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6월 04일 (화) 18:11

'乙'이었던 박혁거세, 어떻게 신라를 건국할 수 있었을까? (brainmedia.co.kr)

천손문화연구회 경주 선도문화탐방기 [1] 신라 건국의 비밀 - 오릉, 알영전, 숭덕전

 
 신라 천 년 고도 경주 속에 오롯이 간직된 한민족 고유의 천손문화를 찾는다!

지난 25~26일, 경주에서는 아주 특별한 문화탐방행사가 있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의 천손문화연구회가 주최한 '경주 선도문화탐방'이 바로 그것. 선도문화는 한민족 전통의 '하늘문화(제천문화)'로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화랑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등이 이 선도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들었지만, 한민족 고유의 선도문화를 향한 천손문화연구회원들의 뜨거운 열정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그 현장을 기자가 동행 취재하였다.

 

※ 천손문화연구회 경주 선도문화탐방 기획기사


[1편] 신라 건국의 비밀 - 오릉, 알영정, 숭덕전

 

혹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이라는 노래를 아시는지.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고구려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

그렇다. 신라의 선도문화는 한민족의 시조이신 단군왕검, 그리고 그 이전의 환웅천황, 그리고 신라의 건국시조인 박혁거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에 천손문화연구회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능이라고 알려진 오릉에서 선도문화 탐방을 시작하였다.


▲ 경주 오릉 입구. 이곳에서부터 천손문화연구회의 경주선도문화탐방이 시작되었다.

 

5월 25일 정오. 경주 오릉 매표소 앞.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속속히 모여들었다. 서울, 부산, 서산, 구미, 천안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의 얼굴에는 설렘이 한가득 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경주를 처음 찾는다는 회원부터 경주 토박이까지. 오로지  선도문화의 자취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모인 회원들 앞에 천손문화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정경희 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가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중국의 도교, 불교, 유교와는 다른, 고유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풍류도, 선도, 선교 등 다양한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왔는데, 단순히 종교나 신앙이 아니라 '신선'으로 표현되는 전인적인 인격체가 되는 심신 수련법, 즉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밝음을 밝히는 수행문화였습니다.

단군왕검, 그 이전인 환웅의 배달국 시대부터 우리 민족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 수행문화와 이를 통해 내면의 밝음이 깨어난 '천손', 천손문화가 세월이 흐르면서 수행을 잊고, 중심을 잃어가면서 점차 그 본질이 변질되어 끝내 사라졌습니다. 이번 선도문화탐방은 잃어버린 천손문화를 되찾고, 이 천손문화의 중심이 바로 서서 들불처럼 펴져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하였습니다. 그 시작은 비록 미미할지라도 크게 번져나가 상고이래 천손문화가 다시 부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수와 함께 누군가 구호를 제안했다.

 

"천손문화부활! 천손문화부활! 천손문화부활!"

 

천손문화가 다시 살아나 이 땅의 모든 사람의 내면을 밝히기를 바라는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의 마음을 담은 구호가 널리 퍼져 나갔다.

 

# 오릉(五陵)


▲ 박혁거세의 왕릉으로 알려진 오릉. 신라건국 초기 왕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매표소 문을 지나서 조금 걸으니 우거진 소나무 숲 사이로 새초롬하게 얼굴을 내민 봉분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릉은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였던 알영부인(閼英夫人), 제2대 남해왕(南解王), 제3대 유리왕(儒理王), 제5대 파사왕(婆娑王) 등 박씨 성을 가진 5명의 왕의 왕릉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승하 후 유체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섯 개로 나누어져 땅에 떨어졌으므로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그대로 다섯 군데에 매장하였다 하여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천손문화연구회는 봉분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오릉을 바라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기 이전, 이 지역에 있었던 6부는 조선 유민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단군조선은 공식적으로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에 의해서 망했다고 되어있지만, 선도 사서에 의하면 그 이전인 기원전 238년에 고열가 단군을 끝으로 나라 문을 닫습니다.

나라의 중심이 사라지니 사람들도 흩어지겠죠. 그래서 각 처로 흩어지게 되지만, 이들은 단군조선의 후예이고 천손족이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신라로 정착 하게 된 6부 세력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이 6부는 경주 내에 각각 산을 근거지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들이 천손강림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 오릉과 그 시대배경을 설명하는 정경희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모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집중을 하면서 듣고 있었다. 정경희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런데 기원전 70년경, 단군조선 계통 - 단군조선이 나라이름을 북부여로 바꾸었는데 - 이 북부여 계통의 여성사제이죠, 신녀집단이 경주지역으로 유입 됩니다. 이미 6부가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신녀집단은 6부 중 소벌도리 가문과 혼인동맹을 통해서 세력을 형성합니다. 이 신녀집단의 우두머리가 파소 또는 파사소 신녀로 바로 박혁거세의 어머니입니다."

 

신라는 사상의 중심을 단군조선에 두었었다. 선도가 나라의 중심이었던 단군조선에서 왕은 통치자이기 이전에 당대 최고의 수행자였고,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스승이었다. 그래서 단군조선에서는 '단군'의 지위가 반드시 아들에게 세습 되지 않았었고, 이런 전통을 신라도 이어받아 박,석,김 세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이 되었다. 물론,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선도 전통이 흐려지면서 이런 문화가 사라지게 된다.

삼국유사에서 기록하는 박혁거세 관련 전승을 보면 번개 빛, 몸에서 나는 빛, 청명해진 해와 달, 밝다는 뜻의 '밝'을 성으로 삼아 '朴'으로 성을 표기한 점, 이름인 '혁거세(赫居世)' 역시 밝음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인 점 등 박혁거세에 대한 모든 수식어가 '빛'과 관련 있다. 이는 박혁거세의 수행자적인 면모를 보여줌과 동시에 당시 신라의 시대이념으로 선도문화에 대한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단군조선으로 부터 이어져 온 선도의 정통성, 그리고 박혁거세가 지닌 수행자적 면모. 이것이 북부여에서 이주한 세력인 파소신녀의 아들이었던 박혁거세가 6부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이다.

▲ 설명을 들으며 환하게 웃는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

 

한참 눈을 빛내며 설명을 듣던 한 회원이 이야기 하였다.

"제가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보니 백제, 고구려, 신라 중 유독 신라에서 불교가 늦게 받아들여지고 또, 그 과정에서 이차돈이 죽는 등 진통이 있었는데 이런 신라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군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을 천천히 박혁거세의 전설이 서려 있는 오릉을 둘러보았다. 조선시대 왕릉의 봉분에 비해 엄청나게 큰 박씨 왕들의 왕릉을 보고 있자니, 왠지 이곳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부인의 탄생지라고 알려진 알영정을 향해 이동하였다.

 

# 알영정(閼英井)과 숭덕전(崇德殿)

▲ 알영정으로 들어가는 입구. 천손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알영정의 유래에 대해 살펴 보고 있다.

 

오릉을 끼고 몇 미터 걸었을까. 알영정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대나무 숲을 지나니 곧 작은 전각이 나타났다. '신라시조왕비 탄강지'라는 제목 아래 알영정의 유래가 쓰여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알영정은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간 노인이 큰 용을 보았는데 그 용의 옆구리에서 귀녀가 탄생하여 거두어 길렀더니 용모가 아름답고 총명할뿐더러 매우 지혜로워 혁거세 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라고 한다. 왕비가 태어났던 우물이라..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간 기자의 앞에 길죽한 돌 3덩어리만 놓여 있었다.

▲ 알영정 유적. 지금은 덮개돌로 덮어 놓았다.

 

당황한 기자의 마음을 읽은 듯, 정경희 교수는 얼른 마이크를 잡고 알영정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알영정은 우물이라고 알려졌지만, 일제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이 일대에 언덕이 있었다고만 하지, 우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마도 기원전 1세기에도 우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알영정인데 우물이 아니라니..? 정경희 교수는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신라시대 여성 사제들은 '알', '아리' , 남성 사제들은 '아도' 와 같이 '알'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았습니다. 또 박혁거세, 김수로 등 건국시조나 뛰어난 영웅들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많지요. 이는 우주 근원의 생명력에서 나오는 '천지인(天地人)'의 우리말 표현인 '얼울알'을 의미합니다. '천'은 '얼', '지'는 '울', '인'은 '알'을 말하는 것이지요. '알'은 실제 달걀을 말하는 알이 아니라 우주 근원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이며, 건국시조나 영웅들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알'계통의 이름은 이들이 우주의 생명력을 받은 빼어난 인물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시간이 흐르며 선도가 중심을 잃고 변질하면서 단순 난생(卵生)설화로 바뀐 것이지요."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는 사람들이 늘어나 있었다. 자녀와 함께 온 부모, 관광객 등이 함께 선도문화유적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새로운 사실에 대하여 놀라워했다.

 

"경주에 우물 '井'자를 쓴 유적이 몇 군데 있지요. 대표적인 곳이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하는 '나정'이고, 이 알영정 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정을 답사하면서 이야기하겠지만, 우물 井의 표상은 '얼'의 한자식 표기입니다. 이 일대는 원래 파소신녀세력과 혼인동맹을 맺었던 소벌도리 가문의 '서청전(壻請田)'이라고 불리는 신성지역 즉, 소도터였습니다. 아마 알영은 이 소벌도리 가문의 여성사제였을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알영부인도 '성인(聖人)'이었다고 하지요. 알영부인과 박혁거세왕은 이성(二聖)이라 불리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자신을 경주 토박이라고 소개한 이동호(41) 회원은 "어렸을 때 이곳의 덮개돌은 굉장히 깨끗한 새 것"이었다며, "덮개돌 아래에는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 신라건국시조 박혁거세의 시조사당, 숭덕전 전경. 세종의 왕명으로 지어진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중건하였다.

 

알영정에서 조금 걸어나오니 박혁거세의 시조사당인 숭덕전이 있었다. 지금도 박씨 문중에서 춘분과 추분에 제향을 봉행하는 이곳은 신라 초기 국가 제사의 중심으로 '밝음', '밝'왕인 박혁거세를 통해 하늘과 통할 수 있는 장소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5세기 소지왕(?~500, 신라 제21대 왕)이 지금의 나정에 신궁을 지으면서 모든 국가 제사의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고 박혁거세의 사당은 박씨의 종묘 정도로 위상이 격하되어 버린다. 이후 사라졌다가 조선 세종 조에 삼국의 시조사당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려 다시 세워지게 된다. 내부를 살펴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 홍살문과 숭덕전. 홍살문이 있었던 자리가 옛 담엄사(曇嚴寺)의 당간지주 자리이다.

 

이곳 숭덕전 일대는 서청전이라 불리는 소도터였었다. 선도에서 소도는 하늘과의 통로를 의미하는 신성지역으로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다수 존재하였으나,  불교가 들어오면서 신성지역이었던 소도터에는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곳 서청전(壻請田)에도 담엄사(曇嚴寺)라는 사찰이 자리 잡았다가 조선조에 폐사되었고 당간지주 역시 유교식의 홍살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천손문화연구회의 경주선도문화탐방 첫번째 답사지인 오릉과 알영정, 숭덕전은 신라 건국의 역사부터 지금까지 2천여 년을 지나면서 선도에서 불교, 불교에서 유교로 사상의 변화를 거친 장소였다.

✔ 천손문화연구회 경주 선도문화탐방 두번째 기획기사 ::
[2편] 신라의 불교 수용과 한국 선도의 쇠락
 - 천경림 흥륜사, 무열왕릉, 서악리 고분군

글/사진. 조채영 기자 chaengi@brainworld.com

 

 

기사입력 2007/04/13 [16:51]

[단독]박혁거세 왕능은 중국 양주에,고구려 시조와는 형제간이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7/04/08 [14:26]

[본지 단독]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왕능-경주도읍지는 일제가 조작했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7.01.23뉴스메이커 709호

[화제]박혁거세는 인도인이 키웠다? - 주간경향 (khan.co.kr)

신화에 나타나는 우리말과 타밀어의 유사성, 힌두교문화의 흔적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나정. <경향신문>

 

지난 10월 말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구간에서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BC69~AD 4)를 키웠던 진한 6촌장의 사로육촌 중 고허촌의 유적이 대량 발굴되면서 이들의 정체 규명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알에서 태어나 왕궁에서 키워지다가 자력으로 만주지역에 고구려를 세우고,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은 알에서 태어난 지 반나절 만에 성인이 돼 보름 지나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모든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 사로육촌의 6촌장 손에 13년간 키워지고 나서 신라의 초대왕으로 추대된다.

 

진한 6촌장 인도 타밀 출신 추정

필자는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 및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설화 속에 언어적 유사성 및 해양교류 등을 추적한 결과, 이들이 인도 남부의 타밀 출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혁거세의 설화에 나오는 주요 명칭들이 당시 타밀어와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윷놀이와 제기 등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도 타밀어 명칭과 놀이 형태가 완전히 똑같다. 박혁거세의 대부 격인 6촌장이 타밀 출신이라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도 남부 및 스리랑카 북부 출신으로 토론토에 거주하는 20여 만 명의 타밀인들 가운데 타밀인협회 및 여성단체 관계자, 힌두교성직자, 교수, 교사 등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취재하고 타밀어 사전 및 역사서 등을 참조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타밀어에서 ‘자력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운 좋은 왕’ 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왕’을 지칭하여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라고 불렀는데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6촌장들이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박처럼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은 ‘박(朴)’, “세상을 밝게 한다”하여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는 한자어 작명을 한 것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박’은 당시 타밀어와 우리말이 아주 똑같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수라이카이(Suraikai)라고 불리고 있다.

 

또 박혁거세에게 붙인 ‘왕’의 명칭 거서간(居西干)도 당시 타밀어 ‘거사간(kosagan)’과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울러 6촌장들의 이름 또한 당시 타밀인들의 이름과 유사하다. 박혁거세 알을 처음으로 발견한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는 타밀어로 ‘훌륭한 지도자(Good Leader)’를 뜻하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거의 같다. 알천 양산촌의 알평은 아리야판(Aryappan)과, 자산 진지촌의 지백호는 치빠이코(Chippaiko)와,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는 구레마(Kurema)와, 금산 가리촌의 지타는 치타(Cheetha)와,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은 호친(Hochin)과 각각 일치한다.

 

이들의 출신에 대해 학계에선 “이곳(서라벌)에 오래 전부터 조선의 유민들이 내려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는 여러 역사서의 내용과 유물 등을 분석하여 박혁거세 및 6촌장 모두를 북방유목민출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박혁거세와 6촌 주민들이 북방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서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라고만 전해오는 6촌장 만큼은 허왕후나 석탈해와 마찬가지로 당시 막강한 해상력으로 아시아 전체를 누비고 다니던 인도의 타밀 출신으로 추정된다.

