자면 해성이 바로 험독인 셈이다.【전술한 요수(遼水) 기슭의 평양은 바로 해성을 가리킴】.
조선이 이 전쟁에서 참패하면서 두 나라의 경계는 지금의 대릉하 부근인 만반한(滿潘汗)으로 정해졌다. 만반한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면 발음이 같아서 자주 혼동을 일으키는 패수(浿水)와 패수(沛水)부터 먼저 구분해야 한다. 패수(浿水)는 해성(海城) 서남쪽에 있는 어니하(淤泥河)를 말한다. 이 강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된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조의 '번한(番汗)에 대한 주석에서
패수는 요새 너머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된다.
라고 한 것은 낙랑군(樂浪群) '패수(浿水)'에 대한 주석에서
서쪽으로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유입된다.
라고 한 패수의 물길과 혼동한 것이다. 패수(沛水)는 사실 조양(朝陽)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지금의 대릉하이다. 《수경》에서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난 후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된다.
라고 한 것이 번한(潘汗) 지역을 흐르는 패수(沛水)이다. 《한서》에서 '반한'조에 패수(沛水)에 대한 주석을 단 것은 옳지만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된다고 한 부분은 패수(浿水)와 혼동한 것이다. 《수경》의 경우도 누방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된다고 한 것은 옳지만 패수(浿水)라고 한 것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되는 '패(浿)'와 혼동한 것이다.
한나라가 연나라 장새가 너무 먼 것을 걱정하여 국경선을 자기네 쪽으로 물렸다면 그것은 조선이 고토 수복을 위하여 쏟은 피와 땀이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연나라 장새가 너무 먼 것은 언급하면서도 진나라 요새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것은 한대 초기에 보수한 옛 요새가 바로 진나라 요새임을 의미한다. 한대 초기에는 연나라가 잃은 영토를 되찾나는 논의가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현실적으로 지키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진나라 때의 영토만 계속 승계하게 된다. 여기서 언급된 '패수'는 지금의 금주에서 산해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려하성(高麗河城)이라는 땅을 흐르는 '고려하'를 가리킨다.
해성현(海城縣) 서남쪽에서 바다로 유입되는 패수(浿水)는 '어니하(淤泥河)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어니'는 토질이 질다는 의미를 빌어 쓴 것이 아니라 그 발음나 한자로 옮긴 것이므로 '우리'로 읽어야 한다.
......
한대 초기에 국경선 역할을 한 패수는 지금의 산해관에 조금 못 미친 곳에 있는 고려하(高麗河)임이 자명해진다. 따라서 한나라와 경계를 이루는 하천을 패수(浿水)라고 했던 것이 나중에 '고려'라는 이름으로 남은 것이고, 연나라와 경계를 이루는 땅의 강인 패수(沛水)가 우리말로 '어름'이라고 부르던 지금의 대릉(大凌)이다. 이 강도 일종의 국경선이었기 때문에 '우리'라고 불렸을 것이다. 지금의 요하의 옛 이름인 '구려하(句麗河)' 역시 후세의 요동이 이 강을 기준으로 해서 나뉘었기 때문에 '우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즉 해성의 '패(浿)'나 요하의 '구려(句麗)'나 대릉하의 '릉(凌)'이나 고려하의 '고려(高麗)'는 모두 '벌내' 또는 '우리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강들인 것이다. 이것들은 이름이 다 같기 때문에 서로 다른 지역을 부르는 이름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잘 살표보면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2)
리지린
"고조선의 패수의 위치에 대하여
《사기·조선렬전》에는 《한나라가 일어나자 그곳이 멀고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여겨서 다시 료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라고 씌여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패수가 어느 곳에 있는 강인가?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기·조선렬전》의 기록에 의하면 한 초에 진의 료동외교를 포기하고 패수 서쪽으로 퇴각하여 패수를 고조선과의 국경선으로 삼았다. 동 렬전에는 또한 이렇게 씌여 있다.
