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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손진태(孫晋泰)(1900년 12월 28일~미상)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학자이다. 1920, 1930년대에는 주로 현지 조사에 기초한 왕성한 민속 자료 수집과 동서양의 방대한 문헌 섭렵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 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 광복 후에는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며 민족사 연구의 성과들을 집성하고 교육 관료로서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민속 · 역사학자, 교육 관료. 본관 밀양(密陽). 출생지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주요 저서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조선민족사개론(상)』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는 1900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신채호는 일제강점기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한 학자이며, 언론인·독립운동가이다. 1880년(고종 17)에 태어나 1936년에 사망했다. 『황성신문』 기자,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항일언론운동을 벌이며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191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항일을 고취하는 글과 역사서를 집필하면서 대한독립청년단 조직,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22년 이후에는 폭력을 통한 민중 직접혁명을 주장하여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1928년 대만에서 체포, 여순 감옥에서 복역 중 순국했다.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하였고,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항일언론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한국사 연구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사학자 · 언론인 ·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일제강점기 『안중근전』, 『한국통사』, 『대동민족사』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1859년(철종 10)에 태어나 1925년에 사망했다. 젊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해 성리학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독립협회의 영향을 받고 개화사상가로 변신했다. 국권회복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주장했고, 황성신문 등 언론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는 데 주력했다. 한국인의 혼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통사』를 저술했고,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수습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황성신문 및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통사』 등을 저술한 유학자 · 언..

정인보(1893년(고종 30)~미상)는 해방 이후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등을 저술한 학자.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정경시(鄭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 · 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 · 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정인보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사장,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고,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

문일평(1888년 5월 15일~1939년 4월 3일)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문일평(文一平)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1939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중퇴하고 태극학회 일어 강습소인 태극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1906년 신학기에 도쿄 세이소쿠〔正則〕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 보통과 3학년에 편..

계봉우(1880년(고종 17)~ 1959년)는 이명은 사방자(四方子)·뒤바보·북우(北愚). 함경남도 영흥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외 항일운동을 전개한 역사학자 · 독립운동가이다. 1908년 동경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영흥지회에 들어가 「진지사(眞志士)」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국내에서의 신민회(新民會) 운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북간도로 망명,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간도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상해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가을 시베리아로 들어가 이동휘의 정치적 거점인 다르뷰로에 부설된 한인부(..

안확(1886년(고종 23)~1946년)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 신천지 편집인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문학사』 등을 저술하며 국어학, 국문학, 아악 등을 연구한 국학자 · 독립운동가. 호는 자산(自山). 운문생(雲門生)이란 필명과 팔대수(八大搜)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대마을(서울 성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지역, 곧 인왕산과 가까운 지역)의 안씨(安氏)집안 태생으로 중인 출신이다. 1895년 서울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교육받고, 1896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할 때 그 모임에 참여하여 연설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소학교를 마친 뒤 당시 유행하던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며 사상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특히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황의돈(1890년(고종 27)~1964년)은 일제강점기 『대동청사』, 『조선신사』, 『중등조선역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이다. 호는 해원(海圓). 충청남도 서천 출생. 아버지는 황기주(黃麒周)이며, 한말의 문인 황현(黃玹)과는 족친간이다.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1890년에 태어나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만에 수료하고 그 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의 동경(東京)을 내왕하며 근대 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존망의 위기에 놓였음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을 전개..

장도빈(1888년(고종 25)~1963년)은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 출신. 봉구(鳳九)의 둘째아들이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논진(필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 내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