 

둘째, 박혁거세의 탄생지 근처에 있는 우물 ‘나정’은 타밀어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을 뜻하는 ‘나중(nazung)’과 거의 일치한다. 타밀어의 나주쿠(nazukku)는 “땅을 파헤쳐 이랑이나 도랑을 만들다”(=make a shallow furrow)라는 뜻의 능동형 동사인데 그 수동형동사 ‘나중구(nazungku)’는 ‘이랑이나 도랑이 만들어지다’ (=be ploughed with shallow furrows)라는 뜻이다. 여기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이라는 뜻의 명사 ‘나중(nazung)’이 바로 박혁거세의 우물 ‘나정’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8월 문화재청은 깊은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든 경주 시내 우물 나정을 발굴한 성과를 공개하는 현장 설명회를 가졌다. 발굴팀은 현장 조사에서 확인된 나정의 정중앙 8각형 건물지(한 변 8m, 지름 약 20m) 주변에서 이 8각형 건물지보다 앞서 축조되었음이 분명한 도랑, 즉 구거 같은 대형 구상 유적을 확인했다. 이로써 박혁거세가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역사상 존재했던 인물로 자리매김된 것이라고 문화재청측은 설명했다.

인도 ‘공화국의 날’ 에 수도 뉴델리에서 낙타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이는 병사들. <경향신문>

 

알영 부인 이름도 타밀이름과 유사

 

셋째, 박혁거세의 또 다른 이름인 ‘불구내’는 현재 타밀 나두주(州) 땅에 있던 당시 타밀인들의 촐라 왕국 바닷가 마을 ‘부르구나이(Purugunai)’와 거의 일치한다. 필자는 신라 4대 왕 석탈해의 고향이 동서양 무역으로 크게 흥했던 고대 국제도시 나가파티남(Nagapattinam)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도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부르구나이가 있다. 박혁거세의 후견인 6촌장들이 이곳을 출발, 동아시아를 향해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신들의 고향 이름을 박혁거세의 별명으로 붙여 막강한 영향력의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부르구나이는 현재 벨란간니(Velankanni)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가톨릭 교회 ‘안네 벨란간니(Annai Velankanni)’가 들어서서 명소가 됐다.

 

넷째, 고구려의 주몽이나 가야의 김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나지만 혁거세의 알이 박에 견주어졌다는 점이 다르다. 박은 우리말과 당시 타밀어가 그 발음과 뜻에서 똑같다. 박은 현대 타밀어로는 수라이라이(Suraikai)라고 불린다. 박은 인도나 아프리카 등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인도에서 건너온 6촌장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 필수품 중 하나인 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타밀인들은 일년내내 무더운 날씨를 견디려고 박을 파낸 표주박 등으로 만든 물통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목을 축이곤 했다. 이 물통은 타밀어로 단니 쿠담(Thaneer Kudam)이라고 불리며 호리병박으로 만든 작은 물통은 수라이 쿠담(Surai Kudam), 호박으로 만든 큰 물통은 푸사니 쿠담(Pusani Kudam)이라고 칭한다.

 

다섯째, 신라 이전의 나라 이름인 ‘서나벌’은 당시 산스크리트어 및 고대 타밀어로 황금을 뜻하는 ‘서나(Sona)’와, 벌판(field)을 의미하는 ‘벌’ 또는 ‘펄(Pol)’이 합쳐져 황금밭(Gold Fiel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말에서 ‘벌’의 옛말이나 거센말은 ‘펄’인데 고대 타밀어와 마찬가지로 “매우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아울러 ‘서라벌’도 ‘아름다운(nice)’을 뜻하는 ‘서라(Sora)’가 ‘벌(Pol)’과 합쳐져 ‘아름다운 들판’을 뜻해 새 나라의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입증하는 기원전후의 우물지.

 

민속놀이 명칭도 거의 비슷

 

여섯째, 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BC 53 ~?)부인은 아리영이라고도 불리는 데 타밀 여성이름 아리얌(Ariyam)과 거의 일치한다. 아리얌은 아리야말라(Ariyamala)의 줄인 이름으로 기원전 타밀 왕국역사에 나오는 캇타바라얀(Kaththabarayan)왕의 부인 이름인 데 이를 신라 초대 왕비 이름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계룡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알영부인이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이 생겼다는 내용도 인도 힌두교 신화에서 지혜와 총명의 여신(Goddess of Learning and Wisdom) 사라스와티(Saraswati)가 백조(swan)의 부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화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결국 알영부인은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릴 정도로 추앙받았다는 것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 타밀인들이 사라스와티를 숭배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힌두교와 관련된 것들이 우리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김수로왕의 별칭)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는 데 이들 모두 힌두교와 관련 있다. 힌두교의 주요신 시바(Shiva), 부인 파르바티(Parvati), 두 아들 가네쉬(Ganesh)와 무루간(Murugan)을 각각 고대 타밀어로 ‘이비가지(Ibigaji)’ ‘정견(Chongyon)’ ‘뇌질주일(Noejil Juil)’ ‘뇌질청예(Nojil Chongye)’라고 불렀다. 이 구절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펴낸 동국여지승람의 증보 개정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곱째, 박혁거세왕은 재임 17년(기원전 40년)에 알영부인을 대동, 6부를 순시하며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고 전하고 있다. 즉, 삼과 누에로부터 얻은 실로 길쌈해서 삼베옷과 비단옷 등을 해입었고 벼농사를 비롯한 곡식생산에 주력했다는 이야기다. 또 제3대 유리왕은 추석 때 길쌈놀이를 실시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우리말의 비단, 삼, 길쌈, 벼, 풀 등은 고대 타밀어와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경악할 정도로 너무나 똑같은 농경사회의 주요 명칭들을 다음의 비교표로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새해 첫날 우리가 즐기는 윷놀이, 제기놀이, 쥐불놀이, 팽이놀이 등 민속놀이도 당시 타밀어로 각각 ‘윷노리(Yuddh, Yuth Nori)’ ‘제기노리(Jegi Nori)’ ‘추불 노리(Chupul Nori)’ ‘ 팡이 노리(Pamgi Nori)’로 불리며 그 형태도 완전히 똑같다. ‘놀이’는 고대 타밀어로 ‘노리(Noori), 또는 노루(Nooru)’로 불렸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빌햐야들(Vilaiyattu)’로 불린다. 다음의 비교표를 보면 타밀인들이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바로 이웃 사람으로 느껴진다.

 

고인돌 문화 인도에서도 발견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설화가 실린 삼국유사.

 

현대 타밀어에서도 우리말과 똑같은 말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 “난(나), 니(니)””니, 인거 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바나깜(반갑다)” 난, 서울꾸 완담(난, 서울로 왔다)””모땅(몽땅)””빨(이빨),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등 거의 똑같은 단어와 어구들이 적지 않다.

 

이는 박혁거세 부부의 대부격인 6촌장들이 인도 타밀의 것을 한반도에 소개한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그 이전에 중국대륙을 통해 벼나 보리농사가 이미 도입됐다고 하더라도 농사 관련용어 및 민속놀이 등은 타밀출신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우리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타밀인들이 한반도까지 도달했던 또 다른 증거는 박혁거세와 석탈해 등 신라 초기의 왕들의 난생설과 경주와 포항 등 신라지역에서 대거 발견되는 고인돌 등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고고학계의 원로인 한양대의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벼농사, 난생신화,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 등의 지리적 분포가 인도-동남아시아-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인도 문화의 영향을 시사했다. 김교수는 또 “신라주민은 진한-신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 중에 중국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고조선의 유민들, 그리고 고구려에게 멸망한 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으로 구성돼 있다”고 지적했는데 필자는 토착 농경인들을 이끌던 6촌장들이 타밀출신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들이 경주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인도 남부 해안지대의 타밀인들은 기원전 수세기부터 서쪽으론 로마제국까지, 동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활발하게 진출하다가 대만 북쪽으로 흐르는 흑조 난류를 타고 북상, 급기야 한반도까지 도달한 것이다. 타밀인들은 사로 6촌 가운데 동해안과 접한 금산가리촌에 도착한 뒤 내륙으로 들어가 경주의 사로 6촌을 개척,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타가 통치한 영일만 부근 금산가리촌은 현재 동해안과 접한 경주시 감포읍과 양남면, 양북면 등 3개 지역 모두를 포함했다.

 

또, 필자가 인도 타밀 출신으로 간주하는 신라 제4대왕 석탈해의 알이 담긴 궤짝도 동해를 표류하다가 동해안의 아진포에 당도하는데 이 곳이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아진포라고 석씨전국대종회가 밝히고 있어 이래 저래 금산가리촌은 당시 인도 타밀인들의 도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경주 덕천리 유적 발굴작업에서 출토된 목관묘 11기와 청동기 항아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문토기, 그리고 매장된 사람의 지위가 높음을 알려주는 오리모양 토기 11개와 말과 호랑이 모양의 허리띠 고리 등이 당시 인도 타밀의 역사적 유물들과 비교, 추적해 정확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6촌장들은 물론 박혁거세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 제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 육촌을 육부로 개편하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6촌의 각 촌장들은 자동적으로 각 성의 시조가 된다. 소벌도리는 최(崔)씨의, 알평은 경주 이(李)씨의, 구례마는 손(孫)씨의, 지백호는 정(鄭)씨의, 지타는 배(裵)씨의, 호진은 설(薛)씨의 조상이 된다.

김정남〈타밀학회장·캐나다통신원〉

 

 

 

송고시간2021-04-27 10:28

동궁과 월지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 너비 11m 석교 터도 발견

경주동부사적지대 발굴조사 지역 주변 현황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발천(撥川)은 경북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월성 북쪽과 계림을 지나 남천으로 흐르는 하천을 가리킨다.

이 하천의 이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유래됐다. 삼국유사 권1 기이 1편에 보면 '사량리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아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 그 천의 이름을 발천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문화재청은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인 경주동부사적지대(발천) 수로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조사에서 679년(문무왕 19년)에 만들어진 동궁과 월지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고대 발천 수로가 확인됐다고 27일 밝혔다.

신라왕경핵심유적복원·정비사업추진단에 따르면 유로 방향은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진행하며, 최대길이는 150m 정도로 확인됐다. 수로는 5.2m 정도의 일정한 너비를 가진 직선 형태이나 중앙부는 최대 너비 15m 정도의 부채꼴이었다.

새로 확인된 수로는 오랫동안 알려져 왔던 수로와는 다른 것으로, 이번 발굴을 통해 삼국 시대에는 넓었던 하천 폭을 통일신라에 들어서면서 좁혀 사용했고, 고려 전기까지 사용하다 폐기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석교 터와 도로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아울러 발굴조사에서는 760년(경덕왕 19년) 축조된 경주 춘양교 터와 월정교 터보다 제작 시기가 훨씬 앞서는 것으로 추정되는 7세기 후반 석교 터도 발견했다.

석교 터는 하천의 너비가 5.2m인 것에 비해 다리 너비가 교각을 기준으로 11m가 넘는다. 잘 다듬어진 장대석을 이용해 양쪽 교대를 만들고 하부에는 교각과 교각받침석 7개가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됐다. 이외에 난간석, 팔각기둥, 사각기둥과 청판석 등의 석재가 상부에서 흩어진 채로 확인됐다.

또 석교지 북쪽의 도로에는 초석(礎石)과 적심석(積心石, 돌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돌)이 확인돼 기와집 문의 흔적(門址·문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문화재청은 "특히 '신문왕 3년(683) 왕궁의 북문에서 일길찬(신라 시대 17관등 가운데 7번째 등급) 김흠운의 어린 딸을 왕비로 정하고 성대하게 맞이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아 이번 도로 유구의 발굴은 신라왕궁 북문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석교 터 내부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도로 서쪽 경계부는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암거식(暗渠式, 물을 대거나 빼기 위해 땅속이나 구조물 밑으로 낸 도랑) 배수로를 설치했으며, 통일신라 석교 터와 연결되는 도로는 너비 20m 정도로, 잔자갈이 깔린 도로면 위에서는 수레바퀴 흔적도 확인됐다.

문화재청·경상북도·경주시는 발굴조사 성과 공유를 위해 오는 29일 오전 10시에 발천 유적 조사 현장을 공개한다. 또 30일까지 이틀간 '발천, 신라왕경의 옛물길'을 주제로 발천 복원정비 방안을 논의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현장공개와 학술대회는 문화재청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볼 수 있다.

dklim@yna.co.kr

 

 

입력 2021. 4. 27. 14:35수정 2021. 4. 27. 16:48

알영부인..계룡 나타나 낳은 여자아이 씻긴 곳
동궁월지~계림 하천 '발천', 돌다리터, 도로 확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 발굴조사, 29~30일 공개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삼국유사’에 설화처럼 기록돼 있던 ‘신라 시조’ 박혁거세 부인과 관련된 유적이 경주 동부사적지대에서 발견돼 2000년 전 어떤 일, 어떤 모습이었을지에 관한 토론과 연구가 본격화했다.

동궁월지에서 출발한 ‘발천’이 계림을 거쳐 남천과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월정교 인근. 발천은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이 태어나자 몸을 씻겼는데, 닭부리 같은 것이 제거(撥)됐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나아가 친중·친신라 사대사관으로 쓰인 ‘삼국사기’는 교과서처럼 믿으면서 왕실과 귀족사회, 민중 속의 숱한 이야기를 집대성한 삼국유사를 ‘야사’로 치부하며 평가절하하는 것을 반성하는 모습도 나타날지 주목된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과 경상북도(도지사 이철우), 경주시(시장 주낙영)는 신라왕경 핵심 유적 복원 정비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인 경주동부사적지대(발천) 수로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작업을 벌인 결과, 신라 첫 번째 왕의 왕비 ‘알영’과 관련된 ‘발천’이라는 하천, 수로, 돌다리 터(석교지), ‘석교지’ 연결도로와 수레바퀴 자취 등의 흔적을 발굴했다고 27일 밝혔다.

 

▶2000년 전 얘기지만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발천은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월성 북쪽과 계림을 지나 남천에 흐르는 하천을 가리키는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유래됐다.

 

발천에 놓인 돌다리 터.

 

삼국유사 권1, ‘기이 1편’에 ‘사량리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아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 그 천의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발(撥)’자는 10여가지의 뜻이 있는데, ‘다스리다’ ‘휘다’가 주로 쓰이며, 이번엔 ‘제거하다’의 의미로 쓰였다.