위만이 망명했는데, 무리 천여 인을 모아서, 상투를 하고 만이 복장으로 동쪽으로 달려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서 진나라 옛 빈 땅인 상하 장에 거주했다. 그 후 차차 진반, 조선의 만이들과 옛 연과 제나라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했다.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동일한 사실에 대하여 《위략》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조선은) ··· 후에 그(조선후)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이에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반한에 이르러 경게를 삼으니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 ···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면서 호복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나아가 항복했다. 위만은 준왕을 설득해 서쪽 경계에 거주하겠다면서,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이를 조선의 번병을 삼겠다고 했 다. 준왕은 그를 신임하고 총애하여 박사를 제수하고 규를 내려주고 백 리의 땅을 봉해 주면서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다. 위만은 망명자의 무리를 꾀어 무리가 차차 많아지자, 이에 사람을 보내 준왕에게 거짓으로 "한나라 군사가 10개의 길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숙위하기를 구 합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돌아와 준왕을 공격했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지만 적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이 자료들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패수는 고조선과 한과의 국경선이였으며, 패수 이동에 진반, 조선의 령역-즉 진의 고공지의 상, 하 장이 있다는 사실. 《위략》에서는 연, 진 대 고조선과의 국경선을 만반한으로 인정함.
② 위만은 국경선인 패수를 건너 와서 패수 이동의 진 고공지의 상, 하 장에 거주하면서 고조선 왕과 교섭을 진행한 사실.
③ 위만이 거주한 진의 고공지에 거주한 원래의 주인은 고조선인이며, 그 고공지는 연나라 진개 시기에 일시 한인들의 세력하에 놓였다는 사실.
④ 고조선 왕 준은 위만에게 백 리의 땅을 봉해 주었으며 따라서 위만이 거주한 진의 고공지는 약 백 리 되는 지역이라는 사실.
⑤ 위만이 거주한 약 백 리의 지역은 곧 패수 이동의 백 리 지역이며 따라서 왕검성과 패수와의 거리는 백 리 이상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 간에는 반드시 어떠한 자연 계선이 있어야 하겠다는 사실.
고조선과 한과의 국경선인 패수는 반드시 이상에 렬거한 력사적, 지리적 사실과 부합되여야 한다.
......
패수에 관한 기록으로서 가장 오랜 것은 《수경》의 기록이다. 《수경》 14권, 《패수》 편에는 《패수는 락랑군 루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림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썼다.
......
우리는 반드시 《수경》의 《패수》 편에 기록된 바와 같은 그러한 강이 조선 평양에서부터 료서에 이르는 지역의 어느 강에 해당한 것인가를 조사해야 한다. 우리는 문헌 자료 상에서 진, 한 대 이후 료동, 료서의 물줄기가 변동된 사실을 찾아 볼 수 없으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지도 상의 물줄기와 진, 한 대의 물 줄기가 기본적으로 같다고 인정해서 잘못이 없다. 양수경의 《수경주지도》를 보면 그 물줄기가 기본적으로 오늘의 물줄기(료서, 료동의)와 동일하다. 이 지도에 의하면 료동, 료서 지역에서 동남으로 흐르다가 하류에 가서 다시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대릉하 이외에 다른 물줄기를 찾아볼 수 없다.
......
따라서 필자는 한과의 국경선이였던 패수를 오늘의 대릉하로 인정한다. 나의 론거는 아래서 더 보충될 것이다. 즉 위에서 필자가 제기한 패수와 왕검성과 관련된 력사적 지리적 관계들이 동시에 해명됨으로써 나의 근거가 보충될 것이다.(3)
윤내현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패수浿水는 어느 특정한 하나의 강에 대한 고유한 명칭이 아니라 여러 강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옛 문헌의 기록을 보면 요동군 번한현의 浿水 · 樂浪郡 패수현의 浿水 · 樂浪郡 鏤方縣의 浿水 등이 있었고, 대동강 · 예성강 · 어니하(헌우락)도 浿水로 불리어졌다. 이와 같이 여러 강이 浿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사용되었던 강이라는 말의 고대어인 펴라 · 피라 · 벌라가 향찰식으로 기록되면서 浿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된 浿水 외에도 지금은 명칭이 바뀌어 버린 더 많은 강들이 浿水로 불리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浿水를 확인함에 있어서 浿水라는 강 이름에만 너무 집착할 것이 아니라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지역이 지금의 어느 곳이었는지를 먼저 확인한 후 그 지역을 흐르는 강 가운데 어느 강이 浿水였을 가능성이 있는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 순서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진제국 및 서한제국의 행정구역이었던 요동군 위치와 일반적 의미의 