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입력 2018-04-23 17:48 업데이트 2018-04-24 00:13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남한 “왕험성=낙랑군=평양” vs 북한 “왕험성=中 요령성 개주” | 서울신문 (seoul.co.kr)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남한 “왕험성=낙랑군=평양” vs 북한 “왕험성=中 요령성 개주”

남북한 학계가 보는 왕험성·낙랑군 위치, 2100여년 전에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가 지금껏 현안이 되는 것은 현재의 강역 논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도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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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남북한 학계가 보는 왕험성·낙랑군 위치

2100여년 전에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가 지금껏 현안이 되는 것은 현재의 강역 논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 역시 고대사를 가지고 한 말이다. 그 핵심이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인데, 한국 고대사학계는 그 위치를 지금의 북한 전역으로 보는 ‘한사군=한반도 북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낙랑군=평양설’을 고수하고 있다.

중국 동북공정에 맞서라고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은 2009년 홈페이지에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王險城·왕검성)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다.…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治所·낙랑군을 다스리는 곳)는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다”라고 버젓이 게시해 놓았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2008~2015년 국고 47억원을 들여서 만든 ‘동북아역사지도’는 한사군을 북한 강역에 그리고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가 경기도까지 차지하고 있었다고 그려 놓았다.

리지린이 ‘고조선연구’에서 그린 서기전 3~2세기경의 고조선 강역. 연나라 진개에게 1000~2000리를 빼앗긴 뒤 고조선의 강역이 하북성 난하에서 요령성 대릉하까지로 축소되었다고 보고 있다.

 

●“왕험성=위만 도읍, 낙랑군=기자 도읍”

‘낙랑군=평양설’이 각종 사료로 입증되는 객관적인 사실이라면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한서’(後漢書) ‘광무제본기’ 주석은 “낙랑군은 옛 (고)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라고 말했다.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사군은 한(漢)나라에서 설치했으므로 그 위치에 대한 가장 기초 사료는 한나라의 정사(正史)인 ‘한서’(漢書)다. ‘한서’는 ‘지리지’가 있어서 낙랑군의 위치를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과 낙랑군 조선현을 모두 평양이라고 말했다. 과연 ‘한서’ ‘지리지’도 그렇게 말하고 있을까. ‘한서’ ‘지리지’는 ‘요동군 험독(險瀆)현’과 ‘낙랑군 조선현’을 각각 따로 설명하고 있다. 2세기 무렵 후한(後漢)의 학자였던 응소(應)는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 “(고)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라고 말하고 낙랑군 조선현은 “주나라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낙랑군이 실제로 있었을 때 살아 있었던 응소는 ‘한서집해음의’(漢書集解音義) 24권을 쓴 ‘한서’ 전문가인데, 그는 위만의 도읍지 왕험성에 세운 것은 ‘요동군’ 험독현이고, 기자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세운 것은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따로따로 설명했다. ‘군’(郡)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한의 고대사학계는 ‘왕검성=낙랑군=평양’이라고 우긴다.

●中 “왕험성, 한반도에 있는 건 불가능”

남한 학자들과 달리 중국 학자들은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다. 우길 때 우기더라도 사료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역사지리학자 담기양(潭其)의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전 8권, 1987년)을 이론적 근거로 삼는다. 담기양은 남한 학계가 북한 강역이 모두 중국 땅이었다고 갖다 바치는 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어서 낙랑군을 평양으로 그린 것을 비롯해서 한사군을 모두 북한강역으로 그려 놨다. 그러나 ‘요동군’ 소속인 험독현까지 평양으로 그리기에는 학자적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역사지도집’이 그림으로 표시한 고대사라면 ‘석문회편’(釋文編)은 그 이유를 글로 설명한 이론서다. ‘석문회편’에서 중국 학자들은 “요동속국에 소속된 각 현은 모두 요하(遼河) 서쪽에 있었는데, 험독현 한 현만 조선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비록 중국의 이익을 위해서 ‘낙랑군=평양설’을 따랐지만 ‘요동군’ 험독현까지 평양에 그리는 것은 학자적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중국역사지도집’은 요동군 험독현을 지금의 요령성 안산(鞍山)시 산하의 태안(台安)현 동남쪽 20리 손성자(孫城子) 지역으로 그려 놨다. 중국도 위만조선의 왕험성이 지금의 요령성 안산시 태안현에 있었다는데 국고로 운영되는 동북아역사재단은 “아닙니다. 왕험성은 평양에 있었습니다. 북한 땅은 중국 것입니다”라고 애걸하는 중이다.

위당 정인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의 ‘낙랑=평양설’에 맞서 ‘낙랑=요동설’을 주장했다. 정인보가 6·25전쟁 때 납북되지 않았다면 한국 사학계가 지금처럼 ‘낙랑=평양설’을 정설이라고 우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인보·신채호 “왕험성은 요령성 해성시”

북한은 왕검성의 위치를 어디라고 보고 있을까.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1963)에서 요동군 험독현과 위만조선의 왕검성이 각각 다른 곳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한(漢)나라 때의 요동군 험독현은 지금의 하북성 산해관 부근이고 위만조선의 왕검성은 “오늘의 개평(蓋平)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서술했다. 개평은 지금의 요령반도 중간의 개주(蓋州)시다. 단재 신채호는 ‘평양패수고’에서 개주시 조금 위의 요령성 해성(海城)시를 왕검성 자리라고 보았고 위당 정인보(鄭寅普)도 1946년 ‘조선사연구 상(上)’에서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 평양과 원래 무관하다’면서 신채호처럼 해성현을 왕검성 자리라고 보았다.

 

낙랑군의 위치를 찾을 때 중요한 강이 열수(列水)다. 낙랑군은 산하에 스물다섯 개 현(縣)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열구(列口)현이고 또 하나가 장잠현이다. ‘후한서’에는 “최인(崔)을 장잠현의 현령으로 삼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주석에 “장잠현은 낙랑군 소속인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長岑縣, 屬樂浪郡, 其地在遼東)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 열구(列口)현은 열수라는 강의 하구에 있어서 생긴 이름인데 동북아역사재단은 홈페이지에 “열수(列水)는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써 놓았다. 그러나 이는 열수를 대동강이라고 우긴 이병도의 억지를 추종한 것에 불과하다. 열수의 위치는 ‘후한서’ ‘군국지’(郡國志) 주석에 “열(列)은 강 이름이다.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列水在遼東)고 나온다. 중국 사료에 요동에 있다는 열수를 이병도는 대동강이라고 사료 없이 우겼고, 국고로 운영되는 동북아역사재단은 그대로 추종하고,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면서 각종 사이트에 ‘열수=대동강’이라고 홍보 중이다. 그러나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중국의 고대 사료는 일관되게 낙랑군은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내몽골 적봉(赤峰)시 영성(寧城)현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 영성현 남산근(南山根) 유적에서는 고조선의 표지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낙랑군=평양이면 요동, 강원 東에 있어야

‘사기’, ‘한서’의 주석자였던 서진(西晋·265~316) 시대 학자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는데 이것이 험독현이다”라고 말했다. 당 태종 때 학자 안사고(師古)는 “신찬의 설이 맞다”고 말했다. 남한 고대사학계의 주장처럼 낙랑군이 평양이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 요동군 험독현은 강원도나 함경도에 있어야 한다. 요동(遼東)은 요하(遼河)라는 강의 동쪽에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언제 강원도나 함경도가 요동이 되었을까. 더구나 평양과 강원·함경도 사이를 세로로 흐르는 강이 존재하기는 할까. 북한 학계는 한사군을 지금의 요동반도로 본다. 북한의 ‘조선전사’ ‘고대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조선을 강점한 한나라 침략자들은 고조선 령역 안에 락랑군(오늘의 료동반도 천산산 줄기 서쪽 료하 하류 류역)을 비롯하여 진반, 림둔, 현도 등 4군을 설치하였다”(‘조선전사’ 2권, ‘고대편’ 112쪽, 1979)