물론 귀한 인물의 탄생을 상징하므로 ‘다스리다’는 뜻을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발천이 동궁월지 근처에서 출발해 유려한 곡선을 이루다가 남천과 합류 지점에서 크게 꺾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휘다’는 의미라고 봐도 일리 없지는 않다.

동굴월지에서 계림을 거쳐 교촌마을에 이르는 길가에 실개천이 흐르는데, 지금까지는 월성(신라왕궁)의 해자 흔적 같기도 하고, 과거에는 컸을 달천의 축소판 같기도 했었다.

동궁과 월지 앞 습지.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 오는 29일 오전 10시에 발천 유적에 대한 조사 현장을 공개한다.

또한 29일 오후 1시부터 30일까지 이틀에 걸쳐 발천 복원 정비 방안을 논의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현장 공개와 학술대회는 문화재청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온라인 시청이 가능하다.

이번 발굴조사의 새로운 성과로는 무엇보다 679년(문무왕 19년)에 만들어진 ‘경주 동궁, 월지’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고대 발천 수로가 확인됐다는 점이다.

새로 확인된 수로는 오랫동안 알려져왔던 수로와는 다른 것으로, 이번 발굴을 통해 삼국시대에는 넓었던 하천 폭을 통일신라에 좁혀서 사용했던 양상과 고려 전기까지 사용되던 하천이 이후 폐기되는 시점이 확인됐다.

 

두 번째 성과로는 760년(경덕왕 19년) 축조된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보다 제작 시기가 훨씬 앞서는 것으로 추정되는 7세기 후반 ‘석교지’를 발견한 것이다.

석교지는 너비 5.2m 정도의 조그만 하천에 비해 다리 너비가 교각을 기준으로 11m가 넘는 큰 규모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長臺石·길게 다듬어 만든 돌)을 이용해 양쪽 교대를 만들고 하부에는 교각과 교각받침석 7개가 거의 같은 간격으로 배치된 형태다. 이외에 난간석·팔각기둥·사각기둥과 청판석 등의 석재가 상부에서 흩어진 채 확인됐다.

또 석교지 남쪽과 북쪽으로 연결된 도로 흔적도 찾았다. 석교지 북쪽의 도로에는 초석(礎石)과 적심석(積心石·돌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돌)이 확인돼 기와집의 문지(門址·문이 있던 자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문왕 3년(683년) 왕궁의 북문에서 일길찬(17관등 가운데 7번째 등급으로, 육두품 이상이 오를 수 있음) 김흠운(金欽運)의 어린 딸을 왕비로 정하고 성대하게 맞이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미뤄보아 이번 도로유구의 발굴은 신라왕궁 북문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계림.

 

도로 서쪽 경계부는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암거식(물을 대거나 빼기 위해 땅속이나 구조물 밑으로 낸 도랑) 배수로를 설치했으며, 통일신라 석교지와 연결되는 도로는 너비 20m 정도로, 잔자갈이 깔린 도로면 위에서는 수레바퀴 흔적도 확인됐다.

한편 경북문화재단 문화재연구원(원장 전규영)은 29일과 30일, 양 일에 걸쳐 라한셀렉트 경주에서 ‘발천, 신라왕경의 옛물길’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발천의 발굴조사 현황과 성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앞으로의 복원 정비를 위한 방향과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다.

 

첫날인 29일에는 신라왕경과 왕궁, 발천을 주제로 한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발천 발굴조사 성과, 신라왕경의 홍수와 치수 등 4건의 주제발표가 진행된다. 다음날인 30일에는 신라왕경의 배수 체계를 통해 본 발천의 의의, 중국 수당(隨唐) 시기 장안성의 수리 시스템 연구 개술 등 6건의 주제발표와 종합토론이 이어진다. 문화재청 유튜브로 발굴 현장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문화재청 신라왕경사업추진단은 경주시와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과 함께 지난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온라인 발굴 현장 공개(경주 황남동 120-2호분)를 진행한 바 있다. 정부혁신과 적극행정의 하나인 이번 발천 발굴 현장 공개와 학술대회 역시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국민을 위해 온라인(유튜브)을 통해 볼 수 있게 기획됐으며, 앞으로도 신라왕경사업추진단은 복원 정비사업의 추진 과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널리 알릴 예정이다.

abc@heraldcorp.com

 

 

 

20.02.07 11:36l최종 업데이트 20.02.07 11:42l

경주 반월성에 얽힌 탈해왕의 탄생 설화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삼국유사 발자취를 따라서] 경주 석탈해왕 탄강유허, 탈해왕릉

 

경주 도심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에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리원자력발전소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발전소이다. 중수형 원자로를 설치한 이곳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 신라 제4대 탈해왕의 탄생 설화가 스며있는 곳이 있다.

석탈해왕 탄강유허비가 없었더라면 그냥 멀리서 발전소 겉모습만 보면서 그냥 지나쳐야 한다. 탄강유허비 덕분에 최근접 거리에서 월성원자력발전소를 구경할 수 있다. 월성원자력발전소 정문으로 들어가다 보면 왼편에 주차장이 보인다. 공원처럼 잘 꾸며진 주차장 한편에 고풍스러운 비각이 한 채 세워져 있다. 여기가 바로 석탈해왕 탄강유허비가 있는 곳이다.

 
  경주 양남면 나아리에 있는 석탈해왕 탄강유허 모습
ⓒ 한정환 관련사진보기

   

 

석탈해왕 탄생 설화

왜국에서 동북으로 400여 km 떨어진 용성국 왕비가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7년 뒤에 큰 알을 하나 낳았다. 이는 상스럽지 못한 일이라 하여 왕이 궤 속에 알과 칠보(七寶)를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다.

왕은 궤를 띄워 보내면서 인연 있는 땅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고 한다. 궤를 실은 배를 붉은 용이 나타나 호위하며, 그 궤가 신라 땅에 와닿자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이를 발견한다.

<삼국유사> 기이편 기록에 의하면 신라 동하서지촌 아진포라 기록되어 있는 곳에 아진의선이란 노파가 살고 있었다. 노파는 매일 멀리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살았는데, 하루는 한 척의 배 위에 수많은 까치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다. 노파는 이상한 배가 포구 앞바다에 있는 것을 보고 배 위로 올라가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배 위를 살피던 중 갑판 위에 놓여있는 큰 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궁금하여 열어보니 상자 안에는 알에서 깨어난 남자아이와 종들이 있었고, 수많은 금은보화가 쌓여 있었다. 이 사내아이를 데려다 키우면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 한다.

노파가 발견하여 데려올 때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다. 그래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 자를 떼서 석(昔)으로 성을 삼았다고 전해진다. 탈해는 62세 때 왕위에 올랐다. 탈해라는 이름은 상자를 열 때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하여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 한다.

유허에는 비각과 비석이 있는데 조선 헌종 11년(1845) 이종상이 비문을 지었으며, 상량문은 1845년 한문건이 썼고, 비각기는 조선 헌종 13년(1847) 이시우가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 아진포'가 궤가 닿은 바닷가이다. 지금의 유허비가 세워진 곳이다.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석탈해왕 탄강유허)
주차료 및 입장료 : 없음
 

 
  탈해가 호공의 집을 모략을 써 빼앗았다는 경주 반월성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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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 거주할 집을 마련하다

신라 땅 아진포에 도착한 탈해는 거주할 집을 찾기 위해 토함산에 오른다. 토함산에 올라 7일 동안 서라벌을 관찰하다 초승달 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한다. 풍수지리적으로 지세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난감해 하며 고민을 하던 탈해는 모략을 써 타짜 같은 지혜를 발휘한다. 그곳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 이 집이 원래 자기 조상의 집터라고 주장한다. 탈해의 강력한 주장에 황당해하던 호공은 이를 관청에 신고한다. 그러나 이게 패착이었다.

신고를 받은 관리가 직접 현장에 와서 "무슨 근거로 너희 집이라고 우기느냐?"라고 물었다. 탈해는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에게 "이 땅은 아주 오래전부터 살던 곳으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대장장이였으니, 집 주변을 파 보면 그 증거물이 분명히 나올 것이오"라고 허위 진술하여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탈해가 자기 집터라고 우겨 뺏는 집터가 바로 지금의 경주 반월성이다.

요즘 같으면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고, 골목마다 주차한 차량들의 블랙박스가 있어 이런 모략을 사용할 수가 없다. 금방 들통나 사기죄로 교도소로 직행해야 할 탈해였다. 그러나 이런 탈해의 행동을 지켜보던 신라 제2대 남해왕이 탈해의 지혜로움을 높이 사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이 남자가 바로 탈해이다.
 

 
  경주 북쪽 소금강산 아래에 있는 경주 탈해왕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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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릉

신라왕은 박, 석, 김 세 성씨이다. 그중 석씨 왕 가운데 최초가 제4대 탈해왕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탈해왕릉은 사적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4.5m, 지름 14.3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 무덤이다.

신라에서 석씨 성을 가진 여덟 왕 중에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은 '탈해왕릉' 뿐이다. 왕릉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아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삼국사기에는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수장하였다가 뼈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기록이 현재의 탈해왕릉 위치와 부합된다.

신라 제2대 남해왕이 죽은 후 탈해에게 먼저 임금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더 많은 유리왕이 임금이 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신라 제4대 임금으로 탈해왕이 즉위하였다.
 

 
  경주 탈해왕릉 동편에 있는 숭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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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릉 동편에는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숭신전이 있다. 숭신전은 경주 반월성에 있던 민가를 철거하면서 198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왔다. 서북쪽에는 경주 표암이 위치해 있다. 경주 표암은 신라 6촌 가운데 근본이 되는 알천양산촌의 시조 이알평공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하는 곳이다.

탈해왕릉은 8년 전만 하더라도 경주 시민들의 화장터가 있었던 소금강산 아래 위치해 있었다.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발길도 뜸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주차장과 현대식 화장실을 설치하고, 왕릉의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산책로가 만들어지자, 요즘은 힐링 숲으로 널리 알려져 주민들과 관광객의 발길이 부쩍 잦아진 곳이다.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북 경주시 윗동천안길 93
입장료 및 주차료 : 무료

* 참고문헌
- <삼국유사>(최광식, 박대재 옮김)
- <역주 삼국사기 2>(권덕영외 4인) 

 

 

송고시간2017-10-15 11:55

김씨가 550여년간 다스린 신라…후대에 박씨 왕 나온 이유는 | 연합뉴스 (yna.co.kr)

 

이종서 교수 "초기엔 성씨가 혈족 구별 기능…말기엔 성씨집단 해체돼"

경주 배동 삼릉.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성의 왕 3명이 묻힌 무덤이라고 전한다.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 초기 왕은 대부분 박씨(朴氏)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박씨는 약 230년 동안 아달라 이사금(재위 154∼184)까지 7명이 신라를 통치했다.

박씨 왕조에 균열을 가한 성씨는 석씨(昔氏)였다. 탈해 이사금(재위 57∼80)이 제4대 왕에 올랐고, 아달라 이사금 이후 7명의 석씨 왕이 배출됐다.

박씨와 석씨가 왕위를 양분하던 신라에 새롭게 등장한 성씨는 김씨(金氏)였다. 미추 이사금(재위 262∼284)이 김씨로는 처음 제13대 왕이 됐고, '마립간'이란 왕호를 최초로 쓴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부터는 김씨만 왕좌를 차지했다.

김씨 왕조는 통일의 과업을 달성한 문무왕(재위 661∼681)을 거쳐 효공왕(재위 897∼912)까지 550여 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 신덕왕(재위 912∼917)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다시 박씨에게 넘어갔다. 공고했던 김씨 왕조는 왜 갑자기 무너진 것일까.

이종서 울산대 교수는 학술지 '역사와 현실' 최근호에 실은 논문 '신라 진골 성씨의 성립과 기능 변화'에서 "한때는 성씨가 하나의 혈족집단을 표현하는 역할을 했지만, 후대에는 점차 성씨집단의 개념이 약화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라에서 최초로 성씨를 칭한 인물은 진흥왕(재위 540∼576)이라고 주장했다. 이전까지는 성(姓)에 대한 관념이 없었는데, 진흥왕이 처음으로 '김진흥'(金眞興)이라는 이름을 대외 관계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에는 초창기 혁거세, 알지, 탈해를 시조로 숭앙하는 귀족 혈족집단이 있었을 것"이라며 "진흥왕이 김씨를 칭하면서 혁거세를 추종하는 집단은 박씨, 탈해를 섬기는 집단은 석씨를 성으로 채택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김씨는 세 성씨 가운데 가장 강한 권력을 갖게 됐고, 혈족집단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하지만 왕권이 강화하면서 임금은 혈족집단에 의존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 결과 왕이 특정인에게 성을 하사하기도 했다. 가야계인 김유신이 김씨 성을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교수는 "후대에는 김씨가 단일한 성씨집단이 아니라 분열된 상태였다"며 "이러한 사실은 9세기 중반에 김씨인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이 서로 살육하며 왕위를 다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9세기 초반의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은 혁거세를 모신 시조묘에 제사했다"며 "성씨별 분립 의식이 소멸해 혁거세가 김씨를 포함한 진골 귀족 전체의 선조로 숭앙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김씨 사이의 동질의식이 희박해지자 박씨도 왕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박씨인 신덕왕은 김씨인 효공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추대 형태로 왕이 됐다. 평화로운 왕위 이양이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효공왕의 왕비가 박씨였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성씨집단이 해체하면서 결국 개인을 기준으로 한 혈연의식이 강화됐을 것"이라며 "박씨 국왕의 재등장은 김씨와 박씨로 구성된 진골이 혈연을 통합적으로 인식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신라 말기에는 부계와 모계를 모두 따르는 '양측적 혈연의식'이 확대됐고, 이는 '양측적 친속조직'으로 발전했다고 덧붙였다. 즉 진골이라는 귀족 집단이 중요했을 뿐, 성씨는 더 이상 특정 세력을 가르는 기준으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 후기에는 혈연의 친소만 따졌고, 성씨의 같고 다름은 신경 쓰지 않았다"며 "고려 지배층에서 확인되는 양측적 친속관계의 연원은 신라 하대 진골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psh59@yna.co.kr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6-12-14 18:26

“신라왕 두개골은 새 모양” (hani.co.kr)

16일 동아시아고대학회서 발표
“태양조 숭배로 길쭉하게 변형”

김해 예안리 두개골 발굴현장.

 

“신라의 왕들은 새 머리 모양의 머리를 지녔다.” 새의 두개골과 흡사하게 인위적으로 길쭉하게 변형됐다는 얘기다.

김인희 중국중남민족대 교수(민속학)는 이런 내용을 16일 동아시아고대학회에서 발표하는 ‘두개 변형과 무의 통천의식’ 논문에서 발표한다. 김 교수가 근거로 삼은 것은 고고학 발굴 유물과 신화 자료.