요동 위치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고증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행정구역의 요동군은 진제국 및 서한제국의 가장 동북부에 위치해 있어서 고조선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고, 일반적 의미의 요동은 당시 중국의 동북부 국경지역으로부터 고조선의 서부지역을 포괄한 지역을 지칭하였으므로 행정구역의 요동군과 일반적 의미의 요동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바로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지역을 확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浿水에 대한 종래의 연구는 고러한 고증작업을 거치지 않고 고조선의 영역이나 낙랑군의 위치 등을 한반도내로 상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구역의 요동군과 일반적 의미의 요동을 혼동한 채로 그 위치를 지금의 요동과 동일한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고증작업을 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본론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고대의 요동은 그 위치가 지금의 요동과 달랐다. 고대에 있어서 일반적 의미의 요동은 지금의 난하(灤河) 유역과 요서지역을 포괄한 지역이었으며, 진제국 및 서한제국의 행정구역이었던 요동군은 碣石山 서쪽의 난하(灤河) 하류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난하(灤河) 유역이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패수는 이 지역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증 결과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浿水는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요동군 번한현의 沛水(浿水)로서 그 강은 지금의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하(灤河)였거나 그 서부 지류 또는 난하(灤河)보다 조금 서쪽에 있었던 강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浿水가 지금의 난하(灤河)보다 동쪽에 위치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4)
심백강
『흠정열하지』에서는 혁수를 유수 즉 오늘의 난하로 보는 것을 반대하고 혁수가 오늘의 조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혁수는 바로 패수(浿水)라는 지적은 하지 않았다. 혁수가 바로 패수(浿水)이며 패수가 바로 조하라는 사실을 최초로 언급한 것은 정본 『한단고기』(한뿌리, 2005년도간)이다.
그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연나라의 노관이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패수를 동쪽의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이다."
그러나 한단고기에는 "패수가 오늘의 조하"라는 사실만을 간단히 언급한 채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그러면 오늘의 조하가 바로 패수인 이유를 다섯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아래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1. 『무경총요』에 "연경에서 중경을 가는 도중에 조선하를 지나서 고북구에 도달한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조선하는 고북구 서쪽에 있어야 하는데 조하는 고북구 서쪽에 있고 난하는 고북구 동쪽에 있다. 이는 조하가 조선하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패수는 『사기』 「조선열전」에서 살펴보면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이었고 또한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이기도 하였다. 위만은 서쪽에서 패수를 건너서 조선朝鮮에 왔고 섭하는 패수를 건너 조선朝鮮에서 중국으로 도망쳤다. 이는 패수가 중국과 조선 양국의 국경선이긴 하지만 조선에 속하는 조선하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패수와 조하는 조선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2. 『한서』 「지리지」에 "혁수는 다른 이름으로 포구수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혁수는 패수의 오기이고 패수 · 포구수는 원래는 중원의 강 이름이 아니라 만이 지역 북쪽 변방의 강 이름을 한자로 번역한 명칭일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패浿와 포구鮑邱는 만이의 어떤 발음을 그렇게 번역한 것일까. 포는 현재의 중국어로는 '빠오'로 발음하고 패는 '페이'로 발음한다. '빠오'나 '페이'는 우리 말 '밝'을 된 발음했을 때 나는 음과 유사하다. 포구의 구는 '터'이다. 패수와 포구수는 우리 말 '밝달강' '배달강' 즉 조선하의 고대 중국식 번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3. 패수가 있는 백단현은 그곳에 백단산이 있어 거기서 현의 명칭이 유래했다. 백단은 역시 우리 말 '밝달'의 한자식 표현이라고 본다. '밝달산' 밑에 '밝달현'이 있다면 밝달현 지역에 흐르는 강물이 '밝달강'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중국인이 한자로 번역한 것이 포구수 · 패수이고 그것의 다른 이름이 조선하였다고 하겠다.