현재의 요령성 천산(千山)산맥 서쪽의 현 요하(遼河) 하류 유역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의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서 지금의 하북성 노룡(盧龍)현에 대해서 “또 조선성이 있는데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다.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라고 말했다.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이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나라 낙랑군이 하북성에 있었는지 북한의 주장대로 요동반도에 있었는지는 더 살펴봐야 할 과제지만 최소한 평양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입력 2023.10.01 00:44수정 2023.10.31 21:01

일제식민 통치용으로 만든 '낙랑군 평양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일제식민 통치용으로 만든 '낙랑군 평양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글: 김상윤(광주마당 고문) 낙랑군, 19세기까지 중국은 산해관 끝으로 인식일제 만철 조사부, 요녕성 요양 서북부로 비정이나바이와키치 낙랑군 수성현, 황해도 수안 주장조선사편수회 부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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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서 출토된 낙랑 관련 유물 유적 일제가 조작
낙랑군 속현 점제현비도 조작, ‘비’라는 용어 안 써
북경 유리창서 낙랑유물 대거 수집해서 가져와

심백강이 <사고전서> 연구를 통해 밝힌 바에 의하면,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기점은 호타하 북쪽의 갈석산에 있던 '낙랑군 수성현'인데, 그곳은 현재의 '서수현 수성진'이라고 합니다.
낙랑군은 난하 중•하류 유역으로부터 갈석산 부근에 이르는 지역에 발해를 끼고 펼쳐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관변학자들의 연구가 비록 허구라 할지라도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군 유적과 유물은 그럼 어떻게 되는가요?
평양에 존재하는 낙랑 유물 유적은 대부분 일제시대 일본학자들이 발굴하고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유물 유적들은 당시 신채호나 정인보 같은 학자들에 의해 그 진위를 의심받아 왔습니다.
1960년대 북한의 연구를 시작으로 1980년대에 이를 정리한 윤내현에 이르면 낙랑 유물 유적은 더 이상 거론하기도 창피할만큼 철저히 비판되었습니다. 윤내현은 <고조선연구, 상>에서 '대동강 유역이 낙랑군이었다는 근거로 그들이 제시한 고고 사료인 고분, 토성, 봉니, 인장, 점제비, 효문묘 동종 등'을 철저히 검증하여, 일부가 위조인 것은 물론 위조가 아니더라도 낙랑군이 있었다는 증거로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 이후 실제로 이 낙랑 유물 유적을 절대시하는 학자는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안정준 같은 '무서운 아이들'이나 거짓말로 위장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만약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그 유적과 유물들은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함경도 전역에서 출토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모든 유물과 유적들이 평양 한군데에서만 나오고 있습니다.
문성재의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에는 일본 학자들이 유물을 날조하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는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있던 이마니시 류가 평안남도 용강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마니시 류는 용강에서 발견된 각석에 새겨진 '점제'가 한나라 낙랑군 점제현을 나타내며, <한서 지리지>의 열수가 대동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서 쓰다 소키치는 <한서, 지리지>의 열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했으며 이병도 역시 이 주장을 적극 추종하였기 때문에, 그후 국내 사학계에서는 '열수대동강설'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정설로 굳어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대에는 비석이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 근대 학자인 마형(1881-1955)의 고증에 따르면, 비석에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한 것은 한대 이후부터였다는 것이지요. 진시황이 각지의 명산들을 순행할 때도 자신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면서 '각석'이라고 하였고, 한무제가 진시황을 흉내내면서 가는 곳마다 자신의 공적을 바위에 새겼지만 '비'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비석에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한 것은 후한대 이후부터였다는 것입니다.
금석학에 깊은 조예가 있는 정인보는 '점제현 신사비'라는 석각을 면밀히 분석한 후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는 위조품이거나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또한 '신의 손'이라고 알려진 세키노 다다시는 '효문묘 동종'등 여러 유물을 발견하였고, '대방태수 장무이전'을 발견하고 이를 근거로 황해도 지역을 한대의 대방군으로 단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정 7년(1918년)에 작성한 그의 일기를 보면,
'(중국 북경에 있는) 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대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이라고 기록했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500만 원이나 되는 큰 돈을 주고 무엇 때문에 조선총독부를 위해 한대의 유물들을 구입했을까요?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 출토류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 이틀 후에 세키노 다다시는 또다시 유리창에 들려 낙랑 출토품들을 힘닿는 대로 다 사들였다는 것입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면 그 유물이 평양 근처에 있어야 할 텐데, 왜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했을까요?

 

 

 

입력 2020.04.08 18:05 수정 2020.05.07 23:20

중국 식민지 한사군, 북한 아니라는 결정 증거 찾았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중국 식민지 한사군, 북한 아니라는 결정 증거 찾았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조한전쟁 후 전쟁에 나섰던 한(漢)나라 장수들은 모두 사형,항복한 고조선 신하들은 모두 제후(諸侯)로 봉함을 받았다고조선과 한사군 위치표지, 패수는 동으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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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조선 열전〉에서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망명하는 노정(路程)에 대해서

"동쪽으로 달려서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

(東走出塞, 渡浿水)

 

《수경(水經) 》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于海)

 

 

입력 2020.04.11 00:13 수정 2020.05.10 00:28

한사군은 북한 평양에 있었을까?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한사군은 북한 평양에 있었을까?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가연지 열전, , 낙랑군의 열구현 위치는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한사군은 중국 하북성 갈석선 인근이라고 증거 한사군(漢四郡)은 북한에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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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가연지열전(賈捐之列傳)>
“(한나라 강역이)동쪽으로는 갈석을 지나 현도, 낙랑으로써 군을 삼았다"

(東過碣石以玄菟、樂浪為郡)
한(漢)나라에서 상서령(尙書令)을 역임한 가연지(賈捐之:?~서기전 43년)는 낙랑군 설치 후 50여년 후의 인물이다.
갈석산(碣石山) 부근에 낙랑군과 현도군이 있었다는 뜻인데, 한(漢)나라 때 갈석산은 현재 중국 하북성 창려현에 있다.

《한서漢書》 및 《후한서後漢書》의 낙랑군 열구현(列口縣)의 위치
《후한서》〈군국지郡國志〉

“곽박이 《산해경》 주석에서 말하기를, ‘열은 강이름이다. 열수는 요동에 있다’

〔列口(郭璞注山海經曰, “列, 水名, 列水在遼東”)〕

열구(列口)는 열수(列水)라는 강의 하구에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그 열수가 고대 요동(遼東)에 있었다는 뜻이다.


입력 2020.04.26 20:36  수정 2020.05.25 18:47

한사군, 중국 1차 사료가 요동에 있다 말해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한사군, 중국 1차 사료가 요동에 있다 말해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후한서 광무제 본기 주석,후한서 배인열전사기 하본기 주석의 태강지리지모두 낙랑군은 요동, 갈석산에 있었다고 해 한사군(漢四郡)은 북한에 있었나? 고대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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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昌黎縣)이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이 있던 곳이다.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본기光武帝本記〉
“처음에 낙랑사람 왕조(王調)가 (낙랑)군을 근거로 불복했다 낙랑군은 옛 (고)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樂浪人王調據郡不服(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

 

《후한서後漢書》 〈배인열전裵駰列傳〉
"배인은 과거 급제자이므로 장잠현의 현령으로 삼았다"
주석(註釋)에 "장잠현은 낙랑군 소속인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出爲長岑長〔長岑縣, 屬樂浪郡, 其地在遼東〕

≪사기史記≫ 〈하본기夏本記〉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사기≫ 〈하본기〉주석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입력 2020.04.18 15:09 수정 2020.05.17 22:09

한사군 설치될 위만의 왕검성, 북한 아닌 요동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한사군 설치될 위만의 왕검성, 북한 아닌 요동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글: 신종근(역사연구가, 의사) 강단식민사학, 중국동북공정, 한사군은 재북한 고집송호정, 오영찬 모두 왕검성도 북한에 있었다 주장중국사료는 요동군 험독현에 왕검성 있다고 명시 # 한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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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지리지」는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서 중국 고대 역사학자인 신찬(臣瓚)은 “왕험성(요동군 험독현)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라고 말했고, 당나라 때 주석가(註釋家)인 안사고(顔師古)는 “신찬의 설이 맞다”라고 동의했다.


