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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2016년부터‘고대사학계의 거짓말 잔치’를 통해 이미 45회의 억지 주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을 하고 시정을 요청하였으나 고대사학계에서는 학문적인 답이나 공개토론회 제안에는 응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겨레가 역사의 처음부터 중국의 식민지로 시작되었다’는 거짓말투성이 시민강좌를 더 강화하고 있다. 새해에는 공개토론회를 통해 이런 것을 바로잡아 ‘한강의 기적’과 한류의 뿌리가 되는 민족 저력이 포함된 우리 겨레의 바른 역사를 복원하는 데 나라가 앞장서기를 바란다. ■ [민족NGO 새해 외침] 겨레의 미래를 위한 바른 역사 복원을 바란다!기사입력 2018.01.02 17:04기자명민족NGO면 편집장 [민족NGO전면기사] ‘역사가 없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제4산업혁명은 인문학이 그 바탕이고,..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사학자들은 편협한 국수주의자도 팽창적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신채호는 영토와 국권(國權)을 확장하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서의 민족주의, 즉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주장하였을 뿐이다. 신채호는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나 조선인 이주지로 생각했을지언정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만주를 고토회복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신채호의 고대사에 대한 저술에서도 만주수복론이 명시적으로 표명되어 있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20년대 아나키스트로 변신한 신채호를 주목한다면, 그의 민족주의 사상은 국수적인 자강주의의 낡은 옷을 벗고 인류공동의 국제주의적 세계관 속으로 민족의식을 흡수하여 열려진 민족주의로 승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

단군왕검 실재에 대한 인식이 모호하고 단군조선 역사도 공백으로 비워두는 주류 강단사학은 기자조선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자조선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과 기자조선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이 아직도 병립하고 있다. 주류 강단사학이 유교사학과 식민사학에서 바라보는 기자조선을 그대로 수용하진 않지만 결별하지도 못하여 선도사학 관점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에 기자조선에 대한 애매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3) 주류 강단사학의 성립과 식민사학의 계승 K스피릿 입력 2022.07.16 08:13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8.15 광복은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을 해체하고 한민족의 자주적이..

계몽사학에서는 중국에 대해서는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일본인이 쓴 역사책(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朝鮮史》(1892))의 영향을 받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계몽사학자들은 반청독립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쓴 교과서들은 조선시기 전 기간에 걸쳐 유지되던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청독립 정신은 청의 정치적 간섭에서 독립한다는 정당성은 있었으나 많은 부분은 일본의 부추김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일본으로의 예속’으로 연결되었다. 유교사학에서는 탈피도 못한 채 오히려 친일화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논리를 자발적으로 조선인에게 교육하는 역할을 하는 형편이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0) '임..

이익은, 단군조선은 요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으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순(舜)의 통치권 내에 들어가 중국 문화 영향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然則檀君亦必在虞廷風化之內 而東邦之變夷爲夏久矣”, 『성호사설』)고 보았다. 이익이 하(夏)문화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본 편발개수(編髮蓋首)는 이암의 『단군세기』와 『정조실록』과,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 이종휘의 『東史』에도 실려 있다. 다른 사서에서는 모두 단군이 제정한 제도(『단군세기』에는 2세 단군 부루)라고 인식하고 있는데도, 오로지 이익만은 하(夏)의 예(禮)가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000여 년 동안 원시적이고 개척되지 못했던 문화는 기자 시대가 되어서야 암흑이 걷혔다는 인식(“檀君之世鴻濛未判 歴千有餘年 至箕子東封天荒始破”, 『성호사..

유교사학이 중화사관이라는 틀 속에 우리 역사를 최초로 집어넣은 사건은,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일천년 이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표현했던 고려중기 서경천도운동(1135)과 그 실패 과정에서 드러난 선도(仙道:선불습합) 세력과 유교 세력의 대충돌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이루어졌다. 승리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한 유교 세력은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정치 표방을 합리화하고 유교사관 확립을 도모하였다. 한국사를 유교사관으로 해석한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배달국과 단군조선을 역사기록에서 배제하고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사를 서술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인식을 송두리째 바꾸고자 하였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4) 고대사 중심무대를 한반도로 축소한 김부식과 중화사관 도입K스피릿 입력 2022.05.16 1..

민족사학에서는 고유의 신선사상을 민족종교로, 만주를 민족사의 중심무대로, 민족사의 연원을 단군으로 삼고 있다. 1980년대 이래 중국 동북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 성과로 인해 요서지역 청구문화(홍산문화)와 요동지역 천평문화를 두 중심으로 하는 배달국이 단군조선 선행문화임이 밝혀졌으므로, 고대사인 단군조선 역사는 물론 상고사인 배달국 역사까지도 다루고 있는 선도사학을 민족사학의 ‘원형’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생명을 존중하고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선도적 세계관인 홍익주의에 기반한 역사인식을 ‘홍익사관’이라고 명명하였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 홍익사관은 共生의 역사관 K스피릿 입력 2022.04.25 10:19 업데이트 2022.05.23 10:36기자명 소대봉 민족..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 桓檀古記 僞書論 批判2006년 3월 (통권 제80호)安昶範濟州大學校 名譽敎授(韓國哲學 專攻) / 本聯合會 指導委員 Ⅰ. 問題의 提起『桓檀古記』는 桂延壽 선생이 서기 1911년(光武 15년) 5월 묘향산 檀窟庵(단군굴 암자)에서 ㆍㆍㆍ를 모아 하나로 묶은 책이다. 그 요점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우리 民族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고 둘째,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종교를 창설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桓檀古記』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민족의 이상을 높이고, 민족의 기강을 강하게 하며, 민족의식이 다시 되살아날 것 같은 굉장한 책이다.그러나 이들 문제들은 우리 民族의 원초적 종교를 모르고, 漢字를 경솔히 國譯하거나, 古典 섭렵이 많다하더라..

일경은 이러한 그를 정부에 추천해 일본 궁내청 서능부(書陵部:왕실도서관) 서고에서 조선전고(朝鮮典故)를 조사하는 사무를 맡아보도록 했는데, 193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12년간 촉탁직으로 근무하면서 그곳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창화 선생은 일본왕실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사료의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수탈해간 단군 관련 우리 고대사서였다고 하면서, 조선에서 수탈해간 사서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고 할 만큼 엄청난 분량이었다고 증언했다. 남당은 그 사서들을 직접 분류하고 내용을 검토하다가 《고구리사초략》, , 등 많은 사료를 필사해 집에서 보관해오다 귀국 후 조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던 것이다. ■ 일본 왕실서고에서 탈출한 고구리사초략 ..

마고 창세신화는 한국선도의 천지인 정신, 홍익인간 재세이화 건국이념, 신인합일 사상의 뿌리를 알 수 있게 합니다.21세기 기후위기와 분열, 분쟁으로 인해 지금의 생존방식을 유지하며 공멸할지, 인류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 공존할 것인지 절대 위기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지구와 어떤 관계 설정을 해야 할까요?우리 인류는 신의 씨앗을 지닌 천손이고, 우리 안에서 그 씨앗을 깨워낼 수 있지 않은가요? ■ [마고 4편]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진정한 가치 회복 ··· “마고성을 떠나온 인류, 신성의 씨앗을 가진 존재들”K스피릿, 강나리 기자, 2024.08.27 마고 창세신화에서 주목할 또 한 가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입니다. ‘오미의 화’에서 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