4. 만이와 북방 변경에서 발원한다는 혁수의 발원지를 『흠정열하지』는 하북성 풍녕현 북쪽으로 보았다. 패수의 발원지 북이 자몽지야는 혁수 · 조하의 발원지인 지금의 풍녕만족자치현 일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5. 패수는 상흠의 『수경』에서 "낙랑樂浪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오늘의 조하는 하북성 풍녕만족자치현 조하원촌에서 발원하여 풍녕만족자치현 중부와 난평현 서부를 경유하고 장성관 고북구진을 지나 지금의 밀운 저수지에 유입된다. 이 이후로는 백하와 합쳐지며 '조백하'라 불린다. 조백하는 북경시 · 낭방시 · 천진시를 경유하여 계운하 입구에서 동쪽으로 발해에 주입된다. 동쪽으로 바다에 유입되는 조하는 바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유입된다"는 패수와 바다로 유입되는 방향이 일치한다.(5)
이덕일
■위만이 건넜다는 ‘패수’의 위치는
"패수는 고조선과 중국의 진·한(秦漢) 사이의 국경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이 동쪽으로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고 나온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 남한 학계는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등 한반도 안의 강으로 본다. 반면 북한은 서기 전 5~4세기 때는 하북성 난하였다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에서 서쪽 강역 1000~2000리를 빼앗기고 난 다음의 패수는 지금의 대릉하로 보고 있다. 중국 고대 지리서인 ‘수경’(水經)은 패수에 대해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東入于海)라고 말했다. 압록·청천·대동강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 구절에 대해서 이병도 박사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구절은 잘못된 것이라면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西入於海)고 바꿔 써야 한다면서 패수는 청천강이라고 우겼다. ‘동북아역사지도’도 이를 따라 패수를 청천강으로 그려 놨다. 원 사료의 동(東)자를 마음대로 서(西)자로 바꾸어 우긴 것이 이른바 ‘정설’이 되어, 나라 강역 넘기는 데 국고가 투입되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현주소다."(6)
이찬구
이찬구 박사의 패수 3단계 이동설
그러면서 그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헌의 패수 관련 사료들을 소개하고, 종래의 대동강, 압록강, 청천강, 요하, 사하, 고려하, 대릉하, 난하 등 주장의 근거를 소개하면서 결국 패수는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동되었다고 분석하고, 『사기집해』의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의 세 물이 있는데 낙랑조선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취한 것’이라는 기록의 세 강을 추적하여 습수는 영정하, 산수는 조하(조백신하), 열수는 구수(=당하)라고 찾아내고, 이 열수가 패수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수경주』에 패수의 셜명이 불분명한 것이나 지금 중국에 패수라는 하천이 없는 점에서 패수는 고조선의 서구 북경선 이동에 따라 옮겨간 것으로 판단하고, 『괄지지』의 패구(浿丘)를 근거로 1차 패수는 오늘날의 제수였으며, 위만 이전 또는 위만 초기에 북쪽으로 밀려 당하(唐河, 대청하, 구하, 구수)로 옮겨졌다가, 위만 패망 후에 오늘날의 조하(조백하, 산수, 고수)로 옮겨지는 3단계 이동을 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전혀 새로운 학설로서 중국인들의 지명이동과도 연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8)
김종서
김종서의 각각 다른 세 곳의 패수설
패수의 기록이 있을 당시 또는 이와 가까운 시기의 사람에 의해 쓰인 기록을 최우선시하여 분석한 김종서 박사는 역사기록으로 볼 때 패수는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던 패수, 낙랑군 내부를 흐르던 패수, 낙랑군 소멸 후 고구려ㆍ백제사에 등장하는 패수ㆍ패하ㆍ패강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이날의 토론회의 주제는 고조선의 서쪽 국경선 패수였으므로 그 부분만 소개한다.
사마천의 『사기』「조선열전」에는 7회의 패수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역사상 최초로 패수라는 강 이름이며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인 패수라 보고, 그 조건은 조선이 수천 리 영토, 발해만 서쪽이 열구 서쪽, 동이제국과 한나라의 교통로 상, 요동군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 갈석산 동쪽, 요동군 요새의 동쪽, 상류가 서쪽으로 흐르는 등의 조건과 고조선과 한군현 위치 기록에 따른 11가지의 조건 등 19가지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면서 그 하나하나를 증명한 결과 하북성 진황도시 산해관 서쪽을 흐르는 양하(양하)와 석하(석하)가 가장 패수의 조건에 가까운 강이라는 결론을 맺었다.