천마총, 금관총, 서봉총, 황남대총, 금령총 등 신라 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왕관의 지름은 15.9~20cm. 성인 남자가 아닌 12살 남자 아이의 머리둘레에 해당한다. 이를 두고 실제 착용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학계에서는 부장용품설이 유력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지증대사 탑비(885)의 비문 “편두는 비단에서 잠을 자는 존귀한 국왕으로, 국왕은 범어의 발음을 익혀 혀를 굴리면 인도의 말이 되었다”에 나오는 ‘편두’와 더불어 신라왕이 두개골을 변형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라고 봤다. 새 머리 모양을 하고 춤을 추는 형상이 그려진 신라토우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 교수는 건국신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았다. 고구려 유화와 신라 알영의 설화를 관련된 내용이라고 재해석한 것.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의 어미 유화의 입술이 석자’라든가 ‘박혁거세의 아내가 된 알영의 입이 새의 부리와 같았다’는 것을 두개골의 변형과정에서 입이 돌출하는 현상이 신화화한 것으로 본다. 또 이것은 고주몽이나 김알지가 알에서 탄생하였다는 내용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풀이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긴 돌로 머리를 눌러두어 평평한 머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진한(辰韓)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편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두개골을 새 머리 형상으로 만든 것은 동이족의 태양조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추상적인 사고를 하기 이전의 고대인들은 태양을 새가 싣고 날아가는 형상으로 이해했다는 것. 새의 모습을 닮는다는 것은 신인합일 또는 신과 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신라왕의 두개골 변형은 제정일치 시대의 유습이었다고 해석된다.

김 교수는 이런 두개골 변형이 동이족 분포지역에서 보편적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싼동, 지앙수, 후베이, 한국, 일본 등지에서 편두로 보이는 두개골이 발굴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경남 김해 예안리에서 10구가 발굴되었다. 또 설화에서도 증거는 채집된다. <산해경> 등 고문헌을 보면 동이족으로 간주되는 치우의 머리가 소수(疏首)였다고 기술돼 있다. 여기서 소수는 두개변형을 한 머리를 일컫는다고 김 교수는 풀이한다. 산해경에 보이는 동이족 전욱 역시 <설문>과 <백서>의 해석으로 보면 머리가 기울어져 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제5의 진흥왕순수비' 감악산비 글자, 350년 만에 읽어냈다

입력 : 2019.09.24 03:16 수정 : 2019.09.24 09:59
경향신문 선임 기자
 

“광(光), 벌(伐), 인(人)…. 감악산 비석에서 몇자 읽었어요.” 얼마전 서예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대전대 서화연구소책임연구원)와 연락을 취하던 중 ‘감악산 고비 운운’하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그러면서 손 박사는 “마침 삼국시대 석비와 관련된 논문을 썼노라”면서 오는 30일 곧 게재될 학술지 논문(<한국사상과 문화> 99집)을 보내줬다. 손 박사는 논문에서 감악산비를 진흥왕순수비인 북한산·황초령·마운령비와 함께 진흥왕대(재위 540~576) 혹은 진평왕대(579~632)에 조성된 신라고비로 분류해놓았다.

기자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10여 년 전 감악산고비가 ‘제5의 진흥왕순수비’(앞서 거론한 3곳과 경남 창녕의 진흥왕척경비 포함)일 가능성을 취재했던 경험 덕분이었다. 그런데 손 박사는 “예전(1999년)에 감악산 정상에서 뜬 비석탁본에서 몇 자를 판독했다”는 말을 꺼냈다. 귀가 번쩍 뜨였다.

왜냐면 감악산비는 글자는 있었지만 판독할 수 없는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져왔기 때문이다. 조선 중후기의 문신·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은 1666년(현종 9년) 감악산 정상에서 올라 “석단 위에 비석은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됐다”(<기언> ‘하·산천 상·감악산기’)고 썼다. 1982년 동국대조사단이 학술조사를 벌였지만 어렴풋 12~13자의 자흔(글자흔적)만 확인됐다.

감악산비문에서 등장하는 벌(伐)자는 중국 감숙성 무위에서 확인된 무위의 무덤에서 출토된 ‘무위의례’ 목간의 ‘벌’자와 유사하다. 가운데 一자처럼 그은 획의 양끝이 살짝 올라가있다. 이런 서법은 6세기대 신라고비에서 흔히 나타나며 삼국시대가 끝날 무렵엔 사라진다. |손환일 박사 제공

 

당시 동국대 조사단의 보고서는 “북한산 순수비와 외관 및 규모 면에서 이상하리만치 흡사하다”면서 “그러나 당시 임창순·고병익·황원구·남도영·이병도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비문을 판독하려 했지만 글자의 흔적만 겨우 12~13자 확인했을 뿐”이라고 썼다. 이 보고서는 “삼국시대 고비는 틀림없지만 ‘기적적으로’ 새로운 자료나 판독방법이 나오지 않으면 판단은 유보하는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황해~임진강~서울 축선에 자리잡고 있는 감악산 정상에 우뚝 선 감악산비. 글자가 마멸된 몰자비로 알려져 왔다. 신라의 순수비로 추정되는 이 비석은 현재 파주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돼있다. 국가 지정문화재 승격이 시급하다.

 

이렇듯 최소한 350년 넘게 ‘몰자비’로 인식됐던 감악산 비석에서 몇 자를 읽어냈다면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하여 “어떤 글자냐”고 되물었더니 손박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석자, 즉 광(光)자와 벌(伐)자, 인(人)자를 표시한 자료를 보내주었다. 기자가 “삼국시대 글씨체가 맞냐”고 물었더니 손 박사는 “예서 기법이 가미된 삼국시대 해서체가 맞다”고 확인했다.

“감악산비의 ‘벌(伐)’자를 보면 가운데 一자 처럼 그은 획의 양끝이 살짝 올라갔는데, 이런 필법은 삼국시대가 지나면 없어집니다.”

감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임진강. 삼국시대땐 기마부대가 한국전쟁 땐 인해전술로 무장한 중국군이 건너올만큼 수심이 얕은 지점이다.

 

손 박사는 “도드라지게 구별되는 글자만 3개 찾은 것”이라면서 “묻어두었던 감악사비 탁본을 꼼꼼히 들춰보아 글자를 더 읽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판독 가능한 글자 중에는 ‘중(中)’자와 ‘김(金)’자도 있다고 전했다. 손 박사는 “겨우 몇 자를 읽은 것으로 전체적인 석비 내용과 의미를 설명하기는 역부족”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판독한 ‘벌(伐)’자는 의미심장한 글자다. 다른 나라의 땅을 정벌했다는 의미이거나, ‘이벌찬’ 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낱말일 수도 있다. 손 박사는 “관등명이라면 앞쪽이나 뒤쪽에 보이는게 신라 고비의 상례”라며 “비석의 한가운데서 보인 감악산비의 ‘벌(伐)’자는 ‘어느 땅을 정벌했다’는 의미의 동사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신라의 임금(진흥왕 혹은 진평왕)이 영토를 임진강 유역까지 넓힌 기념으로 새 영토가 훤히 보이는 감악산에 올라 비석을 새긴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북한산과 창녕, 황초령, 마운령의 경우를 보라. 한결같이 중요한 국방시설 인근지역이다. 창녕비(561년) 인근의 화왕산성은 낙동강 남쪽 의령과 함안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고, 마운령비 인근 운시산성은 청진과 함흥을 잇는 통로를, 황초령비 인근 중령진은 강계와 함흥을 잇는 통로를 각각 통제하는 곳이다. 물론 북한산비가 있는 북한산성은 개성과 서울을 잇는 통로를 감시하는 군사요충지다.

추사 김정희가 북한산(삼각산) 비봉에서 확인한 진흥왕순수비. 크기와 규모가 감악산비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감악산비는 어떤가. 감악산 앞에는 삼국시대부터 요충지였던 칠중성이 버티고 있다. “638년(선덕여왕 7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범하니 백성들이 산골짜기(감악산)로 들어갔고, 대장군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선덕여왕조’)는 기록이 있다. 또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년·고구려 보장왕 19년) 고구려·신라간 전투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신라의 칠중성 현령 필부가 고구려군에 맞서 20일간이나 성을 지켰다, 고구려가 포기하고 퇴각하려 했지만 반역자 대사마 비삽이 은밀히 고구려와 밀통해서 ‘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공격하라’는 편지를 보냈다…고구려군이 화공(火功)으로 공격했다. 필부는 고구려군의 화살을 맞아 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릴 때까지 싸우다 죽었다.”(<삼국사기> ‘열전·필부전’)

감악산 정상에서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성의 흔적들이 남아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로부터 1400년이 지난 1951년 4월 이곳은 영국군·중국군의 치열한 국제전쟁터가 된다. 캐슬고지로 명명된 칠중성을 지키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는 중국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 공세를 3일간이나 지연시켜 중국군의 서울 재점령을 막았다. 멀게는 1400년 전부터 가깝게는 60여 년 전까지 칠중성과 감악산이 전략적 요충지로 각광을 받은 이유가 있었다. 이곳을 흐르는 임진강이 유난히 얕아 사람은 물론이고 말(삼국시대)과 탱크(한국전쟁)가 도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악산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는 개성 송악산과 남으로는 삼각산까지 훤히 조망하며 통제할 수 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뒤 북한산 비봉 정상(556m)에 순수비를 세웠다면 황해도~한강을 잇는 지름길인 임진강 유역을 확보한 뒤 바로 감악산 정상에 같은 성격의 비석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짙다.

아닌게 아니라 감악산 비석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너무도 흡사하다.

강원 철원 자연 바위로 조성된 고석정. 고석정 윗부분에 동굴이 있다. 고려 때의 국통 무외 스님은 이 동굴에 신라 진솔왕의 비가 있었다고 전했다.

 

감악산비는 높이 170㎝, 너비 74㎝, 두께 15㎝이다. 북한산비는 남아 있는 비신의 높이 154㎝, 너비 69㎝, 두께 15㎝이다. 석재도 둘다 화강암이다. 나중에 얹어놓았다는 덮개돌(감악산비)을 빼면 두 비의 형태와 규모는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어느 누가 명문도 없고, 또 별 의미도 없는 비석을 해발 675m 산 정상에 올려 놓았겠는가.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은 “감악산과 칠중성은 신라가 소사(小祀·작은 규모지만 국가차원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했다. 신라는 초창기 왕경(경주)인근에서 대사(大祀)를 지냈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사(中祀)-소사 등으로 국가제사를 추가했다. 북한산도 소사를 지낸 곳이다. 따라서 감악산 소사는 북한산과 함께 신라가 한강 유역~임진강 유역까지 영역을 넓히는 과정, 즉 6세기 중엽~7세기 초엽 추가한 제사일 가능성이 짙다. 이 시기는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한강과 임진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까지 영역을 넓힌 기념으로 순수비를 세운 시기와 일치한다. 학계 일각에서는 강원 철원 고석정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진솔왕(진평왕 비정)의 비석’에 착안해서 감악산 고비 역시 진평왕(재위 579~632)순수비로 여기기도 한다. 진평왕이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차지한 뒤 할아버지(진흥왕)를 벤치마킹해서 순수비를 건립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가설이다.

그렇다면 상당부분 판독이 가능했던 다른 순수비와 달리 감악산비는 왜 그렇게 ‘몰자비’로 전락했을까. 오랜 풍우난설로 자연 훼손된 이유도 클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신라시대부터 왕실 및 공경사대부는 물론 일반백성들의 기도처였던 것도 주요 원인이 됐을 것이다. 정상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이 비를 훼손했을테니까….

이 대목에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했을 때의 기록을 떠올린다. 19세기초까지 북한산비는 ‘무학대사비’나 혹은 ‘나말의 고승인 도선국사비’로 구전됐다. 그러나 1816년(순조 16년) 7월 북한산 비봉에 오른 추사가 비석의 탁본을 떠내 살펴본 결과 진흥왕의 ‘진(眞)’자와 순수(巡狩), 경(境)자를 읽어냈다. 추사는 “1200년만에 무학비라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완당전집> 1권)고 기뻐했다.

순수비가 자리잡고있는 지점들은 한결같이 요충지였다.

 

감악산비는 어떨까. 지금까지 ‘몰자비’로 인식됐고, 지금에 와서는 더더군다나 읽기 어렵게 된 비석이 됐지만 추사와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히 1999년까지의 탁본이 남아있고, 또 한 연구자가 읽을 수 없을 것처럼 여겨진 몇글자를 찾아냈으니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얼마전 3D 스캔 이미지를 활용해서 판독이 불가능했던 포항 중성리비 글자들을 읽어냈다. 감악산비도 최첨단 기술로 몇글자 더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진흥왕(진평왕) 순수비임을 알리는 진(眞)자나 순(巡), 수(狩), 경(境) 자같은 글자를 읽어낼 수 있다면 상황 끝이다. 무엇보다 산정상에서 자연의 풍우난설(風雨亂雪), 인공의 손길로 훼손되는 감악산비를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지금 감악산비는 파주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됐을 뿐이다. 삼국시대, 그것도 진흥왕(진평왕) 순수비로 추정되는 비를 국가지정문화재로 두지않고 저렇게 둘 것인가. 후손들의 무심이 안타깝기만 하다.

 

 

리복재 기자  | 기사입력 2014/12/30 [08:12

세계적 역사학자 보수기교수 '신라가 지구의 중심이었다':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비상한 관심,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 비판 쏟아져

▲ 무함마드 보수기 교수가 최초로 공개한 2천년전 고대 페르시아의 고지도에 나타난 경주. 사진=경북신문 이은희기자 &nbsp; &nbsp; &copy; 편집부

 

▲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 사진=영남일보 &nbsp; &nbsp; &copy; 편집부

 

 

[민족/역사/통일=플러스코리아타임즈-리복재 기자] 2천여 년 전 제작된 고대 페르시아의 지도에 신라의 수도 경주가 지구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12월 24일 경북 경주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린 제92회 화백포럼에서 해양실크로드의 세계적 역사권위자인 이란 테헤란대학교 역사학과 모함마드 보수기 교수(사진)는 "2천여 년 전 제작된 고대 페르시아의 지도에 경주를 자오선의 시작으로 명시하고 있다"며 "이 문서는 신라가 이미 국제적인 왕국이었으며 세상과 폭넓게 교류했다는 점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고 주장했다고 경북신문 이은희 기자가 25일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보수기 교수는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 본초자오선 이전에는 신라의 왕경이었던 경주가 동서를 가르는 중심축이었고, 경주를 자오선의 시작으로 정하고 경주를 기점으로 지구상의 동서가 나눠졌다는 것.