입력 2017.10.01 15:41 수정 2017.11.01 04:00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진짜고대사>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낙랑군은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제1부)글 : 김 봉 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사료 몰이해로 엉뚱한 주장을 하는 강단식민사학자들올바른 역사 연구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식민․노예사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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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1> 필자가 비정한 낙랑군 위치 출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http://www.koreahiti.com)

 

『회남자』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고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부목의 땅에 이른다(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

“갈석산은 요서계 바다의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현이다(碣石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樂浪之縣也).” 『회남자』「시칙훈」(고유 주)

『산해경』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산해경』권18, 해내경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산해경』권18, 해내경(곽박 주)

『산해경』은 선진시대의 지리서로 조선이 존재하던 시기의 1차 사료이다. 조선이 중국 동해의 안쪽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의 동해 안쪽은 현 중국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조선(낙랑군)은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 있었다.

『잠부론』

“옛날 주 선왕 때 역시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 가까이 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커다란 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한韓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가 살았다(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遷居海中).” 『잠부론』권제9, 지씨성제35

“(상략)...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한성의 동쪽을 지난다. 『시경』「한혁장」에 이르기를 “저 커다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았네. 왕께서 한후에게 추와 맥을 주시니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네.”라고 하였다. 정현은 말하기를 “주나라가 한후를 봉하니 한성에 거하여 후백이 되었다. 험이의 핍박으로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하였다. 왕숙은 말하기를 “지금 탁군 방성현에 한후성이 있다. 세상에서는 한호성이라 이르는데 옳지 않다.”고 하였다...(중략)...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거마하로 들어가므로 바다에는 이르지 못한다((上略)...聖水又東南逕韓城東, 『詩韓奕章』曰:溥彼韓城, 燕師所完,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鄭玄曰:周封韓侯, 居韓城為侯伯, 言為獫夷所逼, 稍稍東遷也. 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 世謂之寒號城, 非也...(中略)...又東南流注于巨馬河而不達于海也).” 『수경주』권12, 성수

 


입력 2017.10.03 15:44 수정 2017.11.02 16:25

고구려 4방 2천리, 낙랑국과 낙랑군의 비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진짜고대사> 고구려 4방 2천리, 낙랑국과 낙랑군의 비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2부) 글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3. 『삼국지』는 고구려 강역을 사방 2 천리로 기록했다.기경량은 낙랑군이 존재할 당시 ‘1차 사료’로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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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낙랑국과 낙랑군은 다르다. 
 “3월,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兩國歸服).”『삼국사기』‘신라본기’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삼국사기』‘고구려본기’

“15년(314) 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둘째,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를 누락시켰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삼국지』위서30, 동이전, 고구려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에는 고구려 강역이 사방 2천리, 『북위서』‧『주서』‧『북사』‧『수서』에는 동서 2천리와 남북 1천리, 『구당서』에는 동서 3,100리와 남북 2천리, 『통전』에는 고구려 강역이 동서 6천리로 나온다. 특히 『통전』은 아래와 같이 시대별 고구려 강역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땅은 후한 시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基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東西六千里).” 『통전』권 제185, 변방1, 동이 하, 고구려

고대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은 중국 서진시대의 정사인 『진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문의가 모두 멋대로 요동에 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사服事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으며,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의 5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로 합하였다. 공손문의가 멸망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고 양평에 거하였다. 함녕 2년(AD 276)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개현을 다스리고, 18,100호이다(平州. 案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護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진서』권14, 지제4, 지리상, 평주

『자치통감』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에 의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여 수 년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부하니, 외가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遼東張統據樂浪ㆍ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자치통감』313년

조선총독부가 ‘낙랑군 평양설’의 근거로 삼은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은 모두 이동․교류․왜곡이 가능한 것들로 역사지리를 확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들이다. 더구나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한국사를 연구했다는 것은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유물들을 핵심근거로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는 것은 자료의 기본 성격도 판단하지 못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입력 2017.08.25 23:50 수정 2017.09.14 04:26

중국 한나라 낙랑군=평양이라구, 모두 망상속에서 나온 허구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중국 한나라 낙랑군=평양이라구, 모두 망상속에서 나온 허구다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기사수정: 서기2017.08.26. 23:19 식민사학소굴, 한국고대사학회 존립근거 '낙랑군=평양' 깨지다낙랑군=평양설의 근거로 제시된 서기313년 장통관련조항,사실은 서기313년에 일어난 것 아냐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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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교치설은 이미 조선총독부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라는 것을 두고 우리 역사를 날조 왜곡했다. 조선반도사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안에 ‘한나라 영토시대’라는 장이 있다. 이 장에 낙랑군 교치설을 실었다. 「요동 장통이 고구려 미천왕과 싸우다가 “313년에 그 땅을 버리고 그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 씨의 요동으로 이주했다. 이후 지리적 호칭으로 낙랑. 대방이란 이름은 조선 반도에 남았다. 요동에는 두 군의 교치가 있어 정치적 호칭이 남았다.”」

 

입력 2016.08.06 10:35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나,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고조선의 강과 산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야,『사기』「조선열전」은 가장 기본적인 사료고조선 관련 사료 매우 풍부하게 남아있어... 글 싣는 순서1. 고조선의 습수는 하북성 북경지역을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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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3.26 13:29

[이덕일의 천고사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hankookilbo.com)

 

[이덕일의 천고사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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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 일대의 고대 무덤군에서 또 하나의 한사군 유물이 출토되었다. 중국신문망 등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후한(後漢), 북조(北朝), 당(唐), 요(遼)나라의 묘 등 129기의 고분이 있는데, 이중 북조(北朝) 무덤에서 동위(東魏) 원상(元象) 2년(539) 사망한 ‘한현도(韓顯度)’가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 출신이라는 벽돌 묘비가 발견된 것이다. 그간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와 그 한국인 후예 식민사학자들은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평안남도 대동강 남단의 대동면 토성리(土城里) 일대라고 비정해왔는데, 천안문(天安門) 남서쪽 20여km 지점에서 낙랑군 조선현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2014년 07월 29일 (화) 19:10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동쪽에 있었다 (brainmedia.co.kr)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동쪽에 있었다

한국 고대사 연구가 어려운 것은 사료(史料)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흔히 말한다. 남아 있는 역사 자료가 없어 연구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런데 심백강 박사의 저서 ‘사고전서 사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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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백강 박사,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 발간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동쪽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발해를 끼고 있었다

  사고전서 사료는 낙랑이 어디에 있다고 말해주는가. ‘사고전서 사료에는 서한 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 현도, 낙랑을 설치했다라고 했는데 그 갈석산은 하북성 남쪽 오늘의 호타하유역 북쪽에 있다. 현재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은 후대에 붙여진 명칭이고 한무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리장성의 동단 또한 산해관 장성이 아니라 현재 하북성 수성진에 문물로 보존되어 있는 연()장성이 그것이다.