김종서의 주장은 철저한 기록 분석과 함께 『후한서』「군국지」에 나오는 낙양에서 각 군까지의 거리에 따른 실제 위치를 기본으로 하였는데, 토론 과정에서 성헌식, 황순종으로부터 “그 기록을 100%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강하게 제기되었으며, 주변에 큰 강이 여럿 있는데, 큰 강을 두고 작은 강으로 국경을 삼았다는 논리는 좀 맞지 않는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세 개의 패수설을 만든 기록의 해석에서 꼭 세곳이 달라야 한다는 확실한 이유가 없다는 질문도 받았다.(8)
황순종
황순종의 조백신하 패수설
황순종은 패수가 세 곳이라는 김종서의 설과 3단계 이동을 했다는 이찬구 설에 반대하였으나, 이찬구와 같이 『사기집해』의 세 강에서 열수가 패수라고 보았다. 『수경』의 기록을 근거로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북경 북쪽을 지나는 백하가 조하와 만나 조백하가 되는데 이 강이 패수로서 하류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흐르는 조백신하가 패수에 해당한다’고 보았다.(8)
성헌식
패수는 하남성 황하북부에 있다는 성헌식
중국 여러 사서에 기록된 패수 관련 주ㆍ군을 보면 <표1>과 같은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주변 지명들이 지금도 북부 하남성에 있다는 점에서 패수도 황하북부 하남성에 주변 지명들과 함께 있으며, 기록에 나오는 추수(溴水)와 격수(湨水)가 패수라고 한 여러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심수 바로 서남쪽에 있는 작은강이 패수라고 주장했다.(8)
박준형
박준형 연구사는 최근 학계에서 힘을 얻고 있는 훈허설을 지지했다. 후한대 역사서 '전한기'에는 '요수(遼水)를 새(塞·변경에 설치하는 군사시설)로 삼았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게 패수에 대한 사기의 기록을 반영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금의 훈허인 (소)요수가 패수라는 논리다. '전한기'는 '사기 조선열전'을 거의 그대로 옮긴 '한서'를 편년체로 편찬한 책이다.
박 연구사는 한나라 뿐만 아니라 기원전 3세기 동쪽으로 진출해 고조선과 접경한 흉노와의 관계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까지 훈허∼압록강 유역에서 흉노와 관련된 유적은 발견된 게 없다. 이런 점에서 고조선과 한의 경계는 요수(훈허)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고 훈허 이북지역으로 고조선과 흉노가 접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9)
신종근
중국 식민지 한사군, 북한 아니라는 결정 증거 찾았다
기자명신종근 객원기자 입력 2020.04.08 18:05수정 2020.05.07 23:20
조한전쟁 후 전쟁에 나섰던 한(漢)나라 장수들은 모두 사형,
항복한 고조선 신하들은 모두 제후(諸侯)로 봉함을 받았다
고조선과 한사군 위치표지, 패수는 동으로 바다로 들어가
한사군(漢四郡)은 북한에 있었나? 고대 요동(遼東)에 있었나?
첫 번째 이야기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중국 동북공정 및 일본 극우파와 남한 강단사학은 모두 북한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서기전 108년에 설치한 낙랑군(樂浪郡) 및 한사군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고조선 강역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고조선(위만 조선)이 평안남도에 있던 작은 소국이고, 그 수도는 평양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만주 요령성은 물론 하북성과 내몽골 일대에서 고조선 유적.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고조선이 지금의 요령성 요하(遼河)까지는 차지했다고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한사군(漢四郡) 중에서 중심인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를 알면 나머지 3군도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대략 파악할 수 있다.
낙랑군의 위치를 알려면 낙랑군이 존재했던 당시에 쓰여진 1차 사료(史料)나 그 사료를 보고 쓴 고대 사료를 근거로 판단해야 한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중국의 1차 사료를 일부 살펴보자.
1.《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사마천(司馬遷:서기전 145~서기전 86)은 (고)조선과 한(漢)나라가 싸운 조한전쟁(朝漢戰爭:서기전 109~서기전 108) 당시 생존했던 목격자다.
그는 조한(朝漢)전쟁의 경과나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인물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이로써 비로소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으로 삼았다(以故遂定朝鮮 爲四郡)"라고 모호하게 서술했다.
전쟁에 나섰던 한(漢)나라 장수들은 모두 사형을 당했는데, 항복한 고조선의 신하들은 모두 제후(諸侯)로 봉함을 받았다고 서술했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볼 때 중요한 강이 패수(浿水)이다. 고조선과 한(漢)의 국경선이기 때문이다.