보수기 교수는 이날 '실크로드를 통한 신라와 페르시아의 역사적 교류'라는 주제의 강의에서 한 장의 고지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당초 지리학을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의 지도에는 칼레닷 섬(현재 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을 자오선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이후 페르시아의 자오선은 당시의 신라, 즉 현재의 경주를 자오선의 0도 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며 "이후 이슬람의 지리학 문서에는 이에 따라 신라의 강데즈(경주=금성. 현 중국대륙의 낙양=동경)를 자오선의 기준점을 설정했다"고 덧붙였다.

보수기 교수는 그동안 '강데즈'라는 지명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신라의 왕경인 경주가 과거 '금성'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강데즈'가 경주임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페르시아어로 '강'은 '금'을 뜻하고 '데즈'는 '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대 페르시아 문헌에 수시로 강데즈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이 지명을 신라와 연결 짓지 못해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며 "그러나 지금은 중요한 퍼즐 조각 하나를 완성함으로써 실크로드상의 동쪽 시작점이 신라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날 보수기 교수는 신라의 공주와 페르시아 왕자가 결혼해 페르시아를 재건한 영웅을 낳은 사실을 묘사한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를 설명하면서 이 서사시는 신라와 페르시아의 다양한 교류가 이뤄졌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또 '도로와 왕국 총람' 등 많은 페르시아 문헌에 신라를 "금이 많은 도시, 물이 맑고 젊은이가 많은 도시,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고 살기 좋은 도시여서 한 번 방문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도시로 묘사돼 있다"며 "신라는 페르시아에서 유토피아로 여겨진 최고의 왕국이었다"고 밝혔다.

▲ 모함마드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공개한 고대 페르시아 문헌. 필사본인 이 사서에 &lsquo;신라&rsquo;가 여러번 언급돼 있다. 사진는 영남일보 &nbsp; &nbsp; &copy; 편집부



한편,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는 “보수기 교수가 발표한 논문 이전엔 지금까지 아랍과 페르시아인 학자들이 편찬한 총 23권의 각종 역사서, 지리서, 백과사전, 풍물지 등에 ‘신라’가 부분적으로 언급됐다. 이 내용은 1970년대 이후 재미학자 정기원을 비롯해 김정위·정수일 교수를 중심으로 상당 부분 논의돼왔다. 특히 김정위 전 한국외대 이란어과 명예교수는 2005년 ‘중동사’를 증보편찬하면서 중세 중동인 18명이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를 어떻게 묘사했는지에 대해 썼다. 이후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한·이슬람 교류사’등에서 중동인의 신라 묘사에 대해 언급했다. 보수기 교수는 이번에 처음으로 페르시아의 고대 문헌을 인용해 이 사실들을 뒷받침했다”고 전제한 뒤,

보수기 교수는 학술대회에서 “9~16세기 많은 페르시아와 아랍 문헌들에는 신라에 대한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가 많은데 마티니 교수가 발간한 ‘쿠쉬나메’를 제외하곤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란인은 이란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수세기 동안 신라와 교류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정치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산조페르시아의 멸망(AD 632)으로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슬람세계로 전해졌다. ‘신라(Sila)’라는 명사는 이란의 상인에 의해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를 거쳐 이슬람 문화와 문학 속에 녹아들어오게 된다”는 보수기 교수의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지구조선사 지명선 대표는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이란 테헤란대 보수기교수는 경주(금성)가 원래 지구 자오선의 기준점(0도)이 되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밝혔다" 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신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세계를 석권한 지배국이었다는 큰 사건인데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보수기 교수에 대해서도 "보수기 교수는 대륙신라를 이해못하고 신라가 한반도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하여 한반도 경주(금성)를 지목했으나, 신라는 대륙에 있었고 경주가 바로 하남성 낙양이었는데 페르시아지도의 강데즈는 곧 낙양(금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한반도 경주가 아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역사의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보수기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다른 재야사학자도 “경주(慶州)는 대륙의 동경(東京)이며, 동경이 곧 낙양(洛陽)이라는 지명으로 시대에 따라 다르게 쓰인 것뿐이지, 결국은 같은 지명”이라며 “이 글을 쓴 기자도 경주(慶州)가 낙양(洛陽)인 줄 모르고 쓴 것 같지만, 아마 기자가 경주를 대륙지명인 낙양이라고 썼으면 아마 학계가 난리 났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천자문(千字文)에선 동서이경(東西二京)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대륙에서의 동경(東京)이요 다른 하나는 서경(西京)이며, 서경은 곧 장안(長安), 동경은 현 경북 경주시가 아니라 대륙 낙양이 경주(慶州)다”고 지명까지 설명했다.

▲ 모함마드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발견한 &lsquo;신라&rsquo;. 고대 페르시아 글자로 쓰여 있다. 사진=영남일보 &nbsp; &nbsp; &copy; 편집부

 


다음은 역사의 중요성을 감안해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의 기사를 여과 없이 인용 보도한다.

보수기 교수에 따르면 최초로 신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9세기 중엽 ‘술레이만 시라피(Sulayman Sirafi)’라는 이란의 항해사다. 그는 극동지역을 여행한 이란 상인이기도 했다. 시라피는 그의 책에서 “중국의 바다 한쪽에 ‘알 신라(Al Sila, al은 관사)’라는 섬이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흰색 피부를 가졌고, 그 나라에 도착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 나라에 대한 기록을 갖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흰색 매를 가지고 있다”고 썼다.

보수기 교수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처음으로 극동아시아에 건너간 무슬림은 시라피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븐 코르다드베(Ibn Kordadbeh)’라는 페르시아의 지리학자가 AD 846년에 쓴 지리서에는 “중국의 가장 끝 지점인 광쑤 근처에 많은 산과 많은 왕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금이 많다. 이슬람인 중에 그곳에 정착한 이도 있는데 살기가 좋았기 때문이다”라고 나와 있다. 이븐 코르다드베의 정보는 페르시아와 극동아시아 간 문화적 관계에 기초했다. 11세기에 쓴 쿠쉬나메는 페르시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텍스트다. 쿠쉬나메의 중요한 텍스트는 이슬람 이전에 속하는데 동양과 서양의 두 길에 바탕을 두고 있다.

페르시아인은 신라에 대해 ‘신라(Silla)’ 또는 ‘바실라(Basilla)’라고 했다. 바실라 혹은 신라 역시 한국에 대해 비슷하게 언급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다 역사적 동질성을 갖고 있다. 보수기 교수가 발표한 ‘고대 페르시아 문헌에 기록된 신라의 묘사와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논문에 나타난 신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 실크로드 &nbsp; &nbsp; &copy; 편집부


◆마수디(Masudi·출생미상~957년)가 쓴 ‘황금초원과 보석광산 총람’과 지리서인 ‘학습과 개관’ 속 신라

<중국 해안 건너 신라와 그에 예속한 섬을 제외하곤 이 나라에 대해 많이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이라크인과 일부 외국인이 신라와 그 섬에 정착했으며 그곳을 고향으로 선택했다. 신라는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했으며 농토가 비옥했다. 또한 보석과 광석물이 많은 데다 획득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신라에 정착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떠나는 이도 극히 적었다. ‘왕국과 도로총람’에 따르면 중국의 동쪽에 한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한 사람 역시 맑은 공기와 비옥한 토지, 깨끗한 물에 반하고 풍요한 생활과 주민들의 친절한 행동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일곱째 종족은 신라를 비롯한 중국과 그 주변지역이다. 그곳에는 노아의 아들 야벳과, 야벳의 후손 아무르족의 거주지다. 한 명의 왕이 그들을 통치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한편 김정위 교수는 ‘중동사’에서 아무르를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야벳의 장자 ‘고메르(Gomer)’로 봤다. 김 교수는 야벳의 일곱 아들 중 아무르의 이름이 빠질 때도 있었는데, 이때 아무르 대신 ‘주마르(Jumar)’를 사용했으며 주마르는 ‘고메르’의 아랍어 철자라고 추정했다)

◆이븐 나딤(Ibn Nadim·출생미상~995년)이 쓴 ‘세계 각 나라의 목록(Al Fehrest)’에 나타난 신라

<중국에 ‘신라’라고 부르는 땅이 있다. 신라는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다. 그곳에는 금이 아주 많다>

한편 9~11세기의 지리학자 알 비루니와, 알 마수디, 알 이드리시는 각각 지도에 신라(Silla)라는 지명을 표시했다. 특별히 ‘알 비루니(Al Biruni)’는 그의 지도 ‘알 카눈(Al Qanun)’에 신라의 위도와 경도를 표시했다. 그는 신라에 대해 “중국의 동쪽 끝에 위치하며 몇 명의 사람만이 바다를 통해 그곳으로 여행한다"고 썼다.

◆1092년 타바리(Mohammad Bin Ayub Tabari)가 쓴 ‘갈렙’이란 책에서의 신라

<중국과 가까운 또 하나의 도시는 신라다. 그곳은 강하고 견고하다. 신라의 왕은 매년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 만약 조공을 보내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아 폐허가 될 것이다. 만약 조공을 보내면 이러한 상황은 완전히 변한다>

◆마르위지(S.Z.T. Marwzi)가 쓴 ‘동물의 자연적 번성’에 나타난 신라

<중국 영토의 가장 끝에 신라라는 땅이 있다. 무슬림이나 어느 이방인이든 그곳에 가면 정착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다. 유쾌하고 살기에 좋기 때문이다. 많은 금이 거기에서 발견된다>

◆에드리시(Edrisi·1099~1167)가 쓴 ‘먼 지역을 가로지르는 트레킹 모험’ 속 신라

<신라는 중국의 북동부에 위치한다. 당시 몇 명의 사람이 신라를 여행했다>

◆투시(M.bin.A. Tusi·1161~1178)가 쓴 ‘창조의 경외감’에 나타난 신라

<신라는 중국에 있는 한 도시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결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다>

◆바크란(M.N.Bakran·1208)의 저서 ‘세계 이야기’에 나타난 신라

<마친(Machin) 혹은 중국 내지를 보실라(Bosila)라고 하는데 중국의 맨 끝부분에 있다. 이 지역은 산악지대이며, 때론 보신라로 불린다. 일부는 물속에 있다. 이 도시같이 예쁘고 풍요로운 도시는 발견할 수 없다. 소수의 사람이 이 도시에 도착하지만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라서 이 도시에 한번 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는다>

◆자카리야 카즈위니(Qazwini·1203~1282)가 쓴 ‘창조의 경이로움과 존재의 희귀성’과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에 나타난 신라

<신라는 너무나 완벽하고 좋은데, 중국의 한 지방이다. 물이 달고 땅이 비옥하며 맑은 공기가 있어 가난하고 비루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아름답다. 질병도 적다. 사람들이 만약 물을 땅에 뿌리면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한다. 유해동물과 해충, 파리와 전염병도 이 땅에선 거의 없다. 다른 지역에서 병이든 사람을 누구나 신라에 데려오면 병이 완쾌된다. 자카리야에 라지는 “누구든지 신라에 오는 사람은 이곳에 정착하는데 풍부한 금과 과일, 맑은 공기와 물 등 살기 좋은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향유고래의 배설물에서 나는 향기)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 진실을 안다>

◆세드 빈 알리 조자니(Jojani)가 쓴 ‘도로와 왕국 총람’에 등장한 신라

<신라는 중국의 맨 끝부분에 위치한다. 어떤 사람은 신라를 바신라라고 부르는데 바신라 역시 해변을 갖고 있다. 바신라는 부유하고 아름답다.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젊은이다.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매우 적은데 한번 그곳에 가면 살기가 좋아 떠나지 않는다>

이상으로 볼 때 페르시아인의 눈에 비친 신라는 무릉도원이자 이상향이다. 하기야 사막과 황무지로 된 그곳에서 바라본 동방의 신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일 수도 있다. 그들의 문헌에서 보듯 한번 신라를 찾은 사람은 그곳에 정착해 돌아오지 않는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관한 이 기록들은 한자문화권 밖에서 나온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수기 교수의 논문에 대한 반론도 있다.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는 ‘Silla’ ‘Sila’ ‘Shila’가 ‘섬’ 혹은 ‘군도’라고 언급된 것을 볼 때 한반도의 신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대양의 극동에 신라라는 섬이 있다’ ‘중국의 해안 쪽으로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중국 저편 동해에 여섯 개의 섬으로 형성된 신라라는 나라가 있다’는 설명을 예로 들었다. (글·사진=영남일보 박진관기자)

 

 

˝신라의 선도산은 중국 절강성에 있었다˝ (breaknews.com)

[잃어버린 국사] 선도산 성모는 혁거세와 고주몽을 낳았다

박병역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7/10/16 [08:15]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7의 쇼를 즉각 중단하라

지금 천년고도 경주에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7은 '천년의 빛, 천년의 창' 이라는 주제의  얼빠진 작태의 굿판이 한창이다. 즉 신라 삼보(三寶) 중 하나인 황룡사 9층 목탑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82m높이의 경주타워는 최첨단 멀티미디어의 불빛 쑈를 펼치고 있다. "천년의 불빛"이 아니고 2천년의 불빛은 그야말로 얼빠진 7천만 국민을 희롱하는 광란의 불빛이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7은 문헌상 “2천년의 빛” 이라 해야 합당한 것을 '천년의 빛, 이라 하니 어찌 7천만 국민을 기만하는 진짜 광란의 쑈가 아니고 무엇인가? 즉 경주는  신라시대(기원전 57~935년)의 천년 왕도이다,  고려시대(918~1392)는 동경(東京)이며,  조선시대(1392~1896년)는 병마절도사를 두었던 2천년의 지방 행정 중심도시 이었다.

그런데 한일문화유적답사연구소의 故박정호 선생이 소장한 신라의 고도 경주고적안내(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에 의하면 일제식민지 때의 1936년 당시 경주읍의 총 인구는 19,748명 이었다면 지금의 경주는 일제에 의해 신라 천년의 왕도로 급조한 실증적 증서이며 살아있는 명확한 입증이다. 정녕 7천만 한국인은 두 번도 생각하지 못하는 단세포적 민족인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7천만 한국인은 정녕 얼빠진 민족인가?

경주는 문헌상 무려 2천년의 행정 도시 인구가 1936년에 19,748명이라면 개가 멍멍 짖고 소가  비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정녕 경주시민은 단세포적 인간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2007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광란의 굿판을 즉각 중단하고, 진실로 각성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은 순국선열에게 진심으로 참회하는 조곡(弔哭)의 천고(天鼓)를 울려야 마땅할 것이다.