이 사료에 따르면 낙랑군은 이병도 등이 주장한 것처럼 대동강 유역에 있지 않았다. 난하하류 창려현 갈석산에서 동쪽으로 요하 서쪽에 걸쳐 있었다고 한 민족사학자들의 주장과도 다르다. 그럼 낙랑군은 어디 있었나? 현재 진황도시 노룡현, 산해관 일대에서 서쪽으로 당산시, 천진시를 지나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에 이르는 지역에 발해를 끼고 동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 사고전서 사료를 분석한 심 박사의 주장이다.

 

 

 

수정 2009-06-09 20:58등록 2009-06-09 20:58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hani.co.kr)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주류 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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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⑤ 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

북한학자 안병찬은 ‘평양일대 락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에서 ‘평양시 락랑구역 안에서만도 2600여기에 달하는 무덤과 수백 평방미터의 건축지가 발굴되었으며 1만5000여점에 달하는 유물들을 찾아냈다’면서 “이것은 일제가 ‘락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하기 위해 조선 강점 기간에 도굴한 무덤수보다 무려 26배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 결과에 대해 남한의 한 사학자가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이란 논문에서 “(북한에서) 근래 연구서 형태의 몇몇 자료가 나왔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특히 문자 유물의 보고는 더욱 부실하여 설명한 내용조차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고 쓴 것처럼 무조건 부정하고 있다. 북한 정치체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해당 유적을 직접 발굴한 역사학자의 연구에 대해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단정 짓는 것은 학문적 소통의 거부 선언에 다름 아니다.

 

남한 학자들이 북한의 연구 결과에 대해 ‘안 믿겠다’고 부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정설로 떠받들고 있는 ‘한사군 한반도설’과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 학계에서 한사군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목곽묘(木槨墓)를 ‘나무곽무덤’이라고 부르는데 850여기나 발굴했다. 북한의 리진순은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관한 연구’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더라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108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해 한사군이 설치된 지 오래지 않아 사라진 목곽묘는 한사군 유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수정 2009-05-27 14:49등록 2009-05-27 14:49

‘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 사서 하나도 없어 (hani.co.kr)

 

‘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 사서 하나도 없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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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③ 낙랑군은 어디 있었나
2천년전 한서 “베이징 일대에 위치”
후한서 “낙랑=옛 조선, 요동에 있다”
사기 “만리장성 시작되는 곳에 자리”

대동강변의 낙랑 토성. 일제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로 만들어졌으나 당시에도 수도 자리가 아니라는 반론이 일었다.

 

그러나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2천여년 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역시 일제 식민사관이 아니라 낙랑군 설치 당시의 시각으로 그 위치를 찾아야 한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도 역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일제시대 <사학잡지>에 쓴 ‘진장성동단고(秦長城東端考: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대한 논고)’에서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본 것을 비판없이 따른 것에 불과하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갈석산과 갈석산 각자

 

군색함 자인한 이병도 ‘황해도설’한국 주류사학계 무작정 받아들여

“수성현(遂城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뜻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군색하기 때문에 ‘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 ‘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전8권)>은 이나바와 이병도의 주장대로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만리장성 관광단을 모집해서 외화 획득에 나서야 할 일이지만 지난 2천년 동안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중국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낙랑군 수성현을 수안 근처로 표시했으면 갈석산도 그 부근에 그려놔야 하는데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은 한반도 깊숙이 그려놓고도 갈석산은 본래 위치대로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놓았다. 중국측 동북공정 논리의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昌黎)현을 주목해야 한다.

 

갈석(碣石)은 ‘돌(石)로 새긴 비석(碣)’이 있다는 뜻인데 비석을 세운 인물은 진시황(秦始皇)이다. 서기전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상식이다.

그럼 지금의 창려현이 옛날에는 수성현이었는지를 알아보자. 고대 지명은 왕조 교체에 따라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여러 사서(史書)를 추적해야 한다. <수서(隋書)> ‘지리지’는 수성현은 11개 속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창(新昌)현이라고 적고 있다. 신창현은 후제(後齊) 때 조선현을 편입한 곳이다. 신창현은 수나라 문제 18년(598) 때 노룡현으로 개칭되는데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河北道)조는 창려현이 노룡현에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수성현의 속현이었던 신창현이 당나라 때 창려현이 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창려현이 과거 수성현의 일부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비정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수안군 건치연혁’에는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今名:수안)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에 수안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고려 태조 23년(940)에 수안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유일한 근거가 수(遂)자인데 그마저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서 아무리 빨라도 10세기 이전에는 ‘수(遂)’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못 본체하고 황해도 수안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1913년 세키노(關野貞) 같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 곧 옛 조선현으로 만들어졌지만 식민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반론이 일었다. 고대 수도는 관방(關防), 즉 방어시설이 가장 중요한데 대동강변 토성은 사방이 탁 트인 낮은 구릉지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는 반론이었다. <사기> ‘조선 열전’은 고조선의 우거왕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적고 있지만 대동강변 토성 주위에는 험준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는 또 “우거왕이 굳세게 성을 지켜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적고 있는데, 대동강변 토성은 반나절도 지키기도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낙랑군의 실제 치소를 찾자는 게 아니라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그런 대동강변 토성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에서 보듯이 한국 주류 사학계에 의해 오늘도 ‘올바른 역사’로 주장되고 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박일근입력 2015. 3. 20. 15:57수정 2015. 3. 20. 20:12

1500년 전 베이징에 살던 한민족 무덤 발견? (daum.net)

 

1500년 전 베이징에 살던 한민족 무덤 발견?

베이징시 다싱구 싼허좡(三合庄)촌 일대 고대 무덤군 발굴 현장 /2015-03-20(한국일보)베이징시 다싱구 싼허좡(三合庄)촌 일대 고대 무덤군 발굴 현장중국 베이징(北京)에서 1,500년전 원적(原籍)이 '

v.daum.net

1500년 전 베이징에 살던 한민족 무덤 발견?

 

베이징시 다싱구 싼허좡(三合庄)촌 일대 고대 무덤군 발굴 현장 /2015-03-20(한국일보)

베이징시 다싱구 싼허좡(三合庄)촌 일대 고대 무덤군 발굴 현장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1,500년전 원적(原籍)이 '조선현(朝鮮縣)'인 이의 무덤이 발굴됐다. 무덤 주인공이 우리 민족일 가능성이 커 주목된다.

경화시보(京華時報) 등에 따르면 베이징시 문물국은 최근 다싱(大興)구 황춘(黃村)진 싼허좡(三合庄)촌 일대 고대 무덤군 발굴 작업(사진) 중 북조(北朝) 시대의 묘 2기를 발견했다. 이중 한 무덤에서 나온 벽돌모양 묘비에는 무덤에 묻힌 이가 '韓顯度'(한현도ㆍ중국어 한셴두)이며, 원적이 '낙랑(樂浪)군 조선현'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무덤 주인공은 원상(元象) 2년 사망했다. 원상은 동위(東魏) 효정제 원산견의 2번째 연호로 서기 539년이다. 베이징시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남서쪽으로 20여㎞ 떨어진 이 곳을 재개발하던 중 1,000년 이상 된 무덤 129기가 발견되자 지난해부터 발굴 작업을 해 왔다.

 

중국 매체들은 무덤 주인공의 원적인 '낙랑군 조선현'에 대해 "낙랑군은 한무제(漢武帝)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평정한 뒤 지금의 한반도 내 설치한 사군(四郡) 중 하나이고, 조선현은 지금의 평양시"라고 주장했다. 이어 중원 왕조들의 힘이 쇠약해지면서 313년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탈취'당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사군이 존속한 기간은 25년에 불과했고 가장 오래 남아있던 낙랑군도 사실상 상업적인 무역기지로서 명맥만 유지됐다는 게 우리 학계 입장이다. 중국이 이런 낙랑군을 강조하는 것은 '동북공정'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냔 지적이 나온다.

