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환국-가사라국》 5. 9환족은 누구인가?(3) 본문
《환국-가사라국》
5. 9환족은 누구인가?(3)
9환족과 일반적으로 우리 겨레의 이름으로 일컫는 예족, 맥족, 한족, 동이족 등과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본다.
5.5 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신용하는 《고조선문명의 사회사》에서 12,000년 전 기후가 따뜻해지자 동아시아 북위 40도 이남지역에서 가장 밀집된 동굴지역인 고한반도에서 구석기인들이 모두 동굴에서 나와 주위의 강변과 해안에서 움막을 치고 마제석기와 토기를 만들어 사냥, 어로, 식료채집을 하면서 ‘신석기인’으로 진화되어 새로운 ‘신석기시대’를 열었다고 하였다.
『약 1만 2000년 전 지구 기후가 따뜻해지자 구석기인들은 동굴에서 쏟아져 나와 인접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돌을 갈아서 만든 마제석기와 토기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신석기시대를 열었다.
古한반도 중부 1,000여 개의 석회암동굴이 밀집된 제1동굴지역에 가까운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강변에는 수십 개 단위의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이 남아 있었다. 특히 남한강 유역 수양개Ⅱ지구에는 약 3만 평 면적에 500채 이상의 대단위 ‘마을유적’도 확인되었다. 이것은 신석기시대 세계 최대 마을의 하나이다. 신석기시대의 시작과 함께 古한반도 중부지역은 유라시아 대륙 초기 신석기인의 최대 인구 밀집지역의 하나가 된 것이다.
古한반도 중부 초기 선석기인 인구밀집지역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상대적 과잉인구로 인한 식료 부족문제였음이 명백하다. 종래의 사냥 어로 채집만으로는 이 과잉 인구를 부양하기 불가능한 것이었다.
식료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방향에서 추구되었다. 하나는 야생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채용 순화 재배하여 식량 생산을 위한 ‘농업경작’을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지역으로의 인구이동을 감행하는 것이었다.』(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43쪽~44쪽)
약 1만2000년 전∼9000년 전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이 오래 교류하며 생활하는 동안에 사람과 문화에 ‘공동 유형’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밝’족이라고 부르고, 밝족은 성립 후 처음 단계에서 크게 3갈래로 분화·발전했다고 한다.
『고(古)한반도 중부 남한강·금강 유역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은 식량공급을 일거에 증가시켰으나, 인구증가도 뒤따랐으므로 식료부족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농업경작의 새로운 방법과 기술을 간직한 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선 이남의 농업경작이 가능한 크고 작은 모든 강변과 해안으로 이동을 감행했다. 농업경작은 ‘햇빛’의 은혜에 직결되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공통으로 ‘태양(해)숭배’ 사상을 갖게 됐다. 그들은 ‘밝음’(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고,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정해 애경했다. 후에 그들의 후예들은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 후대의 고대중국인의 차음표기로는 발인(發人), 백족(白族)이라고 호칭했다.
주목할 것은 약 1만2000년 전∼9000년 전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농업경작·사냥·어로·식료채집을 하고, ‘태양’ 하늘숭배, 천손의식, ‘밝음’ 애호 사상, ‘새’ 토템을 공통으로 형성해 오래 교류하며 생활하는 동안에 사람과 문화에 ‘공동 유형’을 형성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들을 ‘밝’족이라고 통칭하면서도 학술용어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 그들의 문화를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 문화유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 ① 천손 사상을 상징하는 옥천 안터 1호 선돌 ② 한강 유역 암사동 뾰족밑 햇빛살무늬 토기 ③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제21호묘 출토 거북 모양 옥기 ④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 청동기 ⑤ 신락하층문화 유적의 석탄정제품 ⑥ 충북 단양 소재 현대에 복원된 솟대 끝의 새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밝족)’은 성립 후 처음 단계에서 크게 3갈래로 분화·발전했다. 첫째는 지구기후 온난화 이후에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강변과 해안에 그대로 계속 남아 정착해서 ‘고대’를 맞은 신석기인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밝’족이라고 호칭했으나, 후에 ‘밝’대족 기원의 다른 부족들과의 구별을 위해 그들이 ‘남한강’을 거쳐서 ‘한’강 유역 등에서 유래했다는 특징이 파악돼 ‘한’족이라는 호칭도 갖게 됐다. 이때의 ‘한’은 ‘큰’ ‘하나’ ‘하늘’의 뜻을 가진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의 고유어라고 해석된다. 즉 그들은 ‘밝’족 또는 ‘한’족으로 호칭되다가 ‘밝’대족의 분화 진전에 따라 ‘한’족으로 점차 호칭이 확정돼간 것이다.