7천만 大韓國人아...! 진실로 각성하고 깨어나라!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는 일제식민지시대의 [1895년 전국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비로소 한반도 속에 신라 천년의 왕도로 급조한 확실한 실증(입증)이 곧 1936년 일제가 발행한 신라의 고도 경주고적안내(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1910년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신라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고, 거짓 가짜로  편찬된 조선사(현행 국사)와 얽어 맞추기 위해 [1895년 전국 지방관제 개편]을 단행 했던 것이다. 넋을 잃은 7천만 대한국인은 아래의 [특보 제2편]의 본문을 읽고 진실로 각성하여 깨어나라.

 

[특보 제2편]신라의 선도산은 중국 절강성에 있었다

[1] 신라왕은 오직 하느님을 숭배했다

[부도지] 고조선 삼한이 멸망에 이르자 유랑하던 고조선 삼한의 백성들은 마침내 삼신(하느님)에게 제사를 올리는 천부도(天符都)의 명지단(明地壇:제천단)을 봉해버리고, 동쪽 海濱(해빈)으로 피하여 빈 공지 땅의 사례벌(斯禮筏)에 이르렀다. 사례벌 광야(曠野)에는 긴 깃대를 걸어 놓고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둬들여서,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먼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리게 하는 깃 빨이었다.

곧 육촌(六村) 가까이 살고 있던 여러 부족이 분담하며 함께 보위(保衛)하였다. [고조선 3한]의 각 부족을 한(韓)민족이라 하였는데 韓(한)나라는 천부도를 보위 한다는 뜻이다. 북쪽에 마한이 있고, 남쪽의 변한, 동쪽의 진한은 각각 자치를 행하였다. 삼한(三韓)을 통칭하여 한국(韓國)이라 칭했는데 선세(先世) 고조선의 천부도를 굳게 지키었다.

신라는 삼신(三神:여호와 하느님)을 숭배하고, 제사를 주제(主祭)하는 제사장의 나라로서 천부도(天符道)를 지키며 나라를 보위하는 일에 전념하여, 국력은 방비할 여력이 거의 없었다. 이 때 서방 하토(夏土)는 서로 땅을 빼앗는 쟁탈의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삼한에 까지 동요와 혼란이 파급되므로, 육촌의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였다. 서쪽의 화가 점차 우리나라에 임박하여, 보수(保守)하기가 장차 위태로워 어쩔 수 없이 통합 방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국경의 경계를 설정하고,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어(統御)하는 일을 위임하고 모든 부족 역시 수령을 두어 방비하게 하였다.

먼저 육부(六部)의 촌장(村長)들이 약(藥)을 캐는 날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는데 선도산 단묘(仙桃山壇廟)의 성모(聖母)가 알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가서 보았다. 동쪽의 우물을 보로 덮어 가리고, 껍질을 벗겨서, 남아를 얻었다. 몸에서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컸다. 곧 박(朴)으로 성을 삼고,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명지단(明地壇)의 어음이 지상을 밝게 한다. 는 뜻이기 때문에 밝다에서 박을 취하여 성씨로 삼고 몸에서 빛이 났기 때문에, 빛날 혁(赫)자로 이름 하였다. 즉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천리(天理:근본 이치, 자연의 법칙) 깨우치게 하여 중생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육촌의 사람들이 함께 양육하니, 점차 자라면서, 신기(神氣)가 수명(秀明)하고, 도리(道理)를 깨우쳐 덕성을 겸한 대인(大人)이었다. 13세에 이르자 여러 사람이 추거(推擧)하여, 거서간(居西干)이 되었다. 거(居)는 거(据)요, 간(干)은 방(防)이요, 장(長)은 곧 투쟁을 일삼는 서방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방어장(防禦長)의 뜻이다. 즉 서방의 하(夏)나라는 남의 나라를 침략을 일삼고 사도(詐道)를 행하는 자들이다.

혁거세씨는 천성(天性)이 어질고 지혜와 덕성을 겸한 神聖(신성)이시다. 또한 현비(賢妃) 알영(閼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두 사람을 가리켜 이성(二聖)이라 하였다. 여러 부족을 능숙히 통솔하며, 선세(先世)의 천부도를 행하며, 제시(祭市)를 설치하여 나라가 부흥하였다. 남쪽 태백산(太白山:산동성 태산)에 천부소도(天符蘇塗)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을 설치하고, 보단(堡壇) 동서남북에 4臺(대)를 설치하여, 계불의식(禊祓儀式)을 행하였다. 혁거세 대인(大人)으로 하여금, 금척(金尺)의 이치에 준거하여 천지시원의 근본을 증리(證理)하고, 옥관(玉管)의 음을 조절하여 율여화생법(律呂化生法)을 수증(修證)하였다. 혁거세왕은 해마다 10월 (3일)은 제천단에서 흰옷을 입고 백의제(白衣祭)를 행하였다. 이는 처음 황궁씨의 속신백모지의(束身白茅之義)를 따르는 제례의식이었다.

혁거세왕은 [선동성]의 달구(達丘:청구)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산서성의 율포(栗浦)에 해시(海市)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항상 나라를 순행(巡行)하시며, 뽕나무를 많이 심어 농상(農桑)을 권장하시어 각 가정마다 베를 짜고 백성들은 비단 옷을 입었다. 인자하신 혁거세 대인(大人)은 항상 백성들에게 도리(道理)를 가르쳐 선행(善行)을 권장하여 백성들 또한 어질고 순박하여 농작물을 들에 쌓아 두어도 도적이 없었다. 이와같이 나라를 부흥시키고 여러 사람들과 고락(苦樂)을 함께 하였다. 비록 나라는 부강했으나 외국에는 방패와 창을 쓰지 않고, 이웃 나라와 더불어 평화를 보존하여 군자(君子) 국이라 칭하였다.

백성들은 한 마음 한뜻으로 옛 풍속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시니, 신라 국경 내에 도리가 있어, 옛날 고조선과 흡사 하였다. 이 때에 弁韓(변한)과 진한(辰韓)의 제족이 합동하여 협력하니, 비록 경계를 두고 방비는 하였으나, 國(국:나라) 라고 칭하지 아니하고, 또한 왕이라고 칭하지도 아니하였다. 국경 내를 다스리는 정치제도는 선세(先世)의 법을 준수하여, 제회(祭會)에서 의결되지 아니하면, 일찍이 한가지의 일도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수계위법(領首繼位法) 역시 씨족 혈통 계열에 한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비록 평민이나 제후국 사람이라도 현명한 사람을 선택하여 영수로 삼았다.

[신라는] 제 1세 혁거세왕이 서례벌(西禮筏)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창업한 후로 제 2세 남해왕 제 3세 유리왕에 이어 삼세(三世)를 지나니, 어느덧 백여 년이 되었다. 세상의 풍조가 크게 변하여 보수파들의 입지가 어려워졌다. 이에 국왕을 세워, 대권을 행사하자는 여론이 대두하여, 그 반대자들이 이러쿵저러쿵 나라가 시끄러웠다. 선세부터 지켜온 유법의 천부(天符:河圖)의 원리는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진도(眞道)이다.

지금의 시대는 비록 어렵더라도 나라를 튼튼히 방비하며 보수하고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지 어찌 사단(詐端)에게 굴종하며 스스로 소자(小子)가 되어, 부모국도 모르는 패리(悖理)의 중국에게 모독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이와 같이 된다면, 의롭게 목숨을 바쳐, 진도(眞道)를 뚜렷하게 나타내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만 못 할 것이다.

왕을 세워 대권을 행사하자고 주장하는 진보파에게 찬성하는 사람들은, 외세가 긴박하여 파동이 격심하니, 어떻게 나라를 방비하겠는가?. 담장 안에서도 이반하여 시끄러움이 그치지 아니하는데, 어찌 천부도를 지키며 보수한단 말인가?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같이 경쟁해야지 나라가 부강하게 된 후에, 유업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지금 사해 제족이 사도(邪道)에 미쳐 날뛰어, 눈 멀은 봉사가 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자멸하면 누가 眞道(진도)를 현창하며, 후세에 누가 알아 볼 수 있겠는가? 만약 능히 방비하여, 보수한다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되면 새 천 마리 중에 백로 한 마리와 같이 고립되어, 오히려 세상에서 존립할 수도 없는 다른 道(도:종교)가 될 것이니 장차 또 그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 같은 것은 다 옳지 못하며, 오직 선택은 왕이 대권(大權)을 집행하며, 군마를 호령하여, 파죽지세로 전진하고 부도 전역을 회복하는 것뿐이다.

부도를 다시 세워, [잃어버린 자신의 본성] 근본을 명확히 밝혀지면, 여러 부족들이 비록 완강하더라도, 반드시 각성하여, 근본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마침내 중론(衆論)이 德望(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결정되어 왕국 수립을 주장하던 석(昔)씨에로 돌아 왔다.

석씨는 동보(東堡:인도) 유배인의 후예로, 옛날부터, 해빈(海濱)에서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나 남해씨(南海氏)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중의 여망에 따라, 탈해(脫解)가 왕위를 계승하고 비로소 왕이라 칭하게 되었다. 즉 보수(保守)의 질고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또한 서라국(徐羅國)이라 칭하고, 비로소 방패와 창을 사용하여 옛 삼한 국경 내를 모두 다 평정하였다.

[탈해]는 用兵術(용병술)을 과도하게 행사하여, 필경은 배척당하였다. 중론이 다시 박씨의 보수계로 돌아오니, 이에 박씨가 다시 계승하고, 왕국의 칭호를 폐지하였다. 4세를 지나, 중론이 또 석씨에게로 돌아갔으나, 단 정벌하는 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벌휴씨(伐休氏)뿐이었다. 석씨 4세 사이에 정벌을 다시 시작하니, 중론이 중화(中和)를 주장하는 김씨에게 돌아갔다. 김씨는 원래 부도에서 동쪽으로 옮겨와 진한에서 살던 사람으로, 온양덕후(溫讓德厚)한 지마씨(祗摩氏)가 손녀를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미추씨(味雛氏)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은 [미추(味鄒)를] 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워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이 때 서북쪽은 계속 전쟁을 일으켜 환란을 당하여도 하나도 조치된 바가 없으므로, 중론이 다시 석씨에게로 복귀하였다. 이에 석씨가 다시 자리를 이어, 3세 사이에 征服(정복)하는 일이 허다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탕진하는 왕은 배척을 받는 시대이었다. 중론이 다시 김씨에게로 돌아가니, 이에 김씨가 다시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직 근본을 지키는 우리민족이 침략자를 피하여 동해에 살면서, 방비하고, 보수한 지 삼백여년 사이에, 중론의 번복이 이와 같았으니, 역외(域外)의 풍운이 어떠함을 가이 짐작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천부의 진리가 사단의 세상에서도 의연히 전해온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세 중론이 반드시 이 도는 무너지지 않는 것에 근거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역대 영수들이 오히려 중론의 소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과격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게 능히 조절하여, 보수파들이 대도를 전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사람들로 하여금 천부의 실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장차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때 행한 天符(천부)를 습득하여 천부도를 다시 건설하고, 4해를 하나로 통합하여 평화시대로 이룩해야 될 것이다. 근본을 다시 찾는 眞理(진리)를 명증(明證)하자고 주장하던 당시 석씨 이론의 결과를 성취한 [사람이 현세에 출현한다면] 불행 중 다행이 될 것이다. 본문 끝.

[2] 선도산 성모는 혁거세와 고주몽을 낳았다.

[삼국유사] 임자년(bc 69) 3월 초 하루 날 6부의 각 촌장은 子弟(자제)를 거느리고 그들의 아버지 俱禮馬(구례마)를 모시고 閼川(알천) 언덕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다. 아버지 구례마 의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아직 임금이 없으니 난세를 맞아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렵다. 德(덕)있는 君主(군주)를 옹립하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설치하도록 하자.

이에 높은 남산을 바라보니 楊山(양산:강소성) 밑의 蘿井(나정) 우물곁에 이상한 빛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白馬(백마)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는 현상을 하고 있기에 그 곳에 찾아가 살펴보았더니 백마는 사람을 보고는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고 그 곳에 자주 빛(혹은 청색)의 알이 하나 있었다. 그 알을 깨고서 사내아이를 얻으니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東泉寺(동천사: 詞腦野(사뇌야) 북쪽)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상서스러운 광채가 났으며 온갖 새와 짐승들이 무리지어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치고 해와 달도 淸明(청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혹 혁거세를 弗矩內王(불구내왕)이라고 하였다. 광명은 암흑세상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西述聖母(서술성모)가 혁거세왕을 낳았기 때문에 中華人(중화인)들이 선도산성모를 찬양했다. 는 말이 있고 성모(聖母)가 동국의 선도산으로 가서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았기 때문에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찬양했다. 또한 상서스러운 鷄龍(계룡)이 나타나서 閼英(알영)을 낳은 것도 西述聖母(서술성모)님이 아니겠는가?

혁거세가 왕위에 즉위 하시고 호를 居瑟邯(거슬감 혹 居西干:거서간)이라 하였다.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칭 말하기를 한번에 일어나 閼智居西干(알지거서간)이라 하셨다. 이 같이 칭한 말씀으로 인하여 이 뒤부터 왕을 거서간이라 칭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세상 사람들은 다투어 賀禮(하례)하였다. 지금 天子(천자)가 이미 내려 오셨으니 마땅히 德(덕) 있는 왕후를 찾아서 聖君(성군)의 배필로 맞이해야 옳지 않겠는가?

이날에 沙梁里(사량리)의 閼英井(알영정 혹 娥利英井:아리영정)우물가에 鷄龍(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갈빗대에서 어린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얼굴 모습이 뛰어 나게 아름다웠다.(일설에는 龍(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 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흡사하여 月城(월성)의 북쪽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차차 그 부리가 떨어 졌다. 그로 인하여 그 하천 이름을 撥川(발천)이라 하였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昌林寺(창림사)에 궁실을 세우고 두 성스러운 아이를 양육하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출생하여 그 알이 匏(박)과 같다 하여 鄕里(향리)의 사람들은 박을 朴(박)이라 하는 고로 그로 인하여 성을 朴(박)이라 하고 여자 아이는 우물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우물의 이름으로 이름을 알영(閼英:아리영(娥利英)이라 하였다.

혁거세 聖人(성인)은 나이 13세 때의 원년 갑자(서기전 57년)에 南韓(남한:진한)의 왕위에 옹립하고 여자 아이는 왕후로 삼았다. 국호를 徐羅伐(서라벌) 또는 徐伐(서벌) 혹은 斯羅(사라) 또는 斯盧(사로)라 하였으나(지금은 세속에 京字(경자)를 서울 京(경)자라고 가르치고 있으나 옛날은 서울을 徐伐(서벌)이라 했기 때문이다.)