무덤 주인공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현재로선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 매체들은 "고조선 유민이 왜 베이징에 묻혔을까"라며 한민족일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북위(北魏) 태무제 탁발도가 서기 432년 '조선민'을 비여(肥如ㆍ중국어 페이루)로 이주시키고 '조선현'을 다시 설치했다는 기록이 근거다. 비여는 베이징에서 동쪽으로 250㎞ 정도 떨어진 현재의 친황다오(秦皇島)와 창리(昌黎), 루룽(盧龍), 첸안(遷安)현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으로 유입된 한국인이 이 곳에 살게 됐고 이들은 원적을 '낙랑군'으로 계속 유지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러나 북위가 '조선민'을 강제 이주시킨 시기는 낙랑군이 사라진 지 100여년도 지난 때다. 무덤이 조성된 것은 이로부터 또 다시 100여년이 지난 시기다. '조선민'이 강제 이주됐다 해도 그들이 수백년 전 사라진 낙랑군을 굳이 원적지로 썼다는 건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1,500년전 우리 선조들이 베이징까지도 활동 무대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적일 수도 있다. '낙랑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베이징 부근에 설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덤의 주인공이 과연 한국인인지, 또 어떻게 이곳에 묻히게 됐는지는 현재로선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조선현'이 고향인 이가 1,500년전 베이징에 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됐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입력 2015. 3. 17. 14:02수정 2015. 3. 17. 14:02

중국 베이징서 최고 2천년 된 무덤 다수 발견 (daum.net)

 

[발로읽는역사#1] 낙랑군 조선현사람 무덤이 왜 북경에서 나와?

https://youtu.be/Q8LBfr0t0Mw

 

 

 

[점제현신사비]

입력 2018. 5. 8. 03:36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2000년간 아무도 못 본 '평양 신사비'..하루 만에 찾은 조선총독부 (daum.net)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2000년간 아무도 못 본 '평양 신사비'..하루 만에 찾은 조선총독부

[서울신문]위당 정인보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1월부터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서울신문사에서 이를 ‘조선사연구’라는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했는

v.daum.net

위당 정인보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1월부터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서울신문사에서 이를 ‘조선사연구’라는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했는데, 그 서문 격인 ‘부언’(附言)에서 위당은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고적도보’와 ‘점제현 신사비’를 보고 “일본학자들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라는 것이 저들의 총독 정책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해방 후 이 화강암의 재질과 조성 연대를 분석한 결과 평안도가 아니라, ‘요하지방의 화강석’과 비슷하다고 발표했다. 또한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기초에는 시멘트를 썼다”(‘물성 분석을 통하여 본 점제비와 봉니의 진면모’·1995)고 발표했다.

 

북한 학자 리순진은 ‘지난 시기 일제 어용사가들과 봉건 사대주의 사가들의 역사 위조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 ‘한나라 낙랑군 재평양설’이라면서 “해방 후 우리 고고학자들은 평양 일대에서 일제가 파본 것의 30배인 근 3000기에 달하는 낙랑 무덤을 발굴 정리했다”고 말했다. 리진순은 “이것들은 한식(漢式) 유적 유물이 아니라 고조선 문화의 전통을 계승한 낙랑국의 유적 유물임을 실증해 준다”(‘평양 일대 낙랑무덤에 대한 연구’)는 것이다. 북한은 한나라 행정관청인 낙랑‘군’(郡)이 아니라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왕 조에 나오는 낙랑‘국’(國)의 유적·유물이라고 발표했는데, ‘나라 국(國)’ 자를 ‘고을 군(郡)’ 자로 바꿔 속인 것이다.

  

 

입력 2016.03.25 10:10 수정 2016.03.25 10:13

기획특집: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한국고대사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기획특집: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한국고대사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2 최동환 / 역사연구가 둘째, 물증(고고자료)을 살펴보자. 『역사비평』의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에서는 “고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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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2

최동환 / 역사연구가

 

둘째, 물증(고고자료)을 살펴보자. 『역사비평』의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에서는 “고적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자료가 실증의 물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썼다.

과연 그런지 살펴보자. 윗 글에서는 동경 공과대학(건축학과) 교수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다다시)이 한국에서의 고적조사를 주도하였다고 소개하면서 그가 1902년과 1909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조사했는데, 1909년 대동강 유역의 석암동 고분을 처음에는 고구려 고분으로 보았다가 훗날 낙랑군 유적으로 수정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세키노 타다시는 1910년부터 1915년까지 대동강 일대 토성리 지역의 유적들을 발굴 조사하고 이후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유적 유물을 확인했는데, 이것이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임을 확인하는 핵심적 증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헌사료로는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아무런 근거를 찾지 못했지만 고고학으로 낙랑이 평양이라는 물증을 얻었다는 것이다. 세키노 타다시를 비롯한 일본인 학자들의 고고학 발굴이란 조선총독부의 의뢰에 따른 일방적 주장인데도 이를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임을 확인하는 증거라고 우기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이“고적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자료가 실증의 물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것의 실체이다.

▲점제현 신사비,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가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는 발견 당시부터 조작설이 일었다.

 

여기에 덧붙여「특집」에 있는 세 번째 글「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를 보면,“낙랑군 대방군에 대한 고고자료의 발굴은 일제시기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제시기에 발굴한 낙랑지역의 고분의 수는 70여 기에 불과하지만, 해방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고분의 수는 무려 2600여 기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굴한 70기가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데 이어서 해방 후에 북한에서 발굴한 2600여기의 고분 역시 평양 낙랑군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수정 2009-06-09 20:58등록 2009-06-09 20:58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hani.co.kr)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주류 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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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1913년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현재 평남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를 살펴보자. <한서>(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점제현은 낙랑군의 25개 속현 중의 하나이므로 주류 사학계는 이 신사비를 용강군이 낙랑군 지역이라는 결정적 증거로 보고 있다. 그런데 비가 발견된 지역은 현재 온천군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유명한 휴양지이고 비가 서 있던 곳도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였다. 이런 곳에 2천년 동안 서 있던 비를 아무도 못 보았으나 이마니시 류가 단번에 발견했다는 자체가 의문이다. 조선총독부 고분 조사위원이었던 후지타 료사쿠(1892~1960)는 <조선고고학연구>(1948)에서 이마니시 류는 용강군 해운면의 어을동 고분에서 단 한 개의 와당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면장으로부터 ‘비문을 읽을 수 있으면 그 아래의 황금을 얻을 수 있다는 고비(古碑)’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증언을 한 면장은 누락시키고 동네 아이와 찍은 사진을 발표했다. 북한의 <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는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기초에는 시멘트를 썼다”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화학 성분도 근처의 마영 화강석·온천 오석산 화강석·룡강 화강석과는 다르다고 분석했다. 은(Ag)은 주위 3개 지역의 화강석보다 2~4배, 납(Pb)은 3배, 아연(Zn), 텅스텐(W), 니켈(Ni), 인(P)은 각각 2배가 많은 반면 바륨(Ba)은 주위 화강석의 6분의 1 이하로서 다른 지역(요동)에서 가져온 비석이란 분석이다.

 

3.1절 특집 SBS스페셜 역사전쟁, 금지된 장난(239회)

https://youtu.be/y1lb2fEqu1c?list=PLSYO-0E0OfUCXk5GI4B6OOC-tXP2U7iyY

 

 

 

[봉니]

수정 2009-06-09 20:58등록 2009-06-09 20:58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hani.co.kr)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주류 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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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竹簡)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 덩이를 뜻한다. 봉니는 진흙이란 성격상 위조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매입했다. 일제강점기 평양 일대에서만 200여기에 달하는 봉니가 수습되었는데, 북한의 박진욱은 <락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에서 “1969년에 낙랑토성에서 해방 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나 발굴하여 보았는데 단 1개의 봉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운성리 토성·소라리 토성·청해 토성 발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고쳤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신의 손’을 거친 모든 유적·유물은 의문투성이다.

