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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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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쳤다. 성왕은 신라 · 가야와 연합하여 고구려군을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고 백제는 한강 하류유역을, 신라는 한강 상류유역을 차지하였다.이 시기에 백제 공주가 신라에 시집가는 등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으로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말년에 신라가 배신하여 백제의 동북변을 차지하자 성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신라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은 중국의 남조와는 물론 북조(당시의 북제)와도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북제는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라는 작위를 내렸다. 이는 백제가 동청주를 지배하는 것을 승인한 것이다. 백제는 일찍이 서기 245년경에 중국의 동북부에 ..

● 만리장성이 압록강까지 있었다고 왜곡한 중국● 사파리가 된 북한, 중국에 돈 내고 이를 구경하는 한국인● 중국, 抗日·抗美援朝에 이어 抗韓援朝(한국에 대항해 북한을 지원함) 준비 중● 중국 도교 건물터를 고구려 첫 수도 왕궁건물터라 주장● 장군묘로 불리던 무덤을 주몽묘라고 강변● 주몽이 이끈 졸본부여는 고구려와 따로 존재했다● ‘장군총은 주몽의 무덤이며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주몽부터 5대왕까지는 解氏, 6대 태조왕부터 高氏● 한국식 룸살롱 문화로 흥청대는 심양, 과연 우리에겐 중심이 있는가 3년 전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최초 폭로한 ‘신동아’의 현장 취재광개토태왕비 앞에는 發福 비는 잔돈만 수북이…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입력2006-09-06 16:32:00 ..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발해연안문명의 여명을 밝히다부여의 갑골 습속 (naver.com)부여국(扶餘國)의 유적지 분포도 부여(扶餘, 혹은 夫餘)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중의 하나로서 발해연안북·동부 지구에 위치했다. 부여에서는 제사·군사·정치면에서 고대 동방 사회의 중요한 신앙 활동의 하나인 갑골을 통하여 점복을 행하고 있었음을 사서(史書)를 통해서 알 수 있다.우선 중국의 진(晋)나라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 보면, “군사라든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소를 잡아 그 굽뼈를 보고 좋고 나쁨을 점친다. 이때 소의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해져 있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有軍事 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고..

김정일 정권 붕괴시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동요 막으려는 심모원려 “옌볜의 지식인 사회는 ‘술렁’, 그러나 한국의 학계와 정부는 ‘조용’” 한국의 북방사 연구 저작물 분석하는 중국의 역사 연구기관들 고구려를 중국 변방 정권으로 자리매김하려는 ‘東北工程’ 프로젝트 日本, 발해는 중국사로 고구려사는 한국과 중국사 양쪽으로 분류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한국의 역사 主權에 대한 중국의 심각한 도전글: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hoon@donga.com입력2003-08-22 13:25:00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내용의 시론을 담고 있는 광명일보 인터넷판과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는 중국변강사지연구 중심의 사이트 지난해 초 기자는 교토(京都)에 있는 일본 국립박물관..

신라인은 나당전쟁 시기에 당군을 물리쳐 왕조와 국가를 보존하고, '삼한일통'했던 자신들의 자부심과 긍지를 역사 기록으로 남겼고, 그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 곳곳에 담겨 있다. 이런 신라인의 의식을 읽어내고 이해할 때 나당전쟁의 실상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고구려사 명장면-139]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2)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2021. 12. 23. 한국사 교과서에는 나당전쟁에 대해서 675년 매초성(買肖城) 전투,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군을 격퇴함으로써 나당전쟁을 신라의 승리로 종결시킬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나당전쟁의 승리로 비로소 삼국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제1대 고왕의 뒤를 이은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대무예와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 대흠무(大欽茂) 시기는 발해 역사의 전반기에 해당하며, 영토 확장과 제도 ‧ 문화면에서 큰 발전을 이룬 시기이다. 무왕은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치(武治)에 큰 업적을 남겼다. 무왕이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蕃)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남은 풍속을 가졌다고 하였다. 『신당서』에는 발해가 부여 ‧ 옥저 ‧ 조선 등 바다 북쪽 여러 나라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무왕의 활발한 영역 확장은 필연적으로 주변국과 마찰을 야기하였고, 마침내 발해가 당나라와 무력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무왕 대에 ..

1115년, 여진족 최초의 국가 금이 건설되었다. 금은 요와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며 세력을 떨쳐나갔다. 이 무렵 송나라는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는데 형세를 오판해 금과 손을 잡고 요를 협공하였고, 이때 금의 지원을 받은 대가를 지불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송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계속된 송의 약속 파기로 격분한 금은 송나라(북송)를 멸망시켰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 금의 건국 - 쇠퇴하는 송나라, 금에 의해 멸망하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1126년 : 이자겸의 난이 일어남1135년 : 묘청, 서경에서 대위국 세움; 김부식이 평정함1145년 : 김부식, 《삼국사기》 50권 편찬1170년 : 정중부 등, 무신난(경인의 난)을 일으킴; 이후 100년간 무신집권1198년 : 만적의 난목..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옛사람의 격식을 따르지 않고 거침없이 종횡으로 치달려서 그 기세가 끝도 없이 크게 펼쳐졌으며, 당시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려사’ 이규보열전) 고려사에 실린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문장에 대한 평가다. 짤막하지만 시와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외교 문서 작성을 도맡은 이에게 걸맞은 찬사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규보가 살다 간 시기 고려는 무신 정권과 대몽 항쟁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황이었다. 후덕한 인상의 이규보 초상화. 시와 술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그의 삶을 보여 주는 듯하다. 서울신문 DB #긴 기다림 끝 명예 얻었으나… 그의 인생 역시 거침없는 글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

한국 고대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가 말갈이다. 그것은 바로 만주사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한반도에 갇힌 역사가 아닌 민족의 원류가 북방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한반도로 귀착되기 전에 만주가 주된 역사 공간이었다. 현재 만주는 역사연구적으로 보면 비어있는 공간이다.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 강제로 현재 기준으로 만주를 비롯 동북아지역에 존재했던 민족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탈바꿈시켰다. 그 만주지역에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가 그 이전부터 오랜 기간 존재했고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지금의 중국을 만든 한족의 역사와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것은 분명 역사왜곡이고 옛 역사터전을 잃고 한반도에 갇혀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