처음 왕이 태어난 우물은 鷄井(계정)이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鷄林國(계림국)이라 칭했다. 상서스러운 鷄龍(계룡)이 鷄井(계정)의 우물에서 나타나 閼英(알영)을 낳았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脫解王(탈해왕) 시대에 金閼智(김알지)를 얻었는데 숲 속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여 국호를 고쳐 鷄林(계림)이라 했다. 후세에 드디어 국호를 新羅(신라)로 정하였다.

혁거세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3월에 왕은 하늘로 올라 가셨는데 7일 후에 遺體(유체)가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나시니 나라의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하여 五體(5체)를 각각 장례하여 五陵(오능)이 되었다. 역시 능의 이름을 蛇陵(사능)이라 하였다. 曇嚴寺(담엄사)의 북쪽에 이 陵(능)이 있다. 태자 南海(남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본문 끝.

[환단고기의 고구려 본기 제 6] 사로(斯盧)의 시조 혁거세왕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아들이다. 옛 부여 황제 궁실의 娑蘇(사소)라는 여인이 남편 없이 아이를 잉태 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만주 흑룡강성)에서 도망하여 東沃沮(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행하여 진한의 奈乙村(내을촌)에 당도했을 때 蘇伐都利(소벌도리)가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나이 13세가 되자 다 숙성하여 聖德(성덕)을 두루 갖추었기에 진한의 6부에서 居世干(거세간:거슬한(居瑟邯)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를 낳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하백의 딸 유화, 사소)는 地仙(지선)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 오래 머물러 계시며 신라국을 진호하시어 신라국은 신령스러운 일이 매우 많이 일어났다.

[3] 진짜 선도산은 경주인가? 절강성인가?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 仙桃聖母 隨喜佛事(선도성모 수희불사)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는 佛殿(불전:대웅전)을 새로 수리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안흥사 주지 지혜에게 도움을 주시었다. 신라의 진평왕조(서기 579-632년) 때 이름이 지혜라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행실이 많이 어질었다. 安興寺(안흥사) 住持(주지)로 있으면서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새로 수리하고자 하였으나, 자금력이 모자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밤 꿈에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간드러지게 예쁜 선녀가 쪽빗 머리에 푸른빛의 비취 구슬로 장식하고 내려와서 위로하며 약속하시기를 나는 선도산의 神母(신모=사소, 유화) 이니라,

너희가 대웅전을 수리하기를 소원하니 내가 기뻐서 금 열 근을 시주하여 돕고자 하노라, 내가 앉은 좌대 밑에서 금을 취하여 主尊佛(주존불) 3像(상)을 모시고 점등하고, 53 六類聖衆(육류성중)과 모든 天神(천신)과 五岳(오악)의 神君(신군) 그림을 그려서 벽 위에 붙이고 매년 봄과 가을 두 계절 10일 날은 선남선녀 들을 광장에 모아서 일체의 모든 含靈(함령)들을 위하여 占察法會(점찰법회)를 개최하는 일을 규정으로 삼아 항상 잊지 않도록 하라.

지혜는 놀라운 생각에 승도를 거느리고 선도산 神祠(신사)로 가서 좌대 밑의 굴에서 황금 160량을 얻었다. 지혜는 지극 정성으로 공을 다하여 神母(신모)가 일러주신 말씀에 의거하여 불상을 갖추고 모셨다. 그 事跡(사적)은 아직 남아 있지만 법회의 일은 폐지되었다.(중략) 또 聖母(성모:하백의 딸 사소)는 하늘의 모든 仙女(선여)들에게 비단을 짜서 붉게 염색된 비단 직물을 가지고 와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옷을 만들어 주었다. 신라 사람들은 이 신비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비로소 神驗(신험)을 알게 되었다.(중략)

신라의 진평왕조(서기 579-632년) 때 하늘나라의 옥황상제(여와=여호와)의 명을 받은 천사가 신라의 진평대왕을 배알하고 옥으로 만든 天賜玉帶(천사옥대)를 주시었다. 천사가 말하기를 이 玉帶(옥대)는 옥황상제(삼신=여호와 하느님)님이 내려 주시는 보물이니 잘 간직하여 대대로 전하도록 하시오, 신라국의 진평왕은 친히 꿇어앉아 길이가 十圍(10위)이고, 62개의 옥으로 새겨서 장식하여 만든 요대(허리띠)를 천사로부터 받았다.(후략)        

 

 경주의 선도산은 이병도가 지정한 가짜이다



▲   경주 선도산 삼존상(三尊像)  © 박병역                                                                                                                                                                                                                                                                              
한반도 속의 가짜 선도산은 높이 380,2m이며 경주의 진산으로 서악(西岳), 서술(西術), 서연산(西鳶山), 서형산(西兄山)이라고 불린다. 산성내의 정상부에 보물 제65호로 지정된 마애석불입상이 남아 있다. 선도산 동면의 남쪽에 태종무열왕릉을 비릇하여 김인문(金仁問)과 김양(金陽)의 무덤이 있고 북쪽 서악서원의 뒤쪽 산허리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있고, 선도산의 서면 애공사지(哀公寺址)의 서쪽에 법흥왕릉이 있다. 라고 돼 있습니다. [국립경주 박물관 참조]

 

 선도산의 성모사(聖母祀)는 1963년에 만든 가짜이다



▲   선도산 정상의 가짜 성모사(聖母祀)                                                                                                                                                                                                                                                                                                                          
경주 성모사(聖母祀)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을 낳은 성모(聖母)를 기리기 위해  경주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 세운 사당이다. 1963년 사우(祠宇)를 중건한 것이다.신라 천년의 도시 경주는 궁궐의 유적물은 단 하나도 없고 온통 무덤의 도시입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임의대로 지정한 경주의 각 유적 물에 대하여 1945년 8.15광복 이후 학문적 토론의 비평이나 단 한번의 검증도 없이 경주를 신라 천년의 도시로 믿고 있는 얼빠진 민족입니다. 도대체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는 언제까지 왜곡된 국사로 국민을 호도하며 기만 할 것인가?

 신라의 선도산은 중국 절강성에 있다

 

▲중국 절강성의 선도산  © 박병역 칼럼니스트

 

선도산(仙桃山)은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부인이며,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를 낳은 유화(柳花=사소(娑蘇) 성모(聖母)님이 오랜 세월로 머물러 계신 대한민족의 성지(聖地)입니다. 경주시의 충효동 서산의 선도산은 이병도가 조작한 가짜이고, 중국 호북성(안휘성?)의 선도산이 진짜인지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중국 산서성의 신라 蔚州(울주)   © 박병역 칼럼니스트

 

신라의 혁거세왕은 [산동성] 달구(達丘:청구)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산서성(山西省) 율포(栗浦=蔚州(울주)에 해시(海市:해물 시장)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蔚州(울주)는 삼한시대의 진한 땅이다.

 

[4] 혁거세왕과 고주몽은 형제이다

(1) 혁거세왕과 고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이다

[삼국사기 본문에서] 史臣(사신) 김부식은 정화년(政和年)에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갔는데 대궐의 우신관(佑神館)에 一堂(한당)을 설치하고 여선상(女仙像)을 모셔 놓은 곳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輔)가 말하기를 이 상은 귀국의 신상(神像)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고대 중국(中國:부여 해모수)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이 바다 건너 진한(辰韓:신라)에 들어가 아들(혁거세)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늘 선도산(仙桃山)에 계셨는데 그분의 상(像)입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국은 당시 북부여(北夫餘)를 중국(中國)이라 칭했던 것입니다. 일제는 [삼국사기 본문]의 북부여 황제 해모수를 삭제했던 것입니다.

(2) 혁거세왕과 고주몽의 어머니는 유화이다

[삼국사기 고구려의 시조편]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북 부여를 떠나 동부여(가섭원)를 개국하게 된다. 즉 북부여(중국) 해모수 황제 궁실의 여인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이며, 또한 유화 부인이다. 북부여 황제 해모수의 부인은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 또한 사소(娑蘇)이며, 이를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혹은 동신성모(東神聖母)라 칭했습니다.

즉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의 두 성인(聖人)을 낳았기 때문에 동신성모(東神聖母)라 칭했던 것이다. 혁거세왕과 고주몽의 어머니는 유화(柳花)이며, 아버지는 북부여 황제 해모수로서 같은 형제가 된다.

▶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의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비문에서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과 형제이기 때문에 장수왕 9년 신유(辛酉 421)년에 신라 눌지왕(訥祗王)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구려는 신라와 형제와 같은 나라이다. 라는 [여형여제(如兄如弟)]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고주몽과 박혁거세왕은 형제간이 된다.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에게 충성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신라와 고구려의 근본역사를 짤라 없애고,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의 신라국을 문명이 제일 뒤늦은 나라로 왜곡, 폄하(貶下)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 우리나라의 국호변천사

우리나라는 1, [환인의 환국 bc 7199년)]부터 ⇒ 2, [환웅의 배달국시대] ⇒ 3, 3황5제의 진단국시대 ⇒ 4, [단군왕검의 고조선 삼한시대)] ⇒ 5, [해모수의 동북부여 후 삼한시대] ⇒ 6, [중조선의 신라,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시대] ⇒ 6, [신라 삼국통일, 발해 남북 2국시대] ⇒ 7, [대제국 고려시대] ⇒ 8, [근세조선의 대제국 조선시대] ⇒ 9, [대한제국 일제식민지시대 및 미군정시대(1945-1948)시대 ⇒ 10. [대한민국,조선 2국 남북시대]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 일제는 무려 7천여년의 고대 역사를 짤라 없앴다

즉 인류 최초의 환국 ⇒ 배달국(진단국) ⇒ 고조선 삼한은 천제(天帝)가 개국한 세계적 대국이며,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국의 4국 또한 성군(聖君)이 건국한 아세아적 대국입니다. 세계에서 천제(天帝)와 성군(聖君)이 건국한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에게 충성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인류 최초로 개국한 1, [환인의 환국 bc 7199년)]부터 ⇒ 5, [해모수의 동북부여 후 삼한시대]까지 무려 7천여년의 역사를 짤라 없애버렸습니다.

◆ 1만년의 우리역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본  http://www.breaknews.com/ 

1, [환인의 환국 bc 7199년)]부터 ⇒ 10. [대한민국,조선 2국 남북시대]까지 무려 1만년의 우리역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회원님들께서 꼭 애독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는 신라와 고구려의 근본역사를 짤라 없애고,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의 신라국을 문명이 제일 뒤늦은 나라로 왜곡, 폄하(貶下)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광대한 4국의 영토를 독자님이 확실히 납득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부터 연재하겠습니다.

다음 주는 [제 3편]

[환인은 인류 최초로 환국을 개국하였다.]가 연재됩니다.

 

 

박병역 위원 | 기사입력 2007/04/20 [09:19]

경주의 선도산은 진짜인가 가짜인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승인 2015.01.05 15:46

김유신이 흉노의 후예라고? - 미래한국 Weekly (futurekorea.co.kr)

  •  한정석 편집위원

[한정석의 역사파일]


▲ 김수로왕 영정

 

신라 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중국 한(漢)나라 시대 때 흉노족의 수장이었다가 무제에게 항복하고 그의 신하가 되었던 김일제(BC 134~BC 86년) 후예였다는 주장은 우리 고대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다.

이 주장은 처음부터 학설로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김유신 흉노후예설’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사실 추리소설 기법을 동원한 재야 사학자들로부터였다.

1998년 1월 경향신문은 베이징발 뉴스를 통해 중국 산시성에서 유목민인 흉노 김씨의 후예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새로 발견된 흉노족 후예들의 집단 거주지는 중국 중부 산시성(陝西省) 츠양현(紫陽縣)으로, 이곳에 사는 김 씨는 모두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던 김일제의 후손들로 확인됐다는 것.

<한서 김일제전>에 따르면 김일제는 한무제 당시 흉노를 격파한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부모 형제와 함께 포로로 붙잡혔는데, 무제는 당시 14세였던 그를 몹시 아꼈다.

무제는 쇠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흉노족의 습속에 따라 그에게 김 씨를 사성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후손들은 여러 차례 이동을 거듭, 지금의 후베이(湖北)·산둥(山東)·산시(陝西) 등지에 분포하게 됐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김일제 후예들의 집단 거주지 발견은 중국의 민족 융합사와 유목민족의 중국 내륙 이동사의 연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봤다.

물론 이 발표가 있기 전까지 김유신의 흉노후예설은 국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철을 다루는 야금술과 함께 신라에 들어와 제4대 임금이 된 석탈해가 흉노족 출신이거나 최소한 흉노족의 국가를 거쳐 신라로 왔을 것이라는 설은 가끔씩 주장된 바는 있었다.

중국 정부가 김일제 후손들이 중국 내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민족주의 재야 사학자들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다. 당시 환단고기 열풍과 함께 1997년 IMF금융위기는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민족의 조상들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주기 좋은 환경이었다.


재야사학자들 ‘김유신=흉노후예설’ 주장

선봉에 나선 이는 소설가 강준식 씨였다. 그는 중국 김일제 후손 집성촌 뉴스가 보도됐던 그해 1998년 8월에 <김씨의 뿌리>라는 역사소설을 펴내게 된다.

강 씨는 이 소설에서 김씨의 난생설을 담고 있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반박한다. 그리고 이들 고서보다 500년 전에 쓰인 신라 문무왕릉의 비문에 주목한다.

문무왕릉 비문은 김 씨의 선조가 투후 김일제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한서>도 흉노의 왕자인 그가 한무제로부터 김씨 성을 최초로 하사받았다고 <김일제 열전>에서 전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

소설은 김일제의 아버지가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었고, 그는 진시황의 5세손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신라 김씨의 조상은 중국 진나라 사람이었다는 것. 저자는 소설에서 신라와 가야의 통치그룹이었던 김씨는 중앙아시아와 몽골, 중국, 한반도, 일본을 지배한 종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렇게 소설로 시작된 ‘김유신=흉노후예설’은 일반 대중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게 되면서 여러 재야학자들의 신라 문무왕비에 대한 무리한 해석으로 이어졌다.

사실 문무왕비는 마모가 심해 김유신의 선조가 어떻게 김일제의 후손이 됐는가에 대한 전체적 연관성을 파악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대성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한국문자학회 부회장이 비문에 대한 상상력적 고증을 하게 되면서 ‘김유신=흉노왕족설’은 점차 굳어지게 된다.

사단은 이듬해인 1999년에 일어났다.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는 그해 4월 신라 김씨인들 스스로 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9세기 재당(在唐) 신라인의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덮개돌에 새겨진 비문을 찾아 연합뉴스에 제공했다.