 

 

[평양 석암리9호분]

수정 2020-04-13 16:35 등록 2020-04-12 19:19

【단독】 평양 낙랑 무덤의 비밀, 104년 만에 풀렸다 (hani.co.kr)

 

【단독】 평양 낙랑 무덤의 비밀, 104년 만에 풀렸다

옛 무덤 등의 유적을 파서 살피고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는 근대 고고학 발굴조사가 한반도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 구한말~일제강점기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은 일본 경찰과 관리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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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석암리 9호분은 기원전 1세기 고조선 멸망 뒤 한반도 서북지방에 진출한 중국 한대 낙랑 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나무덧널(목곽)로 짜여진 낙랑의 귀틀 무덤 얼개가 처음 확인됐으며, 국내 출토 금공예품 가운데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명품으로 평가되는 일곱 마리 용 문양이 돋을새김된 금제 띠고리 장식(버클)을 비롯해 한자와 무늬가 들어간 칠기류, 거울, 제사용 술을 바치는 용기인 동정, 장식 철검 등의 화려한 유물들이 잇따라 쏟아졌다. 상당수 유물이 한나라의 전형적인 생활용기와 장신구류여서 평양 일대 낙랑군이 한나라 식민지였다는 일본의 식민사관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 104년 만에 평양 석암리 9호분 낙랑시대 무덤에 대한 단독보고서를 국내 학계 전문가들과 함께 처음 펴냈다. 일제는 이미 1917년, 1925년, 1927년에 걸쳐 석암리 9호분을 포함한 일대 고분들을 함께 묶어 대규모 발굴보고서를 낸 바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석암리 9호분의 유물 전모와 분석 내용, 발굴 상황 등을 종합 정리한 보고서는 발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 뒤 한국 고고 발굴의 시원으로 꼽히는 석암리 9호분의 발굴조사를 정리하는 것은 학계의 오랜 숙제였다. 그동안 내용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다가 박물관 학예진과 정인성 영남대 교수(고고학), 주경미 박사(공예사) 등 각계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 이번에 결산 보고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세키노 다다시 등 발굴 당시 일본 학자들은 출토품을 한나라 중원 유물로, 무덤 주인은 중원에서 파견된 식민지배자로 단정했다. 이와 달리 보고서에서는 따뜻한 술을 담는 용기인 청동온주준이나 대모 장식 등 부장품 상당수가 중국 광시성·광둥성이나 베트남 등 중원 남쪽에서 온 유물임을 일일이 고증하면서 낙랑 지역이 중원 못지않게 남방 지역과도 밀접하게 교역했음을 드러냈다.

 

이 무덤의 가장 유명한 출토품인 금제 띠고리 유물도 중국 중원에서 발굴 사례가 없고 서역의 신장이나 내몽골 지역에서 유사한 사례가 나타난다고 한다. 유물 자체가 북방 유목민의 전형적인 공예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중국 중원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국제 교역망에 따라 사들인 것들로 보았다. 낙랑 사회가 생각보다 훨씬 열린 사회로, 중국 중원 정권에 정치적으로 강하게 예속되지 않았을 것이란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낙랑목간]

 

2007년04월26일 제657호

목간에 새겨진 낙랑군의 실체는? : 한겨레21 (hani.co.kr)

 

목간에 새겨진 낙랑군의 실체는? : 문화 : 문화&과학 : 한겨레21

목간에 새겨진 낙랑군의 실체는? 낙랑군 ‘한반도 서북 지역 존재’의 결정적 증거, 낙랑 목간을 둘러싼 논란 ▣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옛 낙랑군은 오늘날 중국 땅인가, 북한 땅인가. 독립국

h21.hani.co.kr

목간에 새겨진 낙랑군의 실체는?

낙랑군 ‘한반도 서북 지역 존재’의 결정적 증거, 낙랑 목간을 둘러싼 논란

▣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옛 낙랑군은 오늘날 중국 땅인가, 북한 땅인가. 독립국가 혹은 중국 식민지였는가. 2년여 전 북한의 수도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2000여 년 전 낙랑시대 나무쪽 문서(목간)가 남한 학계의 해묵은 논란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 목간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동시대 중국 공문서 목간. 1993년 중국 장쑤성 롄윈강에서 발견된 기원전 10년께의 한나라 묘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관할지 면적,호구,인구 증감 등을 담고 있어 이번에 출토된 낙랑목간의 원형을 짐작케하는 유물이다.

 

 

파장의 진원지는 지난 4월14일 낮 충남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장. 첫 발제자인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사는 ‘새로 발견된 낙랑 목간’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최신 발굴 유물을 갈무리한 소개글을 발표했다. 기원전 45년(한나라 연호로는 초원 4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을 기록한 당시 공문서 목간이 평양 낙랑 구역의 옛 귀틀무덤에서 발굴됐다는 내용이었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이 지난해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학술지 <력사과학> 198~200호의 논문들을 통해 보고한 이 유물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 뒤 60여 년 지난 시점에 나온 유일한 통계 사료다.

 

평양 일대는 낙랑군 통치 지역?

윤 학예사는 손영종의 논문을 분석한 결과, 목간은 낙랑군 25개 현의 현별 호구 수를 적은 통계표라고 소개했다. 목간 목록, 사진, 수효, 서체, 판독 글자 전문 등은 언급이 없으나 낙랑군 남쪽 관할인 남부도위 7개 현, 동쪽 관할인 동부도위 7개 현, 중심부인 직할 11개 현의 일부 인구와 호구 수가 기록돼 있다. 목간 통계를 보면, 고조선 도읍이었고 낙랑군의 핵심부인 조선현(평양)의 호구 수가 근 1만 호에 이르는 등 직할지 11개 현의 인구가 17만9천여 명, 남부도위 대방현 이하 7개 현이 5만1167명 등 모두 4만5956호에 28만여 명이 낙랑군에 살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윤 학예사는 <후한서> <한서> 등 기원후 한나라 사서의 인구통계와 비교한 결과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0.8%로 중원 다른 지역의 정상적인 증가율과 거의 일치한다고 밝혔다.

또 조선현 등 직할지 11개 현은 인구밀도가 높아 대부분 2천 호를 넘었다. 반면 동부도위나 남부도위는 1천 호 미만의 작은 현이 각각 3개, 6개였다. 동부도위의 동이현(함남 안변으로 추정)은 279호 2030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또 목간은 전체 인구의 14%인 4만 명을 한족(중국인), 86%는 토착민으로 분류해 꽤 많은 중국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사실도 보여준다.