‘한’족 신석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세계 최선진 신석기 농업혁명의 성취와 그에 인과관계를 가진 모든 문화항목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태양’ 숭배, 태양이 있는 푸른 하늘 숭배, 천손의식, ‘새’ 토템 등이었다. 현재도 충북 옥천에 세계 유일의 태양을 잉태한 신석기시대 여성상이 남아 있다. 햇빛살(태양광선)이 토템 ‘새’에 집중해 비쳐서 잉태해 ‘알’에서 천손 영웅이 탄생했다는 유형의 ‘난생설화’도 밝족·한족의 설화다.
한족은 약 1만2000년 전부터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문암리 유적 제10층), 약 1만 년 전부터는 햇빛살 무늬를 그린 뾰족밑 토기가 출토돼 나오기 시작한다. 이 무늬를 일본 학자들이 머리 빗는 ‘빗살무늬(櫛目紋)’ 토기라고 이름했는데 잘못된 호칭이다. 머리 빗는 ‘빗살’을 그린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을 풍요롭게 해 주는 ‘햇빛살’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래가 뾰족한 독특한 형태의 ‘한’족 토기 명칭은 ‘빗살무늬(줄목문)’ 토기가 아니라 ‘햇빛살무늬(태양광선)’ 토기, ‘빛살(광선)’ 토기로 호칭돼야 할 것이다.
‘한’족은 ‘밝’족을 본터에서 계승해 하늘을 나는 ‘새(鳥)’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필자가 2013년 고조선문명 세미나에서 처음 발표한 “밝족과 한족의 토템은 ‘새’다”라는 명제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쉬운 것이다. 사회학·인류학적으로 토템 장대(totem pole)인 한족의 ‘솟대’ 꼭지에 세우는 ‘새’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고대문헌들이 이 ‘새’를 써놓지 않고 ‘蘇塗’(소도)라는 귀신 제사하는 곳으로 써 놓았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뿐이다.
한민족은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가라·탐라 모두 ‘새’ 토템이었으며, 모자에도 두 귀 위에 새털 깃을 세우고, 왕관에도 새털 깃 도안을 했으며, 죽으면 무덤에도 새털 깃을 넣었다. 지금도 한국 대통령의 상징 도안은 ‘봉황새’다. ‘한’족은 ‘밝’족과 마찬가지로 10진법과 자(尺度)를 사용했으며, 천문지식과 기하학적 도안을 크게 발전시켰다. 햇빛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특히 기하학적 도안이 크게 발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족은 죽으면 상층은 ‘고인돌’ 무덤을 썼다. 고인돌은 ‘한’족의 무덤양식이었다.
둘째 갈래는 지구 기후 온난화로 동토(凍土)가 녹아 북위 40도선 이북도 농경이 가능하게 되자, 고한반도 ‘밝’족의 일부가 북위 40도선 이북의 요동지역에 이동·정착해 형성된 ‘예(濊)’족이다. 이들은 자기들을 개척지의 큰 강 ‘요하’의 ‘東(동,쇠)’쪽으로 이동한 ‘밝’족의 일부라고 자부해 ‘쇠’(東)족이라고 차별화해서 호칭했다. 후대에 고대 중국지식인들은 ‘쇠’를 ‘濊’ ‘예’ ‘예’ ‘穢’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후에 남방음으로 변음돼 ‘예’(Ye)로 발음하게 됐다.