 

 
▲ 9세기 대당고김씨부인묘명

 

그 묘지석에는 분명하게도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냈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라고 적고, 그에서 비롯된 “먼 조상 김일제가 흉노의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중략) 투정후라는 제후에 봉해졌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로써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여기에는 고대사에 관해 학계로부터 나름 신임을 받고 있던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의 코멘트와 해설이 더 그 신빙성을 더해줬다.

하지만 이 비문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비문의 출토지가 다름 아닌 중국 정부가 발표했던 김일제 후손들의 집성촌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곽가탄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묘지석의 주인공이 대당신라인인지, 아니면 그곳의 중국인으로 살던 김일제 후손인지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자료를 제공한 권덕영 교수는 묘지명에서 김씨 부인의 조부로 등장하는 김충의와 부친 김공량이 “모두 기존 문헌을 통해 이미 알려진 재당 신라인이라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고 덧붙였지만 그런 문헌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

결국 KBS의 <역사스페셜>이 ‘김유신=흉노왕족설’에 가담하게 되면서 오늘날 이 주장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흉노·신라, 연관성 찾기 쉽지 않아


▲ 김유신 동상

 

그렇다면 김유신은 흉노왕족의 후예가 아니라는 것인가.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며 다만, 김유신이 신라를 통일한 후, 김씨 왕조의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 중국 내 김일제 후손들의 조상인식 관행을 차용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해보는 이유는 신라 김씨의 두 주종인 경주 김씨의 김알지와 김해 김씨 김수로 모두 흉노족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이 존재했던 시기는 김일제의 생존시기로부터 멀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이 신라나 가야에 들어왔을 때 흉노족의 문화, 적어도 이름이나 종교에서 그 흔적이 있어야 한다. 이들이 김씨(金氏)의 성을 갖게 된 배경은 황금알이라는 상징성을 통해 처리되고 있는데, 그런 난생설화는 흉노족의 문화와는 관계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라 문화가 북방 흉노계의 문화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신라 금관은 오직 김씨 왕조의 릉에서만 발굴되며, 그 양식과 모티브는 분명히 흉노족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도대체 흉노의 문화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흉노족의 문화와 정체성은 여전히 국제학계에서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현재도 논쟁 중에 있다. 그들의 언어가 어떤 계통이었는지, 아울러 인종적으로 몽골리언인지 인도-이라니언, 즉 아리안인지도 여전히 수수께끼다.

   
▲ 가야금관

 

하지만 분명한 것은 흉노라는 정체성이 특정한 집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범 부족적인 정치적 연대였다는 점에서 그 인종과 문화, 언어마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었을 것이라는 게 오늘날 학자들이 가진 흉노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흉노의 후손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돌궐이 투르크라는 정치적 연맹체의 이름을 내걸었을 때 중앙아시아의 거의 모든 유목 부족들은 자신을 투르크라고 불렀다.

그런 점에서 신라를 통일하는 데 공헌한 김유신 그룹도 어떤 형태로든 당시 유일한 강대국인 당나라와 일정한 사대적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차원에서 오랑캐 흉노를 정벌한 중국 왕조의 충직한 가신으로 그 주종관계를 확립하고 있던 김일제 후손들의 역사에 자신들을 같은 김씨(金氏)로 연대를 모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김씨 성은 김일제가 최초가 아니다. 사실 김일제에게 김(金)이라는 성을 하사한 무제, 그의 어머니가 바로 김씨였다. 그녀의 이름은 진왕순(金王孫)이었는데 무제를 낳기 전에 이미 평민과 한번 결혼했던 여자였고, 무제와는 배다른 딸들이 있었다.
한정석 편집위원·전 KBS PD
출처 : 미래한국 Weekly(http://www.futurekorea.co.kr)

 

 

2007.10.17 (수) 14:30

김유신,영웅인가 모략가인가 | 세계일보 (segye.com)

 

 

2007년 10월 16일 (화) 16:01

"김유신은 7세기 동아시아의 유명인" (mediawatch.kr)

 

 

입력 : 2013-05-17 14:06:24 수정 : 2013-05-17 14:06:24

페르시아 구전서사시에 신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오랜 세월동안 고대 이란에서 구전되다가 11세기에 필사된 대서사시 ‘쿠쉬나메’가 그것. ‘쿠쉬의 책’이라는 뜻으로 중국 왕 쿠쉬가 악인에서 선인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1만 129절이라는 방대한 ‘쿠쉬나메’의 내용 중 절반가량이 신라에 관한 내용이다. 천 년 전 페르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신라를 알고 있었을까. ‘쿠쉬나메’에 등장한 신라의 모습은 어떠할까. KBS 1TV ‘KBS파노라마’는 2부작 ‘쿠쉬나메’를 통해 최근에 발굴된 이 페르시아 대서사시의 내용을 밝힌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가 결혼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훗날 이란의 영웅이 된다는 신화. 그런데 ‘쿠쉬나메’는 단순한 문학일 뿐일까? ‘쿠쉬나메’는 이란의 민족 설화에 사산조 페르시아 멸망기의 역사가 결합된 결과물이다. 경주에서 발견되는 페르시아계 유물과 서역인의 모습을 한 무인상을 통해 페르시아와 신라의 교류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쿠쉬나메’는 단순한 문학을 넘어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책이다.

아랍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하자 쫓기는 신세가 된 페르시아 왕자 아브틴은 페르시아인들이 이상향으로 여기던 신라로 망명한다. 정의롭고 현명한 신라 왕 타이후르는 아브틴 왕자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아브틴은 타이후르의 딸 파라랑을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사랑에 빠진 아브틴은 우여곡절 끝에 파라랑과 결혼에 성공한다.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결혼 장면은 ‘쿠쉬나메’에 나오는 신라 내용 중에서도 하이라이트이다. 아브틴과 파라랑은 아들 페레이둔을 낳는데, 훗날 페레이둔은 아랍을 물리치고 페르시아를 되찾는 영웅이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 이란. 페르시아 제국은 비록 멸망했지만 로마보다 앞서 대제국을 건설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졌었다. 이란에는 아직도 페르시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페르시아의 고도, 페르세폴리스. 무려 20m 높이의 기둥이 남아있는 아파다나 궁전, 23개국 사신들의 모습이 새겨진 조공도, 화려한 황금 유물들에서 찬란한 문명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옛날 페르시아인들은 왜, 어떻게 ‘신라’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KBS 파노라마 ‘쿠쉬나메’ 2부작 중 1부 ‘신라에 온 페르시아 왕자’에서는 최근 발굴된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의 내용을 방송에서 최초로 공개한다. 17일 밤 10시 방송.

 

 

"신라 괘릉 무인상, 아라비아인 아닌 금강역사상이 모델"

입력 2017. 2. 1. 03:02
 
임영애 경주대 교수 논문서 주장

 

[동아일보]

경북 경주 원성왕릉(괘릉)에 있는 무인상. 독특한 생김새 때문에 서역인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데 이어 금강역사상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견해가 추가로 제기됐다. 동아일보DB
 부리부리한 눈과 덥수룩한 턱수염, 커다란 코…. 경북 경주 원성왕릉(괘릉)을 지키고 있는 무인(武人)상은 얼핏 봐도 한민족의 얼굴이 아니다. 학계 일각에선 생김새는 물론이고 머리에 두른 띠, 허리에 매단 주머니 등을 근거로 괘릉 무인상이 서역(아라비아)인을 모델로 했다고 본다. 이는 ‘경주 계림로 보검’(보물 제635호)과 더불어 신라∼아라비아의 장거리 교역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겨졌다. 그런데 괘릉 무인상의 기원이 서역인보다 금강역사(金剛力士·불교의 수호신)상 같은 불교 조각이며, 원성왕 사후 60여 년 뒤 경문왕에 의해 조성됐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최근 발표한 ‘신라왕릉의 석인(石人)상’ 논문에서 38기의 신라왕릉 중 석인상을 갖춘 괘릉과 성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을 분석했다. 이 가운데 석인상과 석사자, 십이지상, 화표석 등을 두루 갖춘 괘릉에서 신라왕릉 중 처음으로 무인상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 신라 하대 석학이던 최치원이 쓴 ‘숭복사 비명(碑銘)’이 주목된다. 경문왕이 곡사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숭복사로 이름을 바꾼 경위를 적은 비석이다. 괘릉은 곡사가 옮겨간 뒤 빈자리에 들어섰다.

 숭복사 비명에는 ‘선대(원성왕)를 계승해 절을 중수하고 위엄으로 능역을 ‘호위’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임 교수는 호위의 구체적인 의미를 석인상 설치로 봤다. 따라서 괘릉 무인상의 조성 시기는 원성왕이 죽은 직후가 아닌 경문왕 즉위 초인 9세기 중반 이후라는 것이다. 또 원성왕 사후 소성왕, 애장왕 집권기는 사회 혼란기여서 선대 왕릉을 꾸미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정황도 있다.

 그렇다면 괘릉 무인상의 모티브는 무엇인가. 임 교수는 9세기 전반 서역인들의 신라 입국이 힘들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델로 석인상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당시 세계 제국이던 당나라가 서역인들의 활동을 대대적으로 단속했으며, 신라의 국내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괘릉 무인상의 얼굴이 경주 서악동 고분 문비(門裨)석의 금강역사상과 비슷한 게 오히려 눈길을 끈다. 무인상에서 머리에 두른 띠나 허리에 찬 둥근 주머니와 같은 복식은 서역뿐만 아니라 당대 중국 복식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신라왕릉 십이지상이 입고 있는 갑옷이 사천왕상과 흡사하고 사자상도 불교 사자상을 닮는 등 불교 조각의 광범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임 교수는 “무인상은 사찰 입구에서 수호 역할을 하는 불교의 금강역사상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박남수 동국대 교수 주장

“박창화의 별도소설 발견

‘필사본’보다 앞서 씌어

용어-일부내용 거의 흡사

두책 모두 가공인물 등장”

《신라 화랑의 남녀 관계나 근친혼 등을 담아 진위를 둘러싸고 역사학계를 뜨겁게 달궈온 ‘필사본 화랑세기’가 가짜임을 보여 주는 증거가 나왔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된다. ‘화랑세기’는 신라의 문장가 김대문이 7세기 말 여러 화랑의 생애를 쓴 전기로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 채 한학자 박창화(1889∼1962)의 필사본이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받아 왔으나 학계에서는 필사본이 가짜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

동국대 겸임교수인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11일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남당 박창화 선생 유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들어진 시기(1930, 40년대)보다 앞선 1930년에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과 흡사한 45쪽의 소설책(가칭 ‘소설 화랑세기’)과 이에 수록된 향가 1수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 연구관은 “‘필사본 화랑세기’에 쓰인 용어가 ‘소설 화랑세기’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됐고 비슷한 내용도 다수 발견됐다”며 “이에 비춰보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소설 화랑세기’ 처럼 화랑을 다룬 박창화의 역사소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오늘날로 치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팩션(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창조한 문학예술)의 수작인 셈이다. 박창화는 생전에 ‘화랑세기’를 필사했다는 점을 밝히지 않았으나 그의 유족이 1989년과 1995년 2차례에 걸쳐 ‘필사본 화랑세기’를 공개했다. 이후 진위 논란이 이어졌으며 학계 일부에서는 ‘화랑세기’를 사료로 인용하고 있을 정도다.

박 연구관이 주목하는 것은 ‘소설 화랑세기’에 쓰인 용어와 내용 일부가 ‘필사본 화랑세기’와 거의 같다는 점이다. ‘가야파(加耶派)’ ‘진골파(眞骨派)’ ‘국선(國仙)’ 등 수많은 용어와 뜻이 ‘화랑세기’와 같으며 신라 국왕을 ‘제(帝)’로 표현한 점도 같다.

박 연구관은 특히 ‘소설 화랑세기’와 ‘필사본 화랑세기’에 모두 나오는 ‘김흠돌의 난’이 ‘필사본 화랑세기’가 역사소설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강조했다. ‘소설 화랑세기’에는 배장공이 신문왕(?∼692) 때 일어난 김흠돌의 난을 진압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배장공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고 박창화가 만든 화랑 계보도에만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김흠돌의 난을 평정한 주인공이 김대문의 아버지인 오기공으로 바뀐다. 박 연구관은 “오기공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한 차례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가공의 인물로 보인다”며 “소설이 ‘필사본 전기’로 둔갑하면서 역사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저자(김대문)의 아버지를 등장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짜라고 주장해 온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것은 박창화의 여러 소설 중 하나일 뿐”이라며 “‘화랑세기’ 원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상상력의 산물일지 모르지만 이를 근거로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해 진위 논란이 다시 학계를 달굴 것으로 보인다.

박 연구관은 13일 오후 5시 동국대 문화관에서 열리는 동국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소설 화랑세기’와 ‘필사본 화랑세기’를 비교하는 ‘신발견 박창화 화랑세기 잔본과 향가 1수’를 발표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UPDATED 8 MAY, 2018 - 18:51 MARK OLIVER

The 1,500-Year-Old Love Story Between a Persian Prince and a Korean Princess that Could Rewrite History | Ancient Origins (ancient-origins.net)

 

 

20.02.15 20:25l최종 업데이트 20.02.15 20:25l

삼국통일의 정신적 지주, 진흥왕과 원광법사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기사입력 2014/03/03 [09:28]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족인가? (1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14/03/05 [14:54]

한나라를 무너뜨린 왕망은 원래 김씨인가? (2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14/03/15 [14:56

한나라에서 요동으로 피난 가는 김씨 집안 (3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14/03/23 [14:21]

신(新)나라와 관련 있는 국호 ‘신라’ (4부):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8/12/03 [10:59

[역사추적]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족?: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8/12/16 [03:19]

스키타이족 기원과 신라의 김알지 왕족: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윤복현 저널리스트 | 기사입력 2009/09/25 [00:35]

신라-가야 적석목곽분 주인은 선비모용씨: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9/11/07 [08:20]

사대주의의 뿌리 신라의 '걸사표'와 닮은꼴: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기사입력: 2008/12/11 [00:26]  최종편집: ⓒ pluskorea

신라의 숭당사대주의와 오늘 날 정치인: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년 01월 15일 (화)

“이사부, 동물습성 이용 주변국 정벌” < 학술 < 문화 < 기사본문 - 강원도민일보 (kado.net)

 

 

입력 2007. 5. 18. 18:50수정 2007. 5. 18. 18:50

차갑고 외로운 바다무덤 주인장을 기리며 (daum.net)

멀리서 본 문무대왕릉

 

<참고자료>

 

신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Silla Pottery - World History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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