주류학계는 목간의 이런 통계 내용들을 한반도 서북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됐음을 새삼 확증하는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사학자 이병도 등이 통설로 제기한 낙랑군의 한반도 주재설은 80년대 이후 거센 반론에 부딪혀왔다. 북한 학계와 재야 학자들은 평양에 낙랑군과는 다른 ‘낙랑국’이란 토착 독립 국가가 기원후까지 존속했다가 후한에 복속되었으며, 313년 고구려에 흡수됐다고 주장해왔다. 기원후 32년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왕자가 낙랑왕 최이의 딸 낙랑 공주와 결혼하면서 내통해 낙랑국을 멸망시켰다는 <삼국사기> 기록, 이곳의 중국계 출토 유물들이 기원후 후한 계통이라는 것이 주된 근거였다. 이는 중국 왕조가 경영한 낙랑군은 요동벌의 요하 부근이나 더 서쪽인 요서 대릉하 일대에 있었다는 두 개 낙랑 병립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 출판물에 보고된 목간의 발굴로 요동·요서 존립설은 빛이 바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게 주류 학자들의 시각이다. 윤 학예사의 말대로 “목간의 호구 통계가 평양, 서북 지방이 낙랑군 통치 지역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각 현 관리들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 통계를 보고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목간 통계에서 낙랑군 직할 지역이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것으로 나온 만큼 평양이 통치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명확히 입증됐다는 것이다. 한족과 토착민을 갈라 인구통계를 냈다는 점에서, 당시 낙랑 사회는 한족이 토착 사회 속에 융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 드러내”

북한 쪽은 왜 자기네 주장과 맞지 않는 목간 자료를 공개한 것일까.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있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 것은 요동 낙랑군의 관리가 목간을 들고 도망해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윤 학예사를 비롯한 남한 연구자들은 황당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가설이라고 이를 반박하고 있다. 영남대 사학과 권오중 교수는 “목간이 나온 장소를 우선 감안하지 않고, 거리가 먼 요서 쪽에 낙랑군 위치부터 비정하는 것은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 학예사는 “북한 스스로 낙랑군의 요동·요서 존재설을 부인하는 자료를 공개한 셈”이라며 “목간 정보의 전모에 대해 북한 쪽이 침묵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고조선 강역과 직결되는 낙랑의 강역 문제는 우리 고대사의 미묘한 쟁점이다. 낙랑군의 변천사 자체가 만주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킨 ‘동북공정’의 주요 연구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새로 공개된 낙랑 목간은 새삼스런 화두를 던져준 셈이다. 이미 인터넷 포털에서는 이 목간의 의미와 낙랑군의 위치를 둘러싸고 누리꾼과 아마추어 애호가, 재야 사학자들 사이에 다시 입씨름이 벌어지고 있다.

낙랑 목간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평양 부근에서 다섯 차례 발굴됐다. 전모가 파악된 것은 일제시대 남정리 116호분 출토 목간뿐이며, 해방 뒤에는 90년대 <논어> 구절을 새긴 대나무 목간(죽간)들이 출토된 사실 정도가 알려졌다.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7-04-12 18:53

2천년전 낙랑군 인구 4만5천세대 28만명 (hani.co.kr)

 

2천년전 낙랑군 인구 4만5천세대 28만명

때는 한나라 원제가 중국 땅을 다스리던 초원 4년(기원전 45년).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앞선 ‘문명 중심’이던 낙랑군의 관리들은 일종의 인구 센서스(호구 조사)사업을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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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구씨, 평양 발굴 목간내용 첫 공개
한반도서 가장 오래된 인구조사 자료
“중국인-조선인 따로 집계 민족의식 뚜렷”

 

때는 한나라 원제가 중국 땅을 다스리던 초원 4년(기원전 45년).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앞선 ‘문명 중심’이던 낙랑군의 관리들은 일종의 인구 센서스(호구 조사)사업을 벌였다. 군내 중국·조선 백성들의 호구 현황을 파악해 통계 수치를 나무쪽(목간)에 적어 넣는 작업이었다. 조사결과 군내 25개현의 인구는 28만명, 호수는 4만5천여세대로 나왔다. 각 현별 인구는 수백명에 불과한 마을부터 만명 이상의 대촌락까지 들쭉날쭉이었다. 조선인, 중국인 수는 따로 집계했다. 당시에도 뚜렷한 민족간 의식이 존재했던 것이다.

2000여년전의 이 통계 문서는 한반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인구 센서스 자료가 된다. 2005년 북한 평양 대동강 기슭 낙랑구역의 옛 유적에서 나온 나무쪽 문서(목간)를 판독한 결과 밝혀진 내용이다.

12일 낙랑사 연구자인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실장은 오는 14일 열리는 한국 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충남대)를 앞두고 이 목간 내용을 남한 학계에 처음 공개했다. 목간 내용은 지난해 입수한 북한 역사학자의 낙랑군 관련 논문에 포함된 것으로, 전체 내용과 수량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그러나 연대가 확실하고 출토 경위도 명확해 당대 낙랑군 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사료다.

 

 

입력 2018. 5. 8. 03:36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2000년간 아무도 못 본 '평양 신사비'..하루 만에 찾은 조선총독부 (daum.net)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2000년간 아무도 못 본 '평양 신사비'..하루 만에 찾은 조선총독부

[서울신문]위당 정인보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1월부터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서울신문사에서 이를 ‘조선사연구’라는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했는

v.daum.net

 

■평양서 발견된 ‘中낙랑목간’…메이지 일본식 한자로 기록?
1993년 평양시 정백동에서 이른바 ‘낙랑목간’을 발견했다는 발표가 나오자 남한 학계는 ‘낙랑=평양설’는 증거라고 환호했다.
그러나 정작 북한 학자들은 이를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는데, 목간을 구경도 못한 남한 학자들은 평양에서 나왔다는 사실에만 주목해서 ‘낙랑=평양설’의 물증이라고 거꾸로 해석했다. 낙랑목간의 이름은 ‘낙랑군 초원(初元) 4년 현별(縣別) 호구부’로서 낙랑군 산하 각 현의 인구를 적은 것이다. 문성재 박사는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에서 중국은 산하 현을 표시할 때 속현(屬縣) 등의 용어를 쓰지 ‘현별’(縣別)이라고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별(別)자’는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쓰던 일본식 한자라는 것이다.

 

 

입력 2016.03.25 10:10 수정 2016.03.25 10:13

기획특집: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한국고대사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

 

기획특집: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한국고대사2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2 최동환 / 역사연구가 둘째, 물증(고고자료)을 살펴보자. 『역사비평』의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에서는 “고적조..

www.koreahiti.com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역시 거짓말이었다.」2

최동환 / 역사연구가

 

*낙랑목간은 낙랑군이 평양이라는 증거인가?

계속해서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에서는, 1990년 7월에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나온 부장품인 「초원 4년 호구부」목독, 즉 이른바 낙랑목간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당시에 평양지역의 낙랑군 내에서 군현지배를 위한 문서행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그 목독이라는 것은 나무에 글을 쓴 목간(木簡)을 말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인천도시공사 문화재담당부장 이용구가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樂浪木簡) -「낙랑군(樂浪郡) 초원 4년(初元四年) 현별호구(縣別戶口)」통계문서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낙랑목간에 대해서 처음 논문을 쓴 사람은 북한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손영종이다. 낙랑목간에 대한 남한의 여러 논문들은 모두 이 손영종의 논문을 가지고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손영종은 “초원 4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의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하였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손영종은 낙랑군 소속인 제해, 해명, 함자현의 3개현은 “료동반도 남단의 력사지리적 및 경제지리적 환경조건과 대비 고찰해 보면 잘 대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초원 4년은 서기전 45년을 뜻하는데, 이해의 낙랑군의 현별 호구수를 기록한 낙랑목간에 대해서 손영종은 낙랑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낙랑목간은 평양에 낙랑군이 없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남한의 일부 인사들은『역사비평』에서 낙랑목간은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증거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국민들을 완전히 속인 것이다.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에서는 계속해서“해방이후에도 중국군현의 지배와 관련한 문자들이 이 일대의 벽돌무덤 내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었으며, 기타 낙랑군 시기의 고분 내에서 중국왕조의 연호가 새겨진 칠곽이나 양산 등의 물건들도 발견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써가며, “이러한 근거들을 고려할 때 일부 사이비 역사가들의 저서에서 현재 학계가 일제 시기의 총독부 주도로 발굴한 자료들만을 근거로 낙랑군의 위치를 확정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북한도 해방이후에 발견된 유물을 낙랑군의 유물임을 인정했다는 식으로 읽힌다.