‘濊’족은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또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요하 동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요동반도·태자하·목단강·제2북류 송화강·두만강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분산해서 정착한 신석기인들이었다. ‘예’족은 요하 이동지역에서 고한반도와 동일 기초의 문화를 가지면서도 요하 이동 새 정착지에서 독자적 신석기문화를 창조해 생활했다. 심양 부근의 신석기 ‘신락(新樂)문화’는 현재 발굴된 ‘예’족의 대표적 신석기문화 유적이라고 판단된다. ‘후한서’ 예전에서 “(예족은)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범(虎)을 신(神)으로 여겨 제사 지낸다”고 했다. ‘예’족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맹수의 왕인 ‘범’을 주토템으로, ‘새’를 부토템으로 정해 외경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예족은 부근에 풍부한 무순광산의 노천 철광과 노천 석탄광이 있으므로, 7200년 전의 신락문화 유적에서는 이미 석탄정제품과 적철광석 덩이가 출토됐다.
셋째 갈래는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밝족) 일부가, 북위 약 40도 이북의 과거 동토였던 지역이 인간거주와 농경 가능지역이 되자,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서북방이동을 감행해 지금의 요서 대릉하 및 시라무렌강 사이 평야지역·내몽고자치구 동부지역 일대에 정착한 ‘貊(박)’족이다. 그들은 새 환경에 적응해 토템을 ‘곰(熊)’으로 정하고, 고한반도에서 가져온 ‘새’는 부토템으로 했다. ‘후한서’에서도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다”라고 했다. 이들은 자기들을 ‘밝’대족의 일부로서 서북방 이동을 감행했다고 ‘북밝족’으로 자부했는데, 후대에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한자로 ‘북발’(北發) 또는 단음으로 ‘貊’(박, 백, 맥)족이라 이름을 붙이고 ‘박’ ‘백’이라고 발음하다가 후에 남방 발음으로 변음돼 ‘맥’이라고 읽게 됐다.
종래 일부 고대사학자가 ‘貊’(맥)을 ‘곰’과(科)의 짐승의 표기로 해석하고, 또 시베리아 또는 중앙아시아 또는 바이칼호 부근 북방 부족 ‘예’ ‘맥’족이 빈 공간의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왔다고 해석한 것은 지구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기의 낡은 가설이다. 그러한 북방은 동토가 돼 당시 부족과 문명의 기원 형성지가 될 수 없었다. ‘맥’족은 원래 고한반도에서 ‘밝’족 일부가 서북방으로 이동해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 정착해서 형성됐으며, ‘맥’족이 그곳에서 만든 신석기문화가 홍산문화(紅山文化)이고, 그 가장 발전된 중심이 우하량(牛河梁) 유적이다. 우하량 유적 제1지점에는 제단과 신(神)을 모시는 신성한 묘당(廟堂)이 있고, 그 묘당에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곰의 조각상, 새의 날개 등이 부서진 상태로 출토됐다. 이 부족은 ‘여신’을 숭배하고 ‘곰’을 주토템과 ‘새’를 부토템으로 한 부족이었음이 증명됐다. 우하량 유적 제2지점에는 여신을 위해 제사하는 제단 다음에 족장급의 무덤들이 있는데, ‘족장’을 나타내는 맨 앞의 중앙 대묘의 유골은 여성이었다. 이 곰 토템 부족의 족장은 여성이었다.
홍산문화의 족장급 무덤들에서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당시 세계 최선진의 찬란한 옥기(玉器)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일부 고고학자는 홍산문화의 찬란한 옥문화와 제의문화를 놓고 ‘요하문명’이라는 개념과 학설을 정립해, 심양 요령성 박물관에서 장기 전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중국문명의 시작은 황하문명에서가 아니고 그보다 1000여 년 앞서 ‘요하문명’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면서, 홍산문화의 창조자는 하(夏)를 건국한 황제(黃帝, 軒轅)의 ‘황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홍산문화와 우하량 출토유물은 그들이 고한반도의 ‘밝’족과 동일한 ‘북밝’족이며 ‘맥’족임을 출토유물이 매우 명료하게 증명하고 있다. 신성한 묘당에서 여신상과 함께 맥족의 토템인 ‘곰’ 상과 ‘밝’족 및 ‘한’족의 토템인 ‘새’ 상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중국 문헌 역사 25왕조사의 어디에도 ‘황제족’이라는 족속은 아예 없었다. ‘곰’ 토템과 ‘새’ 부토템을 가진 것은 貊(맥, 박)족뿐인데, 그들은 고한반도 계통이며, 고조선에 통합된 부족의 일부였다.