사마천은《사기》〈조선 열전〉에서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망명하는 노정(路程)에 대해서 "동쪽으로 달려서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東走出塞, 渡浿水)”고 설명하고 있다.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패수를 압록강(노태돈), 청천강(이병도) 등 한반도 북부의 강으로 비정(比定)한다. 조선총독부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는 대동강으로 비정한다.
그런데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려면 패수는 압록.청천.대동강처럼 동서로 흐르는 강이어서는 안 된다. 동서로 흐르는 강을 동쪽으로 건널 수 없기 때문이다.
위만(衛滿)조선의 수도가 평양이고, 압록.청천.대동강 등이 패수라면 남쪽으로 건너야 평양에 도착할 수 있다.
중국의 고대 지리서인 《수경(水經) 》은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라고 말하고 있다.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 패수다. 패수는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만주나 하북성 일대에서 찾아야 한다.(10)
출처:
1. 미국 LA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 근무하는 교수, 교사, 교민들과 함께한 '21세기 동아시아 역사 전쟁과 한국'이라는 주제 발표 자료.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2019.11
2.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 황순종, 2014, 만권당
3. 성헌식의 ‘대고구리’. 스카이데일리. 2013.11.23
[주]
(1) [네이버 지식백과] 불조선과 진나라·한나라의 관계 (조선상고사, 2014. 11. 28., 신채호, 김종성)
(2) 정인보, 조선사연구, 우리역사연구재단, 183쪽, 264-266쪽, 274-277쪽
(3)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고조선연구, 말, 175-196쪽
(4) 윤내현, 고조선연구, 248-250쪽
(5) 심백강,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바른역사, 35-39쪽
(6)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남한 “왕험성=낙랑군=평양” vs 북한 “왕험성=中 요령성 개주” | 서울신문 (seoul.co.kr)2018-04-23<16> 남북한 학계가 보는 왕험성·낙랑군 위치
(7) 조선(단군)의 판도를 가늠하는 패수는 어디인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2017.07.25
(8) “고대 한ㆍ중 국경선 패수는 한반도일 수가 없다!”:홍천뉴스투데이 (hongcheonnewstoday.kr) 2017/08/12
(9) 고조선 국경 '패수' 위치 놓고 역사학계 격돌(종합) | 연합뉴스 (yna.co.kr) 2016-06-15
(10) 중국 식민지 한사군, 북한 아니라는 결정 증거 찾았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20.04.08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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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단군)의 패수를 찾아라,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4. 고조선의 패수는 하북성 보정시 지역을 흐르는 당하이다.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네 번째)
이익의 압록강, 한백겸의 청천강, 안정복의 대동강 패수설 (3부):홍천뉴스투데이 (hongcheonnewstoday.kr) 2017/10/24
사마천이 본 조선과 한나라 국경선인 패수 위치 (2부):홍천뉴스투데이 (hongcheonnewstoday.kr) 김종서 역사모 회장 2018/03/27
조선과 한나라 국경선 패수는 상류가 서쪽 (4부) :홍천뉴스투데이 (hongcheonnewstoday.kr) 김종서 역사모 회장 2018/05/29
패수에 대한 기존 학설 비판 (7부):홍천뉴스투데이 (hongcheonnewstoday.kr) 김종서 역사모 회장 | 기사입력 2018/09/19
패수의 올바른 위치비정은 우리 고대사 복원의 핵심 (3부):홍천뉴스투데이 (hongcheonnewstoday.kr) 성헌식 컬럼니스트 2015/09/20
역사왜곡을 위해 ‘수경주’까지 편집한 중국 (7부):홍천뉴스투데이 (hongcheonnewstoday.kr) 성헌식 컬럼니스트 2018/12/10
중국이 숨긴 패수(浿水)는 북부 하남성 격수/추수(湨水/溴水) (8부):홍천뉴스투데이 (hongcheonnewstoday.kr) 성헌식 컬럼니스트 2018/12/25
[이덕일의 한국통사] 고조선과 중국의 최초 전쟁 이야기 #2 패수에 관한 3가지 학설
https://youtu.be/vN8ibYdhPpE?list=PLRAmvpNm4pmmRSyCOBUipzw4lmxC6bFH-
STB스페셜 197회 사기, 조선열전에 나타난 패수 위치 고찰 / 정규철 대한사랑 학술분과
송시내 강사의 고대사 강좌 15강 | 종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패수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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