거기에 덧붙여,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수천 기의 중국계통 고분들, 그리고 그 고분 내에서 발견된 중국계 인명과 군현 관리 명칭 등이 새겨진 벽돌과 칠기 유물들 그 외에도 점제현 신사비, 봉니 등을 언급하면서 평양일대에서 발견되는 2600여 기의 고분들을 아예“중국계통 고분”이라고 주장하며 거기에 내장된 유물들 역시 평양 낙랑군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점제현 신사비와 봉니도 평양 낙랑군 설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낙랑목간, 북한에서는 이 목간은 낙랑군 일부군현이 요동반도 남단에 있었다는 증거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일단 일제강점기 때 이미 정인보 선생이 조선총독부에서 발견했다는 유적, 유물에 대해서 전혀 한사군의 유적, 유물이 아니거나 조작의 혐의가 짙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겠다. 여기에서는 북한 지역에서 발굴한 낙랑고분 및 내장 유물과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지상유물 발굴과 조사분석에 대해서 북한은 어떤 입장인지 정확한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해방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고분 2600여 기」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지상유물에 대한 발굴 및 조사 보고서는 북한에서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라는 책의 형태로 북한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발간하였는데 그 책을 남북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규정에 따라 우리나라의 「도서출판 중심」에서 재출판하여 2001년, 시중에 판매하였다.

이 책에는 낙랑고분 2600여 기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지상유물의 발굴과 조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분석, 그리고 북한의 정확한 주장이 담겨있다.

그 책의 결론부터 말하면, 낙랑고분은 모두 낙랑국의 고분이지 낙랑군의 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삼국사기』에 나오는 최씨 낙랑국의 고분이지 한사군 낙랑군의 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점제현 신사비에 대해서도「평양일대 낙랑무덤에 대한 연구」라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서기 85년 후한의 영역 안에 세웠던 비이며, 비석 자체도 그 근방의 돌이 아니라 다른데서 만든 것을 거기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점제현 신사비는 원래 다른데 있었던 것을 현재의 위치에 옮겨 놓은 것이므로 비가 현재 서 있는 곳은 점제현이 아니라는 말이다.

봉니 역시 그 책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결론만 간단히 말하면“때문에 ‘한 낙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한 일제어용사가의 두목 이마니시까지도 락랑 토성에서 수집한 거의 모든 봉니가 가짜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현지에서 발간한「평양일대 낙랑무덤에 대한 연구」에서는 북한지역에서 발굴된 무덤은 낙랑군의 무덤이 아니라 최씨 낙랑국의 무덤이며, 점제현 신사비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일제가 옮겨다 놓은 것이며, 봉니는 대부분 가짜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비평』에 실은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라는 글은 완전히 거짓말을 한 것이며 국민을 완전히 속인 것이다.

북한의 조사 및 발표 결과는 낙랑국의 유물이라고 말했는데, 그 유물을 발굴하거나 조사하지도 못하였고 실물조차 본 일이 없는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를 쓴 자는 는 무슨 근거로 해방 후에 발견된 유물이 낙랑군의 것이며 따라서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가?

왜 북한에서 발표한 것과 완전히 반대로 주장하면서 국민들을 속이는가?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이며 따라서 누가 사이비인가?

*앞뒤 안 맞는 주장들

더구나 낙랑국의 무덤 안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중국제 물건이 발견되는 것에 대해서「오늘날의 낙랑군 연구」라는 글에는 “그렇다면 토착민의 무덤에서 중국제 물건들이 함께 부장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중국과의 통교가 잦아지면서 이 지역에 들어온 제품, 그리고 이 지역에서 제작된 중국식 물건들이다. 당시 사회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토착민이 중국제 고급물건들을 일상에서 사용하고 이를 무덤에 위신제로써 함께 부장했던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과거 부유층이 값비싼 미국제나 일본제 수입품들을 구입해 사용하고 이를 자기 지위를 내보이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라고 말했다. 즉 낙랑국의 무덤 안에서 발견된 중국제 물건은 중국과의 통교로 중국에서 들여온 물건이라고 분석해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해방이후에도 중국군현의 지배와 관련한 문자들이 이 일대의 벽돌무덤 내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었으며, 기타 낙랑군 시기의 고분 내에서 중국왕조의 연호가 새겨진 칠곽이나 양산 등의 물건들도 발견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다른 이야기를 서술했다. 앞에서는 중국과의 통교로 들어왔다고 주장해 놓고는 여기에서는 낙랑국의 무덤 안에서 발견되는 중국제 물건들을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증거라고 말한 것이다.

똑같은 중국제 물건을 낙랑군의 증거가 아닌 중국과의 통교로 인해 들어온 물건이라고 말해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반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증거라고 모순되게 서술 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들이 했다는 분석은 제 입맛에 맞게, 작위적으로 행해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들이 의도하는 바대로 분석한 것이지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첫째, 1920년대 중반에 대부분의 학자들, 즉 일본인 학자들 사이에 확고한 통설로 자리 잡았다는 평양 낙랑군 설의 양대 축의 하나인 문헌 연구는 추론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둘째, 또 하나의 축인 물증 역시 북한이 발굴한 고분 2600여 기 등을 통하여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타다시) 등의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 때 발굴한 유물은 낙랑국의 유물이지 낙랑군의 유물이 아님이 밝혀졌다. 즉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설은 완전히 근거를 잃은 것이다.

이처럼 조금만 연구해 보면 평양 낙랑군 설은 사실이 아니고 허구이며 거짓임이 완전히 드러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일부 학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완전히 속이고 아직도 거꾸로 평양 낙랑군 설이 사실이라고 국민을 속인다.

누가 사실을 속이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누가 사실이 아닌 사이비인가?

왜 대국민 사기극을 벌리는가?

 

 

낙랑군 평양설 가짜다-낙랑목간으로 검증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낙랑군 평양설 가짜다-낙랑목간으로 검증

  인터넷에서 낙랑 속현을 그린 지도 중 대표적인 이 지도위에 낙랑목간에 세겨진 중부, 동부, 서부, ...

blog.naver.com

 

 

[임둔군]

수정 2009-06-09 20:58등록 2009-06-09 20:58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hani.co.kr)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주류 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

www.hani.co.kr

 

1997년 중국 랴오닝성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 옛 성터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는 조작 시비가 일지 않는 유일한 봉니다. 길림대 고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복기대 박사는 <백산학보 61집>(2002)에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를 발표했다. 봉니 출토지는 물론 근처의 대니(大泥) 유적과 패묘(貝墓) 유적의 출토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논문이다. 그는 전국시대(서기전 475~221)에는 금서시 유적에서 고조선 계통의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다가 전한 중기부터 후한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의 특징은 약해지고 중국 특징의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뒤의 시기는 한사군 설치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논문은 주류 사학계로부터 외면당했다. 임둔군은 함경남도쪽에 있어야지 랴오닝성 금서시에 있어서는 정설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의 구석기 시대 유적·유물을 조작해 큰 파문을 일으켰던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조작이라는, 조선사편수회의 전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아직도 조선사편수회의 해석을 정설로 떠받드는 대한민국 주류 사학계는 과연 조선사편수회와 단절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사군 임둔군이 중국 요녕성에 있었다는 결정적 유물이 나왔지만 아무도 연구하지 않아

https://youtu.be/MoGzWIXG6MM?list=PLRAmvpNm4pml6Fdvi3gAISxE382DbiQ6b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 일신서적출판

정인보, ‘조선사연구’

윤내현,  <고조선연구, 상>
문성재,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문성재, ‘한국고대사와 한·중·일의 역사왜곡’(2018)

심백강,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

이덕일·김병기,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 아침, 2006.

복기대,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 , <백산학보 61집>(2002).

리지린지음 이덕일해역,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말, 2018

안병찬, 평양일대 락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5.

리진순,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관한 연구,

박진욱, <락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

송호정, 「고조선의 위치와 중심지 문제에 대한 고찰」, 2010.
오영찬,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 동향』, 서경문화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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