고중국은 명나라 초기 이전까지는 이 홍산문화 지역에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다. 역대 고중국학자들은 그들이 모두 東夷(동이) 또는 北狄(북적)이어서 자기들의 조상이 아니라고 한결같이 강조, 주장하고 배척해 왔다. 홍산문화는 고한반도 밝족 계열인 맥족(貊族)의 신석기시대 문화이며, 후에 고조선문명의 선행요소의 일부로 고조선문명에 통합된 신석기문화다.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것은 약 5000년 전에 앞에서 고찰한 ①‘한’족의 한강문화와 ②대동강문화 ③ ‘맥’족의 요하 이서 홍산문화(일부 중국학자의 ‘요하문명’)와 ④ ‘예’족의 요하 이동 신락문화 등 크게 4대 신석기문화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지양·승화·발전돼서 탄생한 것이다. ‘고조선문명’을 큰 강과 연관해 표현하면, 신석기시대 ‘한강문화’ ‘대동강문화’ ‘요하문화’(중국 고고학자들의 ‘요하문명’)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해 탄생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3대강(한강·대동강·요하) 문화가 밝족과 그 후예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돼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결정적 계기는 약 5000년 전에 고한반도에서 ‘한’ ‘맥’ ‘예’ 3부족이 결합해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국한 대변혁에 의거한 것이었다.』
(출처; 문화일보,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⑤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0701032812000001)
한족은 古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강변과 해안에 그대로 계속 남아 정착했으므로 ‘한족의 농업경작의 발전과 전파’를 살펴보고, 예족과 맥족의 ‘기원과 이동’ 그리고 ‘맥족의 기장과 조 농경의 시작’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한족의 농업경작의 발전과 전파
『‘한’족은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에서 ‘古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밝족)의 신석기 농업혁명을 그 자리에 계승·발전시켰기 때문에, 古한반도의 강변들에서는 온대농업경작이 크게 발전하였다. 신석기시대 말기~고대 초기 온대농업에서 한강문화의 농업경작은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가장 선진적 농업이 성취된 곳의 하나가 되었다.
한족의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에서 경작 재배된 곡류는 단립벼·콩·조·기장·수수·밀·보리·들깨 등이었다. ~
한족의 농업경작의 곡물을 분류해 보면, 조·기장·수수는 유라시아 대륙 도처에서 가장 널리 재배된 신석기시대 곡물이다. 그러나 단립벼(쌀)·콩·팥·들깨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한족의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 등의 농경에서만 출토되는 곡물이다.
밀·보리 등 맥류는 古한반도에서는 초기 신석기시대의 것은 출토되지 않고, 조동리유적의 약 6,200년 전의 것부터 다량 출토되었다. 이 밀·보리가 한족이 야생종을 순화 재배시킨 것인지, 다른 지역에서 도입 전파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고한반도에서 한족의 신석기시대 농업경작은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가장 선진적 농업의 하나였으므로 이주민들과 함께 이웃 지역인 고중국과 일본열도에 전파되었다. 특히 단립벼와 콩은 한족의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에서 경작 재배를 시작하여 이웃 각 지역과 전 세계로 전파된 것이었다.』(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62쪽~63쪽)
예족의 기원과 이동
『예족의 기원은 이전 얼어붙어 인간 생존이 불가능했던 시베리아 동토지역의 가상 ‘고아시아족’에서 기원하여 내려온 것이 아니라, 말기구석기인과 초기신석기인이 생존 가능했던 북위 약40도 이남 古한반도 동굴지대 부근 강변과 해안 지역에서 기원한 古한반도 초기신석기인들(밝족)이 지구 기후온난화(약 12,000년 전) 이후에 북상하여 압록강·요동반도·소주산·태자하·운하·제2송화강·눈강·목단강·두만강·동해안 북부에 이르러 정착해서 형성된 것이었다.
‘예’족의 기원인 古한반도 초기신석기인의 일부가 북방 이동을 감행하여 지금의 요동·제2송화강 지역 등과 요서·동부 내몽고 자치구 일대에 도달해서 정착한 것은 9,000년 전경(BC 7,000년경)부터 6,000년 전경(BC 4,000년경)이라고 추정된다.
‘예’족은 소주산, 요동반도, 태자하, 운하, 제2송화강, 눈강, 목단강, 수분하, 혼강, 홍개호, 두만강 중 하류, 연해주 남부 등 지역에서 한편으로 ‘한’족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한편 ‘한’족과 구별되는 독특한 신석기문화를 남겼는데 이것을 ‘요동 신석기문화’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심양시 인근의 ‘신락문화 유적’은 ‘예’족의 요동 신석기문화의 대표적 유적이라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132쪽~133쪽)
『‘예’부족은 ‘범’토템 부족이었다. 《후한서》 예전에서 “(예족은)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범을 신으로 여겨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
고고유물로는 예족의 유적인 압록강 하류 요녕성 동구현 후와 하층문화에서 활석제 ‘범(호랑이 머리)’ 조각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후에 예족이 흩어져 거주한 중국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에서는 범 조각상이 다수 발견되었다. ~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밝족)에 기원을 둔 초기 신석기인들은 고한반도 거주시기에 모두 해를 숭배하며 새를 토템으로 했기 때문에, 북상 이주하여 형성된 예족도 처음에는 새를 토템으로 간직한 흔적이 여러 곳에 보인다. 그러나 예족이 범토템을 정한 후에는 종래의 새토템은 부토템으로 전화되었다.』(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134쪽~135쪽)
맥족의 기원과 이동
『‘맥’부족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문화유형(밝족)에서 기원하여, 북위 40도 이북의 과거 동토였던 지역이 인간 거주 가능지역이 되자 고한반도 신석기인 일부가 약 9,000년 전(BC 7,000년경)부터 약 6,000년 전(BC 4,000년)경에 북방 이동을 감행해서 그 서방 행로가 ‘요하’ 서쪽인 시라무렌강 · 노합하 · 대릉하 유역 등 지금의 요서 · 내몽고자치구 동부지역 일대에 정착하여 형성된 부족이었다. 맥족은 종래의 견해와 같이 고중국의 북서지방 또는 알타이 지방에서 형성되어 동방으로 이동해 들어온 부족이 아니었다.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일부가 북방 이동을 한 시기는, 기후변화와 농업경작 조건을 고려할 때, 서북방 이동의 경우 2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단계는 약 9,000년 전부터 약 8,000년 전까지의 서북방 이동이다. 이 기간에는 주로 소하서문화유적(BC 7,000년~BC 6,500년), 흥륭와 문화유적(BC 6,200년~BC 5,200년)을 남긴 초기 신석기인들이 이동했다고 볼 수 있다. 제1단계의 북서방 이동 인구는 비교적 소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제2단계는 약 8,000년 전부터 5,000년 전까지의 서북방 이동이다.
주로 사해문화유적(BC 5,600년~BC 5,500년), 부하문화유적(BC 5,200년~BC 5,000년), 조보구문화유적(BC 5,000년~BC 4,400년), 홍산문화유적(BC 4,500년~BC 3,000년), 소하연문화유적(BC 3,000년~BC 2,000년)을 남긴 중기·후기 신석기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제2단계의 북서방 이동 인구는, 옛 홍산문화 지역이 현재의 그 지역보다 농업경작에 더 적합한 기후로 급변했기 때문에 더 다수였다고 볼 수 있다. 홍산문화의 범위는 우하량유적에 한정되지 않고 그와 유사한 문화 유형을 가진 요서지역 신석기시대 유적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제1·2단계의 북서방 부족이동의 경로가 모두 현재의 요동반도 지방을 경유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노합하 · 시라무렌강 유경의 최서북방 지역으로 이동한 부족도 씨족별로 요동과 요서의 각지에 수십·수백 년간씩 정착했다가 다시 이동하는 식의 점진적 이동을 했으리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요서에 이동한 맥족 부족장·씨족장들이 주로 요동반도의 ‘수암옥’으로 주요 옥기를 제작했다는 사실은, 옥광석의 교역을 고려할지라도, 그들이 ‘수암옥 광산’이 있는 요동반도 일대를 경유하여 이동했으므로 요동반도 수암의 거대한 옥광산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맥부족은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문화유형(‘밝’족 유형)에서 기원하여 약 9,000년 전~약 6,000년 전에 대흥안령 동부의 과거에는 동토가 되었다가 다시 온난화된 요서 · 내몽고자치구 동부지역에 정착해서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면서 새시대를 연 곰토템을 가진 신석기인들의 통칭이다. 그들이 남긴 유적들이 위에서 든 홍산문화 유적 등 신석기문화 유적들이었다.』(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105쪽~108쪽)
『‘맥’부족은 ‘곰’토템부족이었다. 우하량의 여신을 모시는 신성한 묘당에서 여신과 함께 모셔져 있던 곰의 조각상(파편)이 출토된 사실은, 우하량 일대의 홍산문화를 남긴 신석기인이 곰을 주토템으로 하는 맥족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맥’족은 ‘곰’을 토템으로 하면서, 동시에 ‘새’를 부토템으로 애호하였다. 우하량의 신성한 묘당에서 ‘여신’상, ‘곰’조각상과 함께 ‘새’의 날개와 두 발톱이 출토되었다. ~ 이 새조각상은 신성한 장소인 묘당에 여신상, 곰상과 함께 모셔져 있었기 때문에 ‘새부토템’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새토템은 초기 신석기시대부터 고한반도의 ‘한강문화’에서 매우 성행한 것으로서, 태양숭배와 관련된 것이었다.』(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112쪽~113쪽)
기장과 조 농경의 시작
『흥륭와 유적(BC 6,200~BC 5,200년)에서 7,700년 전~8,000년 전의 기장과 조가 출토되어 ’맥‘족이 기장과 조를 중심으로 한 잡곡 재배 농경을 시작했음이 증명되었다.
중국 고고학계는 2010년 8월 31일 신화사 통신을 통하여 흥륭와문화 유적에서 2003년 발견된 1,500낟알(90퍼센트는 기장, 10퍼센트는 조)을 캐나다 토론토대학에 의뢰해 방사성동위원소 14번의 탄소측정을 했더니 7,700년에서 8,000년 전의 것으로 측정돼 나왔는데, 이것은 중부유럽에서 발견된 것보다 2,000~2,700년 앞선 것이므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북방 한작 농업의 기원 또는 기원지의 하나라고 볼 수 있으며, 중국은 이를 ‘세계 중요 농업문화유산’으로 등재신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흥륭와유적의 기장과 조의 농업경작 시작이 고한반도 한강문화의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 농업혁명의 시작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한강문화에서는 12,000년 전의 단립벼의 재배 볍씨가 충주 소로리에서 출토되어, 신식기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고한반도의 인천 영종도 운서동에서는 이미 신석기시대 초기·전기에 기장·조·콩·들깨가 경작되고 있었다. 충주 조동리 유적에서는 6,200년 전의 볍씨를 비롯하여 그 후 탄화된 쌀·밀·보리·수수·기장 등이 출토되었다.
구석기시대 말기~신석기시대 초기 동굴에서 나와 강가에서 농경을 시도하다가 북방의 새 정착지를 찾아서 이동한 ‘고한반도 초기신석기인 유형’의 한 갈래가 흥륭와 유적일대에 정착하여 북방의 한랭한 기후 조건에 적응하면서 고한반도에서 경험한 ‘기장·조’의 재배를 시작했을 것임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 사실을 더욱 보강해 주는 것은 흥륭와 유적에서 출토된 한강문화 유형과 비슷한 ‘빛살무늬’ 토기이다. 한강문화의 ‘빛살무늬’ 토기는 처음에는 뾰족밑(尖低)이었다가 중·후기에는 둥근밑(圓低)·납작밑(平底)으로 변해 갔는데, 흥륭와 유적에서 출토된 ‘빛살무늬’ 토기의 바닥은 모두 납작밑으로 변화되었지만 무늬는 한강문화와 동일한 ’빛살무늬‘ 그대로였다.
흥륭와 유적에서 ‘기장·조’의 출토는 요서에 이주해 정착한 맥족의 주식이 ‘기장’과 ‘조’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118쪽~119쪽)
〈참고자료〉
신용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지식산업사, 2018
문화일보,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⑤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0701032812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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